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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연재수 :
1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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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36,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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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0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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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78화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78화


길드 마스터로서 초대할 때는 하늘 위로 불러들였지만, 친구로서 초대할 때는 저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던전의 이국적인 나무 뿌리 아래서 독이 섞인 비를 피했을 때처럼.


검은 대리석에 마노를 박아넣었다. 금장 촛대에 서사시를 새겨넣었다. 화사하게 장식한 룸은 호화로웠지만, 의외로 넓지 않았다. 어차피 이 방에 모일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적으면 여섯, 많아 봐야 아홉.


누군가는 이 모임을 있는 자의 궁상 떨기라고 부를 거다. 진짜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가진 놈들이 자기들 고생 이야기 하면서 자위한다고 비난할 거다.


길드 마스터들이 그 룸 안에서 마약과 음욕과 식탐에 빠져 허우적거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치부를 공유하며 더러운 관계에 질척한 접착제를 붓는다고 머릿속에서 단정지었다. 굳게 닫힌 철문을 열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헐벗은 남녀가 용뿔 잎 연기 사이에서 민달팽이처럼 달라붙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길드 마스터들은 과거를 추억하지 않았다. 받을 거라곤 공포의 눈길과 의심 어린 손가락질뿐이었을 때도, 세계적인 대형 길드의 마스터가 된 지금도 똑같았다.

과거가 추억거리가, 자랑거리가 된 적은 없었다.


여전히 그들은 악몽을 꿨다.


룸 안에는 용뿔 잎도, 헐벗은 여자도 남자도 없었다.


어두운 밤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공포를 피해 용뿔 잎 연기로 뛰어들었지만, 약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건 혼자서도 충분했다.

이 룸에 모일 사람들 중 술자리에서 여자 가슴을 주무르고 남자 복근에 키스하는 걸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도덕관과 윤리관은 진작 지독한 세월에 마모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그건 친구들 앞에서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보이고픈 친구들이 아니었다. 더 깊은, 더 치열하고 잔혹했던 밑바닥을 본 사이였다.


“애들은 언제 오려나? 헤르메스. 지금 몇 시야?”


미르한은 근처의 침대방에 드러누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오후 다섯 시 13분 43초입니다. 지난 5분간 같은 질문을 네 번 하셨습니다. 저녁 식사는 일곱 시 정각으로 잡으셨습니다.”


헤르메스는 짜증을 몰랐다. 동시에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주인의 속내도 몰랐다.

...물론 때로는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길드 연말 정산 중간 보고서와 붉은 자갈 던전 광석 수출건 최종 결제건, 콘체른 길드와 공동 개발하기로 한 하늘섬 게이트-광산 사업 기공일 보고서가 마스터의 결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헌터관리지원실에서 인력 지원 요청서가 들어왔고, 골드핸드 길드에서 남미 쪽과의 계약으로 수입될 마물 부산물의 명단과 우선매입권을 요청했습니다.”


“여기서 더 있어?”


“린트부름 길드의 박은성 헌터가 직접 공동사냥 제안서를 보냈습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보류될 수 있으나, 이번 달 안으로 검토해주면 감사하겠다는 의견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설마 더 있어?”


“...그 외 검토하셔야 할 서류가 17개 정도 남아 있습니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미르한과 헤르메스 모두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이거 내가 전문 경영인들을 괜히 고용하고 있는 거 같은데.”


“백일혼 헌터가 18개를 가져가셨습니다. 그 전에 올라온 46개의 결제안을 전문 경영인들이 가져가고 가져가서 그 정도 남았습니다. 돌발적인 사건 사고는 전부 이서윤 헌터가 처리하고 있습니다. 아, 북측 접경지역의 게이트 브레이크를 이서윤 헌터가 국방부의 협력하에 처리했습니다. 결과 보고서가 이틀 안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


“저녁식사 시간까지 1시간 40분 정도 남아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집무실로 이동하셔서 업무를 보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미르한은 비척비척 일어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일하기 싫은 건 인턴이나 회장이나 똑같았다.


***


“...으음.” 43호는 고통스런 저음을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토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선 블루문 길드의 본사가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직 저녁이라 하기에도 이른 시간이었지만 때는 12월. 이미 해는 빌딩숲 사이로 뉘엿뉘엿 떨어져 갔다. 초승달이 떠오른 서쪽 하늘이 진청색으로 빠르게 물들어갔다.


어젯밤 3시간 3교대로 나뉘어 나수빈 연구소장을 감시했다. 한 명이 안방에서 수빈을 감시하고 있으면, 두 명이 거실에서 잠을 잔다는 형태였다.


하지만 한 명이 안방에서 수빈을 감시해도, 두 명은 거실에서 잠들지 못했다. 결국 세 클론이 모두 안방에 들어가 착잡한 표정을 주고받으며 제 창조주를 감시했다.


정작 나수빈은 제 집에라도 온 듯이, 아니 제 집에서 쿨쿨 잘도 잤다. 자기 전에 반건조 곶감와 훈연햄을 안주로 와인까지 자작했을 정도다. 곶감을 더 잘게 자르라는 꾸지람에 결국 67호가 손목 묶은 자일을 잘라버렸지.


여하튼, 우리의 포로는 단잠을 취했고 우리는 쫄딱 젖은 고양이 같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만약에 계획이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했다. 서로 알아낸 사실을 공유하고, 취한 수빈에게 캐물은 정보를 취합했다.


더럽게 길고 괴로운 밤이었다.


사거리 신호등에 푸른 불이 들어왔다. 또각또각, 뚜벅뚜벅, 자박자박, 나름의 발소리를 내며 사람들이 길을 건넜다. 귀에는 무선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을 들고, 끊임없이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래도 목숨을 걸고 할 게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겠지?’


사거리 한켠에 있던 미르한 쾌차기원 천막은 어느새 자연스레 철거되었다. 근처보다 조금 덜 바랜 보도블럭 과, 천막을 고정시키는 데 썼던 추들의 눌린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무심했다. 옆을 걷는 사람에게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제 손바닥 안 조그마한 기계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 사이를 해치며 주변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옆을 지나친 남자가 신은 신발의 메이커, 앞 여자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 중년의 신사가 입은 고급 정장, 횡단보도에 애매하게 걸쳐 선 양아치 택시, 모든 것을 관조하며 흘러가는 구름, 하늘 높게 솟은 빌딩들까지.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삶을 체감했다.

롱 패딩 자락을 단단히 여미고, 눌러 쓴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여기도 담이 있네.”


블루문 본사 빌딩 주변은 사원들을 위한 공원이었다. 잔디 깔린 넓은 대지 군데군데 멋들어진 수형의 나무들, 고요한 연못과 물 흐르는 작은 개천.


그 주위를 높다란 담이 둘러쌓고 있었다. 축대를 쌓아 올리고 검은 철골을 촘촘하게 둘렀다.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만큼 철조망을 두르거나, 과도하게 뾰족한 장식을 하지는 않았다. 축대 역시 위압감을 줄 만큼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빌딩의 주인은 제 성 부지 안을 ‘보통 것들’이 들여다보는 게 그리도 거북하셨는지, 담을 따라 대나무나 억새, 관목을 빽빽하게 심어 놓았다.


“길드 신분증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출입구마다 가드들이 즐비했다. 차를 통해 지하로 들어가는 곳이든, 공원을 가로질러 본사로 들어가는 곳이든, 신분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끔은 얼굴이 신분증보다 유용한 법이지.’


내 얼굴은 미르한의 것과 정말로 닮았다. 유전적으로 동일하니 당연하겠지만, 터럭 하나까지 다른 곳이 없었다.


우리들은 매일 서로를 보고 사니 구별이 가능했다. 누가 더 다리가 길고 누가 더 콧대가 높고, 누가 더 허벅지가 두꺼운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교관들조차도 어지간히 우리를 유심히 보지 않은 이상, 번호표만 바꿔 달면 누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없다.


쉿. 입술 앞에 검지손가락을 세우며, 후드를 살짝 젖혔다. 신체부분변조로 은발화한 머리카락이 모자 아래로 흘러 내렸다. 마스크를 치우며 슬며시 얼굴을 드러냈다.


?!


가드의 얼굴이 경악과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옆 차선에 서 있던 가드가 곧바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고위 헌터 특유의 머리색이나 눈동자 색은 마력 파장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아무리 솜씨 좋은 미용사라고 해도 염색약만으로는 따라할 수가 없다. 흉내야 낼 수 있겠지만, 한 번이라도 원형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곧바로 알아볼 거라고 한다.


이 몸은 미르한과 같은 피가 흘렀고, 여전히 마력 패턴은 수십% 이상 동일했다.


“드, 들어가십시오.”


자연스럽게 가드가 빌딩을 가리켰다. 다시금 마스크를 올러 썼다. 이 일이 알려지면 해고당할지도 모르겠네. 뭐, 그건 고위인사의 보안 절차를 무시하던 길드의 잘못이겠지.


공원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아름다웠다. 여기저기 노란 가로등들이 켜졌다. 커다란 갓이 잔잔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야근 전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온 직원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1층 홀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작은 카페도 몇 개나 들어와 있어서,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바닥은 반짝거리는 무늬가 들어간 하얀 대리석이었다. 흙자국 하나 없이 윤기가 났다.


‘이제 어떡하지?’


일단 무작정 엘리베이터를 찾았다. 맨 위 층에 있거나, 그 아래 층에 있겠지.


‘저건 또 뭐야?’


엘리베이터로 가는 길에 지하철 개찰구 같은 셔터가 있었다. 사원증을 찍어야 셔터가 열렸다.


죽치고 앉아 있어 봐야 수상한 시선이나 받겠지. 일단 무턱대고 돌진했다. 이미 사고는 쳤다, 남은 건 뒷수습 문제였다.


손바닥 안쪽에 카드를 쥔 척하고 개찰구 위를 훑었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바를 자연스럽게 넘으려 했지만, 놀랍게도 바가 그대로 돌아갔다.


오! 하고 감탄해야 했을까? 어? 하고 의아해해야 했을까?


아무도 없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순간, 거울에 선홍색 문자열이 떠올랐다. 동시에 중성적인 기계음성이 들려왔다. 공기 그 자체가 울리는 것 같아서, 어디서 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은 저의 최고위 명령권자와 매우 흡사한 유전적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고위 명령권자의 상시 언행 분석 중. 3. 2. 1. 혈족과 인연을 중시하던 최고위 명령권자의 의사를 이행합니다.”


“뭐, 뭐야?”


인공지능인가?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저는 저의 기존 명령권자들에게 당신의 존재과 권한에 대한 언질을 받지 못했습니다. 접근 권한을 코드 5로 제한 중입니다.”


“접근 권한을 코드 1로 상승시켜.”


뭐지는 모르겠지만 잘 됐다. 어떻게든 도움이 되게 해야지.


“이행이 불가능합니다. 접근 권한 코드 1은 최고위 명령권자에게만 허용된 권한입니다.”


“그럼 코드 2로 상승시켜.”


“이행이 불가능합니다. 코드 2는 최고위 명령권자의 인가가 있어야만 발급이 가능합니다.”


“내가 받을 수 있는 최고 권한을 줘.”


“코드 4를 발급하겠습니다. 사원증을 인증하시면 코드 3으로 상승이 가능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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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74화 21.04.05 54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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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70화 +1 21.03.30 51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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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62화 +1 21.03.18 54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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