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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의 서재

사막의 소드마스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922
작품등록일 :
2020.05.11 21:30
최근연재일 :
2021.01.1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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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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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4,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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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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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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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자
12쪽

143. 나미르 1

DUMMY




01.

"그녀를 놔주어라. 네 더러운 손에 붙들려 있기에는 너무 소중하고 또 고결한 여인이니.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다."


지저인들의 검은 탑 앞에서 마침내 나미르와 재회한 사자가 말했다. 그가 옷걸이를 가볍게 휘둘렀다. 옷걸이에 묻은 재와 피를 한꺼번에 털어냈다. 덕지덕지 엉겨 붙은 지겨운 악연도 털어내야 할 때였다.


"그러면 고통 없이 죽여줄 테니."


사자가 말했다. 그의 부드럽고 정중한 협박이 나미르에게 먹혀들었을까?


오오, 이런 신사 같은 친구. 내가 어찌 너의 '소중한 사람'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겠나? 아니야, 아니야. 그럴 수는 없지. 그런데 혹시...... 그 소중한 사람의 팔을 부러트리면 너는 또 어떤 이야기를 할 거니, 친구?


나미르가 그녀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마드의 몸이 땅 위에 철퍼덕 떨어졌다. 그때 나미르가 그녀의 팔을 재빠르게 낚아챘고, 부러트렸다.


...... 부러트렸어야 했는데. 알맞게 근육이 붙은 마드 세라자드의 팔뚝에 힘을 주기가 무섭게 엄청난 충격이 미식가를 덮쳤다. 그의 몸이 검은 탑을 향해 튕겨졌다. 그는 발사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하염없이 직선으로 날아가는 포탄처럼 똑바로 날아갔다. 이대로 검은 탑의 벽면까지 날아가 처박히겠다고 생각한 나미르가 간신히 몸을 제어해서 멈춰 섰다.


"이런 개자식이......"


나미르가 으르렁거렸다. 나미르를 날려보낸 것은 사자가 던진 옷걸이였다. 미식가가 마드를 땅 위에 내려놓는 순간을 노렸다. 사자는 노련한 창던지기 선수처럼 군더더기 하나 없는 동작으로 옷걸이를 던져 나미르를 맞췄다. 사자가 마드에게 다가가 그녀를 다정하게 안았다.


"괜찮소? 정신이 드시오?" 사자가 물었다.


"...... 응. 당신이 와줄 줄 알았거든. 오늘 아침에 봤던 얼굴인데 엄청 오랜만인 것 같네, 사리안."


마드가 얼굴을 찡그리며 애처롭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이마에 달라붙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사자가 조용히 쓸어 넘겼다.


"정말 긴 하루요. 대체 몇 날 며칠이 지난 건지 모를 만큼 길어. 하지만 아직 저녁도 되지 않았다니. 여기 지저인들의 시간관념이 우리랑은 영 다른지도 모르겠어."


"하하. 아...... 맘 놓고 웃지도 못하겠네, 너무 아파서. 놈은 어떻게 됐어? ...... 끄떡없지?


마드가 물었다. 사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미르는 이미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 쉽게 끝나지는 않겠지. 하지만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요. 비골라도 유마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소. 함께 나갑시다. 덥고 창백한 달이 뜨긴 해도 '우리'의 세계인 사막으로."


사자가 마드를 조심스럽게 앉혀 주었다. 이제 곧 시작될 싸움을 눈에 새겨놓으려는 듯 마드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의 눈에 나미르가 들어왔다. 나미르는 마치 달리기 선수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자세를 취했다.


"사리안. 부디 조심......"


그때 미식가가 사라졌다.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지만 그의 돌격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빨랐다. 하지만 사자는 이미 옷걸이를 주워들고 만전의 태세를 다 갖춘 채 기다렸다.



02.

나미르는 표범이었다. 거칠게 하늘을 나는 악마였다. 만약 악마들에게도 군주가 있다면 그가 타고 다닐 머리 세 개짜리 파수견이었다.


나미르가 네 발로 뛰어들었다. 마치 짐승들이 먹잇감을 사냥할 때처럼 앞손으로 땅을 짚고 뒷발로 땅을 박찼다. 사자는 그가 달려들려고 자세를 취했을 때부터 옷걸이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마드의 눈에는 미식가가 움직이는 것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사자의 눈에는 하나하나 새겨질 듯 선명하게 보였다.


지하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온했던 사흘 동안 마드를 가르치면서 유일하게 교정해 준 자세는 허리 움직임이었다. 공놀이를 하는 대부분의 소년들은 공을 치겠다는 마음이 너무 급해 몸이 먼저 움직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노련한 소년들은 기다릴 줄 안다. 그 아이들의 허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다가 공을 때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포착했을 때 천천히 움직여 공을 쳐낸다.


검술도 마찬가지였다. 사자의 허리는 고요한 호수처럼 미동이 없었다. 눈앞에 야수가, 조금만 힘을 써도 팔 다리를 찢고 머리를 날려버릴 수 있는 괴수가 달려드는데도 사자는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때가 왔을 때 옷걸이를 세차게 휘둘렀다. 나미르가 떠밀리듯 나가떨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나미르는 알 수 없었다. 사자의 옷걸이가 그의 오른쪽 어깨 절반을 날려버렸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마침내 고통이 들이닥쳤을 때 나미르는 포효했다. 용이 한입 베어 문 것처럼 오른쪽 어깨가 뜯겨 나갔다. 나미르는 벌어진 입으로 침을 흘리며 사자를 노려보았다.


공화국 검사는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땅 밑을 다졌다.


그래, 자세가 미끄러진 거구나. 지저인들의 땅이 미끄러워서 말이야. 미끄러지지만 않았다면,


"...... 내 목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는 거냐!"


상처 입은 짐승이 으르렁거렸다. 드러난 송곳니가 푸르스름한 빛을 냈다. 그 사이 발밑을 모두 다진 공화국 검사가 나미르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시야에서 검사가 사라졌다.


나미르는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피했다. 이번엔 허벅지 쪽에서 벼락같은 통증이 솟아올랐다.


"야 이, 개자식아!"


나미르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검사를 찾았다. 사자가 다시 미식가의 사각에 나타났다. 오른손에 든 옷걸이를 왼쪽 어깨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휘둘렀다.



03.

퍼석.


너무 시시한 결말이었다. 시시한 끝을 상징하듯 소리마저 허무했다. 사자가 휘두른 옷걸이가 미식가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사자의 힘찬 백스윙에 나미르가 저 멀리 날아가 떨어졌다. 최후의 순간에 나미르가 어깨를 잔뜩 움츠러뜨렸지만 피할 수 없었다. 마드가 순간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괴악하고 잔혹한 적이었지만 공화국 검사에게 최후의 일격을 당한 그의 고통이 이 순간만큼은 절절하게 느껴졌다. 미식가의 몸이 부들부들 떨었다. 죽음을 맞는 이라면 누구나 보이는 반응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몸의 모든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뒤면 미식가의 몸은 차갑게 굳어갈 것이다.


'네놈에게 딱 맞는 최후지. 시체같이 차가운 자에게 딱 어울리는 최후야.'


마드가 생각했다. 그리고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를 흘렸다. 미식가의 최후에 긴장이 풀려버려 그녀의 근육들 역시 경련을 일으킨 것이다. 사자가 나미르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마드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앉은 자세에서 그대로 옆으로 쓰러진 채 몸을 딸싹거리고 있었다.


"이런. 괜찮소? 근육에 쥐가 난 모양이군." 사자가 물었다.


"...... 너무 꼴사나운 광경이어서 좀 창피한데. 검사, 미안하지만 고개를 좀 돌려주겠어? 아니 그렇게 빤히 쳐다보지 말고. 쥐가 난 건 내가 어떻게든......"


마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자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 아, 아니...... 잠깐만...... 여보세요?"


마드가 황급히 사자에게 말했다. 사자가 따뜻한 미소로 마드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소. 불편하겠지만 잠시만 안겨 계시오. 우리는 이제 저 탑 안으로 들어가야 하니. 왕가의 무녀가 아직 살아있을지 모르오. 그녀를 찾아야 하오."


"맞아! 시알라님. 저 빌어먹을 놈이 그녀를 납치했었......"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리며 쓰러진 나미르를 바라본 마드가 말을 삼켰다.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사자가 의아한 듯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 흉측하게 덧니가 툭 튀어나온 녀석인 줄로만 알았더니, 미식가들은 정말 괴물이라도 되는 건가?"


등 뒤에서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기운을 느끼며 사자가 말했다. 일찍이 아우바에서도 경험했던 기운이었다. 거대한 야수와 같았던 사내, 마크 에반스를 간단히 제압했던 반역한 미식가 짐 레이건의 기운과 흡사했다. 하지만 기질이 훨씬 더 난폭하고 거칠었다.


사자가 마드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나미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위대한 천정의 빛 아래 생생하게 드러났다. 위대한 천정은 분명 그 빛을 다 잃어버린 뒤였다. 하지만 태양의 노란빛을 모두 전하고 난 천정이 이제는 지금껏 본 적 없던 하얀 빛을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한 번도 지하 세계에 내린 적 없던 사막의 달빛이었다.


그리고 창백한 달빛 아래서 분명 사자에 의해 죽음을 맞았던 미식가가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



04.

끔찍했다. 그건 아주 끔찍한 고통이었다. 나미르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에 아주 익숙한 만큼 스스로의 고통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사디스트이면서 동시에 마조히스트였다.


그런 그가 느끼기에도 지나치게 끔찍한 고통이었다. 나미르는 부활이 주는 고통에 정신이 나가버리기 직전이었다. 공화국 검사에게 철저히 파괴당한 그의 몸이 급속도로 재생되었다. 사자가 살점을 뜯어낸 부위에서는 마치 뜯어진 옷을 실로 깁듯 살점들이 서로 뭉치고 교차하며 다시 '짜였다'.


부활이었다. 동시에 변신이었다. 살아오면서 이토록 비참하고 처참하게 당해본 적이 없었던 미식가는 지금 이 순간 완전히 다른 존재로 태어났다.


"...... 널 잡아 찢고 네 살점은 씹어 삼키겠다. 이 빌어먹을 녀석아......"


나미르가 말했다. 하지만 사자와 마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미르가 내뱉는 모든 말은 이제 거의 완벽한 짐승의 언어로 치환되었다. 쩍 벌린 입 사이로 송곳과 같은 이빨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몸은 3배가 넘게 부풀었고 온몸의 근육도 하나하나 커지고 단단해졌다. 지저인의 창백한 피부를 닮았던 살갗은 거친 가죽이 되었고 찢어진 옷 대신 진회색의 거칠고 날카로운 야수의 털이 뒤덮었다.


알란의 마나에 짓눌렸을 때도 변신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급진적인 변화였다. 변화보다는 진화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나미르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으니까.


"모르겠어. 내가 지금 무엇으로 변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다. 그냥 그저......"


나미르가 탁한 목소리로 사자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가 이어서 울부짖었다.


"고마울 뿐이지."


마드는 배신한 가드장이 폭탄을 터트린 후의 그를 떠올렸다. 가드들의 머리통을 잘 익은 호박처럼 밟아부수던 모습이 기억났다. 하지만 달랐다. 확실한 것은 그때 보았던 괴물의 형상보다 2배 이상 커졌다는 것이다. 마드보다 머리 하나 높았던 미식가의 키가 지금 마드와 사자를 합쳐놓은 것보다도 더 높이 솟아 있었다.


"괴물이야. 역시 저놈은 인간이 아니었어."


마드가 말했다. 그리고 자신을 안아든 사리안을 올려다보았다. 사리안은 그저 가만히 서서 미식가가 어디까지 변하는지 바라보고 있었다.


"...... 한시라도 빨리 무녀를 구하고 왕자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소." 사자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긴장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공화국 검사라도 저런 괴물 앞에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미르가 마침내 모든 변화를 마치고 어깨를 천천히 들썩이며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이 사자와 마드 사이를 오갔다. 일찍이 지저인 남매의 집에서 아이들을 향해 보였던 행동과 똑같았다. 그는 고르고 있었다.


누구를 먼저, 찢어 죽이면, 좋을까요.


괴물이 입을 씰룩이며 웃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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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최종화. 사막을 건너는 사자 +32 21.01.18 738 27 15쪽
169 169. 히크마 +2 21.01.18 366 15 13쪽
168 168. 황제 +6 21.01.17 374 14 12쪽
167 167. 제단 +3 21.01.16 296 14 12쪽
166 166. 붉은 달 +6 21.01.15 302 13 12쪽
165 165. 저주 +3 21.01.14 327 13 12쪽
164 164. 로즈 +8 21.01.13 371 14 13쪽
163 163. 혁명의 밤 +5 21.01.10 466 12 12쪽
162 162. 미궁 3 +4 21.01.09 364 15 12쪽
161 161. 미궁 2 +4 21.01.08 345 14 12쪽
160 160. 미궁 1 +3 21.01.07 363 14 14쪽
159 159. 다시 성도로 +3 21.01.06 348 13 14쪽
158 158. 회합 +2 21.01.03 376 11 12쪽
157 157. 야습 2 +3 21.01.02 331 11 12쪽
156 156. 야습 1 +6 21.01.01 358 13 13쪽
155 155. 성도 2 +4 20.12.31 351 12 14쪽
154 154. 성도 1 +5 20.12.30 379 12 13쪽
153 153. 사막의 밤 3 +9 20.12.27 376 15 16쪽
152 152. 사막의 밤 2 +6 20.12.26 432 13 15쪽
151 151. 사막의 밤 1 +4 20.12.25 449 13 13쪽
150 150. 싸움이 끝나고 +3 20.12.24 368 15 14쪽
149 149. 폐막 +4 20.12.23 379 17 12쪽
148 148. 형제 2 +8 20.12.20 395 14 14쪽
147 147. 형제 1 +2 20.12.19 386 13 14쪽
146 146. 검은 탑 2 +2 20.12.18 372 11 13쪽
145 145. 검은 탑 1 +6 20.12.17 378 14 13쪽
144 144. 나미르 2 +8 20.12.13 435 17 13쪽
» 143. 나미르 1 +5 20.12.12 379 12 12쪽
142 142. 두 번째 조커 2 +3 20.12.11 398 1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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