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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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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선생
작품등록일 :
2023.01.24 20:43
최근연재일 :
2023.08.16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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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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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고 06

'나는 이것이 준비 없이 시작되었음을, 그러나 끝은 예정되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노라.' -3급 집행관 하희지의 비망록 中




DUMMY

“고맙다.”

흥진과 우하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무 늦진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죽은 후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될 때까지 시간이 많진 않을 테니. 내가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되면 지금 네 앞에 있는 주흥진의 몸은 사라질 거다. 일 년이고 십 년이고 내 시체를 붙잡고 연구할 시간은 없다는 말이다.”

흥진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퍼졌다. 우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끔찍한 취미는 없어요. 걱정 마요. 늦지 않을 테니.”

“됐다. 넌 서장을 준비하던 법관이 아니다. 이제 그만 돌아가라. 넌 아직 젊다. 돌아가서 너의 삶을 살아라.”

흥진은 오락가락 말을 바꾸며 점점 횡설수설했다. 우하는 흥진의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우하는 흥진에게 약속했다. 반드시 서장의 의식으로 그의 죽음을 송별해주겠노라고.

여씨가 다시 돌아왔을 때쯤엔 이미 흥진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산사면에 가려 바람을 막아주는 자리에서 눈치 없는 눈송이가 여유를 부리듯 하늘하늘 흥진의 몸에 내려앉았다. 우하가 여씨에게 물었다.

“서장터까진 아직 멀었나요?”

“걸어서 여섯 시간은 가야 한다.”

“서둘러야겠군요.”

우하가 흥진의 상체를 일으키려는 모습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여씨는 곧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씨는 한숨을 내쉬며 등에 걸고 있던 사냥총을 풀었다. 흥진을 안아올리기 위해 낑낑대는 우하를 부드럽게 밀친 여씨는 흥진을 가볍게 업었다. 머쓱해하는 우하를 향해 그가 무심하게 물었다.

“내가, 아니 우리가 헛고생을 한 게 아니라고 믿고 싶다.”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려던 우하가 곧 그의 뜻을 알아채곤 입을 다물었다.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흥진은 여씨에게 업힌 채로 거친 숨을 내뱉으며 아직 생존의 끈을 놓지 않고 있음을 간신히 증명하는 중이었다. 우하가 짐을 챙기며 혼잣말을 하듯 그에게 말했다.

“만중의 추천장 못봤어요? 난 하늘이 내린 재능입니다.”

마고를 업은 사냥꾼과 젊은 법관은 눈 덮인 산길을 빠른 걸음으로 나섰다.

한시도 쉬지 않고 일곱 시간을 걸은 끝에 세 사람은 여씨가 마련해 둔 서장터 근처의 원시림에 다다랐다. 이지산의 깊은 골에서도 한참을 걸어 들어가면 한여름의 대낮에도 햇빛을 찾아보기 힘든 빽빽한 원시림이 나타난다. 웬만큼 이지산의 지리에 밝은 이라도 찾기 힘든 산골짜기의 숲이었다.

“저기다. 저 동굴 안에 서장터가 있다.”

산기슭의 오른편을 거대한 지붕으로 삼으며 자생하는 원시림의 왼편엔 어울리지 않게도 꽤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었고 공터 뒤편으론 원시림의 왼쪽을 막고 있는 형세로 서 있는 육중한 바위 절벽이 셋을 맞이했다. 우하는 바위 절벽의 중간에 나 있는 커다란 구멍을 볼 수 있었다. 바로 흥진, 만중, 여씨가 준비해놓은 서장터였다.

“가요.”

다리가 주책맞게 후들거렸지만 우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놀라고 있었다. 일단 한겨울에도 옷이 흠뻑 젖을 만큼 땀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면서도 자신이 쉼 없이 일곱 시간의 산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도착한 건가.”

“그래. 고생 많았다, 흥진.”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놀라웠던 건 아직 흥진이 살아있다는 사실이었다. 펄펄 끓는 고열에 실핏줄이 터진 눈은 새빨갰고 혼자선 서 있기도 어려운 상태였지만, 그는 삶의 끈을 아직 놓지 않고 있었다. 서장터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엔 의식도 회복한 그는 힘겹긴 했지만 간간이 말을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여씨는 피로의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지만 그가 셋 중 가장 고생했을 것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그래도 세 사람은 서장터에 도달했기에, 움직일 수 있었다. 희망이 남아 있는 한, 움직임을 멈출 순 없었다. 셋은 자연굴 안에 발을 내디뎠다. 여름엔 서늘했을 자연굴의 공기는 한겨울이 다가오자 그들에게 따뜻한 온기로 다가왔다. 마치 남은 희망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우하가 서장을 해낼 수 있느냐의 여부완 관계없이 찾아오는 희망찬 기운이었다.

탕-!

이지산의 혹한이 만든 고통의 끝에서 간신히 찾은 희망은 한 발의 총성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안 돼!”

흥진을 업고 있던 여씨의 몸이 주춤하더니 옆으로 천천히 기울어졌다. 그에게 업혀 있던 흥진 역시 당연하게도 함께 허물어졌다. 우하가 여씨를 향해 달려가 그를 품에 안았다. 그의 오른쪽 가슴에 새빨간 핏자국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 여씨의 옆에 널브러진 흥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우하 역시 총을 쏜 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그러져 있던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 것은 한순간이었다.

“워, 원장님?”

총을 들고 있는 건, 대성황당 수련원의 원장, 법관 태욱이었다. 경악에 찬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는 건 우하뿐만이 아니라 원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이럴 수가. 설마 했거늘, 아니라고 믿었거늘! 희지야, 정녕 너는 만중과 함께 이단을 획책한 부역자였단 말이더냐!”

원장의 울부짖음엔 고통이 어려 있었다. 만중의 추천으로 들어왔다 해도 일 년간 스승으로 그녀를 훈육한 당사자는 원장 본인이었다. 게다가 열셋의 어린 소녀를 길러본 적이 없는 원장은 그녀를 딸자식과 같은 마음으로 대했다. 그녀를 오라사로 보낼 때 가장 마음이 쓰렸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을 준 이 어린 소녀가, 사실 이단자의 무리 속에서 촉망받던 이단의 마지막 남은 씨앗이었다니!

“만중의 이단 혐의를 벗기기 위해 노력했던 내 지난 세월이 사실은 그의 정당한 화형을 증명하기 위한 시간이었다는 것도 내게 참기 힘든 고통이었거늘, 게다가, 게다가! 우하 네가 그런 이단의 후계자였다는 끔찍한 진실까지···아, 진실은 고통이다!”

여씨가 쏟아내는 붉은 피가 우하의 옷을 적셨다. 흥진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마지막 남은 삶의 숨소리만을 내뱉고 있었다. 파국의 한가운데 얼어붙은 스물셋의 어린 법관은 자신이 비로소 미망에서 깨어났음을 느꼈다.

사실 그것은 일종의 위험한 장난이 아니었을까?

아무것도 없는 오라사에서, 권태에 지쳐가는 한 젊은 청년에게 위험한 장난은 유혹적이었다. 이단으로 화형당한 만중의 흔적을 쫓는 것, 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매력적인 일인가! 게다가 이 일이 자신의 길지 않은 인생을 규정지은 사람과 연관돼 있다는 사실은 이 일에 정당성마저 부여했다.

그런 차에 갑자기 등장한 여씨가 들려준 마고의 이야기, 인격을 바꿔가며 끝끝내 불멸하는 자에 대한 신비로운 이야기. 불멸하는 자가 추구하는 죽음의 의식에 내가 참여할 수 있다고? 신비와 위험의 결합이 이루어낸 미망. 미망 속을 헤엄치며 안도하던 한 청년의 행복한 익사.

심지어, 이단의 편에서도, 그녀의 진심은 그저 허세에 불과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서장의 의식은 기껏해야 시골 어촌 오라사의 예배당에서 확인할 수 있는 출처 불명의 정보들이었고 그마저도 여씨를 통해 들은 서장의 정보와 결합하여 간신히 완성된 잡지식 수준에 불과했다. 그녀가 서장에 대해 아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런데 그녀는 함부로 약속했다. 반드시 서장을 치러주겠노라고. 동전의 양면처럼 인간의 일생에서 삶 전체와 짝을 이루는 죽음이란 문제 앞에서, 누구보다 진지하게 생을 걸고 있는 자들 앞에서 그녀는 서장을 이루겠노라 약속했다.

하지만 허세로 이루어진 맹약은 천박한 신기루였고 지켜질 수가 없는 허망한 약속이었다.

‘천박한 것들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는 건 아닐까.’

여씨를 따라 겨울 이지산을 오르며 그녀가 의심했던 것, 천박하게 장난치고 있던 건 사실 그녀 자신이 아니었을까? 무섭게 파고드는 자기 비하의 감정에 빠져 있던 우하가 뭔가를 느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에 원장이 서 있었다. 손에 든 권총의 총구가 정확히 그녀의 이마를 겨냥하고 있었다. 우하는 원장의 얼굴에 깃든 슬픔을 보았다. 진정으로 그는 슬퍼하고 있었다.

“심판관의 권한을 위임받아 이단자 우하를 처단한다.”

고개를 숙인 우하가 문득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모로 누워 쓰러져 있는 흥진에게 향했다. 간신히 눈을 뜨고 있는 흥진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흥진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넌 아직 젊다. 돌아가서 너의 삶을 살아라.’

서장을 해달라는 부탁과, 서장을 포기하고 돌아가라는 부탁은 중첩되어 그녀에게 전해졌다. 아니, 그렇게 전해지는 것으로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두 부탁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였기에 하나의 선택이 필요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양립 불가능한 두 부탁에도 공통점은 있었다.

어쨌든 두 부탁 모두, 우하가 살아 있어야 가능한 것들이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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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15 23.07.31 19 1 12쪽
104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14 23.07.30 17 1 11쪽
103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13 23.07.28 15 1 9쪽
102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12 23.07.26 15 1 10쪽
101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11 23.07.24 15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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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9 23.07.21 18 1 11쪽
98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8 23.07.19 18 1 11쪽
97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7 23.07.17 18 1 10쪽
96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6 23.07.16 18 1 12쪽
95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5 23.07.14 19 1 10쪽
94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4 23.07.12 18 1 9쪽
93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3 23.07.10 20 1 10쪽
92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2 23.07.09 19 1 11쪽
91 영원의 바다에 던져진 닻 01 23.07.07 17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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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예언이 빗나가지 않는 이유 14 23.07.03 20 2 12쪽
88 예언이 빗나가지 않는 이유 13 23.07.02 21 2 11쪽
87 예언이 빗나가지 않는 이유 12 23.06.30 20 2 10쪽
86 예언이 빗나가지 않는 이유 11 23.06.28 24 2 10쪽
85 예언이 빗나가지 않는 이유 10 23.06.26 27 2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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