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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님의 서재입니다.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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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룡
작품등록일 :
2020.12.29 11:21
최근연재일 :
2021.06.03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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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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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1화

DUMMY

레플리카 헌터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21화


“입 달린 인간들마다 자기 주장이 있는 분야잖습니까. 일단 정론은 심장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의지와 확신에 사역되는 것 아닙니까?”


43호는 의아함을 숨기지 않았다.


고위 헌터일수록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 필요도 없다. 손발처럼 다루는 마력의 움직임을 도식화하려는 건,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눈을 어떻게 깜빡이냐는 질문과 같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냅스니 교감신경이니 하는 걸 의식하는 한심한 인간은 없다.


“맞아. 정론은 그거야. 그런데 큰 부상을 입고 의무동에 온 애들은 정신이 반쯤 나가 있어. 살아야 할 의지를 잃어버렸다고 해야 하나? 절실함이 없으니까 회복력도 크게 떨어지더라고. 의지가 없으니 마력도 움직이지 않아. 아, 이거 말해도 되는 거였나?”


두툼한 뿔태 안경을 쓴 연구원이 잠시 허공을 빤히 쳐다보며 고민했다.


“거기까지 말하는 건 딱히 안 될 거 없지 않을까? 아무튼! 43호 너는 만약에 다쳐서 보건동 올 일이 생겼을 때도 꼭! 살아야 한다는 일념을 잊지 말도록! 알았지?”


두툼한 뿔태 안경을 쓴 연구원이 유쾌하게 말을 마무리지었다.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43호는 철사태 안경을 쓴 연구원이 한순간 지었던 난처한 표정을 잊지 않았다.


“만약에, 만약에 있잖아요.”


포석을 깔며 말을 있는다. 연구원들을 곤란하게 만들려는 생각은 아니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질문이다.


“제가 알기로 저희가 만들어진 이유가, 어떤 강한 헌터가 쓰러져서 그 전력 공백을 매우려고 만들었다고 아는데,”


무해하다는 것을 전력으로 어필하며 순수하게 웃는다. 어쩌다 생각한 한 마디임을 지나치다시피 강조한다.


“그 헌터가 깨어나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한다. 유리관 안에서 몸뚱아리를 몇 년치만 더 키웠어도 구역질이 났을 거다.


연구원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마주본다. 네가 대답해, 뭐라고? 하며 눈빛으로 소리지른다.


네? 하는 의성어를 넣으며 살포시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압박했다.


‘살처분은 아니겠지? 우리의 원형이라는 그 헌터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국가적 전력 공백을 고민해야 할 정도로 강한 헌터라면, 당연히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어마어마한 거물일 거다. 적어도 평소에 “내가 쓰러지면 내 클론을 만들어 세상을 구해라.” 이런 말을 하고 다닐 사람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누구라 한들 멋대로 자신의 피를 가져다 만든 클론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낼 가능성은 낮았다. 더욱이 그 클론이 자신과 같은 힘을 쓰고 같은 얼굴을 가졌다면.


43호는 까득 소리가 날 때까지 이를 악물었다. 판단과 선택은 희망이 아니라 확률에 근거해야 했다.


‘성과가 난다면 국가가, 성과가 나지 않는다면 기관이 우리를 지켜준다고 했어. 67호가 그랬지. 우리를 만든 조직의 이름이 헌터관리지원실이라고. 헌터관리지원실이 어느 정도 힘을 가진 조직일까?’


만약 우리의 원형이라는 헌터가 깨어나 우리의 처분을 원한다면, 기관은 저울질할 태지.


‘우리의 쓸모와 원형의 분노 사이에서! 그때 우리가 쓸 만할 정도로 강하다면 우리를 지켜주겠지만, 어느 선까지 지켜 줄지는 모른다. 어느 선까지 지켜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나는 고위 헌터와 헌터관리지원실 중에서 어느 쪽이 주도적인 관계인지도 모른다. 썩었는지도 모르는 동앗줄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는 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확실하지도 않은 새 줄을 찾아 무작정 뛰어내릴 수도 없다.’


치, 하며 43호는 다시 자세를 바르게 했다.


쥐에게 물린 고양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두 연구원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 말했듯이 너희는 기관에서 지켜줄 거야.”


‘저건 아무 말도 아니야. 그냥 들숨 날숨 같은 거다.’


43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무해한 웃음을 만면에 띄웠다.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다. 해서는 안 됐다. 67호 같은 힘이 없는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해야 했다.


‘C급이 돼서 이 섬을 벗어나면 정보를 접할 기회도 늘어나겠지. 그때까지는 숨죽이고 있자. 고개 팍 숙이고 가드 바짝 올리고. 일단 무조건 C급이 되는 거다.’


***


보건동 소장실에서 달콤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 방에서 보는 낙조는 정말 아름답지만, 오늘은 바다 안개가 밀려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수빈은 용뿔 잎의 효능과 부작용을 잘 알고 있었다.


10여년 전 한때는 안정과 안락함을 주는 그 나른한 연기를 갈망했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용뿔의 부작용이 수면 위로 떠올라 하나하나 밝혀졌다.


수빈은 그녀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신인 두뇌를 망가트리지 않은 것에 몇 번이고 안도했다.


수빈에게 용뿔이란 이상과 여유의 상징이었다. 신 같은 권능을 휘두르며 게이트 안에서 마수들과 싸우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따뜻하게 데운 술을 홀짝이며 용뿔을 태우는 고위 헌터들을 동경했다.


어느 순간 그녀가 진짜로 원하던 것은 용뿔 잎이 아닌 고위 헌터들의 삶이란 것을 알았다. 비싼 정장을 입고 밴츠를 탄다 해서 고급진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용뿔에 대한 동경은 약해졌지만, 역시 담배는 끊을 수 없었다.


크리스탈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껐다. 그녀는 수석 연구원이자 소장이었고, 할 일이 많았다. 이제 막 보고서가 올라왔다.


“마력 수치는 다들 엄청나게 성장했네. 역시 마력적 자극을 줘야 한다니까.”


마력, 역, 力.


세상에 이리도 기괴한 힘이 있을까?


과학이란, 자연 현상과 인간 사회를 체계적으로 관찰하여, 그 관찰 결과를 바탕으로 보편적인 법칙 및 원리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행위와 이에 대한 방법론 그리고 이 둘의 결과로 이루어진 체계적인 지식이다.


그런 점에서 마력이란 지독하게 과학적이면서도 비과학적이었다.


‘보편적인 법칙 및 원리를 발견하고’


각성한 헌터가 아니라면 마력을 다룰 수 없었다. 마력은 보편성을 거부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치밀하고 복잡한 법칙을 가지고 있었다. 헌터라면 남은 생 평생에 걸쳐 자신만의 법칙을 발견하고 발전해나간다.


수학을 모르는 자가 과학을 논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마도공학-이라 이름 붙인 학문-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각성일지도 모른다.


‘벌써 늙었나? 시답잖은 생각이 드네.’


수빈은 고개를 저으며 스크롤을 내렸다. 많이 잡아도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주름살은커녕 잡티 하나 없었다. 50년 후, 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30년 후까지는 자신이 있었다. 라지아의 길드 골드핸드에서 회춘약을 팔기 시작한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역시 시답잖은 생각이야.’


아직 그녀는 할 일이 많았다.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하는 일도 많았다.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국립대의 교수가 되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쌍둥이 중에도 한 명은 각성하고 한 명은 각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졌을 때, 누구는 A급 헌터로 각성해 힘과 영광과 권세를 손에 넣었다. 누구는 E급 헌터로 각성해 던전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누구는 각성조차 못해 그저 사망자 명단에 한 자리를 더했다.


수빈은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거나 생각하고 있어도 될 나이도 자리도 아니었다. 자부심을 가지고 진행하는 연구와 인정받기 시작한 실력, 눈에 보이는 성과들. 그녀는 더 이상 고위 헌터들의 삶을 동경하지 않았다.


그저 알고 싶을 뿐이었다. 같은 소망을 가진 두 사람 중 한 명은 하늘을 날았고, 한 명은 날아온 콘크리트 파편에 맞아 죽었다. 각성의 조건. 영원히 궁금해하고만 있고 싶지는 않았다.


2호. 성별 F.

무자극형 클론 1호와의 마력 패턴 일치율(이하 마력 패턴 일치율) 88%

마력 수치 1081.


9호 성별 M.

마력 패턴 일치율 87%.

마력 수치 1121.


12호. 성별 M.

마력 패턴 일치율 82%.

마력 수치 1048.


17호. 성별 F.

마력 패턴 일치율 85%.

마력 수치 1050.


22호. 성별 M.

마력 패턴 일치율 91%.

마력 수치 1101.


...


수빈은 연구원들이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놓은 프로필과 사진을 한참 동안이나 읽어 내려갔다. 프로필은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와 실시간으로 비교되며 거대한 지도의 일부분이 되어갔다.


‘대부분 마력량 천 초반대에 패턴 일치율은 80대 초중반에서 90대 초. 자아-무의식 활성도도 극히 낮아. 이 정도면 신호는 끊히지 않는다. 예상보다 수치가 빠르게 떨어져서 놀랐지만, 이 정도면 적어도 A급 최상위까지는 무난하게 도달하겠어.’


얇은 철사태 안경을 쓴 연구원을 불러 원본 데이터를 요구했다. 연구원이 난색을 표하며 들고 온 데이터는 방대했다. 인상을 찌푸리고 읽어 나갔다. 원본과 정리본 사이에는 언제나 오류가 있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었다. 중간중간 쉬며 피운 달콤한 담배가 두 갑을 넘어갈 때, 그녀는 43번을 마주했다.


43호. 성별 M.

마력 패턴 일치율 75%

마력 수치 1187.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일치율이 왜 이렇게 낮지? 그런 것치고는 수치가 높다. 자아-무의식 활성도도 높아.’


스읍, “아, 이거 안 좋은데.”


결국 수빈의 입에서 육성이 흘러나왔다. 밸을 누르거나 폰을 울리는 대신 목이 터져라 외쳤다.


“최 연구원! 이리로 튀어와 봐!”


잠시 뒤 복도 저 편에서 거친 발걸음 소리가 났다.


“소장님. 부르셨습니까?”


두툼한 뿔태 안경을 쓴 그녀가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 쪽잠을 자고 있었는지 머리가 부스스했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오늘 클론들의 상담과 신체 검사를 맡았었다.


‘피곤할 텐데.’ 미안했다.


“43호 마력 패턴 일치율 왜 이렇게 낮아? 제대로 재 본 거 맞아?”


“네. 맞습니다. 저희도 이상해서 두 번이나 재검사해 봤는데 딴 애들보다 평균 8%나 낮습니다.”


“그런데 또 마력 수치는 높단 말이지? 알았어. 가 봐.”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갈 때, 수빈은 등에 대고 물었다.


“그, 지금 하던 작업 뭐야?”


“죄수들 특성이랑 클론들 전투 영상 보면서 최대의 자극을 줄 수 있는 상성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 건 새로 들어온 애들 시키고 숙소 가서 자. 걔들도 해 봐야지.”


최 연구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수빈은 가볍게 손짓했다.


...


67호. 성별 F.

마력 패턴 일치율 92%.

마력 수치 2201.


“얘는 어쩌면 S급대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도?”


수빈은 사진 속 67호의 얼굴을 단단히 눈에 새겼다. 그래 봐야 현실에서 마주쳐도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빈은 자신이 만들어낸 가장 훌륭한 피조물에게 마음 속 깊이 애정을 주었다.


똑똑. 그때 소장실 문에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와.”


철사태 안경을 쓴 훤칠한 연구원. 김 연구원이었다.


“소장님. 이서윤 헌터에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예전에 랩에서 쓰시던 계정입니다.”


이서윤? 수빈의 머릿속에서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았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데스 나이트 군단을 이끄는 사령술사. 진홍색 트윈테일에 정장을 입은 사신.

한 눈을 잃고 천리안을 얻은 헌터.

블루문 길드의 이인자.

S급 헌터 이서윤.


“이런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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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9화 +1 21.01.18 107 4 11쪽
18 18화 사형집행 +1 21.01.15 118 3 14쪽
17 17화 +1 21.01.14 110 3 12쪽
16 16화 +1 21.01.13 113 3 12쪽
15 15화 +1 21.01.12 117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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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화 +1 20.12.30 162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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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화 +1 20.12.29 244 5 12쪽
2 2화. 프로젝트 이미테이션 +1 20.12.29 309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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