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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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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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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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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교주(2)

DUMMY

※※※



백연은 그저 멍하니 시선을 들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한치의 의심도 머리에 스치지 않는다. 보자마자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백연이 아는 그자 본인이라고.


“네 소식을 들었었다.”


무심히 내뱉는 목소리는 과거와 조금 달랐다. 끝도 없이 광활하게 세상을 덮어오던 메마른 음성은 이제 한낱 공동에 흐르는 차가운 바람마냥 가라앉을 뿐이었다. 속삭이듯 흩어지는 메마른 음성은 아직 단단했지만, 그럼에도 이전처럼 세상을 오시할 힘은 깃들어 있지 않았다.


허나 그 태도만큼은 여전했다.


“마지막에 이르러 하늘을 벤 검이 설산(雪山) 끝자락에 잠들었다 했지.”

“......”

“안타깝게 여겼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희미하군. 오늘로부터 일백하고도 열 다섯해 전의 이야기인가.”


무(武)가 극에 달하면, 수명이 늘어난다는 소리는 들어보았다. 일신의 무위가 하늘에 닿으면 천명을 거슬러 살아갈 수 있다고.


그리 드물지 않은 이야기이다. 강호 무림의 괴력난신들은 일백살은 훌쩍 넘게 살아가는 경우가 꽤 있으니. 때문에 다시 눈을 뜨고 백여년이 지난 것을 막 깨달은 백연은 생각했었다.


신교의 교주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여 복수를 노리기도 했었다. 허나 당대 천마신교를 이끌고 있는 교주라는 인물의 특징들은 그가 아는 신교의 교주와 일치하는 점이 한가지도 없었다. 외양이건, 나이건, 사용하는 무공이건.


그리하여 기억에서 지웠다.


아니, 묻어놓았다. 이제는 다시 마주할 수 있으리라 생각지 않았기에 마음 한구석에 밀어 치워버린 과거의 잔재.


깊은 상흔으로 남은 기억.


세상을 뒤덮은 괴이한 마기(魔氣)에 쓰러져 가던 녀석들의 얼굴을.


표정과 목소리를.


이름을.


쩌저저저정-!


뇌성(雷聲)이 터져나왔다. 희끄무레한 벼락이 내려앉은 어둠을 갈라내며 허공을 찢어발겼다. 찰나 분분히 튀어오르는 백광이 여휘의 검신 전체를 휘감으며 명멸했다.


이 순간.


“일백년이 지나고, 새로운 육신에 깃들었어도 똑같은 눈이다. 그 기백이 여전하구나.”

“닥쳐라.”

“그것이 네가 끝에 이르러 얻어낸 성취인가.”


그 자리에 소년은 없었다.


어느 순간 끌어당겨진 어둠이 등허리를 타고 장포처럼 흘러내린다. 귀기(鬼氣) 서린 두 눈동자가 흐릿하게 침잠하며 연푸른 불빛을 띄워올렸다.


검귀(劍鬼)가 여휘를 비스듬히 치켜든채로 교주를 응시했다. 어둠과 혈무(血霧)마저도 갈라내는 검격이 선연한 궤적을 그리며 허공에서 느릿하게 흔들렸다.


“이런 곳에서 살아 있었을 줄이야. 좀 더 열심히 찾아봤어야 했는데.”


까득.


씹어뱉듯 중얼거린 검귀의 턱이 비틀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툭 터져나온 선혈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켜켜이 쌓인 진기가 여휘의 검신 위에서 춤추며 휘몰아쳤다.


천린의 목에 검끝을 가져다 댄 검귀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길 말이 있나?”


천린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온다. 말 없이 검귀를 응시하는 새카만 흑안. 심연처럼 깊숙하게 가라앉는 그 두 눈에는 공포도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세월 속에 묵빛으로 침잠해 더 이상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만 같은 느낌.


과거에도 이러했던가.


‘아니.’


크게 다르지는 않다. 허나 그때는 살아있었다.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 거침없이 나아가던 신교주. 끊임없이 흑색으로 타오르던 암혼제의 눈은 이제 세월 속에 침잠해 멈춰 있었다. 검귀 자신과는 달랐다. 그에게는 고작 몇 해 전의 일이지만, 교주에게는 온전히 일백여년이 넘는 세월 전의 이야기였으니까.


그리고 그도 그것을 인지한 것일까.


“네겐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일이군.”


뒤늦게 깨달은지 내뱉는다. 담담히 사실을 나열하는 듯한 음성.


“그 살아있음이 기껍다.”


마치 자신은 이미 죽었다는 듯한 어조기도 했다. 동시에 검귀는 그것이 지극히 진실임을 깨달았다.


저 흑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빛바랜 과거.


몇차례 검귀와 대면했었던 그 순간을, 기억속에 박힌 잔향처럼 불러와 이 자리에서 겹쳐보고 있다.


그 순간, 참을 수 없이 속이 뒤집히는 듯한 감각이 일었고-


쩌적. 콰과과과과과과광!


여휘가 휘둘러졌다. 한순간 어둠이 희게 물들며 시야가 백색으로 명멸했다. 혈라무옥의 아래에서 뇌기를 휘감은 검격이 한없이 단단한 공동의 강철 바닥마저 갈라내며 깊은 상흔을 새겼다.


어떤 것이라도 베어낼 수 있는 일검.


허나, 그 검로(劍路) 위에 천린의 목은 없었다.


검격이 스치고 메아리치는 뇌성이 잦아들때쯤, 사내의 목덜미 아래로는 잘려나간 흑발 몇가닥만이 느릿하게 나풀거리며 떨어질 뿐.


“하아, 하아.”


검귀가 거친 숨을 뱉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럼에도 천린은 여전히 똑같은 시선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툭 내뱉는다.


“과거, 너를 손에 쥐고 싶었던 이유가 이제 기억났다. 그 검(劍)을 쥐면 천하를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지.”

“......”

“목적은 헛되었으나......그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검귀가 입매를 비틀었다. 느릿하게 숨을 가다듬은 그의 입에서 흐릿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한자루 검으로 천하를 얻으려 했다? 오만의 극치로군.”

“단지 한자루 검이 아니다. 국사무쌍(國士無雙)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전신(戰神)이지.”

“......”

“대전(大戰)의 전황이 수십차례 바뀌었었다. 너와, 너를 따르던 이들의 힘으로 인해 정도 무림이 몇번이나 살아남았는지 너 스스로도 잘 모르고 있을터.”


검귀는 교주를 내려다보았다. 허나 교주의 표정에는 여전히 한치 변화가 없었다. 그저 오래된 기억을 회고하는 듯한 어투.


우득.


여휘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어느새 검파를 타고는 옅은 핏물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천린의 목을 치고 싶은 심정이 넘실거리며 그의 마음을 뒤흔든다.


허나.


“그 눈.”


침잠해버린 교주의 눈을 응시한 검귀가 이를 드러내었다.


“암혼제 천린은 어디간거지? 세상을 불태우려던 광인(狂人)이 그리 쉽게 사라질리가 없다.”


지금 이 순간.


교주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적어도 그가 아는 교주는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저 목을 베어도 그것은 복수라 할 수 없다.


“너는 마땅히 정점에 서서 세상을 오시하고 있어야 한다. 왜 이곳에서 그런 눈으로......!”


이래서는 안된다. 껍질을 베어버린다고 그의 목을 취했다 할 수 없었다. 검귀는 진심으로 천린을 죽이고자 했으나, 이곳에 그가 죽여야 할 천린은 남아있지 않았다.


떠난 이들의 복수를 하고자 했다. 허나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베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잠시간 이를 악문 검귀가 여휘를 살풋 들어올렸고.


서걱.


여휘의 날이 강철로 된 바닥을 한뼘 넘게 가르고 들어가 박혔다. 땅에 검을 박아버린 검귀가 교주를 응시했다.


그때까지도 교주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해라.”


검귀가 핏물을 퉤 뱉어내곤 말했다.


“네가 왜 이곳에 처박혔는지, 내가 아는 천린은 어디갔는지.”


그의 말에 처음으로 교주의 얼굴에 흐릿한 표정 비슷한 것이 떠올랐고.


“좋다.”


그가, 입을 열었다.



※※※



“교에 한 아이가 들어왔었다. 교도를 키워내는 곳에서도 유달리 특출난 성취를 보이는 아이였지. 모든 일에 빨랐고, 모든 일에 압도적인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천하에 둘도 없을 기재.”


무감한 어투가 흐른다. 빛바랜 책장을 넘기듯 낡은 어조에서 과거의 이야기가 묻어나온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어조는 사람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숨결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그야말로 사실같다 느껴질 정도로 뚜렷한 환상.


그가 의도하지 않음에도 사람의 귓가에 스며드는 속삭임이다. 암혼제의 목소리는 백여년의 세월을 건너서도 똑같은 위협을 지니고 있었다.


보인다.


거대한 신교의 본단 기둥 아래, 작은 보폭으로 돌바닥을 가로지르는 한 소년의 뒷모습이.


“무재(武才)가 아니었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그 아이는, 점차로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교에 내려오는 신공들을 탐독하면 며칠 가지 않아 스스로의 것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새로운 것으로 발전을 시켰다. 교의 교리와 구조에도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며 새로운 해결책을 내어놓았다. 전략과 술법, 보급과 통제, 누군가는 그를 보고 혜안(慧眼)을 타고난 소년이라고 하더군.”

“......”

“허나 그 아이는 모든 재능을 대가로, 어떤 것에도 흥미를 가지지 못했다. 감정 없는 목각 인형을 보는 것 같았으나......어느 순간부터 유일하게 흥미를 가진 것이 생겼다.”


환상 속의 아이가 점차로 커진다. 어느 순간 검귀와 비슷한 눈높이가 된 아이. 소년에 이른 그가 한 서고 앞에서 멈춰선다. 집어드는 책의 제목은.


“그것이 바로 천마(天魔)였지.”

“교의 교리에 충실했군.”

“지나치게 충실했다.”


천린이 담담하게 말했다.


“본디 교는 천마를 위해 살아가는 집단이 아니다. 교의 목적이자, 본 교주의 목적은 중원 무림을 발밑에 두는 것이었다. 천마라는 인물은 교의 교리로써 숭상되어야 하겠으나, 결코 그를 부활시키는 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으니.”

“......놈은 아니었다는 소리인가.”

“그는 집착했다.”


천마에 관련된 교의 서적을 탐독한다. 그의 발자취를 좇고, 그의 삶을 파헤친다. 무공부터 그가 살아가던 장소들까지. 무림을 누비는 소년은 점차로 커져 청년이 되었고, 이미 그때즈음 천마는 그의 유일한 집착이자 동경이며 모든 것이 되어있었다.


“어린 아이군.”

“힘을 쥔 아이지.”


맹목적으로 천마를 좇는다. 그 과정에 무엇이 있건 간에. 그리고 그것을 천린이 깨달았을 때쯤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어느 순간 아이는 교의 반절 이상을 집어삼켰다. 교의 교리를 재정립하고, 새로이 태어나 천마를 부활시키겠다고 선언하며 반기를 든 것이지. 그리하여 그와 맞붙었고.”


암혼제 천린은 패배했다. 그렇게 신교는 천마신교가 되었다.


“그가 이 육신을 살려놓고자 했기에 살아남았다. 허나 그건 그가 자비로워서가 아니다. 혈교주와의 거래를 통해 천마 본인을 재현하기 위한 재료로써 삼고자 함이었지.”


천하에 몇 없을 강대한 초월자였던 암혼제. 그 육신에 깃든 힘이 얼마나 드높을 것인가. 그것을 이용한다면 이적(異蹟)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하다.


그 말에 검귀가 느릿하게 반문했다.


“마교주는 그렇게 무얼 얻었지?”

“육신.”

“육신......?”

“그 아이 본인의 자질과 육신. 그리고 이 육신을 재료로 사용하고 그가 얻어낸 천마의 조각들을 합쳐 그는 스스로의 몸을 새로이 엮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렇게 얻어낸 것이 현재 교주의 몸.”


암혼제가 툭 뱉었다.


“천마의 육신이다.”

“......”

“그것이 그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줬는지는 모른다. 허나 그 아이의 목적은 이미 강해지는 것에 있는게 아니다. 스스로에게 천마의 실제 영혼을 강림시켜 온전한 합일(合一)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지.”


그야말로 광기가 엿보이는 집착.


“말 그대로 미쳐버린 광신도가 아니겠나.”


허공에 옅은 침묵이 잠시 내려앉는다.


이윽고 검귀가 헛웃음을 흘렸다.


툭, 투두둑.


빗방울이 떨어지듯 맑은 웃음소리가 점차로 커지며 울렸다.


“웃기는군. 천하를 상대로 전쟁을 걸던 신교의 일원들은 암혼제 네놈을 향해서 미쳐버린 광신도들이었는데. 그보다 더 높은것을 숭상하는 광신도에게 배신당해 여기에 처박혔군. 우스운 일이야. 그 기분이 어떻지?”


허나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천린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네 말이 맞다. 우스운 일이지.”

“......”

“하지만 그것은 이쪽의 과거일 뿐. 나는 이미 실패해 스러진 잔재에 불과하다. 허나 너는 어떻지?”


찰나였다.


“......!”


천린의 눈이 빛을 내었다. 한순간 압도적인 존재감이 후욱 내려앉으며 흑색 눈동자가 검귀를 꿰뚫어보듯 번뜩인다. 그 속에서 검귀는 찰나 일백년 전의 암혼제를 엿보았고.


“가짜 육신에 깃들어 허상을 지키고자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어느 순간 몸을 반쯤 일으킨 천린이 검귀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한없이 깊은 무저갱(無底坑)같은 흑안이 일렁였다.


“네 질문에 답해주었으니 하나 묻겠다.”


새카만 눈동자에 스스로의 모습이 비쳤다. 마치 그 속으로 빨려들 것 같은 감각 속에서 천린의 음성이 더없이 선명하게 귀에 틀어박혔다.


“지금의 너는......무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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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 빼앗긴 것(2) +6 24.07.10 1,511 46 13쪽
307 빼앗긴 것 +5 24.07.09 1,565 45 13쪽
306 화림(和林)(3) +4 24.07.08 1,512 41 13쪽
305 화림(和林)(2) +7 24.07.06 1,610 50 13쪽
304 화림(和林) +5 24.07.05 1,535 43 13쪽
303 광승(2) +6 24.07.03 1,635 52 18쪽
302 광승 +6 24.07.02 1,503 44 14쪽
301 회합(2) +5 24.07.01 1,562 43 16쪽
300 회합 +13 24.06.29 1,683 53 16쪽
299 경음성주(4) +4 24.06.28 1,523 46 14쪽
298 경음성주(3) +5 24.06.27 1,592 44 13쪽
297 경음성주(2) +5 24.06.26 1,687 48 15쪽
296 경음성주 +6 24.06.25 1,719 46 14쪽
295 북새풍(3) +8 24.06.24 1,650 49 13쪽
294 북새풍(2) +7 24.06.22 1,800 50 12쪽
293 북새풍 +6 24.06.21 1,764 5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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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일보(一步)(5) +7 24.06.19 1,686 43 19쪽
290 일보(一步)(4) +7 24.06.18 1,718 48 13쪽
289 일보(一步)(3) +6 24.06.17 1,726 49 17쪽
288 일보(一步)(2) +7 24.06.15 1,814 52 15쪽
287 일보(一步) +5 24.06.14 1,793 46 14쪽
286 교주(3) +5 24.06.13 1,805 44 17쪽
» 교주(2) +5 24.06.12 1,729 47 13쪽
284 교주 +8 24.06.11 1,741 48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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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혈귀궁(2) +4 24.06.08 1,813 51 14쪽
281 혈귀궁 +4 24.06.07 1,903 53 17쪽
280 기련산(3) +2 24.06.06 1,893 5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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