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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a 님의 서재입니다.

촉법소년은 보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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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ya
작품등록일 :
2023.12.25 04:33
최근연재일 :
2024.09.21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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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4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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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28화. 엄벌주의

DUMMY

화려하게 꾸며진 집무실.

과거, 예현이 과시욕을 은밀히 드러낸 곳이다.

동시에 지금은 적당히 있을 만하기도 장소이기도 했다.

녹호일 때 누렸던 호사스러움을 생각하면, 누추하지는 않은 수준이니까.


톡, 톡, 톡···


가죽 의자에 앉고서 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가볍게 두드린다.

휴식처럼 보이기도, 고민하는 듯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중후한 외모 덕에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별것 아닌 동작이었지만, 영화를 떠오를 정도였다.

경건한 종교인 역할이라든가, 반대로 느와르 속 흑막이라든가.

방 안이 약간 어두운 편이라 더 그런 걸 수도 있다.


“저기요! 면담하고 싶은데요!”


그런 휴식을 한 목소리가 방해했다.

예현은 피곤한 듯 눈가를 한 번 문지르더니,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게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짝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 하나가 튀어나왔다.


“인영 양이었군.”


박인영.

서주의 조카가 갑작스레 찾아왔다.

아니, 전화번호를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무슨 일인가? 서주 양은 벌써 돌아갔네만?”

“알아요. 일부러 지금 찾아온 거예요.”

“흐음, 일단 앉게.”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마실 것이라도 필요한가?”

“아니요, 되도록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요.”

“알겠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게나.”


인영이 자리에 앉았다.

시선은 차가웠고 표정은 굳어있다.

그동안 잘 지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역시 뻔했다.


“이모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죠?”


다소 날이 선 목소리.

하지만 마지막에 봤을 때처럼 반말은 아니었다.

문제를 깔끔하게 풀긴 힘든 모양이다.

그토록 싫어하던 목사에게 다시 예의를 갖춰야 할 정도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만.”

“······.”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는 들은 바가 없다네.”


미주알고주알 사정을 다 얘기하는 일.

분명 자존심이 상할 터였다.

원흉에게 징징대는 꼴이었으니.

그래도 계속 침묵을 지킬 순 없는 노릇이다.

자존심과 가족, 그 사이에서 결정해야 했다.


“···짐작할 텐데요. 저랑 이모 사이, 틀어졌다는 것 정도는요.”


예현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상스레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인영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눈가를 떨었다.

기껏 자존심을 접은 대가치고는, 너무나 짧막한 대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엔 입을 닫고 잠시 기다렸다.

혹여 뒤이어 뭐라고 할까 싶었는지.


“······.”


5초.

10초.

15초.

이 정도가 지나자 알 수밖에 없었다.

예현은 이대로라면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을 거라고.

그러자 인영도 더는 참지 못했다.


“책임감이라는 게 없어요?”

“무슨 말인가?”

“사이비 짓거리로 가정을 파탄 내놨으면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껴야지, 아예 모른 척을 하나요?”


다시 반말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혼자 해결하기 힘들어 차린 예의, 하지만 계속 모른 척한다면 더 유지할 이유는 없었다.


“오롯이 나 때문에 사이가 틀어졌다니, 그건 지나친 비약 아닌가?”

“뭐라고요?”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보게. 정말 서주 양이 이 교회에 다니기 전까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가?”

“당연하죠, 당신이 없을 때까지만 해도 다 좋았어요!”


망설임도 없이 단호히 대답한다.

좋은 선택이기도 했다.

잠깐이라도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기세가 꺾였을 테니 말이다.


“서주 양이 고생이 많았겠군.”


하지만 상대가 안 좋았다.

예현은 지금 상황을 예상하고 이미 시나리오까지 다 써놨다.

심지어 나름 베테랑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속내를 숨기고 기회를 노리는 신경전을, 최소한 두 번은 더 해봤지.


“속이 곪아도 조카에게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어야 했으니 말일세.”

“저기요, 그게 무슨···!”

“정말 이곳을 사이비로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답해보게. 아무 괴로움 없이 멀쩡한 사람이, 붙잡아두지도 않았는데 여기에 빠지겠는가?”

“댁이 수작을 부렸겠죠!”


결국, 인영이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건 무조건적이고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듣는 사람에 따라 기가 꺾일 만했다.


그렇지만 예현은 여전히도 차분했다.

이 상황 역시도 경우의 수에 존재해서 그런 걸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빈틈이 보였을 수도 있겠지.


“이보게. 나는 목사지, 마법사가 아닐세. 아무리 감언이설을 소나기처럼 퍼붓는다고 한들, 단단한 바위 속까지 스미진 못한다네.”

“계속 말한다면 모르죠.”

“그렇지, 계속 말한다면. 하지만 그걸 듣고 있겠는가? 멀쩡한 사람이? 자네라면 그렇게 하겠는가?”


‘너라면 사이비에 빠지겠는가?’

걸려든 피해자는 많지만,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그건 아니죠.”


긍정할 리 없었다.

그리고 원하는 대답이 나온 만큼, 당연하게도 흐름은 예현에게로 넘어갔다.


“그래, 보통은 기껏해야 휴식처로 활용할 뿐일세. 힘든 삶에서 기댈 수 있는 휴식처 말이네. 든든한 둥지, 가정은 따로 있지 않은가?”

“이모는 아니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서주는 왜 이곳에 집착했겠는가?”


또다시 질문.

이번엔 답이 정해지지 않은 주관식이다.

단지, ‘서주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다’는 전제가 깔렸을 뿐인.


“그건···.”


답은 섣불리 나오지 못했다.

이모의 약점을 말하는 일이다.

쉽게 입을 열 수 있을 리 없었다.


‘서주는 왜 사이비에 빠졌는가?’


망설임이 있었고, 고민이 이어졌다.

그리고 고민은 늘 그렇듯 침묵과 손을 잡고 있었다.

예현이 언제 그 답을 대신 내도 이상하지 않을.


“둥지가 든든하지 못했겠지. 자네가 이제야 겪었을 감정을, 서주 양은 오래전부터 앓고 있었다는 말일세. 불안하고 있을 곳 없는 표류감을.”

“······.”

“둥지가 제 역할을 못 하니,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방법이란, 휴식처로 도피하는 것뿐이지. 안 그런가?”


사이비는 목표가 가장 취약해진 순간을 노린다.

반대로 말하자면, 위기에 처한 인간일수록 쉽사리 잘못된 길로 빠진다는 뜻이다.

‘있을 자리’가 ‘없는 사람’은 그래서 휴식처로 도피를 하고 만다.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서주 양은 자네가 믿어주지 않은 순간 무너지고 말았네.”


인영은 그 말에 표정을 굳혔다.

그건 자신이 저질러버린,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기 때문이다.

그 말만 아꼈더라도 지금처럼 사이가 벌어지진 않았을 테지.


그랬다면 상황은 훨씬 좋았겠지.

최소한 현상 유지는 하고 있으며, 대화 정도는 나누고 있을 거다.

동시에 기회를 노릴 수도 있었다.

예현이 실수하는 순간, 서주를 빼낼 기회를.


“···네, 제가 이모한테 너무하긴 했죠. 단 한 번도 믿어주지 않았으니까요.”

“······.”

“정론이에요. 가족 모두가 서로에게 관심을 가졌다면, 이런 일을 예방할 수 있다는 말은요.”


마음은 무기질이라서, 망가진 후에 쉽사리 복구되지 못한다.

균열이 생겼다면 그대로 방치될 뿐이다.

그렇기에 더 소중히 여겼어야 했다.

혹여 부스럼이나 생기지 않을까, 매일 살펴봐야 한다.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동시에 이상론이죠.”


이제 그건 늦어버린 얘기였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언제 시간 내서 서로 대화하고 있어요? 밖에서 할 일 때문에 나도 힘든데, 어떻게 계속 웃고만 있고요?”

“······.”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죠, 그건. 그러니까 당신 같은 범죄자를 족치고, 피해자는 치료하는 게 최선이고요.”


인영은 차선을 선택했다.

눈앞의 사이비를 믿느니, 경찰과 보호센터에 맡기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게 사실이기도 할 테지.


결론은 나왔다.

더 대화할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린다.

그대로 저 문을 나가 경찰서로 갈 예정이었겠지.

예현이 입을 열지만 않았더라면.


“‘정론이지만, 이상론이다.’ 똑똑한 척하기에는 좋은 말이지.”


계속 연기해온 근엄함 안에 묘한 싸늘함이 스몄다.

세심한 사람이라면, 예현이 불쾌해한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겠지.


“실상은 반박할 말도 안 떠오르고, 노력하기도 싫다는 소리 아닌가? 정론이지만, 이상론이라는 이야기는.”

“뭐라고요?”

“비겁하지 않냐는 얘기일세. 누구보다 이상적인 상황을 원하면서, 정작 이상론을 가져오니 허황됐다는 소릴 하고 있잖은가? 이루기 힘들다는 이유를 들면서 말일세.”


묵직했던 눈빛에는 날카로움이 서렸고, 목소리에도 노기가 느껴졌다.

그건 탈처럼 뒤집어쓴 예현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본질에 가까운, 도플갱어가 지닌 분노였다.

그 명백히 변한 태도에, 나가기로 결심한 인영마저도 잠시 붙잡히고 말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가? 그래, 예를 들어주겠네. 한 범죄자 집단이 있었다네. 한 아이를 납치하고 감금한 자들이지.”


도플갱어가 말하는 사건.

그게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는 자라났다네. 어느 날 감옥에서 탈출했고, 자신을 가둔 인간 중 한 명을 죽였지.”


진짜 녹호 이야기, 그리고 두오와 관련된 사건.

두오는 도플갱어에게도 자식의 정을 느낀다고 말했었지.

동시에 상대 역시 자신을 어느 정도는 아버지라고 여긴다고 짐작할 터였다.

그러니 말로 훈계해댔겠지.

죗값을 치르고 새사람이 되라며.


단호하고 냉정한 말이다.

하지만 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오가 ‘교화’를 위해 ‘엄벌’을 택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포기나 복수가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기에 그 말을 따랐다.


“웃긴 건 뭔지 아는가? 그중 한 범죄자는 신고하겠다며 발발거렸다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면서. 그게 정의라며.”

“도대체 그게 나랑 무슨 상관···”

“그런데 자신 역시 잡혀갈 처지가 되니, 그만두자고 했지. 제 가족에게 부끄러운 아버지, 조부가 될 수 없다며 말일세.”


‘교화’를 위해 ‘엄벌’을 택한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논의해볼 만한 이야기다.

적어도 아이에겐 그랬다.


원래 ‘엄벌주의’의 반대말은 ‘교화주의’가 아니었다.

배려와 따뜻함을 주자는 ‘온정주의’지.

아이도 거기까지 바라진 않았다.

이미 십수 년을 지하실에서 홀로 보냈던 만큼, 차라리 ‘엄벌’이 속 편했다.

그 끝에 정말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할 수 있었다.


“웃기지 않은가? 엄벌은 교화를 위해 있다고 말했으면서, 정작 자기 앞에 왔을 땐 추락이라고 여긴다니.”


‘교화’란 세상에 섞이기 위해 하는 일이니, 얼마든 견딜 수 있을 터였다.

난생처음 기회라는 것이 주어진다니, 얼마든 견딜 수 있을 터였다.

속죄가 끝나면 그 끝에 아버지가 있으니, 얼마든 견딜 수 있을 터였다.

얼마든, 견딜 수 있을 터였다.


“사실 제 분노를 풀기에 급급했던 게지. 법이 강해야 범죄자가 바뀐다는 말 따위, 뒤늦게 붙인 핑계에 불과했다네.”

“그러니까, 그걸 왜 저한테 얘기하냐고요.”


하지만 진실은 드러났다.

‘엄벌’ 따위, ‘교화’를 위해 권한 것이 아니었다.

‘엄벌’ 따위,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엄벌’ 따위, 아버지가 내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닮지 않았는가?”


‘엄벌주의’가 ‘교화주의’의 반대말이 되었을 때, 광소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이제는 모를 수 없었다.

자식의 정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는 여전히 그 지하실에 홀로 있었을 뿐이다.


“자네 역시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지 않은가? 그 불쌍한 아이를 살뜰히 소모해버릴 생각이면서, 이리도 기만해버리다니.”


작가의말

깜빡하고 말 안 했는데, 이거 엄벌주의 까는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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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1화. 빚 +1 24.01.29 59 1 12쪽
30 30화. 모텔 +1 24.01.26 68 1 12쪽
29 29화. 이상 +1 24.01.25 58 1 12쪽
» 28화. 엄벌주의 +1 24.01.24 59 1 13쪽
27 27화. 욥 +1 24.01.23 64 1 12쪽
26 26화. 고래 사이 새우 +1 24.01.22 63 1 12쪽
25 25화. 사이비 목사가 될 준비 +1 24.01.19 69 1 12쪽
24 24화. 벌이가 괜찮은 사이비 +3 24.01.18 77 1 12쪽
23 23화. 가정 파탄 +1 24.01.17 80 1 12쪽
22 22화. 창세기 +1 24.01.16 79 1 12쪽
21 21화. 세뇌의 시간 +1 24.01.15 90 1 13쪽
20 20화. 독대 +1 24.01.12 94 1 12쪽
19 19화. 쥐와 고양이 +1 24.01.11 93 2 14쪽
18 18화. 없는 사람 +1 24.01.10 100 2 13쪽
17 17화. 목을 조르다 +1 24.01.09 113 3 12쪽
16 16화. 천선분식 +1 24.01.08 113 2 13쪽
15 15화. 악마를 낳았다 +1 24.01.05 127 2 12쪽
14 14화. 달동네 +1 24.01.04 124 2 12쪽
13 13화. 훌륭한 사람 +1 24.01.03 130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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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화. 의심 +1 24.01.01 136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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