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웅루까의 서재

죽기 싫은 활쟁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웅루까
작품등록일 :
2021.05.24 22:15
최근연재일 :
2021.05.31 23:53
연재수 :
6 회
조회수 :
141
추천수 :
6
글자수 :
28,049

작성
21.05.24 22:22
조회
46
추천
3
글자
6쪽

1. Prologue

DUMMY

처음 활을 잡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낯선 곳에 떨어져 아등바등 살아가려 노력했던 순간이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무엇하나 내세울 게 없는 초라한 몸뚱이에서 나오는 기적 같은 재능의 발현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활 한 자루를 잡는 순간 팔에서부터 찌르르 울리던 고양감.

멍하니 바라보기만 해도 모든 것을 계산해주던 압도적인 재능. 천재가 바라보는 시선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 황홀감. 마치 마약이라도 한 듯, 절대로 이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활을 잡은 순간 인지할 수 있었다.

그 감정은 노력이 없으면, 재능에 매몰되어 비루한 몰골이 되리라는 환청을 희미하게 동반한 상태였다.


당시 나는 무엇이든 좋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그것이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나온 포기였는지, 재능에 삼켜진 상태에서 나오는 자신감의 발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세상을 오시하는 몇몇 존재가 스쳐 지나가며, 그렇게 될 수 있으리란 헛된 바람이 가슴에 희망을 불어넣었다.


호수 실얀과 오르사의 주인.

오루그 바니 대평야의 대전사.

가로웨의 대제.


한 때 꿈꿨던 정점의 마법사나 검사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활에 낭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활이 주입하는 압도적인 재능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게 해주는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몸에 일어나는 극적인 변화 또한 그 자신감을 뒷받침하는 좋은 증거였다.

검은색 모발은 마치 무언가에게 색을 빼앗기듯 옅은 은발로 물들었고, 두 눈은 녹색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 프리시오."

"아."


옅게 잠긴 목에서 나온 내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일어나. 네 차례야."


단잠이 주는 꿈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차가운 새벽 공기가 볼에 맞닿는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체감으로 느껴지는 온도는 꽤 서늘했다.


"고생했다."

"그래. 너도 고생해."


편한 복장에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는다. 불침번을 설 차례였다. 말번이었기에 이대로 나갈 채비를 하면 끝난다.

도시로 향하는 여정의 마지막. 이런 노숙과 야영도 오늘로 끝이다.


동트기 전 어슴푸레 지평선을 비집고 나오는 옅은 빛을 멍하니 바라보니 문득 잠시 꾸었던 꿈이 떠오른다.

활을 처음 잡았던 순간.

차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교차한다.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초기였다면 막을 새도 없이 활을 부여잡으며 차오르는 정신적 충족감을 만끽하고 있었을 테지.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텐데. 시도하고 나면 헤어나올 수 없다. 잠깐 참는 것이 전부일 뿐.

하물며 재능이 그 대가로 생명력을 요구한다면야. 활을 한 번 잡을 때마다 불타 들어가는 육체가 뻔히 보인다.

그러면서도 더 높은 경지와 깨달음을 좇는 것 나 자신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짓게 된다.


여느때와 다를 것 없이 새벽이슬과 함께 습기를 머금은 화살을 다듬는다.

접착제로 사용되는 어교(魚膠)가 망가지지 않았는지 확인한다.

투사의 편함을 위해 달아놓은 슬링의 탄성 여부를 자연스레 확인하며 궁사로서의 일상적인 점검을 이어나간다.

연습을 위해 소모되었던 나무 화살 몇 대를 충당하기 위해 근처 나무의 재질을 확인한다. 쓸모 있어 보이는 나뭇가지를 대충 주워들어 단검으로 매끄럽게 다듬는다.

접착제는 어교와 괴교(怪膠). 흔히 몬스터따위를 잡을 때 얻을 수 있는 부위다.


재능이 주던 노력의 강박감은 이제 와서 일상의 무던함으로 묻혔다. 일련의 과정 모두 활을 잡았을 때 시행하던 초반기 노력의 잔재였고, 기본을 바탕으로 내가 오롯이 쌓아올린 재능의 결과물이다.

비로소 그제야 재능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더 나은 길을 제시한다. 그러한 깨달음을 맛본 이상 나는 활을 놓는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소박하게 이어지는 노력 또한 마찬가지.


흐릿하게 이어지던 꿈의 잔재를 뒤집어 밟으며 느긋하게 장비점검을 이어나간다.

시골이나 소도시 근처가 아니기에 별일이야 있겠냐만은, 여느 공습이 그렇듯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알맞은 시간대였다.

심호흡을 티 날 정도로 크게 행하며 활을 잡는다. 늘 그렇다. 활을 잡기 전 마음가짐은 언제나 이따위 재능에 먹히지 않겠다는 것이지만, 쉬울 리가 있나.

압도적인 폭력과도 같은 재능이 파도처럼 거칠게 밀고 들어온다.

손가락 끝으로부터 전해지는 전율적인 떨림. 동시에 머릿속을 폭발시키는 정신적 고양감. 안정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시야의 확장. 감각의 증대. 활로 할 수 있는 목록의 열거.


"하아..."


달콤하기 그지없는 유혹은 천천히 목숨을 앗아가는 질병이었지만, 언제나 함께 해야 하는 동반자였다.

떨림은 멎었고, 내가 든 활은 어둠 너머를 그렸다. 쉽게 만든 나무 화살 다섯 대는 이윽고 빛이 머무르기 직전의 숲을 활공했다.

화살은 지적할 데 없이 깔끔하게 과녁을 관통했다. 위력은 여전했고, 정확도는 흠 잡을 곳이 없었다.

활대의 탄성은 준수했고, 안쪽에 새겨진 십자 빗금은 선명히 모습을 드러낸다.

굳게 먹은 마음으로 활을 놓아 다시금 등 뒤로 멘다. 별다른 이상 없는 장비 점검의 끝이자,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종.


차올랐던 재능은 이윽고 썰물처럼 단번에 빠져나가며 탈력감을 선사한다.

매일 많게는 수십 번 겪어왔던 상황이지만, 적응은 그와 또 다른 문제다. 이것에 적응하는 때는, 내 시야가 천재 그 이상의 재능에 맞물리는 때가 아닐까.


이 땅에 떨어진 지 어언 1년. 380일. 6개월.

1월의 50일째를 맞이하며 아직 떨어지지 않은 세 개의 달을 바라본다.


작가의말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꾸준히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죽기 싫은 활쟁이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 6. 라스 아노드 21.05.31 17 1 8쪽
5 5. 첫 번째 시험 21.05.28 13 0 14쪽
4 4. 첫 번째 시험 21.05.27 18 1 11쪽
3 3. 숲 21.05.26 22 0 12쪽
2 2. 숲 21.05.25 25 1 12쪽
» 1. Prologue 21.05.24 47 3 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