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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C
작품등록일 :
2018.04.09 10:17
최근연재일 :
2018.09.18 22:44
연재수 :
63 회
조회수 :
36,322
추천수 :
368
글자수 :
270,153

작성
18.04.12 19:00
조회
614
추천
9
글자
10쪽

연인들

DUMMY

「사고예요!」


이렇게 외치며 한울은 거대한 트럭이 버스와 정면으로 충돌한 현장으로 내달렸다. 어찌나 센 충돌이었는지, 버스의 앞부분이 종잇장처럼 구겨진 것은 물론이고 그러고도 충격이 남아 버스는 다시 뒤로 10미터 이상 튕겨져 나갔다. 사고의 장면들이 거친 크로키 바탕에 무겁고 짙은 색으로 채색된 유화처럼 하나하나 한울의 눈앞을 채웠다가 지나갔다. 채색으로 미처 표현되지 않은 버스와 트럭의 속도감과 충돌 순간의 충격은 강한 콘트라스트와 보조 일러스트의 명멸로 보완되고 있었다. 모여드는 사람들의 윤곽은 거칠고 빠른 붓질로 조금씩은 디테일이 손상되어 있었고, 일부는 채색이 불완전한 부분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사고 현장의 경악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이 루프 왜 이래요?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림질인가?」


달려오는 동안 한울 자신의 몸 역시 빠른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한 거친 이미지로 바뀌어 있었고, 이것은 뒤따라온 미정도 마찬가지였다. 미정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자 미정의 팔다리며 얼굴의 디테일이 조금씩 복원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는 게 아니라니깐! 여기서는 자연 현상일 뿐이야. 그건 그렇고—.」


사상자를 확인해야 한다. 눈동자가 표현되지 않고 몸 윤곽이 뭉개진 것을 보니 버스 운전사는 이미 틀린 것 같았다. 박살난 핸들이 복부를 반 이상 파고 들었고 깨진 앞유리에 피가 튀어 온통 칠갑이 되어 있었다. 운전사 옆에는 한 여자아이가 거꾸로 떨어진 듯, 목과 다리가 뒤틀린 채 엎어져 있었다.


「이봐요! 여기 이 아이 좀 —.」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류미정이 한울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이쪽은 내가 볼테니 트럭 쪽으로 가 봐!」


트럭 쪽으로 달리며 뒤돌아보니 류미정이 버스 문짝을 뜯어내고 있었다. 별로 놀랍지 않은 것이 더 놀라웠다. 오늘은 놀랄 일이 풍년이로군.


트럭 운전사 역시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있었지만 형체가 뚜렷한 것으로 보아 아직 살아 있는 듯 했다. 한울은 그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트럭 운전석 쪽에 매달려 운전사를 소리쳐 불렀다.


「이봐요! 정신 차리세요! 괜찮으십니까?」


운전사는 대답 없이 그대로 머리를 박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이 들어 눈을 떴음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한울이 직감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트럭과 그 내부, 그리고 운전사의 이미지는 사진처럼 상세하고 구체적이었다. 온통 그림뿐이고 교통사고 현장마저도 그림으로 표현되고 있는 이 루프에서 이 트럭과 운전사는 이상한 위화감을 풍겼다. 더욱 이상하게도, 조금씩 살아나는 생기와 더불어 알 수 없는 살기가 느껴졌다.


「이런··· 씨팔.」


이 말이 들린 순간, 운전사가 고개를 숙인 채 거칠게 문을 열어 한울을 밀어젖히고 트럭에서 뛰어내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매달려 있던 한울은 순간적으로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넘어지며 바닥에 어깨를 강하게 부딪쳤다.


「거기 서!」


류미정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두 손으로 권총을 잡고 운전사를 겨누고 있다. 탕, 소리가 들리고 달아나는 운전사의 뒷모습이 이상하게 흐릿해 보이는가 하더니, 곧이어 그 모습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새하얀 붓선 하나가 난데없이 나타나 운전사의 뒷모습을 세로로 쭉 훑어 지웠다. 한줄, 그리고 또 한줄. 그렇게 운전사가 지워진 자리에는 그대로 하얀 줄만 남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운전사의 모습 뿐 아니라, 온 세상이 지워지고 있었다 — 사고 버스와 트럭은 물론, 역도, 모여든 사람들도, 건물도 도로도. 어느새 다가와 걱정스런 얼굴로 한울을 들여다보던 류미정이 마지막으로 지워지며 말했다.


「어떡해—. 좀 이따 봐.」


그리고는 모든 것이 하얗게 보이는가 하더니, 이내 칠흑같은 어둠으로 채워져 버렸다.



*



「환자분, 환자분? 이제 일어나시죠.」 남자가 잠든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여자는 좀처럼 깨지 않았다. 남자는 눈을 감고 편안히 잠든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눈길은 언제나처럼 서늘했지만, 여자를 향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차갑지 않았다.


남자는 가만히 한 손을 올려 여자의 뺨 쪽으로 가져갔다. 얼굴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지자, 뽀얗게 일어난 볼의 솜털이 그의 손등에 느껴졌다. 뺨의 온기 역시 전해져 왔다. 그는 뜨거운 숨을 한 모금 토해내며, 마음 속으로 마인드테크의 기술력과 마인드루프의 해상력에 감탄했다.


곧 손의 한기를 느꼈는지 여자가 뒤척이며 눈을 떴다. 남자는 재빨리 손을 뺐다.


「아아—. 여기가 어디······ 죠?」


「플랫폼루프. 여기선 눈이 보이니 잘 아실 텐데.」 남자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말했다.


「······ 평소와 달라 보여서요.」 여자가 살짝 눈을 흘기며, 조금 뾰로통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다지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병원에서 튜링 역 건물에 공동 진료실을 하나 냈어. 공동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의사들은 루프에 들어와서까지 일하고 싶어하지는 않으니까······ 거의 내 사무실이라고 봐도 돼.」


여자가 비스듬히 세워진 진입기 안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무실은 책상 하나와 루프 진입용 침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 스산해 보였다. 벽과 바닥은 온통 진한 청록색으로만 칠해져 있어 마치 심해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무겁고 답답했다.


여자는 검붉은 색의 민소매 원피스에 눈부시게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역시 붉은 색 무광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진입기 안에서 완전히 몸을 빼내고 나와선 약간 부담스러울 정도로 긴 블라우스의 보우를 만지작거리거나 두 팔을 들었다 놨다 하며 자신이 입은 옷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 옷은······. 그리고 구두까지······.」


「선물. 루프 안에서까지 밖에서 입고 있는 환자복을 입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여자가 의사 쪽으로 바짝 다가서서, 의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스스로를 가꾸는 연습을 해야 해. 누가 그러던데, 자기 아름다움의 1대 주주는 자기 자신이라지.」


「하아······ 글쎄요.」 여자가 남자의 앞에서 홱 뒤돌아서더니, 실내 한 구석의 입식 거울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전 잘 모르겠어요. 내 실제 모습이 어떨지, 기억조차 희미한걸요. 기억이 난다 해도 이미 오래 전 어렸을 때 모습일테고······. 내 모습이 진짜로 지금 거울 속에 있는 저 모습일 거라는 실감이 들지 않아요. 솔직히······.」


남자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여자가 말을 끊은 후로도 침묵이 계속되자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가 여자의 뒤에 서서 여자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두렵고 낯선 게 당연해. 20년이나 못 보다가 다시 만나는 세상이고, 당신 자신이니까.」


여자가 남자의 두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잡아 가슴께로 끌어내려 꼭 안았다. 「20년까지는 아니죠. 마인드루프 덕분에 저는 다시 볼 수 있었어요. 세상을, 나를, 그리고······.」


여자가 남자의 두 손을 풀고 돌아서더니 남자의 가슴에 안겼다. 가슴에 고개를 파묻기 직전, 여자의 커다란 두 눈동자가 남자의 시선에 아프게 들어와 꽂혔다.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까지 할 만한 마인드루프의 시뮬레이션도 20년 동안 동작하지 않던 여자의 동공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진 못했다. 아름다운 흑갈색의 두 눈동자는 촛점을 잃고 떨고 있었다. 마치 두려워하는 듯이.


「······당신을요.」


남자는 팔을 들어 여자를 꼭 안으며 눈을 감았다. 보이겠지만, 진짜로 보는 게 아니야, 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반드시 이 여자가 볼 수 있게 하겠어. 마인드루프의 시뮬레이션이 아닌 진짜 세상을. 진짜 자신의 모습을.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그러자면 여자의 브레인을 청소해야 했다. 마인드루프는 여자가 볼 수 있게 하는 대신 여자의 의식에 그림자를 짙게 드리워 놓았다. 이제 소용이 다한 그 그림자는 제거되어야 한다, 반드시.


「다시 시력을 찾는 게 무서운 게 아니예요. 수술도, 수술 전에 필요하다는 그 시술도, 당신이 해 주는 것이니 무섭지 않아요. 무서운 것은, 혹시라도 잘못되면 당신이 실망할까봐······, 당신을 볼 수 없게 될까봐, 루프 안에서조차······.」


내려다본 여자의 두 눈에 눈물이 고여있다. 여자의 머리를 끌어당겨 꼭 끌어앉고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겁내지 마. 곧 끝나. 절대로 실패하지 않아. 모든 게 다 잘 될거야. 당신이 이미 나를 돕고 있거든.」


당신이······ 총을 알게 됐거든.


「당신 주치의로서, 당신 남자로서 보장해. 저 거울의 이미지는 백 퍼센트 당신 그대로야.」


이렇게 말하며 남자는 고개를 꺾고 여자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아 부드럽게 당겼다. 여자는 저항하진 않았으나, 남자의 뜨거운 숨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는데도 눈을 감지 않았다. 살짝 눈을 뜬 남자가 여자가 눈을 뜨고 있음을 알아채고 물었다.


「왜 그래?」


여자는 잠자코 남자를 빤히 쳐다보더니, 한 걸음 살짝 물러나 천천히 블라우스의 보우를 풀었다. 새하얀 보우가 길게 여자의 앞가슴을 타고 늘어졌다. 여자가 그 중 한 쪽을 남자의 얼굴에, 다른 하나를 자신의 얼굴에 둘렀다. 보우는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길었고, 남자와 자신의 얼굴에 두르는 여자의 손길을 따라 더욱 길어졌다.


「이렇게 해야 더 진짜 같아요, 나에겐.」


이번엔 여자가 남자의 머리를 잡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흰 실크 천에 가려 보이지 않을텐데도 여자는 용케 남자의 입술을 찾아 더듬었다. 두 입술이 실크 천을 사이에 두고 닿는 순간, 여자가 속삭였다.


「백 퍼센트 내가, 백 퍼센트 당신을 느끼기 위해서.」


남자는 속수무책으로 여자의 입술에서 전해지는 달콤함에 빠져들어갔다. 실크 천의 질감은 물론 아니었다.






작가의말

오늘자 공지를 꼭 참조하시어, 르네 마그리트의 ‘연인들' 과 함께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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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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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9 la******..
    작성일
    18.04.12 22:53
    No. 1

    오~ 멋있습니다.
    공지 사항의 그림을 보고 읽어보니 더욱 느낌이 생생히 전해집니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4.12 23:32
    No. 2

    감사합니다~ 9화의 '여자'는 마그리트의 팬이라, 마그리트의 그림이 앞으로도 몇 번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4.22 22:59
    No. 3

    9화 떡밥리스트:
    13) 한울의 표현대로라면 ‘그림질’ 루프 안인데도 왜 트럭과 트럭 운전사의 이미지는 실사처럼 선명했던 걸까요?
    14) 여자가 볼 수 있게 하는 대신 마인드루프가 드리워 놓았다는 ‘의식의 그림자’는 무엇일까요? 왜 그것이 제거되어야 할까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8.04.28 05:46
    No. 4

    아름답지 않다는 건 1대 주주가 부실하다는 뜻? ㅎㅎㅎ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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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왜 국민정신건강진흥원인가 +5 18.04.10 645 12 7쪽
3 임무 +4 18.04.09 697 12 8쪽
2 인터뷰 +5 18.04.09 861 1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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