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프로그래머Programmer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SF

완결

안규영
작품등록일 :
2017.01.08 22:25
최근연재일 :
2017.02.03 12:00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25,999
추천수 :
607
글자수 :
207,653

작성
17.01.31 12:00
조회
535
추천
8
글자
28쪽

Ctrl Z (5) + 1장 9

DUMMY

**Ctrl Z (5)


"이거 불륜이에요."

지예는, 모텔방은. 점잖은 장밋빛 패턴의 방은, 어차피 무드등 하나로는 다 보이지 않아 설명이 필요 없지만 그녀와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훈김과 그들 사이에서 터져 나와 흐르는 긴장감은 그 방을 가득 메웠다. 현태는 지예를 벽으로 밀쳐 덥석 입술을 물었다.

"괜찮아."

입술을 떼어내고, 지예는 죽 늘어진 침이라든가, 말려 올라간 치맛자락이 아닌 현태의 눈을 쳐다봤다. 맥주 네 병, 그리 많지 않았다. 현태가 옷 속으로 손을 넣으려 했으나 지예는 그의 손길을 막았다.

"안 돼요. 정말로."

"왜?"

"불륜이에요."

"이혼할게." 현태는 끈질기게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그게 그렇게 쉽게 하실 말이 아니지 않아요?"

"질렸어. 그 년." 그 말을 들은 지예는 현태를 밀쳐냈다.

"질렸다니, 그게 뭐예요?"

"니가 좋아. 이젠 나도 내 속을 알 수가 없어."

"그딴 건."

"그딴 거라니? 불을 지른 건 너야."

"아냐."

현태는 지예의 어깰 잡고 침대로 밀어냈다.

"저, 남자친구 생길 거예요."

"거짓말이지."

그녀의 치마가 바닥에 팽개쳐졌다.

"진수라는 애에요." 지예는 그를 피해 몸을 뒤척였다.

"진수?" 현태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착한 친구예요."

"나는?"

"선생님하고는 이런 일까지 생각한 건 아니죠."

"그래서?"

"여기까지만 해요."

현태의 하의가 뱀처럼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는 잠깐 정신이 멍해졌으나 그런 말을 하고는 다시 옷을 입지 않는 지예를 보고는 그녀의 위로 엎드렸다.

"나보다 그 새끼가 더 좋다?"

지예는 그의 어깨를 감싸 쥐고 약하게 밀어냈다. 그러나 움직일 리가 없다.

"그딴 애새끼 보다야."

"그 애 욕하지 마요."

"왜? 왜 그래? 너 처음부터 나랑 잤잖아? 그건 무슨 의미였는데?"

"꼭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해요?"

"적어도 나한텐."

"걔가 얼마 전에 저한테 고백했어요."

"애새끼 같은 짓이지."

"그 고백에 마음이 흔들린 저도 애새끼에요."

"제발, 그 예쁜 얼굴로 욕 하지 마."

"싫어." 그 때, 현태가 지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어린 마음에, 발정 좀 나서 아무 예쁜 애들 찔러 보는 게 그맘때 애들이야. 차여봤자 몇 달이면 다 잊고 다른 여자 찾는다고."

"당신 아내랑 저를 고민하던 당신은요? 사람 저울질 하던 건?"

"난 그딴 놈이랑 달리 각오하고 있어. 널 책임질 각오가 있다고." 현태는 발끝에 닿는 이불을 당겨와 머리끝까지 덮었다.

"이혼 진짜 할 거야."

지예는 눈을 감아버렸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내일 당장 해요."

"응."

"그리고, 오빠도, 당, 당신, 도, 욕, 욕하지, 말아요."

"응."

"책, 책임"

"..."

"책임, 그 말, 잊지, 말, 잊, 말아, 요."

무드등은 필요 없었다.


** 4장 - 10


"재밌네."

진수는 마지막 권을 바닥에 놓았다. 그가 바라보는 천장엔 만화의 여운이 그려졌다. 푹신한 감각과, 약간 시큼하게 맡아지는 땀내가 간헐적으로 그의 코끝을 스쳤다. 허리가 찌뿌듯하니, 그는 몸을 돌렸다. 미진이 그를 보고 있었다.

"재밌어."

그는 마주친 눈을 피하고 몸을 일으켰다. 가슴에 바스러진 과자 부스러기들이 그의 몸에서 흩어졌다.

"마지막엔 조금 뻔했다고 할까."

"그래요?"

미진도 그와 마찬가지로 만화를 덮었다.

"와, 진짜 징하게 퍼질러졌다. 벌써 밤 9시에요. 대박, 얼마 만에 이렇게 있었는지 몰라요. 요즘엔 만날 일, 일, 100억 생긴 뒤엔 좀 많이 여유로웠지만 이렇게 행복한 적은 없었네요."

"다행이네. 다음 소원은?"

"진수님이랑 자기."

"그건 소원 판에 없던 거잖아."

"들켰네요."

그녀는 무릎을 꿇어 그와 마주앉았다.

"안 돼요?"

진수는 그 때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진한 갈색, 쌍꺼풀이 없고 눈썹이 옅었다.

"미안하네, 나랑 같은 무언가를 만들어줄 수는 있어도 나는 안 돼."

미진은 고갤 떨기고 피식 웃었다.

"아쉽네요."

그녀는 다시 쿠션에 누웠다. 그랬다가, 진수가 미진의 만화를 하나 집어서 누웠을 때, 그녀는 그 책을 덮어버리고 진수의 위로 올라 타 입을 맞췄다. 꽤 긴 시간 동안, 그들은 그 자세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서로의 콧바람이 쉬어지고, 둘은 지금 그 상황 이외의 것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진수는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서성였다가 바닥에 내려놓았다.

진수가 그녀를 밀쳐냈으나 그녀는 그럴수록 그와 더 붙어 다시 입을 맞췄다.

"잠깐."

그는 완전히 고갤 돌려버렸다.

"이건 안 되겠어."

진수는 그녀를 밀어 비키게 하고 입을 닦았다. 미진은 또, 그에게 상태 정보를 보내고 있었다. 진수도 그로 인해 무언가를 눈치 챈 것이다. 그녀가 하려는 행위는 호기심이나 가벼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진수는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피곤하니까 잘게."

미진은 그가 누운 뒤로 그의 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버려진 인형처럼, 시선조차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뒷정리를 하고서 그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자세 그대로 몇 시간을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한 쪽도 잠에 들지는 않았다. 둘은 서로의 숨소리가 고르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진수는 그녀의 정보가 꾸준히 다운로드 되고 있다는 사실에 쉬이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맥박, 혈압.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등 뒤에 있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의 감촉이 생생했다. 썩은 고기의 비곗살 같을 줄 알았던 그 텁텁해 보이는 입술에서는 지예와 비슷한 달고 포근한 촉감이 느껴졌었다.

"자요?"

먼저 정적을 깬 건 미진이었다. 그녀는 그의 몸 위로 팔을 올렸다가, 껴안지는 못하고 다시 거두었다. 그녀는 그에게 더 가까이 붙어 그의 체취를 맡았다.

"안 자요?"

미진은 작게 속삭였다. 진수에게 그녀의 몸이 조금 닿았다.

"처음엔 무서웠어요. 당신, 아니, 진수님이 저를 죽일 듯이 쳐다보고, 인간 취급도 하지 않던 것처럼 느껴졌어요. 대체 왜? 왜 그렇게 된 거예요? 뭐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원래, 그 속내가 얼마나 순수하고 착한지 알아요. 아직은 진수님을 알아가는 단계라서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어요. 그래도 처음 마주했을 때, 병원에서 간호하던 때까지, 다 좋아했어요. 어떤 비현실적인 능력이 아니라, 진수님 그 자체를요. 저는 경찰이라는 직업 때문에 여태 남자 하나 못 만나봤어요. 그래서 사랑이 뭐고, 어떤 건지 몰라요. 그래도 호감이 가고, 좋다, 안 좋다는 건 분별할 수 있어요. 저는 잔인해지기 전의 진수님에게 그랬었죠. 천천히, 천천히 돌아가요. 저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말이 없었으나 그게 어떤 대답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당신, 아니, 어차피 안 들으니까, 당신, 당신에게 어떤 과거가 있든 간에 저랑 행복하면 그만인 거예요. 지금 당신을 웃게 하고, 지금 당신 곁에 있는 것에만 집중하고 살면 되는 거예요."

진수는 지예를 그려냈다. 그녀와 보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그가 그려내면 그려낼수록 달콤했다. 그는 뒤늦게 의문을 가졌다. 나는 왜 지예를 이토록이나 되돌리려 하는가, 하는 것이다. 왜 종찬을, 성철을 없애고 현태와 찬우까지 지워가며, 그 순경들은? 자신은 그랬어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이었다. 정확히는, 지예가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었냐를 물어야 했다. 지예가 아닌 다른 인간들은 그저 데이터 덩어리라고만 생각했기에 잔인해지지 않았나. 그는 정작 그의 삶에서 기쁨을 줬던 건 그 하찮은 데이터 덩어리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했다.

"잘 자요." 미진은 그러곤 돌아 누워버렸다.

진수는 오늘 미진과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 역시 그녀처럼 간만에 긴장을 풀고 무언가를 즐겼었다. 만화를 보면서, 졸기도 하고, 단 것을 먹었다. 그는 그 때를 그리다 잠에 들었다. 잠이 들기 직전에 그의 앞에 하나의 문이 그려졌지만, 그는 열지 않았다.


그가 읽은 만화가 많아졌다. 슬램덩크미도리의나날패션왕진격의거인스쿨럼블미스터초밥왕베가본드드래곤볼마기마겐수은혼짱수험의제왕베트맨반항하지마유루유리쓰르라미울적도페이트스테이도브나이트카이지차나왕요시츠네스모모모모지상최미강의제자켄이치감옥학원라이어게임러브인러브마법쳐생네기마킹덤카리스마천국의신화디-그레이맨도라에몽더파가팅마요치키신만이아는세계

그로부터몇개월이지난걸까의미없이시간은가고있다진수는기스난CD처럼시간의중간을제멋대로넘겨버리고서는이제는이제는자기자신의인생마저도그냥모든걸허투루다허송세월로넘겨버리기에이르고그는끝없는만족과행복속에서지냈다그의허리옆엔그가읽은만화가쌓여갔다.

이제는 그가 '문'을 여는 방법도 희미하게 느낄 때였다. 그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그는 미진의 품에 안겨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도 그의 머릴 감싸 안고 마찬가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책을 너무 오래 읽으면 눈이 아파 치르는 일종의 휴식 겸 의식이다. 진수의 옆에는 <베르세르크>가 쌓여 있었다.

"점심 뭐 먹을까."

"초밥 어떠세요."

"좋지."

그는 자리에 누운 채로 식탁에 초밥을 두 세트 만들었다.

"우동 국물?"

"좋지요." 우동 국물도.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만 제가 살면서 이런 삶을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나도."

그는, 몇 개월 간 지예에 관한 상처를 어느 정도 회복한 참이었다. 이제 미진의 사소한 스킨십이나 언동에도 지예에 대한 것은 떠오르지 않는 듯 했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가끔 그런 날이 있었다. 그러나 포옹 이상의 것을 하려거든, 이전의 충격이 그를 한 입에 잡아먹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가 잠든 지예를 겁탈했을 때의 일이 뇌리에 박혀 미진의 어깨, 겨드랑이, 배꼽, 사타구니까지, 아직까지도 그에게는 지예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건 지예에 대한 죄책감이기도 하면서, 하찮은 욕구에 져버린 쓰레기 같은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기도 했다. 미진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소고기 초밥이다."

"이거 진짜 맛있지."

그러나 그런 애매한 결론을 내린 행복은 항상 오래가지 못한다.

"약간 불로 구운 게 쩐다니까."


그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그래왔다. 초밥을 한 입에 넣는 미진의 얼굴이 지예로 보이는 진수에게든, 더 이상은 그녀를 속일 수 없다고 확신했다. 지예를 잊어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닌 체 하는, 처절하면서 잔인한 거짓이었다.

그리고 행복은 그 시점, 그 공간,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완전히 파멸되었다. 무의식중에, 그는 지예를 그려내던 것을 그만 실체화해버린 것이다.

지예는 실오라기 하나 없이 식탁 위에 올라 큼지막한 눈을 껌뻑거렸다. 미진은 비명을 질렀다. 진수는 성급히 지예를 지우려 했다가 그만 패닉에 휩싸인다. 모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진수는 겨우 지예를 지워냈다. 그러나 이미 어질러진 식탁, 어질러진 정신은 원상태가 되지 못했다. 미진은 입을 떡 벌리고 앉아 있다가 이내 고갤 숙이고 젓가락을 식탁에 얹어두었다. 그리고 바닥이 걸라지듯 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지예를 없애며 생긴 파동에 책장이 뒤틀려 쓰러지기 시작했다.

책장들은 도미노처럼 줄줄이 쓰러지며 만화책들을 저마다의 내장에서 게워냈다. 침실 문이 박살나고, 샹들리에 모양을 한 등이 바닥으로 추락해 흩어졌다. 그것들이 모두 순차적으로 진행되었고, 마지막 책장이 넘어지며 베란다 유리문을 깨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고서는 낮은음자리표 모양의 탁한 먼지가 듬뿍 피어올랐다.

"일 났네."

진수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집을 팔짱 끼고 둘러봤다.

"미안, 실수."

미진은 진수의 멋쩍은 표정을 보고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냉수가 엎어진 분위기에, 진수는 어떠한 부가설명도 할 수 없었다. 상상을 토대로 그의 창조활동이 이뤄진다는 것을 미진도 알고 있다. 특히 아주 세밀하고 고난도의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뭘요, 미안하실 것까지야."

그녀는 그에게서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 '미안'이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색다르게 다가왔다. 세상을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에게서 '미안'이라는 단어는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그에게 '도저히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난감해 사과를 해야 하는 일'이 있었을 줄이야, 그녀는 허탈했다.

그도 인간이었다고 그녀는 새삼 느꼈다. 물론 그가 순수한 소년이라 사랑에 빠졌던 것도 맞았다. 그건 그녀 내면에서도 얼추 감 잡고 있던 부분이었다.

"초밥 더 먹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허탈했던 건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잘못이 고작 옛 여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녀 입장에서는 진수가 이보다 더 담담하게 지예를 없애버리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하고 간장에 와사비를 녹였다면 더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아, 아녜요, 배부르네."

그녀는 왜, 자신이 이 소년과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이제는 청년이지만. 돈도 화수분만큼 있고, 본인 생각에 외모도 나쁘지 않다.

왜 그녀는 이런 약간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청년과 있는 건가, 그건 사이비 종단 속 현실을 깨달은 수행원과 같은 심정이었다. 지금 나는 이 남잘 좋아하는가? 그녀는 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치울게." 책장이 원위치 되고, 집이 모두 되돌려졌다. 초밥 또한 사라졌다.


그 질문은 네모 박스에 갇힌다. 두 개의 직선이 박스로부터 갈래로 뻗어나가 YES와 NO의 연장선이 된다. 그녀의 알고리즘은 그 애매한 이분법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의 새하얀 뒷덜미를 보면서, 그의 약간 좁은 어깰 보면서. 그녀는 끝내 하나의 직선을 더 긋는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아.' 라고 단정 짓는다.

"저 다섯 번째 소원이 생겼어요."

"뭐?"

진수는 그녀의 갑작스런 부탁에 당황에 옅게 어깰 들썩였다.

"사흘 동안 심박 호출기 좀 떼 주세요."

"뭐?"

"저도 이제 혼기 찬 여자에요. 진수님이 저랑 아무런 관곌 맺지 않으니까, 저도 배우자 하나는 있어야죠. 갖고 싶어요." 그녀는, '갖고 싶다'라는 말에는 배에 힘을 주고 짜내듯 말했다. 어쩌면 진절머리 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었다.

"그거랑 호출기랑은 무슨 상관이지?"

"제 연애를 보여주기 좀 그렇달까요."

"뭐?"

"어른의 데이트는 진수님 나이에 보면 너무 수위가 높아요." 그녀는 박술 치며 '뭐래니' 했다.

그는 오른쪽 눈썹을 높게 쳐올리고 침을 삼켰다.

"그래? 그렇다면."

그는 미진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는 그녀에게 설치한 프로그램을 오려냈다.

"됐어."

"고마워요."

미진은 그 길로 옷장으로 걸어갔다. 진수가 보는 앞에서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외출용으로 갈아입었다. 진수는 잘 지내던 그녀가 왜 이러는지 혼란스러워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바로 나가게?"

"네?"

미진은 테니스 스커트를 허리에 안착했다.

"네."

"지금 나가서 언제 돌아오게?" 진수는 그녀가 있는 방 문의 문틀에 서서 그녀를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글쎄요, 모르겠어요."

"갑자기 왜 이런 소원을 빈 거야?"

미진은 가르마 방향을 결정하고 207호 분홍을 뻐끔거렸다.

"너무 편하기만 해서요. 사람들하고 부대끼면서 사회 맛도 좀 봐야죠."

미진은 적당한 클러치를 골반에 갖다 대보고 현관으로 가 발목이 없는 캔버스를 신었다.

"잘 다녀와."

"네, 그럴게요."

미진은 신발 끈을 다 묶고 문을 열고 나갔다. 진수는 그녀가 나간 철대문을 쳐다봤다. 그는 불안한 건지, 안 좋은 예감 때문이었는지,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머릴 감쌌다. 돌이 떨어질 줄 알았지만 그건 그냥 예감으로 그쳤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 바닥 장판의 무늬를 따라 눈알을 굴렸다. 장장 두 시간을.


둘의 시간은 평행하게 흘렀다. 그리고 균등하게, 동일하게 흘렀다. 상대성이 전혀 없는 정적이었다. 진수는 겨우 제 정신을 차리고서 아무 옷이나 만들어 입었다. 그리고 한 톨 있는 용기를 내 대문을 열어 문고리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그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이 대문 밖의 세상에는, 다른 남자와 키득대고 있을 미진이 있을 것이지 않은가. 진수는 대문을 열지 못하고 그 자세 그대로 굳었다. 두 시간이면 아무 택시나 타고, 아니, 관광지니까- 쉽지 않을까. 아무 남자나 붙잡고 술이라도 마시는 일이지 않을까. 진수는 문에서 손을 뗐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논리로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으나 문을 열지 않아도 그의 직감으로는 고양이는 이미 '뒈져서' 구더기가 꼬였다.

진수는 새삼 그녀가 완전히 떠나버렸음을 눈치 챘다. 어느 촉발사건으로 미진이 자신에게서 정을 완전히 떼버린 거구나,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무의식중에 지예를 만들어버린 것일 거다. 진수는 인정하기 싫으면서도 그 이외의 상상이 되질 않았다. 미진은 이미, 분명 다른 곳으로 마음을 돌린 것이 틀림없다. 진수는 천천히 고갤 끄덕여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는 마룻바닥에 누워버렸다.

그는 자신이 왜 이리도 미진에게 집착하게 되었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녀는 단순한 '말'이 아니었나, 지예와의 행복한 삶, 미래를 위한 발판이 아니었나? 진수는 온 몸에 힘을 빼버렸다. 고작 그런 상대에게 어째서 이런 허탈을 느껴야 하는지 몰랐다. 게다가 그가 원한다면 하나 더 만들 수도 있는 육신이다.

그에게 그런 존재는 몇 개가 더 있었다. 현태와 찬우. 그들은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다. 미진도 똑같다. 그런데 지금 그의 옆엔 아무도 없다. 그게 중요했다. 그는 그게 궁금해졌다. 왜 아무도 남지 않았나? 아니, 그것보다는 아무도 없다는 것에 왜 허탈을 느끼는가가 문제였다. 고작 도구들 따위에! 진수는 내심 해답을 떠올렸다. 외로운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울었다. 현태와 찬우에게 저지른 죄, 이때까지 없앤 인간의 수, 그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아 이런 일이 생긴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부 내 잘못이다."


그는 모든 잘못을 돌려놓기로 작정했다. 모든 것을 되돌리는 방법, 포맷이 있다. 그는 옆에 지예를 생성했다. 그녀는 조금 놀라더니 이전과 같은 태도로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연기 하지 마."

"이게 더 우선시 되는 인격입니다."

"포맷을 하고 싶어."

"무슨 오류라도 있습니까?"

"이 세상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야. 가능할까."

"세상이 유지되기 힘들 정도로 큰 오류가 있거나 과도하게 많은 데이터가 저장됐을 때 청소하는 용도로 포맷을 하게 됩니다."

"짧게 말 해."

"포맷을 하면 진수님의 기억이 모조리 사라지게 됩니다."

"괜찮아."

"간단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셔서 거기 있는 컴퓨터로 'F1'을 누르고 계시면 포맷이 진행됩니다."

"그 안에 있는 지예보고 눌러 달라 해."

"네."

그는 잠시간 정적을 만들었다. 지예도 그와 마찬가지로 가만히 있었다. 조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그 분위길 먼저 깬 것은 지예였다.

"진수님, 포맷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시작해."

"그 전에, 하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예는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본 그는 약간 섬뜩함을 느꼈다.

"진수님이 알려 달라 해서 알려드립니다만, 이 포맷은 720번 째 포맷입니다."

"뭐?" 그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판단하기로 다른 경우의 수로 갈 확률이 없다고 판명되면 알려달라고 말씀을 들었고, 알려드린 겁니다."

"경우의 수라고?"

"네. 이미 이 세상은 719번 포맷 된 세상입니다. 당신은 행동 하나, 토씨 하나 다른 것 없이 같은 행동을 반복해왔고, 나비효과라도 불러일으킬 아주 작은 차이도 없이 이 세상은 같은 시간을 반복했습니다. 처음의 당신 또한 아무 생각이 없어서 무작정 포맷을 했으나,"

"그럼 내 기억을 유지한 채로 포맷해줘."

"그렇게 말했던 당신이 이 세상이 당신의 기억을 기반으로 학습하여 창조된다는 것을 깨닫고 아까와 같은 전언을 남긴 것입니다. '내가 너무 가망이 없으면 이 순환을 끊어줘.'라고."

진수는 정말 한 톨의 희망도 없는 것인가, 한탄했다.

"혹시, 지예의 인격을 꺼낼 수 있니?"

"아주 잠깐이면 제 의지대로 할 수 있습니다."

"해줄래?"

"네."

진수는 자리에 앉았다. 양반다릴 한 그는 허릴 구부정하니 굽히고 지옐 올려다봤다.

"왜."

"나 어떻게 해야 해?"

"저번에도 말 했지만 그냥 있는 애들이랑 잘 지내."

"그게 안 돼."

"왜?"

"이미 내 사람들이 아냐."

지예는 그를 내려다보고 머릴 쓰다듬었다.

"현태나 찬우가 이제 와서 나랑 잘 지내줄까?"

"잘 사과해봐."

"미진이는? 걔는?"

"걘 널 좋아하고 있어."

"아냐, 그래도 나는 너랑 있고 싶어."

"늦었어."

"지금 이렇게 있잖아."

"현실을 회피하지 마."

"내가 사랑하는 건 너잖아."

"그딴 소리 듣고 싶지 않아."

"그딴 소리?"

진수는 벌떡 일어나 지예를 쏘아봤다.

"그딴 소리라고 했어?"

"그딴 소리."

"나는, 신이야. 다 내 좆대로 할 수 있어."

"근데 고작 인간 하나에 질질 짜고 있잖아."

"마음만 먹으면 너랑 지낼 수 있어."

"나는 앞으로 몇 번 못 나와. 덮어쓴 인격에 묻혀버릴 거야."

"아냐."

"현실을 직시하고 날 잊어. 넌 행복하기가 쉬워. 뭐든지 할 수 있잖아. 애써서 불행할 필요는 없잖아."

"아냐."

"그냥 행복하게 잘 살아."

"안 돼."

진수는 어느 순간 확 달라진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고갤 떨기었다. 그건 미진이 나가고 네 시간이 지난 때였다.

진수는 얼른 지예의 양 어깰 붙잡고 흔들었다.

"다시, 다시 지예로 돌아가 줘."

"죄송하지만 이 행동은 버그를 이용하는 것이라 너무 자주 사용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또 다른 절 만드셔서 부탁하시면 큰 문제없을 겁니다."

"알겠어."

지예는 걱정이 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수는 단숨에 새로운 지옐 만들어 내 그녀와 대화했다. 그 지예는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는 고갤 끄덕이고 진수의 그녀로 빙의했다. 진수는 또다시 만난 지예를 껴안고 흐느꼈다. 지예도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제 정신이 들 때마다 늘어나는 또 다른 자신을 보고는 지금 진수가 무슨 행동을 어떤 심정으로 하고 있는가 보이기 때문이었다. 지예는 열 명, 스물로 더 불어났다.

"벌써 밤 10시야." 그녀는 진수를 무릎베개하고 그의 머릴 쓰다듬고 있었다. 밤 10시라 함은 미진이 나간 지 8시간 반이 지난 시간이었다.

"음."

"정말로, 이게 행복하다면 별 수 없는데, 언제든 날 놓아도 원망하거나 하지 않을게."

"음." 그는 졸린 눈을 겨우 뜨고 있었다.

"잠 와?"

진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옅고 고르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지예의 배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허릴 감싸 안고 잠에 빠졌다.

"떠나간 사람은 떠난 채로 두는 게 예의야."

지예는 그의 이마를 쓸고 한 숨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표정이 굳었다. 도우미 인격의 그녀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들은 각자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자고 있었다. 깨어 있는 마지막 지예는 자세를 바꾸기가 난처해 머릴 긁적였다. 그리고 그녀도 그 상태로 잠에 들려고 했으나, 대문이 열리는 탓에 잠에서 깨버렸다.

열린 대문 밖엔 눈물로 범벅이 된 미진이 놀란 눈으로 서 있었다. 지예는 무어라 말 할 것이 없었다. 미진은 고개 숙여 인사했고, 지예가 받아 인사하자, 미진은 피가 나는 입술을 더 물어뜯으며 뒤돌아 문밖으로 나갔다.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진수가 다음 날 일어나 미진의 얘길 들은 건 아침 7시였다.

"그 때 미진이가 들어왔었다고?"

"네."

"왜 날 안 깨웠어?"

"부탁하시지 않으셨으니까."

"진짜 다 끝났어." 진수는 피식 웃었다.

"아직일 겁니다."

진수는 지예를 쳐다봤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지켜볼 심산이었다.

"제가 만약 지예 양이었다면 그렇게 말씀드렸을 것 같습니다."

"뭘 기준으로?"

"여자의 직감입니다."

진수는 지예의 눈을 쳐다봤다. 포기하긴 이르다, 그는 이제야 그런 감이 들었다. 그는 모든 지예들을 없애 버렸다. 그리고 새 옷을 만들어 입었다. 거울 앞에 서서 모습을 확인하고, 여드름을 없앴다. 그는 기억 저 너머에 있던 심박 수 호출기를 다시 프로그래밍 했다. 그리고 원래 있던 자리로 그것을 돌려놓았다.

그는 천천히 미진의 상태를 느꼈다. 그녀의 위치를 알아내려 했으나, 심박이 어느 정도도 뛰질 않아 전혀 다운로드 되지 않았다. 진수는 하는 수 없이 나가서 찾기로 작정했다. 그는 신발을 신고 문을 열었다.


"쏴."

진수는 배에 테이저 건을 맞고 쓰러졌다. 문 앞에는 중무장을 한 경찰 넷과 미진이 있었다. 미진은 진수 위에 쪼그려 앉아 그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렸다.

"상상만으로 다 죽이고 없앨 수 있어. 눈을 가리고 손발을 석고로 굳혀놔야 해. 말을 걸려면 음성 변조를 사용하고."

"네."

미진은 일어나 뒤에 있던 차로 걸어갔다. 경찰 넷은 쓰러진 진수를 업고 그녀를 뒤따랐다.

"그러게 왜 그랬어요."

미진은 진수를 쳐다봤다. 기절한 진수는 고갤 축 처진 채로 두고 있었다. 이 날 이후, 미진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잃어버린 기록 No. 42

부재중 통화 1건 - 종찬이 형님

무음 처리 되었습니다.



뒤늦게 올리는 원본-------------------

캡처.JPG

------------------


작가의말

다음 화가 마지막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프로그래머Programmer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부셔와 인젠과 인제 +3 17.01.24 512 0 -
공지 프로그래머 이전 프롤로그 +2 17.01.20 739 0 -
35 4장 - 10 + 0203 근황 +10 17.02.03 628 11 12쪽
» Ctrl Z (5) + 1장 9 +3 17.01.31 536 8 28쪽
33 Ctrl Z (5) .5 19금 17.01.31 289 6 4쪽
32 4장 - 7 + 8 17.01.30 421 10 12쪽
31 4장 - 6 +1 17.01.29 383 8 16쪽
30 4장 - 5 17.01.29 406 3 16쪽
29 4장 - 4 +1 17.01.29 406 5 16쪽
28 2장 - 2.5 19금 17.01.29 295 5 6쪽
27 4장 - 2 + 3 +1 17.01.29 416 11 12쪽
26 4장 - 1 +2 17.01.27 427 15 22쪽
25 3장 - 7 +3 17.01.27 471 14 7쪽
24 3장 - 6 / Ctrl Z (3) +5 17.01.24 546 19 12쪽
23 3장 - 4 + 5 +7 17.01.23 557 16 21쪽
22 3장 - 2 + 3 +1 17.01.21 458 19 18쪽
21 3장 - 1 + CtrlZ (1) +2 17.01.20 538 16 13쪽
20 2장 - 5 +2 17.01.20 490 14 8쪽
19 2장 - 4 +3 17.01.20 554 15 7쪽
18 2장 - 3 +3 17.01.20 550 14 10쪽
17 Winf1 (8) + 2장 - 2 +2 17.01.20 543 16 16쪽
16 2장 - 1 +3 17.01.20 574 15 24쪽
15 1장 - 10 +2 17.01.20 565 19 5쪽
14 1장 - 9 +4 17.01.15 623 16 17쪽
13 Winf1 (7) +2 17.01.15 643 22 5쪽
12 1장 - 8 +1 17.01.15 727 18 17쪽
11 Winf1 (6) +1 17.01.15 664 22 5쪽
10 1장 - 7 +3 17.01.12 753 18 14쪽
9 1장 - 6 / Winf1 ( 4) +5 17.01.12 727 25 12쪽
8 1장 - 5 +3 17.01.12 971 24 1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