퀵바

pe******** 님의 서재입니다.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SF, 현대판타지

새글

peacetiger
작품등록일 :
2022.04.16 14:18
최근연재일 :
2024.09.16 21:00
연재수 :
383 회
조회수 :
21,149
추천수 :
353
글자수 :
2,306,164

작성
22.04.16 14:34
조회
855
추천
8
글자
24쪽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1. 이복형제

DUMMY

- 1부.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1. 이복형제



인류는 수십 년의 시간 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발전해왔다.

그간 세상은 혼란스러웠다.

전쟁, 테러, 분쟁, 혁명과 같은 인간들끼리의 문제뿐 아니라 지구환경 대위기, 기후변화 사태, 천재지변, 생물학적 사태들에 이르기까지,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은 심히 시끄러웠다.

수백 년간 막후에서 암약해온 '네오 오더'를 붕괴시킨 지도자, 위버멘쉬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모두 태평성대를 꿈꾸었다.

지혜로운 지도자와 뛰어난 인재들의 활약으로 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 같았다.

초고효율의 신에너지의 개발, 전쟁의 금지, 테라포밍과 같은 기술적 혁신, 부패한 정치 및 경제의 대규모 개혁이 봇물 터지듯 이루어졌었다.


위버멘쉬(Übermensch).

이제껏 지구가 보지 못했던 이 새로운 리더가 살아 숨 쉬던 동안에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가 미처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이른 시기에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혼돈의 시대가 도래했다.

각자 더 많은 파이를 차지하기 위한 개인, 조직, 국가들끼리의 경쟁이 심화된 나머지 분쟁이 시작되었고, 과학 기술은 악한 용도로 발전되고 남용되었다.


춘추 전국시대를 바로잡기 위해 다시금 걸출한 영웅 같은 인물들이 대거 출몰하여 활약했지만, 그들은 힘을 온전히 합치지 못했다.

결국 전 세계는 허다한 어려움과 실패를 감수하며 산통을 겪어야 했다.

곳곳에 난리의 설왕설래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다시금 질서를 세워줄 뛰어난 영웅을 기대했다.


그 혼란의 때 한중간에도 난세를 바로잡을 위대한 여걸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비정해지지 못한 탓에 실패했다.

사랑과 인간적인 연민을 배우면서 더 강해질 수 있는 길을 포기했던 것이다.

영웅들은 그녀에게 실망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세상에 질서가 찾아왔다.

옛 폐허들 위에 더 웅장한 도시들이 재건되었고, 훼손된 환경은 완벽하게 복구되고 제어되었으며, 어질러진 정치•경제 시스템들은 전보다 더 완전무결한 신 체계로 혁신적 도약을 겪었다.


제로원(ZERO-ONE).

재번영의 정점에 이르러 완성된 결과물 중 으뜸.

명실상부 인류가 세운 새 문명의 최고의 심장부.

모든 길들이 수렴하며 교류가 이루어지는 곳.

이 도시는 세계의 심장이자 혁신의 절정이며, 첨단기술들이 샘솟는 연못이며, 모든 자본과 물자와 사람이 통하는 순환의 중심이며, 온 우주의 수도였다.

동시에 찬란한 문화의 도시이며, 수억의 시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다.


도시는 장엄했다.

하늘 높이 솟은 마천루들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져 있었고, 공간을 수놓는 다리들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돔 형태의 실드(Shield)가 도시 전반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서 온실처럼 덮고 있었다.

지상뿐 아니라 지하에도 아름다운 도시들이 여러 층으로 놓여 있었다.

방대한 에너지와 신소재가 도시에서 생산되었고, 훌륭한 문명의 이기들을 넘쳐났다.

동시에 그곳은 온갖 위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는 지식의 보고였다.


이곳 시민들에게 노동이란 생존 수단이 아닌 자아 충족의 수단이었다.

단순 육체노동은 모두 기계가 대신한다.

주민 모두는 풍부한 부를 갖추고 있었다.

은하계 식민지에서 자원을 획득하고 에너지를 얻는 문명 수준에 이른 시대인만큼 인간들은 경제 감각 자체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파이 전체의 크기가 커지고 효과적인 분배 시스템까지 확립되면서 이제는 생업 문제의 절박함이 사라졌다.

제로원은 그런 세계 가운데서도 부유함의 정점에 서 있었다.


한 세기 전만 해도 제한된 자원으로 고민했었던 인류는 부의 무한한 생산과 효과적인 분배가 자신들의 모든 염려를 해결해주리라 여겼다.

네오 오더 붕괴 이후에 그 꿈은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시대에 영웅들의 과한 탐욕이 공생의 균형을 망가뜨리면서 인류는 새로운 위기에 봉착했다.

그런 뼈저린 실패의 과정을 극복하고 재기한 결과, 인류는 마침내 궁핍을 영원한 풍요로 바꾸고 불확실성을 시스템의 힘으로 제어하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은 이제 곧 행복해지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물질적 풍요는 그들의 마음속 공허를 채워주지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영혼의 생기를 잃었다.

많은 여가 시간으로 건강관리를 하였으며, 위험한 환경 위협들을 제거했으며, 최첨단 의료 시스템과 의학 기술의 도움을 받은 덕에 몸은 점점 더 건강해졌지만, 마음은 텅 빈 것 같았다.

흥미로운 매스미디어와 지식의 발전도 내면의 갈증을 축여줄 수 없었다.


평범한 재능의 사람들은 사회에 기여할 기회가 없었다.

사소한 일들은 기계들이 모두 해결해주었다.

일자리가 없어도 풍요를 누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범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을 알지 못했다.

일부는 그저 풍요롭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자랑하거나 취미와 교양을 연마하는 데 열중함으로써 공허함을 달래려 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탁월한 능력을 지닌 소수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증명하기 위해서 애썼다.

세상을 더 풍요롭게 발전시키는 것이 그들이 존재하는 의미였다.

부를 축적하고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기에, 그들은 업적과 명예를 쌓으려 했다.

그들에게서 능력과 업적을 제외해버렸을 때 남는 가치는 없었다.


결국, 제로원과 세상의 시민들은 살았으나 기실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영혼이 죽어버린 자들이 배회하는 냉담한 도시.

풍요는 마치 위험한 방사성 물질과 같아서 그들의 영혼을 서서히 메마르게 했다.


이 도시의 주인이요 세상의 지도자인 한 젊은 남자도 그러하였다.

세계의 갖가지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어튼 그는 당대의 영웅이자 초인적 존재였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능력과 지혜를 활용해 손수 인류 문명의 재건과 번영을 주도하였다.

이렇듯 세계를 위해 온 삶을 바친 위인이었지만, 그 역시도 때때로 밀려오는 지독한 허망함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는 의무감에 몸을 맡겨두고 가까스로 스스로를 지탱할 때가 많았다.


창밖으로 야경이 보였다.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란했다.

키가 매우 큰 젊은 사내는 밖을 조용히 내다보았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은 철저히 자신을 대중 앞에서 감추기 위한 수단이었다.

부끄러움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맨 얼굴이 알려지는 것이 피곤해서 그럴 뿐.

한편으로는 신비주의로 포장하는 효과도 있었다.


답답함을 느낀 그는 조용히 가면을 내려놓았다.

“대표님, 비서관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붉은 머리카락과 루비처럼 선명한 적색의 눈을 가진 흰 피부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비서는 자신의 보스의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그 앞으로 나아갔다.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는 붉은 머리 남자조차도, 보스 앞에 설 때면 항상 위압감과 눈길 때문에 움츠러들곤 했다.


“업무 관련해서는 이미 오늘 이야기는 다 정리된 걸로 기억하는데?”

“개인적으로 부탁하셨던 일 때문에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키 큰 흑발의 남성이 뒤로 몸을 돌려 붉은 머리의 비서를 바라보았다.

흑발 남성의 비서, 데미안 룩스는 잠시 주인의 위세에 흠칫하였으나 이내 자세를 바로잡은 다음에 할 말을 이어나갔다.

“후보자 중 부친 분을 발견했습니다. 유전 데이터를 대조하여 높은 확률로 친자 여부 확인을 마쳤습니다. 부친 분은 아직 대표님을 모르십니다.”

데미안은 서류를 주인에게 건네었다.

자신을 뚫어보는 선명한 금빛 안광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자 그제야 데미안은 한숨을 돌리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분의 과거 기록들도 같이 정리해왔습니다.”

“전과자라⋯⋯, 현재 가족 관계는?”

“아내 한 분, 아들 한 분입니다. 둘 다 부친 분과 같은 국적 출신입니다.”

“그렇군. 수고했다.”

데미안은 그의 상관이 홀로그램 파일 문서의 데이터를 훑어보며 골똘히 생각 속에 잠긴 동안, 넌지시 상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대표의 맨 얼굴을 아는 사람은 U-Society 고위 간부들, 그리고 직속 비서들뿐이었다.

“내일 바로 찾아가도록 하지. 사흘 정도는 비워도 큰 문제 없겠지?”

“한동안 무리하셨으니, 일주일 정도는 쉬셔도 괜찮을 것입니다.”

“룩스, 그대가 언제부터 그렇게까지 내 걱정을 했었나?”

“대표님은 항상 일로 무리하시니 저라도 충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참 눈물 나게 고맙군.”

흑발 남자는 냉랭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옷맵시를 다듬었다.

현대식 양복이 우람하고 탄탄한 몸에 딱 맞게 달라붙었다.

강인함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치 거대한 검은 호랑이 같았다.

생태계 정점에 서 있는 포식자의 자태를 연상시켰다.

“가면은 안 쓰실 생각입니까?”

“내 부모를 만나러 가는 데에 모습을 감출 필요가 뭐 있나?”

어차피 대표의 본명이나 얼굴 기록은 데이터베이스 상에 존재치 않는다.

감히 담아둘 수도 없는 위대한 인물이므로.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함께 동행하겠습니다.”

“아니, 해당 섹터로 갈 때까지만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간 이후 그는 의자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뿌리.

돌아가신 어머니는 한 번도 이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늘 그 문제를 대수롭지 않은 양 치부했었다.

덕분에 아버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자라왔다.

지금까지는 일 때문에 바빠서 친부 문제는 잊고 지냈다.

며칠 전 문득 그 생각이 다시 떠올라 물색을 시작했다.

실패를 모르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두려웠다.

아버지의 입으로 듣게 될 자신의 가정사가.



*


한 무리의 청년들이 운동장에서 농구를 마치고 헤어졌다.

“윤혁아, 수고했어. 내일 보자.”

“정후 형도 수고했어요.”

땀에 젖은 상의를 갈아입고 수건으로 닦은 뒤 가방을 챙겼다.

Y대 공대는 대부분 남학생으로 되어있다 보니, 단체로 즐길 것이라곤 스포츠 정도였다.

다행히 캠퍼스 큰 운동장이 있어서, 수업을 마치면 학생들이 운동 경기를 즐길 수 있었다.

혈기가 왕성한 20대 초반 젊은이들이다 보니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청년은 체육관 라커룸에서 간단하게 샤워한 후 사복으로 갈아입고 캠퍼스 밖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의 이름은 강윤혁.

올해로 22세이며 기계공학 전공이었다.

호감이 가는 인상, 서글서글한 말투, 친근한 성격, 편견 없는 태도, 신뢰 가는 행동거지와 예의 바른 성격 때문에 그는 선후배, 동기, 교수들 사이에서 평이 제법 좋았다.

나름 괜찮은 외모 덕분에 인기도 있었고.



“날씨 많이 풀렸네.”

윤혁은 노을 진 하늘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의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과거 대기 정화 시스템이 재건되기 이전에는 환경오염이 심해서 맑은 날이란 게 거의 없다시피 했었단다.

그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이전 세대에는 지구가 불안정했었다지?’

부모님께서는 모든 일상이 소중한 선물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공기도, 물도, 땅도, 건강한 몸도, 평범한 일상도.

윤혁도 그 말을 십분 이해했다.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혜택 중 상당수는 언제든 잃어버릴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게 잃어버리면 회복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 힘이 드는지 모른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평소에 늘 모든 일에 감사해야 마땅하리라.


청강, 연구, 공부에 이어 운동까지 하고 난 뒤라 심신이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당장 집에 돌아가서 휴식을 만끽하고 싶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부모님이 식사 준비하는 것을 도와드리고 책 읽다 보면 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다지 변화랄 것이 없는 일상이었지만 윤혁은 이러한 생활에 제법 만족했다.


공중 위의 도로를 날아다니는 자동 운행 차량들, 기하학적 패턴이 돋보이는 매끈한 건물들, 지상 위에 걸어 다니는 보행자들, 수목들과 정원들이 보였다.

평소와 똑같은 도시의 풍경.

수십 년간 놀라운 진보를 경험했다.

하지만 윤혁에겐 별로 특이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현실과 투쟁하고, 행복을 찾으려 고민하다가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미래형 도시의 찬란함도 이를 덮어주진 못했다.


그때 길가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렸다.

고양이는 윤혁이 지나가는 모습을 알아보고 긴장을 풀고 걸어 나왔다.

주인 없이 살면서 남는 음식을 받아먹는 처지이지만 신기하리만큼 도도해 보였다.

윤혁은 한 달 전 만난 이 검은 고양이에게 ‘태원’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먹을 사료를 챙겨주곤 했었다.

“안녕, 잘 지냈어?”

-냐아아아

태원이 그에게 인사했다. 마치 ‘어서 먹을 것을 바치라’라고 명령하는 것 같았다.

윤혁은 가방 안에서 고양이용 사료를 꺼내 뚜껑을 열고 펼쳐 보였다.

기다렸다는 듯 길고양이는 할짝거리며 맛을 보더니 이내 경계심을 놓고 포식하였다.

“너도 참 하루하루를 보내기 힘들겠다. 길가는 험난한 곳일 텐데. 마음 같아서는 너를 우리 집에 들여놓고 싶지만, 부모님이 허락을 안 하니 어쩔 수가 없네. 나중에라도 독립하게 되면 데리러 올게.”

고양이는 식사를 마친 후 도도하게 혀를 할짝거렸다.

청년이 손을 뻗어 쓰다듬으려 하자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윤혁은 조심스럽게 고양이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


도시 외곽의 어느 식당. 주로 한식 가정식을 제공하는 이곳은 이웃들 사이에서 평가가 꽤 좋았다.

유명한 맛집인 것은 아니었지만, 연령대와 상관없이 누구나 거리낌 없이 먹을 만한 맛 좋은 식사, 숙련된 요리 솜씨, 친절하고 정 넘치는 운영자들, 깔끔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 덕에 호평을 받았다.

이곳의 요리를 도맡아서 하는 이유진 여사는 성실함의 현현 그 자체였다.

게다가 그녀는 그려낸 듯 완벽한 어머니였다.

그녀는 바쁘게 일하며 가정의 살림을 지탱하였고 동시에 지역 주민들에게는 최선의 친절로 대접해왔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후 지난 23년간, 유진은 가족들과 함께 이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고단한 시간을 꿋꿋이 잡초처럼 견뎌내고 일어섰다.


세상이 어지러웠던 지난날에는 삶이 각박하고 힘들었다.


뉴스에서는 분쟁이니, 테러니, 생물학 사태니, 우주 이변이니 하는 둥 온갖 난리의 소문들이 빗발쳤고, 힘없는 사람들은 고래 등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고통을 받아왔다.

지금이야 세계가 다시 재정립되고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어려운 시절의 상처는 그 시절을 같이 보낸 모두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나마 유진은 원래 어려운 배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지만, 엘리트 자리에서 몰락했던 남편은 더 힘들어했으리라.


그래도 그녀를 주축으로 가족들은 어려움을 이겨냈다.


감사하게도 그들은 평안한 오늘을 보게 되었다.



저녁 시간인지라 손님들이 많이 몰려왔다.

눈코 뜰 새 없이 일하던 유진은 잠시 숨을 돌리고자 의자에 앉았다.

시간이 흐르자 차츰 인적이 줄어들었다. 남은 사람들도 식사를 거의 마쳤다.

이제 아들과 남편만 귀가하면 곧 함께 식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용히 가족들을 기다렸다.


그러던 차에 ‘딩동’하는 종소리가 울리며 식당 문이 열렸다.


손님인지 아니면 가족인지 확인하기 위해 유진이 문가 쪽으로 급히 시선을 돌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키가 상당히 큰 그는 문틈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게 몸을 숙이며 들어왔다.

체격도 장대하고 어깨가 광활하게 떡 벌어진 사람이었다.

몸 전체에서 금강석 같은 단단함이 느껴졌다.

얼굴에는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워낙 범상치 않아서 말을 걸기 쉽지 않았다.


“어머, 식사하러 오셨나요?”


그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조용히 걸어가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유진은 혹 상대가 소리를 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번 질문하였다.


“식사하시러 오셨나요?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대답이 없었다.

수상한 사람은 아닌가 덜컥 걱정이 앞섰다.

괜히 기분을 거슬렀다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봐 잠자코 있었다.

그는 유진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으나 강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곳이 강성한 씨 자택이 맞습니까?”


“네? 아, 네, 일단 그분이 제 남편인데, 무슨 일이신지?”


수상한 사람이 남편을 알고 질문을 하자 당혹감이 한층 더 깊어졌다.

유창한 한국어였으나 발음은 보통 한국인들과는 매우 미묘한 차이로 달랐다.


“그분과 대화를 나눌 일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남편과의 용무를 보겠다는 사내의 말에 유진은 쭈뼛거렸다.


“아, 그, 그러면 기다리시는 동안 시장하실 텐데 뭐라도 챙겨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식당에 남은 손님들의 시선이 죄다 그 사내에게 쏠렸다.

가면을 쓰고 있는 점도 특이했지만 기이할 정도로 매혹적인 분위기와 비범함이 돋보이는 몸 때문이었다.

마치 아름다운 고양잇과 맹수가 고요히 먹잇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모두 이유 모를 두려움을 느끼고 한둘씩 자리를 피했다.


몇 분 후 종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유진이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엄마, 다녀왔습니다. 아빠는 아직 안 오셨죠?”

“어머, 어서 오렴, 윤혁아.”


이 집 외아들인 강윤혁이 돌아왔다.

윤혁은 손님이 없는지 잠시 둘러보았다.

그는 식당 건물 2층에 있는 주거 공간으로 이동하려던 차에 시선을 유독 끄는 키 큰 사내의 모습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사내도 윤혁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네가 그의 아들이군.”


중저음의 목소리로 그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그런데 혹시 저를 아시는 분인가요?”

“아들이라.”


남자는 한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하였으나 발음이나 어투가 권위적으로 느껴졌다. 

거기다가 체격과 내뿜는 기운까지 평범하지 않아 보였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윤혁은 속으로 경계 태세를 갖추고 다시 한번 질문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이 집 가족들과 이야기할 일이 있어서.”


태연스러운 마이페이스의 대답에 윤혁은 당황했다.


“그, 그렇다면 왜 가면을 쓰고 계시는지요?”


가뜩이나 수상한데 가면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눈에 띄어서는 안 되니 어쩔 수가 없었군.”


사내의 목소리에는 적대감이 섞여 있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예의 바른 사람 같아 보였다.

사내는 주변에 윤혁과 그의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였다.


“실례했군."


그는 그제야 가면을 내려놓았다.


‘우와!’


그 순간, 윤혁은 깜짝 놀랐다.

내심 사내가 흉한 화상이나 일그러진 부분이 있어서 얼굴을 가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그 반대였다.

맹세코 윤혁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직간접적으로 본 모든 얼굴들을 통틀어 그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었노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배우보다 잘생긴 아버지 때문에 남성 외모의 기준치가 제법 높아졌는데도 적응이 안 되었다.


‘왜 얼굴을 가렸는지 알겠는걸.’


기하학적인 균형과 색채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조각상처럼 이상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가면을 쓸 수밖에 없었겠다.

길을 거닐 때마다 모든 사람이 쳐다볼 테니까.

어차피 근육질 체격 때문에 주목받긴 했겠지만.


‘홀로그램 환각 기술 같은 걸로 덮어도 됐을 텐데.

아니지. 그런 기술들은 파훼나 투시가 가능하니까 뭐가 되었건 특수 가면이 필요하긴 하겠다.’


윤혁은 예술 작품에 홀린 듯 사내의 얼굴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내가 무섭지 않은 건가?”

“네? 무슨 말씀인지요?”

“보통 처음 본 사람들은 날 무서워하던데 너는 조금 반응이 다르군.”

“얼굴이요?”

“아니, 눈 말이다.”


그제야 얼굴에 정신이 팔려 주목하지 않던 눈이 보였다.

매우 선명하게 빛나는 금빛 홍채였다.

맹수들만 갖는 금빛 눈이 뚜렷했다.

지독하게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심겨주는 인외(人外)의 눈이었다.

특이한 점은 그 눈동자 안에 서려 있는 얇은 고리 형태의 안광이었다.

왼쪽 눈에는 사파이어 같은 진한 푸른색, 오른쪽 눈에는 루비 같은 붉은 색 고리가 홍채를 감싸고 있었다.


“아름답긴 한데⋯⋯, 무섭지는 않아요.”

“재미있군. 평범한 아이치곤 대담해.”


평범한 녀석이라. 하긴 저 사람 정도 외모면 누구든 그렇게 보이겠지.


“보통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비범한 녀석들뿐이거든.”


사내는 처음 본 사이에 반말을 자연스럽게 꺼냈다.


“심지어 그들도 오랫동안 제대로 마주 보지는 못하는데.”

그렇게 하대를 하는데도 묘하게 아무 위화감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권위가 느껴져서일까?

외국에서 온 사람이라서 그런 것일까?

윤혁은 저도 모르게 그 사내의 권위에 자발적으로 복종 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미안하다. 네 기분을 상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윤혁의 속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가 말했다.


“네 아버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려고 왔다. 내게는 중요한 분이라서.”


침묵이 흐르며 분위기가 묵직해졌다.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니겠죠?”

“글쎄? 네게도 상관있는 문제일지도? 기다리는 동안 앉아 있어라.”


사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윤혁더러 맞은편 의자에 앉을 것을 권유하였다.

딱히 강압적이지는 않았지만, 사내 특유의 맹수 같은 분위기 때문에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윤혁은 저항 없이 얌전히 앉았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강윤혁입니다.”

“괜찮은 이름이군.”

“감사합니다.”


조금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사내가 계속 빤히 윤혁을 주시하는 바람에 엄청난 부담감이 느껴졌다.

정적을 깨보기 위해 윤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떤 목적으로 오셨는지는⋯⋯, 미리 여쭤보면 안 되겠죠?”

“참 호기심이 많은 아이로군. 딱히 숨길 생각은 없지만.”


사내가 피식거렸다.


“어차피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다.”

“알겠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훤칠한 미남이 나타났다.

젊은 외모에, 유명 미남 배우를 연상시키는 멋진 분위기와 건장한 체격.

그는 윤혁의 아버지, 강성한이었다.


“아버지, 다녀오셨어요?”

“여보, 윤혁아. 아빠 왔다. 아무 일 없었⋯⋯?!!”


성한은 젊은 남자가 그들의 집에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그는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거나, 최소한 비슷한 모습을 알고 있는 듯했다.


“처음 뵙게 되는군요.”

“그럴 리가! 설마 그 눈은 라일라의⋯⋯.”


성한이 당혹감을 드러내며 얼어붙었다.


“어머니를 알고 계신 걸 보니 제가 맞게 찾아온 모양이군요.”


그 엄청나게 잘생긴 미남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강성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키가 190cm 가까이 되는 성한 조차도 작아 보일 만큼 높은 눈높이.

윤혁도 다시 한번 낯선 사내에게서 한층 더 큰 위압감을 느꼈다.


“이야기가 좀 더 쉽겠군요.”

“그 말인즉 당신은⋯⋯.”

“반갑습니다. 카이젤 라흐블뤼크입니다.”


사내의 라스트네임을 듣자마자 성한은 당장에 조금 전 자신이 우려하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가 지금껏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과거의 그림자가 성큼 그에게로 다가왔다.


“만나서 반갑군요. 아버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가족들의 반응들이 터져 나왔다.


“여보?”

“아빠?”


카이젤은 작게 한숨을 쉬며 가족들을 한꺼번에 바라보았다.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맞은 기분이군요.”


아버지는 죄지은 사람이 된 것처럼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저 역시 최근에야 아버지를 찾기 시작했죠.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는데.”


해명할 책임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사모님과 아드님과 더불어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은데 따로 이야기할 시간을 드리죠. 이곳에서 제가 기다리는 동안에 먼저 이야기하고 오셔도 좋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성한은 잔뜩 긴장한 채 카이젤이란 남자에게 대답했다.


“밖에서 기다리지 마시고 안으로 들어오시는 게 어떠신지?”

“편하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부친 아닙니까.”

“아, 알겠습니다.”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문 뒤로 물러났다.

성한은 윤혁과 유진에게 위층으로 올라가자고 손짓을 하였다.

둘은 성한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지만, 그가 자기 입으로 솔직히 말해주기 전까지는 잠자코 기다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9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15. 리온 마흐무드 (1) 22.05.31 101 1 11쪽
28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14. 휴먼 솔져 (2) 22.05.30 101 2 12쪽
27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14. 휴먼 솔져 (1) 22.05.27 103 2 11쪽
26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13. 차신해 (2) 22.05.25 110 2 11쪽
25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13. 차신해 (1) 22.05.23 110 1 11쪽
24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12. 기계들의 반란 (2) 22.05.20 105 1 11쪽
23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12. 기계들의 반란 (1) 22.05.18 114 1 16쪽
22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11. 매드사이언티스트 (2) 22.05.16 135 2 11쪽
21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11. 매드사이언티스트 (1) 22.05.13 126 2 14쪽
20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10. 데우스 엑스 마키나 (2) 22.05.11 134 2 14쪽
19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10. 데우스 엑스 마키나 (1) 22.05.09 148 3 12쪽
18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9. 노인과 청년 (2) 22.05.06 148 3 15쪽
17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9. 노인과 청년 (1) 22.05.04 145 3 17쪽
16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8. 폭발 (2) 22.05.02 146 2 13쪽
15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8. 폭발 (1) 22.04.29 160 2 13쪽
14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7. 공학 (2) 22.04.28 172 2 14쪽
13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7. 공학 (1) 22.04.27 189 3 14쪽
12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6. 이방인 가족 (2) 22.04.25 224 7 14쪽
11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6. 이방인 가족 (1) 22.04.25 217 3 11쪽
10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5. 불로불사 (2) 22.04.25 234 4 17쪽
9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5. 불로불사 (1) 22.04.25 263 4 16쪽
8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4. 형제의 재회 (2) 22.04.24 264 4 12쪽
7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4. 형제의 재회 (1) 22.04.22 302 5 17쪽
6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3. 괴물들 (2) 22.04.22 353 8 12쪽
5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3. 괴물들 (1) 22.04.21 408 7 11쪽
4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2. 과거 이야기 (2) 22.04.20 465 7 16쪽
3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2. 과거 이야기 (1) 22.04.18 584 7 16쪽
» 초인들의 세계 : Chapter 1. 이복형제 22.04.16 856 8 24쪽
1 멸망을 봉인하는 사슬 프롤로그 22.04.16 1,710 12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