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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연재수 :
1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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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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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
글자수 :
6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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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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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81화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81화


본사 50층~55층. 이곳에서 유나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극비 인력인 제작계 헌터, 연구계 헌터들이 커피잔을 들고 복도를 이리저리 오갔다. 이 다섯 층에서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헌터의 비밀 연구실’에 해당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가죽이 고스란히 붙은 마물의 다리에 전류를 흘리며 이 종족의 전류 내성을 측정한다. 살을 발라낸 뼈에 마법진을 새기며 부위별/종족별 마나수용도를 측정한다. 여러 던전에서 나온 광석들을 한데 모아 단조해 가며 최고의 효율을 내는 합금을 찾는다. 마나수용도가 높은 금속과 열처리한 강판을 접쇠해 양산용 검의 프로토타입을 만든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톱니바퀴에 마법진을 새기고, 그 톱니바퀴들로 시간에 간섭하는 시계 마도구를 만든다. 레어메탈에 고위 마물의 값비싼 뼈를 박아 넣으며 맞춤 갑옷을 만든다.


산업의 기반이 되는 순수 마도학 연구, 시제품 제작, 개별 맞춤 무구 제작, 종합개발 등등.


이들이야말로 대형 길드가 보유한 저력이었다.


-혁신을 행한다.


“...”


수빈은 백의 차림에 마력을 봉인하는 수갑을 차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한때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표어를 향했다.


아니, 한때가 아니다. 지금도 저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뛴다.


“차라리 빨리 죽여주면 안 될까?”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옆에 서 있던 헌터 둘이 소리없이 돌아보았다. 늘씬한 정장 차림에 금속 징이 박힌 검은 가죽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미안해. 오래 기다렸지?”


철컥. 방문이 열리고 한 소녀가 들어왔다. 황록색 포니테일에 단정한 앞머리, 소악마같이 귀여운 얼굴.


그녀를 알고 있었다. 마도연구 업계에 소문이 무성했다. 때로는 흐릿한 안개처럼, 때로는 손에 잡힐 듯한 아지랑이처럼 살랑거렸다. 실존 인물인지, 블루문이 보유한 연구자 집단을 부르는 말인지도 명확하지 않지만, 그 존재는 분명 경외의 대상이었다.


-라지아 다음가는 제작계 헌터.


“유나 님 아니십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여인이 10대 중반이나 되었을 외모의 소녀에게 극도의 예를 표하는 모습은 언듯 우스깡스러울 정도였다.


“나를 알아?”

“유나 님 논문도 안 읽어본 녀석은 마도 연구자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유명하면 안 되는데. 아, 앉아. 앉아.”

작은 테이블에서 얼굴을 마주했다.


“여기...어떤 방인 거 같아?”

몇 초가 이어진 침묵 끝에 유나가 입을 열었다.


넓고 천장이 높은 방. 안쪽으로 이어진 다른 공간들, 하얀색 일색의 바닥과 벽, 천장. 여기저기 박힌 대용량 플러그,


“빈 연구실 아닙니까?”

“맞아. 빈 연구실이야. 너 하는 거에 따라서 찰 수도 있도, 계속 비어있을 수도 있지.”

“...”

유나의 눈동자에서 연록색이 번뜩였다. 맹독을 품은 어린 뱀 같았다.

“우리를 위해 일해. 꼭 블루문이 싫다면 골드핸드나 스케빈져에 파견 근무 보내줄 수도 있어.”


유나는 그 작은 몸집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단호함으로 밀어붙였다.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눈동자가 올곧게 수빈을 응시했다.


“난 오라비나 서윤이하고는 달라. 거절해도 죽이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너와 네 팀원들은 어디에도 취직하지 못할거야. 대학 교수는커녕 조교 자리도 못 얻을 거고, 다른 길드에 들어가거나 대기업에서 헌터 관련 업무를 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겠지. 물론 다른 일을 하는 건 말리지 않겠어. 넌 똑똑하고, 능력 있고, 수명도 보통 사람들보다는 길고, 화학적, 생물학적 지식도 뛰어나니까 제약회사 같은 곳에 들어가기도 쉽겠지. 하지만 이 판에 너희 자리는 없을 거야.”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미래가 너무 선명하게 그려져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감정이 먼저 움직였다.


“그렇게는 못 살겠지요.”


지난 10여 년을 바쳐 온 일이다. 굶주리고 막막한 순간들을 버텨 가며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다.


마나, 게이트, 마수, 각성, 헌터, 던전. 세상을 바꿔놓은 힘들이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알고 싶었다. 배우고 싶었다. 며칠 밤을 새 가며 데이터를 수집하고 취합하면서도 지칠 줄을 몰랐다.

감지 못한 머리가 떡지고 백의에 얼룩이 묻었지만, 논문 원고가 늘어가는 만큼 희열감도 커져 갔다.


“...그걸 제 삶에서 도려내시겠다면.”


아마 살지 못할 거다. 한동안은 모아 둔 돈으로 버티며 술에 쩔어 살겠지. 밥은 먹어야 하니 직장을 구하기는 구해야 할 거다. 이 이력과 외국어 실력이면 대기업 연구직 취직도 쉽겠지.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어느 날 뉴스를 볼 거다. 어디 길드, 어디 대학 연구실의 누가 무슨 발견을 해냈다는 이야기를 들을 거다.


그리고 분명히 생각하고 말겠지. 후회하고 말겠지. 내가 해낼 수 있었을 일이라고. 저걸 알아내는 희열은 원래 내 것이었다고.


이 세상 가득한 신비를 알아내지도 못하겠지. 준민한 호기심도 열의에 찬 심장도 헛돌겠지. 놀이동산 담장 밖에서 노랫소리와 화려한 지붕을 훔쳐보는 어린아이로 살다 죽겠지.


“그냥 여기서 죽여주시면 안 됩니까? 당신들의 분노를 샀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안 돼.”

“어째서입니까?”

“넌 나도 못한 걸 해냈거든.”

“네?”

“은발의 B급 클론.”


수빈은 설마, 하며 가죽 마스크 쓴 헌터를 응시했다. 머리색은 까마귀처럼 검었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눈매였다.


“이미 만들어보셨군요.”

“오라비는 강하지만, 지치지 않는 건 아니야. 혼자서 모두를 지켜낼 수는 없었어. 전력은 많을수록 좋지. 적이 모르는 전력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난 C급 이상부터는 마력 패턴 일치율을 유지할 수 없었어. 용뿔 마약, 자의식 무너뜨리기, 세뇌 마법, 최면, 별 짓을 다 해 봤는데 결국 실패했지 뭐야. 넌 나보다도 나은 점이 하나 있는 사람이야. 애초에 나는 마도 생명공학 전문도 아니라고.”


외모에 어울리는 약간의 투정을 덧붙이며, 유나는 말을 이었다.


“왜 우리의 제안을 받아드리지 않으려는 거지? 헌터관리지원실에 대한 의리도 아니잖아. 대형 길드는 꿈의 직장 아니었어?”


다시 눈을 마주쳐온다. 강렬하다. 터무니없는 의지와 갈고 닦은 감정을 앞세워 압도한다.


“너. 고위 헌터들이랑 안 좋은 일이 있었구나?”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갑에 거칠게 비벼진 손목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묻지 않을게.”


“뭐?”


의문이 이빨 사이로 새어 나왔다. 존대하는 것조차 까먹어버렸다.


“오라비는 세상을 떠받친 거인이야. 6대 길드 마스터들과 A급 헌터들은 모두 누군가의 신이나 다름없어. 하지만 거대하게 자란 나무는 그림자도 짙게 드리우는 법이야. 법과 윤리와 도덕으로부터 받아낸 면죄부를 마음껏 사용했지.”

나를 전면에 공개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야.

짧게 덧붙이며 유나는 새파란 불길 같은 눈빛을 쏘아냈다.

“하지만 넌 오라비를 섬길 수밖에 없을 거야. 너는 똑똑하니까 지금쯤이면 머릿속에서 계산이 끝났겠지. 네가 살고 싶어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건 지금 내 손을 잡는 것 뿐이야.”


수빈은 머리를 감싸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무릎 사이로 떨어진 고개,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때도 비슷한 소리가 났었다. 똑같이 지옥에서 눈을 떳건만, 한 명은 하늘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날아올랐고, 한 명은 지옥에 남겨졌다.


“나도 보고 싶었어.”

“그랬겠지.”

“당신들이 보던 풍경을.”

“그랬겠지.”

하지만 나는 날개가 없었어. 그래서 비행기를 만들려고 했지. 그리고 당신들을 그런 나를 데려다가 날개에 꽂을 강화 깃털을 만들라고 하고 있어. 좋은 깃털을 만들면 부스터를 빌려주겠다고 하면서.


“당신들은 영원히 내 소망을 들어주지 않을 거야. 남은 시간 같은 게, 내가 원하는 연구 같은 걸 하게 놔둘 리가 없잖아.”


“네가 뭘 만들어주냐에 따라서, 나는 자비로운 상사가 되줄 수 있어.”


“내 남은 인생이 한 사람의 변덕보다는 조금 더 확실한 기반 위에 있기를 바랬어.”


“원래 갈대 같은 게 연구원들의 삶이야. 필요로 하는 걸 만들어야지.”


170도 넘는 키에 모델 같은 몸매, 파란 기운이 감도는 눈와 어울리는 투명박스태 안경. 구겨진 백의에 회색 눈물방울. 나수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난 1여년이 증발했다는 허무감과 분노, 세상을 향한 질투, 손을 잡으면 펼쳐질 달콤한 미래에 대한 기대, 오만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콱! 유나는 조막만한 손을 뻗어 수빈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힘이었다. 덫에 걸린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방에 다음 달부터 연구 기구들이 들어올 거다. 블루문 길드가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 만들어낸 훌륭한 기구들이지. 지금껏 모아온 자료도 숨겨둔 논문도 마음껏 읽을 수 있어. 이 옆 실험실의 연구자도, 그 옆 실험실의 연구자도 너 같은 천성을 가졌으니까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거야. 옛날부터 흡혈귀들이 쓰는 것과 비슷하게, 생체 조직과 융합되는 형태의 마도구를 개발해보고 싶었는데, 전문가가 들어오다니 잘 됐어.”


“윽.”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팀원은 네 명까지 받아주지. 조수 한 명 정도를 더 데려와도 좋아. 헌터관리지원실의 일을 마무리하고 이곳에서 일해.”


“아직 난 선택하지 않았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개뿐이야. 이 업계를 떠나 비참하고 소소한 일상을 누리던지, 오라비의 밑에서 네가 하고 싶던 연구를 마음껏 하던지.”


“이게 연구계 헌터들을 대하는 블루문 길드의 방식이야? 무례하고 당돌한데.”


“아니. 내 방식이야. 10년 전부터 6대 길드의 표준이 되었지.”


유나가 마디 마디 숨을 토할 때마다 진주 같은 이빨들이 뽀얗게 빛났다.

“죽을 죄를 지었다며? 오라비 피를 멋대로 가져가서 클론을 양산해? 헌터관리지원실이 널 잘라낼 줄은 몰랐어?”


“그걸 몰랐을 거 같아? 물주가 하나뿐이면 대안도 없는 거야.”


이해한다는 듯이 유나가 손에 힘을 풀었다.


“일을 줄거야. 스물 여덟 흡혈귀 귀족들이 쓰던 아티팩트들을 가져다줄게. 갑옷과 신체가, 비생체 조직과 생체 조직이 융합되고 분리되는 방식을 알아내. 우리가 생산한 무구에 각인 가능한 마법진 형태로 만들어. 자원이 필요하면 사무관들한테 말해. 길드 내부에 있는 자원은 보고만 하면 차출해줄 거고, 길드 외부의 자원은 월 예산 30억 안에서 확보, 구매해줄게. 연차는 30일 줄 거니까 마음대로 써.”


스르륵. 유나가 손을 대자 수빈의 양손을 묶고 있던 수갑이 뚝 떨어졌다. 바닥에 부딪히며 잘그락 소리를 냈다.


“연봉 3억에 성과급 별도. 연봉 협상은 3년마다. 한 50년 일하면 놔줄 거야. 그때쯤이면 서울에 아파트니 오피스텔이니 하는 거 몇 채는 모아놨을 거야. 목 좋은 곳에 꼬마 빌딩도 두세 개는 있겠지. 지방에 땅도 좀 생길 거야. 괜히 주식이다 뭐다 눈 돌리지 말고 성실하게 일해. 젊음의 약이 사내복지로 나오니까 늙어서 못 놀 거 걱정하지 말고 일해.”


끝으로, 하고 운을 때며 유나는 선언했다.

“내 조건 중에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면, 속으로 삭히도록.”


“꿈의 직장이구만.”


수빈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제 손목을 내려보았다. 붉은 수갑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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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79화 +1 21.04.12 53 3 12쪽
78 78화 +1 21.04.09 51 4 12쪽
77 77화 +1 21.04.08 52 3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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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65화 +1 21.03.23 55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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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62화 +1 21.03.18 54 3 12쪽
61 61화 +1 21.03.17 72 3 12쪽
60 60화 귀환 fin +1 21.03.16 59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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