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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 매니지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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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곰.
작품등록일 :
2021.07.26 10:09
최근연재일 :
2021.08.24 14:36
연재수 :
3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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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80
추천수 :
509
글자수 :
180,475

작성
21.08.23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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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030_

DUMMY

갑자기 정소율과 마주친 상태에서 오전에 벌어진 일을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는 능력은 나에게 없었다.


당황한 나는 대답은커녕 당장 머리에서 떠오르는 질문을 내뱉기 급급했다.


“너는 왜 여기······”


내 목소리는 정소율의 뒤에서 들려오는 피디의 목소리에 완전히 묻혔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는 거야? 픽스한 거야?”


피디는 그답지 않게 조금 흥분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소율이 고개를 돌려 피디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네 아까 저희 팀장님이랑도 얘기 끝나셨잖아요. 하기로 한 거에요. 이제 못 물러요!”


“내가 왜 물러 미쳤어? 좋았어. 그래 이런 일도 있어야지!”


얼씨구 허공에 펀치를 날리기까지?


내가 멍하니 감독이 하는 양을 구경하고 있는데 뒤이어 김미희 작가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바로 옆에 도지안도.


“소율씨 너무 고마워요. 진짜 혹시나 하고 던져본 건데 진짜로 들어줄 줄은 몰랐어.”


“지안이 일이잖아요. 제가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야죠. 드라마 시작되기 전에 얼굴 한번 비출 수 있으니까 저한테도 이득이고요.”


‘이게 다 무슨 소리지?’


나는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상황을 해석해 보려고 노력했다.


뭔지는 몰라도 정소율이 ‘오늘의 너’에 출연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마 까메오에 가깝지 싶은데.

이유는 도지안과의 친밀도, 그리고 자기 작품이 방영되기 전에 매체를 한 번 더 탈 수 있다는 메리트.


애초에 첫 번째 이유부터 이상하다. 나는 정소율을 이제 제법 잘 안다고 자신한다. 한창 떨림에서 같이 지내며 영상을 만들 때도, 그 후 전화나 톡으로 연락하며 안부를 물을 때도 정소율은 단 한 번도 도지안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옆에서 도지안은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정소율과의 관계가 그 정도인지 재고해보는 모양새다.


당장 어제저녁에 전화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말은 없었는데······오늘 아침에 갑자기?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그 틈을 정소율이 파고들었다.


“오빠. 물이라도 한 잔 줄까? 표정이 핼쑥해 보이네.”


채정철도 대화에 끼어든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어떻게 알아?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데.”


“몇 달쯤 전에 같이 일했어요. 저희 소속사에 걸려있는 제 소개 영상도 이 오빠가 만든 거고요.”


“그래? 이 사람아 그런 일이 있으면 빨리빨리 말을 해야지. 우리가 얼마나 정소율 찾고 있는지 뻔히 옆에서 다 알고 있었을 거면서.”


아니. 몰랐다. 촬영장에서 이유주를 케어하는 것만으로 하루가 부족할 지경인데 피디가 정소율을 찾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랬었나요···?”


“아무튼 잘됐네! 아는사람도 만나고. 근데 좀 늦었네? 무슨 일 있었나 봐?”


“맞아 오빠. 리딩 여기서 안 한다면서. 왜 이쪽으로 왔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리딩을 여기서 안 한다니? 어제 조연출보고 다 공지하라고 했는데? 원래 쓰던데 행사 있으니까 이쪽으로 오라고.”


채정철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다른 장소로 안내받았습니다. 가보니까 아무도 없고 문도 잠겨있더라구요.”


“다른 장소? 다른 장소 어디?”


“저번에 저희 모였던 세트장 옆 빌딩의 회의실이요.”


“해민아! 최해민! 너 어디 갔어?!”


채 정철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느라 바쁘던 배우들이 깜짝 놀라 무슨 일 인가하고 채 피디가 있는 쪽을 돌아본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관계자들도 갑자기 나는 커다란 소리에 깜짝 놀라 하던 일을 멈추고는 우리쪽을 바라보았다.


김이수의 옆에서 웃고 떠들던 최해민 그러니까 조연출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급하게 우리 쪽으로 뛰어왔다. 커다란 덩치가 안쓰럽게 흔들린다.


“네. 네. 부르셨어요?”


“너 내가 어제 배우들 스케줄 관리 잘하라고 했지. 한명 한명 다니면서 장소 바뀐 거 공지하고 확인받으라고. 일 처리 정확하게 했어?”


조연출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시선을 맞춰주지 않았다.


“네. 했습니다.”

“맞아? 맞게 잘했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너 어제 이유주 씨한테 세트장 옆으로 오라고 했다는데.”


조연출의 얼굴은 볼만했다. 그는 어설프게 연기를 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 말했다는 걸

인제야 알아챈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떡 하고 벌린다. 그 꼬라지가 너무 어설퍼서 동네 길고양이도 그게 진짜 감정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아챌 정도였다.


“아 네······ 죄송합니다. 착각했습니다.”


“야이새끼야 착각할 게 따로 있지 장소를 잘못 공지해? 그러다가 리딩 순서 꼬이면 니가 책임질래? 니가 순서 다 바꾸고 새로 조정할 거야?”


“죄···죄송합니다.”


그때 김이수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는지 종종걸음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피디님 리딩 시작할 시간 지나지 않았어요? 저희 시작 안 해요?”


채 피디의 표정이 묘하게 달라지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잔뜩 화가 난 거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그는 어느새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조연출과 주연배우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감독님. 저희 오늘 리딩할 거 많잖아요. 리딩 시작해요 네?”


“너구나?”


“네? 그게 무슨 말이세요?”


채 피디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을 조그맣게 열었다가 필터를 채울 필요가 있는 것처럼 허공에다 손을 몇 번 휘저었다.


“김이수씨.”


“네 피디님.”


채 피디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아까 조연출을 크게 부를 때에 비하면 이제는 가까이 있는 나도 거의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조금 있다가 나 좀 봅시다. 리딩 끝나고 쉬는 시간에.”


창백한 표정이 되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김이수를 지나쳐 채종철은 항상 리딩 때 앉는 자기 자리로 가 앉았다.


U자형 테이블이 곡선 부분 한가운데.


“자. 리딩 시작합시다. 다들 앉으세요.”


그때까지도 멈추어 선 채 멍하니 우리 쪽을 바라보던 관계자들과 배우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약간 허탈해지는 기분이었다. 아까 문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항의를 해야 재발 방지를 약속받을 수 있을지 고민했었다.


그건 바꿔 이야기하면 어떻게 김이수와 더블케이의 영향력을 넘을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실을 말한다고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이렇게 쉽게 끝나다니···..


옆을 보자 정소율이 사람들 시선을 피해서 히죽 웃으며 v를 날리고 있었다.


***


리딩은 어수선한 가운데 진행됐다.


‘오늘의 너’는 서로 상처가 있는 두 남녀가 만나 과거를 잊어버리고 ‘오늘’을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남자 주인공 진원은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었다. 진원의 와이프는 더는 진원을 보는걸 견디지 못했다. 자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죽은 아들 생각이 난다면서.

진원은 결국 이혼한다.


여자주인공 미리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해외에서 죽었다. 사인은 실족사. 사진작가인 남자친구가 높은 곳에서 촬영하다 발을 헛디디고 만 것이다.


서로 인생의 바닥까지 보게 된 두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사랑을 이뤄내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의 너’의 주된 골자였다.


오늘 대본리딩 하는 장면은 꽤 어려운 장면이었다.

특히 미리에게.


채정철이 지문을 읽어나갔다.


“진원과 다투고 집에 들어온 미리.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마시려다 말고 문을 닫고 멍하니 생각에 빠진다. 방금 귀로 들은걸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들이 죽었다니? 미리는 자신이 했던 말이 하나씩 생각나 견딜 수가 없다.”


“···”


지문이 끝났는데도 김이수는 멍하니 있었다.


“이수씨?”


옆에 있던 다른 배우가 어깨를 톡톡 치자 김이수는 깜짝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네. 네?”


다른 배우가 대본을 가리켰다.


“대사해야죠.”


“아······ 네. 죄송합니다.”


그녀는 피디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미쳤어······미쳤어······ 미리야. 너 미쳤다 진짜. 그러길래 평소에 험하게 얘기하던 습관 좀 고치자니까······ 이게 뭐야. 앞으로 진원씨 얼굴 어떻게 봐.”


아무리 봐도 겨우 정신줄만 잡은 채로 되는대로 내뱉는 모양새다.

딕션이며 감정이며 대사에 대한 이해까지. 지금 그녀가 하는 대사에는 모든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김이수는 망가져 있었다.


그녀의 컨디션에 상관없이 대본리딩은 그대로 이어졌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리딩을 이어가는 걸지도 모른다. 채정철이 김이수를 저렇게 만든 장본인이니까.


애매하게 말한 게 오히려 김이수의 상상력을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원래 학교 다닐 때도 혼나기 전이 더 불안하고 초조한 법 아니겠는가.


나는 김이수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이범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실은 김이수보다 이 인간이 어떻게 생각할지가 문제다. 우리 탓이라고 생각하려나. 가해자들이 늘 그렇듯이.


이범준은 얼핏 보면 우리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김이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한 번씩 이범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유주를 슬쩍슬쩍 곁눈질했다.


마치 이유주가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한 회차 분량의 리딩이 끝났다.

잠시 쉬는 시간.


채정철은 미리 이야기한 대로 김이수를 호출했다.


김이수는 제법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범준은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입을 꾹 닫고 김이수의 뒤를 바짝 쫒아갔고, 완전히 사색이 된 조연출은 멀리서 봐도 안절부절 하는게 보일 정도로 당황한 상태에서 이범준의 뒤로 따라붙었다.


그렇게 넷은 한 덩어리가 되어 회의실에서 사라졌다.


피디와 김이수가 사라진 미팅룸은 제법 재미있었다.


이유주가 포섭했던 다른 배우들은 구심점을 잃고 방황했다. 그들도 모두 봤을 것이다. 김이수가 회의실 한가운데서 험한 꼴을 당하는 장면을.


아무리 주연배우에 일부 제작 투자까지 한 기획사를 등에 업고 있어도 드라마에서 피디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였다.


아무리 주연과 잘 지내고 싶어도 피디와 관계가 틀어지면서까지 그럴 용기를 가진 배우는 몇 없을 것이다. 저 중에는 하나도 없는 듯 했다.


김이수를 구심점으로 한데 모여 쉬는 시간을 보내던 그룹은 두 명 세 명의 더 작은 그룹으로 쪼개졌다.


그들 중 몇몇은 이유주에게 접근하려고 했으나 그건 허사였다. 선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지한이었다.


“이제 제이 빠지면 리딩 무슨 재미로 한대.”


제이는 드라마의 중반부 갈등을 심화시키는 역할이다. 내일로 제이가 들어 있는 모든 회차의 대본리딩이 끝이 난다.


“선배님 보러 나올까요?”


“뭐하러. 본 촬영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쉬는 게 낫지.”


“그래도요.”


“뭐가 그래도요야. 알아서 잘 쉬고 본 촬영 때 보면 되지. 연기만 잘해.”


김지한은 콧노래를 부르며 정수기 쪽으로 사라졌다.


김지한은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평소 그의 성격대로라면 이상한 일이다. 조금 전 회차의 리딩은 완전히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연기에 진심인 그로서는 용납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터. 그런데도 기분이 좋다는 건 다른 요인이 있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김이수라던가······


아마 그에게도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작품에 모든 걸 거는 스타일인데 옆에서 정치질이나 하고 있으니······ 차마 뭐라고 말은 못 하고 속 꺠나 끓였을 수도 있다.


아니 확실해 보인다. 정수기를 향해 가면서 거의 뛰듯이 가는 걸 보니.


생각을 길게 할 틈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이유주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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