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들의 심야 난투극(검거 작전) 3

방으로 진입하자 말자 밤사이 술을 먹고 거실과 방에 곤히 자고 있는 □□동파 조폭들 향하여 “야! 이새끼들아! 빨리 안 일어나나 !”라고 소리를 치며 소지하고 간 경찰봉으로 사정없이 닥치는 대로 후리쳤다.
자다가 난데없이 많은 형사들이 들어와 경찰봉을 휘두르니 감히 대항 할 생각도 못하고 고스란히 당했다.
거실 한쪽으로 몰아 놓고 옷을 입어라고 하지도 않고 팬티만 입고 있는 □□동파 조폭들에게 수갑을 채웠다.
팬티만 입고 수갑을 찬체 계단을 내려 오는데 출입문 밖에 있던 폭력계장인 김00 경정이 타격 대원이 소지 하고 있던 M16 소총을 달라고 하더니 장전되어 있는 공포탄을 3발을 하늘을 향해 발사했다.
‘탕,탕,탕’
날이 밝아지는 새벽녘 주택가에서 총 소리가 나자 동네 주민들이 무슨 일이 났는 줄 알고 전부 나왔다.
괜시리 총을 쏘아 시끄럽게 한 것 같아 주민들에게 미안했지만 조폭들 때문에 며칠 동안 고생한 것을 표시하는 모션 같았고,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도로상에 대기 중인 버스를 현장으로 올라오게 하여 전신에 용, 호랑이등 문신이 새겨진 팬티 바람의 조폭들을 싣고 중부서 형사계로 호송 했다.
우리 경찰청 폭력계 형사들은 사건 실체를 파악했고, 은신처를 알아낸 후 검거하였으니 우리의 임무는 끝이 난것으로 중부경찰서 형사계에 인계 하고 철수를 했다.
폭력계 스스로 인지 사건 같다면 우리가 처리 하지만 발생 사건이기 때문에 발생 경찰서에서 처리 하도록 했고 기일 내 미검시에는 지휘부 교체를 한다고 했기에 중부경찰서에서 마무리를 하도록 했다.
조폭들은 형사들이 검거 할 때와 구속하기 전 피의자 신문과정에서 조금의 물리적인 힘(?)을 가했다고 변호사에게 독직 폭행 고소를 해 달라고 했다.
변호사는 자신들의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검거 형사들 처벌을 원하면 형량이 많아 질것이라 생각하고 사임을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중부경찰서에서 □□동파 8명과 ▲▲파 3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조직원들은 가족과 친구들을 통하여 자수 시키거나 수배를 하면서 사건을 마무리 했다.
이 사건으로 00동에 00기획이라는 유령회사를 차려 놓고 두목의 별명을 따서 ▲▲파라고 이름을 지어 변두리 조직 폭력배로 불리던 조폭들이 전국에 이름을 떨치게 되었고, □□동파는 동네 이름을 따서 신흥 폭력배 □□동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에게 연락을 하였던 병수에게 알아서 처리 한다고 했지만 사안이 워낙 중한 폭력사건이라서 불문에 그칠 수가 없었고 구속이 되었지만 피해자측면이 있어 1년 6월형을 받고 출소를 했다.
이러한 사건이 터지면 고생을 하지만 검거를 하게 되면 그에 따른 보상(?)이 있어 형사로서 존재 가치를 느낀다.
사건을 마무리 하자 대구경찰청장과 경찰서장등 지휘부 문책은 없었고 사건 발생 당시 초동조치를 잘못한 상황실장과 파출소장이 징계를 받고 마무리 된 사건이었다.
중부경찰서에서 일부 책임이 있었던 모 과장은 승진을 거듭하여 치안정감까지 승진 후 퇴직을 했다.
◆ ▲▲파는? ◆
나에게 처음 연락을 취했던 ▲▲파는 당시 D호텔 주변에 공단들이 들어서며 유동인구가 많아 번창을 하면서 유흥가가 생겨나는 신흥지역을 무대로 조직된 폭력배들이었다.
본래 지역에 있는 건달들은 그냥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며 운동을 하거나, 술을 먹는 그저 그런 상태였지만 시내에서 놀던 ▲▲는 조폭들이 이권에 개입하여 조직 자금을 마련하며 허세를 부린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었다.
그만큼 시내 중심부와 변두리의 인식이 달랐던 것이었다.
유동인구가 많아지고 여러 가지 업소에서 호황을 누리게 되자 시내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가 후배들을 데리고 와서 정착을 하면서 00기획이라는 유령회사 사무실을 개설하고 ▲▲파의 거점이 되었다.
▲▲파는 전원 나에게 주대갈취, 물품강매, 취업미끼 협박등으로 2-3번씩 검거되어 구속이 되는 악연이었고 나의 실적 거양 재물이었고 ▲▲파라는 이름도 내가 지었다.
악연도 인연이라고 그사이 정이 들어 나하고는 친하게 지냈던 사이라 손쉽게 □□동파와의 충돌 사건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들과 인연이 되었던 것은 사건을 여러 번 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조직원 중 1명인 영진이 어머니가 D호텔 옆에서 포장마차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아예 들어 올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았고 지역을 무대로 다니는 ▲▲파의 비호가 없으면 영업이 어려운 시기였기에 영진이(가명)의 어머니가 영업을 했던 것 이었다.
주변에 유흥업소가 많아 야간이 되면 영업이 잘 되었고, 유흥업소가 마치는 시간이면 업소의 남, 여 종사자들이 퇴근을 하면서 포장마차에 들려 많은 매상을 올려주어서 제법 쏠쏠했다.
나는 야간 근무를 하다가 자식을 교도소에 보낸 죄스러움(?) 때문에 자주 들려 수입을 올려주었다.
야식을 먹으면서 모친에게 영진이가 없더라도 이곳에서 영업을 하도록 할테니 이제 영진이는 동네에 안 나오도록 하는 게 좋을것이라며 설득을 했는데 집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했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영진이는 무슨 운동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신체가 엄청 좋았다. 키가 190Cm, 몸무게가 130Kg이 넘는 거구였다.
출소 후 만났더니 “형님! 이제 그만 쫌 보내이소. 화장실에 못가겠습니다”라고 하소연을 할 정도였다.
덩치가 커서 대구교도소 화장실이 작아 볼일 보기가 많이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물론 화장실 가는 고통이 커서였는지, 아니면 포장마차 하는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었는지 언제부터 인가 동네를 떠났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조직원들에게 물어도 모르고 있다.
조폭들은 교도소를 많이 갔다가 와야 조직에서 인정을 받고 또 교도소 안에서 조폭들끼리 사귀게 되어 도피시 서로 도와주는 사이가 되고 전국구 조폭이 되기도 한다.
▲▲파는 워낙 교도소 출입이 잦아 인원이 몇 명되지 않지만 대구 동성로파, 향촌동파, ▲▲파로 대구의 조폭 3대 패밀리 중에 하나가 되었다.
구속이 되어 전국 각 교도소로 분산이 되다 보니 그곳에서 조폭들끼리 인연을 맺고 이름을 날렸다(?).
지금은 조직원들이 젊은 날의 추억으로 남기며 모든 것을 잊고 뿔뿔이 흩어져 각자 생을 살고 있는데 두목인 이00는 예전 시골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하여 축하차 갔었는데 지금은 경북 어느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농군이 되어 있다.
일부는 베트남 하노이에, 일부는 제주에서 낚시 배 운영과 건설업에, 일부는 아직 도박판을 기웃거리기도 하지만 나에게 가끔 연락들은 하고 사는데 이들은 예전 낭만의 건달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의리 하나로 단단히 뭉쳐 있던 조직원들이었다.
▲▲파는 현재 와해 되었고 추억 속의 폭력 조직이 되었다.
- 작가의말
사진은 팬티 바람으로 수갑을 차고 중부 경찰서 형사계에 연행되었던 □□동파 조직원들(mbc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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