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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디귿 님의 서재입니다.

기적과 함께(Now is mira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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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디귿
작품등록일 :
2018.01.06 20:23
최근연재일 :
2018.03.11 21:27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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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2,920

작성
18.02.11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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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9화. 우연에 우연이 겹치며 벌어진 비정상적 상황

DUMMY

역시 이 상황에 잠들겠다는 건 헛된 바람이었다.


고속 열차 특유의 소음이 귀를 찌르는 건 MP3와 이어폰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통로를 지나는 사람들이 의자를 짚으려다 내 머리를 치는 것도 창가 쪽 자리로 옮기며 해결됐다.


하지만 결국 가장 결정적인 원인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건 바로 내가 머리를 기댈 수 있는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잘 자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불편한 체질이 된 걸까? 머리까지 기댈 수 없는 시내버스의 작은 의자라면 고개를 꾸벅거리며 졸수 있다. 그런데 고속버스나 기차, 택시같이 머리를 기댈 수 있는 의자에 앉아서는 조는 것도 어려웠다.


물론 술에 취해 신체활동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상태이거나 눈을 뜨고 있는 자체가 고문일 정도로 수면부족 상태라면 가능했다. 하지만 그 외엔 머리를 기댈 수 있는 의자에 앉아 잠을 잤던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 요상한 체질은 생전 처음 타는 비행기나 유럽이라고 다르게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에서 파리로 가는 14시간의 비행, 그리고 스페인 세비야에서 마드리드, 이탈리아 로마에서 밀라노, 스위스 바젤에서 프랑스 파리까지의 장거리 기차 안에서도 역시 잠에 빠지지 못했다.


“휴~”


더 이상 눈을 감고 있는 건 무의미 하다는 판단에 깊은 한숨을 얹으며 억지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래. 여행기 보충이나 하자.


아무리 테이블이 있다고 하지만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글을 쓰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난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기도 만만치 않았다.


유럽에 온 뒤로 여행기는 단 하루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에 여행기를 다시 보니 빠트린 내용이 너무 많았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의 모든 기록을 자세히 기록할 수는 없지만 분명 기록되어야 할 사건이나 감정 등이 많이 빠져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 한 뒤로 틈이 날 때마다 이미 쓴 여행기를 보충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난 기억일수록 떠올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2011년 8월 12일

노숙의 절망 속에서 깨어난 아침. 전날 씻지 못하고 잠을 청한 교구 여인들의 아침 소란함에 생각보다 일찍 깼다. 사실 미쳤다고 남들 다 침낭 덮고 자는데 그냥 맨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가 새벽의 엄청난 한기에 눈을 뜬 게 맞다고 해야지?


교구 행사를 위해 바욘에 도착한 다음 날의 여행기다.


한 달 전에 써놓은 여행기를 찬찬히 읽으며 다시 한 번 그날의 내가 되었다. 추위와 소란스러움에 잠을 깨어 수돗가에서 간단히 세수를 하고 전날 밤 늦게까지 어울렸던 외국 친구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다음 일정이 바욘 교구 내에 있는 루르드 성지(聖地) 순례였기에 봉사자들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분주했다. 수 천 명에 달하는 청년들을 버스에 나눠 태우고 시간에 맞춰 출발하려면 서두를 수 밖에 없었다.


아, 그 분주함 속에 진균이 충전기를 콘센트에 그대로 꽂아두고 왔었지. 신부님들이 봉사자들을 통해 충전기를 찾을 수 있는지 확인해 준다고 하셨었지.


진균이의 충전기 뿐 아니라 루르드에서 만났던 맨발의 수사님들, 더위에 지쳐 그늘진 잔디밭에 누워 휴식을 취했던 일 등이 떠올랐다.


미리 꺼내놓은 포스트잇에 다시 떠올린 기억을 적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의 형태로 보이는 그림자가 테이블 위에 드리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조금 전까지 바쁘게 통로를 오가던 중년의 동양 여자였다. 중년 여자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뭐 하는 거지? 아!’


아차 싶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여기 자리 비었어요?”


그녀는 내 맞은편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네.”


대략 50후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 여자는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 앉았다.


“한국 사람이죠?”


응? 이게 말이야? 방구야?


먼저 한국말로 물어보고 분명히 ‘네’라는 대답 뒤에 자리에 앉았으면서 국적을 물어보는 여자의 의도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자리를 역방향으로 앉았더니 멀미가 심해서 못 앉아있겠더라고요.”


“아··· 그래서 계속 왔다 갔다 하신 거예요?”


“봤어요?”


“네.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이기도 하고 등산복 차림의 동양 사람이 많지 않으니 눈에 띄더라고요.”


“잠도 안 와서 서서 가더라도 앞을 보면서 서 있으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찾는데 마땅한 자리가 없네요. 유학생이에요?”


“아니요. 배낭여행 중이에요.”


“그래요? 난 처음에 한국사람 아닌 줄 알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마을 걸까 하다가 말 안 통하면 그냥 앉으려고 했죠.”


“하하하. 그렇죠. 제가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외모는 아니죠.”


이젠 뭐 새롭지도 않았다. 유럽에 온 뒤로 외모만으로 날 한국인으로 보는 한국인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이탈리아에선 가슴에 쓰인 COREA라는 글씨를 보고도 한국을 정말 좋아하는 현지인으로 알았다는 유학생을 만난 적도 있었다.


“조금 긴가민가하긴 했어요. 한국사람 같으면서도 동남아 쪽이나 흑인 혼혈?”


역시··· 내 정체성은 어디로 가는 걸까······.


“꼭 그것 때문은 아니고··· 일본 사람인 줄 알았어요.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은 뭔가에 그렇게 집중하는 걸 보기 어렵거든요. 일본의 젊은 사람들한테서 자주 보던 모습이라 그런 줄 알았죠. 공부하는 중이에요?”


거슬렸다. 여행기에 향했던 집중이 깨진 것도, 원치 않는 상황으로 이어폰을 빼야 했던 것도, 결정적으로 편향된 시각을 단단하게 가진 저 말투를 듣는 순간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아뇨. 여행기 정리 중이었어요.”


하지만 대답은 감정과 별개의 모습으로 표현됐다. 한국에서 30년을 산 남자의 당연한 응대였다.


“여행기? 슬쩍 보니까 굉장히 자세히 적던데··· 작가에요?”


“아니요. 나중에 다시 보게 될 때 기억 안 나는 부분이 있으면 아쉬울 것 같아서요. 어디까지 가세요?”


여자가 어디까지 가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여자가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나이 서른의 사내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해외여행을 즐기고 있는 모습은 기성세대들이 그저 한심한 한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시각은 회사를 그만 둘 때부터 여행을 준비하고 막상 유럽에 와서 만난 한국인 대부분에게서 공통적으로 쏟아졌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시각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눈앞의 여자가 그런 시각으로 날 볼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있을, 기분 상하는 상황을 기다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생장까지 가요. 젊은 총각도 생장까지 가는 거죠?”


“순례길 걸으러 가시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유럽에 온 거예요. 아까 보니까 저 쪽에 아가씨 둘도 생장 간다고 하더라고요. 아마 이 칸 안에도 생장 가는 사람 많을 걸요.”


한국 사람들이 그 길을 많이 찾는다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기차에 탄 뒤로 등산복 차림의 황인을 보면서도 그들 모두가 순례길을 걷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성당 다녀요?”


중년 여자의 시선이 왼손 검지에 껴있는 묵주반지에 머물러있었다.


“네. 아주머니도 성당 다니세요?”


“같은 한국 사람인 것도 반가운데 성당 다니는 사람 만나니까 더 반갑네. 난 사비나라고 해요. 세례명이 어떻게 돼요?”


사비나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는 오로지 산티아고 순례길을 위해 유럽에 왔으며 이틀 전 파리에 도착해 관광도 하지 않고 호텔에서 휴식을 취한 뒤 이 기차에 오른 것이라 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녀의 준비가 굉장히 철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갖고 있지 않아 보여주지 못하는 수첩에 그 길에 필요한 것들을 빼곡히 적어왔다고 했다. 생장에 가본 경험과 순례자 등록소가 어디 있는지 안다는 사실 빼곤 아무것도 모르는 처지에 이 아주머니를 만난 건 기회였다.


하지만 질문도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할 텐데 아무것도 모르니 뭘 물어야 할지 몰라 대화는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큰 도움 받지 못하고 아주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정보도 얻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보다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조금 더 컸다.


다시 혼자 된 상쾌함에 이어폰을 귀에 꽂자 의식은 다시 약 한 달 전인 8월 12일의 나로 돌아갔다.


루르드에서의 일정을 마친 청년들은 다시 교구별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제 그토록 기다리던 홈스테이 지역으로 출발할 차례였다.


비록 2박 3일의 짧은 시간이지만 언어도 문화도 완전히 다른 나라의 가정에서의 홈스테이. 세계청년대회 일정이 나온 반 년 전부터 가장 기다리던 일정 중 하나였다.


교구 일행을 태운 버스는 남부 프랑스의 한적한 시골길을 약 2시간 정도 달려 낯선 풍경의 한 마을에 도착했다. 주황색 기와가 인상적인 고즈넉한 마을에서 우릴 기다리는 것은 짧고 조촐한 환영회였다.


아니, 환영회라고 부를 만한 것도 아니었다. 지난 일정에 지친 외국 손님들이 홈스테이 가정과 조우하기까지 무료함을 달랠 수 있을 정도 작은 배려였다.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조촐한 환영회나마 우리를 반기는 그들의 미소 속에서도, 나와 비오를 맞이한 쟝자크 가족과의 만남에서도,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손바닥만한 가리비를 받아 목에 걸으면서도 알지 못했다.


아버지 쟝자크와 어머니 앤, 행사의 봉사자이자 그들의 딸인 엠마누엘과의 즐거운 저녁 식사에서도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배가 터질 듯 푸짐한 점심을 먹을 때까지도 몰랐다.


예상은 그만두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후가 되어 교구 일행을 다시 만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전날 이탈리아, 리투아니아 청년들과 도착해 하루를 묵은 이 마을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가장 보편적인 길인 프랑스 길의 시작 마을인 생장삐드뽀(Saint Jean de Pied Port)였던 것이다.


이건 뭐지?

기적?

운명?

걸으라는 건가?

걸어야만 하는 건가?

난 이 길을 걸을 운명이었던 걸까?


내가 기적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을 믿었던가? 아니. 믿지 않았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 벌어진 일에 대해 상식적인 판단이 서지 않을 때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더군다나 그런 것들에 의미나 상징성을 부여하는 꼴들이 참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얽히고설킨 상황의 복잡성이 낳은 이해 못할 결과물을 놓고 순간적이나마 기적이라고 생각한 내게도 한심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 믿지 못할 우연과 놀라움 속에서도 여전히 확실하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마치 행동을 부추기는 것 같은 우연을 앞에 두고도 생장을 떠나는 순간까지 결정을 짓지 못했다.


생장을 떠나 마드리드, 바로셀로나, 세비야 등을 거쳐 베니스, 로마, 나폴리, 그리고 스위스에 닿았다. 그 한 달 정도의 시간동안 내 마음과 발끝은 조금씩 그 길을 향해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스위스에서 확실한 마음을 굳혔다.


흔들리는 기차에서 글을 쓴 탓인지 약간의 멀미 기운이 찾아와 수시로 창밖이나 기차 안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20140405_124137.jpg


작가의말

술을 좋아합니다.

술자리도 좋아하고 술 자체도 좋아합니다.
취하는 것도 좋아하고 알딸딸한 것도 좋아하고 몽글몽글한(?) 것도 좋아합니다.
덕분에 매일 술을 마십니다-_-
키보드를 두드려야 하는데 매일 마십니다...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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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화. 노 티켓! 18.03.11 80 0 7쪽
» 9화. 우연에 우연이 겹치며 벌어진 비정상적 상황 18.02.11 66 0 12쪽
8 8화. 스페인 북부의 이 천리 길 18.01.27 112 0 11쪽
7 7화. 러브레터 18.01.21 108 0 17쪽
6 안드레아와 안드레아 18.01.14 113 0 13쪽
5 5화. e-mail 18.01.12 92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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