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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한 소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꽁.곰
작품등록일 :
2020.09.20 22:17
최근연재일 :
2021.01.25 10:04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870
추천수 :
43
글자수 :
179,542

작성
20.12.31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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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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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9쪽

산맥을 지키는 고래-6

DUMMY

“나오지 않으면 싸우자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


리브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무를 타고 산맥에 울려 퍼졌다. 리브케의 손에서 솟아나듯 나타난 검은 칼날이 빠르게 모습을 갖추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나무 뒤에서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루론 탄타니, 의지를 거두어라.”


길게 솟아나와 있는 검은 칼날을 남자가 불길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건 당신들이 해야 할 일 같은데. 내 앞에서, 산맥 안에서 숨바꼭질이라도 하나?”


리브케가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그 눈길이 닿는 곳에서 라프-칸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는 풀잎의 그림자에서, 누군가는 나무둥치 아래에서, 또 누군가는 공기 중에서.


“오랜 습관이다.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나도 모르는 이를 만나면 손에 날부터 세우는 게 오랜 습관이다. 이해해 주길 바란다.”


힐끗 뒤를 돌아본 남자가 항복하듯 손을 들어 보였다.


“우리는 당신과 싸울 의사가 없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일 텐데?”


“맞는 말이야. 하지만 먼저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돌아가라. 지금은 누구도 산맥을 넘을 수 없다.”


“그게...사실 좀 불가능하다.”


리브케의 날선 태도에 망설이던 태도를 보이던 남자가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말을 하는 남자의 어조는 꽤나 무덤덤했다.


“불가능하다고? 황국의 라프-칸이 산맥을 넘겠다 그 말인가?”


“자세히는 말할 수 없지만, 우리는 지금 도시를 파괴하고 한 고귀한 분을 납치한 악독한 자를 쫓고 있다. 대륙의 자그마한 성 소속의 라프-칸이 한 신고 덕분에 위치도 겨우 알았지. 일초가 아까운 시점에, 사실 이렇게 입씨름할 시간도 없단 말이다.”


“납치범?”


리브케의 반문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국의 일이라 더 자세히 말할 수는 없다.”


“누굴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지금 산맥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그런 내가 말하는데, 너희가 말한 존재는 산맥을 넘지 않았다. 그러니 돌아가도 괜찮다.”


“거짓말, 당신의 말은 거짓말이야.”


남자의 시큰둥한 목소리에는 약간의 분노마저 들어있는 듯했다. 그 말에 리브케가 대답하는 대신 눈을 찌푸렸다.


“돌아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우리가 물러날 것 같나? 당신네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산맥에만 처박혀 지내더니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잊은 모양이군.”


남자의 비꼼에 가까운 말에 리브케가 남자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리브케가 휘두른 팔에서 뭐라 설명하기 힘든, 그림자마냥 뿌연 형상이 빠져나왔다. 빠르게 쇄도하며 세 배 이상으로 몸집을 불린 ‘그것’이 남자가 있던 곳을 덮쳤다.


‘퍼어어엉-‘


그가 서있던 곳이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흙과 돌들. 하지만 자욱하게 일어나는 흙먼지 속에서 남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 곳은 아까 그가 서있던 곳으로부터 몇 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나는 펠카타의 다섯 번째 시험을 통과한 이다. 당신의 공격 한 번에 쓰러질 정도로 약하지도 않지.”


“펠카타 본인들이 가진 힘을 알고 있다면, 지금 얼마나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잘 알 것이다.”


“안 보내주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나?”


“당신들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거꾸로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았나? 그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인데 말이다.”


남자의 목소리에 가득한 급박함과 투기가 가득했다. 무슨 생각인지 그런 그를 말없이 쳐다보던 리브케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린 라프-칸들아. 부디 너희 스스로를 어여삐 여기도록 하여라.”


가라앉은 리브케의 목소리는 꽤나 차분했다. 리브케의 바뀐 어조에 남자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너희가 겪는 모든 감정들, 너희를 이루고 있는 하나하나는 모두 너희 옆에 선 자들이 있을 때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기를 바라고 한 말인가? 돌려 말하는 건 우리나 그대나 모두 싫어할 텐데.”


“흑탑에서 지독한 수련을 거친 자들이니 잘 알 것이다. 너희는 나와 싸우면 모두 죽는다.”


그 말에 앞서 나온 남자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그대들은 내가 이 산맥에 사는 이유를 알고 있나?”


“감히 우리 일족 중에 그 이야기를 모르는 자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내가 워홀을 부숴 라포칼리스의 분노를 받게 되었고, 그 분노를 피해 산맥으로 숨어들었다는 이야기?”


리브케가 조소했다. 정곡을 찔린 남자가 침묵을 지켰다.


“나는 일전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였다. 그 날 나는 내게 유일하게 의미가 되어주었던 무언가를 잃어버렸어.”


“···..”


“자책하고, 분노하고, 절망했다. 물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서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 깃든 곳이니까.”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지금 이 산맥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나에게 희로애락으로 다가오지만,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는 지금 방안에서 혼자 웅크린 채, 조그마한 티비 화면에서 나오는 코메디에 취해 웃고 있다는 것을.”


“티브이? 쿠메디? 그게 뭐요?”


남자가 기억을 되감아보았지만, 역시나 그러한 것들을 들어본 기억은 없었다. 그가 자신의 앞에서 자조하듯 떠드는 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저 망령은 까마득한 멸망한 시대로부터 거슬러온 케케묵은 존재였다. 어쩌면 저 단어들은 과거의 잊혀진 문명에서의 무언가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너무 잘 알고 있다. 저 문 바깥이 티비 속 세상처럼 행복으로 가득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기서 욕심을 내어 한 발자국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그 밖에는 죽은 듯한 고요함과 어둠만이 가득하고, 방안 티비에서 나오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얼마나 부질없는 거짓말인지를 깨닫게 해줄 뿐이라는 것을.”


“.....”


“너희들은 모른다. 홀로 남겨진다는 것이 얼마나 지독한 일인지. 슬픔과 절망, 기쁨이 모두 무채색이 되고, 나를 취하게 한 그 모든 감정들이 무의미 해진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때 너를 절망케 했던 그 감정조차 그리워하게 된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남자가 쥐어짜내듯 물었다. 가만히 망령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저 정신나간 이야기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이 산맥은 수많은 이들의 약속 아래 세워진 것이다. 그 끔찍한 절망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그 속에 너희들 또한 없으리라고 생각하나?”


“지금 산맥을 못 넘게 하는 것이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인가? 거짓된 이야기로 우리를 희롱하는 것인가?”


“너희들의 가짜 신도 차마 해주지 못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리브케의 그 말에 남자가 뿌득, 하고 이를 갈았다.


“설마 그 가짜 신이 라포칼리스를 얕잡아 조롱하는 것이라면, 내 목숨을 태운 의지를 받아내야 할 것이다.”


“얕잡은 적 없다. 라포칼리스. 아아-! 얼마나 가엾은 자인가.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나 가장 축복받은 길을 걸어야 할 자임에도, 너희들이 잃어버린 진짜 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기꺼이 무너져 내려가는 자임을. 어찌 진짜 신의 사랑을 그리도 갈구할까? 정작 나는 너희를 향한 그의 사랑이 이리도 절실하게 느껴지는데.”


격분해 소리치려던 남자가 말을 멈추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이라도 하듯, 리브케의 온 몸에서 정말 격한 분노와 슬픔이 요동쳐 나왔던 것이다. 잠시 소강상태가 벌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안한 침묵을 깨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당신이 한 말들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의지는 이해하기에 앞서 느끼는 것이니까.”


“그래, 고맙군.”


“하지만 당신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이 산맥에 너무 오래 처박혀 있어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 미처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참 유감이군.”


고저없는 리브케의 목소리에 남자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흘린 피를 누군가는 기억해줄 것이다.”


남자의 말에 리브케를 에워싼 이들로부터 형형색색의 의지들이 발현되었다. 이내 리브케의 주변이 수십, 수백개의 의지로 가득 찼다.


“살아남아 산맥 저편에서 만나자.”


뒤를 돌아본 남자가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이들을 보며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소리쳤다.


“...돌격!”


작가의말

올해가 한시간도 채 안 남았군요. 


올해는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해이기보다, 버티어내는 해라고 합니다.

모두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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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정체불명의 이방인-5 21.01.25 12 1 11쪽
33 *오래된 기억(1) 21.01.24 16 0 2쪽
32 정체불명의 이방인-4 21.01.22 19 0 13쪽
31 정체불명의 이방인-3 21.01.18 21 1 12쪽
30 정체불명의 이방인-2 21.01.14 17 0 13쪽
29 정체불명의 이방인-1 21.01.08 23 1 13쪽
28 산맥을 지키는 고래-7 21.01.04 18 1 8쪽
» 산맥을 지키는 고래-6 20.12.31 21 1 9쪽
26 산맥을 지키는 고래-5 20.12.17 17 1 10쪽
25 산맥을 지키는 고래-4 20.12.13 13 1 10쪽
24 산맥을 지키는 고래-3 20.12.10 24 0 12쪽
23 산맥을 지키는 고래-2 20.12.07 18 1 11쪽
22 산맥을 지키는 고래-1 20.12.03 17 1 11쪽
21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7 20.11.29 19 1 13쪽
20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6 20.11.26 17 1 12쪽
19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5 20.11.24 17 1 12쪽
18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4 20.11.19 20 2 18쪽
17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3 20.11.15 25 2 15쪽
16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2 20.11.13 25 2 11쪽
15 하늘에서 떨어진 소녀-1 20.11.08 22 1 9쪽
14 *낡은 편지 20.11.08 20 2 2쪽
13 추락하다-13 20.10.29 20 2 15쪽
12 추락하다-12 20.10.25 20 2 15쪽
11 추락하다-11 20.10.22 24 0 12쪽
10 추락하다-10 20.10.19 20 1 12쪽
9 추락하다-9 20.10.15 22 1 13쪽
8 추락하다-8 20.10.12 20 2 10쪽
7 추락하다-7 20.10.08 19 2 13쪽
6 추락하다-6 20.10.04 28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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