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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연재수 :
1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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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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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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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5화 허물 Fin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25화


오후 네 시. 슬슬 잠이 쏟아지고 피곤한 시간이다. 주변 구덩이에서 치고 받고 빔을 쏴 가며 대련을 이어가던 부지런한 놈들도 슬슬 허리를 펴고 어깨를 돌리며 기어 나왔다.


몇몇은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했다. 내용은 결국 스킬이나 대련, 싸움과 부상에 대한 것이었지만, 우리에게도 서로 나눌 만한 서로 다른 것들이 생겼다는 뜻이겠지.


‘애초에 너 같은 애들이랑 싸우기 싫어서 친해진 거였다고!! 이게 뭐야?!’


43호는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구덩이 한 가운데로 질질 끌려왔다. 다리를 동당거리며 발버둥쳤지만 어림도 없었다.


“67호 들어 봐. 애들 다 가고 있잖아. 오전에 그렇게 목숨 건 대련을 하고도 훈련하던 애들마저 지금 나가고 있는 거야. 우리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고개와 자세를 낮추고 또 낮췄다. 조아리고 또 조아렸다. 67호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지만, 43호는 대련을 그만두려는 노력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저, 저 67호. 나 옆구리에 칼 찔렸어. 칼이 한 뼘도 넘게 들어갔다고. 이거 봐. 붕대, 붕대도 감고 있잖아. 응?”


“43호.”


“제발.”


“고개를 들어. 허리를 펴. 그리고,”


어울리지 않은 고상한 주문을 하던 67호는 단호하게 일갈했다.


“싸워.”


43호는 이미 자신이 구덩이 한 가운데까지 끌려온 걸 알아챘다. 이미 한 구석에 교관이 서 있었다.


녹색 불이 켜져 있던 목걸이에 붉은 불이 들어왔다. 띠, 하는 소리. 사형 집행장의 버튼 소리 같았다.


‘그래. 너라면,’


뼛속 깊은 곳부터 발악했다. 미친 짓은 생각하지 말라고, 고개를 조아리고 납작 엎드리라고 울부짖었다.


살아야 한다. 바닥을 기고 머리를 조아리고 신발을 햝더라고 살아야 한다. 의식적으로 생각한 내용이 아니었다. 학습장치에서 배움받은 내용 중에 존엄의 경험은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존엄감은 지식이 아닌 경험에서 나온다.


허나 생존은 본능이다. 연구원들은 그들의 자아가 옅고 얕기를 바라 마지않았다. 전부 그들이 바란 대로 이루어졌다.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은 지독했다. 67호와 쌓은 우호 관계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고 죽음의 가능성에서 도망치려 했다.


‘내가 배운 게 뭔지 마음껏 받아 줄 수 있겠지.’


43호의 심장이 뛰었다. 흥분은 언제나 두려움과 함께했다. 오늘은 그 사이에 뭔가가 섞여 있었다. 기묘하고 옅은, 고양감이었다.


이질적인 전투 영상을 보고, 이질적인 방법으로 스킬을 사용해 이질적인 무기를 만들었다. 자신들의 기원에 대해 이질적인 이야기를 하고, 창조주의 이야기를 엿듣는 이질적인 짓을 했다. 이질적인 무기를 사용해 이질적으로 싸운 끝에 이질적인 마나를 받아드리고 이질적인 스킬을 얻었다. 이질적인 마음이 생겼다.


신체 강화는 상시 발동된다.


43호는 턱을 들고 가슴을 폈다. 67호가 가볍게 몇 발자국 물러나며 씨익 웃었다.


“역장도검.” 반투명의 푸릇빛의 육각비늘방패 조각들이 허공을 맴돌았다. 일렬로 늘어서며 거대한 한손 직검의 형태를 만든다. 조각들의 접합부가 순간 옅은 오랜지색으로 빛나고, 반투명한 대검이 43호의 손에 잡혀들었다.


“그렇게 나와야지.”


만족스럽게 중얼거린 67호가 손가락을 튕겼다. 하얀 벼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치직치직 튀었다.


“기다려줄 마음 없어.”


새파란 불꽃이 눈부시게 튀었다. 압도적인 출력이 모든 것을 불태우며 쇄도했다. 공기가 터져나가며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43호는 대검을 종으로 휘둘러 내렸다.


‘반탄검기.’


벼락이 검신에 파고들었다. 대검이 갈라질 것처럼 달아오르며 웅웅 울렸다. 보이지도 않는 게이지가 차오르는 감각이 손끝을 타고 움찔움찔 전해졌다.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43호? 뭔가 더 대단할 걸 보여주지 그래?”


67호가 출력을 더했다. 그녀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나 싶더니 몇 배로 굵어진 벼락 줄기가 검신을 후려쳤다.


43호는 양손 가득 힘을 실어 검을 밀었다. 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리가 뒤로 밀렸다.


‘죄수 놈이 했던 것처럼 받아 쳐야겠어. 오래는 못 버틴다.’


몇 번이고 해본 듯이 익숙했다. 저절로 움직이는 손과 몸을 머리가 따라가지 못했다. 푸른 마나의 결이 변하며 물리력과 절삭력을 띄었다. 순간 대검이 한계까지 부풀어오르고 스킬: 반탄강기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43호는 대검을 힘껏 휭으로 휘둘렀다. 초승달 모양으로 뿜어져 나간 오러 블레이드가 대기에 전격을 튀겼다.


이런 미친, 하고 67호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전면에 육각미늘방패 수십 개가 떠오르며 역장을 이뤘다.


카가가가가가가가가강!!!


67호가 양손으로 역장을 밀며 진형을 유지했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육각미늘방패 조각들이 산산히 부서져 내렸다.


“으아아아아아아!!”


67호의 양손에서 하얀 불꽃이 또다시 튀었다. 43호는 곧바로 역장 방패를 불러내 충격에 대비했다. 오러 블레이드와 교란 전격이 사방으로 튀었다. 땅이 타고 깊숙하게 파였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봐야겠지?”


43호는 역장 방패를 후려친 교란 전격을 능숙하게 막아내고 견제용 열선 두 발을 날렸다. 67호는 웃기지도 않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피하고 다시 한 번 압도적인 출력의 벼락을 손끝에서 튀겼다.


‘저걸 두 번이나 막아 줄 수는 없지.’


43호는 대검을 늘어뜨리고 전방으로 대쉬했다. 몇 배로 강해진 몸이 순식간에 구덩이를 가로질렀다.


“새 스킬이 좋기는 좋나 보네?”


67호가 비릿하게 외치며 경질화된 손으로 가드를 올렸다. 발뒤꿈치로 땅을 박차며 아찔한 백스탭을 밟았다.


‘잘만 하면 한 방 먹일 수 있을지도?’


은근한 기대감이 달처럼 차올랐다. 43호는 희뿌연 오러가 은은히 타오르는 대검을 종으로 횡으로 휘둘렀다.


67호가 아슬아슬하게 피하기를 몇 십 차래. 슬슬 뭐가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67호의 샤기 컷 장발이 한껏 올려친 대검 아래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얀 머리카락 몇 개가 허공에 흩날렸다.


흠칫, 67호의 손 안에 열선의 구가 큼지마하게 모여들었다. 43호는 땀을 삐질빼질 흘리며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제발 그러지 마.’


한껏 올려 밴 대검은 아직 관성의 영향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역장방ㅍ! 으아아아악!!!”


화끈한 감각이 몸통을 덮쳤다.


***


대련은 그럭저럭 무사히 끝났다. 43호는 몸통에 누에고치마냥 붕대를 감고 돌아왔다. 44호가 낄낄거리고 웃었다. 43호는 일단 몸 가누는 법부터 연습해야겠다고 이를 박박 갈면서도, 새로 얻은 스킬들에 대단히 감사하며 만족했다. 행운은 행복으로 이어지기까지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에 43호와 44호는 C급 헌터가 되었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다른 클론들도 하루 일찍, 혹은 혹은 하루 늦게 멀게만 느껴지던 그 자리에 올랐다.


잔여 마력: 1545


보면 볼수록 마력량이란 기묘하다. 43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상태창을 뒤졌다.


분명 자신의 마력량은 1500을 조금 넘는다. 그건 마력량 500짜리 헌터 세 명의 합공을 이길 수 없다는 게 아니었다.


‘세 명이 아니라 서른 명이 와도 날려버릴 수 있을 거 같은데?’


43호는 대검 위에 오러를 덧씌우는 연습을 했다. 수많은 신체 강화계 C급 헌터들을 먹여 살리는 <오러 블레이드> 스킬답게 어지간한 방패를 한 방에 잘라 버릴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교관들의 탐탁치 않아 하는 듯한 시선이 따라 붙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흘 뒤 펼쳐질 마지막 훈련은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대부분의 죄수들은 D급 헌터, 간혹 C급 헌터가 간간히 섞여 있었다.


마력은 양적 성장이 불가능하다. 그 명제를 깨 부수려 태어난 것이 우리들이었다.


헌터 죄수들은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엄청난 적이었다. 그들이 코웃음거리로 변하는 건 며칠이면 충분했다.


이미 클론들끼리 하는 대련이 더 효율적이었다. 경험에서 오는 숙련도는 조금 떨어졌다. 하지만 헌터들의 싸움에서 마력량이라는 피지컬은 웬만한 경험 따위로 커버할 수 없었다. 열선과 교란 전격을 마구 퍼부어 버리면 죄수는 갈갈이 찢어져 쓰러졌다. 숨을 곳이 있는 구덩이라면 은폐물까지 같이 꿰뚫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물며 대부분의 구덩이는 황량한 콜로세움이다.


선임 교관 엑스가 나수빈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 수빈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훈련의 타당성에 못을 박았다.


“엑스 교관. 그 녀석들은 뭔가를 죽이는 훈련도 해봐야 해. 앞으로 죽이게 될 건 몬스터뿐만이 아니야.”


마지막 훈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2호. 이따 끝나고 나랑 원거리 기동전 연습해보자.”

“22호. 우리 격투술 훈련은 내일 하고, 오늘은 교란전격부터 마무리할래?”

“44호. 게이트 안에 들어가면 어떤 기분일 거 같아?”


한때 벌벌 떨며 고개를 숙이고 그야말로 죄수처럼 끌려가던 길에서 클론들은 태양처럼 웃었다. 붉은 흙이 깔린 구덩이 안으로 서슴없이 들어섰다.


43호는 역장 대검에 희뿌연 오러를 피어 올리며 돌진해 일격에 죄수의 목을 땄다. 헌터지원관리실에서 서비스하는 검술 인강 강의를 2배속으로 돌려 본 성과였다. 힘도 속도도 방어력도 신체 강화 능력에 따라왔다. 불과 2주 전쯤에 자신을 거의 죽일 뻔했던 놈들과 같은 급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44호는 여덟 발의 열선을 허공에 띄우고 고정형 기관포대마냥 난사했다. 야생 승냥이마냥 날렵하게 돌진해오던 죄수는 처참하게 구멍이 뚫려 죽었다. 팔다리가 삶은 꽃게처럼 떨어졌다. 훈련장을 치우는 교관이 무서워할 정도였다.


67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오전 내내 죄수를 가지고 놀던 그녀는 죄수가 살려달라고 빌다 못해 죽여달라고 빌 때가 와서야 교란전격으로 죄수를 태워 죽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클론들은 제 발로 걸어 나왔다. 어쩌다 팔이 부러진 9호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부상자도 없었다. 섬에서의 생활이 끝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너희들의 성장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너희들에게는 앞으로도 수많은 기회가 있다. B급, A급, 심지어는 S급 헌터가 될 수도 있어! 부디 너희의 길을 걸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축복받는 삶을 살기 바란다.”


선임교관 엑스는 그렇게 말했다.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고 번호를 부르며 금장 번호표를 달아 주었다.


2호, 9호, 12호, 17호, 22호, 24호, 32호, 34호, 43호, 44호, 49호, 51호, 53호, 58호, 61호, 67호, 73호, 84호, 92호. 95호.


20명을 만들기 위해 수백 명이 죽었다. 수정란 단계에서, 태아 단계에서, 준성체 단계에서, 유소년 단계에서 죽은 걸 포함하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분명 같은 피를 같은 온도 같은 기계에서 같은 약물로 배양했는데, 왜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었는지, 수빈은 여전은 알지 못했다.


“그래도 고마워. 살아줘서 고마워.”


수빈은 섬뜩하고 자애롭게 웃으며 식당 한 구석에서 클론들과 교관들을 바라보았다. 한 클론이 케이크 조각을 다른 클론의 얼굴에 던졌다. 킥킥대고 웃고 떠들었다.


앞으로 더 많은 일들이 남아 있겠지.


43호는 식당 한 구석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수빈은 흠칫하며 몸을 돌려 구석으로 숨었다.


“뭘 봐? 이런 걸 언제 먹어 보겠냐? 빨리 먹어.”


44호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티라미슈 케이크 한 조각을 내밀었다.


“그래. 고마워.”


43호는 케이크를 한 입 배어 물었다.

달고, 맛있었다.





허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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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24화 +1 21.01.25 112 3 12쪽
23 23화 +1 21.01.22 104 3 13쪽
22 22화 실험실의 코끼리 +1 21.01.21 113 3 12쪽
21 21화 +1 21.01.20 113 3 12쪽
20 20화 +1 21.01.19 115 2 12쪽
19 19화 +1 21.01.18 107 4 11쪽
18 18화 사형집행 +1 21.01.15 118 3 14쪽
17 17화 +1 21.01.14 110 3 12쪽
16 16화 +1 21.01.13 113 3 12쪽
15 15화 +1 21.01.12 117 3 12쪽
14 14화 +1 21.01.11 121 3 12쪽
13 13화 +1 21.01.08 127 3 13쪽
12 12화. 뿌리 +1 21.01.07 114 4 13쪽
11 11화 +1 21.01.06 122 4 12쪽
10 10화 +1 21.01.05 133 3 12쪽
9 9화 +1 21.01.04 125 3 12쪽
8 8화. 성장통 +1 21.01.01 152 4 12쪽
7 7화 +1 20.12.31 152 3 13쪽
6 6화 +1 20.12.30 162 4 12쪽
5 5화. 인스트럭션 +2 20.12.29 184 5 12쪽
4 4화 +1 20.12.29 194 5 12쪽
3 3화 +1 20.12.29 243 5 12쪽
2 2화. 프로젝트 이미테이션 +1 20.12.29 309 4 13쪽
1 1화. +2 20.12.29 435 5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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