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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land o' violence

옛날에 썼던 망한 글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학인생
작품등록일 :
2020.06.21 10:21
최근연재일 :
2020.06.2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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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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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쪽

무진행

DUMMY

(0) 병사


낙조가 부둣가의 스산한 공기를 검붉은 빛으로 물들이고 나서도 바닷속은 검청색으로 차갑기만 했다. 물때 지났으니 해가 지렷다. 승형은 멀거니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돌아갈 때쯤 떠오를 샛별과 배고파 짖을 개의 구슬픔이 뒤이어 생각났다. 그러나 오늘은 밥을 줄 수가 없다.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룻배가 닿은 곳은 오작도. 까마귀와 까치가 이 섬의 산세에 많이 들러붙어 살고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그 까마귀들은 지금 때 아닌 포식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덤불과 관목림을 헤치고 거두는 자 없어 푸른 잎 무성한 무우밭을 지나 들판으로 나아가면 아직도 말라붙지 못한 핏자국과 주인 잃은 채 녹슬어가는 검 그리고 갑옷이 승형을 반겼다. 코가 아릿한 쇳내를 가득 들이마시며 승형은 고함을 질렀다.


"이놈!"


널려 있는 시체의 눈알을 쪼아 먹던 까마귀가 눈알을 부리에 문 채 푸드득 날아올랐다. 발톱에서 떨어진 찐득한 진혈이 지면을 적셨다. 얼마 전 겨우 끝난 왜구의 준동이 가장 심했던 곳이 이 오작도였다. 뱃바닥 뾰족한 배와 돛 넓은 배를 몰고 온 짐승들은 양민을 약탈하고 백성을 노예로 잡은 채 이 곳 오작도에서 증원과 돌아갈 배를 기다렸고 곧 모두 목숨을 잃었다. 하늘로 떠나는 데에는 배가 필요하지 않았다. 주인 잃은 배들은 바닷바람에 비꺽거렸고 뱃전마다 따개비와 이끼가 황폐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것은 조선군도 마찬가지였다. 왜구는 지독하고 악랄하나 전쟁터에서는 그것이 미덕이었다. 그들은 강했다. 왜구는 허릿춤에 한 됫박씩의 특별한 고기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조선인의 코였다. 놈들의 군령은 한 됫박의 코를 자른 자에게만 약탈을 허용했다. 눈이 시뻘개진 왜구들은 아기의 코부터 노인의 코까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잘라내 소금에 절여 가져갔다. 조선군도 공적을 위해 시체를 해하긴 마찬가지였다. 조선군은 귀를 썰었다. 고로 평원에 있는 시체의 본적을 알아내기는 쉬웠다. 코가 없으면 조선놈이었고 귀가 없으면 왜구였다.


코가 없으니 향불 사르는 쓰디쓴 내음을 맡으랴. 귀가 없으니 여염에서 울리는 곡 소리를 들으랴. 이들 모두 구천을 떠나지 못할 외로운 넋들이었다. 승형은 희미한 금속음을 들은 듯했다. 피안을 건너서도 성불하지 못해서, 황천 개울가에 흐드러지게 핀 빨간 피안화 무리를 짓밟으며 너는 조선놈이구나, 너는 왜놈이로구나 악을 쓰고 있을 혼백의 싸움 소리였다.


왜구의 찰갑을 걷어내고 고기주머니를 끌러 귀를 꺼내 대지에 뿌리며 승형은 평원을 가로질렀다. 야트막한 구릉 위로 가득 쌓인 시체더미는 노을에 잠겨 있었다. 그 위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림자가 하나 있다. 곧 그 그림자는 움직였다. 서걱, 고기 써는 소리가 들렸다.


"해거름이 한창인데 식사는 하셨는지요?"


승형의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다. 서걱. 또 다시 들린 고기 써는 소리는 무정했다. 그 남자는 연록피로 튼튼히 덧댄 비홍색의 두정갑을 입고 있었다. 그는 무진도의 병마절도사인 이영청이었다.


영청은 이 들판에 매여 있는 마지막 사람이었다. 왜구들은 영청의 식솔을 노렸다. 돈을 뿌려 하인을 매수하고 산행을 나가던 영청의 일가 피붙이를 모조리 납치해 이 곳 오작도에 유폐했고 오작도를 한 갑자 동안 내어줄 것을 요구했다. 영청은 거절했다. 영청은 섬을 지켰고 가족을 잃었다. 영청이 군사를 일으켜 오작도에 당도하자 이 구릉 위에서 왜구들은 영청의 딸의 육신에서 튀어나온 부분을 모두 자르고 오목한 부분에 모두 쳐박아 동앗줄로 묶고 가마솥에 던져 넣었다.


그래서 영청은 싸움이 끝나도 이 땅을 떠나지 못했다. 그저 초점 잃은 눈으로 귀와 코를 바라보며 시체로부터 왜구를 가려내 튀어나온 부분을 잘라내고, 이빨을 드러내며 썩어가는 입에 쳐박고 있을 뿐이었다. 처참한 꼴이 된 딸 외에는 가족의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전란 중 이름 없는 주검으로 널부러져 까마귀의 밥이 되었을 것이 십중팔구였다.


백성들은 영청을 칭송했으나 영청에게는 그 소리가 닿지 않았다. 영청도 귀가 잘려나간 것만 같았다.


"벌써 이레 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인삼 달인 물과 미음을 쑤어 왔으니 자시지요."


그 말은 까마귀의 홰 치는 소리에 묻혔다. 어디선가 날아온 까마귀 한 마리가 영청의 어깨에 올라탔다. 곧이어 까마귀가 한 마리씩 영청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청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정육도로 잘라낸 왜구의 손마디를 왜구의 눈구멍에 쳐박았다.


"곤수! 저는 가족을 잃어본 일이 없어 어찌 감히 곤수의 헤아릴 길 없는 슬픔을 알 수 있겠습니까만, 비감에 젖어 몸을 해치는 것은 장부의 일이 아닌 줄로 압니다. 제발 이 미음 한 술이라도 자시지요. 모두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음식이라면 이미 먹었소."

"예?"

"이 것들의 품에서 소금을 꺼내 이 것들의 살로 젓갈을 담가 먹었소."


승형은 할 말을 잃었다.


"그닥 맛은 없더군."

"곤수, 어찌하여 인간을..."

"인간? 이 것들이 인간이란 말이오?"


쿵! 정육도는 목뼈를 끊었다. 굴러떨어진 왜구의 머리통을 향해 까마귀들이 맹렬히 달려들었다. 영청의 어조는 너무나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워 오히려 공포스러웠다. 승형은 엎드려 조아리고 외쳤다.


"공자께서 이르기를 사해가 모두 동포라 하였습니다. 영청께서 지킨 백성들과 병사들이 한 가지로 곤수의 덕을 칭송하며, 곤수의 슬픔과 애통함을 제 몸의 애통함과 슬픔같이 여깁니다. 거리에서는 향을 사르고 집집마다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백성들 또한 어찌 영청의 가족 아니겠습니까. 부디 슬픔을 거두고 가장을 걱정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가족이라. 그럼 승형, 한 가지 묻겠소."

"하문하시지요."

"내가 백성들에게 내 가족처럼 되라 하면 그들은 승락하겠소?"

"소인이 밝지 못하여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이 섬에서 죽어간 내 가족과 병사들처럼 하라 명한다면 따르겠냐 이 말이오."


푸드득, 엎드린 승형의 귀에 날개짓 소리가 울렸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저물고 있었다.


"그야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가 이 땅의 백성의 대표로서 확언할 수 있습니다."

"그렇소?"


푸드득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마치 붕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한 거대한 소리였다.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승형은 깜짝 놀라 뒤로 엎어졌다. 한 두마리씩 날아오던 까마귀가 어느새 수백을 헤아리며 영청을 중심으로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영청의 눈은 달빛처럼 훤하게 빛났다.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푸른빛이었다. 까마귀들이 일제히 까악거리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승형은 벌벌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손가락과 발톱 따위가 쳐박힌 병사들과, 귀 없는 병사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일어나 역겨운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들의 입안에서 바글대던 구더기가 떨어져나와 승형의 피부를 훑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영청의 손이 승형의 입을 막았다.


"그럼 명하겠소. 이 땅과 하나가 되시오."


오작도. 날개 검은 새만이 오가던 이 외딴 섬.

그 곳에 파멸이 임했다.


(1) 유생


황토길 위로 물동이의 맑은 물이 쏟아져내렸다. 군졸의 뒤를 따라 갈색 옷 입고 보라색 건을 두른 직동들이 성균관의 앞을 말끔하게 청소하고 있었다.


"설사 말을 탄 자가 지나간다 하더라도 먼지 하나 안 날 만큼 말끔하게 청소해야 한다!"


아방사령이 소리치자 기다렸다는 듯 예이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짹짹대던 참새가 쏟아지는 물을 피하지 못하고 쫄딱 젖어 비실거리다 풀숲으로 뛰어갔다. 이 청소의 물자국은 성균관에서 시작하여 궁으로 이어졌다. 유소의 준비였다.


곧 연한 쪽빛의 유복으로 의관을 정제한 유생들이 예를 갖추고 늘어서 궁을 향해 소행했다. 줄지어 걷는 하늘빛의 유생들을 황토색 옷의 반인들이 둘러싸듯 호위한 것이 꼭 하늘과 땅이 함께 움직이는 듯 했다.


맨 앞에 있는 자는 말끔하게 생긴 젊은 생원이었다. 유난히 높은 콧대와 콧날이 돋보였고 눈꼬리가 내려간 눈매는 장난기 있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상소문이 들어 있는 함을 나르고 있는 것은 그였다. 그가 소두라는 뜻이었다.(*소두: 상소문의 대표)


유소가 시작되었다. 소두는 봉함된 상소문을 꺼내 힘차게 읽어나갔다. 가려진 발과 창호문 너머에 곤룡포를 입은 주상이 앉아 있을 것이다. 소두를 제외하고 모두 자리에 앉아 예를 경건히 했다. 그러나 그들의 엄숙한 얼굴은 소두가 상소문을 읽어나가기 시작하는 순간 형편없이 핼쑥해졌다.


"병사를 맡은 영청이 오작에서 사라진 지 수 년이 지나 무진도의 일대가 기묘한 재앙으로 황폐해졌음이 풍설로도 무성하여 하늘에 닿았을 진대, 조정에서는 어찌하여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지 신은 그것이 가장 궁금하외다. 이미 왜의 재침으로 곤궁과 근심에 찌든 백성들은 뜻밖의 환난에 삶의 기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음기가 하늘에 차 서리마저 엄혹한데, 이들은 대체 무엇에 의지해야 하오리까. 어찌하여 주상께서는 지방관을 파견하시거나 병졸을 보내시지 않으시나이까? 이는 임금의 도를 다하지 않은 것이옵나이다."


임금의 도를 다하지 않았다는 말을 꺼내자 유소를 올리는 유생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저 미친 놈을 잡으라는 말도 이어졌다. 하지만 소두는 아쟁을 농현하는 것 같은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근래 무진에서 재앙을 피해 인근의 피난촌으로 달아난 이들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이 다만 주린 배만 움켜쥐고 있을 따름이옵고, 미처 무진에서 달아나지 못한 민초는 생사조차 불분명하옵나이다. 정 병졸이 없다면 근위병이라도 풀어 백성을 환난에서 구해내는 것이 백성을 다스리는 상책이옵고, 정 상책을 이룰 수 없으시다면 관리를 파견하시어 민심을 다스리는 하책이나마 하시는 것이 고금의 도리에 비추어 옳을 줄로 아뢰옵나이다."


그리고 끝맺었다.


"이는 모두 신이 문묵의 보잘것없는 재주로 차마 폐부에 고인 것을 함묵할 수 없어 올리는 것으로, 동재와 서재의 유생들은 이 상소와는 전혀 관계가 없사오니 성총을 내리시려거든 다만 신 하나에게 내려주소서. 엎드려 빌며 올리나이다."


낭독을 마치고 봉함되어 임금께 올라간 상소문에 적힌 이름은 정휘영, 하나 뿐이었다. 휘영은 유소가 끝나기도 전에 반인들에게 붙잡혀 단을 내려왔다.


"재회를 개회하여 재인벌인을 실시한다!"


서재청에 나이 순을 맞추어 서쪽을 바라보며 늘어앉은 유생들은 장의(*장의: 성균관에서 일종의 학생회장과 같은 지위)의 외침에 모두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재직(*성균관의 하인)에게 인도받아 절을 하고 앉은 장의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사나워 보이는 수염을 기른 유생이었다. 이름은 이계성이다.


색장이 바로 발의를 시작했다.


"정휘영 유생의 출재(*출재:퇴학)에 대하여 의론을 구하고 싶습니다!"

"옳소!"


사방에서 동의의 말이 쏟아져나왔다. 장의는 바로 색장에게 물었다.


"사유는 무엇이오."

"사유는 유소에 있어 소두라는 중책을 맡았음에도 재회의 결과로 정해진 재생들의 중론을 무시하고 사사로이 본인의 의견을 상언하여 예를 짓밟은 죄입니다!'

"무릇 성균관의 유소는 다만 재생들의 유소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국의 선비들의 의견을 대표하여 주상께 아뢰는 것일진대, 그것을 사사로이 참칭하였으니 그 죄가 팔도의 선비의 학식과 지혜의 무게를 모두 합친 것 만큼이나 무겁다 할 수 있습니다!"

"휘영이 일을 그르치고 예를 가볍게 여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원점을 깎는 정도로는 이제 묵과할 수 없습니다!"

"휘영은 이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할 말이 있소?"

"없습니다."

"역시 반성하는 빛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출재 외의 어떤 형벌도 가벼울 것입니다!"

"출재를!"

"휘영의 출재를!"

"정숙! 정숙하시오."


계성의 외침에 붕 떠올랐던 장내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이미 좌의정 대감께서 이 건에 대하여 소를 올렸다 들었소. 내일이면 그 결과가 하교될 것이오. 어차피 하루만 기다리면 조정의 의사를 알 수 있는데 굳이 출재를 시킬 것은 없다고 생각하오."

"그렇다면 장의께서는 어떤 벌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휘영이 조정의 뜻이 내려올 때 까지 반인의 일을 도맡아 폐를 끼친 동료 재생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오."

헙 하는 소리가 울렸다. 특히 나이 어린 순에 앉아 있는 유생들이 그랬다. 이윽고 다수결이 있었다. 거의 만장일치에 가깝게 동의가 구해졌다.

"그럼 재회를 종료하도록 하겠소. 휘영은 일단 물지게를 나르는 반인을 돕도록 하시오."


그렇게 재회는 끝이 났다.


"아이고 생원님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요."


새벽 5시, 막쇠는 유복을 입은 채로 비틀비틀 물지게를 나르는 휘영을 받치며 말했다. 성균관에서 물을 나르기 위해서는 1리 떨어진 실개천까지 움직여 물통을 채워야 했고, 하나의 물독을 채우려면 물지게를 지고 네 번을 왕복해야 했다. 그리고 하루에 사용하는 물독은 마흔 개 남짓이다. 즉 반인들은 하루에 이 물지게를 지고 160번을 왕복해야 하며, 도합 320리를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 된다. 물론 여럿이 나누어 나르지만 그래도 충분한 고역이었다.


"뭘 말인가? 저번에 반촌에서 연줄에 사금파리 발라준 거? 그거야 그 학동이 계속 지고 있기에 불쌍해서 그랬지."

"쇤네 앞이라고 능청 떨지 마시지요. 어찌하려고 임금께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아시잖습니까. 싹 다 죽인다구요."

"그럼 죽는 것이지 뭐 별 수 있나."


휘영보다는 오히려 막쇠가 더 조급하고 걱정스러워 보였다.


"가끔 생원님을 보면 생원님이 정말 이 땅에서 가장 지혜로운 200명 중 한 명이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요. 이 놈조차 임금님께 대들면 죽는다는 것은 아는데 말입니다."

"이보게, 주상께 대들어서 죽은 사람보단 주상께 대들지 않았는데도 죽은 사람이 훨씬 많지 않은가. 나는 오히려 살 공산을 높인 셈이지."

"하여간 말장난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요."


이제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끓였다. 하얀 증기가 황토굴 안을 가득 채웠다. 휘영과 막쇠는 바가지로 뜨신 물을 퍼 놋 대야에 물을 담았고, 또 다른 반인은 그 대야를 들어 동재와 서재의 숙소 앞으로 날랐다. 세안을 위한 물이었다.


"북채는 이리 주게. 북은 내가 치겠네."

"괜찮겠습니까요? 아무렇게나 친다고 소리가 울리는 건 아닌데."

"내가 방 안에서 잘 때는 저놈의 기상 북소리만큼 증오스러운 것이 없었네. 그러니 한 번 있는 힘껏 두들겨보고 싶어서."

북채를 건네받은 휘영은 매달린 가죽북을 세 번 두들기고 뱃심을 모아 외쳤다

"기침!"


이와 함께 성균관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휘영에게는 성균관에서의 마지막 아침이 될 지도 모르는 아침이었다.


"근데 그 소문이 정말 사실입니까요?"

"무슨 소문?"

"무진도에 귀신이 나타났다는 소문 말입니다."


한낮, 막쇠는 휘영과 함께 싸리빗자루로 명륜당을 청소하던 중 뜬금없이 그런 말을 꺼냈다.


"허, 나보다는 자네가 더 잘 알 듯 한데, 그 귀신이 어떻다던가?"

"소문에 따르면 사해 구주의 모든 괴물들이 무진에 다 몰린 것 같다는데요. 거기서 도망쳐나온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시체가 살아 움직이고 땅가죽이 시꺼멓게 죽으며 짐승의 모습을 한 괴물부터 나찰의 모습을 한 괴물까지 쏟아져나온다고."

"어느 정도는 과장이겠지."

"하지만 유소에 올리신 풍설이라는 게 그 소문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요? 생원님도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니 임금님께 아뢰는 상소에까지 올린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저자의 풍문은 안 믿지만 생원님은 믿습니다."

"허허, 아까는 자네보다 멍청한 것 같다더니."

"그렇게까지는 말 안했습니다요. 하여간 우리들의 이치로는 도저히 닿지 않는 기괴한 것들로 가득한 모양입니다. 수유의 소굴이라 할 지라도 그보다는 안락할 것 같습니다."

"일단 누구든지 공통적으로 기괴하게 변한, 갑주 입은 시체들을 보았다는 말은 하더군."

"예. 우리 조선군과 왜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시체에 혼이 돌아와 살아난 것인가?"

"우리는 그런 주술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하니 말입니다. 눈 뜨고 소경이 된 기분입니다요."

"좀 더 자세한 정보는 아는 게 없나? 내가 귀동냥한 것보다는 역시 자네가 들은 게 더 많을 것 같아서 말일세."

"소문을 주워들어 취합한 세인들이 평하기로는, 이 사태의 원인은 오작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고 합니다."

"오작도에? 어째서?"

"영청께서 사라지신 곳이니까요. 도깨비도 베어내는 영청을 위험하게 할 정도면 얼마나 사특한 귀신이 거기 머물러 있다는 것일지 쇤네는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요. 근거로는 오작도 근교에서는 살아서 무진을 빠져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정도가 있지요."

"무슨 이야기를 그리 정답게 나누시오."


휘영과 막쇠는 고개를 홱 돌려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두루마기를 곱게 차려입은 유생이었다. 기억에 있었다. 사량기재생(*사량기재생:기부입학생)으로 성균관에 들어온 박성이었다. 성은 이죽거리며 말했다.


"휘영께서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귀어 사대부보다 오히려 반인과 환담하는 것을 더 즐기는 듯하니 참 부럽소이다."


말이 부럽다는 것이지 노비인 반인과 수준이 똑같다고 비꼬는 것이었다. 배움이 얕은 막쇠도 알아들을 수 있는 비꼼이었지만 휘영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성께서는 무슨 일이시오?"

"말을 전하러 왔소. 대사성이 유소의 일로 휘영을 부르고 있소이다."


막쇠는 머리를 조아리고 성이 사라질 때 까지 공손히 서 있었다.


대사성은 학창의를 입고 불상이라도 되는 듯 정갈하게 앉아 있었다. 희게 바른 벽과 하나가 된 듯 했다. 팔각으로 모양을 낸 장지문과 난이 그려진 족자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제일 눈에 띈 것은 선객이었다. 계성이 대사성 앞에 공손히 앉아 있었다.


"계성 옆에 앉게."


스승을 보는 예를 갖추고 휘영은 자리에 앉았다. 눈썹 털도 수염도 희게 변한 대사성의 눈두덩은 깊게 주름이 내려앉아 있었다. 대사성이 말할 때마다 입가와 눈 근처의 주름이 움직였다.


"유소의 내용을 멋대로 바꿨다고 들었다만."

"드릴 말이 없습니다."

"과를 인정하는 건가?"

"아니오, 정말로 드릴 말이 없다는 뜻입니다."


계성이 홱 눈을 돌렸다. 역대 최연소로 동재의 장의 자리에 앉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이 남자는 사람을 노려보는 것 만으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살모사 같은 희안한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휘영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럼 계성은 할 말이 있는가."

"예. 다시 한 번 유소를 준비하고 싶습니다. 허락을 내려주십시오."

"무슨 내용인가."

"나라의 도를 지키고 주군의 보위를 굳건히 하는 내용입니다."


휘영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휘영에게는 특유의 이상한 웃음이 있었다. 한 번 들으면 누구나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특이한 음색의 웃음이었다. 예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대사성은 문제삼지 않았다.


"무진에서 빠져나온 백성들이 굶주리건 헐벗었건 그냥 놔두고 군을 둘러 북쪽이나 방비하자는 상소입니다. 바꿔 말하면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내용이지요."

"재회에서 머리를 맞대어 결정한 내용입니다."

"재회에서 동재의 청인이 결정한 내용이지요."

"국가의 존망이 백척간두에 올라선 지 십 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위태한 다리를 건너는 마음으로 국가를 운영함이 옳습니다."

"백성 없는 국가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아무런 죄 없이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해내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하지 아니함이 낫습니다."

"휘영은 어설픈 이상론은 거짓을 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 만큼 현명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불민하여 알지 못하겠군요. 사사로운 의견에 머릿수를 더해 민의를 가장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을 말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대사성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듯이 둘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계성과 휘영은 전혀 눈을 마주치고 있지 않았다. 둘 다 오직 대사성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접근은 어떨까요. 동재는 청인을 기르는 집이지요. 영청도 동재에서 수학한 청인의 자랑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영청은 훈신입니다. 그를 모욕하는 말을 입에 담음은 도리에 어긋납니다."

"영청을 모욕하는 것은 청인들 당신들입니다. 당신들은 혹여 영청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고 있지 않습니까?"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휘영은 과연 소문대로 두려움이 없군요."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 뿐입니다. 이십여년에 걸친 홍인의 정권이 끝나고 얼마 전 간신히 청인이 정권을 잡았지요. 그런데 청인의 거두인 영청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음이 드러난다면 또다시 피바람이 몰아치고 청인은 정권을 손에서 놓치겠지요. 그게 두려워 청인이 기반을 다질 때까지 조사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것 아닙니까."


대사성은 눈을 깜빡였다. 휘영은 격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


"얼마 전부터 계속해서, 신뢰할 수 있는 창구와 신뢰할 수 없는 창구를 통틀어 무진에서 조선군의 갑주와 왜군의 갑주를 입은 시체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청인은 이것이 시체라는 것은 헛소문이고, 가족을 바쳐 백성의 지지를 끌어낸 영청이 군사를 키우고 있는 것이라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휘영의 말은 도를 지나치고 있습니다."

"혹여 반란을 획책하는 것이 아니고 귀신의 일이 맞다면 그대로 놔둬도 백성 몇 다치는 것 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영청이 반란을 획책하여 성공한다 하더라도 영청은 청인의 거두이니 청인은 다치지 않겠지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계성이 말했다.


"군을 보내어 조사를 실시했을 때 영청이 반란을 꾸미고 있지 않았다고 칩시다. 홍인이 그것을 놔두겠습니까? 아직 언론은 홍인의 손에 있습니다. 약간의 트집거리만 있어도 반역으로 몰아 목을 치라는 표를 붙일 것이고 주상께선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으십니다. 반드시 쓸모 없는 피가 흐르게 될 것입니다."

"쓸모 없는 피는 이미 흐르고 있습니다! 무진의 피난민이 그 피의 주인입니다."

"나에게는 이름 모를 백성들의 피보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의 피가 더 중합니다."

"대체 언제부터 성균관이 이런 말이 오가는 투전장이 되었단 말입니까..."


휘영의 음성이 맥이 빠진 듯 탁하게 변했다.


"동재의 청인들은 계성 당신이 대표해 주겠지요. 서재의 홍인들은 우의정이 대표해 주겠지요. 하지만 그 이름 모를 백성들은 누가 대표해준단 말입니까? 그들을 대표해줄 사람은 임금밖에 없습니다. 고로 이를 내버려 두는 것은 임금의 도를 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상소에서 그 말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잡론이 길었군요. 결국 결정으로는 군을 보내 무진을 조사하느냐, 마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군을 보내면 반드시 청인이 죽는다는 것 뿐입니다. 군을 보내고 지역을 위무하는 것은 언론에서 홍인의 세력을 몰아내 조정을 깨끗이 한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휘영 당신도 홍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이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그만두십시오. 대사성께서는 유소를 다시 올리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음률 같았던 말의 폭풍이 가라앉고 방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고요를 깬 것은 대사성이었다.


"가부는 자정에 다시 정하겠다. 그 때 좌의정이 올린 소에 대한 봉서가 내려올 것이야. 계성과 휘영은 자정에 다시 나를 찾아오도록."


축객령이었다. 대사성의 방에서 빠져나온 휘영과 계성은 기묘한 동행을 했다. 서로 바라보지도 않은 채 같은 방향으로 쭉 걸어갔던 것이다. 그들은 성균관 대성전의 은행나무 앞에서 멈춰 서고, 곧 좌우로 갈라져 흩어졌다. 가을은 깊어 부채꼴의 은행잎이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3시 무렵, 유생들이 학당에 모여 강독하는 낭랑한 소리가 널리 퍼질 즈음. 휘영은 막쇠와 함께 미나리를 캐고 있었다. 가을이라 풀이 억세게 여물어 뿌리가 뽑혀난 진초록 미나리에선 기름 향기가 싸하게 풍겨 왔다.


네 소쿠리를 캐면 한 광주리의 미나리무침이 된다. 소쿠리 가득 미나리를 캔 다음에는 조촐하게 반촌의 주막에서 식사를 했다. 막쇠와 함께 주막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막의 일을 돕는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켰다. 근래에 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머리를 한 줄로 곱게 땋은 여자아이다.


"주모! 손님 오셨습니다!"


그리고 낑낑거리며 걸상을 두 개 가져와 날랐다. 휘영의 것은 옻칠된 사각의 소반이었고 막쇠의 것은 개다리소반이었다. 그러나 주문은 똑같이 시래기국밥이었다. 곧 된장에 시래기와 다진마늘 따위가 듬뿍 들어간 팔팔 끓는 국밥이 도착했다.


"한 술 뜨니까 비로소 살 것 같은 느낌이 드네."

"오늘은 특히 일이 많아 밥때가 늦었습니다요."

"그런데 자네는 이게 첫 끼 아닌가? 평소에도 이렇게 늦게 밥을 먹나?"

"오늘은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근궁(*근궁= 미나리 궁. 성균관을 이렇게도 부름)에서 밥을 먹는 유생들이 적어 반인들도 아침을 먹지 못한 것입니다요. 1년에 한 두어번은 이런 일이 있지요."


일반적으로는 유생들이 먹고 남긴 밥을 반인들이 마저 먹게 된다. 그런데 오늘은 유생들이 성균관 내에서 밥을 먹지 않아 반인들도 따라서 밥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럼 이건 두 끼에 갈음하는 중대한 식사인데 찬이 이렇게 초라해서 되나."

"찬이 초라하다고 하면 여기 주모가 화를 내니 목소리 줄이시지요! 아주 독사 같은 여자입니다. 가끔 객이 생원님 같은 불평을 하면 이렇게 받아치곤 하지요. 찬을 달라고만 하면 수십가지를 차려줄 수 있는데 왜 궁시렁대냐고."

"허허, 그래 그 수십가지 반찬이라 함은?"

"무김치, 배추김치, 백김치, 순무김치, 열무김치, 총각김치, 나박김치, 오이김치, 깻잎김치, 갓김치, 미나리김치..."


휘영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상을 나르고 바닥을 닦던 여자아이가 깜짝 놀랄 정도의 웃음이었다. 맡은 일을 마치고 밥을 먹으러 온 반인들과 길손들이 주막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손님들 중에는 휘영과 아는 얼굴이 있었다.


"막쇠 네 이놈, 또 생원께 들러붙어 일은 안 하고 농땡이치고 있느냐."

"아침부터 허리가 빠지게 돌아다녔다 이놈아."


등에는 지게를 메고 허리춤엔 무명 주머니를 찬 사람이 빙긋 웃으며 대뜸 호통을 날렸다. 그리고 그들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원께서는 이 막되먹은 놈이랑 자꾸 놀아주지 마시지요. 버릇 나빠집니다."

"장사치 네놈이랑 노는 것 보다야 낫겠지."


새로 앉은 남자는 김일춘이라고 하여, 반촌의 주막들에 물품을 대는 상인이었다. 상인이란 무릇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을 돈으로 바꾸는 데 능숙한 사람이라 일춘도 우선 사람을 가리지 않고 두루 사귀되 쓸모가 없다 싶으면 어물쩍 연을 끊어 버리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다. 좌랑 정랑은 물론이오 판서나 정승의 인까지 제수받을 수 있는 성균관의 유생인 휘영에게 어떻게든 줄을 대어 보려고 일춘이 달라붙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필연적인 일이었다. 눈치가 빠른 반촌의 사람들도 그의 그런 사람됨을 알고 있어 가끔 밉살스럽다는 얘기가 나돌곤 했지만, 그보다 더 눈치가 빠른 일춘은 그런 기색이 보이면 바로 모아둔 돈을 아낌없이 풀어 닭을 잡고 막걸리를 부어 주어 미운 마음을 녹이곤 했다. 그리고 능청스럽게 껄껄대며 농지거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 밉살스러워도 정이 들기 마련이었다.


"오늘은 근궁에선 논강이 없는 모양인데, 이 뒤에도 시간이 나면 저기 윗쪽 주막에 들러보는 것이 어떠십니까요? 새로 작부가 들어왔는데 그 자태가 보통이 아니라 인근 사방에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주막에 작부가?"

"물론 아직은 작부가 아니지만 돈이란 물건은 양기가 가득해 한 꾸러미 가슴에 찔러주면 더위를 참지 못하고 옷고름을 풀기 마련이지요. 그러고보니 저번에 바둑 진 내깃값을 청산하지 않았었구나, 막쇠야 너도 같이 가자. 비용은 내가 대 주마."


이럴 때 막쇠를 끌어들이는 것이 일춘의 수법의 능숙함이었다. 여느 노비와 같으면 참한 처자의 속곳을 벗겨볼 기회가 있다 하면 먼저 몸이 달아 가고 싶은 티를 낼 것이다. 그러면 마지못해 휘영도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막쇠는 여느 노비와는 달랐다.


"난 그런 덴 흥미가 없으니 가려거든 너 혼자 가거라."


딱 잘라 거절하자 더 이상 일춘도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일춘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이제 그런 수작을 그만두겠다는 뜻이었다.


"주모 여기도 국밥 하나 말아주시게. 날달걀도 하나 까 넣어주고."


그리고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자 상인들은 오히려 더 바빠진 모양이었다. 전란으로 황폐해진 마을 가운데 상인의 손길을 애타게 바라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일춘도 그런 마을을 돌아다니며 짐승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한 병장기며 황무지가 된 밭을 갈기 위한 농기구 따위를 팔아 재미를 좀 본 모양이었다.


"그나마 한양 일대와 중부, 북부지방은 좀 낫지요. 남쪽은 지금 황폐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내 생전에 못 보던 기묘한 꼴까지 보았다니까요."


"허어. 무슨 꼴이길래?"


"피가 뚝뚝 떨어지는 붉은 고기와 짐승의 내장으로 들판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숨어 지켜봤더니, 글쎄 사람들이 사라지자 수유들이 몰려와 제삿상을 받아먹지 뭡니까."

"수유가?"

"마을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왜군이 수유의 영역을 건드려 수유들이 몰려가 왜구를 죽이고 잡아먹은 모양이더군요. 그리고 왜군 고기에 맛이 들린 수유들이 그쪽 방면에 있는 왜놈들을 아주 싸그리 박살을 내 주었다고 합니다. 관군보다 수유가 더 믿음직스러우니 감사함을 담아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군자는 괴력난신을 믿지 않는 법이라고 하였거늘..."

"글은 글이고 사람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이리도 괴로우니 글 많이 읽은 자들부터 먼저 미치는 모양이더군요. 저 밑에서는 의관을 풀어헤치고 돌아다니며 주술을 외는 미친 선비나 병장기에 피를 바르고 고기를 씹는 파계승을 보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참, 글 읽는 자들 부터 미친다는 말을 하고 보니 여기서도 미친 놈이 하나 나왔다던데요."

"무슨 말이냐 이놈아."

"귓구멍 좀 열고 다니거라, 너는 여기 살면서 주워들은 것도 없느냐? 상소의 내용을 멋대로 바꾸어 임금이 도를 다하지 않았다며 궁 한가운데서 주상을 면박했다는 그 미친 유생 말이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 쯤 목이 달아나겠지. 글을 하도 많이 읽어서 돌아버린 것이 틀림 없다. 안 그렇습니까요?"


그 글을 하도 많이 읽어서 돌아버린 미친 유생은 커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어느새 국밥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주막을 나와 반촌의 넓적둥글한 돌 박힌 흙담길을 빠져나오던 휘영과 막쇠는 곧 한 무리의 유생과 마주쳤다. 화려한 빛깔로 염색한 두루마기와 금술 장식을 맵시있게 빼입은 유생들이었다. 박성과 박성을 따르는 무리들이었다. 조용히 지나치려 했지만 박성은 휘영을 잡아세웠다.


"휘영께서는 여기 어인 일이시오?"

"성이야말로 어인 일이시오."

"저 위의 주막에 새로 기녀가 들어왔다 하길래 선비된 도리로 금 타는 솜씨를 한 번 보지 않을 수가 없어 친우들과 함께 가는 중이지요."

퍽이나 신빙성 있는 소리였다. 박성은 주색잡기에 능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리고 어서 빨리 성균관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계성께서 사재를 풀어, 누구 때문에 유소를 망치고 새로이 상소문을 써내야만 하는 수고로움을 겪고 있는 재생들을 위로하기 위해 대별미를 준비한다 하였소. 지금쯤 반인들은 죄다 다림방에 몰려가 있을 것이오."


대별미란 소고기를 뜻했다.


"생,생원님께서 다림방에 가신단 말씀이십니까요? 아이고 나으리, 아무리 반인의 일을 한다 할지라도..."

"넌 무어냐."


바로 따귀를 올려붙였다. 막쇠의 뺨이 붉게 부풀어올랐다. 그러자 막쇠는 입을 다물었다. 다림방은 소를 도축하는 곳이었다. 유생에게 소를 도축하라고 하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모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휘영은 또 특유의 웃음을 터뜨리며 말할 뿐이었다.


"알겠소. 말을 전해 주어 고맙소."


박성은 대답도 듣지 않고 제들끼리 웃고 떠들며 떠나갔다.


저녁을 알리는 북소리가 성균관 안에 크게 세 번 울려퍼졌다. 막쇠는 장의에게 불려 갔다. 박성이 유생에게 말대답을 한 반인이 있다고 고자질한 모양이었다. 막쇠는 벌로 내일 새벽까지 근궁의 쪽문을 지키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싯누런 소는 사지를 줄에 묶일 때까지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양순하게 사람의 손길을 따랐다. 이윽고 길다란 칼이 황소의 목에 꽂혔다. 피를 솟구치며 무오오 애달프게 울부짖던 소는 곧 숨쉬기를 멈췄다. 반인 여럿이 그 소를 들어올려 고리에 세로로 매달고 피를 방혈하기 시작했다. 휘영은 바가지를 들고 그 쏟아지는 피를 받아 바깥에 뿌렸다. 다섯 바가지 반을 뿌리면 방혈은 끝이 난다. 그러면 공중에 매단 채로 털 붙은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한다. 가을이지만 저녁에 다다르니 날씨는 추워 뜨끈뜨끈한 더운 피를 바깥에 뿌리자 김이 하얗게 솟아올랐다. 다림방 안은 핏내가 자욱했다.


나이가 차 드디어 반인의 일을 맡게 된 소년이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아마 오늘 처음으로 다림방에서 일을 하게 된 것 같았다. 왜 우냐고 휘영이 조용히 물어보자 소년은 그냥 눈물이 난다고 했다. 천역을 하게 되었다는 서러움일까, 소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마도 그건 소년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박피가 끝나면 하얀 기름막과 붉은 살점이 드러나고 이를 부위별로 도려내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는 전문적으로 도축을 배운 반인들의 일이었다. 휘영과 같은 초짜는 잡일을 도울 뿐이었다. 그러나 휘영이 다가가 일을 도우려고 하면 오히려 반인들이 불편해했다. 휘영과 오래 지낸 몇몇 반인들은 그렇지 않았지만 대부분은 유생들을 경원시했기 때문이다.


"아!"


또 소의 목을 따던 반인이 헛손질을 하여 피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바닥에 떨어진 쇠가죽을 모으던 휘영에게 튀었던 것이다. 규정상 의관을 함부로 바꿀수 없었으므로 여전히 유복 차림이었다. 희고 푸른 유복이 붉은 피에 젖었다. 소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아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으나 반인은 칼을 내팽개치고 바로 휘영에게 엎드렸다.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휘영은 반인이 내던진 칼을 주워들고 천천히 걸어갔다. 반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휘영은 칼을 높게 쳐들고 내리찍었다. 그리고 소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축 늘어졌다. 반인은 눈을 떴다.


"솜씨가 서툴러 고기가 상했을지도 모르니 미안하네. 축생이라 하나 저리 괴로워하는데 빨리 숨을 끊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손을 썼네."


그리고 피를 튀기게 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엉거주춤 일어난 반인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눈을 감고 다림방의 문을 나서면 별천지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다림방 안은 피냄새와 오물 냄새로 가득했지만 바깥의 마당에서는 주방에서 흘러 나온 고기 굽는 향기로운 냄새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코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이따금씩 바깥에 뛰쳐나간 반인들은 토악질을 하곤 했다. 휘영도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하늘엔 어느새 달이 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자정이었다. 대사성에게로 떠나야 할 시간이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하늘을 보고 있는 휘영의 어깨를 건드리는 손이 있었다.


"생원님"


막쇠였다. 그런데 차림이 이상했다. 뭔가 보따리를 잔뜩 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휘영 자신의 방에서 꺼내온 짐과 옷가지들이었다. 그리고 휘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다림방은 가장 천한 곳이라 근궁의 가장 외곽에 있었다. 막쇠가 휘영의 손을 잡아끄는 방향은 쪽문 쪽이었다.


"이건 생원님의 짐입니다. 제가 행장을 대충 꾸려 왔고, 반인 생활을 하면서 모은 돈을 추려 여비를 넣었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어딜 간단 말인가?"

"도망 말입니다! 아까 장의님께 꾸중을 들을 때, 장의께서 분을 참지 못하고 몇 마디를 흘린 것을 주워들었습니다. 오늘 자정이면 생원님의 목을 칠 명령이 떨어진다면서요. 우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막쇠..."

"마침 쪽문을 지키는 것이 이 놈이니 통과할 수 있습니다. 쪽문을 나가시면 저와 옷을 바꿔 입고 뒤도 보지 말고 북문으로 달아나십시오. 그 쪽의 문지기가 일춘과 말이 되어 있어 문을 열어줄 겁니다."

"일춘이?"

"일춘이 말도 준비해주기로 했습니다. 생원님은 나주가 고향이시지요. 나주로 도망쳐서 산에 숨고 비바람이 가라앉을 때까지 피하는 겁니다."

"그럼 자네는 어떡하고? 나 대신 자네가 죽겠다는 말인가."

"생원님도 무진의 백성들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도 생원님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싶습니다."


막쇠의 억센 손에 이끌려가던 휘영은 쪽문 앞에 다다라 멈춰섰다. 사람 하나가 간신히 머리를 숙이고 드나들 수 있는 이 문 위에도 기와가 올려져 있었다.


"어서요. 반인 생활 삼십여년, 태어날 때부터 종놈의 새끼였고 이놈, 저놈이었던 저한테 막쇠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여 주신 것도 생원님이시고 저 같은 것의 말을 듣고 함께 울고 웃어주신 것도 생원님 뿐입니다. 생원님 같은 분이 성균관에 없다면 저도 다시 막쇠에서 이름없는 노비로 돌아가는 겁니다. 저는 그건 싫습니다. 그러니 생원님을 살려 이 놈을 죽이고 막쇠를 살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막쇠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호롱불이 흰 벽으로 그림자를 뿌렸다. 계성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와 대사성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사성은 여전히 명주처럼 맑았다. 계성은 가만히 사방을 둘러보고는 말했다.


"휘영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군요."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그러나 계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드르륵 방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계성의 옆에 꿇어 앉았다. 휘영이었다. 푸른 옷감에 들러붙은 핏자국은 닦아내었으나 흰 옷감에 묻은 얼룩은 닦지 못해 군데군데가 더러웠다.


"불우한 사고로 의관을 정제하지 못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계성은 물끄러미 휘영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대사성에게로 눈을 돌렸다. 대사성은 회초리를 들어 바닥을 치며 말했다.


"그럼 두 사람 다 모였으니 배강을 시작하도록 하자."


배강. 스승께 등을 보이고 돌아 앉아 그날 배운 것을 읊는 강의의 마지막 일과였다. 계성과 휘영은 잠시 당황했으나 곧 돌아 앉았다. 그림자가 일렁이는 종이 바른 문과 벽살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선 묻겠다. 계성은 오늘 무엇을 배웠느냐."

"공맹과 같은 선현이 정한 법도를 한 때의 정의감으로 어지럽혀 예를 그르치면 수 많은 사람들이 곤혹스럽게 되며, 결국 그런 정의감이 뜻했던 바 조차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더 혼란스럽게 할 뿐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재회와 유소의 규정을 어기고 함부로 움직인 휘영을 돌려 꾸짖는 말이었다.


"그럼 휘영은 무엇을 배웠느냐."

"근궁에서 하루에 쓰는 물독이 마흔 독이고, 한 광주리 가득 미나리를 무치기 위해서는 네 소쿠리를 캐야 하며, 소 한마리에 들어 있는 피는 다섯 바가지 반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동안 물을 쓰고 미나리를 씹으며 쇠고기를 입에 댔음에도 몰랐던 것을 오늘에서야 배웠으니 부끄러움이 큽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현이 정한 법도라 할 지라도 현실의 삶이 어떤지는 그 세상을 사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다는 되받음이었다.


"둘은 아름다움과 추함이 어떤 것이라 생각하느냐."

"아름다움이란 도탄과 진창을 걷는다 할 지라도 의관을 더럽히지 않고 흰 도포를 희게 다스리며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과 같은 마음가짐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소 피에 젖은 휘영을 노리고 한 말이 틀림없었다. 휘영은 또 신명나게 웃었다.


"어리석은 제가 알기로는, 도탄과 진창을 걷고도 옷자락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는 건 귀신밖에 없습니다."

"덕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계성이 사납게 외쳤다.


"덕이란 우선 그릇을 만들면 알아서 담기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는 곳에 넓게 땅을 파면 호수가 되고 물이 나는 곳을 깊게 파면 우물이 되며 단물이 저절로 차오르듯 덕도 그러합니다."

"호수가 아름다운 이유는 물고기와 같은 생을 품고 있기 때문이고 우물이 아름다운 이유는 두레박으로 길어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너무 굳어 흐름을 멈춘 물은 썩기 마련이고 아무런 생도 품지 못하며, 썩어 마실수 없게 된 우물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휘영도 지지 않고 되받았다. 둘은 계속 그렇게 흉험하게 말과 말을 부딪혔다. 파도와 파도가 부딪히는 듯 했고 전차가 흉벽을 당파하는 듯 거칠었다. 촉광이 마구 흔들려 그림자가 아지랭이처럼 너울거렸다. 계속 질문해나가던 대사성이 말을 멈췄다. 다시 고요가 방 안에 가득 차올랐다.


"우선 계성에게 답을 주겠다. 유소를 다시 붙이는 것을 허락한다."


계성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이은 말에 곧 굳어졌다.


"그리 예와 법도를 중시하였으니 이번 재회와 쟁론은 내가 직접 참관하겠다. 전란의 여파로 지금 서재에는 장의가 없는 것으로 안다. 우선 서재에서도 장의와 색장을 고루 뽑아 법도를 가장 공정하게 세우고 누구나 거리낌없이 흉부에 들어찬 것을 토해낼 수 있는 장을 마련한 후에야 상소를 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 되었느냐."

"받들겠습니다."

"그럼 휘영에게 답을 묻겠다. 여기 조정에서 내려온 봉서가 있다. 붉은 비단으로 두른 것이다."


붉은색은 왕실의 색이었다. 주상이 직접 내린 봉서라는 뜻이었다. 휘영은 등줄기에서 오한이 이는 것을 느꼈다. 서늘해진 미간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호롱불은 아무 말 없이 그런 휘영을 비추고만 있었다.


"이 봉서의 내용을 짐작해 보라."

"성총을 입는다면 유배를 지시하는 내용일 것이고, 불운히도 은혜를 입지 못한다면 자진하라는 명령일 것입니다."


휘영은 평정을 가장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계성은 무표정하게 휘영의 기색을 살폈다.


"이 봉서가 너를 유배보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북쪽은 경계가 허술해 달아니기 쉬우니 북으로 보내지는 않겠지요. 아마 황폐한 남으로 보낼 것입니다. 곤장을 맞고 팔도를 헤매며 머리를 풀고 광야를 누빈다 하더라도 남으로만 보내 주신다면 저는..."


목을 가다듬은 휘영은 한참을 말을 찾지 못했다. 목이 메인 듯 했다. 그 후에 나온 말은 의외로 담백했다.


"보수를 속여서라도 달아나..."


다시 한 번 목을 가다듬었다.


"의병장이 되고 싶습니다."

"의병장이 된다?"

"다행히도 조상의 은덕으로 제 몫으로 떨어진 유산이 약간은 있습니다. 그 돈으로 군사를 기르고 사람들을 모아 남쪽의 귀신을 물리쳐 피난민들을 구해주고 싶습니다. 홍인의 군대도 청인의 군대도 임금의 군대마저도 그들을 지키지 않는다면 미력한 내가 하겠습니다."

"의병장들의 말로를 보지 않았나. 수고로움은 많고 얻는 것은 없는 일이야."

"글 읽는 이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군요."

"너는 역사에 운 좋아야 반역자로 남을 것이다."

"종이에 적힌 것은 그저 제 이름일 뿐 제가 아닙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건가? 자네는 무진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 않나. 무진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 곳으로 향하길 꺼리고 있거늘."

"바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휘영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울음기가 배여 있었다.


"저희 집안은 왜란의 한 가운데에 있었는데도 멀쩡했지요. 어째서 그럴 수 있었나 작은 얘기를 말하고 싶습니다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말해보거라."

"저희 집안은 나주에서도 손 꼽히게 전답을 가진 지주 가문입니다. 그리고 가훈에 따라 흉년만 되면 쌓인 쌀을 풀었고 논밭을 비싸게 사 싼 값에 빌려주고 풍년에는 땅을 헐값에 되팔았습니다. 어렸을 적 저는 그게 너무 못마땅했습니다. 누대에 걸쳐 그들을 도와준 끝에 백성들은 나눔을 당연히 여겨 나눔을 받을 땐 나눔이 적다고 불평하고 감사하진 않았으며 흉년에 주린 자가 있으면 우리의 탓을 했지요. 허나 집안의 어르신꼐서는 그저 웃으며 곡식을 더 풀라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계성도 어느새 조용히 휘영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왜란이 일자 그 뜻을 알았습니다. 주변의 지주들은 그들을 지키는 군사가 물러나자 제일 먼저 그들이 수탈하던 백성들에게 돌을 맞고 죽었고 끌려나갔지만. 우리 땅의 농민들은 관아보다 먼저 우리를 지켜주었습니다. 공공연히 불만을 입에 담던 자들마저도 무명 옷에 갈퀴 하나 들고 갑주와 창검으로 무장한 왜군에 맞섰습니다. 저는 그 때 죽음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화살을 맞고 죽어가며 저를 도망시킨 농부가 저는 이해가 가지 않아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물었지요."

"뭐라고 답하던가."

"답은 못 들었습니다. 그는 답을 주기도 전에 화살에 발린 독에 당해 죽었으니까요. 저는 그 답이 알고 싶어 글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만하면 대답이 되겠습니까."

"훌륭하다."


대사성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계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초는 누가 심지에 불을 밝혀주기 전까지는 차갑고 단단하나 영원하지. 허나 불을 붙이면 밝은 빛을 내뿜는 대신 제가 내뿜는 열기에 녹아내려 곧 무너져. 그럼 초는 촛불을 원망하겠는가."


이 선문답 같은 소리에 계성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이런 문답이 돌아올 때 언제나 흉중을 꿰고 있는 듯 잽싸게 답을 외치던 평소의 계성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휘영은 어떤가."

"원망하지요. 원망하면서도 기쁘게 타오를 것입니다."

"좋다. 그럼 이 봉서가 너에게 자진하라 명한다면 어찌 하겠는가."

"반촌의 반인 중에 막쇠라는 이가 있습니다. 비록 불운하여 태생이 천하나 선비보다 중용의 도를 알고 세상의 묘리를 깨우쳤으며 영민하고 재치 있는 자입니다. 그의 앞으로 편지를 남겨 두었습니다."

"편지의 내용이 무엇이오."


계성이 다그쳐 물었다.


"그가 저 대신 가문의 유산을 받아 의병을 이끌어 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가 만일 따르지 않는다면 어찌 할 것이오."

"그건 막쇠의 소관이지요.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대사성은 휘영의 등을 바라보았다. 주름진 등, 군데군데 피로 얼룩진 자국이 남은 등, 그림자가 새겨진 등, 그러나 한없이 넓게만 보이는 등. 대사성은 봉서를 건네주며 말했다.

"사자가 말하기를 봉서는 이 꾸러미와 함께 가져가 숭례문을 지난 후에 열어보라 하더구나."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침묵하던 대사성은 툭 던졌다.

"초가 되거라."

"덕담 감사합니다."


대사성과 두 사람의 배강은 그렇게 끝이 났다.


대사성의 방에서 나온 두 사람은 낮에 그랬듯 또다시 동행을 시작했다. 어둑시근한 바람이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또 멈춰선 것은 은행나무 앞이었다. 왕이 친히 식재한 것으로 수백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이 나무는 성균관의 보배였다. 둘은 그 자리에서 멈춰서서 한 동안 은행나무를 바라보았다. 은행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에 기울어가는 달이 걸려 있었다.


"휘영은 휘영이 신래(*신입생)일 때를 기억하오?"

"그 때 장의께서는 색장을 맡고 계셨지요."

"신방례가 많이 짓궂었지. 특히 휘영에게 가장 짓궂은 내용이 떨어진 것으로 아는데."

"은행나무의 가지를 꺾어 오라는 얘기였지요."

"그래, 원래부터 차마 하지 못할 일을 시키고 신래가 당황하는 꼴을 보는 게 목적이니. 펑펑 울면서 못 하겠다고 엎드리는 꼴을 볼 줄 알았건만 휘영은 어떻게 했소."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나는 기억하오. 진짜로 가지를 꺾어서 가져왔었소. 그 때 온 서재청이 아주 발칵 뒤집혀졌었는데. 성균관에 새로이 미친 놈이 하나 들어왔다고 말이야. 어찌 할까 숙의하다 그냥 몰래 묻어 버리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 헌데 내가 나중에 그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니 은행나무가 저 은행나무의 가지가 아니었어. 근궁 바깥으로 나가 아무 은행의 가지를 꺾어온 것이었지."


휘영은 조용히 나무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웃기지 않소? 우리는 그렇게 저 나무를 아끼면서도, 정작 다른 은행과는 무엇이 다른지 알지도 못했던 것이오. 휘영은 많이 비웃었겠지."

"당치도 않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휘영이 매우 싫었소."

"거짓을 말하고 계시는군요."


휘영의 말에 계성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소슬한 바람이 불어 은행잎을 감싸고 지나갔다. 가지에서 떨어진 은행잎은 하늘하늘 궤적을 그리며 바닥에 소리없이 쌓였다.


"계성께선 저를 매우 아끼셨습니다. 그 날부터 쭉."

"무슨 말인지."

"아까 제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막쇠가 혹시 움직이지 않은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모양이셨습니다만, 막쇠는 제대로 저를 도망시키려 찾아왔습니다."

"그랬소? 쳐죽일 놈이로군. 나는 모르는 일이오."

"제게 반인의 일을 시켜 막쇠와 계속 닿아 있게 만든 것도 계성이고, 대별미를 준비시켜 근궁의 가장 바깥에 있는 다림방에 저를 보낸 것도 계성이고, 막쇠에게 봉서의 일을 일러주신 것도 계성이며 막쇠에게 쪽문을 지키라 명한 것도 계성인데 계성이 저의 목숨을 구하려 하였음을 모른다면 저는 귀머거리에 장님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모르는 일이오."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일춘이 문지기를 매수하고 말을 준비시켰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주막에서 일춘과 잔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일춘도 막쇠와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만, 겉보기에는 그래도 그는 진짜 상인입니다. 환금할 수 없는 일에 목숨을 거는 부류가 아니지요. 그런데 그가 잘못하면 참형을 면치 못하는 일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면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계성과 같은 명가의 명사와 연을 닿을 수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계성께서 지시하신 것이겠지요."

"그럼 알면서도 왜 죽으러 걸어들어왔소!"


계성은 빽 소리를 질렀다. 계성의 목소리는 처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의병을 키우겠다면 그냥 그대로 달아나서 해도 충분한 일 아니오. 유배? 유배가 만만히 보이시오? 곤장을 맞다 장독이 올라 죽는 것이 절반이고 맨발로 길바닥을 헤매다 죽는 것이 나머지 절반이오. 게다가 유배가 아니면 어쩔 것이오? 정말로 그 노비 하나에게 필생의 유언을 남기고 죽을 생각이오? 거짓이 아니오. 나는 휘영이 정말로 싫소."


그리고 그는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던져주었다.


"원래 휘영이 달아난다면 버리는 셈 치고 주려던 물건이오. 받으시오."

"이것이 무엇입니까."

"사인검이오. 선왕께서 조부에게 하사하신 물건인데 어쩌다보니 나에게까지 흘러들어왔소. 내 손에서 노리개로 쓰이는 것보다는 무진에 내려가 귀신을 베는 게 이 놈에게도 더 기쁜 일일 것이오."


사인검. 호랑이의 해, 호랑이의 달, 호랑이의 날, 호랑이의 시간 즉 인해 인월 인일 인시의 인 넷이 겹칠 때 만든 검이라 하여 사인검이다. 평생 사인검 하나를 벼리고 죽기를 바라였으나 떄가 닿지 못해 벼리지 못하고 죽은 명장들도 수두룩했다. 삿된 것을 베고 악귀를 쫓는 힘은 명나라의 명검조차 따라가지 못한다는 커다란 주술적 공능을 가진 보검이었다. 결코 버리는 셈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떨리는 손으로 사인검을 받아든 휘영은 등을 돌린 선배에게 절을 올렸다.


"하늘이 도와 뜻한 바를 다 이루기를 내 빌겠소. 그럼 어서 어명을 따라 남쪽으로 가시오."


그런 말을 툭 던지고 계성은 멀거니 사라져갔다.


돌담 드높은 대성전을 지나, 도색이 영롱한 남색 기와를 지나, 등롱이 매달린 대로를 지나, 남새 푸르른 채마밭을 지나, 남쪽으로.


한양에서 살아온 십여년을 음미하듯이, 한양의 흙먼지부터 용마루까지 모든 것을 우러러보며, 봉서와 꾸러미를 쥐고 남쪽으로.


북문에선 아직 마필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래도 남쪽으로.


북망은 북에 있거늘 나는 남쪽으로 향하는데 죽음을 걱정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픽 웃음이 나왔다. 사람이 사라지고 혼자 남자 마침내 스물스물 기어나온 나약한 마음이 심장을 옥죄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크게 웃어 떨쳐내며 그렇게 휘영은 남쪽으로 향했다.


다다른 곳은 숭례문.

예를 높이는 문.

이 문이 사문이 될는지 생문이 될는지.


모두 손에 쥔 봉서가 결정하는 것이었다. 문지기는 봉서를 보여주자 두 말 없이 커다란 문을 열어주었다. 주색으로 칠한 나무문이 오직 휘영만을 위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휘영이 걸음을 옮기자 입을 쩍 벌린 숭례문은 너무나도 쉽게 휘영을 잡아삼켰다. 휘영은 등 뒤를 돌아보았다. 짙은 음영이 휘영의 턱 아래 드리웠다. 성 안에서는 횃불이 타오르며 사위를 밝히고 있었으나 문 밖은 어둡기만 하다.


숭례문을 등지고 흙바닥에 털썩 앉았다. 성벽의 서늘한 촉감이 등 뒤로 전해졌다. 휘영은 사인검을 꺼냈다. 그리고 사인검의 날로 조심히 봉서를 묶은 비단의 매듭을 끊었다. 죽을 때에는 이 것으로 배를 갈라 죽어야겠구나. 그리고 꾸러미를 잘라 끊고, 봉서를 천천히 읽어 나갔다. 머지않아 봉서를 읽어나가던 휘영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봉서의 끝자락에는 임금의 친필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군사를 보내는 것이 상책이고 관리를 보내는 것이 하책이라. 그럼 자네를 보내는 것은 어떤가? 가가(*가가:요즘으로 치면 ㅋㅋ. 격식 없는 웃음을 표현하는 것.)."


꾸러미에 들어있는 것은 유척과 또 다른 봉서, 사목 그리고 마패였다. 사목의 겉면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정종심의 아들 정휘영을 오늘부로 무진도의 일대를 돌아보며 백성을 보살피고 관리를 파면,임명할 수 있는 전권을 가진 특별 어사로 임명한다. 혹여 녹을 먹는 자가 이 문서를 보게 될 경우 어떤 지방관보다 이 문서를 가진 자의 명을 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휘영은 봉서를 뜯는 즉시 말을 골라 타고 무진으로 향하며, 팔도에서 날랜 자와 굳센 자를 가려 뽑아,'


'무진을 구원하라.'


암행어사로 제수 받은 것이었다. 읽기를 마친 휘영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참을 소리없이 울던 휘영은 일어나 주상이 있는 궁을 향해 세 번 절을 했다. 마지막 절을 할 때 이마를 땅에 댄 채로 일어나지 않은 채 속삭였다.


"전하, 반드시 무진의 빛을 되찾겠사옵니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먼 산에서 동이 트고 있었다. 먼지를 털어낸 휘영은 봇짐을 들쳐메고 이제는 더 이상 어둡지 않은 새벽길을 비척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성균관의 아침을 알리는 북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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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썼던 망한 글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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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진행 +51 20.06.21 4,613 89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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