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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블로우 님의 서재입니다.

우리는 다른 시간을 걷지만 같은 공간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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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레온
작품등록일 :
2023.10.09 14:09
최근연재일 :
2023.10.12 07:48
연재수 :
2 회
조회수 :
17
추천수 :
0
글자수 :
10,409

작성
23.10.09 14:42
조회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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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
11쪽

그날, 소녀는 그대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

DUMMY

지난 10년간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마왕이 쓰러졌다.

그리고 예정되었다시피, 용사도 쓰러졌다.


예정···그렇다.

용사는 마왕을 쓰러뜨리고 그와 함께 산화하게 될 것이라고.

우리 용사 파티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마왕은 매우 강했고 용사는 그 강한 힘을 넘기 위해, 성검을 들었기 때문이다.

육체가 무너지고 영혼이 부서져 내릴지라도.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용사는 희생을 감수했다.

나는 그 행동이 아주 고귀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고귀했으며 그는 세상에 모든 것을 공헌했다.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을 업적을 이루었고 사라졌다.


용사─제이드 니콜라스.

현세 인류 최강이던 사내는 마왕의 앞에서 모든 것을 쏟아붓고 그렇게 사라졌다.


“제이드···.”


왕도로 돌아가기 위해 타고 있던 짐수레 위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으로 짙던 저 하늘이 이제는 파랗고 청량하다.


거짓말처럼 지독한 마기는 이제 사라졌다.

몸도 가볍고 숨도 거칠지 않았다.

그 마왕이 사라지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세상이 변했다.


아마 시골 변방의 꼬마 아이도 마왕의 죽음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있겠지.


“아니스? 괜찮은가?”


나를 부른 목소리에 뒤로 젖히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옆을 돌아보았다.

삐걱, 삐걱···소리를 내면서 움직이고 있는 작은 짐수레가 불쌍할 정도로 거대한 사내.

인간치고 용사 다음으로 강한 자가 누구냐면 이 녀석이겠지.


“괜찮고말고. 내가 언제 괜찮지 않은 적이 있던가?”


“아니, 아니스.”


“내 이름으로 그런 말장난은···그래, 이제 마지막이니 마음껏 해도 좋아. 응···끝났구나~”


“역시 이상하군. 너, 방금 제이드의 이름을 불렀잖아?”


성전사 디오펜시.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우리 파티의 방벽이 되어준 사내.

성전사라는 이름답게, 성직자 겸 전사인 말도 안 되는 인간이었다.


거대한 방패와 무지막지한 도끼가 듬직했지만, 지금은 눈꼴 시려서 보기 민망한 상태다.


근육질이 드러난 상체를 훤히 드러냈다.

방패는 이미 부러져서 마왕 성 근처에 버려두었고 내친김에 도끼도 두고 왔다.

갑옷마저 너덜너덜해서 지금 저 상태다.


“내가? 제이드의 이름을 불렀다고?”


“그래, 아니스 네가 방금 ‘제이드···.’ 그렇게 구슬프게 울었다니까?”


헛소리다.


내가 어째서 그 녀석의 이름을 부른단 말인가?

그것도 이미 죽어서 사라진 인간이다.

그 이름을 부를 이유도 생각할 필요도 없거늘.


“나를 놀릴 생각이라면 집어치워라. 차라리 내 이름으로 말장난이나 더 하거라.”


“오, 이런···아니스. 그립다면 그립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야. 어렵지 않네.”


“그의 말이 맞다. 우리의 만남이 아무리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마주친 건 마주친 거야.”


언제나 차분하고 말 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파티의 암살자.

그런데도 모두가 그녀를 믿고 따르던 엄마 같던 엘프, 헬레나.


그리움이란 무엇인가?

보고 싶어서 애타는 마음을 뜻한다.


내가 제이드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그 녀석과 처음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나의 둥지에 발을 잘못 들인 소년 제이드.


그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고작 13년이다.

한숨 푹 자고 나면 잊힐 한 조각의 꿈에 불과했다.


“헬레나는···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 하지만 결국 마음속에 남아 쌓이기 마련···.”


“쌓이기도 전에 그는 사라졌다. 그리고 이미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


그는 죽을 것이다.

마왕의 손에 죽는 것은 아닐지언정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우리 파티는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준비했으며 실행했다.


나는 그를 보내준 것이다.

어차피 길고 긴 여생에서 지나가는 누군가 중 한 명일 뿐이다.

나의 여생은 앞으로 9천년은 더 남았으니까.


헬레나는 내게 말한다기보단 늘 그랬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우리 같은 장생 종의 숙명이란다, 어린 용이여···하지만 결국 남은 것은 추억뿐이구나.”


이미 5천년 이상을 살아온 헬레나.

엘프의 수명을 아득히 넘은 현자와도 같은 그녀 또한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몸도 1, 2천년 정도는 아니스 그대와 똑같은 생각을 했지. 찰나의 순간···인간의 수명···.”


부질없으며 딱히 마음을 줄 이유도 없고 어차피 눈 깜짝하면 그들은 죽는다.

나에게는 찰나의 순간이며 한숨의 꿈과 같은 유희일 뿐.


인간 세상이 혼란스럽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잠깐 외출한 것뿐이다.


길에서 돌아다니던 참새가 손에 앉았다가 떠나갔다.

다음 날에도 날아와서 창가에 앉아 기웃거리길 반복하지만 그뿐이다.


어느 날 녀석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고 삶이란 끝나길 마련.

그것은 나와 너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제이드···.

사실 나는 그를 살릴 수 있었다.

마왕과의 혈투 끝에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대는 각오했으며 그것이 끝이라고 다짐했고 준비했으니까.

나는 그 고결함에 감동했고 그 마음을 지켜주었다.


그것뿐이다···.


그때 일으켜 세웠다면, 그대는 얼마나 더 살 수 있었을까?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더 열심히 오랫동안 살 수 있었을까?


아마 고작 2년?

무너진 육체와 영혼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

그 고통 속에서 2년 동안 살아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인간···인간···.


삐걱, 삐걱.

짐수레가 나아간다.

푸름을 되찾은 산길을 넘어서 천천히 수도로 향하고 있었다.


가끔 지나치는 마을에서도 인간들이 우리를 찬양했고 환호해주었다.

하지만 그것뿐, 이것도 찰나의 순간이다.


우리가 마을에 머물 때는 한없이 기뻐하고 잘해주지만 마을을 나서면 끝이다.

그들의 마음에 우리가 남을진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잊힐 것이다.


다시 그들의 삶으로 돌아가 현실과 맞서 싸우고 모두 잊는 것이다.


“로버트는 요양을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한동안 말이 없어진 우리들 사이에서 오펜디시가 입을 열었다.

로버트는 술만 밝히는 땅딸보 드워프의 이름이었다.


우리 파티에서 장비 점검과 보급, 요리 담당이었고 물론 전사로서도 훌륭했다.

하지만 싸움 도중 헬레나를 지키기 위한 그의 희생이 있었다.

결국 리타이어해버린 그는 끝까지 함께 할 수는 없었다.


“죽진 않았겠지. 그 망할 드워프는 죽어도 입은 살아 있을 것이야. 술은 마셔야 하니까.”


“푸하하! 그렇겠지?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그 녀석도 찾아서 데려가야지!”


그리고 또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이 파티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대화 밸런스가 어긋났다고 해야 하나?

무엇이 빠졌는지 생각해보자면 역시 제이드인가.


“제이드···.”


흡. 아무도 못 들었나?

방금은 스스로 그 이름을 부른 것을 인지했다.

나는 입을 가렸고 눈동자를 굴려 두 사람을 살폈다.


오펜디시는 수레 벽에 기대어 양팔을 베개 삼아 눈을 감고 있었다.

헬레나는 여전히 어떤 책을 읽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제이드의 얼굴도 아니다.

고작 이름을 생각한 것뿐인데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지금에 와서?

조금 전까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입술이 조금 떨리는구나.

인간의 육체를 빌려서 그런 건가···피부와 근육이 약해서 경련이 일어난다.

심장도 작아서 금방금방 놀라고 크게 두근거린다.


그 녀석은 큰 가슴을 좋아한다고 했지.

그래서 지난 7년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일부러 가슴을 키우기도 했고.

그에게 맞춰서 놀기도 했었다.


물론 한순간의 유희로서 인간과 함께 어울리기 위해서 맞춰준 것뿐이지만.

이것이 바로 추억이라는 것일까?


하지만 어째서 다른 것인가?


다른 수많은 인간을 보았고 그들과 생활을 해보았다.

어떤 인간과는 대략 50년을 알고 지냈지만···이런 마음이 생긴 적은 없었다.


가슴 한쪽이 아리고 시리다.

제이드라는 이름을 되뇔 수록 눈이 흐리다.


“아니스···?”


“오, 이럴 수가 드래곤의 눈물이다!”


“눈···물?”


나는 얼굴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손을 내려다보니 방울방울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흑···윽···나, 나 이상해! 내가 왜 이러지?”


“우리 도도한 아가씨가···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오펜디시! 위로를 해줘야지 무슨 말씀이신가요?”


두 사람이 무어라 떠들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청각 능력이 감퇴하고 있다. 아주 위험한 상태였고 마법 능력도 줄었다.

하지만 몸을 추스를 수 없었다.

아니, 추스를 마음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여운에 몸을 맡기고서 마치 술에 취한 로버트처럼 슬픔에 취해버렸다.


제이드···제이드···.


“흐윽, 제이드···미안해! 제이드···조금이라도 노력해볼걸! 살리려고 노력이라도 해볼 것을···!”


적어도 2년은 더 함께할 수 있었을 텐데, 그가 아무리 괴로워할지라도···.


“아니스? 아무리 그대가 드래곤일지라도, 그 상태를 살리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헬레나···! 이 몸의 마법을 무시하는 것이더냐!”


순간 화가 나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굳어버린 그녀에겐 미안했지만 정말, 정말 미안했지만···.


“아닙니다···위대하신, 존재···.”


“윾, 으윽···미안해 헬레나···.”


내 마음이 지금 오락가락하고 있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

─히이잉! 푸르륵. 털썩.


“오 이런···마부 아저씨!”


말과 마부 아저씨가 나 때문에 기절했다.

우리 용사 파티의 일원은 아주 익숙하고 담력도 강해서 버텨내지만···.

잊고 있었구나. 저 작은 생물들은 나의 숨결에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성전사 오펜디시의 신성력이 마부와 말을 살려낸다.


“무, 무슨 일이···? 저 죄송합니다! 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절해버렸습니다···.”


벌떡 일어난 마부가 놀라서 그렇게 말했다.

오펜디시는 괜찮다며 그를 다독였다.


헬레나는 나의 노여움을 이겨냈고 오히려 이쪽으로 다가와 나를 안아주었다.


“우리 꼬마 아가씨···드디어 우리에게 진짜 마음을 보여주신 건가요?”


“지, 진짜 마음?”


“오래 걸렸습니다. 아니, 아니스···그대치고는 아주 빠른 걸까요?”


“헬레나마저 말장난을 하는 거야?”


그녀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언제나 표정이 없어서 이 여자가 웃으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궁금했는데···.

그 모습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헬레나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웃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아.”


“그런가요? 저는 자주 웃는다고 생각했는데.”


“흥, 꼬마라고 하지 마세요. 헬레나는 몰라도 지금 이곳의 그 누구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나는 올해로 대략 1400세.

막 성년을 맞이한 어린 드래곤.


방금 사랑을 깨달았고 그 사랑은 끝났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대를 기리면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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