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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C
작품등록일 :
2018.04.09 10:17
최근연재일 :
2018.09.18 22:44
연재수 :
6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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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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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
글자수 :
270,153

작성
18.04.0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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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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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글자
7쪽

메모

DUMMY

시연은 안장에서 엉덩이를 살짝 들고 페달을 좀더 힘차게 밟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도로에는 시연의 자전거를 제외하면 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거리가 마치 오늘의 시연의 자전거 주행을 위해 사전에 마련된 것 같았다.


거리에는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지만 잘 준비되고 관리된 듯 깔끔했고, 적막한 느낌은 없었다. 원래 인구가 많은 도시도 아니지만, 여기는 그 중에서도 유동인구가 적은 구역인 것 같았다. 주택가 같지도, 오피스 단지 같지도 않았다. 도로 좌우로 드문드문 건물이 하나둘씩 서 있지만 눈길을 끄는 대형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물도 사실 그 목적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이 낯섦을 즐기며 달리고 있는 시연이 그런 것들을 궁금해할 이유는 없었다.


‘마치 그림 속을 달리는 기분이야.’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항상 시연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불안이나 공포, 정복감 따위가 아니다. 새로운 공간을 보고 그 안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시연 자신이 녹아든 조화로운 공간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행복해하곤 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가슴 뛰는 순간이었다 — 이곳을 왜 여태 모르고 있었을까? 나중에 꼭 영상으로 남겨놓고 싶어.


태어나서 15년 동안 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이 거리는 처음이었다. 그 메모가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영영 와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



시연은 잠자리에 들기 전 머리맡에 메모지와 볼펜을 준비해 놓는 습관이 있었다. 잠을 자다 잠시 깨어났을 때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꿈의 조각들이 아쉬워, 잊기 전에 급히 내용을 적거나 스케치를 하기 위함이었다.


대부분은 알아볼 수 없거나 앞뒤가 안 맞는 황당한 내용이었지만, 아주 가끔은 좋은 아이디어를 건질 때도 있었다. 언젠가는 꿈에서 건진 아이디어만으로 시나리오를 한 편 써 봐야지.


그런데, 오늘 아침 깼을 때 발견한 메모는 그동안의 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직도 시연 자신이 쓴 메모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그것은 휘갈겨 쓴 문장도 스케치도 아닌, 생전 처음 보는 점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점자_떠나한번도가보지못한역으로.png

처음에는 잠결에 뒤척이다 메모지가 어딘가에 눌린 자국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작은 점 모양들이 규칙적으로 눌려 있고, 그 점 하나 하나에 볼펜 잉크가 진하게 스며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의도가 있는 것임은 분명해 보였다.


으레 그랬듯 자신이 잠결에 쓴 것이라 해도 굳이 이런 방식을 택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간밤에 깨어 이런 메모를 쓰거나 그린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아니면 누구겠어. 이리도 깨끗하게 잊어버렸다면, 오히려 어마어마하게 근사한 내용일지 몰라.’


시연은 매사에 낙관적인 아이였다. 누가 썼는지는 아직 몰라도 그 미지의 내용을 미리 상상해 보니 조금 의욕이 났다. 의혹은 잠시 미루고 일단 연속된 점의 의미를 알아봐야지 싶었다. 세수와 양치질도 제쳐 두고 인터넷을 뒤지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지만, 막상 검색해 볼 키워드가 없으니 어디부터 시작할지 너무 막연했다.


메모지를 뜯어 책상 위에 놓고 이리 저리 앞뒤로 살펴 보다가 망연자실하여 하릴없이 손가락으로 피아노 치듯 두드려대고 있는데, 문득 손가락 끝으로 메모의 점마다 박혀 있는 돌기가 느껴졌다.


‘이 돌기들은 뭐지···?’


메모지를 뒤집어 검지손가락으로 종이 표면을 쓸면서 돌기를 하나 하나 만져 본 순간, 마치 불꽃이 일듯 머릿 속의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건 점자다! 떠-나. 내가 어떻게 점자를 알지? 한-번-도.


‘한번도’까지 확인한 후 손이 떨려 메모지를 떨어뜨렸다. 시연은 점자를 배운 적도, 직접 만져서 읽어본 적도 없었다. 놀랍고도 괴이한 일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점자를 내가 어떻게 읽은 거지? 머리 속에 그냥 떠오른 글자들인데, 그게 읽은 건가?


메모지를 주워 들고 다시 한번 검지손가락으로 쓸어 읽기를 시도해보았다. 역시 아까와 마찬가지로, 한 글자 한 글자 떠오르기 시작했다. ㄱ. ㅏ. ㅂ. ㅗ. ㅈ. ㅣ. ㅁ. ㅗ. ㅅ. ㅎ. ㅏ. ㄴ. ㅕ. ㄱ. ㅡ. ㄹ. ㅗ.


떠나. 한번도 가보지 못한 역으로.


뭔가를 읽었다기보다는 돌기를 만지면서 그냥 머리 속에 떠오른 문장이었다. 정말 점자가 말하는 내용이 이것일까? 시연은 인터넷을 뒤져 급히 점자 읽는 법을 찾아보고, 메모지의 점자를 하나씩 맞추어 보았다.


‘맙소사. 좀 전에 떠오른 문장 그대로잖아. 내가 점자를 읽다니······.’


경악스러울 만한 일임에도 시연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점자 메모의 수신인이 자신이라는 확신이 들게 만들었다. 역시, 내가 간밤에 적어 놓은 메시지일까. 한번도 가보지 못한 역으로 떠나라니, 이게 무슨 말인지 간밤의 나는 알고 있었을까.


나일 수도 있는 미지의 존재가 나에게 보낸 메시지. 시연은 그 메시지의 내용을 따라가보기로 했다.



*



한번도 가보지 못한 역을 찾는 일도 쉽진 않았다. 시연이 사는 도시는 전철 노선은 하나뿐이었고 역은 일곱 군데였지만 그 중에 시연이 안 가본 역은 없었다. 시연의 집과 학교는 전철역의 양 끝 역 근처에 있어서 모든 역을 매일 통과해야 했다. 기차역은 중앙역 하나뿐이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역은 없는데···. 어디로 가라는 거지?’


시청 콜센터에 문의를 해서 겨우 알아냈다. 상담원은 친절하게 ‘마인드트레인 노선이 들어오는 역이 하나 있는데, 들어오기만 하는 단방향 노선이라 철도-전철 노선표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지금 그 역으로 가는 중이다. 단방향 노선이라는데 어떻게 떠나지, 하는 의문은 또 미루어 두었다.


자전거가 달릴수록 조금씩 역사의 지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가슴이 설레어 왔다. 나일 수도 있는 미지의 존재는 나를 만나고 싶은 걸까. 그래서 나를 부른 걸까. 이제 네거리를 건너 우회전하면 역 앞 광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설레임,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어.


네거리의 신호등은 파란 불이었다. 시연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네거리에 들어섰다. 시연의 오른쪽에서 나타난 대형 트럭 한 대가 똑같이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그대로 시연의 자전거를 치고 밀어제꼈다. 충격으로 몸이 튕겨나가 높이 떠올랐을 때, 시연은 역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쿨리 투이(Oculi Tui).


너의 눈, 이라는 뜻이지.


이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아스팔트에 떨어져 두개골이 깨져나가고,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순간까지도 시연은 그게 궁금했다.



*



그러고나서 침대에서 눈을 번쩍 떴다. 아침 8시 3분이었고, 머리맡의 메모지는 텅 비어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 작성자
    Lv.45 희망녀
    작성일
    18.04.20 05:48
    No. 1

    저 점자를 읽는 법을 배우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찌 알았을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4.20 09:30
    No. 2

    ㅎㅎ 다음 주 연재분 중(27화쯤) 점자 메모의 비밀이 밝혀집니다! 기대해 주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4.22 22:41
    No. 3

    1화 떡밥리스트:
    1) 메모는 왜 굳이 점자일까요?
    2) 시연의 ‘나일 수도 있는 미지의 존재’ 는 왜 역으로 시연을 부른 걸까요?
    3) 시연은 ‘오쿨리 투이’ 라는 역 이름의 의미(너의 눈)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요?

    찬성: 1 | 반대: 1

  • 작성자
    Lv.55 맘세하루
    작성일
    18.04.25 20:37
    No. 4

    색다른 출발이네요. 건필핫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3 빌드업
    작성일
    18.05.06 18:36
    No. 5

    놀러왔습니다ㅋ 글을 정말 잘 쓰시네요.. 흥미롭습니다 다만..개인적으로 아쉬운건 떡밥리스트가 없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5.06 20:09
    No. 6

    아이쿠 감사합니다... 떡밥리스트는 독자 반응이 너무 없어 잠정적으로 중단하려고 합니다. 완결된 후에 주요한 항목만 정리하는 선으로 하려고 합니다. 공모전 말미라 그런지 연재도 힘들고 부가 콘텐츠(?) 작성도 너무 힘드네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3 빌드업
    작성일
    18.05.06 20:52
    No. 7

    저도 똑같은 고민입니다 하루이도 수십번 엎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아요..ㅠ 쓴 에너지에 비해 너무 반응이 없으니까.. 랄프님 보다 글 못쓰는 작가가 인기많을 걸 보면.. 저도 참 뭐가 문젠지 모르겠네요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5 랄프C
    작성일
    18.05.06 21:03
    No. 8

    ㅎㅎ 과찬이십니다~. 속상할땐 사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막상 인기작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제가 아직 갖지 못한 뭔가가 있는 것 같더라구요~ ㅋ 글솜씨일수도 있고 캐릭터나 이야기전개, 세계관일수도 있는 것 같구요. 일단 이번엔 기간내 완결이라는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을 목표로, 거기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마음만 ㅠㅠ) 라구요 작가님도 건필하시고 마무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찬성: 1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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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진입 +7 18.04.10 630 9 7쪽
4 왜 국민정신건강진흥원인가 +5 18.04.10 647 12 7쪽
3 임무 +4 18.04.09 697 12 8쪽
2 인터뷰 +5 18.04.09 861 13 10쪽
» 메모 +8 18.04.09 1,191 13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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