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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피쉬의 바다

미움받을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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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Fish
작품등록일 :
2020.05.11 17:01
최근연재일 :
2021.08.02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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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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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13. 부서진 얼음 (5)

DUMMY

마물은 양손을 모아 높이 들었다. 루칸은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그도, 엘도,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쾅!


후두둑, 피와 살점들이 쏟아졌다.




루칸은 갑자기 제 앞에서 터져버린 마물을 아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천천히 몸을 세우던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총을 들고 있는 의민을 발견하고, 입을 벌렸다.


저에게 다시 붙은 마물을 서둘러 죽이고 달려온 엘 역시 그를 발견하고 경악스러운 표정을 했다.


의민은 긴장이 풀렸는지 자리에 주저앉았고, 페이지가 그를 부축했다. 이를 바득, 간 엘은 근처로 다가오는 다른 마물을 거칠게 죽여버리고 둘에게로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아직도 창백한 얼굴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부족한 기운으로 총알을 감싸기라도 했는지 총이 반쯤 망가져 있었다. 엘은 울분에 받쳐 그의 옷자락을 잡고 소리쳤다.


“니가 어디라고 여길 와!”


의민은 아직도 힘이 없는지 그저 약하게 미소지었다. 그는 꽉 쥐고 있었던 총을 덜그럭거리며 풀어냈다.

그는 마찬가지로 경악한 얼굴인, 그러나 다행히도 멀쩡한 루칸을 보고 말했다.


“다행···”

“너···!”


루칸이 노호성이 지르기 전, 갑자기 아이몬의 다급한 지령이 모두의 머리 속을 울렸다.


- 막아라!


아이몬의 불안감이 자신들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들은 확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마물들이 심상치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물들은 갑자기 진영을 흩어 버리고는 한곳으로 뭉쳤다. 그리고는 그 수의 반절 정도가 갑자기 전장을 이탈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마치 다른 목표물을 잡았다는 듯 아주 빠르게 움직였다.


페이지가 얼굴을 굳혔다. 그것들이 향하는 방향은, 얼음동굴 쪽이었다.


페이지는 억지를 부리는 의민을 설득하지 못해 결국 데리고 나왔었다. 동굴을 나오는 길에 그는 사무엘과 남은 병사들을 마주쳤었다. 사무엘은 정말 슬픈 눈으로 의민을 보다가 결국 보내줬다.

문제는, 페이지가 기억하기에 그곳에 남은 병사의 수가···


아이몬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이를 부득 갈았다. 정말 지휘하는 누군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저쪽이 나눈다면, 이쪽도 전력을 나누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몬은 뛰어가면서 레아에게 신호를 보냈고, 바로 알아들은 레아는 남은 병사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지령을 받은 병사들은 곧바로 전장에서 몸을 빼내 아이몬에게 합류했다. 아이몬은 그들을 데리고 곧바로 마물들을 쫓기 시작했다.


쫓으려 했다.


아이몬은 머리 속에서 병사들과의 연결이 끊기는 것을 느꼈다. 아이몬은 설마, 하면서 옆에 있는 병사의 눈을 확인했다. 또다시, 그 지긋지긋한 보라색이었다. 병사는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무기를 휘둘렀다.


아이몬은 그 공격을 피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옆에 있는 병사도 심상치 않았다. 아래 전장에 있는 병사들도 점차 이상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저쪽은 게다가 전투 중이었다. 저 상황에서 갑자기 눈을 가리라고 할 수도 없는 판이었다.


레아 역시 몇 명 병사들이 이상해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잡고 있던 마물의 머리를 으깨고, 옆에서 움찔거리는 병사를 붙들었다. 그녀 주위의 몇몇은 붙잡았지만 멀리 떨어진 이들은 벌써 가진 무기를 동료에게 휘두르고 있었다.


좋지 않은 상황에 입매를 굳히던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의민을 발견했다.


그녀의 등에는, 의민의 검이 있었다.


레아는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의민을 보고, 제 할 일을 정한 듯 뛰기 시작했다.


의민은 조금 떨어진 곳을 응시했다. 그때 봤던, 옅은 보라색의, 일렁이는 무언가가 여기에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듯, 병사들 앞에서 자유로이 움직였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전장을 내려다보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의민은 다급한 마음에 떨어트렸던 총을 쥐었다. 그러나 망가진 총에서는 딸각, 딸각하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이의민!”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의민이 고개를 돌렸다. 레아가 그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덤벼드는 마물을 아대로 내리쳐 제압한 그녀는 급한 듯 등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의민에게 밀어 보냈다.


의민은 곧바로 그것이 제 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바로 부축을 뿌리치고 일어나 달렸다. 그리고 마침 미끄러져 내려오는 검을 낚아챘다.


“어디 가요!”


페이지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가 보기에 의민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절벽 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설명해 줄 시간이 없었던 의민은 그대로 달렸다. 그리고 아슬아슬한 절벽 끝에 가까웠을 때, 검을 들었다.


푸른 기운으로 감싸진 검은 정확하게 목표물을 향해 내리쳐졌다. 의민은 검이 무언가를 베는 것을 느꼈다.

몸을 뒤로 뺐다. 절벽 끝에서는 얼음 조각이 떨어졌다.

그는 그 순간 그것과 눈을 마주쳤다.


아무것도 없던 공중에 푸른색 검흔이 생겼고, 희뿌연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의 베인 자리에서는 마왕의 것과 비슷한, 그러나 보라색의 연기가 꾸역꾸역 쏟아져나왔다.


다른 사람들도 이제 그것을 볼 수 있게 된 듯, 놀란 눈으로 달려왔다.

의민은 그것이 자신을 공격할 거라 생각해 다시 검을 움직이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낭패라는 생각으로 몸을 굴리려고 했으나 무슨 일인지 그것은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예상한 바라는 듯 의민에게 눈웃음을 치더니, 꺽꺽거리고 웃으며 그대로 사라졌다.


그것이 사라지자, 병사들은 마법에서 풀려난 것처럼 다시 멀쩡해졌다. 미쳤다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 병사들은 몹시 지친 얼굴을 했지만, 어쨌거나 일단은 멀쩡했다.


영향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아이몬은 병사들을 독려해 서둘러 얼음동굴로 간 마물들을 쫓도록 했다. 사무엘과 병사들이 어느 정도는 버티겠지만 최대한 빨리 쫓아가야 했다.


의민은 무겁게 느껴지는 검을 떨어트리고, 피곤한 몸을 반쯤 낮췄다.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아니나 다를까, 그 앞에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한 루칸과 엘이 있었다.

의민이 다시 주저앉자 루칸은 같이 몸을 낮추고, 그의 어깨를 단단하게 붙들었다. 루칸은 의민과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몬이랑 같이 돌아가라.”


의민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크게 떠진 눈은 아직도 그 주위가 붉었다.

그는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옆에 있던 엘이 이를 으득, 갈고 외쳤다.


“멀쩡하지도 않잖아!”

“괜찮···아요.”

“그래? 그럼 괜찮으니까 가! 사무엘이랑 다른 애들 구하라고!”


그녀의 노호성에 의민이 움찔거렸다. 눈치를 보며 다가온 페이지가 의민을 부축해 일으켰다. 의민이 애절한 눈으로 둘을 쳐다봤다.


“같이··· 같이 있게 해주세요. 그냥···”

“가!!!”


엘이 그의 말을 잘랐다. 루칸이 뒤에서 페이지에게 눈짓을 했고, 페이지는 의민을 재촉해 그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의민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내디디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 끔찍한 불안감이 그를 숨쉬기 힘들게 만들었다.





페이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최대한 빨리 갔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병사가 부상을 입고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샘.”


의민이 사무엘에게 다가갔다. 사무엘은 반쯤 눈더미에 몸을 기대고 끙끙거리며 의민을 맞이했다.


“아, 의민 씨. 다행, 다행이다. 무사히 돌아오셨구나.”

“부상이 심해요.”

“당신보다야 훨씬 멀쩡한데요.”


사무엘이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이쪽으로 데리고 오는 와중에도 의민은 아주 불안정했으며, 사무엘의 부상을 확인하자 그 불안함은 더 심해졌다. 페이지는 엘이랑 루칸이 아무리 무섭더라도 그 자리에 놔뒀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마물의 사체 속의 마석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피로 범벅이 된 마석을 징그럽다고 생각하며, 페이지는 그냥 지나쳐갔다. 마음 쓰이고 짜증 나는 것들부터 먼저 해결해야 했다.


페이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골골거리는 환자들을 분류했다. 마력이 간당간당하기는 하지만, 뭐 어쩌겠어.





눈보라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이몬은 그 눈밭에 남았던 병사들을 찾기 위해 다시 밖으로 나섰다. 의민이 함께 가기를 원했지만 아이몬은 매섭게 그를 질책했고, 기어코 그를 데려가지 않았다.


안쪽에 앉아 마력을 채우고 있던 페이지는 얼굴을 찌푸렸다.


“좀 안쪽으로 들어와요.”


의민은 순순히 말을 들었다. 그는 얼음동굴의 입구에서 딱 한걸음 안쪽으로 들어왔다. 짜증이 팍 치솟은 페이지가 외쳤다.


“이봐요, 방금 죽다 살아난 양반. 마력이고 비위고 다 쏟아부어서 구해준 의사 선생 말 좀 들으시죠? 안으로 들어오라고요! 그렇게 보고 있으면 뭐 좀 빨리 오나!”


의민이 그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혹독한 추위에 이미 볼과 귀는 빨갛게 얼어있었다. 의민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금만 봐주세요.”


페이지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심술 가득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싫어요.”


의민은 그런 그에게 다시 약한 미소를 짓고 다시 몸을 돌렸다. 페이지가 작게 툴툴거렸다.


“이봐, 이거. 내 말은 쥐뿔도 안 듣고··· 그럴 거면서 뭘 물어본다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저 멀리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다른 이가 말릴 새도 없이 의민은 바로 눈보라 속으로 뛰쳐나갔다.


아까보다도 눈보라는 더 심해졌다. 강한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다. 의민은 서둘러 달려갔다. 먼저는 레아가 보였고, 그 뒤에는 꽤나 많은 수의 병사들이 보였다. 레아가 그를 부른 듯싶었지만 의민은 바로 지나쳐 병사들 사이를 헤맸다.


눈보라가 강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 거리에서, 얼굴을 식별하는 것은 문제없었다. 그러나 의민은 몇 번씩 얼굴을 다시 확인했다.

눈보라가 너무 심해서, 내가 얼굴을 잘 못 본 거겠지. 내가 놓치고 지나친 거겠지. 침잠된 병사들 사이를 정처 없이 헤메고 다녔다.


“엘··· 루칸···”


보다 못한 레아가 그에게로 다가오려 했다. 귀신에 홀린 듯 병사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그의 모습이 섬찟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아이몬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의민이 아이몬을 알아보고 그에게 매달렸다.


“의민.”

“아이몬, 엘이랑, 루칸은···”


의민은 물으면서도 주춤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몬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엘은 뒤쪽에 잠깐···”


아이몬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의민이 튕기듯 뛰쳐나갔다. 작게 보이던 뒷모습은 곧 눈보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아이몬은 뿌리쳐진 손을 차마 내리지 못한 채, 미처 못한 말을 황망하게 내뱉었다.


“루칸은···”





하얀 눈밭은 너무나도 넓어서, 방향이 잘 분간되지 않았다. 칼바람이 살을 엘 듯이 불어왔다.

의민은 절박하게 달렸다. 가끔 얼음덩어리에 발을 걸리기도 했고, 넘어져 구르기도 했지만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그때처럼. 평야지대에서, 첫 번째 전투가 끝나고. 돌아오지 않는 둘을 찾아 달렸을 때처럼. 때마침 자신에게 돌아오는 둘을 그사이에 마주칠 테니까. 그럴 테니까. 그래야 하니까.


그러나 한참을 가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넓은 눈밭, 죽은 마물들이 근처에 보였다.

의민은 기어코, 아까 둘과 헤어졌던 곳까지 왔다는 걸 깨달았다.


가쁜 호흡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얀 눈밭은 마물과 병사들의 피로 얼룩덜룩했다. 깨끗한 도화지에 물감을 떨어트린 것처럼. 혼란스러운 풍경이었다.


의민은 그 한가운데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엘이었다.


그녀는 방금 봤을 때보다 더 몰골이 좋지 않았다. 원래 단정하게 땋았던 검은 머리카락은 먼지가 뒤엉켜 엉망으로 풀려있었고 근처에 떨어진 단검은 반쯤 부서져 있었다. 외투를 잃어버린 건지 얇은 옷차림으로 그 추운 곳에 있었다.


그녀의 머리와 옷 곳곳에는 온통 눈과 얼음 묻혀 있었다.


그리고 차가운 것을 만진 건지 손이 새빨갛게 얼어 있었다.






의민은 그녀에게 달려갔다.



머리와 옷에 묻은 눈과 얼음을 털어주며 의민은 물었다.



엘은 시선을 아래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파란 눈이 그를 봤고, 입이 열렸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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