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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미르 님의 서재입니다.

만천과해2021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완결

네오미르
작품등록일 :
2021.09.27 23:52
최근연재일 :
2022.01.24 06:00
연재수 :
1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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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064
추천수 :
922
글자수 :
72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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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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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세발오악 11

DUMMY

만천과해(瞞天過海)

세발오악(勢拔五岳) 11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이어진 공격들에 천환은 아직도 정신이 없었다. 위아래, 좌우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멍한 상태가 이어진다. 손에 들고 있던 검도 어느새 떨어져 있었다.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순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백근남의 발이 천환의 턱을 향해 들어왔다. 천환은 두 손을 들어 턱을 막았지만 몸이 또다시 붕 떠오른다.


백근남은 이번에도 역시 같이 뛰어들며 장을 날렸다. 천환의 몸은 땅에 떨어지며 몇번 튀어오른다. 천환은 울컥 피를 토했다.


백근남이 펼치는게 대단한 초식은 아니었다. 심지어 시중잡배의 싸움같기도 했다. 하지만... 천환은 도저히 백근남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백근남은 왼손으로 천환을 집어들었다. 이어 우측권이 천환의 배를 가격했다.


"야... 벌써 뻗은 건 아니지? 큰 소리만 치더니."


"그 손은 놓고 나랑 대결하자."


아영의 목소리에는 더이상 분노도 두려움도 담겨있지 않았다. 감정이라는 것을 뛰어넘은 듯 초연(超然)해 보이기까지 한다.


백근남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본다. 아영을 보며 실망한 눈치다.


"뭐야? 사내놈들은 다 뻗고 여자와 애들만 남은거야?"


근심 가득한 초연(愀然), 의기를 상실한 초연(悄然), 심지어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초연(超然). 아영이 어떤 모습을 보이든 자신의 상대는 될 수 없다는 깔보는 마음이 가득 느껴진다.


"여자든 아니든... 내가 네 부하들을 죽였으니 내게 덤벼라."


그러나, 그는 부하들의 죽음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아주 귀찮다는 듯한 태도다.


"약해 빠진 여자들과 무슨 재미로 싸움을 해?"


"백근남, 그건 나보러 들으라고 하는 말이냐?"


나무 위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흑리가 기분 나쁜 듯 날카롭게 묻는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러나 어느새 백근남의 말투는 공경하거나 두려워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분군목과 천환을 순식간에 차례로 제압하고 나서 기고만장해진 듯 하다.


아영이 옆에서 보기에는 심지어 흑리에게도 약간 비아냥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었지만, 형식적일뿐. 표정 역시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쩔쩔 매는게 더 좋다는 건 아니지만, 쩔쩔 매던 분군목이나 정다련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영이 백근남이 흑리를 대하는 태도를 신경 쓸 상황은 아니었다. 백근남은 흑리에게 말을 하는 것 같더니 바로 아영을 향해서 치고 들어왔다. 아영은 피하지 않고 일검을 찔러들어갔다. 백근남은 몸을 띄웠다. 똑같은 수법. 아영은 일검을 거두며 몸을 굴려 백근남의 손을 피한다. 일단 손이 닿을 거리에 들어서면 속수무책이라는 것을 보아서 알고 있었다.


백근남은 발이 땅에 닿음과 동시에 몸을 튕겨 아영에게 달려들었다. 뛰어오르는 듯 하던 백근남은 갑자기 몸을 낮춰 아영의 하체를 공격하였다. 아영의 중심이 흐트러진다.


백근남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아영의 목덜미를 잡았다. 아영은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영은 검끝을 틀어 백근남을 향해 찔러 들어간다. 그러나 둘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이미 백근남이 아영을 집어던진 거였다.


아영은 땅에 떨어지며 한바퀴 굴러 몸을 보호한다. 일어서자 눈앞에 보이는 주먹. 아영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백근남은 권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백근남이 물러서는 것과 같이 아영은 앞으로 다가서며 검을 내질렀다. 모든 것은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아영이 검망을 펼치자 백근남은 위축되는 듯 보였다. 아영은 겨우 한숨을 돌린다. 처음만 조심하면 별거 아니네...


순간 백근남이 주욱 미끄러졌다. 아영은 백근남을 찌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백근남은 미끄러지듯 다가와 아영의 다리를 붙들었다. 백근남은 아영의 다리를 붙든 채 쭈욱 미끄러지며 나아갔다. 아영은 앞으로 쓰러지고 만다. 다리가 붙들려 있어 몸을 어찌할 수도 없었다.


백근남은 일어서며 아영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아영의 몸이 떠오르자 아영의 목덜미를 잡고 그대로 땅에 메친다. 이어 발을 들어 아영의 목을 눌렀다.


"켁켁."


아영은 숨이 막혀온다.


"이제 잔재주는 끝이다."


퍽-.


그때, 누군가 한 사람이 몸을 날렸다. 그는 백근남의 허리를 붙들고는 땅에 뒹군다.


후두둑.


두 사람은 서너바퀴 구른 후 떨어졌다.


"아까 확실히 마무리졌어야 했는데.."


백근남은 몸을 일으키면서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사형, 검 받아요."


아영은 옆에 있는 검을 들어서 천환에게 던져 주었다. 천환의 시선이 검으로 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근남은 치고 들어갔다. 백근남은 천환의 얼굴을 가격했다. 천환이 비틀거린다.


뎅그렁. 검은 천환의 손에 닿지 못한 채,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떨어진 검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백근남의 주먹이 연달아 날아온다. 천환이 정신차릴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퍽-.


천환만 신경쓰느라 비어있던 백근남의 옆구리에 아영의 발이 들어갔다. 백근남의 몸이 비틀리자 아영은 백근남의 머리를 붙잡아 내리며 무릅으로 면상을 가격했다. 아영으로서는 살면서 지금껏 한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공격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때는 아니었다.


아영은 백근남을 놓았다. 백근남은 흔들거린다.


"당신이 원하는게 이런 싸움이에요?"


백근남은 중심을 잡고 다시 아영에게 달려들었다. 아영은 몸을 굴려 땅에 떨어져 있던 검을 들었다. 푹-. 아영의 검이 백근남을 찔렀다. 백근남은 그대로 쓰러졌다.


"우아고 멋있게도 싸울 수 있는데 영 그런 분위기를 안 만들어주네."


아영은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하였다.


***


아영은 천환을 돌아보았다. 천환은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천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매, 너무 하네. 이제보니 검을 던져준게 들고 싸우라는게 아니라 날 미끼로 만든 거였잖아?"


화가 난 말투는 아니었다. 농담이 섞여있었다. 아영은 안도감을 느낀다. 농담까지 하는 걸로 봐서는 괜찮은 것 같아 보인다.


"그렇다고 싸움 중에 한눈 판 사형 잘못이죠."


천환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영은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하하."


왜 웃음이 나왔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눈물이 나고 있있다. 웃음은 그저 눈물을 숨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아영은 촉촉히 젖은 얼굴을 아무도 볼 수 없게 천환의 가슴에 묻었다.


"많이 아프죠?"


아영은 몸을 떼며 물었다. 천환의 옷자락을 찢어 상처를 감싸주었다. 상처가 너무도 많아서 모든 상처를 감싸줄 수는 없었지만.


***


"나도 아픈데..."


내가 더 아픈데... 분군목은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여겼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모든 것을 잃었다.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눈에 들어갔다. 분군목은 소매로 눈을 문질렀다. 일어서려고 했지만 곧 앞으로 거꾸러진다. 온몸이 쑤셔온다.


분군목의 마음을 모르는 듯 머리 위에서 박수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그래도 재미있었네요."


***


그제서야 천환과 아영은 아직 흑리가 남아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끝난게 아니었다.


아영은 흑리를 올려다 보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에요?"


"구경할 게 없어지면 그때 가야죠."


그 말은 아직 더 남았다는 건가? 하긴... 그냥 갈 리는 없었다. 직접 손을 쓰든, 다른 누가 있든.


"어쨋든 고마워요. 멍청한 찬영문 놈들까지 제거해 줘서."


"예?"


"아영은 눈치챘을 것 같은데... 왜 놀라는 척 해?"


"제가 눈치채다뇨?"


흑리는 눈치챘을 거라고 말하지만, 정작 아영은 흑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었다.


"백근남은 젊은 여자가 명령하고 지시한다며 불만이 많았거든. 언젠가 나한테 대들 기세여서... 그 전에 손을 보기는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대신 처리해줘서 고마워."


아영은 흑리를 바라본다. 아군도 적도 없는 모습을 보며, 사파는 사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내 자신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는 사이, 분군목은 백호도를 집으며 힘들게 일어섰다.


"왜 갑자기 그러셨나요?"


흑리를 향한 분군목의 말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장문인 교체와 제자들의 처형은 분군목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 같았다.


분군목의 질문에 건방지다고 화를 낼 줄 알았지만, 흑리는 오히려 분군목의 시선을 피한다.


"알잖아. 나도 일개 집사일 뿐."


흑리는 짧게 말하였다. 짧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말투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계와 슬픔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리고, 흑리의 지위가 극천신교 내에서 낮은 편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흑리가 저 정도면 흑리보다 직급이 높은 다른 사람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그들을 이끌고 있는 극천신군은 어떨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정파 사람들이 극천신군을 극악마괴라고 부르고,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치를 떠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흑리의 짧은 대답만으로 모든 것을 알겠는지, 분군목은 고개만 끄덕일뿐 거기에 대해서는 더이상 질문을 하지 않는다.


짧은 침묵.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는 듯 분군목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흑리님도 주어진 임무를 아직 마치지 못하신거겠네요."


흑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흔히할 수 있는 평범한 동작이었지만, 그조차 조금 전까지 보여준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생각이 아영에게 들어왔다. 다중성 인격장애가 있거나, 한 쪽의 모습을 철저히 숨기려 하는 것 같았다. 아영은 이 모습이 흑리의 본 모습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정확히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저때문에 일이 틀어졌겠군. 죄송합니다."


분군목은 흑리에게 미안해 한다. 자신의 제자들을 죽이고, 심지어 백근남을 시켜 자신마저 죽이려 했던 사람인데, 일개 집사일뿐이라는 말에 오히려 미안해 하다니. 아영은 모든게 이해가 안간다. 하지만, 자기자신조차 흑리를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 아직도 있으니.


"내참. 넌...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 같네. 자꾸 그러면 다음부터는 죄송(罪悚) 분군목이라고 부를꺼다."


흑리는 뜬금없는 농담을 한다. 분군목의 말대로라면 분군목때문에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분군목을 향한 말투는 오히려 아까보다 매섭지 않았다.


분군목의 말이 이어진다.


"제가 처음부터 아영을 죽였으면... 흑리님께서..."


분군목이 흑리에게 하는 말을 들으며 아영은 어이가 없어진다. 다시 같은 편이 되었는 줄 알았는데...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모습이라니... 대체 흑리가 어떤 사람이길래...


"됐다. 다 내 잘못이지."


흑리는 아까와 달리 분군목을 힐책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아영이 묻는다.


"그런데, 극천신군이라는 분은 왜 그렇게 저를 죽이고 싶어해요? 저는 그 분을 본 적도 없고, 누군지도 모르는데."


생각같아서는 '분'이 아니라 '놈'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흑리와 분군목이 발끈할게 뻔했다. 상황을 파악하려면 자신이 말하고 싶은 호칭이 아니라, 두 사람의 눈높이에 맞는 호칭을 사용해야 했다.


"시키면 해야할 뿐 이유는 아무도 몰라. 우리들이야 이유를 알 필요도 없지."


흑리는 감정을 숨긴채 말한다. 흑리는 숨긴다고 숨기지만, 아영은 그래도 예전에 알던 그 모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분군목 뿐만 아니라 자신도 흑리에게 화를 내야하지만... 그게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이겠지만... 이상하할 정도로 흑리에게는 화를 내고 싶지 얂았다.


"그럼 제가 순순히 죽는 게 언니를 돕는 거에요?"


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말이 불쑥 뛰어나왔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거지?


아영 스스로도 당황스러웠지만, 아영의 말에 흑리의 얼굴에도 당황스러움이 스친다.


"얘가 오늘따라 이상한 소리를 많이 하네."


흑리는 그저 이상한 소리라고 치부하며 넘어가려고 하였다.


그런 흑리를 향해 아영은 말을 한다.


"오늘 정말 이상한 건 언니에요. 지금은 그나마 돌아온 것 같지만..."


흑리는 그런 아영을 보며, 다시 감정을 덜어낸 채 말을 한다.


"아니, 그동안 널 속였던거지. 오늘 본 이게 내 원래 모습인 걸."


"아니에요."


아영은 흑리의 말을 강하게 부정하였다.


"믿고 싶지 않겠지. 마음대로 생각해. 그런데 나의 원래 모습이 어떻든 신경쓰기 보다 최선을 다해 살아남는게 서로를 위하는 것이란 건 확실해."


"제가 살아나면 언니가 난처해지는 거 아니에요?"


"날 걱정이라도 하는거야? 에고. 얘가 오지랖이 넓어도 보통 넓은 게 아니네."


흑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했다. 그 속에서 아영은 자신이 알던 흑리의 모습이 보였다.


"오지랖이 넓은 게 아니라... 언니가... 천환 사형도 두 번이나 살려주고, 저도 여러 번 구해주셨잖아요."


아영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을 하였다. 하지만, 흑리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을 하였다.


"내가 언제? 얘가 꿈이라도 꿨어?"


아영은 다 안다고 말하려다가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누가 엿듣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직급이 낮은 흑리가 저렇게 부정하는 것으로 봐서는,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흑리를 오히려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꿈에서는 그랬었는데... 남의 꿈을 들여다 보는 능력도 있나봐요."


흑리는 아영을 바라보다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 아무리 봐도 이상해. 오늘 충격이 크긴 컸나봐. 난 두 사람을 도울 생각은 없고 그럴 리도 없어. 기대하지는 마. 내 역할은 딱 거기까지야."


"무슨 소리에요?"


흑리는 그냥 혼잣말을 하듯 말을 잇는다.


"두 사람이 신군님이 보낸 자들로부터 살아나더라도, 그 과정에서 내가 두 사람을 도운게 아니라면 뭐라고는 안 하실거야."


아영은 흑리가 자신들을 도울 수 없다는 것과 돕지는 못하지만 살아나는게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하시면 다른 고수들을 더 보내시겠지. 아니면 그때는 나보러 직접 손을 쓰라고 할 수도 있고. 하지만, 그것까지 지금 걱정할 필요는 없지. 당장 만나게 될 사람들로부터 살아남는 것 자체가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닐테니."


흑리의 말은 위협보다는 일종의 경고처럼 들린다.


"이사형은요?"


"그렇게 당하고도 사형이라고 챙기는 거야?"


"이사형이 사형이어서라기 보다는 언니가 걱정되서 그러죠."


"알 수 없는 소리만 계속하네. 분군목 역시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야 겠지. 하지만, 그건 나랑 전혀 상관없어. 단지, 신군님께서 분군목에게 기대를 많이 해서 그런 거야. 분군목이 살아남으면 기대에 부합하는 거니 좋아하실테고, 죽으면 어차피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놈이었으니 필요없었다고 생각하시겠지."


흑리는 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이 말을 한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기대에 부합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죽이려 온 자들은 반대로 분군목을 죽이는 게 신군님의 기대에 부합하는 일일테니 필사적일 거고..."


흑리는 분군목을 돌아본다.


"분군목도 쉽지는 않을 거야."


아닌 척하지만, 아영은 흑리의 목소리에 기운없다는 게 느껴진다.


"혹시 이번에도 저들에게 포상이 있는 건가요?"


갑자스러운 분군목의 질문에 흑리의 표정이 아주 살짝 일그러진다. 어이없다는 표정같기도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쓸데없는 생각은 관둬라. 같이 있지만, 넌... 두 사람과 다르다. 신군님의 신임을 다시 한번 확인받기 위한 관문이라는 것만 명심하면 된다."


흑리는 주위를 살펴본다.


"이제 준비가 된 것 같군."


아영이나 분군목을 보고 하는 이야기인지, 숨어있는 누군가를 보고 하는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흑리는 삐익 휘파람을 불렀다. 휘파람 소리가 나자 열 명의 흑의인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절도있는 동작에서 나오는 강렬한 기운. 지금껏 만났던 자들과는 또 다르다. 세 명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분군목은 살아남은 제자들에게 진을 만들도록 한다.


흑리는 모습을 드러낸 흑의인들을 돌아봤다.


"저런 애송이들한테 열 명을 다 보내면 여러분들을 무시하는 거겠죠?"


말을 약간 존대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분군목이나 정다련과 달리 흑리 휘하는 아닌 것 같았다. 설마 흑리와 동급은 아니겠지?


"내가 보기에는 두 명만 가도 될 것 같긴 한데..."


아영은 흑리를 바라봤다. 그냥 심심해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세 사람을 위한 경고일 수도 있고, 어쩌면 열 명을 방심하게 하려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싸움에 참여할 수 없다보니 심심해서 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신군님께서 하신 말씀도 있고, 확실하게 하는게 좋기도 하니... 다 같이 시작하시죠."


휘익-. 흑리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흑의인들이 달려왔다. 불과 열 명인데도 느껴지는 건 그 이상이었다. 검은 물결이 하늘과 땅을 다 덮는 듯한 착각. 숨이 막혀온다.


===


* 초연(超然): 현실 속에서 벗어나 의젓함. 보통 수준보다 뛰어남.


* 초연(愀然): 얼굴에 근심스러운 빛이 있음.


* 초연(悄然): 의기가 떨어져 기운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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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발오악 11 22.01.23 363 4 18쪽
118 세발오악 10 22.01.22 326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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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세발오악 05 22.01.17 303 4 13쪽
112 세발오악 04 22.01.16 314 4 16쪽
111 세발오악 03 22.01.15 317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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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사차부하지 07 22.01.09 313 4 12쪽
104 사차부하지 06 22.01.08 326 4 13쪽
103 사차부하지 05 22.01.07 333 4 13쪽
102 사차부하지 04 22.01.06 351 4 13쪽
101 사차부하지 03 22.01.05 320 4 13쪽
100 사차부하지 02 22.01.04 311 4 12쪽
99 사차부하지 01 22.01.03 347 4 13쪽
98 종남첩경 06 22.01.02 349 4 12쪽
97 종남첩경 05 22.01.01 326 4 12쪽
96 종남첩경 04 21.12.31 333 4 12쪽
95 종남첩경 03 21.12.30 339 4 12쪽
94 종남첩경 02 21.12.29 352 3 12쪽
93 종남첩경 01 21.12.28 376 4 12쪽
92 하년멸시호 12 21.12.27 374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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