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무쌍
5화
봉투였다.
유주가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천천히 그것을 받아 안을 살펴보았다.
"...!"
수표였다.
수표가 한 장 있었다.
그리고 그 수표는 0이 무려 여덟 개, 즉 1억 원짜리였다.
심장이 떨렸다.
누군가에게 이렇게나 거금을 그것도 직접 만질 수 있는 실물로 받는 건 처음이라 가슴이 떨렸다.
...아니, 좀 괜히 죄책감이 드네. 솔직히 이번 삶 유주를 다시 만나게 됐을 때는 이렇게까지 떨리지 않았는데.
는 둘째로 하고 나는 조금 흥분해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큰 돈을 저에게 주셔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죠."
유주는 말한다.
"제 남편 될 사람이 이 정도 돈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호올리.
"물론 이런 것 필요 없이, 제 모든 게 이제 영태 씨 것이긴 하지만-."
유주는 말한다.
"퇴원하셨으니 기분도 낼 겸, 받아 두세요-!"
머리가 어지러웠다.
*
세상은 요지경이다.
이 말을 좋은 의미로도 쓸 수 있다니.
비참하고 슬프게 아내를 떠나 보내고 집에서 소주만 까고 있던 내가.
재벌집 외동딸이 된 아내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
거기에 퇴원을 축하한다며 1억 원을 선물로 받았다.
원래 퇴원 기념으로 맛 있는 음식을 먹고 그러지 않나?
하여간 난 수표를 받았다.
그래도 예의상 거절을 해 보려고 했지만, 유주가 갑자기 눈에 힘을 주며 자신의 정성을 부디 거절하지 말아 달라고 해서 받았다.
나는, 솔직히 받고 싶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말했다.
"고맙긴요!"
유주는 말한다.
"영태 씨는 저를 살려 주셨잖아요. 그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
그러고서 유주는 다시 생긋 웃었다.
그리고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유주는 정말 내가 살던 단칸방을 때 빼고 광을 내는 것을 넘어.
더러운 화장실 청소까지 손수 다 하고서는, 말 그대로 요정처럼 내 집에서 사라졌다.
변기와 화장실 바닥을 청소할 때는- 좀 부끄럽기도 하고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강제로 화장실 솔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갑작스레 그녀가 소리쳤다.
“하지 마세요-!”
“···으음?”
“남자는 이런 일 하는 거 아니에요-!”
이건 또 뭔 소리냐.
“제가 사랑하는 남자는, 이런 일 하는 거 아니라고요-!”
하더니 우리 집 화장실 솔을- 무슨 소중한 금 지팡이라도 되는지 꽉 잡고서는 절대 놓아주지 않고 청소를 거침 없이 하는 것이다.
심지어 위아래 고급진 옷을 걸쳐 입고서는-.
땀까지 뻘뻘 흘리며-.
시간이 조금 지나 유주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하얀 손으로 닦더니, 청소가 끝났다며 날 보고 환히 웃었다.
난 냉장고를 열어 시원한 물을 꺼내 그런 유주에게 한 잔 따라줬다.
유주는 목이 말랐는지 단숨에 마신다.
그리고 내가 한 잔을 더 따라주자 금세 또 마신다.
그러자 시원하다는 듯 입을 벌린다
"하-."
그러고는 순간 아쉽다는 듯 말한다.
“···조금 더 있다 갈까요···?”
괜스레 부끄러운 듯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아니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혼인은 인륜지대사라 하였거늘, 어찌 아직 혼인도 치르지 않은 우리가 단 둘이 있을 수 있겠어요?”
솔직히 유주에게 선물을 받은 것도 있어서, 더 있다 가도 된다고 하고 싶기도 했지만.
역시 결혼 전에는 좀 아닌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다.
“···그, 그건-.”
유주는 붉은 입술을 비죽거리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맞는 말이에요.”
그러고서 그녀는 작별을 한 뒤 요정처럼 집 밖으로 나가 사라졌다.
후···
그녀가 가고서 나는 바로 방에 드러누웠다.
한동안 몸이 아파 병실에 계속 있었고.
의식이 있었을 때는 거의 항상 유주가 있었다.
그래서 혼자가 된 게 무척 오랜만이라, 모처럼 긴장이 탁 풀린다.
나는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휴식을 취하며-
내게 벌어진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놀랍다. 그것도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나의 아내였던 황유주가 있다.
유주는 분명히 나와 오랜 시간 함께했던 사람이 맞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새롭고 낯설기도 하다.
먼저 나를 향한 그녀의 태도.
병실에서부터 이곳 집에서까지 살펴보니, 유주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좋아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날 받아들인다.
물론 지난 삶에서도 유주는 착했다.
그러니 술이나 퍼먹고 쥐꼬리만한 돈을 벌어오는 날 끝까지 사랑했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항상 웃으며 좋아했던 건 아니다.
예컨대 내가 헛소리를 계속 하거나 되지도 않는 개그를 좀 심하게 하면 유주는 조금 토라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무슨 개똥 같은 말을 지껄여도 좋아한다.
이 점이 무척 새롭다.
생각해 보면, 이번 삶 애초 뭣도 없는 나를 그 엄청난 신분의 격차에도 유주가 사랑하는 것부터 납득이 되지 않는다.
···정말로 이 삶은 천국인 걸까?
하늘에 선한 신이 있어서, 내게 복을 내리기라도 한 걸까?
나는 그런 생각을 좀 하다가-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이 현실이 정말 하늘이 내린 복이라면- 나는 이 복을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동시에 그럼으로써, 나는 물론 유주가 행복해지는 게 이번 삶에서의 의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나는 이 현실을 누릴 것이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누릴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타악-!
그러고서 캔맥주 하나를 열고 벌컥벌컥 마셨다.
죽인다.
술 맛은 항상 죽인다.
하지만 지난 삶처럼, 고주망태가 되어서 인생을 되는대로 막 살아서는 안 될 터.
딱 이 한 캔만 먹으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 다음 얌전히 잠을 청하기로 했고-
나는 정말로, 맥주 한 캔만 먹고 잠이 들었다.
놀라운 발전이다.
*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서울 강북.
나는 지금 유주가 사는 대저택으로 향하고 있다.
이번 삶 재밌는 건 지난 삶과 세상이 같은 듯 한편으로는 꽤 다르다는 거다.
예컨대 강남보다 강북이 더 땅값이 비쌌다.
그러다 보니 한강을 접한 강북이, 이 세계의 대한민국에서는 최고 부자 동네였다.
신기했다. 처음 이 사실을 알고서는.
그런데 이번 삶- 뭐, 신기한 게 한둘인가.
“알겠죠, 영태 씨?”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나를 보고 유주가 말한다.
“아버지가 조금은 엄해 보여도, 저한테는 꼼짝도 못 하거든요.”
“···꼼짝도 못 한다고요?”
“예.”
“···”
“그러니까 긴장하지 마세요.”
어떻게 긴장을, 아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슬슬 어떤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삶, 모든 게 잘 풀릴 것만 같다는.
그런 예감으로, 노빠꾸 상남자답게 한 번 뻔뻔하게 살아 보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유주를 모시는 실장의 차량을 타고서, 강북의 한 대저택으로 향했다.
물론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차는, 유주가 가진 여러 차 중 한 대라고 한다.
“···아빠!”
대저택의 마당 안.
나는 무슨 유원지를 방불케 하는 거대하고 잘 가꾸어진 나무와 풀 그리고 꽃들을 지나, 2층짜리 석조 저택 위로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 사람은 유주의 아버지 황창모였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난 삶에서도 나의 장인어른이었지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더 자신감이 생긴 것도 있었다.
병원에서 유주가 재벌집 외동딸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나는 곧장 핸드폰으로 유주의 아버지를 검색했다.
그렇게 지난 삶 나의 장인어른이 이번 삶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 총수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물론 그 순간엔 놀랐다.
하지만 나의 어머니와 형이 지난 삶과 마찬가지였던 것처럼-
유주의 아버지 또한 그런 것이라 여기고 말았다.
물론 유주가 재벌집 외동딸이고 장인어른이 재벌집 총수라는 건, 변함 없이 흙수저인 우리 집과는 말도 안 되는 차이지만.
어쨌거나 나로서는 오랜만에 장인어른을 뵈었는데, 그 분은 나를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가 보다.
문으로 향하고 있는 나와 유주를 팔짱을 낀 채 보더니.
“흠.”
헛기침을 하고 그저 집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아빠!”
유주는 그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지른다.
“그냥 들어가면 어떡해요!”
“으흠-.”
유주의 목소리에, 놀랍게도 그녀의 아버지가 다시 문 밖으로 나왔다.
“우리를 봤으면서 말이에요!”
“···나는 못 봤다.”
“봤잖아요!”
소리를 지르는 유주.
“···”
이건 솔직히, 나도 좀 놀랍다.
유주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삶 나에게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던 것처럼, 아버지인 장인어른에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정말 놀랍게도,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것.
“일단-.”
유주의 아버지는 말한다.
“얼른 들어오렴.”
유주는 나의 팔을 더 꼭 잡고서 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실내에 차가운 기류가 흐른다.
유주의 아버지와 딸 유주가 서로를 팽팽히 노려보고 있다.
뭐, 국내 최고의 기업 총수인 분이야 충분히 이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유주의 모습은···
정말로 의외다.
아무래도 이번 삶, 나는 유주에 관해 더욱더 많이 알아 가야 할 것 같다.
결국 나만 좀 당황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으흠.”
놀랍게도 유주의 아버지가 다시 헛기침을 하더니, 딸 유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린다.
···패배다! 유주 아버지의 분명한 패배다!
한마디로 유주가 그녀의 아버지를 이긴 것이다. 그것도 오로지 시선으로만.
난 이 어이 없는 이 집안의 역학 관계를 목도하고서.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아빠.”
여전히 눈에 힘을 주고 있는 유주가 드디어 입을 연다.
“이 사람이-.”
그러고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무척이나 드라마틱한 표정 변화와 함께 말을 잇는다.
“저랑 결혼할 사람이에요.”
부드러워진 것이다.
아버지를 바라볼 때는 한없이 날카로웠던 눈빛이, 날 보면 천사가 따로 없을 정도로 부드러워졌다.
“···그, 그래.”
유주의 아버지가 말한다.
“이름이-.”
그분이 드디어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박영태라고 했던가?”
“예, 맞습니다.”
나는 곧장 답한다.
“으음-.”
하더니 유주 아버지가 말을 잇는다.
“유주의 아비로서, 나는 딱 세 가지만 살펴보았네.”
그러고서 잠시 딸 유주의 눈치를 보는 지난 삶의 내 장인어른.
“첫째, 범죄 경력이 있는가-.”
“···”
“이것은 최소한의 인성과 관계된 문제일세. 전과는 물론, 단순히 수사 기관에서 조사라도 받은 경험이 있나 철저히 알아봤지.”
“아빠, 뭘 그런 것까지 알아봐요!”
하고 유주가 외쳤지만, 내가 병원에서 정신을 잃고 누워 있을 때 내 뒷조사를 마친 그녀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크흠-.”
유주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고서 다시 말한다.
“둘째, 빚이 있는가.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지. 제1금융은 물론 제2금융 나아가 사채에 사소한 돈까지- 능력은 없는데 악성 채무가 있는지 살펴봤네.”
“아빠!”
“그리고 마지막 셋째. 건강.”
“···!”
여기서는 나도 좀 놀랐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게 내가 유주 대신 당한 교통 사고로 생긴 일 아닌가.
당장 내 건강이 아주 좋을 리는 없었다.
"숨기고 있는 질환이나 알코올 중독 같은, 유주에게 해가 될 병은 없는지 알아봤네. 그렇게 나는 딱 세 가지만 살폈지."
“···”
"결과는-."
이 시점 나는 물론 유주도 긴장하고 있었다.
“합격. 합격일세. 내 딸 유주를- 그대에게 주겠네.”
···뭐?
“···내 딸 황유주를- 박영태, 그대가 데려가도 좋네.”
유주를 이렇게 쉽게 준다고?
“···아빠!”
그동안 한껏 예민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유주의 얼굴이 한순간 밝아진다.
“물론 내가 보기에 그대가 딱 좋다는 소리는 아니네. 다만 최소한의 결격 사유는 없이- 내 딸 유주가 원하니-.”
"아이, 참-!"
유주가 다시 소리를 친다.
“필요 없는 소리는 왜 하세요?! 허락하시는 마당에, 그냥 좋은 말만 해 주시면 될 것을···!”
“···으음.”
유주의 말에 그녀의 아버지, 그러니까 이번 삶에서도 나의 장인어른이 될 분이 입을 다문다.
이건 뭐 허락이 아니지 않나? 애초 유주를 눈앞에 두고, 불허할 수 없는 분위기인데?
어쨌든 나는 좋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유주와 결혼을 할 수 있게 됐다.
그것도 재벌집 외동딸인 유주와!
“그럼-.”
나는 입을 열었다.
“장인어른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
깜짝 놀라는 유주 아버지.
내가 빨라도 너무 빠르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 거칠 게 없다.
내 옆에 무적의 황유주가 지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노려보고 있기 때문.
“···크흠.”
역시 유주 아버지는 딸의 눈치를 슥 살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천천히 입을 연다.
“···알겠네.”
“와아-!”
유주가 소리친다.
“마음대로··· 부르게나.”
“좋습니다, 장인어른.”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딸을 제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삶, 나는 무적무쌍이다.
- 작가의말
시작 부분을 내용 추가 및 수정하였습니다.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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