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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서재입니다.

멀고도 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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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남녘
작품등록일 :
2020.09.20 16:37
최근연재일 :
2021.01.19 20:00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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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수 :
204,498

작성
20.09.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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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3.

DUMMY

대오와 함께 술을 기울였던 마지막 날로부터 벌써 3년이나 지났다. 1학년 2학기를 그런 식으로 말아먹고 복학은 아직까지도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랴. 대학이 내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니니까.

가볍게 힘을 줘 문을 열었다. 짤랑, 하는 소리와 동시에 채윤의 가족이 운영하는 2층하고도 지하가 딸린 카페의 모습이 반겨온다. 카페 이름이 2층, 1층, 지하 카페로 특이한 이곳의 공기를 명절 때 시골에 내려온 어른처럼 단번에 빨아들여본다.


“흐음~”


익숙한 향기.

그래, 그래. 바로 이 향기야.

깊게 들이 쉰 숨으로 휴학을 하고 3년간 익숙해진 향기를 만끽한다.


“오늘도 왔니?”


1층 카페의 주인아저씨. 채윤의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고 물었다.


“네.”

“아주 아지트로 삼지 그러니?”

“이미 아지트에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올린다.


“너는 매번 지하구나?”

“아늑하잖아요.”


지하로 내려가는 발소리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다. 여유로운 발걸음은 채윤이 담당하고 있는 지하 카페에 망설임 없이 빨려 들어간다.


“딸랑.”


손님의 입장을 알리는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왔어?”


검지와 엄지로 만든 작은 고리에 한껏 머리카락을 끌어 모은 채윤이 고개를 뒤로 돌리며 물었다. 그녀의 입에 지금의 손 고리를 대신할 머리끈이 물려있어 발음이 무척이나 어눌했다.


“네.”


나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그녀가 서 있는 바(bar)테이블에서 조금 떨어진 원형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 챈 그녀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사장님.”


내가 진지하게 그녀를 불렀다.


“왜?”


그녀는 머리끈으로 단단히 고정한 부위를 다시 한 번 손으로 만져 확인했다. 오묘하게 은빛과 검은 빛이 섞인 머리카락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져 스컹크의 꼬리처럼 움직였다.

그 부드러운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나는 오늘 다짐한 일을 행하기 위해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것으로는 모자를 것 같아 주먹까지 꽉 쥔다. 가방을 내려놓고 약간의 비장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간다. 최대한 진중하게. 오늘은 기필코, 꼭 해보고 싶었던 대사를 현실로 끄집어낼 생각이다.

그녀의 앞에 서서 숨을 고른다.


“왜 이래?”


벌써 경계하기 시작한 그 물음도 무시한 채,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뗀다.


“늘 마시던 걸로.”


내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표정을 나와 같이 바꿨다.

그녀는 회전초가 휘날리는 서부의 사연 있는 술집 주인과 같이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말한다.


“아메리카노?”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더니, 은은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황홀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마치 암호처럼 ‘늘 마시던 걸로.’ 라는 말로 통하는 사이! 만화나 소설에서 분위기 있는 주인공들이 꼭 한 번쯤은 뱉는 대사!

나는 짜릿함에 몸을 떨었다. 절대 부끄러워서 그런 건. 절대! 절대로 아니다.

물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눈을 깜빡이는 게 반드시 나를 놀리고 싶을 때라는 걸 안다. 지금 그녀가 컵을 가져오기 위해 뒤를 돈 채로 낄낄 거리느라 어깨가 들썩이고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지금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목적은 이뤘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녀에겐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한다.


“좋았어.”


서둘러 자리에 돌아와 내려놓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낸다. 아메리카노가 나오기 전까지 완벽한 모습을 갖춰놔야 한다. 그래야 좀 전에 했던 대사가 완벽해질 테니까말이다.

대충 엉켜있는 노트북 충전기를 풀고 콘센트에 꽂았다. 그 밑에 남아 있는 콘센트에 핸드폰 충전기를 마저 껴 놓았다. 마지막으로 가방에서 끄적거리던 글들이 빼곡한 공책을 꺼내 노트북 옆에 펼쳤다.

준비는 완벽하다. 오늘은 이대로 집에 돌아가 잠을 자도 여한이 없을 것만 같았다.

이제 아메리카노가 나올 때까지, 진중하고 심각한 작가의 표정을 유지하기만 하면 됐다. 목적은 이미 달성했으니, 채윤의 놀림도 두렵지 않다.

손깍지를 끼고 가볍게 인중에 가져다댄다. 무언가를 깊게 고민하는 모습으로 나는 아메리카노를 기다린다. 참고로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로 말할 것 같으면, 원형 테이블이면서 벽에 딱 달라붙어 있다는 기이함이 창작을 자극하는 베스트 플레이스다.

벽이 선사하는 은근한 안정감으로 더 없이 완벽해진 최적의 창작 명당이자, 이 가게에서 유일하게 콘센트를 최 근접에서 이용할 수 있는 유니크한 스폿이기도 하다. 물론 4인 자리이기 때문에 혼자 앉기에는 상당한 부담이 따르지만 그 정도에 눈치 볼 정도로 나는 무디지 않다.

3년 동안 이곳에 앉아 왔으니 이제는 무뎌질 눈치조차 없다.


“어때?”


사장님이 내 노트북 옆에 아메리카노를 놓으며 물었다.


“뭐가요?”

“꼭 해보고 싶었던 대사였잖아?”


마음대로 놀리라지.


“놀리셔도 상관없어요. 저는 이미 만족했거든요.”

“그걸로? 내가 여기서 계속 받아주지 않아도 돼?”


아아, 그건 곤란하다. 내 계획은 그녀가 아메리카노를 내려놓는 순간까지니까 말이다.


“어쩔까나?”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커피로 나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저 음흉한 눈빛. 나를 놀리기 위한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게 아무리 얄밉다고 해도 3년 동안 경험한 바로는 내가 그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주세요.”


결국, 이기지 못 할 싸움에서는 그냥 빠르게 항복하는 게 정답이다.

그녀가 내 말에 기쁘게 웃고 커피를 놓아줬다.


“여기 있어. 늘 마시던 거.”


그래도 내가 항복의 의사를 밝히자 그녀는 끝까지 묵직한 목소리로 기분을 맞춰줬다. 그게 고마워 나는 또 기쁘게 그걸 받아 마셨다.


“생각보다 멋없던데?”


그녀가 내 앞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요?”

“응.”


채윤이 내 표정을 한참 바라보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확 부끄러움이 밀려와 깍지 낀 손을 어색하게 풀어버리고 말았다.

이러면 항복하고도 또 지는 건데······.

그런 내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린다.


“성운이는 단순하다니까~”


그녀의 팔이 의미 없이 움직였다. 새하얀 바탕에 검은 줄이 일정한 간격으로 그려진 스프트라이트 셔츠와 그 위에 입은 베이지색의 브이넥 니트가 부드러운 소리를 내었다. 의미 없이 움직이던 팔은 귀 볼에 박혀있는 작은 꽃 모양의 귀걸이에 불시착해 괜시리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여기 다닌 이례로 제일 멋없었어.”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아요?”

“더 너무한 말 해줘?”


그녀가 다리를 꼬았다.

무릎까지 오는 긴 치맛자락이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 움직임에 맞춰 눈이 내리는 소리를 낸다.


“뭔데요?”

“그러니까 친구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젠장.

오른쪽 팔꿈치를 원형 테이블에 올리고 턱을 괸 그녀가 일침을 가한다.


“친구 없는 건 상관없잖아요?”


정말로.

친구는 없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거지.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노트북 화면을 바라본다.


“친구 없으면 나중에 고생해. 너 도와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거잖아.”

“저 도와줄 친구는 한 명 있으니까 상관없어요.”

“한 명으로는 어림도 없어.”

“그렇게 따지면 사장님도 친구 없잖아요.”

“내가 얼마나 친구가 많은데?”


그녀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조금 당황한 투가 섞여 있는 걸 보아하니 자신도 긴가민가한가 보다.


“만나는 거 본적 없는데. 3년 동안.”

“나 졸업할 때 입학한 녀석이 말대꾸는 아주, 따박! 따박!”


그녀의 검지손가락에 달린 날카로운 손톱이 나의 앞에 위협적으로 왔다간다.

나는 그 위협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흘겨보며 옆으로 고개를 뺐다.


“사장님이 저 놀리는 거랑 똑같죠, 뭐.”

“그건 그렇지.”


그러면서 그녀는 위협적인 손 그대로 내 아메리카노를 집어 들어 홀짝 마셔버린다.

뭐하는 걸까, 라는 표정으로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그녀는 파하하, 웃으며 나의 어깨를 때린다.


“미안, 미안. 한 잔 더 주면 되잖아. 뭘 그렇게 보니?”

“됐어요. 그냥 빨대나 바꿔줘요.”


그녀의 입이 닿아 상흔이 생긴 빨대를 뽑아 조심스럽게 옆에 치워두며 말했다.


“의식하는 거니?”

“아니거든요! 위생! 위생상의 문제거든요?!”

“정말?”


턱을 괸 그녀가 빙글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건, 나에게 여러모로 조금 위험하다. 이제까지의 경험상 그런 표정을 지은 이후에 좋았던 적이 없다. 분명 어딘가에서 내가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해 하는 모습을 찍으려 기회를 노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하면, 한껏 과장되게 팔을 얼굴 앞에 올려 잔뜩 방어하는 모습을 보이면 된다. 마치 그녀가 나를 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나의 표정을 그녀는 볼 수 없다. 그녀의 목적은 내 변화하는 표정, 그걸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 오버하지 마!”

“제가 사장님을 본지 하루 이틀도 아닌데, 사장님 장난이야 눈에 선해요.”

“걱정 마. 늘 새롭게 놀려줄 거니까.”


소름끼치는 말을 남기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빨대를 가져다줬다.

내가 그 행동에 방심해 손을 내려놓자, 그녀는 준비해 놨던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찰칵.


“이야~ 완벽하게 못났어! 사진에 못나게 나왔어!”

“지워요, 좀!”

“히히. 싫어~”


그녀가 한 번 싫다고 뱉었으면, 더는 돌이킬 수가 없다. 차라리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이 상황에서 빠르게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몸을 돌려 그냥 노트북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새로 쓰는 소설이야?”


아니나 다를까, 다시 자리에 앉은 그녀는 흥미를 바꿔 다른 주제를 꺼냈다. 안정적인 대화 주제에 나는 조금 경직된 몸을 풀어본다.


“그렇죠, 뭐.”

“하긴. 오늘은 네가 제일 좋아하는 날씨였지?”

“네.”


그녀가 이해했다는 묘한 소리를 내며 눈을 치켜뜬다.


“맑은 하늘에 내리는 비······. 생각해보면 참 예쁘긴 한데, 막상 보면 싫단 말이지?”


그녀의 눈이 그렇게 천장을 향해 치켜떠지면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게 45도 기운다면, 생각의 실마리가 잡혔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반대 방향으로 45도 기울어지면 생각이 끝났다는 의미이다.

그래, 그래. 지금처럼.


“그러고 보니, 저번 주에 완결 됐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번 장르는 뭔데?”

“로맨스요.”


그녀의 눈이 깜빡인다.

이건 처음 보는 반응인데?

나는 서둘러 그 작은 변화를 메모하기 위해 노트북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녀가 대뜸 테이블을 내리치며 말했다. 그러는 바람에 나는 못된 짓을 들킨 어린 애처럼 두 손을 번쩍 들고 만다.


“네가? 왜?!”

“뭐, 왜요!”

“이상하잖아, 로맨스라니!”

“로맨스가 어때서요!”


주변의 손님은 신경도 쓰지 않는 데시벨이 가게를 가득 채웠다.

그녀의 눈이 가늘게 떠진다.


“스릴러도. 판타지도. 네 글 어디에도 사소한 로맨스나 작은 연애의 기류 따위는 없었잖아?”

“그러니까 지금부터 연습하는 거죠.”

“그럴 수가······.”


그녀가 테이블 위로 널브러진다.


“뭐가 문제에요?”


그녀의 미끄러지는 손에 아메리카노가 쓰러질까, 서둘러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멀찍이 두었다.


“난 ‘연애 간섭 금지 파’란 말이야.”

“그게 뭔데요?”

“넌 네 작품 평가도 안 보냐? 댓글 같은 거.”

“평가 받을 정도로 유명하지 않은 건 제가 제일 잘 알거든요?”


그 말에 그녀는 강한 수긍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상처받는다고, 사장아. 그건 그렇고 내 작품에 댓글 다는 사람들이 있다니.

고개가 절로 옆으로 기운다.

없을 텐데······?


“그래도 댓글 정도는 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조금 무서워서······.”

내 대답이 성에 차지 않은지 한숨을 토해내는 그녀다.


“네 작품 댓글들 보면, 두 부류가 있어.”

“댓글이 있긴 있어요?”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그녀가 한심하다는 듯, 또 한 번 한숨을 뱉었다.


“됐고, 어쨌든. 두 부류가 있어. 그게 연애 간섭 금지파랑 연애 간섭 찬성 파야”


그녀가 멀찍이 떨어트려 놓은 아메리카노를 집어 다시 한 모금 마신다. 아무래도 한 잔 더 받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메리카노가 사라지는 것과 비례해서 설명은 계속된다.


“네 소설은 판타지면 판타지. 스릴러면 스릴러. 연애 따위는 없고 스토리 위주잖아?”

“······그런가요?”

“그래.”

“나름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제법 화끈 거리는 장면도 많은데.

하지만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그녀는 얼굴 전체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커다란 물음표를 띄운다. 그러다 휙, 휙. 그런 표정을 날려버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그거 때문에 댓글이 난리거든. 항상.”


난리까지?!


“물론 나랑, 우리 아빠랑 엄마랑. 그리고 모르는 사람 둘. 이렇게지만.”

“그건 난리라고 표현하면 안 되죠.”


읽지도 않은 댓글에 벌써 상처를 받은 기분이다.


“그래서요?”

“댓글에 ‘연애 요소 좀 넣어 달라. 숨 막히다, 쉴 틈이 없다!’ 이런 쪽이랑. ‘몰입감 있다. 차별화 있고 좋다. 군더더기가 없어서 깔끔하다.’ 이런 식으로 나뉘어 있다, 이 말이지.”


전혀 몰랐다. 애초에 글만 올리지, 댓글 따위는 무서워서 도저히 볼 용기도 없으니까. 나름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과 적어도 아는 사람들이 꾸준히 읽어주는 것에 이 자리에서 소소하게 감사를 보내본다.. 특히 내가 모르는 두 사람에게 거듭 감사를 보내본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에 누군가 동참해 주고 있다는 사실만이 묘하게 힘이 났다.


“그러니까, 사장님은 그 중에서 연애 반대파라는 거죠?”

“그래.”


그녀의 눈은 상당히 진지했다.

이렇게 열심히 내 소설을 봐줬을 줄이야. 그녀가 다 마셔버린 아메리카노가 어쩐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써야 해요.”

“어째서!”

“장르를 늘려보고 싶거든요.”

“왜에~”


진짜 싫은지 그녀가 말을 늘렸다.


“애초에 연애도 안 해봤잖아.”


이 말은 좀 울컥한다.


“그거랑은 상관없거든요?”

“애초에 저는 소꿉친구처럼 진득하게 알아가면서, 각자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이가 돼야 사귈 마음이 드는 사람이라고요.”

“소꿉친구가 없잖아, 너.”

“조용히 하세요.”


이건 진심이다.


“애초에 별로 연애할 생각도 없고요. 지금 하는 일도 바쁘니까.”

“그래서 소설으로라도 연애를 해보시겠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라고요. 그냥 묶여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특화된 것도 좋지만, 잠재력이 죽는 느낌이잖아요.”


그녀가 내 말에 눈을 깜빡였다.


“놀리지 마세요.”

“내가? 왜?”

“지금 제가 오글거리는 말해서 무척 놀리고 싶어 하는 거 다 아니까, 그만 둬요.”


내가 딱 잘라 말하자 그녀는 웃음을 터트린다.


“아아, 아쉽네.”


그녀는 다 마셔버린 내 아메리카노를 새로 내주기 위해서 자리에 일어났다.


“그래, 네가 쓰는 소설이라면 다 재밌을 거야.”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남기고 멀어져가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뜯어내고 노트북을 바라본다.

이제 진짜 소설을 써야할 타이밍이다.


“근데 로맨스를 쓰려면 연애를 해봐야 하지 않을까?”


원두 갈리는 소리를 뚫고 채윤이 크게 물었다. 나는 그 소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답했다.


“자고로 연애 못 해본 사람들이 로맨스는 더 잘 쓰는 법이랬어요.”

“뭐? 왜?”


비웃음을 머금은 물음이 날아온다.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으니까요······?”


자신은 없지만.

원두를 짜서 만들어진 검은 액체가 새하얀 물에 담겨 퍼지는 게 보인다. 뒤섞이지 않을 듯 섞이는 게 참으로 묘하다.


“그런 애들 소설이 재밌긴 하지.”


탁, 하고 그녀가 내 앞에 새로운 아메리카노를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다시 앉아 다리를 꼬고 턱을 괸다.


“근데 한방이 없어.”

“한방이요?”

“글세, 뭐랄까. 걔들 연애 소설에는 현실적인 충격이라는 게 없어.”


현실적인 충격.

그 말에 어째서인지 반박할 수가 없다.


“그럼 어떡해요.”

“연애를 해야지?”


말이 되는 소리를.


“그런 거 안 해도 쓸 수 있거든요? 스릴러도 잘 상상해서 쓰잖아요.”

“얘가 잘 모르나보네. 경험이 있어야 남에게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거야. 네 소설이 그래서 스릴러든 뭐든, 배경이 다 판타지인 거라고.”


그녀가 다짜고짜 내 노트북을 접는다. 화를 낼까했지만 그녀는 나에게 그런 여유도 주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스릴러도 상상해서 쓰면 뻔해. 범행이야 기발할지 몰라도 조사를 해야지, 조사를.”


뭔가 모든 것들이 얼떨결에 지나간다. 그녀가 노트북을 손수 내 가방에 넣어주고 심지어 일으켜서 문쪽으로 밀어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눈을 깜빡인다.

이 사람 지금. 날 놀리고 있다!


“자, 오늘은 밖에 나가서 연애를 하고 와라.”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발악해야 한다. 이거 발악해야 해!


“연애 성공하기 전까지 카페 출입 금지시킨다?”

“도대체 왜요! 사장님이 도대체 뭐길래!”

“사장님이 사장님이지, 뭐 별거 있니?”


내가 거의 울상에 가까운 표정을 지어보였지만, 택도 없다.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마. 네가 아까 말한 말에 나도 감동 받았으니까. 확실히 도와주려는 거야. 주사 같은 거지.”


그녀가 붙잡은 내 어깨에 주사를 넣는 시늉을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세게 등을 떠밀었다. 내 몸이 두 세 걸음 앞으로 밀려 문을 열고 반쯤 밖으로 나갔다.


“자, 가라. 김성운! 사랑을 찾아, 행복을 찾아!”

“그냥 놀리는 거잖아요!”


그 말에 그녀가 싱긋 하고 웃는다. 눈을 깜빡이고, 45도 기울다가 다시 반대로 45도가 기울어진다.


“내가 말했지? 새롭게 놀려준다고.”


이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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