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새글

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22 18:10
연재수 :
294 회
조회수 :
1,527,229
추천수 :
30,534
글자수 :
2,242,906

작성
23.10.11 18:11
조회
4,710
추천
91
글자
18쪽

태청신공(太淸神功)(4)

DUMMY

※※※



“음?”


문득 화천귀제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글거리는 그의 시선이 서북쪽 하늘을 향했다.


“저건.”


일전보다 한층 탁해진 음성에 살풋 놀라움이 스쳤다. 직전 멀리서 느껴진 기파, 그리고 지금 서북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는 검푸른 화염.


우호법 화천귀제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청화단주가 마지막까지 숨겨놓는 비의이자 그의 절초인 마화.


“하오문의 쥐새끼가 저것을 꺼내게 만들 정도였나.”


화천귀제가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교의 정보대로라면, 무영방 방주 대리의 무공 성취는 아직 청화단주에 미치지 못할 터. 그가 익힌 무공이 절세 신공인 월영신공이라 해도 그랬다.


무서운 기세로 성취를 쌓아나가는 괴물이니 몇년 뒤라면 모르겠으나, 당장은 화천귀제 자신의 제자가 위일 것인데.


“......말했잖습니까. 당신은 모르는 것이 많다고.”


그의 뒤에서 지친 목소리가 울렸다. 나직히 깔린 음성에 화천귀제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아래.


붉게 물들어 녹아내린 대지가 있었다. 한계까지 달아오른 열기가 사방을 짓이기며 대기를 불태운다. 열에 달궈진 바위들이 붉다못해 희게 물들어 밤을 밝히고 있었다.


작열하는 열기에 대기가 일렁인다. 간간히 흩날리는 바람결에 실린 것은 재와 불티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발을 들이는 즉시 온몸에 열상을 입고 세 발자국도 떼기 전에 쓰러져 죽을만한 환경.


불문에 묘사되는 팔열지옥(八熱地獄)이 현세에 강림하면 이런 모습일 듯 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화천귀제를 제외하고도 멀쩡히 살아 숨쉬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반쯤 부서진 가면 사이로 일렁이는 하늘빛 눈동자. 부서지고 찢어진 장포를 걸친채로 한쪽 무릎을 꿇고 검에 기대어 서 있다.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한줄기 핏물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입은 살았군, 검성.”


화천귀제가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올렸다.


본디 이검으로 싸우던 풍백. 그의 손에 남아 있는 것은 검 한자루 뿐이었다.


“실력은 녹슬었고.”


잘려나갔던 화천귀제의 왼손. 텅 비어있어야 할 자리에 화염으로 이루어진 기파가 뭉쳐 휘돈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손의 형상은 예리한 검날을 쥐고 있었다.


이를 드러낸 화천귀제가 불꽃으로 이루어진 왼손을 쥐는 순간.


그그극.


짤막한 소리와 함께 검날이 뭉게져 부서졌다. 박살난 검을 한번 슬쩍 쳐다본 화천귀제가 감흥없는 손짓으로 검을 옆에 던져버렸다.


“나름, 귀한 물건이었는데.”


중얼거리는 풍백의 호흡이 거칠었다.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열기가 더없이 강렬했다.


화천귀제와 싸우기를 몇 시진. 수많은 공방을 거친 끝에 이 자리에 몰렸다. 좋지 못한 상성을 상대로 꽤나 분전했지만 그것도 점차 힘에 부쳤다.


그 증거로 일전의 교전에서 풍백은 검 한자루를 빼앗기고 파괴당하고 말았다.


“이검의 검객이라는 말이 무안해지는군요.”

“헌데 이상하군. 네놈의 전력이 이것이 전부가 아닐텐데.”


저벅.


천천히 다가오는 화천귀제의 걸음에 불꽃이 재차 피어올랐다. 사방에 펼쳐진 염혈신공의 권역이 발 디디고 서있을 대지를 녹이고 숨쉴 공기마저 불태운다.


“만일 숨겨놓은 것을 보여줄 생각이 없다면.”


후우욱.


화천귀제가 여상히 손을 들어올리는 순간, 주변의 대기가 일거에 소멸되었다. 한순간 호흡할 공기조차 앗아가는 거대한 열기. 풍백의 호흡마저 틀어막히게 만드는 힘이었다.


동시에 화천귀제의 머리 위에서 더없이 붉은 화염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죽어라.]


쿠과과과과!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화염의 파도가 머리 위를 뒤덮는다. 일순 다시 낮이 찾아온 듯 느껴지게 만드는 압도적인 불꽃의 향연. 사방을 수놓는 붉은 파도 앞에서 풍백은 문득 고개를 들어올렸다.


무언가를 느낀 듯이.


“이건.”


풍백이 중얼거리며 서북쪽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이었다.


찰나.


시야에 들어온 검푸른 화염을 따라 그어지는 새하얀 백광이 눈에 들어왔다. 암야의 창공을 선명하게 가르는 시린 빛줄기.


지상에서부터 솟구치는 뇌광이 모순되는 광경을 자아낸다. 한순간 굽이치는 뇌전의 줄기에서 풍백이 본 것은 승천하는 용의 형상이었다.


눈에 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를 향해 내치던 백광의 검격. 그것을 소년이 손에 쥐었다는 사실을.


“......무모하기 짝이 없군요.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옅은 웃음과 함께 풍백이 몸을 돌렸다. 쪼개진 찰나 속에서였다. 백광이 검푸른 화염을 잘라내는 것에 성공했는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풍백 자신조차도 한 걸음을 회피하게 만든 검격이다. 청화단주 정도의 애송이가 받아낼 수 있을리 없었다.


그러니.


“뭐라도 가르쳐 줄려면, 저도 우선은 살아나가야겠지요.”

[저것이 용인가. 네가 언급한.]


한껏 늘어난 시간 속에서 화천귀제의 육합전성이 풍백의 귀를 파고들었다. 화염을 치켜든채 한순간 솟아오른 백광을 응시하는 모습. 그의 눈에서 번뜩이는 탐욕을 읽은 풍백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당신이 만날 사람이 아닙니다.”

[저건 위험하군. 빠져나가게 두면 안되겠어.]

“걱정 마시지요. 당신은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할테니.”


풍백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동시에 그가 걸음을 내딛었다. 일보에 끌어올린 기파가 휘몰아쳤다. 한순간 그의 발치에서부터 풀려나온 바람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염혈신공의 권역을 풀어헤쳤다.


왼손에는 한 자루 남은 검을 쥔 자세 그대로, 풍백이 오른손을 펼쳤다.


[검 한자루를 잃고 나를 상대하겠다고? 오만한 놈.]

“본래 여기서 보여주면 곤란해지지만.”


피이이잇-


맑은 소리가 피어올랐다. 언뜻 산새의 지저귐 같은 가늘고 높은 음률. 동시에 풍백의 손아귀를 따라 흐릿한 기파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동청(東靑), 남주(南朱), 서백(西白), 북현(北玄).]


육합전성과 함께 어느새 풀려나온 강대한 기파. 여태껏 가둬놓고 있었던 듯이 뿜어져 나오는 바람이 귀청을 찢으며 휘몰아쳤다. 풀려나온 광풍이 풍백의 걸음을 따라 사방을 질주한다.


[무형(無形). 섬풍(閃風).]


키잉.


풍백이 걸음을 내딛는 순간, 화천귀제가 눈을 부릅떴다. 휘몰아치던 화염을 그대로 내리치며 화천귀제가 손을 펼쳤다. 동시에 그의 몸을 타고 막대한 발경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화천귀제가 내리친 작열하는 화염이 시야를 가린것도 한순간. 그가 주먹을 내뻗는 것과 동시에 화염의 파도가 사선으로 갈라졌다.


그 너머, 바람을 두른 풍백이 화염을 풀어헤치며 전진했다. 왼손에는 한자루 남은 검을, 오른손에는 흐릿한 바람의 잔영을 든 채였다.


마치 대기를 그대로 압축해 구겨넣은 듯한 흐릿한 검의 형상. 육안으로 인지하기조차 어려운 바람의 검을 본 화천귀제가 이를 드러냈다.


[역시 끝이 아니었군. 그래. 오라!]


육합전성으로 외치는 것과 함께였다. 화천귀제의 출수는 덩치와 상반되게 더없이 쾌속했다. 풍백의 검격을 응시하며 주먹을 모은 그가 그대로 걸음을 비틀었다.


[초열(焦熱).]


나직이 읊조리는 것과 동시에 대기가 훅 달아오르고, 다음 순간.


콰아아아아!


일대를 뒤덮는 거대한 불꽃의 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



한순간 허공에 풀려나온 백연의 신형. 검끝이 무언가를 가르는 감각이 스치고, 이윽고 암청색 불꽃이 반으로 갈라졌다.


뇌광을 두른채였다. 그조차도 다루기 어려운 쾌속의 보법. 일보(一步)에 뛰어오른 거리가 상당했다. 한순간 다시 착지해야 하는 상황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너무 높은데.’


문득 스친 생각이었다. 저 아래 지면이 턱없이 멀어보였다. 그대로 내려앉다가 다리가 부러질 법했다.


그러나 이미 생각 이전에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뇌광을 휘감은채로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백연이 그대로 낙하했다. 무섭게 땅이 가까워지는 순간.


“백연!”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틀어박히고, 한 인영이 낙하하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찰나 뛰어오른 인영과 그가 허공에서 마주치는 순간, 묵직한 충격이 옆구리를 휘감았다.


“으악!”


짧은 비명과 함께 뒤엉킨 두 인영이 그대로 전각의 이층 벽을 뚫고 들어갔다. 몇바퀴 구른 후에야 멈춰선 백연이 기침을 내뱉었다.


“쿨럭......으. 사형?”

“......아파.”


부서진 전각의 이층 방 안. 바닥에 드러누운 소홍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백연이 떨어지는 순간을 맞춰서 뛰어올라 받아내긴 했는데, 쉽지 않았다. 내공을 끌어올렸음에도 팔이 부러질 뻔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백연이 쓴웃음을 흘렸다.


“흑랑이랑 먼저 움직였을 줄 알았는데.”

“내가, 사형이야.”

“고맙네.”

“기다리기라도 해야지.”


중얼거리던 소홍이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놈은?”


문득 생각났는지 황급히 전각의 창가로 달려가는 모습. 그에 백연이 천천히 어깨를 으쓱였다.


“처리했어.”

“......확실해?”

“응.”


그의 검이 청화단주를 갈랐다. 간극 속에서 마기를 두른 불꽃과 함께 반으로 갈라진 그의 형상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도 살아남는 것은 불가했다. 그가 알지 못하는 마교의 술법이 있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설령 그렇다 해도 당장 전투를 재개하는 것은 불가능할 터.


“운이 좋았지만.”


강적이었다. 전투를 오래 끌었으면 승부의 양상은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화를 꺼낸 순간부터 지극히 위험했다.


승패는 놈이 속도로 승부를 보려 한 것에서 갈렸다. 염혈신공이 지닌 전장을 장악하는 힘은 지금의 백연보다 몇수는 위. 마화를 일으킨 시점에서 그에게 간합을 내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청화단주는 자신의 힘에 취해 거리를 주었고, 태청신공을 일으킨 백연에게 속도로 승부를 걸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룬 것이다.


모든것은 한순간에 결정된다. 찰나를 수없이 쪼개 살아갈 수 있는 무림인들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당장은 청화단주를 처리했으니......”

“백연, 저거.”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던 백연이 소홍의 말이 들리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의 기감 저편. 무언가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소홍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의 사형 또한 말없이 한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그의 시야 저편, 어두워야 할 밤이 대낮처럼 환히 밝아져 있었다. 산맥으로 반쯤 가려진 위치.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이어진 거대한 화염의 기둥이 창공을 받치고 서 있는 양 그 위용을 흩뿌렸다.


잠깐 쳐다보는 것 만으로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듯한 열기.


“염혈신공이야. 저건 아마 우호법인가.”

“......도망가야?”


소홍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악!


한순간 시야에 선이 그어졌다. 화염의 기둥을 문자 그대로 반으로 갈라내는 한줄기의 선. 세로로 죽 갈라진 불꽃이 반듯하게 나뉘었다.


직후.


후우우웅!


휘몰아치는 바람이 들이닥쳤다. 사방 거리를 맹렬히 휩쓸고 지나치는 바람결. 머리칼을 마구 흩어내고 가는 바람을 느끼며 백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괜찮아.”

“검성.”

“풍백께서 시간을 벌어주고 계셔. 지금 당장 나가야겠다.”


두 소년이 서로를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각의 창가를 가볍게 타 넘은 둘이 그대로 바닥에 착지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부서지고 뒤틀린 도시를 뒤로 한 채.


타다다닥.


두쌍의 발걸음 소리만이 주변을 울렸다.


이윽고 불꽃이 밝혔던 하늘이 다시 어두워지자 소홍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원래, 나랑 비슷했는데.”

“뭐가......아, 키?”

“너무 커졌어.”

“아하하핫.”


소홍의 말에 백연이 웃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심상에서 얻어낸 구결. 태청신공을 익히면서 그 반동을 받아내기 위해 억지로 환골탈태에 다다랐다. 본래 그의 현재 경지라면 불가능할 기적.


그러나 여러 우연이 겹쳐 그는 성공했고, 외형도 일전과는 달라졌다. 아직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확실하게 달라진 것은 소홍과의 눈높이.


본래 자신과 비슷했던 사형의 눈높이가 이제는 아래에 있었다. 그것이 못내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좁힌 소홍이었다.


심상에서 벗어나 눈을 뜨자마자 나온 그를 맞이한 사람이 소홍이었는데, 그 표정이 꽤나 볼만했었다. 즐거운 기억을 머리속에 새긴 백연이 옆을 돌아보았다.


“사형, 이리 와.”

“......싫은데.”

“부상당했잖아. 지금은 빨리 빠져나가는게 우선이니까. 그리고 상처도 덧나면 안되고.”


소홍이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윽고 걸음을 멈춰선 소홍이 얌전히 백연에게 다가왔다.


사형을 가볍게 업어든 백연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꽉 잡아.”

“걱정마.”


소홍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태청신공의 뇌기가 하단전을 타고 질주했다. 일전과 비해도 더없이 쾌속한 공력 수발 속도. 이윽고 다리를 타고 진기가 켜켜이 중첩된다.


화신풍 구결을 뒤틀어 다시 엮었다. 새로운 보법이었다. 주변의 기파를 풀어헤치고, 사방 간합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쾌속의 보법.


쿠웅.


백연이 걸음을 내딛는 순간, 주변의 풍경이 흐릿하게 바뀌었다. 찰나 길쭉하게 늘어나는 사방의 모습. 그러나 그들을 향해 격렬하게 들이닥치는 바람은 없었다.


보법의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뒤, 스쳐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소홍이 물어왔다. 목덜미에 닿는 호흡이 따뜻했다.


“무공, 이름이 뭐야?”

“태청신공.”

“보법은?”

“......음.”


백연이 말끝을 흐렸다. 그에 이윽고 소홍이 다시 입을 여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없으면, 내가 지을래.”

“그래.”


백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나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미리 생각해놓고 있었던 듯 망설임 없는 대답이었다.


“용형보(龍形步).”

“그거......”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그가 직전 청화단주를 상대하며 보법을 다시 엮어낼때 하던 생각. 하늘을 마음껏 거니는 영물의 형상. 소홍이 어찌 알고 내뱉었는지 모르겠지만,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마음에 드네.”


곤륜의 새로운 걸음이었다.



※※※



“저기 오는구려.”


지붕위에 올라서 있던 팔영이 읊조렸다. 노인의 흑포를 따라 배어나오는 핏물이 진했는데, 한치도 내색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루주가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흑랑.”

“음.”

“......괜찮나요?”


백연이 말한대로 안쪽으로 향하고 있던 일행이었다. 소홍을 제외한 모두가 있었는데, 각각 크고작은 부상들을 달고 있었다. 바닥에 흩어진 핏물이 한두방울이 아니었다.


하지만 개중 단연코 가장 크게 다친 이는 한명이었다.


“아니.”


흑랑이 미간을 좁혔다. 그의 앞에 반듯이 누워있는 흑포의 무인. 화산의 검룡이 창백한 얼굴로 가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악질적인 수법이군. 청화단주의 무공이 본래 그러하다지만.......”


흑랑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냉막한 시선이 유성의 몸을 살폈다.


온몸에 가득한 열상. 흑랑이 전에 입었던 것과 똑같은 부상이다. 그러나 더 문제가 심했다.


자하신공을 일으켜 한시진 넘게 싸운 유성. 자신보다 강적을 상대로 검을 내쳤다. 공격 일변도인 검격으로 적의 공격을 흘리지 못하고 계속 맞부딪혔는데, 청화단주의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으로 인해 몸에 쌓인 기파가 상당했다.


“빨리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않으면요?”


목소리와 함께 뒤늦게 기파가 몰아쳤다. 찰나 흑랑이 움찔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 한순간 간격을 뛰어넘은 듯이 사람들 사이에 뛰어든 인영이 걸음을 멈춰섰다.


후우우욱!


직후 보법의 여파로 인한 바람이 몰아쳤다. 부채를 펄력여 바람을 흩어낸 루주가 외쳤다.


“공자!”

“루주.”


힐끔 루주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백연이 눈앞으로 시선을 던졌다. 등에 업고 있던 소홍을 조심스레 내려 놓으면서였다.


그에 흑랑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죽는다.”

“......내가중수법입니까?”

“당장은 그게 제일 문제지. 어깨를 관통한 부상도 작지 않다. 근맥을 깊이 끊어냈어.”


흑랑의 말에 백연이 입술을 베어물었다.


“시간은 얼마나 있습니까.”

“그건......”

“노부의 소견으로는 한시진 정도요. 그 시간이 넘어가면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은 있으나 회복해도 몸 상태가 이전과 같기 힘들것으로 보이오.”


어느새 내려온 팔영이 답했다. 그에 백연이 눈을 감았다.


한시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당장 이곳에서 빠져나가 가장 가까운 마을로 간다 해도 반나절이다.


‘반드시 살린다.’


다른 선택지는 뇌리에 없었다. 이곳을 빠져나가 필요한 조치를 취할때까지. 어떻게든 유성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야 했다.


이윽고 백연이 눈을 떴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흑랑부터 루주와 팔영, 그리고 사형들까지.


그 사이에서 백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팔영, 혹시 지니고 있는 독약이 있습니까?”

“......있소. 헌데 어떻게 알았소?”

“암검들은 보통 적에게 잡힐때를 대비해 극독을 지니고 다니는 것으로 압니다. 그걸 주십시오.”


팔영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낸 그가 백연에게 그것을 건네었다.


“무슨 생각인가요, 공자? 그 독약은 어디에 쓰려고......”


루주가 걱정섞인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에 백연이 숨을 가다듬었다.


“이걸 검룡에게 먹일겁니다.”

“그 무슨?”


루주가 당황한 목소리를 내는 순간, 옆에서 누군가 입을 열었다.


“......사제, 가사(假死)를 생각하는거야?”


소홍의 말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중수법은 본래 상대의 체내에 자신의 기파를 쌓아 균형을 흐트러뜨리는 기예. 몸을 안에서부터 파괴하는 것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혈맥을 따라 내가중수법으로 쌓은 기파가 돌아야 하는데.”

“......독약으로 가사 상태를 만들면 그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겠군. 혈맥의 흐름이 거의 멈출테니.”

“맞습니다.”


백연이 담담히 답했다.


“지금부터, 검룡은 잠시 죽을겁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곤륜환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8 영물(4) +6 23.11.15 3,663 91 15쪽
117 영물(3) +7 23.11.13 3,695 86 15쪽
116 영물(2) +7 23.11.10 3,852 86 18쪽
115 영물 +7 23.11.08 3,983 85 15쪽
114 네가 돌아올 곳(11) +5 23.11.06 3,879 89 17쪽
113 네가 돌아올 곳(10) +5 23.11.03 4,007 92 19쪽
112 네가 돌아올 곳(9) +7 23.11.01 3,961 83 20쪽
111 네가 돌아올 곳(8) +6 23.10.30 4,074 83 17쪽
110 네가 돌아올 곳(7) +7 23.10.27 4,191 81 20쪽
109 네가 돌아올 곳(6) +6 23.10.25 4,287 81 17쪽
108 네가 돌아올 곳(5) +7 23.10.23 4,364 87 16쪽
107 네가 돌아올 곳(4) +7 23.10.20 4,460 88 19쪽
106 네가 돌아올 곳(3) +9 23.10.18 4,430 91 20쪽
105 네가 돌아올 곳(2) +8 23.10.16 4,515 92 20쪽
104 네가 돌아올 곳 +6 23.10.13 4,659 93 16쪽
» 태청신공(太淸神功)(4) +8 23.10.11 4,711 91 18쪽
102 태청신공(太淸神功)(3) +8 23.10.09 4,532 100 16쪽
101 태청신공(太淸神功)(2) +8 23.10.06 4,610 107 16쪽
100 태청신공(太淸神功) +12 23.10.04 4,985 107 25쪽
99 네가 만든 마을(9) +7 23.10.02 4,659 101 24쪽
98 네가 만든 마을(8) +7 23.09.29 4,625 106 21쪽
97 네가 만든 마을(7) +7 23.09.27 4,625 99 20쪽
96 네가 만든 마을(6) +10 23.09.25 4,691 105 22쪽
95 네가 만든 마을(5) +8 23.09.22 4,791 98 19쪽
94 네가 만든 마을(4) +8 23.09.20 4,758 98 20쪽
93 네가 만든 마을(3) +7 23.09.18 4,980 97 24쪽
92 네가 만든 마을(2) +5 23.09.15 5,098 105 24쪽
91 네가 만든 마을 +5 23.09.13 5,337 100 18쪽
90 신강(4) +6 23.09.11 5,532 107 23쪽
89 신강(3) +7 23.09.08 5,522 106 2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