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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까밀로 님의 서재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SF

돈까밀로
작품등록일 :
2013.07.28 00:45
최근연재일 :
2013.07.29 21:1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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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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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7.29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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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쪽

1. 임무

DUMMY

1. 임무



국정원

책상에 양 팔꿈치를 괴고 양쪽 엄지는 턱을 양쪽 검지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떠받치고 있는 김한수 정보부장의 표정은 무거웠다. 한지유와 김한수 부장 사이에 아무도 깰 수 없는 침묵이 흐르고 두 사람은 침묵의 강에 부유물처럼 떠 있었다.

한지유는 이 침묵을 깨기 싫었다. 침묵이라는 것- 침묵을 안고 있는 부장의 표정에서 임무의 위험 수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침묵이 한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침묵의 궁금함보다는 자기 어깨 위에 놓이게 될 임무가 부담스러웠다.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고 있던 지유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죠, 부장님?”

“무슨 일?”

드디어 그가 턱과 관자놀이에서 손가락을 떼며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찾았다.

“금연 구역이잖습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도전적인 눈빛은 맘속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아 부장은 움찔했다.

“긴장하고 있나?”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무거운 톤으로 물었다.

“긴장은 부장님께서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자,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꺼내 입에 잠시 물다 빼고는 담배 끝을 책상 위에 톡톡 쳤다. 그러다 다시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게 빨아 뿜어내더니 입을 열었다.

“결국 무모한 녀석들이 일을 낼 모양이야.”

“무모한 녀석들이라면?”

“북. 이번 임무는 한지유 중령이 적임자야.”

길게 남은 담배를 비벼 끄고는 의장에서 일어나 한지유에게 다가왔다.

“얼마나 위험한지 말 안 해도 잘 알걸세. 꼭 살아서……. 살아서 보자고.”

말끝이 흐려졌다.

“성공해서 돌아오겠습니다. 술 사셔야 됩니다.”

“…….”

부장이 입꼬리를 올리며 지유의 어깨를 툭 쳤다.



중국 하얼빈

늘어난 인구에 비해 인도는 좁았다. 그랬기에 거리는 늘 복잡했으며 서로 부딪히는 것에 예민한 중국인들의 불만으로 거리는 시끄러웠다. 지유는 걷기에도 불편한 도심지를 벗어나 근교로 나왔다. 시계를 보니 그와의 접선 시간이 좀 남아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을까 젖살이 귀여운 여 종업원이 물어왔다.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아 그녀는 커피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후텁지근한 바람에 중국 특유의 냄새가 실려 왔다. 그녀는 잎이 울창한 나무그늘로 가 앉아 커피를 마셨다. 쇼핑센터에서 나오고 있는 러시아 관광객들 손에는 구입한 물건이 담긴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다음 쇼핑센터를 향해 떼를 지어 걸으며 러시아말로 떠들어댔다. 커피를 다 마신 지유는 빈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타임지를 겨드랑이에 꼈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접선하기로 한 장소로 슬슬 걸어갔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초저녁이라 공원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지유는 그늘 진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섰다.

“타임지 다 읽으셨습니까?”

어설픈 중국말로 다가온 남자는 서양인이었다.

“다 읽지는 않았지만 달라고 하시면 드릴 수 있어요.”

“저는 괜찮고 내 와이프가 타임지를 구해 오라 했는데 주실 수 있겠습니까?”

“뒷부분이 여자 분이 읽기에 좋은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유가 타임지를 내밀자 그가 받아들며 말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남자가 선글라스를 올리며 말했다. 185 센티미터가 넘을 것 같은 남자는 아주 날렵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지유가 남자 옆으로 다가가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반가워요. 준비는 됐나요?”

남자는 자연스럽게 지유의 손을 잡고 공원 안쪽으로 힘차게 걸어 들어갔으며, 지유는 거세게 걷는 남자에게 끌려가다시피 따라가는 형상이었다.

공원을 나오다 남자의 어깨에 부딪힌 중국 남자는 남자에게 뭐라 퍼부으려다가 험한 남자의 인상에 입을 닫고 그들을 지켜보기로 했다. 분명 남자는 끌려가는 여자에게 해를 가할 것이다. 중국인은 남자를 따라 발길을 옮겼다. 여자는 끌려가면서 뭐라 소리치자 남자는 영어로 되받아쳤다. 남자는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이 몹시 궁금했다.

서양인은 많은 사람들을 밀치며 공원 한복판으로 들어가 여자를 나무 기둥으로 몰았다. 주변으로 많은 중국인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두 사람이 싸울 거라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어쩌면 누가 이길 것이냐를 두고 판돈이 오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서양인은 지유에게 키스를 퍼부으며 엉덩이를 더듬어 댔다. 중국인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지유는 화가 많이 난 듯 남자를 밀치며 따귀를 힘껏 갈겼다.

“날 이런 식으로 가지고 놀지 마!”

“가지고 논다고? 날 가지고 논 건 바로 너야. 잊었어? 넌 날 기만하고 그놈과 실컷 어울려 놀았잖아. 좋아, 그깟 놈과 얼마나 잘되나 두고 보겠어.”남자가 지유에게 화가 많이 난 듯 타임지를 바닥에 팽개쳐 버리더니 구경꾼들을 헤치며 자리를 빠져 나갔다.

“저런 놈이랑 끝내라고요. 사람 많은 데서 여자를 난처하게 만들다니 저런 사람이 우리 중국에 있다는 게 창피하군요. 어디 다친 데 없어요?”

40대 후반의 뚱뚱한 여자가 지유에게 다가와 침을 튀기며 말했다. 지유가 타임지를 주워 들며 여자에게 쏘아 붙였다.

“구경났어요? 댁 볼일이나 보세요.”

돌아서 가는 지유를 향해 여자가 거품을 물며 소리 쳤다.

“저러니까 남자가 우습게 보는 거라고. 요즘 것들은 몸을 함부로 굴린다니까!”


호텔로 돌아온 지유는 그가 혀로 밀어 넣어 준 칩을 입 안에서 꺼내 핸드폰에 꽂았다. 그것은 다양한 기능을 내장한 개발품으로 기술원에서 모처럼 획기적인 발명품을 만들어 냈다고 좋아라했던 물건이었다. 다른 요원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던 것을 이번 임무에 필요했기 때문에 행운처럼 지유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그가 엉덩이와 바지 사이로 넣어 준 빈 여권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임지를 펼쳤다. 안에서 그가 끼워 둔 물건이 나왔다. 그는 소매치기보다 훨씬 손이 빠르고 정확했다. 안의 것은 큐빅이 박힌 귀걸이였다. 핸드폰에 뜬 다른 사람의 여권 위에 빈 여권을 올려놓고 카피를 뜨자 여권의 내용물이 고스란히 빈 여권의 여백을 채워나갔다. 드디어 지유는 러시아 연방 보안국 욜가 카레바로 완성되었다.

체크아웃하고 나선 지유는 호텔 화장실로 들어가 여권에 맞는 변장을 시작하였다.

‘이 마이크로 스캐너는 말이지……내가 생각해도 아주 기막힌 발명품이야.’

서효철 박사의 표정은 매우 뿌듯해 보였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대견한지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지유는 그 말에 맞장구치느라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자신감을 얻은 박사는 큰기침을 내뱉고 말을 이었다.

‘이것을 자네의 왼쪽 새끼손가락 지문 바로 아래층에 넣어 주지. 아마 검열 받을 일이 있어도 이것은 잡히지 않을 걸세. 자, 손가락을 대시게.’

박사는 주사기에 액체 속에 있는 마이크로 스캐너를 빨아들인 다음, 지유의 손가락 끝에 주사하였다.

‘아야!’

‘엄살떨지 말게. 자네가 변하고 싶은 인물 사진에 손가락 속에 숨은 스캐너를 밀착 시키게. 그러면 잠시 후 내가 자네 머리에 넣어 줄 칩에서 그 정보를 받아들일 걸세. 그러면 자네는 원하는 인물과 거의 흡사한 모습으로 바뀌게 될 거야. 그렇다고 너무 배우 같은 인물을 골라 스캔 뜨지 말게. 지금 자네도 충분히 배우 같으이.’

지유가 웃었다.

‘어떤가? 내가 생각해도 난 이곳에서 썩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사 아닌가 말이지. 자, 이리로 와 앉게. 머리칼을 이렇게 잡고.’

“자, 박사님, 박사님의 실력을 어디 한 번 볼까요…….”

지유는 박사가 시키는 대로 카메라로 여권의 사진을 입력했다.

“아- 젠장……. 아…….”

그녀는 심한 두통을 느꼈다. 단순한 부작용일까? 지유는 두 눈을 꼭 감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나 아픔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

“아!”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아픔에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으며 그 소리는 밖에서 손을 씻고 있던 중국인에게까지 들렸다. 그녀는 걱정스런 얼굴로 소리 나는 화장실로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

지유가 러시아 억양이 섞인 중국말로 대답했다.

“러시아 여잔가?”

호기심 많은 중국여자는 문 앞에서 얼쩡거리며 안의 동태를 살피었다. 여차하면 달려가 사람들에게 고함칠 준비를 하고서.

아픔이 가라앉자 머리가 맑아져 왔다. 후-하는 한숨과 함께 지유가 눈을 떴다. 그리고 손을 내려다보았다. 약간 흰빛이 도는 것 같지만 그다지 변한 건 없어 보였다. 지유는 소지품을 챙겨 가지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는 아까의 그 중국인이 서 있었다. 지유는 여자를 향해 웃어 보였다. 화장실 안의 여자가 너무나도 멀쩡하게 걸어 나오자 중국 여자는 오히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같이 씽끗 웃어 주었다.

‘헉!’

거울로 다가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본 지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러시아 여자가 거울 속에 있는 게 아닌가! 설마 하는 맘에 자기의 볼을 꼬집어보았다. 분명 자기 자신이었다.

‘대단하군요, 박사님.’

‘그런데 말이지. 이 발명품은 눈동자하고 머리칼 색은 바꾸지 못해요.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해야 할 거야.’

여권의 눈동자는 흐린 갈색이었지만, 지유의 눈동자는 검은색이었다. 지유는 갈색 렌즈를 착용했다. 이젠 어느 누가 보아도 러시아 여자 욜가였다. 욜가가 된 지유는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짐을 올려놓고 게이트로 향하였다. 검문은 생각보다 치밀하게 행하여졌다.

북한이 중국을 통해 중국 본토와 제 3국으로 스파이를 많이 침투시켰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중국이 세계 여론의 뭇매를 맞을 때가 종종 있었다. 북한에 항의도 해 보았으나 그다지 효과가 없자 그들은 북으로의 모든 출입 경계를 강화시켰다.

몇 안 되는 승객들은 중국 군인들의 권위적인 지시와 교만한 말투에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고분고분했다.

“이름?”

“욜가 카레바.”

“국적?”

“러시아.”

“왜 평양으로 들어가는 거지?”

“볼 일이 있으니까.”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이 남자는 지유의 거만한 태도에 슬슬 배알이 꼴리기 시작했다.

“무슨 볼 일, 정부라도 있는 건가?”

자기 말이 웃겼던지 소리 없이 웃다가 차츰 소리를 높이더니 급기야는 큰소리로 웃어댔다.

“북한 남자가 중국 남자보다 눈이 높더군.”

지유가 소리 없이 웃었다. 지유의 웃음에 얼굴이 굳어버린 대위는 실눈을 하고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지유도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주변의 다른 승객들은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시선을 의식한 대위가 자세를 고쳐 잡고 물었다.

“그래, 그럼 정부가 아니라면 러시아 여자가 뭣 하러 평양에 들어가지? 다른 목적이 있는 건가. 예를 들면 염탐이라던가.”

"염탐?"

이번엔 지유가 호탕하게 웃었다. 대위의 권위가 시체처럼 나뒹구는 찰나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눈들이 그와 여자와의 대결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맘을 가다듬고 말했다.

“틀림없이 넌 테러를 목적을 평양에 잠입하려 하고 있는 거야. 내 눈을 똑바로 쳐다 봐.

두 사람의 눈싸움. 서로 지지 않고 있다. 대위는 뭔가 잘못 건드리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는 여자에게 아무 죄나 뒤집어 씌워 이 자리를 모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인도 모르게 나온 말이,

“이 봐, 이 여자 테러범이야. 끌고 가.”였다.

그가 소리치자 멀리 떨어져 있던 군인 두 명이 급하게 달려와 지유의 팔을 양쪽에서 붙잡았다.

“놔, 난 테러리스트가 아니야!”

지유가 소리쳤다.

“병신 같은 계집애, 어디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지. 끌고 가.”

군인들은 발버둥치는 지유를 어디론 가로 끌고 갔고, 사람들은 저 여자가 테러리스트라고 수군거렸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여자의 몸에서 폭탄이 나왔다는 소리와 비행기를 폭파하려고 했다는 소리도 나돌았다. 테러리스트를 잡은 그의 어깨는 우쭐거리며 올라갔다. 그리고 지유를 직접 심문하기 위해 뒤따랐다.

아직은 체제가 많이 바뀌었다지만, 그래도 폐쇄적인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지유는 그들에 의해 심문실로 끌려갔다.

“몸수색 해.”

대위가 명령을 내리며 의자에 앉았다. 지유는 남자를 향해 윗입술을 살짝 올리며 비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대위는 그래, 어디까지 그런 여유를 보이나 두고 보자 하는 눈빛으로 지유를 깔아 보았다.

옷이 하나씩 벗겨짐에도 지유는 의연했다. 그러한 의연함은 오히려 대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테러리스트인지 뭔지도- 아니 그녀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다 자기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었던가. 여자의 옷을 벗기고 있는 것은 여자의 눈에 눈물이 흐르기를, 자기에게 매달려 더 이상 수치스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애걸복걸하기를 바라고 하는 짓거리였다.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저렇게 계속 벗기어야 하는가, 아니면 굴욕스럽더라도 이쯤에 그만두어야 하는가.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어 몸수색을 멈추게 하였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보안국 직원은 그에게 다가와 서류를 내밀었다.

“뭐야?”

사실 그는 지유와의 기 싸움에서 지지 않기 위해 과장된 몸짓과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나, 은근히 밀려오는 불안감에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그러던 차에 보안국 직원이 그에게 내민 서류는 자기를 보안국에서 퇴출시키는 징조처럼 보였고, 이 여자를 험하게 다룬 적이 있었나 스스로의 행동을 점검하게 했으며 점검 과정에서 켕겨지는 대목이 생각날 때마다 성급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시간을 검문 때로 돌려 이 여자를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양 비행기 안에 태웠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래 직원이 내민 서류를 보고 다리에 힘이 빠져 제대로 서있기조차 거북스러웠다. 대위는 목소리를 다듬어 정중히 물었다.

“러시아 연방 보안국 중령 욜가 카레바 이십니까?”

“미친놈.”

지유는 남자를 흘겨보았다. 대위는 군인들에게 옷을 입히라 고갯짓으로 명했다. 영문을 몰라 하는 군인은 대위가 시키는 대로 지유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옷을 입고 있는 러시아 여자를 보면서 대위는 생각했다. 육감이 움직이는 대로 따랐어야 했다고.

“우리 당원들의 실수를 이해해 주시오.”

부장이라 자기를 소개한 50대 후반의 남자가 말했다. 지유는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자 심문실에서 지유에게 모멸감을 안겨 주었던 대위가 주머니에서 얼른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아까는 제가…….”

대위는 어색하게 웃으며 변명을 하려 하였다. 지유는 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담배 한 모금 깊이 쭉 빨아 내뱉으며 말했다.

“실수라는 건 누구나 있게 마련이죠. 그러나 공항에서 저를 눈에 띄게 만든 행동들은 아주 멍청했어요. 탑승객 중에 북조선 혹은 남조선 스파이라던가 서방 정보부에서 일하고 있는 공작원이 섞여 있을까봐 그게 걱정입니다.”

“혹, 어떤 임무를 가지고 북에 들어가시는 겁니까?”

그 물음에 지유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 질문. 진심 아니죠?”

정말 일진이 좋지 않은 날이다. 대위는 기가 죽었다. 대위의 얼굴에 패배의 색이 짙어지자 지유는 내친김에 그를 더 바짝 조이며 들어갔다.

“어쩌면 벌써 나의 존재가 북조선과 남조선에 알려졌을지 모를 일이죠. 차라리 중국 보안국에서 북한의 인민위원회에 공문을 넣어 주세요. 여기서 이렇게 시간이 지연되고 있으니 이해해 달라고 말입니다.”

“아! 예. 시간이 지연되고 있었군요. 다음 비행기가……. 음, 내일 오전 9시 30분에 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호텔 좀 잡아 주시겠습니까?”

“예.”

그날 지유는 당 간부가 잡아 준 호텔에 투숙하게 되었다. 하얼빈의 밤거리는 무척 화려했다. 지유는 변형을 지속시켜주는 약을 들어 삼키려다 멈추었다. 그녀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거울 속의 욜가를 바라보았다. 남의 인생으로 살고 있는 자신에게 갑작스런 연민이 느껴졌다. 지유는 약 알을 다시 병에 담았다. 내일 먹자.

밤새 악몽에 시달리고 나니 아침이 반가웠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은 많이 꿨었다. 그런데 어젯밤 꿈에는 지유를 쫓는 그림자가 그녀에게 독침을 겨누고 있었다. 지유가 등을 돌려 그림자의 얼굴을 보려는 순간, 그자는 지유의 목에 독침을 꽂았고, 지유는 악 소리 내며 꿈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고개를 좌우 앞뒤로 젖히며 욕실로 향했다.


중국 보안국의 공문을 받은 북한의 인민 사령부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러시아 연방 보안국의 중령이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 중국을 들러 평양을 방문한단 말인가? 보안사령부장은 이준우 대령을 불렀다.

“그건 잘 돼가고 있지?”

“예.”

“골치 아픈 일이 생겼어. 러시아에서 중령이 온다는 거야.”

“중령이요?”

“그래, 그자들이 왜, 무엇 때문에 중령을 우리 측에 파견하는지 모르겠지만, 중국을 들러서 오는 걸 보면 그들과도 어떤 협상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 여하튼 그게 눈에 띄지 않도록 잘 관리하게.”

“예."

이 상황은 즉각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고되었다.

“그래, 갑자기 러시아에서 왜? 이준우 대령 불러.”

위원장의 부름에 즉각 달려온 이준우 대령은 부동자세를 취하고 위원장 앞에 섰다.

“앉지.”

“예, 위원장 동지.”

소파로 다가오고 있는 위원장의 왼쪽 다리는 절고 있었다. 매스컴에서는 되도록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다. 이준우 대령은 그러한 위원장의 모습에 코끝이 찡해 왔다. 맘 같아서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의 왼팔을 잡고 부축하고 싶었다. 그러나 위원장은 남의 도움 받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그대로 서서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힘겹게 소파에 와 앉았다.

“에휴- 땀이 다 나는구만, 임자 나이가 몇인가?

“삼십 삼세입니다.”

“으흠, 서른셋이라……부러울 때이구먼.”

위원장은 이준우를 다시 훑어보았다. 날렵한 몸에 언뜻 나타나는 날카로운 눈매는 같은 남자가 보더라도 움찔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젊은 시절 자기도 이러한 것을 지니고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픽 하는 웃음만 나왔다. 아들놈들이 이 녀석만 같았어도 맘이 이렇게까지 심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코냑 한잔 하게나.”

위원장의 한마디에 뒤에 서 있던 곱상한 비서가 그에게 코냑 한 잔 따라 주었다. 위원장이 술잔을 들자 그도 들었다.

“원샷이라고 하던가 하하…… 남한 친구들 재밌어. 원샷이라…… 나와 취향이 아주 많이 비슷해. 술을 나눠 마시지 않더군. 자, 마시게.”준우는 절도 있는 자세로 술을 단번에 마셨다. 빠른 속도로 흘러내려가고 있는 술의 뒤를 쫓아가면서 식도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쓴 맛에 준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허허……젊은이가 술에 약하구먼.”

스파이들의 세계에서 이준우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독사라 불렀다. 임무 완수할 수 있는 확률이 거의 0%에 가까움에도 그는 임무를 완수했다. 또한 지독한 고문도 그는 견뎠다. 조국의 초석이 되겠다는 그의 다짐은 어떤 고난도 견디게 만들었다. 그는 살아 있는 전설이자 두려움이었다. 스파이는 스파이를 알아본다. 그들은 이준우의 심장이 그리 쉽게 멎지 않으리라는 걸 말이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만 봐서는 험한 일에 몸담고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보통 키에 평범한 외모 아니다, 그 얼굴은 슬픔을 담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슬픔이란 걸 알았을 것 같은 얼굴이다. 그는 자기의 외모를 적절히 잘 활용했다. 어쩌면 활용했다는 말에 어폐가 있을지 모르겠다. 타고난 성품으로 그는 사람들의 호감을 샀다. 그 성품이 때때로 이점으로 작용하기도 한 것이다.

한 예로 이준우가 중국에서 스파이 활동을 할 때였다. 중국 고위 간부의 내연녀가 계획적으로 접근한 준우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여자는 적극적으로 그가 필요하단 모든 정보를 구해다 주었으며, 정부에게 발각되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첩보원이란 직업에 처음으로 회의를 느꼈었다. 어차피 다 지나간 과거지만.

“내가 크게 한 번 실수한 적이 있었지. 불과 몇 해 전 얘기야. 지금 생각해도 웃음밖에는 안 나와. 허허.”

김 위원장은 사람 좋은 소탈한 웃음을 웃었다. 어렸을 적 이준우에게 위원장 동지는 신이었으며, 자기와 같은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점점 머리가 자라면서 위원장 동지도 나처럼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가고, 웃고 운다는 동무들간의 소문에 괴로워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들을 위원장께서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내가 마치 그를 엿보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반역인데……반역인데……나와 같은 사람일 리 없어.

그 신께서 늘 이런 미소로 그를 맞아 주고 있는 것이다. 미소 앞에서 이분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고 다짐한다.

“남조선 간첩이 이곳까지 침투한 적이 있었지.”

“이곳 말입니까?”

이준우가 토끼눈을 하고 김 위원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바로 여기서 내가 와인을 따라 주었어. 참, 대단한 놈이야. 그 간첩 때문에 핵을 포기할 뻔했었지. 허허……그런데 그놈이 뭔 줄 아나?”

“……?”

“휴먼싸이라고……인간이 아니었던 거야. 겉으로는 인간과 다를 게 없었어. 그러나 내부는 요런 칩 하나 가지고 조정당하는 로봇이었던 거야.”

김 위원장은 자기의 새끼손톱을 엄지손가락으로 집어 가리키며 말했다. 이준우는 도대체 그 상황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이해가…….”

“어떻게 인간이 그깟 로봇에게 속는가 이건가, 아니면 그런 로봇이 정말 존재 하는가 이건가? 허허, 그래 대령 말이 맞아.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런데 요런 칩 하나로 북조선에 있는 로봇을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잘 다룬다 이거야.”

“죄송합니다.”

“커허허허……. 그런 일이 있었어. 극비라서 미 국방부 X-파일에 잠자고 있는 문서이기는 하다만, 미국과 아랍 지역 간에 세계대전이 일어날 뻔한 적이 있었지. 그걸 남조선의 대승그룹 신동한이가 막은 거야. 아주 대단한 인물이야. 탐이 나더군……. 지금은 은둔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가 만든 무기는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한 몇 세대 앞서가는 강하고 신비로운 무기였어. 그걸 남조선이 개발해 썼다는 게 자존심 상하더군. 그 사건으로 남조선 대통령이 그렇게도 부러웠던 적은 없었지. 어떤 무기인 줄 아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여기에 잠입했던 스파이는 시체였다는군. 시체에 칩을 꽂아 조정을 했던 거야. 하룻밤 사이에 60km를 맨발로 이동했었어. 평평한 땅도 아닌 험한 산을 말이지.”

“그게……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날 노망난 늙은이 취급을 하는구만.”

“죄송합니다. 위원장 동지.”

"됐어. 됐어. 그건 그렇고 러시아에서 오고 있다는 욜가라는 여자 말이야. 뒤 좀 캐봐야겠어. 그 때 일이 자꾸 생각나서 말이지."

“예, 위원장 동지.”

평양 공항의 활주로는 휑했다. 여객터미널 안으로 들어선 지유는 북한 특유의 억압적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지유는 어깨를 쭉 펴고 최대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욜가 카레바입니까?”

이준우가 다가와 물었다.

“그래요. 누구죠?”

“대령 이준우입니다. 저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어딜?”

“가 보시면 압니다.”

이준우가 사인을 보내자 두 명의 남자가 지유의 양쪽 팔을 끼고 대기해 있던 지프에 태웠다.

“북조선의 방식인가요?”

“뭐가요?”

“이런 식으로 사람을 환영하는 것 말입니다.”

“이해하십시오.”

지유는 심문실 의자에 앉혀졌다. 김정일은 그녀의 심문을 소파에 앉아 모니터로 지켜보았다.

“북조선에 온 이유가 뭡니까?”

“다음 후계자에 대해 알아보러 왔습니다.”

“후계자? 그걸 왜 러시아에서 관여하는 겁니까?”

“우리 러시아는 북조선의 권력세습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 위원장이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할 것인지, 권력을 세습한다면 어느 아들에게 세습할 것인지 말입니다.”

“점입가경이군.”

“뭐라고요?”“아닙니다. 여태 아무 말 없다가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월권이란 생각, 안 드십니까? 그리고 한 나라의 체제를 간섭하러 온 사람치고는 격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당신 나라가 옛 소련이 아니 듯 우리 북조선도 예전의 북조선이 아닙니다. 너무 아랫것 보듯 그러는 것 아닙니까.”

욜가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한지유는 이준우란 작자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첩보계의 거물을 실제로 보니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만, 그가 적이라는 게 유감스러울 뿐이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는 그가 지금 북에 있으리라 곤 꿈에도 생각 못한 게 실수였다. 아니 어쩌면 행운일 수도, 그의 얼굴이 지유에게 노출되었으니 말이다. 대신 지유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바늘구멍만큼의 틈이라도 보이면 그는 지유의 존재에 대해 단박에 알아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난, 외무부 소속의 중령이요. 북조선에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러시아는 당신들이 생각한 만큼 북조선을 크게 쳐 주지 않습니다. 작은 조선의 권력세습 때문에 러시아 외무부 전체가 움직이지 않아요.”

그 말에 준우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그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눌러 참으며 말했다.

“호텔로 모셔다 드리지요.”

준우는 사람을 시켜 지유를 고려 호텔로 데려다 주라고 명령하였다.

지유가 나가자 준우는 그녀가 마시던 컵을 수거해 지문 감식을 의뢰하였다. 그리고 사진기술부에게 그녀가 찍힌 cc-tv를 복사해 오라 명하였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지문과 동영상 복사본이 준우 앞에 놓여졌다. 그는 러시아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넣었다.


호텔에 도착한 지유는 손가락들을 한 번씩 돌아가면서 다시 꾹꾹 눌러 주었다. 그녀의 지문에는 욜가의 지문들이 덧씌워져 있었다. 지유는 욕실에 따뜻한 물을 틀어 수증기를 채웠다. 물이 다 차자 옷을 하나씩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섰다.

그 시간, 지유의 일거수일투족이 적나라하게 보여 지는 감시반에서 감시원이 옷을 벗고 있는 지유의 모습에 침을 꼴깍 삼키었다.

“와, 저 에미나이 사람 애간장을 다 녹이는구만…….”

“어디 좀 보자우.”

두 남자는 지유의 엉덩이를 줌 시켜 바로 눈앞에 갖다 놓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이준우가 들어섰다. 그는 지유의 알몸 영상에 넋이 나가 있는 두 감시원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뭣들 하는 거야? 간나 새끼들.”

그가 내두른 주먹에 두 병사는 나뒹굴었다.

“죄송합니다. 다신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스프링을 단 인형처럼 벌떡 일어나 쓰러진 의자를 세워놓고 부동자세를 하고 앉았다.

“비켜!”

준우의 말에 한 녀석이 절도 있게 일어나서 뒤로 껑충거리며 두 발짝 물러났다.

욕실 안은 수중기로 가득했다. 가득 찬 수증기 사이로 언뜻언뜻 지유의 모습이 보였다. 저 영상만으로 그녀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어쩌면 위원장 동지의 말처럼 휴먼싸이일 수도 있는 것이고, 다른 변장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수증기 없애.”

감시자가 컴퓨터를 조작해 수증기를 없애갔다. 그러자 욕조 안 욜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욜가의 목욕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랬기에 저 여자에게서 어떤 사명을 가지고 들어온 스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욜가가 욕조 물을 내리고 일어나 샤워기를 틀었다.

‘아!’

그녀의 뒤태는 러시아인이 아니었다. 뒷모습을 보는 순간, 준우는 한 여인이 생각났다. 자기를 위해 목숨을 던져버린 여인.


‘원하는 거 다 해 줄게요. 우리 북조선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 중국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 그런 곳으로 도망가요, 제발요. 당신 없으면 죽을 것 같아요. 아니 죽어 버릴 거예요.’

중국 고위 관리의 첩인 이 젊고 아름다운 여자는 중국에서 내로라하는 미인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미녀였다 이 여인이 준우의 다리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여자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은 -자기의 성공을 최대의 자랑으로 삼으며 늘 자기의 업적만을 최고의 화제로 삼는 늙은 관리의 첩으로 살았기에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느낄 수 없었던 가련한 여인 앞에 나타난 준우.

남자의 묘한 매력에 흠뻑 취한 여자는 어느 날 밤, 준우를 불러들였다. 고위 관리의 첩으로 남녀 간의 부적절한 부정행위가 발각되면 그녀의 인생은 밑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여자는 준우를 몹시 그리워했다. 준우와 하룻밤 사랑을 위해서라면 밑바닥 인생으로 떨어짐은 물론이고 잔인한 복수의 죽음도 감수할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불 꺼진 거실, 준우는 몰래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들어서는 그를 뒤에서 꼭 껴안는 여인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함을 깨고 여자의 심장은 거세게 뛰고 있었다. 펄떡이는 심장이 준우의 등을 통과해 가슴에까지 전달이 될 정도로. 그 진동에 준우의 심장은 멎을 듯 숨이 막혀왔다. 그는 얼른 여인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여인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에 취해 준우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그녀 또한 준우의 체취로 비틀거렸다. 그는 비틀거리는 여인을 꼭 안고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쓸린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영롱한 눈망울……눈망울은 어둠속에서도 뚜렷한 형체를 드러낼 정도로 투명했고, 거친 숨을 잔잔히 숨죽여 내보내고 있는 입술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떨고 있는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살포시 올려놓았고, 작은 혀는 서로의 의사를 본능에 가깝게 전달하는 전령 노릇과 몽환적인 꿈길을 걷게 만들어 주는 창조자 역할을 하였다.

“고마워요. 당신을 보는 순간 사랑을 느꼈어요.”

교활한 작은 혀는 그녀의 혀와 떨어지자마자 사물을 이성적인 관점으로만 판단하는 머리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더군다나 내뱉는 문장 안에 부드러운 어조를 혼합했기에 사랑이라는 단순한 감정으로 똘똘 뭉친 여자의 판단력을 쉽게 마비시켜 버릴 수 있었다. 이 순간, 여자는 준우라는 생물학적 수컷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었다.

여인은 준우의 손을 잡고 침실로 사뿐히 뛰어갔다. 그녀의 긴 옷자락은 작은 흔들림에 춤을 추었고, 준우는 나부끼는 옷자락이 북에서 익숙하게 보아 온 여자들의 속저고리와 비슷하다 생각했다. 침실로 들어선 두 남녀는 아담과 이브였다. 도덕의 존재가 무의미하고 통념들이 무시되었다. 단지 성만이 지배하는 육체가 원하는 대로, 태초의 무의식이 지배하던 시대의 노스탤지어에 몸을 띄웠다. 몸속을 오가는 전령들은 주인들의 환희에 찬 몸부림에 사랑이라는 단어로 승화되어 멈추지 않은 연기처럼 흘러 나왔다.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여자는 불현듯 밀려오는 불안에 심장이 창자 아래로 가라앉는 고통이 느껴졌다. 결코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지 않은 그들의 운명에 대한 예감에 여인은 이 순간을 자기 생애 최고의 것으로 기억하고 싶었다.

“당신을 위해서 뭔가를 해 주고 싶어요. 상하이에 당신을 위한 건물을 사 줄까요? 아니면, 베이징 메트로 칸 아파트를 얻어 줄까요?”

“아파트, 빌딩……다 필요 없어요. 늘 그림자처럼 당신의 향기만을 맡고 살고 싶어요.”

준우는 그렇게 속삭였었다. 그는 여자의 어투에서 검은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마음과 냉소적인 뇌의 뜻이 일치하는 말을 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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