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당할 수 있겠는지
“라면 하난 잘 끓입니다.”
노숙자 같은 피시방 사장이 뭘 잘하느냐고 물었을 때 거진이 한 대답이었다.
“피방 알바의 3대 임무를 읊어보아라.”
사장은 야겜중이었고, 모니터 속 헐벗은 여캐에게 두 눈을 고정한 채 거진의 얼굴은 쳐다도 안 보고 면접이란 걸 진행했다.
“군대 가기 전에 잠깐 하는 거라서요.”
“이 놈, 방자하게도 면접 보러 온 주제에 간절함이 없구나?”
헐?
첨 보는 사람한테 새끼? 뭐 간절함?
말투는 또 왜 이러는 건데?
조선시대서 차원이동이라도 했냐?
사실, 거진은 피시방 알바할 맘이 1도 없었다.
집에서 빈둥대던 거진에게 '일 안 하는 새낀 밥 처먹을 자격도 없다'며 갑자기 밥벌이를 자체 해결하라는 아버지의 지엄한 분부가 떨어졌다.
그러나 22년 인생을 캥거루족으로,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고 싶은 거진은 신성한 국방의무를 코앞에 둔 마당에 취직이 웬 말이냐며, 이 핑계 저 핑계로 뺀질대기만 했다.
"니 인생이라고 니 맘대로 할 거면 이참에 부자지간도 끊어버려!"
거진은 억울했다.
학교 때려치운 거랑 부자지간 파괴는 비교대상이 아니잖나?
초등학교 이후 남중 남고 때는 좀 덜했는데,
대학교 입학한 뒤 거진은 수많은 여난을 겪으며 참고 또 참았다.
그런데 4학년에 올라와서 거의 여난의 종지부라 할 만한 두 번의 사건이 있었다.
한 명은 여자 후배였고 또 한 명은 여자 동기였는데
둘 다, 술 먹고 엉기길래 피했을 뿐인데 후배는 성추행을 했다 하고, 동기는 자기한테 사랑을 고백했다고 소문을 냈다.
한창 미투로 시끄럽던 시절, 교수도 아닌 학생 신분으로 구설수에 오른 사람은 거진 뿐이었다.
그러나, 거진은 여자를 돌 같이 여긴 죄밖에 없었다.
그날이 하필이면 거진의 생일을 딱 100일 앞둔 날이었다.
‘100일만 지나면 마법사가 되실 몸인데, 감히 천한 너희따위들에게 내가······.’
그런 거진에게 두 여자의 필사적인 엉김은 어림 없는 개수작들에 불과했다.
그래서 더는 학교가 다니기 싫어 휴학하고 입대 신청을 했다.
여자 없는 세상······.
그곳이야말로 신성하게 100일을 지낼 최적의 장소였다.
그런데 갑자기 번진 코로나로 병역판정검사가 미뤄졌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 날, 아버지가 직접 피시방 알바 모집 전단지를 말없이 내밀었다.
아버지가 말이 없을 땐 조심해야 했다. 주먹이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맞거나 쫓겨나지 않으려면 면접이라도 보는 척해야겠기에 억지로 온 건데, 피시방 사장이 ‘간절함’ 운운하니 그냥 기가 찰 일이었다.
‘그냥 꺼지라고 하든지······.’
대체 이런 피시방이 있었나 싶게 오래되고 낡은 데다, 적어도 십년 이상 업그레이드 안했을 것 같은 고물컴퓨터들······.
조명은 왜 일케 어둡고 냄새는 퀴퀴한지······.
거진이 킁킁 거리자, 사장이 흘깃 거진을 스캔했다.
“키는 크구나?”
쓸데없이 큰 키는 182였고, 몸무게는 60.
아버진 꼬챙이 같아서 어디가 쓰냐며
엄마를 닮아 그렇다고 말했다.
쌍꺼풀 없는 눈매에 갸름한 턱선······.
아버지랑은 상관없으니 그것도 엄마를 닮은 건가?
사진 한 장도 없는 엄마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여자한테 인기가 제법 있을 형상인데······?"
처음과 달리 사장의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웠다.
'인기는커녕, 여자라면 이가 갈린다······.'
거진의 인생에서 아버지 때문이라며 이를 가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이름을 거지 같이 지어놓는 바람에 '거지' 취급으로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낸 것과,
두번째는 여자 복이 지지리도 없다는 것이었다.
거진을 낳다 죽은 엄마 덕분에 아버진 네 번이나 더 새장가를 들었다.
좋게 말하면 능력일 테지만,
그건 행복했을 때 얘기고,
첫 새엄마는 아버지를 패면서 덤으로 거진도 팼고,
두번째 새엄마는 아버지 돈을 갖고 튀면서 거진의 통장도 갖고 날랐다.
세번째는 새엄마라고 부르기도 좀 뭐했는데, 아버지 친구와 바람이 났다.
그리고 마지막 새엄마는 아예 아무 말도 없이 집을 나가버렸다.
세번째까지는 어렸을 때라 잘 몰라 슬프거나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그런데, 네번째 새엄마의 가출은 거진에게도 꽤나 충격이 컸다. 고1 한창 예민한 나이였으니까.
어쨌거나 네 명의 새엄마들을 거치며 모진 인생을 겪은 거진은 여자라면 처음부터 그냥 질렸다.
그 시작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등교 첫날, 못생긴 여자애가 짝꿍을 거부했다.
너무 기분이 나빠 울면서 집에 왔다.
학교 안 가겠다 빠득빠득 우기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마법사로부터 25살 될 때까지 연애를 않으면 마법사가 될 수 있단 소릴 들은 순간부터 거진은 모태 솔로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다.
스물다섯 생일을 90여일 남겨둔 이 시점까지 사지 멀쩡한 놈이 여자친구는커녕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연애고자가 된 데는 이런 너절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인데······.
남들은 연애고자라고 하지만, 거진 스스로는 연애를 거부한 연애거자라 자부했다.
마법사가 되기 위해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해야 한다고,
팥빙수를 볼 때마다 예쁜 마법사가 뿌렸던 그 하얀 얼음꽃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속으로 미리 굿바이 인사를 건네고 있는 거진에게 사장이 선언하듯 말했다.
“일단, 잘 끓인다는 라면부터 하나 끓여 오너라!”
라면 하나 끓여주고 간다고 특별히 나빠질 일도 없다고 자위하며 카운터로 향했지만,
솔직히 안 끓여주고 갔다간 몸성히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공포감이 온몸을 휩싸고 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거진이 통로를 지나가는데 보이지도 않던,
아니 쓰러져 있어서 무슨 거적때기인 줄 알았던 것들이 스멀스멀 고갤 쳐들더니······.
“기왕 끓이는 거 내 것도.”
“하나 추가.”
“나도.”
그렇게 좀비들처럼 ‘하나 더’, ‘하나 더’ 추가해서 총 8개의 주문을 받았다.
한군데 다 넣고 끓이면 좀 쉬우련만, 눈치를 봐 하건대 배분을 정확히 안했다간 라면빨 숫자까지 세가며 엄청 피곤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군대 가기 전 마지막으로 자원봉사한단 정신으로 하나 하나 끓여서 주문한 순서대로 한 그릇씩 가져다줬다.
그랬으면, 적어도 고맙단 소린 들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엣, 퉷!퉷! 이 알바생퀴가 죽을라고 환장했나? 이걸 지금 사람이 먹으라고 끓인 거냐?”
“내 발고락으로 끓여도 이보단 맛있겠다, 평생 알바나 할 알바놈아!”
“이 라면 테러리스트! 음식에 대한 기본예절이 없어!”
“신성한 라면으로 나의 잠재된 폭력근성을 일깨운 겨? 알바스키가!”
“널 라면 살인마라 불러주마...”
"그렇게 맛없어? 그럼 난 짜빠구리로!"
여자의 목소리도 하나 끼어 있었다.
‘와! 생그지같은 새끼들이 찢어진 입이라고 마구 씨부리네!!’
거진은 나름 맛있는 라면에 대해 일가견이 있었다.
그것은 라면 봉지에 써 있는 그대로 끓이는 것이었다.
수십 명의 라면박사들이 엄청난 실험을 거쳐 만들어낸 요리법을 무시하고 뭔 맛있는 라면을 논하는가?
그래서 정확히 물의 양과 시간을 지켜 최고의 라면을 내놓았건만······.
“새꺄, 이미 끓인 건 냅두고 진짜로 잘 끓여 갖고와.”
"라면 하나도 못끓이는 게 남자야?"
맨 마지막 여자 목소리는 거진을 특히나 빡치게 만들었다.
이것들이!
엿먹이자고 덤비는 놈들에겐 빅엿을 주는 것이 예의지.
엄숙한 표정으로 거진은 펄펄 끓고 있는 물에 침을 뱉었다.
다시 라면을 끓여서 나가자,
똑같은 모습에 남자 손님들은 욕부터 하려고 했다.
이미 각오한 바였고, 라면 못끓인다는 걸 방패로 그럼 이만 가겠다며 나갈 참이었다.
그런데,
“와! 진짜 맛있어요. 이런 맛은 태어나서 첨 먹어요!! 어뜨케!!”
극찬하는 여자 손님 말에 남자 손님들이 반응이 갑자기 순해졌다.
“어······, 그러고 보니 먹을 만하네."
심지어 군말 없이 처먹기까지 했다.
'뭐지······? 침 한 방울 첨가했을 뿐인데.'
잠시 후, 여자손님이 카운터로 오더니 은근하게 물었다.
침 뱉은 게 살짝 미안해질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저기······."
여자가 괜히 허릴 숙여 카운터 책상을 짚었다.
안볼래야 안보일 수 없는 가슴골이 거진의 시야를 막았다.
"네?"
거진은 시선을 위로 향했다. 컴컴한 천장에서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난 아까 짜빠구리 시켰었는데······."
여자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금방 끓여드릴 게요."
거진은 짜파게티 라면을 집어들었다.
"그게 아니라, 라면요, 레시피 좀 알려주심 안돼용??"
어디서 코맹맹이 소리를?
"네. 안됩니다."
레시피를 빙자해 어떻게 연락처라도 따려는 개수작을 어이 모르랴.
거진은 철벽남의 표본처럼 여자를 쌩깠다.
그날, 거진은 밤11시 50분까지 라면 53그릇과 짜빠구리 45그릇,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비롯해 34잔의 음료를 만들고 1시간에 걸친 청소까지 마친 후 파김치가 되어 퇴근이란 걸 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이 보이지 않았다.
좀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상하다. 잠시 담배피우러 간 건가?
잠시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기릭기릭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자.
제일 구석에 놓인 컴퓨터에서 뭔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전원버튼을 누르자, 한참 뒤에야 부팅이 되더니 최신 게임은 아예 없고 ‘s시그널’이란 게임만 하나 달랑 깔려 있었다.
클릭하자, 바로 자동 로그인 되었다.
시크한 표정의 여자가 나와 ‘19금 게임’ 표지판으로 가슴을 가린 채 말했다.
[s시그널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9세 이상 입장 / 19세 미만 거부]
[‘enter'를 클릭하기 전, 감당할 수 있겠는지 다시 한 번 신중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뭐지, 이 시건방진 멘트는? 꺼져.’
거진은 컴퓨터를 꺼버리려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런데 커서가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입장’을 클릭!
컴퓨터가 미쳤나.
[어서오세요. 사랑 충만한 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자가 가리고 있던 ‘19금게임’ 표지가 사라지면서 풍만한 가슴이 튀어나왔다.
‘뭐냐?!’
저 크기가 과연 가슴팍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것인지,
돌부처라도 불끈할 정도의 굉장한 것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랄까.
로딩 시간 동안, 여자는 마치 유혹하듯 고개를 갸웃갸웃거렸다.
그때마다 가슴을 이리 흔들 저리 흔들거렸다.
‘우, 움직이지 말란 말이야!’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거진은 입구를 살폈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피시방 안에는 손님도 한 명 없었다.
고요와 적막이 이리 반가울 줄이야······.
갑자기 아래가 묵직해지면서 가슴이 뭉클해지기 시작됐다.
그때였다.
갑자기 피시방이 정전이 되어 불이 꺼졌다.
그런데 이 컴퓨터만은 그대로였다.
'요상하네.'
가슴이 커도 너무 크다 싶었는데,
그 큰 가슴이 점점점점점점 커지더니
불쑥!
화면에서 가슴이 튀어나왔다.
- 작가의말
재미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Comment '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