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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글공방

갓난이

웹소설 > 작가연재 > 일반소설, 중·단편

완결

아버지
작품등록일 :
2018.04.09 13:27
최근연재일 :
2022.08.12 05:24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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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수 :
88,803

작성
22.08.12 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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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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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189쪽

갓난이

DUMMY

[본 글은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글임]


내 머릿속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여섯살이나 일곱살 무렵쯤 얼굴에 부스럼이 많이 났던 일이다. 흔히 눈다락지라고 불렸던 그것은 얌통맞게 눈가에 삐죽 튀어 나와 그 무렵의 나를 친구들의 놀림거리로 만들었었고.


본래 눈다락지라는 것은 그리 심한 병이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없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당시 나를 무척이나 예뻐하셨던 우리 아버지는 내 눈다락지를 치료해주기 위해 내손을 꼭 붙잡고 병원을 데려가셨다.


물론 당시의 열악한 의료환경은 가만히 두었으면 저절로 흉터 없이 아물었을 이 눈다락지를 오히려 80이 넘은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바꾸어 놓았다. 평생 나를 따라다닌 이 지긋지긋한 흉터를 제외하면 그 이후의 기억은 학교를 들어갔을 당시의 기억이다.


당시 다른 아이들은 여덟살쯤 학교에 가지만 나는 열살이 되어서야 학교에 갔다. 그리고 그렇게 학교를 늦게 간 것은 그때 가장 흔한 이유였던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아버지는 부지런한 분이셨고 논을 30마지기나 가지고 계셨으니 열심히 농사만 지어도 먹고 사는데는 걱정이 없었으며 오히려 동네에는 부자라고 소문이 날 정도 였다.


심지어 그시절 우리가 살던 집은 행랑체도 따로 있던 13칸짜리 집이었는데 그정도면 동네에서 보기 드문 커다란 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가정형편이 어려운 것이 아님에도 내가 학교를 늦게 가야 했던 이유... 사실 당시에는 시대적으로 여자들은 학교를 안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는 어린 소녀들을 학교에 보내면 바람이 난다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제 막 국민학교에 들어가는 어린 소녀들이 무슨 재주로 바람을 피는지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하지만 놀랍게도 당시에는 흔히들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때의 어린 나는 학교가 뭔지도 모르면서 너무 학교가 가고 싶어 큰오빠에게 학교를 보내달라고 졸랐다.


우리 큰오빠는 얼굴도 잘생기고 부모님에게도 효도할뿐더러 공부도 잘하는 사람이라 당시 우리 부모님은 맏아들인 큰 오빠의 말을 무척이나 잘 들어주셨기에 내 딴에는 직접 부모님에게 말하면 가능성이 없을 것 같으니 꾀를 낸 것이었다.


"오빠 나도 학교 가고 싶어~ 학교에 가고 싶어~"


나보다 7살 나이가 많던 큰오빠는 당시 고등학생쯤 되었는데 학교가고 싶다 졸라대는 어린 내가 안쓰러웠는지 부모님과 할머니에게 사정사정 하였다.


그런데 그무렵 우리집에 얹혀살던 삼촌이 그런 우리 큰오빠를 다그치며 말하길


​"지금 여자들을 누가 학교를 보내! 큰일날 소리 하지도 말아!!"


라고 하시는데 삼촌이 어찌나 서운하고 미운지 옆에서 그 소리를 들은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당시 얼마나 서러움을 느꼈는지 지금도 호되게 다그치던 삼촌의 목소리가 귓가에 쨍쨍할 정도다.


그래도 우리 큰오빠는 나를 위해 계속해서 아버지를 졸랐고 맏아들을 무척이나 믿으셨던 우리 부모님과 할머니는 결국 큰오빠의 성화에 못 이겨 나를 학교에 보내주셨다. 그렇게 큰오빠 덕에 내 나이 열세살에 6.25전쟁이 나기 전까지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전쟁이 날 무렵 나는 국민학교 3학년 이었는데 어느날 일요일 아침에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갑자기 전쟁이 일어났다. 그 일요일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자기 북한군이 무섭게 쳐들어오자 동네사람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포탄을 피하기 위해 산 밑에 있던 우리집으로 피난을 왔었다.


당시 우리집은 여유가 좀 있었기에 우리 아버지는 그런 피난 온 동네사람들에게 모두 밥을 먹여주셨고 요란한 소리가 조금 잠잠해 지면 사람들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 방공호를 파셨다.


전쟁이 심해져 총소리와 폭탄 터지는 소리가 무섭게 울려 퍼질 때는 모두들 그 방공호에 숨어있었는데 나중에는 전쟁이 너무 심해져서 그마저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결국 우리 가족은 피난을 생각하게 되셨다.


당시 내 나이는 열세살이고 나보다 어린 세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어린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피난을 갈수 없으니 부모님이 집안의 기둥인 큰오빠와 내 바로 밑 남동생 하나만 데리고 피난을 가셨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씨를 남겨야 한다며 남자 형제들만을 데리고 피난을 간 것 이었지만 당시나 지금이나 그것이 서운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때 듣기로는 피난을 가는 도중 어린아이들이 죽는 경우는 숱하게 많았으며 그렇게 아이가 죽어도 아이의 시체는 챙길 겨를도 없이 쏟아지는 총과 폭탄을 피해 아이의 시체를 밟고 피난을 간다고 했으니 그 참상이 말로 못할 지경이었다.


결국 그렇게 할머니와 나 그리고 두명의 동생과 주변에 살던 친척들은 피난을 가는 대신 고향에 남아 동네에서도 큰집으로 손꼽히던 우리집에서 모여 살게 되었는데 어느날인가 무섭도록 요란한 총소리가 주변에서 끊이지 않고 들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울려대는 타타타타! 하는 총소리는 마치 심장을 옥죄는 듯한 긴장감을 주었고 집에 남아있던 식구들은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요란한 총소리에 황급히 전에 파두었던 뒷산의 방공호로 가서 숨었다.


얼마나 심한 전투가 벌어지는지 우리가 숨은 방공호 주변으로도 포탄이 몇발 떨어지며 땅이 들썩거렸는데 제대로 된 방공호가 아니라 마을사람들과 다급한 마음으로 팠던 방공호는 그렇게 주변의 땅이 들썩 거리자 우르르르~ 울리며 불안한 조짐을 보였다.


"방공호 무너진다! 다 나가라!!!"


결국 조짐이 심상치 않았던 방공호는 무너져 내렸고 이를 먼저 파악한 같이 방공호로 피했던 사촌 오빠가 큰소리로 외치자 방공호에 숨었던 가족들은 다들 황급히 방공호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 역시 그렇게 사촌 오빠의 목소리를 듣고 밖으로 피하려 했지만 운이 나쁘게도 방공호에 있던 사람들 중 나만 나가지 못하고 무너지는 방공호에 깔려 땅속에 묻혀버렸다. 나는 달려나가다 엎어진 채로 땅속에 묻혔는데 천운인지 약간의 숨 쉴 공간이 있었다.


거기다 얼핏 밖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땅속에서 겁에 질린 체 소리쳤다.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나 좀 살려줘요~"


그러나 내가 겁에 질린 체 질러댔던 그 소리는 밖에 있는 누구도 듣지 못했다.


"이제 다 나왔냐? 아이구 갓난이가 없구나! 갓난이가!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땅속에 묻혔나 보다!!"


밖으로 탈출한 인원을 확인해보던 사촌오빠가 이내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 땅을 여기 저기 파보는데 방공호 전부가 무너져 내려 흔적조차 남지 않았으니 나를 찾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땅속에 묻힌 와중에도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듣고만 있었는데 사촌 오빠가 가족들을 이끌고 나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며 땅을 파보는 소리까지 모두 들렸다.


"아이고 발이 나왔다. 찾았다!!"


그렇게 여기저기 땅을 파던 사촌오빠가 결국 내 발을 찾아냈고 나는 죽음과도 같은 땅속에서 살아나왔다.


얼마 전 그때 나를 땅속에서 구해줬던 사촌 오빠의 장례식을 다녀왔다. 내 생명의 은인인 사촌오빠에게 살아생전에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 잘하지도 못해서 죄송하고 내 모진 인생사에 대한 설움도 북 받혀 장례식장에서 정말 펑펑 울었었고.


다른 이들은 내가 그리 서럽게 우니 돌아가신 사촌오빠가 그리워 우는 줄 알았겠지만 막상 울기 시작하니 내 인생은 어찌 그리도 모진지 나중에는 오히려 내 인생에 대한 설움 때문에 더 크게 운 꼴이 되었다. 그래도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자 속이 좀 후련한 기분이 들었고.


당시 내 생명의 은인이었던 사촌 오빠는 돌아가시실 때 나이가 아흔이 넘으셨는데 나이가 드신 후 집안에서 탁자를 옮기다 다치신 뒤로는 결국 돌아가실 때까지 거동을 하지 못하셨다.


당시 사촌오빠가 다쳐 몸져누웠다는 소리를 전해들은 나는 녹두를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 놓고 몸이 아프시니 녹두죽을 쒀서 가져다 드려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시다 돌아가셔서 결국 생각만 하다 죽은 못 만들어 드렸고.


이상하게 자꾸 사촌 오빠를 보러 가고 싶더라니 결국 내가 가기로 마음먹은 날짜로부터 단 이틀 전에 사촌오빠가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다 이틀만 있다가 가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다가 다들 갑작스레 병세가 악화되셔서 돌아가시는 옆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운명은 매번 그렇게 잔인하고 모질었다.


방공호가 무너지며 땅속에 그리 오랜 시간을 묻혀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 그때 가족들이 다 나왔다고 생각해서 사촌 오빠가 인원을 세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으면 나는 꼼짝없이 죽은 거였다. 그 고마운 사촌 오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계획만 잡아두고 한번 더 찾아뵙지를 못했으니 그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 다 할까.


그렇게 무너지는 방공호에 파묻혔다가 가족들에 의해 구해지고 난 뒤 확인해보니 무릎팍이 조금 까진 것 말고는 크게 다친 곳은 없었는데 덕분에 그 다음날부터 다시 산에서 밥 지을 나무를 해 와야 했다.


우리 할머니는 평생을 양반으로 사신분이고 할아버지 역시 살아생전 말을 타고 다니던 뼈대 있는 양반가의 사람이셨다.


지금의 드라마를 보면 양반들은 으레 말을 타고 다니는 것으로 나오곤 하지만 말이라는 동물은 손이 많이 가고 그만큼 돈도 많이 드는 동물이라 모든 양반들이 탈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 지위와 함께 집안 형편도 괜찮은 양반들만이 타고 다닐 수 있던 동물이었다.


그런 점잖은 체면의 양반 할아버지와 결혼한 우리 할머니는 궁녀로 사시다 궁에서 나온 분이 재가해서 낳은 딸이셨기에 항상 고고한 인생을 사셨고. 그렇게 궁녀로 사셨던 어머니에게 궁궐의 법도를 배운 우리 할머니는 나에게도 부잣집에 시집가라며 이따금 궁궐의 법도를 가르쳐 주시곤 했었다.


그러나 내 인생을 돌이켜 보면 난 그런 할머니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너무나 가난하고 배고픈 길을 걷게 되었으니 이 또한 애달픈 일이다.​


우리 할머니는 한여름에도 체면을 위해 긴치마를 입고 다니는 양반가의 마님처럼 체면을 중시하며 고고하게 사셨는데 덕분에 가족들이 피난 가 일할 사람이 없어지자 집안의 궂은일은 할머니 대신 온전히 내 몫이 되어버렸다.


당시에는 나무를 할 만한 마땅한 도구도 없어서 커다란 낫을 들고 나뭇가지를 베어서 그걸 모아서 머리에 지고 내려와 불을 때서 밥을 지어 먹었었는데 본래 우리집에서 농사지을 때 쓰던 낫은 억센 나뭇가지를 몇 번이고 자르다 보니 어느날인가는 날이 무뎌져서 나뭇가지가 제대로 잘라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턴 평소보다 더 힘을 주어 나뭇가지를 잘라야 했는데 입을 앙다물고 있는 힘을 다해 낫을 내려치다 기어코 문제가 생겼다. 나뭇가지에 부딪히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쇠로 된 날과 나무로 된 손잡이 사이를 잇는 낫의 목이 뚝! 하고 부러진 것이었다.


게다가 얌퉁맞게도 부러진 낫의 날 끝은 푹! 소리와 함께 바로 내 손등 위로 박혀 들었고. 나는 어린 마음에 갑자기 손에 큰 상처가 나자 아프기도 하지만 놀란 게 더 커서 상처를 꾹 누른 채로 집으로 뛰어갔다.


상처는 제법 깊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꾹 누른 것이 제대로 지혈이 됐는지 피는 그리 많이 나지 않았다. 집에 계시던 할머니는 갑자기 집으로 뛰어온 내 상처를 보곤 깜짝 놀라신 후 천으로 잘 쫌매주셨는데 그때는 왠지 별다른 약도 바르지 않고 그렇게만 해도 조금 덜 아픈 느낌이 들었다.


손을 다쳤지만 그래도 밥을 지으려면 나무가 필요하니 한동안은 다친 손을 천으로 둘둘 감은체로 나무를 했고.


지금 같으면 그 정도 상처는 병원에서 몇 바늘 꿰매거나 아니면 약이라도 발랐을 테지만 전쟁 중이던 당시에는 그냥 그렇게 천으로 묶어만 놓고 거기다 계속 움직이기 까지 해야 했다.


결국 그 상처도 제대로 아물지 못하고 고스란히 흉이 되어 여든이 넘은 지금도 손 한구석에 남아버렸고.


그러나 내게 남은 당시의 아픈 상처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당시 내 생명의 은인이었던 사촌오빠는 종종 우리 가족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 우리집을 들리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 그 사촌오빠의 집에 사촌오빠의 처가댁 아이가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지금은 크게 무서운 병은 아닌 홍역을 앓는 아이였는데 집에 먹을 게 없다보니 그나마 밥은 먹고 사는 사촌 오빠네서 밥이라도 잘 먹고 나으라고 맡겨진 듯 했다. 그런데 홍역은 당시로써는 마땅한 약도 없어서 무척이나 무서운 병이었다.


홍역이 무엇보다 잔인했던건 어른보다 약한 아이들이 쉽게 걸린다는 점이었는데 당시 사촌 오빠네 집에 잠깐 머무르던 그 아이는 결국 오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홍역이 결국 우리 동생들 두명에게까지 번진 것 이었다. 전쟁 중이니 동생들은 병원은 커녕 약 한번 제대로 못써봤는데 결국 오래지 않아 동생 하나도 죽고 말았다.


병으로 죽은 아이라 주변에서 도와주기를 꺼려하여 결국 나와 할머니가 죽은 동생을 보따리에 싸가지고 뒷산에 파묻으러 갔었고. 할머니는 본디 양반 마님이라 험한 일은 못하셨지만 내가 땅은 팔 수 있어도 어린 마음에 혼자 뒷산에 가는것이 너무 무서워 할머니에게 같이 가자고 했더니 그 건 같이 가주셨다.


나는 동생이 죽은 게 너무 슬퍼 울면서 곡괭이로 땅을 파고는 죽은 동생을 묻고 그 위에 흙을 덮은 다음엔 벌레나 짐승이 꼬이지 않도록 주변에서 솔가지를 꺾어다 무덤 위를 가려주었다.


그렇게 집으로 내려와서는 한번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죽은 동생이 안타까워 한참을 울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하룻밤 자고 나니 마찬가지로 홍역을 앓고 있던 다른 동생 하나도 세상을 떠나 버렸다.


이틀에 걸쳐 연달아 동생들이 죽어버리니 둘째 날은 기가 막혀 눈물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결국 하는 수없이 또 다시 죽은 동생을 보따리에 넣어가지고 할머니와 함께 뒷산에 올라 땅을 파는데 사람 하나를 묻으려면 제법 깊이 땅을 파야 되니 어제도 그렇게 땅을 파댔던 내 덜 자란 몸은 근육이 뻣뻣해져 잘 움직이지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죽은 동생을 위해 기를 쓰고 땅을 팠다.


어떻게 동생을 잘 묻어주고 집으로 내려오긴 했지만 동생 둘을 한꺼번에 잃은 충격과 이틀이나 땅을 파대느라 무리한 몸은 탈이 나고 말았고. 당시 몸살이 심하게 와서 오한이 들고 몸이 덜덜 떨렸는데 어린마음에도 몸이 아픈 것보다 동생들을 잃은 아픔이 더 크게 느껴졌다.


다행히 오랫동안 앓아눕지는 않아서 다시 며칠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는데 그 후로 다시 몇달이 지나서야 피난 갔던 가족들이 돌아왔다. ​피난 갔다 돌아오신 부모님은 이미 동생 둘이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는 나를 부둥켜안고 정말 한참을 우셨다.


특히나 마음이 여리신 우리 어머니는 두 동생을 피난길에 데려가지 못한 것을 너무나 가슴 아파 하셨다. 아마 그날 하루는 온가족이 부둥켜안고 눈물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다음날 밥을 먹어야 하는데 피난 갔던 우리 가족들이 돌아오기 바로 얼마 전에 전황이 어려워진 북한군이 동네 주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식량을 징발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마치 메뚜기 때가 쓸고 간 것 마냥 집집마다 식량을 싹싹 긁어 가서 동네에는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사람들도 제법 되었고 나와 할머니도 몰래 숨겨놓은 보릿자루 하나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집과 동네 사람들의 어려운 식량 사정을 알게 된 우리 아버지는 곡괭이를 들고 큰오빠와 함께 무너져 내린 옆집으로 갔는데 난 그제서야 아버지가 피난을 가기 전 비어있던 옆집의 부엌 바닥을 파내고 거기다 커다란 장독들을 가득 묻었던 기억이 났다.


당시 아버지는 그렇게 장독들을 가득 묻고는 허름한 그 집의 기둥들을 모두 도끼로 찍어내 그 초라한 빈집 하나를 완전히 무너뜨렸는데 이번에는 큰오빠와 함께 그 무너져 내린 집을 파내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큰오빠와 아버지가 한참을 애쓰자 마침내 무너진 집 부엌 아래 있던 바닥이 드러났다. 그리고 곧 그곳에 묻혀 있던 당시의 내가 안으로 들어가도 될 만큼 커다랬던 독들이 수두룩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아버지와 큰오빠가 파낸 독들에 무엇이 들어있을지 궁금하여 까치발을 들고 큰오빠의 어깨너머를 기웃기웃 거렸는데 아버지가 장독의 뚜껑을 열자 거기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눈처럼 하얀 쌀이었다.


아버지가 꺼낸 수많은 커다란 독들마다 그득그득 쌀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할머니와 숨겨둔 보릿자루 하나로 겨우 목숨만 연명 하며 살고 있다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가득한 쌀을 보자 손뼉을 치며 좋아했었다.


당시 부지런한 아버지가 삼십마지기나 되는 논에 농사를 지었으니 집에 어느 정도 쌀의 여유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 쌀을 지킨 것은 오롯이 아버지의 현명함 이었다. 그리고 그 현명함이 온가족의 목숨을 살린 것이 되었고.


당시 동네의 식량 사정이 급작스레 안 좋아진 터라 그 많은 쌀들을 동네 사람들에게 땅을 받고 파셨더라면 당시 우리가 살던 포천 지역의 대지주가 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힘들게 지켜낸 쌀을 돈벌이로 쓰지 않으시고 굶주린 동네 분들에게 나눠주셨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쌀을 나눠줄테니 자루를 들고 오라고 말하셨는데 우리 동네사람들 뿐만 아니라 옆 동네 사람들까지 소문이 나서 다들 자루 하나씩을 들고 우리집으로 모여들었다.


그 시골 촌동네에 갑자기 사람이 어디서 그리 많이 나왔는지 우리집 대문 앞부터 나래비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아버지는 그 사람들 모두에게 자루마다 됫박으로 5번 씩은 퍼서 나눠주셨다.


본래 아버지가 묻어두셨던 장독이 내가 들어가도 될 만큼 크고 그 숫자도 많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니 남은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동네 사람들은 다 굶어 죽을 뻔 했다가 우리 아버지가 쌀을 나눠주시니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했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현명함으로 우리 삶이 안정을 찾나 싶었는데 갑자기 다시 전쟁이 심화 되서 결국엔 우리 가족모두가 다시 피난을 가게 됐다.


그때가 1.4 후퇴 때 인데 도로에 사람이 꽉 찰 정도로 거의 모든 이들이 피난을 갔다. 우리가족은 소에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쌀 주머니를 양쪽에 실은 채 피난을 갔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옷 보따리 하나만 부둥켜안고 피난길에 올랐다.


도로에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 때문에 걷다가 신발이 벗겨져도 그걸 찾을 수 없어 맨발로 걷는 이들도 종종 보일 정도로 피난길에 나선 이들은 많았다.


거기다 피난길이 힘들어 아이를 버리고 간 부모들이나 복잡한 피난길에 아이를 잃어버린 이들은 어찌나 많은지 사방에서 혼자 남겨져 '으아앙~' 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아이들이 수두룩했고.


그렇게 힘들게 가족들과 피난을 간 곳은 전에 부모님과 큰오빠 그리고 남동생 하나가 잠시 피난을 갔었던 화성의 남양 이라는 바닷가 근처 시골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가지고 계시던 땅을 헐값에 처분한 다음 남양의 오막살이 같은 집 하나를 사셨는데 피난길이다 보니 가깝게 지내던 친척들 까지 무려 열여섯 식구가 그 오막살이 같은 집 한 칸에서 살게 되었다.


그렇게 피난을 가서는 부쳐 먹을 땅이 없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식량을 구할 길이 막막했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당시 근처 산에서는 땔감으로 쓴다고 나무를 죄다 베어버려 뻘건 흙이 드러난 위로 뚜깔나물이라는 먹을 수 있는 나물이 지천으로 자라났다.


그래서 나는 가족들과 매일 같이 산에 올라 그 뚜깔나물을 열심히 캤는데 하루 온종일 캐면 커다란 광주리로 하나가 가득 찰 만큼 그 양이 넉넉했다. 지금은 어디서 보기도 힘든 그 뚜깔나물은 당시 전쟁 때 먹고 살게 없으니 하느님이 주신 거라는 생각이 들만큼 소중한 식량이었다.


그 소중한 뚜깔나물을 가족들이 다 같이 광주리 가득 캐서는 커다란 가마솥에 가득 부어 넣고 쌀은 한 대접만을 같이 넣어 푹푹 삶아 만든 나물죽을 열여섯 식구가 모두 똑같이 나눠 먹었었다.


음식 배분은 우리 아버지가 하셨는데 성인 남성이나 어린아이나 꼭 똑같은 한 대접씩을 담아주셨다. 아버지는 어른이나 아이나 배고픈 것은 매한가지고 아이들은 자라기도 해야 하니 어른들 만큼 먹어야 한다고 말하셨다.

그러나 그 나물죽조차 나물만 잔뜩 있고 쌀알은 열여섯 개의 대접으로 나눠지면 겨우 체면치레나 하는 수준으로 담겨 있어 아무리 먹어도 배는 부르지 않았고 그저 목숨을 연명만 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피난 생활이 익숙해지니 머리가 좋으셨던 아버지는 가족들을 위해 꾀를 내셨다. 당시에는 먹을 것이 귀해서 남는 땅이 없을 정도로 다들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아버지가 바닷가 근처의 방둑은 소금기 있는 땅과 강한 바닷바람 때문에 비어 있는걸 보시고 그 빈 땅에 고구마를 잔뜩 심으셨던 것이다.


다행히 고구마는 소금기와 강한 바닷바람을 잘 이겨냈고 우리가족은 한동안 그 고구마 덕에 다시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 전쟁이 심해져 우리 큰오빠는 나라의 부름을 받아 전쟁터로 가야했다. 그런데 나는 큰오빠가 위험한 전쟁터로 가는걸 알면서도 학교가 가고 싶은 마음에 큰오빠가 군대를 가고 나면 더 이상 부탁 할 수 없으니 군대를 간다며 준비하는 오빠를 붙들고 매달려서는 연신 부탁을 했다.


"오빠 나 학교 좀 보내 주라고 말해줘. 나 학교가 가고 싶어. 아버지에게 꼭 얘기해야해."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그냥 군대를 가는 것도 아니고 전쟁이 격화되어 전쟁터로 가게 된 오빠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나는 아직 어렸고 학교가 너무 가고 싶었다. 그리고 내 말을 잘 들어주던 우리 잘생긴 큰오빠는 이번에도 내 부탁을 듣고는 자신이 전쟁터로 가는 상황에서도 아버지에게 잊지 않고 말해주었었다.


"아버지, 갓난이 학교를 보내주세요"


우리 큰오빠는 부모님의 기둥 같은 존재였기에 결국 우리 부모님은 큰오빠의 부탁 때문에 피난민이라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나를 학교에 보내주셨다. 그렇게 나는 큰오빠 덕분에 남양에 있던 창문 국민학교를 들어갔는데 그렇게 힘들게 간 학교는 안타깝게도 결국 1년 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전에 이미 포천에서 국민학교를 3학년 까지 다녔지만 전쟁통에 학교를 가지 못했던 나. 그래도 시간이 지났으니 화성 창문 국민학교에 4학년 말로 입학을 했었다.


당시의 나는 갓난이라는 이름이 너무 창피스러워 순이 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다녔는데 전쟁통이다 보니 호적도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고 모든 게 허술해서 호적도 없이 이름을 바꾸고 학교에 가는 것 정도는 대수롭지 않은 시대였다.


지금 보면 순이라는 이름도 퍽 세련된 이름은 아니지만 당시의 나는 순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예쁘고 좋았는지 모른다. 나는 정말 너무 가고 싶었던 학교이기에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덕분에 들어가자마자 전교 일등을 했다.


전쟁통에 다들 학업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내가 열심히 하는 것 만으로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는데 당시 학업성적이 좋아 상도 받았고 수업에 열성적인 태도로 인해 선생님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다.


어느 날은 교장 선생님이 환갑잔치를 하시는데 본래는 선생님들만 가시는 곳인 그곳에 선생님들이 나를 데리고 가셨었다. 그 잔치 집에는 피난민인 내가 평소 먹기 힘든 귀한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기에 정말 숨 쉴 새도 없이 음식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고.


내가 창문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바닷가 둑방에 고구마 농사를 지은 것으로 대부분의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당연히 내 점심 도시락은 아버지가 농사지으신 삶은 고구마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나마도 고구마마저 실컷 먹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어서 당시 어린 나의 주먹 크기만한 고구마 하나가 점심 도시락의 전부 였다. 그런데 어느 땐가 부터 내 고구마 도시락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쌀밥 도시락이 있는 경우가 생겼다.


나는 처음엔 내 고구마 도시락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쌀밥 도시락이 있자 어린 마음에 쌀밥을 먹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내 것이 아니니 어찌할 줄을 몰라 마음속으로 애를 태웠었고.


'아이고 어떻게 하지...어떻게 하지....'


나는 침을 꼴깍 꼴깍 삼키면서도 내 것이 아닌 도시락에 손댈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는데 점심시간이 다가도록 끝내 내 고구마 도시락의 행방을 알 수 없고 내게 남겨진 쌀밥 도시락의 행방을 찾는 이도 나타나지 않자 그제서야 남겨진 쌀밥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먹어본 쌀밥은 얼마나 맛있는지 밥풀 알갱이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 먹었는데 그때는 쌀밥을 먹은 것 만으로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간간히 내 고구마 도시락이 사라지고 쌀밥 도시락이 생기는 경우가 생겼는데 덕분에 나는 종종 맛난 쌀밥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 담임 선생님은 이수영 선생님 이셨는데 화성 남양에 살던 원 주민 분으로 전쟁 중이라도 원래 그곳에서 식구들이 농사를 짓고 사시던 만큼 형편이 그리 어렵지 않으셨다.

덕분에 쌀밥 도시락을 싸오셨는데 나중에 우연히 알고보니 우리 담임 선생님이 종종 내 고구마 도시락과 본인의 쌀밥 도시락을 바꿔주시던 거였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고마운 은사님인데 몇 년전 화성 남양에 찾아가 당시의 고마우신 은사님과 친하게 지내던 동무들을 찾으려 했지만 내가 살던 바닷가 근처는 모두다 간척지로 변해버렸고 오랜 시간동안 동네가 너무 바뀌어 예전의 흔적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물어물어 동네 노인정도 찾아갔었지만 당시의 나를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덕분에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렇게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는 국민 학교를 늦게 갔기에 열다섯 열여섯쯤 되었는데 동네에 똑똑하고 효녀라고 소문이 나자 첩으로 들어오라는 제안이 우리 부모님에게 몇 번이나 들어오곤 했었다.


당시 어려운 피난민 생활을 하던 우리에게 논 열 마지기를 줄 테니 첩으로 들어오라는 등의 제안은 꽤나 큰 것 이었기에 어느 날인가는 아버지가 나에게 혹시 갈 마음이 있느냐며 넌지시 물어 보시기도 했었고.


나는 그 말을 듣자 막 화가 나고 신경질이 나서 난생 처음 아버지께 크게 대들었다.


"세상에 제가 아직 열다섯 밖에 안됐는데 어린 저를 아버지 잘 사시려고 논 열 마지기에 넘기시려는 거예요?"


하며 화를 냈는데 그런 나를 보며 아버지가 슬픈 눈으로 말하셨다.


"부잣집인데 가서 밥 잘 먹으면 좋지 않겠니? 내가 부족해서 네게 고구마마저 배부르게 먹여주지 못하니 아비가 그게 미안해서 그런단다. 아무렴 내 딸을 고작 논 열 마지기에 팔아 넘기겠느냐."


"저는 안 갈 거에요!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요!!"


이에 나는 단호하게 다시한번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아버지도 내 말을 듣고는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시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집으로 끔찍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군인이 되어 전쟁터에 가야 했던 큰오빠가 전쟁터에서 전사했다는 전사통지서였다. 큰오빠는 군대에 가신지 일 년도 채 안되어 돌아가신 거였는데 부모님은 언제나 믿고 의지하던 큰오빠가 돌아가시자 나를 학교에 못 가게 했다.


당시 우리 큰오빠는 군대에 가기 전까지 학생 신분으로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고학력자 였는데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오빠를 가리키느라 애썼는데 그런 오빠마저 전사했으니 네가 학교를 다녀 무엇 하겠느냐"


라고 하시는데 나는 나를 예뻐하고 내 부탁은 거의 다 들어주던 큰오빠가 돌아가신 것도 슬프지만 내가 학교를 못 가게 된 것도 너무 슬퍼 아버지께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다음날 학교를 가서 이제는 학교에 못다니게 되었다는 말을 했는데 선생님들이 학비를 하나도 안 받을 테니 학교에 오기만 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끝내 나를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하셨다. 나는 선생님들이 그렇게 까지 말씀 하시는 데도 내가 좋아하는 학교에 못 가게 하는 아버지가 너무 미워 다음날 집에서 가출을 했었다.


당시 나는 큰오빠가 돌아가셔서 서러운 것 보다도 내가 학교를 못 가게 되어 서러운 마음이 더 컸으니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철이 없는 소녀였다. 그렇게 가출을 감행한 나는 우리가 살던 화성 남양에서 작은 아버지네가 사시던 군포까지 50리 길을 걸어갔는데 당시엔 전화도 없고 내가 나온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 집을 나섰으니 우리 집에서는 내가 군포 작은 아버지댁으로 간 것을 전혀 몰랐다.


나는 작은 아버지댁에 가서는 잠시 머물며 작은 어머니께 주변에 어디 일할데 좀 알아봐 달라 부탁을 하였는데 작은 어머니가 수소문 하시더니 옆집 사는 사람의 친척이 서울에서 버스 운전을 하는데 그 집에서 식모를 구한다는 말을 하셨다.


지금도 버스 운전기사는 밥 먹고 살만큼 벌지만 당시의 버스 운전기사는 엄청난 기술자로 제법 많은 돈을 버는 직업이었기에 상당히 형편의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나는 작은 어머니의 말을 듣고는 어려운 작은 아버지네 형편에 오랫동안 밥을 축내며 머물 수가 없어 거기서 일하겠다고 나섰다.


**


그렇게 처음 서울에 있는 그 버스 운전기사의 집에 식모로 갔더니 주인집 내외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는데 참 좋은 분들 같았다. 나는 깔끔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편이라 지금도 정리 정돈을 하는데 시간을 많이 보내는데 당시에도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던 것은 마찬가지 였기에 바지런을 떨며 많은 시간을 청소를 하는데 보내곤 했었다.


그 집은 식모를 구할 정도이니 밥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어서 덕분에 그 집에서 머무는 동안은 정말 오랜만에 나도 배부르게 잘 얻어 먹을 수 있었고.


그 집엔 자식도 둘 있었는데 모두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언니들 이었다. 둘 다 집안 형편이 그리 어렵지 않으니 별 문제 없이 학교에 다녔는데 나는 다른 것은 하나도 안 부러워도 오직 그 학교 가는 것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내가 워낙 청소도 열심히 하고 바지런한 모습을 보이니 주인집 내외는 나를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주인집 자식들의 키가 자라며 작아져 못입게 된 학생복을 나에게 주었더랬다.


지금은 교복을 입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지만 당시로써는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좋은 재질로 만들어진 그런 교복을 입는 것은 서울 멋쟁이 학생들이나 가능한 일이었었고.


지금 말로 하면 세라복인데 큰 등판을 가릴 만큼 멋지게 생겨서는 뒤로 착 넘어간 새카만 에리에 선명한 하얀 선이 곧게 그어진 세라복은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서는 보기조차 힘든 물건이었다.


나는 그 옷이 너무 예쁘고 좋아서 그날만 해도 몇 번이고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했었다. 그곳에선 밥도 배부르게 먹고 주인집 내외도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사는 형편은 전보다 확실히 나았는데 생전 처음 어머니 아버지와 떨어져 살게 되니 밤만 되면 부모님이 그리워 우는 날이 잦아졌다.


그래서 결국 그곳에서 두어달 쯤 지났을 무렵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주인 내외에게는 '잠깐 집에 갔다 올게요' 하고는 그 집을 나섰다.


주인집 내외는 내가 잠깐 다녀온다고 말했는데도 아예 떠나려 한다고 생각 했는지 일 잘하는 내가 아까워 몇 번이고 꼭 돌아와야 한다며 다짐을 받았는데 그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의 나는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그냥 집에 간다고 하면 내가 좋아하는 그 세라복을 놓고 가라고 할까봐 입고 있는 옷 안에 겹쳐 입었는데 누가 봐도 옷을 여러 겹 입은 게 티가 날만큼 부자연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에게 작아져 못입게 된 것을 나에게 준 것인데 그것을 도로 내놓고 가라고 할리는 없겠지만 그때는 어린 마음에 그것만큼은 꼭 가져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옷 안에 껴입은 것이다.


한데 그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봤으니 주인집 내외가 내가 아주 집으로 갈 생각 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화성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자 돌아온 나를 보며 어머니 아버지가 얼마나 반가워하시면서 많이 우시는지 마음속으로 다시는 집을 나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집에는 큰오빠의 부인인 올케언니가 있었는데 올케 언니는 제대로 결혼생활도 못해보고 큰오빠가 전쟁터에서 전사하면서 그냥 혼자가 되어버렸다. 나는 그런 올케언니와 무척이나 친하게 지냈는데 시누와 올케 사이 라기 보다는 자매 같이 지냈다.


우리는 등잔에 넣는 기름이 아깝다며 밤늦게 불을 켜지 못하게 하는 할머니 눈을 피하기 위해 문에다 담요를 치고는 불빛이 다른 방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고 둘이서 쏙닥쏙닥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은 같이 책도 읽고 부모님 몰래 밖으로 나가 겨울에 담아둔 동치미에서 무를 꺼내다 먹기도 했다.


당시에는 마땅한 간식 거리가 없으니 밤 중에 부모님 몰래 꺼내 먹는 동치미의 무는 그야말로 최고의 간식이었었다. 시원하면서 와삭와삭 씹히는 그 맛에 서로 미소를 머금고 키득키득 거리다간 부모님에게 들킬 뻔한 적도 있었고.


또 당시 우리집 주변에는 저수지가 있어서 그곳에서 올케언니와 내가 빨래를 했는데 한번은 빨래를 하다 누군가 비누를 물속으로 빠트렸다. 당시에는 비누가 무척이나 비싸고 귀한 것이라 할머니에게 불호령을 들을 생각에 우리 둘 다 무척이나 겁을 먹었었다.


거의 새것이나 다름 없는 비누를 잃어 버렸으니 등잔기름 아깝다며 불도 못키게 하는 할머니에게 혼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재밌는건 난 지금도 그걸 내가 빠트린 것인지 우리 올케 언니가 빠트린 것인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그러냐 하면 집으로 돌아와 다음 빨래를 하러 갈 수 없으니 일단 혼나는 게 무서워도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가 할머니 앞에서 서로 자기가 비누를 빠트렸다고 우기기 시작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할머니 비누가 미끄러워서 제가 비누를 물에다 빠트렸어요. 용서하세요."


라고 말하면 우리 올케 언니가


"아이고 할머니 제가 빠트렸어요. 제가 잘못 만져서 빠트렸어요."


라고 말하며 서로 자기가 비누를 빠트렸다고 말하자 화를 많이 내실 줄 알았던 할머니는 비누가 아깝지만 시누 올케가 기특하게 서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나선다며 오히려 우리를 크게 혼내지 않고 용서해 주시고는 동네에 그 일을 자랑을 하고 다니셨다.


당시 너무 열성적으로 서로 자기가 비누를 빠트렸다고 말한 덕분에 지금은 나도 그때 비누를 누가 빠트린 것인지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게 된 것이다.


하나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시누 올케 사이인데 당시 아버지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젊은 것이 혼자 살면 불쌍하다며 직접 남자를 소개시켜 주셔서 올케 언니는 재가를 보내셨다.


그렇게 친자매처럼 어울리던 올케언니가 시집을 가고 나자 나는 동네 이장집 딸과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는데 복실복실 하니 하얗고 탐스러운 얼굴을 가진 언니였다. 그 언니는 나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 무렵 그 곳에 대학생들이 야학을 만들었고 그 사실을 안 언니가 나에게 그곳을 같이 가자고 했다.


"얘 순이야 저기 야간 학교가 생겼는데 같이 가자~ 아이고 요 예쁜것!"


나는 그 동네에서 학교를 순이라는 이름으로 다녔기에 동네 사람 모두가 나를 순이라 불렀는데 나는 누가 나를 순이라 불러주는 것도 좋고 나를 그렇게 예뻐해 주는것도 좋아서 그 언니를 잘 따랐다.


당시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야간학교도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내가 전에 학교를 못 가게 했다고 가출한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풀어 주셔야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전처럼 심하게 반대하지는 못하셨고 결국 나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언니를 따라 그토록 가고 싶던 학교인 야학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야학에 다니는 학생들은 책도 빌려다 보고 글씨는 종이가 귀해 손바닥만한 종이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쓰곤 했는데 종이가 아까워 남기는 공간 없이 빽빽하게 적다보니 나는 지금도 그게 버릇이 되어 띄어쓰기를 잘 못하게 되었다.


당시 야학은 중학교 과정과 고등학교 과정이 있었는데 나는 처음엔 중학교 과정으로 갔지만 선생님들이 나는 공부를 잘하니 중학교 과정대신 고등학교 과정을 다니라고 해서 나를 데리고 야학에 갔던 그 이장집 언니와 같은 고등학교 과정을 다니게 되었다.


나는 그 반에서 제일 작았는데 야학은 학교와는 달라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그 이장집 언니는 날 얼마나 예뻐했는지 다른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물어보면 먼저 앞에 나서서


"꼬마라도 우리반이다 상반이야 상반. 고등학교 상반이다."


하며 나를 자랑 삼아 이야기 하곤 했다. 물론 그렇게 좋아하던 언니도 몇해전 남양에 갔을 때 수소문 하여 찾아보았으나 결국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야학도 한두해 정도 다녔는데 그 무렵 집이 군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당시 군포에는 작은 아버지댁도 있었고 사촌들이나 다른 친척들도 여럿 살고 있어서 군포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남양에서 오막살이집을 살다 군포의 작은 기와집을 하나 사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 다 우리 아버지가 부지런한 분이셔서 가능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남양에 사시면서 돈이 생길 때마다 성냥이나 미역 그리고 비누등을 조금씩 도매금으로 끊어다가 동네에서 구멍가게처럼 좌판을 만들어 장사를 하셨었다. 남양에 살 때는 잘 몰랐는데 막상 이사를 하려고 보니 당시 전쟁으로 집값이 많이 싸진 상황이긴 했어도 그 돈이 그래도 작은 기와집 한체를 살만큼은 되었으니 절대 적지 않은 돈이었다.


그렇게 군포로 이사를 간지 오래지 않아 큰오빠의 전사금이 나왔는데 당시로써는 그 돈이 제법 큰 돈이라 논 일곱마지기와 밭 이천평을 샀다. 그런데 땅의 크기는 컸지만 그렇게 농사를 짓기 좋은 땅들은 아니라 죄다 언덕배기에 있는 땅들 이었다.


밭은 언덕배기에 있어도 별 상관이 없었는데 논은 높은데 있다 보니 항상 물이 부족했다. 당시 나는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도 언제나 이 논에 물대는 일이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와 둘이 타레박을 잡고 논에 물을 뿌리다 보면 고된 하루 해가 다가곤 했다. 아버지는 이 힘든 농사일과 본인보다 일찍 죽은 아까운 큰아들 때문에 많이는 아니어도 술을 자주 드시곤 하셨는데 결국 이것 때문에 병이 나시고 말았다.


아버지가 병이 나셔서 자리보전을 하신 뒤로는 농사일이라는 게 어린 나 혼자 감당이 안되는 일이라 결국 농사는 짓지 못하게 되었었고. 덕분에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아프시게 되자 난 아픈 아버지를 보살펴 드리고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하면서 틈틈히 수를 놓거나 뜨개질을 하여 조금씩 살림에 보태곤 했다.


그러자 가세가 기우는 와중에도 내가 일도 열심히 하고 부모님을 잘 봉양한다고 소문이나 혼담이 여기저기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로써는 일 잘하고 부모를 잘 봉양하는 며느리감이 최고의 며느리감이라 나는 그 소문만으로도 시집을 골라서 갈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 혼담이 어느정도로 많이 들어왔느냐 하면 한사람이 혼담을 가지고 우리집에 와서 이러이러한 좋은 사람이 있으니 시집을 보내시오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다른 혼담을 가지고 우리집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일이 몇일씩 반복 되었으니 내가 당시 마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혼처 중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혼담이 들어온 것 중 괜찮은 사람이 있는 것 같으면 우리 어머니에게 비누나 성냥등을 보따리에 싸서 방물장사인양 그 집을 한번 들러보게 까지 하셨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에게 나는 너무 귀한 딸이니 괜찮은 혼처를 아무리 봐도 성에 차지 않아 하셨다. 그러다 시골인 군포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에 썩드는 좋은 혼처를 찾기 어려우니 당시 도시였던 안양으로 시집을 보내시고 싶어 안양에 사시던 친척 아주머니 한분에게 좋은 혼처를 좀 찾아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런데 당시 그 친척아주머니도 안양에 사신지 얼마 안 되어 마땅히 아는 사람이 없으니 미장이 일을 하던 자기 남편에게 부탁을 했는데 그분이 자기 친구를 만나 이야기 하다 마침 그 친구가 자기 아들이 혼기가 꽉 찼다며 자기 아들에게 그 처녀를 소개시켜 달라고 하셨다고 한다.


같이 미장이 일을 하는 동료이자 친구이니 그분은 그 친구를 위해 그 혼처를 좋은 곳 이라 잔뜩 포장해서 소개를 했고 우리 부모님은 그 친척 아주머니를 믿었기에 좋은 혼처라고 하니 덜컥 혼인 약속을 잡고 말았다.


혼인 약속을 잡기 전 선이라는 것을 보긴 했는데 나는 당시로써는 부끄럼 많은 처녀인데다 시대적 상황도 상황이다 보니 상대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말이 선이지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긴 커녕 말 한번 걸어 목소리를 들어볼 생각조차 못하고 얼굴만 붉힌 채 뜨개질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한 일이다.


나중에 듣기로는 당시 내가 뜨개질을 뜨고 있던 모습이 남편 눈에는 썩 마음에 들었다고 하는데 내가 뜨개질을 잘하니 나에게 목도리라도 하나 해달라고 하자. ‘좋다!'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우리 어머니는 말도 안하는 내가 답답했는지 남편감이 가고 나서 나에게


"니가 뭐가 잘났다고 그리 재고 그러냐? 남자가 저만하면 됐지!"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는 우리 어머니인데도 내 편이 아니라 처음 본 다른 사람의 편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수줍어서 말 못한 내 마음도 모르고 야속하게 말하시는 게 억울해 퉁명스레 대답했었고.


"아유! 간다 그래요"


하고 말했는데 나중에 보니 확실히 어머니가 마음에 드실만큼 남편감이 외모나 체격은 빠지지 않고 늠름했다. 결국 그렇게 열일곱에 군포에 이사를 가서 삼년을 살다 스무 살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결혼할 때 자기 치마저고리 세트를 여러 벌 해가야 했는데 열 벌을 한 죽이라고 부르고 다들 기본으로 이 한 죽씩은 해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당시 우리집은 이미 아버지가 자리보전을 하신지 오랜 터라 가세가 많이 기울어 그 만큼을 해갈 형편이 안 되었다.


그런데 제법 동네에서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았던 터인지 당시 우리 동네에는 딱 열 집이 있었는데 내가 시집가던 때 이 동네 열 집에서 각 한 벌씩 치마저고리를 만들어 기어코 한 죽을 만들어 주셨다. 동네 사람들끼리 인정도 있고 잘 지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결혼 할 때는 남편에게 금 세돈 짜리 반지를 받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시집의 형편이 그리 어려운 줄 꿈에도 몰랐다. 시집을 가자마자 밥을 해먹는데 한 삼일은 그래도 먹을 쌀이 있어 밥을 해먹었지만 시집간 지 삼일이 지나니 집에 쌀이 뚝 떨어졌다.


당시에는 한집에 여러 가족이 살던 대식구라 남편의 바로 위 형님인 둘째 시아주버니가 같은 동네에 살던 잘 사는 친척집에 가서 쌀 한바가지를 얻어와 다시 그걸로 아껴가며 밥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 쌀이 떨어지면 어디서 가족들이 외상으로 가져오거나 얻어오는 식으로 하다 그것도 안 되면 굶는 식이었다.


쌀이 적어 밥을 많이 할 수 없다 보니 가족들 밥을 푸고 나면 내 밥이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원래 친정에서 부터 형편이 어려워 밥을 많이 먹는 편은 아니었기에 가마솥에 남은 누룽지만 박박 긁어 겨우 밥공기에 걸친 수준으로 만들어 놓고 그걸로 한 끼를 때우곤 했었다. 다만 그마저도 여의치는 않았다.


내가 누룽지를 조금 퍼서 겨우 내 밥공기에 걸쳐 놓으면 시아버지가 내 밥공기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얘 나 누룽지 좋아하는데"


하고 말하시는데 그게 어찌나 서러운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배고파 죽겠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 밥은 다 먹고 내 밥공기에 겨우 걸쳐놓은 누룽지를 달라는 시아버지의 말은 나보고 굶으라는 소리와도 같았던 것이다.


나는 감히 시아버지의 말을 듣고 모른 채 할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면서도 시아버지한테 내 밥공기에 담긴 그 누룽지를 다 드렸는데 시아버지는 내가 우는지 마는지는 신경도 안 쓰고 한 톨도 남김없이 그걸 맛나게 드셨다.


결국 그때부턴 밥을 먹는 날보다 못 먹는 날이 더 많을 정도로 힘들고 가난한 세월이 나를 무섭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밥을 못먹고 굶어 힘이 없어도 남의 집 며느리가 되었으니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도 참 억세게 했었고. 당시 시동생 둘은 학생이라 광목으로 된 양복을 입었는데 그건 빨아서 다리고 시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시어머니를 비롯한 다른 가족들은 한복을 주로 입어 한복은 재봉선이 있는 곳 마다 폭폭이 다 뜯어서 삶아 빤 다음 다시 풀을 먹이고 다듬이질을 해서 꿰맨 후 원래대로 옷을 만들어야 했다.


이 일이 얼마나 고된지 하루 종일 빨래를 하고 밤새 다시 꿰매야 옷이 완성이 됐었다. 거기다 빨래조차 쉬운 것이 아니라 두레박이 있는 우물에서 물을 퍼서 빨래를 해야 하는데 겨울이면 떨어진 물이 얼어 얼음덩이가 빨래할 공간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어 그 얼음 위에서 빨래를 해야만 했다.


당시 얼마나 호되게 발에 얼음이 배겼는지 그 후로도 십여 년을 고생했는데 요즘 말로는 동상이라고 하는 그것은 밤이면 발이 간지러워 잠들기 힘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거의 굶어 가면서 호되게 일을 하는 와중에도 애는 잘만 들어섰고.


당시 남편은 시장에서 여기저기 물건을 배달하는 일을 하거나 조암이라는 곳에 가서 생선을 도매로 때다가 팔았는데 영 벌이가 신통치 않아 나중에는 집에 너무 먹을 게 없어 내가 본격적으로 조암에 가서 생선을 때다 팔기 시작했다.


아직 결혼 한지도 얼마 안 된 새색시가 빨간 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고 광주리에 생선을 이고 집집마다 생선을 팔러 다니는데 심지어 임신까지 해서 배는 또 불룩 튀어나왔으니 동네 사람들이 그런 나를 무척이나 딱하게 생각했다.


홀몸도 아닌 임신한 몸으로 그렇게 생선을 팔러 다니는 게 너무 고되고 힘들었지만 당장 내가 일하지 않으면 온 가족이 굶어 죽게 생겼으니 도리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일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가끔 그렇게 집집마다 생선을 팔러 다니다 보면 비가 쏟아질 때도 있었다.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내가 입은 빨간 치마에 노란저고리는 임신해서 불룩 튀어나온 내 배에 착 달라 붙는데 그럴 때면 나는 그런 비참한 꼴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마치 짐승 처럼 느껴졌다.


결국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는 날은 내 눈에서도 서러움의 눈물이 무척이나 쏟아 지는 날이었다. 다만 아무리 비가와도 그날 해온 생선은 그날 팔아야 했기에 비를 맞으면서도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고는 생선 좀 팔아달라고 이야기 하는데 동네사람들은 다들 그런 꼴을 하고도 생선을 팔러 다니는 나를 딱하게 여겨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썼다.


덕분에 비가 오는 날도 어떻게든 그 생선을 다 팔아 가족이 먹을 쌀을 사긴 했는데 그 비참한 기분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그 무렵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내게 정신이 이상한 시어머니까지 더해졌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시어머니를 미워하여 정신이상자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는 정말 정신 줄을 놓아버린 분이셨다.


그 정신 줄을 놓은 시어머니는 매일 나를 괴롭혔는데 마당을 쓰는 싸리 빗자루를 가지고 와서는 내가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으면 그 창호지 종이가 발린 문을 싸리 빗자루로 호되게 내리치며 나더러 나쁜 년이라 소리치시는 게 예삿일 이었다.


시어머니가


"나쁜년!!! 이 나쁜년!!!!"


하며 요란하게 싸리 빗자루로 종이 문을 후려치면 나는 방에서 바느질을 하다 말고 영문도 모른 채 무서움에 떨어야 했는데 시어머니의 괴롭힘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느 날인가는 내가 깨끗이 닦아 놓은 나무 마루에다 우물에서 물을 한바가지 퍼 와서는 화악! 끼얹고는 나를 한번 보고 내가 그저 놀란 표정을 짓자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다시 물 한바가지를 더 퍼다 화악! 끼얹어 마루를 아예 물바다로 만들어 놓으시곤 나를 보며 의기 양양한 표정을 지으신 적도 있었다.


덕분에 나는 물이 흥건해진 마루를 처음부터 다시 닦아야 했는데 정신이 이상한 시어머니의 그러한 기행은 수 없이 많았다.


밥을 먹다가 내가 물이라도 뜨러 나갔다 들어오면 시어머니가 시아버지에게


"아유 부엌에 나가보니까 저 며느리라는 여시가 부뚜막에다 밥을 이렇게~ 한가득 퍼놓고 먹잖아!"


하며 나를 모함하는데 배가 고파 죽겠는 상태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아무리 정신이 이상한 사람의 말이라도 더 억울하고 서운했다.


물론 시아버지도 시어머니의 정신이 이상한걸 아니 모든 말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말을 듣고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소리도 안하는데 아무리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도 뭘 보긴 했으니까 그런 소릴 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표정으로 다 나타났다.


정신이 이상한 시어머니의 기행이야 워낙 많아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끝이 없지만 내가 느끼기에 부엌에다 밥을 잔뜩 퍼놓고 먹는 다는 소리만큼이나 억울했던 게 하나 더 있다.


당시 우리집 대문은 일각대문 이었는데 삐~익 하고 대문 열리는 소리만 들리면 시어머니는 귀를 쫑긋 세웠다가 그렇게 문으로 들어온 사람이 시아버지면 방이나 마루에 있다가도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시아버지 옆에 착 달라붙어서는 말하길


"며느리가 할아버지가 없으면 얼마나 머리끄댕이 끄들고 두들겨 팼는지 아파 죽겠어!!"


라고 하는데 그렇게 듣는 시아버지는 아무리 시어머니가 정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어도 그래도 내가 시어머니에게 소리라도 지르고 툭 치기라도 했겠지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 봤다.


나로서는 갑자기 예상치 못한 봉변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기가 막혔는데 시어머니가 애초에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아니니 왜 없는 말을 지어내서 하냐고 말싸움할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혹여라도 내가 너무 억울하여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시어머니는


"너 같은 거는 우리 큰아들이 우르르! 비행기 타고 저 하늘에 올라가 가지고 비행기에서 팍팍! 폭탄을 던져서 오십 조각은 내서 죽일 거다 너를!!"


하며 말하는데 전쟁 때 죽은 큰아들까지 동원하여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악담을 퍼붓는 도무지 대화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라 결국 나는 시어머니에게 한마디 제대로 꺼내보지도 못했다.


아마도 시어머니는 가족들이 나를 예뻐하는 것이 미워서 그랬던 모양인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시어머니에게서 밥도 제대로 못 얻어먹다가 내가 간 뒤로 밥도 잘하고 빨래도 잘하고 하다못해 먹을 게 없으면 내가 생선 장사를 해서 곡식을 구해오니 가족들이 모두 나를 좋아했던게 당연했다. 그러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시어머니는 그게 그렇게 샘이 났던 모양이다.


문제는 시어머니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억지 고자질을 하면 가족들이 그 말을 온전히 믿지는 않더라도 내가 뭐라도 하긴 했나 보다 생각하는 거였는데 가끔은 시아버지도


"너무 그렇게 하는 거 아니다"


하면서 한마디씩 하시는데 나는 남의 속도 모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가족들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니 나는 결국 같이 못살겠다고 말하고 내가 차라리 시장에 가서 바느질을 해서 먹고 살겠다고 말했다.


결국 시댁에서 못살겠다 말하고는 정말 그렇게 집에서 나와 시장에 방을 얻어 살게 되었는데 그나마도 가진 돈이 없으니 방을 구할 방법이 없어 남편이 시집올 때 해줬던 세 돈짜리 금반지를 팔아서 마련한 방이었다.


나는 그렇게 시장에 혼자 방을 얻어 나와 살면서는 오히려 시장에서 일감을 얻어다 수도 놓고 뜨개질도 하면서 내가 먹을 만큼은 벌게 되었는데 덕분에 모처럼 밥을 굶지 않을 수 있었다.


또 지금은 모르지만 당시에는 시장 사람들끼리 계를 하는 게 일반적 이었는데 나도 시장사람들과 친해지자 계를 하게 되었다. 내가 주도적으로 친한 사람들을 모아 계를 만드니 자연스레 내가 계주가 되었는데 당시에는 계주가 언제나 첫 번째로 계를 탔었다.


첫 번째로 계를 타는 계주는 다른 계원들에 비해 엄청난 이점을 가진 거였는데 흔히 지금말로 돈놀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주가 그렇게 처음 받은 곗돈으로 이자를 놓으면 남은 기간 동안은 이자로 곗돈 충당이 되었을 정도였다.


당시는 은행의 저축이자나 대출이자 모두 비쌌고 덕분에 사람들끼리 돈을 빌려줄 때의 이자도 비쌌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굳이 내가 돈놀이를 해야 겠다 마음먹지 않아도 내가 곗돈을 타서 목돈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돈이 필요한 시장 사람들이 이자를 얼마씩 챙겨 줄 테니 돈 좀 빌려달라고 말해서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당시 우리 뒷집에는 해순이네가 살았는데 그 집 사는 형편이 꼭 내가 집을 나오기 전 우리 시댁 사는 것과 같아서 집에 쌀이 없는 날이 많으니 종종 이제는 밥을 먹고 살만한 나에게 와서 쌀을 꾸어가곤 했었다. 이에 나는 불쌍한 해순이 엄마를 계로 끌어들여 두 번째 순번을 그녀에게 주었었다.


두 번째 순번만 해도 첫 번째만 어떻게 돈을 마련하면 나머지 순번은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이자 받은 것 만으로 해결되는 셈이니 돈을 저절로 벌게 되는 자리였는데 나는 얼마 전의 나처럼 밥 굶는 날이 많았던 해순이 엄마를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했었다.


해순이 엄마는 나보다 5살이 많았는데 돈 버는 재주가 없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집안일만 하니 밥을 굶는 일이 다반사였었다. 그래도 계를 하면서 덕분에 밥도 굶지 않고 돈도 조금씩 모으게 되었었다.


그녀 역시 내가 일부러 두 번째 순번을 주어 돈을 벌게 해줬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나를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한동안 잘 운영되던 이 계는 한 삼년쯤 유지가 되다 시장에 큰 불이 나면서 깨어지고 말았다.


나는 마침 그때 시어머니가 아프셔서 시댁에 가서 잠을 자게 됐던 날인데 그 시장에 난 큰 불이 내가 살던 방을 완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으니 내가 평소처럼 그곳에서 잠을 잤더라면 나도 목숨을 잃었을 만한 사건이었다.


사실 새색시가 집을 나와 살겠다는데 당연히 시댁에서 좋아할 리는 없었다. 때문에 처음 시댁에서는 내가 나가 사는 것을 무척 반대했었다. 그래도 내가 이대로는 못살겠다며 막무가내로 나간 것 이었기에 시댁을 나와서는 아예 한동안 시댁과 왕래가 없었고 그때도 시댁과 왕래를 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남편은 처음엔 시어머니의 몸도 안 좋은데 어딜 나가냐며 내가 시장에 방을 얻는 것을 극구 반대 했었는데 결국 내가 시장에 방을 얻어 자리를 잡고 생활한지 육 개월이 지나서야 내가 살고 있는 방을 찾아왔었다.


그는 처음 내가 살고 있는 방을 올 때는 골이 잔뜩 나서는 심술을 부렸는데


"노인네들 두고서 이렇게 나와 살아야 했어?"


하며 퉁명스럽게 말을 했었다. 덕분에 나는 한동안 남편과 관계가 소원했는데 애는 어찌 그리 잘 들어서는지 얼마 지나니 또 애가 들어섰다.


첫째는 아들이었고 둘째는 딸이었는데 둘째를 가졌을 무렵 시장에 불이 난 터라 시장의 바느질 일감도 따올 수 없었고 곗돈을 모아 놓은 것은 남편이라는 사람이 사업한다고 홀랑 가져가버렸다.


처음엔 남편이 내가 계로 돈을 모은 줄도 모르고 나에게 사업을 하는데 돈이 필요하니 빚을 얻어다 달라는 소리를 했었는데 내가 몇 년을 악착같이 모은 곗돈을 빚을 얻어 왔다고 하고 주었더랬다.


남편은 그때부터 내가 돈만 벌면 사업을 한다고 가져가서 날리기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그게 시작일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남편은 내게 본격적으로 생선 도매 사업을 할 거라고 말했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빌린 돈이라고 하고 줬던 돈을 갚을 생각은커녕 집에 식량을 사라고 돈을 주는 적도 별로 없었다.


그나마 가끔씩이라도 주는 돈으로 그래도 보리밥을 조금씩 해먹으며 가족들이 목숨을 연명해 나가긴 했는데 나는 다시 밥을 먹는 날 보다 굶는 날이 많아졌다. 결국 다시 배고픈 나날이 시작 되었고 둘째를 낳고서는 정말 배가 고파 죽겠는 정도까지 되었다.


아이를 해산하고 미역국은커녕 일주일 정도를 제대로 못 먹으니 말 그대로 눈이 훌렁 뒤집힐 정도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눈알이 뒤로 훌떡 올라가서는 내려오지 않아 눈이 이상해진 거였는데 그걸 이웃사람이 보고는 성당에 가면 미국에서 원조 받은 옥수수 가루를 두 말씩 나눠 주니 성당에 가서 그것을 타다 먹으라고 했다.


그래서 성당을 가보니 정말로 옥수수 가루를 두 말씩 나눠 주었다. 그 옥수수 가루를 보니 정말 눈앞이 훤하게 밝아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기뻤었다.


그래서 냉큼 그 옥수수 가루에다 얼마 남지 않은 보리쌀을 후루룩~ 뿌려 넣어 끓이니 떡처럼 양이 불어나며 아주 밥이 차지게 되었는데 덕분에 오랜만에 온 식구들이 배부르고 든든하게 먹을 수 있었다.


밥을 배부르게 먹고 나니 그제서야 뒤로 자꾸만 훌떡 넘어가던 내 눈알이 정상으로 돌아오며 눈도 정상적으로 뜨여졌고. 그 뒤로도 두 달 정도는 성당에 정말 열심히 다녔는데 갈 때 마다 매번은 아니어도 그 뒤로 몇번은 더 옥수수 가루를 타다가 먹었다.


덕분에 그동안은 배가 안고프고 잘 살았는데 그렇게 두 달쯤 지났을 무렵 남편이 나에게 왜 성당을 다니냐며 야단을 쳤다.


"갈려면 절을 가야지! 왜 성당을 가는 거야? 우리 어머니는 전부터 절에 다니셨어!"


하고 말하는데 그래서 하는 수없이 성당 대신 절을 가게 되었다. 한데 절은 음식을 나눠주지 않고 오히려 가져가야 하는 곳이었다. 다행히 한동안은 성당 덕분에 밥을 배부르게 먹어 기운을 차린 터라 난 다시 바느질 일감을 가져와 하거나 집집마다 다니며 생선을 파는 일을 시작했고 그나마 그것으로 밥은 먹고 살 수 있었다.


내 남편은 무척이나 무능한 사람이었는데 큰 돈을 사업을 한다고 가져가서는 돈을 제대로 벌어오지 못하자 나중엔 너무 답답하여 내가 직접 그곳을 찾아 가봤다.


그런데 그렇게 남편이 사업한다는 곳에 가봤더니 남편은 애써 마련한 큰돈으로 생선을 잔뜩 때다가는 소매상들에게 모두 납품을 하곤 수금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상황 이었다. 당연히 수금이 안 되니 집으로 가져다주는 돈이 없는 거였고.


내가 죽어라 일해서 돈을 조금 모으면 돈이 필요하다며 온통 그 사업에 돈을 쏟았던 남편이었기에 실상을 알게 되니 허탈하고 원망스러웠는데 이집 저집 월세 방을 옮겨 다니면서도 애들은 어찌 잘 들어서는지 그 몇 년 새 애들은 이미 넷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도 계속 돈을 마련해간 남편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장사를 크게 한다고 했었는데 어느새 생선 도매상으로 트럭 떼기를 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조그만 소매상들처럼 물건을 사오는 게 아니라 아예 생선을 트럭째 대량으로 싼값에 사오는 건데 내가 한푼 두푼 모아놓은 돈을 모두 가져가서는 그렇게 규모만 잔뜩 키운 채 돈을 못 벌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건을 아무리 많이 떼와도 제대로 수금이 안 되니 항상 나보고 어디서 돈 좀 빌려 오라는 소리를 달고 살았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모아놓은 돈도 다주고 없으면 정말 빚을 얻어다 주기 까지 했는데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참다못한 내가 나라도 나서야겠다는 생각에 장부책에 적힌 대로 어제 받을 거 얼마 오늘 받을 거 얼마 해서 수금을 하러 나가려는데 그런 나에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하길


"아니 오늘 것도 안주는 사람들한테 어제 거까지 적어가면 어떻게 해! 어제 거 그제 거는 말도 끄내지 말고 오늘 것만 받아와!"


하는데 나는 남편의 무능함에 어이가 없었다. 여지껏 도대체 장사를 어떻게 했기에 매일 빚 얻어 달라는 소리만 하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보니 엉터리 장사를 하고 있었던 거였다.


나는 남편이 그러거나 말거나 기어코 장부책에 적힌 내용을 들고 가서 소매상들에게 수금을 했는데 내가 야무지게 소매상들에게 장부책까지 보여주며 돈을 달라고 하자 그래도 남편 보다는 수금을 좀 더 낫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남편이 트럭떼기로 물건을 사는 도매시장도 가보았는데 남편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물건을 살 때 다른 것은 보지도 않고 제일 싼 거만 사서 트럭을 하나 가득 채웠더랬다.


당연히 싼 물건은 하자가 있기 마련이었고 내가 직접 확인해 보니 거의 반쯤은 썩은 거나 다름없는 쓰레기 같은 물건들이었다. 나는 남편이 물건을 사는걸 보고 또 어이가 없었는데 이제 보니 이런 저질의 물건을 납품했으니 소매상들에게 제대로 돈 달라는 소리도 못하는 거였다.


다만 아무리 저급한 물건이라도 살 때는 돈을 주고 사고 납품한 물건은 수금이 안 되니 돈이 없는 거였는데 당연히 돈이 없으니 이미 도매시장에서도 외상으로 물건을 떼오고 있었다.


거기다 외상이 하도 많이 쌓이다 보니 그 도매시장에 있는 이제 갓 학생티를 벗은듯한 새파랗게 어린 사람들이 남편에게


"야! 돈 안가져 왔어?"


라고 반말로 소리치고 있었는데 쌓인 외상값만큼 사람들이 남편을 우습게 알고 그 어린사람들 마저도 주변 사람들을 따라 남편을 무시하고 있었던 거였다.


남편이 얼마나 무시당하는지 같이 간 내가 창피할 정도였는데 그래서 내가 참다못해 쫒아가서는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어떻게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이 나잇살 먹은 사람한테 반말 짓거리를 하는 거예요!"


내가 그렇게 쫒아가서 화를 내자 어린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는데 그러고 가게로 돌아오니 남편이란 작자가 말하길 창피스러우니까 이제 자기 일하는데는 오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래도 기어코 남편의 장사를 쫒아 다니며 수금을 챙기고 남편이 또다시 쓰레기 같은 물건을 사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나는 그 무렵 정강이에 모기를 물리고 말았다.


물론 모기에 물리는 일 정도야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무려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흉터가 남아있으니 그때 모기에게 물린 그 일이 분명 예삿일은 아니었다.


당시 처음 정강이를 모기가 물었을 때만 해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모기 물린데를 긁어 상처가 생기고 팔리지도 않는 반쯤 썩은 생선들 틈에 들어가 정리하다 그 썩은 물이 상처로 들어간 탓에 모기 물린 자리가 무섭도록 곪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모기 물린데 뿐만 아니라 주변은 물론이고 아예 전신이 부어오르는데 한동안은 목발을 집고 다니다 나중에는 그나마도 아예 걷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결국 나중에 간신히 병원에 가서 그 오염된 부위를 도려냈는데 덕분에 지금도 정강이 부위에는 푹 파인 흉터가 남아있다. 어이없게도 나는 결국 그 모기 물린 것 때문에 한참을 앓아 누웠는데 내가 장사에 나가지 못하자 집안 형편이 또 말이 아니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무렵 나는 우리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마저 알게 됐는데 사실 이미 그때는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몇해는 지난 뒤였다.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어머니는 힘들고 어렵게 사는 내 형편을 알기에 일부러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몇해가 지나도록 이야기 하지 않으신 거였는데 덕분에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몇해가 지나서 알게 된 것도 어머니를 통해서가 아니라 친척을 통해 전해들은 거였다.


사실 어머니가 혼자가 되신 것은 어쩌면 내 탓인지도 모르낟. 첫째를 임신한 채 집집마다 생선을 팔고 다닐 무렵 내가 시집가기 전부터 아프셨던 아버지의 병이 악화 되었고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기별이 와서 나는 아버지를 보러 친정에 갔었다.


아버지의 병은 얼굴이 노래지는 황달이었는데 나는 아버지를 낫게 하고자 주변에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고칠 수 있는지를 수소문 했었다. 한동안 그렇게 사람들에게 수소문을 하고 다니자 사람들이 일러주길 수원에 있는 서독 병원이 아주 유명한 병원인데 무슨 병이든지 다 고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임신한 몸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무작정 그 병원을 찾아갔었다. 당시 끼니 걱정을 하던 나에게는 가진 돈이라고는 전무했는데 그저 아버지를 고치겠다는 욕심 하나로 무작정 그 큰 병원을 찾아갔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어리석은 행동 이었다.​


그래도 막상 서독병원에 가서 아버지가 아프셔서 병원은 왔는데 돈이 없다 말하니 돈이 없다고 그냥 야박하게 내치지는 않고 대신 동사무소에서 서류를 때오라고 했다. 극빈자 증명서 비슷한 것이었는데 우리가족이 가난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서류였다.


이미 아버지가 앓아누우신지 오래라 친정에는 큰오빠의 전사금으로 샀던 땅도 남은 것이 거의 없어 가난을 증명하는 서류를 떼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그 서류를 병원에 가져다 주니 병원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무료로 수술을 해준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를 무료로 치료해 준다는 그 말에 정말 너무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는데 지금으로써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그 후에 펼쳐졌다.


지금은 극빈자를 위한 무료 수술이라고 해도 당연히 정상적인 의사들에 의해 정상적인 수술이 펼쳐지겠지만 당시 그곳에서는 극비자용 무료 수술이라는 이유로 아직 정식 의사도 아닌 의대생들이 우리 아버지의 수술을 집도 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학생들을 위한 실습용 환자가 된 셈인데 나는 수술이 있기 전 어디에서도 그런 설명은 들은 적이 없고 그냥 좋은 의사 선생님들이 치료를 해주는 줄만 알았으니 지금 생각해도 바보 멍충이가 따로 없었다.


결국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내가 망연자실해서 돌아가셨다는 아버지를 찾아가보니 어이없게도 아버지는 살아계셨다.


그런데 수술 중 우리 아버지가 죽었다고 판단한 의대생들이 장기를 제대로 봉합한 게 아니라 대충 겉가죽만 이어지게 뭉퉁그려 봉합해놓은 상태라 아버지는 엄청나게 고통스러워 하셨다.


서독병원에서는 나에게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는데 그곳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돌아가시지 않았고 대충 봉합한 탓에 뱃가죽위로 장기가 불뚝 튀어나와 있는 모습으로 병원에서 퇴원을 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셔서는 3년을 더 사셨는데 나는 그때 아버지께 지금도 후회되는 모진 말을 했더랬다.


우리 아버지는 살아 생전 굉장한 효자셨는데 예전 배고파 먹을 게 없던 시절부터 없는 돈을 만들어서라도 꼭 집에 고등어자반이 떨어지지 않게 한 마리씩 사오셨다.


그렇게 사온 고등어는 새끼줄에 엮어 천장에 매달아 놓고는 매 끼니 때마다 손가락 한 마디 만큼만 토막을 내어 구운 뒤 꼭 할머니 밥상에만 올려 드렸고. 그 시절의 어린 나는 언제나 그 고등어가 그렇게 먹고 싶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 본인조차 입도 대지 않고 할머니 밥 위에만 한 토막씩 올려드리는 그 고등어를 언감생심 내가 맛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고등어를 손가락 한마디씩 잘라서 찬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생선 대가리만 남는데 할머니가 드시기 불편한 부위니 이때 아버지가 그 남은 생선 대가리를 드셨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생선 대가리에 붙어 있는 날개 꼭지 같은 아가미라도 나를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고. 그냥 어떻게든 씹어서 맛이라도 보고 싶어서였는데 그게 어찌나 먹고 싶던지 농사를 지어 밥이 좀 여유가 있을 때는 오히려 밥맛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그 고등어를 먹고 싶던 기억이 무척 강렬해서 나중에 형편이 좀 나아진 뒤엔 정말 고등어를 원 없이 먹었더랬다. 그런 효자 였던 아버지를 가장 큰 불효인 할머니보다 먼저 돌아가시게 만든 것도 내가 서독병원을 데려가서였지만 평생을 효자로 사셨던 아버지에게 나는 일생일대의 후회 막심한 불효 가득한 말을 했었다.


아버지는 서독병원에서 수술이 잘못된 후 처음엔 지팡이라도 짚고 다니셨지만 나중에는 아예 걷지도 못하실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셨는데 누워만 계시면서도 수술이 잘못된 부위가 아프셔서 매일 고통에 몸부림을 치셨다.


당시 나는 이미 시집을 간 상황이라 아버지의 병수발은 온전히 어머니의 몫이었는데 아버지는 겨우 죽을 해도 그 물만 빨아 드실 정도로 쇠약해지시고 기력이 없어 움직일 수 조차 없게 되니 대소변 또한 어머니가 해결해 주셔야 했다.


할머니는 당시에 이미 아흔이 넘으신 고령이라 아버지 병수발을 도와주실 기력이 없어 그 일은 오롯이 어머니의 몫이 되어버렸는데 그럴 때마다 미안한 할머니는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라는 말만 하셨더랬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시간을 내어 친정에 한번 들렸을 때 어머니가 아픈 아버지를 돌봐 드리는 게 얼마나 힘드신지 나에게 힘들어 죽을 것 같다며 울먹이며 하소연을 하셨는데 그때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어머니의 말을 들은 나는 어머니가 안 계실 때 누워만 계시는 아버지에게 모진 말을 했다.


"아유 아버지.. 어차피 일어나지 못 하실려면 차라리 돌아 가셨으면 좋겠어요."


라고 한 것인데 당시에도 아버지는 몸이 아프고 거동이 힘드실 뿐 맑은 정신을 가지고 계셨으니 내가 한 모진 말이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지 상상이 안 될 정도다. 아버지는 그런 내 말을 듣고


"내가 죽었음 좋겠니?"


하고 말하셨는데


"글쎄 말이에요... 일어나지도 못하시고... 엄마도 죽겠고 아버지도 죽겠고 이렇게 하고 어떻게 사세요."


라고 대답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눈물이 왈칵 날만큼 모질고 후회스런 대답이었다.


그 후 나는 어머니에게 일간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병원에서 수술이 잘못된 후에도 무려 삼년을 더 사시던 아버지는 그날로부터 딱 이틀째 되는 날 돌아가셨으니 내가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만든 것과 같았다.


정작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내가 아버지에게 모진 말을 한 것도 너무 괴롭고 먹는 것도 여의치 않을 만큼 가난한 삶을 사는 것도 너무 힘들어 나는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실컷 울고는 화장을 하신다는 아버지를 쫒아 죽을 다짐을 했다.


아버지의 관이 화장터에 들어갈 때 그곳으로 같이 뛰어들 생각을 한 것인데 정작 마음을 굳게 먹고 아버지의 관을 바짝 쫒아 화장터로 가보니 관을 화장장 안으로 집어 넣자 마자 관리인이 재빨리 철문을 철커덩 잠가버렸다.


도무지 내가 따라 들어갈 여지가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화장터의 관리인이 내가 이상한 눈빛으로 화장터 안을 바라보며 아버지 관을 바짝 붙어 들어가는 게 수상하여 일부러 재빨리 행동한 듯 하다.


평생을 고고한 양반가의 마님으로 사시던 할머니는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신 후 오래지 않아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약을 드시고 돌아가셨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걸 나는 그때는 모르고 나중에 친척에게 전해들은 거였다.


그때는 내가 모기 때문에 정강이 살을 도려내고 집안에서 자리보전을 하던 터라 끼니를 때우기 힘들 정도로 살림이 너무 안 좋아 져서 할머니가 오래전 돌아 가셨다는 것에 대해 감흥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나는 그대로 있으면 굶어 죽을 것 같으니 다시 일을 한다고 나섰는데 남편은 창피스럽게 한다며 자신이 장사 하는 데를 끝끝내 못 오게 해서 결국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당시 내가 찾은 일거리는 책장사였다. 그리고 그건 집에서 혼자 오랫동안 궁리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이것저것 재지도 않고 책 도매상에서 책을 때다 동네에 팔면 되겠다는 생각에 그길로 아이들을 업고 안고 끌며 기어코 집이 있던 안양에서 서울로 올라갔었다.


당시 서울 동대문에는 제법 유명한 책 도매상이 있었는데 나는 거길 가서 주위 사람들에게 빌린 돈으로 책을 샀다.


그렇게 책을 잔뜩 사고는 책에다 아이들 까지 데리고 버스를 탈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탔는데 그 돈이 그렇게 아까웠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힘들게 책을 사왔음에도 도무지 동네에 책을 팔 곳이 없었다.


그래서 또 생각해낸 것이 집이 있는 안양에 있던 대규모 공장들에 그 책들을 가져다 파는 거였다. 당시 안양에는 금성방직, 태평방직, 나이롱 공장 세군대가 규모도 크고 생긴 지도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나는 그곳들을 무작정 찾아간 거였다.


그렇게 무작정 가장 가까운 태평방직 공장부터 찾아가서는 어느 정도 지위가 있어 보이는 직원을 붙잡고 형편이 곤란해서 이곳에 책 좀 팔았으면 한다고 사정 설명을 하는데 당시 아이들만 집에 놔둘 수 없어 다시 아이들을 업고 안고 끌며 데려온 상태라 그런 내 사정이 딱해 보였는지 처음엔 안 된다던 그 직원이 곧 내 말에 귀 기울여 줬다.


나는 그 직원에게 내가 책꽂이를 가져다 놓고 거기다 책을 놓아둘 테니 공장 직원 중 사려는 사람이 있으면 이름만 적어 두었다가 월급 탈 때 그 돈을 받아주기만 하면 내가 책 판 금액의 몇 프로를 그 직원에게 주겠다고 했는데 당시는 모두 살기 어려울 때라 그 직원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가외 수입이 생기는 그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처음 태평 방직 공장에서 거래를 트게 되자 나머지 두 공장은 조금 더 쉬워 졌는데 이미 태평 방직 공장에서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하니 그곳 관리직 직원들도 가외 수입이 생기는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게 되어 그렇게 세 곳의 공장에 책을 납품하게 되었다.


심지어 안양에서 제일 큰 세 공장에서 동시에 판매가 이루어지니 한 달에 한번 수입을 정산하면 오히려 공장에서 일하는 일반 노동자 보다 많이 벌 수 있을 정도였다.


생각보다 벌이가 괜찮아 이제 배는 굶지 않고 살겠다 싶었는데 그 와중에도 남편은 끊임없이 돈을 좀 해달라는 소리만 하고 행여 집에 돈이라도 모아 놓으면 그걸 사업에 보탠다며 홀랑 들고 나갔다.


남편은 여전히 무능했고 아무리 사업에 돈을 가져간들 수금도 못하는 그 사업이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결국 내가 제법 돈을 벌게 되었음에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사는 상황이 계속됐다.


그 와중에도 나는 첫째 아들과 나머지 세 딸들을 키우는데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잘못을 하면 꼭 연대책임으로 혼을 내었다.


특히 내가 아이들에게 가장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정직하게 살고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어느날인가 셋째 딸아이가 조막만한 손에 동전을 쥐고는 신이 나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가족들에게 자랑을 하는데 다행히 어디서 훔진 것은 아니고 밖에서 놀다가 주운 동전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평범하게 넘어갔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나는 돈을 주워온 셋째딸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그 자리에 돈을 가져다 놓고 오라고 했다.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애가 닳게 그 돈을 찾고 있을 텐데 그렇게 남의 돈을 홀랑 집어 왔냐고 다그치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게 주운 돈을 들고 오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내 말을 어린 딸은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무섭게 다그치니 결국 그 자리에 동전을 두고 왔다.


하지만 나는 그걸로 끝내지 않고 자식들 보고 모두 종아리를 걷으라고 한 다음 회초리로 자식들의 종아리를 때리며 절대 다른 사람 돈을 탐내지 말라 체벌을 했는데 돈을 주워온 셋째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안했는데도 혼나고 맞아야 되는 다른 아이들 역시 서러워서 펑펑 울었다.


물론 땅에 돈이 떨어져 있으면 줍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지라 그 뒤로도 아이들이 나 몰래 땅에 떨어진 돈을 주웠지만 내게 걸리면 무조건 형제들을 다 같이 혼내니 결국 어느 순간 다른 형제들 눈치가 보여서라도 아이들은 땅에 떨어진 돈을 탐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내 아버지로부터의 가르침인데 나도 그렇게 교육받으며 컸고 생전 남의 돈에 탐을 내본 적은 없었다. 나는 이상하게 유난히 땅에 떨어진 돈을 많이 발견하였는데 어쩔땐 돈 뭉치를 보기도 했지만 딱 한번을 제외하곤 손을 대본 적이 없었다.


내가 단 한번 손을 대었던 돈은 처음 시집와서 집에 먹을 식량이 없어 굶주리던 시절 길에서 주은 작은 돈이었는데 당시 돈으로 쌀 한 됫박 정도 살 수 있는 돈이었고 너무나 굶주림에 시달리던 지라 잠시 아버지의 가르침도 잊고 그걸로 보리쌀을 사서 가족들의 배고픔을 달랬다. 한데 딱 그날 사업 밑천이던 자전거를 잃어버렸다.


당시 그 자전거는 내가 시댁 형편이 너무 어려워 밥을 굶고 사는 걸 안 어머니가 얼마 남지 않은 땅을 팔아 마련해 주신 거였는데 그걸 이용해 조암에서 생선을 떼 오면 걸어서 갔다 오는 것 보다 많은 양을 저렴하게 떼올 수 있어 집집마다 돌아다니지 않고 시장 한구석에 앉아 좌판을 벌릴 수 있을 양이 되었다. 그런데 그만 제대로 몇일 써보지도 못하고 도둑 맞은 것이었다.


당시에는 자전거를 가진 사람이 지금의 자동차를 가진 사람보다 귀했는데 도대체 그 자전거는 하룻밤 새 누가 가져갔는지 그 뒤로 그 근방에서 다시는 볼 수 없었고 나는 다시 걸어서 생선을 떼 오고 얼마 안 되는 물량을 비싸게 사오니 집집마다 방문판매로 팔수 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자전거를 도둑맞은 것은 모두 그때 아버지의 가르침을 잊고 그 돈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덕분에 아이들도 절대 남의 돈에 탐내지 못하게 가르쳤다. 그렇게 아이들을 키우는 데는 많은 가르침도 필요했지만 돈도 많이 들어 갔다.


그래도 일단 공장의 월급날 마다 책을 판 수익금이 들어오니 그것으로 빈 책장을 채워놓고 나면 어느 정도 금액이 되었는데 그걸 집에 모아놓으니 몇 번이고 남편이 사업에 필요하다며 가져가 버려 하는 수 없이 여윳돈을 집에 두지 않고 다른 쪽으로 융통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사람들도 순박하여 지금보다 믿을 만 했고 누가 목돈을 가졌다는 사실은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금세 소문이나 그 사람들이 항상 이자를 줄 테니 돈 좀 빌려달라는 소리를 했기에 나는 이번에도 그런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돈놀이를 했다.


일단 집에 돈을 가져오지 않고 자꾸 밖으로만 돌리니 남편에게 돈을 빼앗기지 않는데다 돈을 빌려줄 때마다 이자를 더해 원금이 점점 불어나니 시간이 좀 지나자 그 돈이 제법 큰돈이 되었고.


말이 쉽지 돈놀이라는 게 나한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애 넷 달린 아줌마가 돈 받으러 가면 아무리 믿을 만한 사람도 무시하고 곧잘 돈이 없어 못주겠다며 버티곤 했다.


덕분에 매번 돈을 받으러 갈 때마다 얼마나 심장이 떨리고 손발이 떨리는지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는 집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용기를 내야 했고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못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돈을 빌려준 사람이 사나운 사람이라 너무 무서워 남편에게 같이 좀 가자고 한 적도 있었지만 남편은 오히려 더 겁을 먹고 절대 안 간다고 하곤 했다. 그러면 나 혼자서라도 벌벌 떨며 그 사람을 찾아 갔는데 정말 사나운 사람들에겐 돈을 떼인 적도 몇 번이나 되었다.


그렇게 아주 힘들게 돈이 불어 날 무렵 난 절에는 정이 안가 다시 성당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 성당 신부님이 내가 돈놀이를 하는 것을 아시고는 돈놀이는 어려운 사람을 더 힘들게 하는 나쁜 일이라고 차라리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돈을 이자 없이 그냥 빌려주고 돌려받으라 말하셨다.


난 신부님의 말씀을 듣자 정말 그 일이 나쁜 일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날로 돈놀이를 정리하였는데 한 번에 목돈이 생기자 이번엔 남편의 사촌동생이 찾아와 나보고 운수사업을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형수! 제가 차를 형수에게 팔을 테니 형수가 그것으로 운전사를 써서 택시 운수 사업을 해보세요. 나는 지금 적자 장사를 하지만 형수는 수완이 좋으니 잘 할 겁니다."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닌지라 자기가 사업을 하다 잘 안되니 나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먹은 것이다. 한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친척이 권하니 냉큼 그것을 사가지고는 운수 사업을 시작했다.


말이 거창해 운수 사업이지 코로나 택시 한대를 사서는 따로 운전사를 두고 지금으로 치면 택시 회사처럼 하루에 정해진 사납금을 받고 나머지는 운전사에게 맡기는 일이었는데 당시 돈으로 하루 육천 원의 사납금을 받았다.


그런데 내가 그저 아줌마인데다 자동차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운전사가 갖은 핑계를 대며 사납금을 주지 않았다. 주로 자동차가 고장 나서 자기 돈이 더 많이 들어갔다는 핑계를 대며 사납금을 주지 않았는데 어쩔 때는 그 핑계로 오히려 나에게 차가 고장 나 수리해야 한다며 돈을 받아가기도 했다.


정작 나는 운수사업을 하면서도 자동차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속이면 그냥 속아 넘어가는 바보가 되어 있었고. 결국 그러다 나중엔 정말 안 되겠어서 내가 자동차 공부를 하고 아예 자동차 면허를 따버렸다.


**


당시 단순히 자동차 운전면허만 딴것이 아니라 아는 사람한테 기본적인 자동차 수리까지 배웠는데 하도 운전사가 차가 고장 났다며 돈을 안 가져다 주고 때로는 오히려 수비리를 청구하기 까지 하니 나로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물론 당시 중고로산 그 코로나 택시는 차도 오래됐을 뿐더러 지금 차들처럼 잘 만들어진 좋은 차가 아니라서 고장이 실제로 많이 나기도 했지만 아예 한 달동안 제대로 돈 만져보기 힘든 날도 있었을 정도니 온 자금을 털어 넣은 사업이 망하지 않으려면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운전사가 일을 나가기도 전에 미리 차를 우리집 앞에 가져다 놓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아유~ 저 차가요 기름 탱크가 터져가지고 기름이 밑으로 줄줄 새요. 오늘은 그거 고치러 가야겠어요"


당시 나는 운전면허를 딴지 얼마 되지 않고 차에 대해 아는 것도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아무리 봐도 운전사가 나를 또 속이는 것 같았다.


"그래? 어디가 새는데?"


이에 나는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척 물어봤는데 운전사가 냉큼 대답했다.


"저 밑이에요. 밑바닥에서 새요"


자기 딴에는 잘 안 보이는 자동차 밑바닥을 가리킨 것이지만 나는 더 이상은 속아줄 마음이 없었으므로 대뜸 땅바닥에 누워서는 정말 차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운전사 말대로 기름이 새는지 보았다.


그리고 역시나 내 예상대로 어디에도 새는 곳은 없었다. 운전사는 내가 갑자기 땅바닥에 들어 누워 버리자 무척 당황하기 시작했는데 내가 직접 차 밑으로 기어들어가 체크까지 하고 나오자 안색이 달라져 있었다.


여지껏 그 운전사가 나를 얼마나 속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도 나도 이번에 그가 한 거짓말로 우리의 신뢰가 깨졌다는 것을 알았기에 별다른 고성이 없었음에도 내가


"이제 그만두게"


라고 한마디 하는 것으로 일은 마무리 되었고 운전사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 별다른 변명조차 하지 못했는데 나는 그동안 그가 횡령한 돈의 행방이나 나를 속여 왔던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추궁을 하지 않았다. 운전사가 그렇게 갑자기 그만두자 당장 일할 사람을 구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는데 나는 그동안 차를 놀리기도 아깝고 어차피 내가 운전면허도 있으니 택시를 운전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 그날 바로 택시를 몰고 영업을 나섰다.


물론 운전면허는 있지만 자동차를 운전해본 경험 자체가 적으니 택시 운전을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 이었는데 그래도 평지에서는 곧잘 운전을 해서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둥그스름하게 배가 부푼 교량을 건널 때가 문제였다.


당시 내가 몰던 코로나 차는 힘이 없어서 언덕배기 같은 교량을 올라가려면 제법 악셀을 밟아 줘야 했는데 운전에 미숙하다 보니 언덕배기까지는 어찌 올라왔는데 내려 갈 때 제대로 속도 조절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차가 빠른 속도로 다리의 경사를 내려오는데 바로 조금 앞에 차 두 대가 나란히 서있었고 이대로면 앞차를 줄줄이 들이 박아야할 상황 이었다. 나는 앞차들 까지 사고에 휘말리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재빨리 핸들을 틀었는데 내려오던 속력이 있으니 차는 그대로 회전하다 교량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당시 내가 택시를 탄체 떨어진 교량은 4.5미터 높이의 제법 낮지 않은 교량이었는데 본래라면 그런 높이에서 차가 떨어지면 거꾸로 떨어져서 내가 죽는 게 맞았지만 내가 탄 택시는 바퀴부터 땅에 떨어져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황망한 와중이라 찰나의 순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몰랐지만 나중에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떨어지던 교량의 난간 쪽에 마침 공사를 위해 가져다 놓은 사다리가 있었고 놀랍게도 내가 타고 있던 코로나 택시의 작은 바퀴가 그 사다리에 걸친 상태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져서 차가 뒤집히지 않았고 덕분에 나도 살 수 있었다고 했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목숨을 살려주신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나는 그렇게 떨어지고 난 후 자동차의 낙하 충격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내가 교량 밖으로 튕겨 나가기 전에 언뜻 교량의 차도 옆 인도에서 놀고 있던 세 아이를 본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세 아이를 다 차로 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고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 하자마자 내 몸의 어디가 다쳤는지를 살필 겨를도 없이 바로 차문을 열고 나와서 아이들의 시체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끔찍하게도 내가 떨어진 교량 아래는 개천 특유의 자갈과 바위가 있는 돌밭 이어서 높은 곳에서 떨어진 아이들이 무사할 것 이라는 기대를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찾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금세 한 아이를 찾았는데 생각보다 아이는 멀쩡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아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졌으니 겉으로 드러난 일부 상처 외에도 큰 충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사고를 구경하던 이들 중 택시가 있길래 재빨리 거기에 태우고는 안양 병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미친 사람처럼 다른 아이들을 찾기 시작했는데 조금 찾다 보니 금세 다리를 다친 아이 하나를 발견해서는 또 다른 택시에 태워 안양 병원으로 보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교량 근처에는 구경하는 사람이 한가득 이어서 따로 택시를 잡을 필요도 없이 그냥 서있는 택시 중에 아무나 태워서 보내면 되었다.


그런데 세번째 아이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이미 죽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시체라도 찾기 위해 열심히 주변을 살폈는데 구경꾼 중 한명이 그런 나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병원부터 가보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분명 아이가 세 명이나 있었는데 한 명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가 않아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내가 처음부터 모두 보았는데 아이 한명은 진즉에 차에 치기 전에 도망갔습니다. 다친 아이는 두 명 밖에 없으니 어서 병원부터 가보세요"


나는 그 구경꾼의 말을 듣고 그제야 한시름 놓고는 택시를 하나 잡아타고 안양 병원으로 향했다.


언뜻 차가 바퀴부터 떨어졌으니 괜찮을 것 같지만 높은 곳에서 자갈밭으로 떨어진 가뜩이나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었던 코로나 택시는 그대로 반파된 상태였고 아이들을 구할 생각에 미친 사람처럼 자갈밭을 해매고 다녔던 나 역시 당연히 몸이 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병원에 가서 간단한 응급 처치만 한 뒤 아이들이 들어간 병실 앞에서 아이들 병실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기도만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제발 아이들 좀 살려주세요. 제발 아이들을 살려주세요."


겉보기에는 가벼운 찰과상 외에는 큰 이상이 없는 아이들 이었지만 나는 그때 왜 그렇게 겁이 나고 아이들이 잘못될까봐 걱정했는지 도무지 아이들 병실을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그때 연락을 받고 아이들의 부모님이 병실에 도착했다.


당시 나는 누가 오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나는 죽어도 좋으니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 아이들 부모가 와서 여자가 무슨 운전을 하느냐고 말하며 아이들을 입원시킨 나를 때리려 들 수도 있는 상황 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다만 아직 어린 아이들이 나 때문에 잘못될까 그것이 두려워 하나님에게 열심히 기도를 한 것인데 누군가 병실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만 하는 내 어깨에 손을 대며 말했다.


"아유 그러지 마요. 괜찮아요. 애들 다 괜찮아요."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은 병실에 찾아온 아이들 중 한명의 엄마였는데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부모들도 모두 와서는 내게 아이들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괜찮다고 말해줬다.


다친 아이 둘 다 완전 무사한 것은 아니라 전치 1주와 2주 진단이 나오긴 했지만 4.5미터 높이의 교량 위에서 자동차에 치어 돌밭위에 떨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든 경미한 부상 이었다. 그나마도 겉으로 봐서는 둘 다 무릎 등이 까진 것이 전부였고.


그중 전치 2주가 나온 한명 또한 다리를 조금 다친 정도라 목숨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펑펑 울면서 아이들의 부모들에게는 죄송하다 연신 사과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택시를 내 이름으로 구매 했던 거라 내가 사고를 낸 것은 보험처리가 다 되어서 아이들 병원비는 보험료로 처리가 되었다. 물론 가벼운 사고가 아니었기에 반파된 택시는 폐차를 시켰는데 그 상황 에서도 아이들은 무사했으니 그야말로 하나님의 도움이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아이들이 교량 위에서 딱지치기를 하고 있다가 사고가 난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 장난감이라도 좀 사다 줄 것을 그때는 미처 그 생각을 못했더랬다.


차까지 폐차를 시켰으니 운수사업은 그대로 망한 셈이 되었고 모아놓은 돈을 다 털어 넣어 했던 사업이 망했으니 먹고살기가 힘들어 졌어야 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하고 있는 책장사가 있어 형편이 단숨에 어려워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돈만 까먹고 있던 운수 사업이 정리되자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조금씩 돈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아직까지 남의 집에서 월세살이를 하니 그 돈을 모아 집을 살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같이 좀 가서 집을 보자고 했더니 남편이 말하길


"니집 사는데 내가 왜 같이 가서 보냐?"


하고 쏘아 붙였다. 나는 남편의 말에 어이가 없었는데 속으로는


'내집이면 너하고 나하고 남인데 왜 밤이면 같이 자고 넌 내 집에서 사냐?'


고 똑같이 톡 쏘아붙여 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게 지금도 분하다. 나는 남편의 대꾸에 하는 수 없이 혼자서 집을 보러 다니고 이사 갈 집을 사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도 남편은 마치 남일 인 것 마냥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나 혼자 모든 일을 다 처리하고 남편에게는 몇 일날 어디어디로 이사를 갈 거다 라고만 말했는데 남편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이사에서도 손을 떼 버렸다. 그렇게 남편이 장사를 하러 나간 사이 나 혼자 아이들과 이삿짐을 싸서 힘들게 이사를 마치고 나니 저녁이 되어 버렸는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여기 오늘 이사를 온 집이 어딘가요?"


하는 소리였는데 알고 보니 남편이 장사가 끝난 다음 새로 이사한 우리집을 찾아오는데 어디로 이사를 했는지 건성으로 들어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 용케 우리 옆집까지는 찾아와서 옆집에 대고 오늘 이사한 우리집을 찾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도 남편이 얄미워 일부러 밖으로 나가보지 않으려 했는데 아이들이 제 아버지 목소리를 듣고는


"아버지 오셨다!"


라고 말하며 맨발로 뛰쳐나가서는 남편을 데려왔다. 남편은 아이들 덕에 새로 이사한 집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뭐가 못마땅한지 이것저것 트집만 잡았다.


아무리 책장사가 잘된다고 한들 잠깐 모아서 집을 살 정도로 돈을 모을 수는 없으니 예전에 세 들어 살던 송경래 할아버지 댁에서 할아버지에게 이자 30%짜리 달러 빚을 내서 겨우 잔금을 치른 것인데 그런 속내도 모르면서 내가 산집이라며 괜히 이것저것 트집만 잡아대는 남편이 좋아 보일 리는 없었다.


사실 나에게 돈을 빌려준 송경래 할아버지는 예전에 우리가 살던 집의 주인이자 안양 중앙시장의 거의 대부분을 가지고 계셨던 부자셨다. 나는 그 분이 아무리 부자라고 한들 남의 돈을 비싼 이자로 빌렸으니 어떻게든 빨리 갚을 생각에 돈이 생기는 족족 아껴가며 빚부터 갚았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가 그런 나를 무척 좋게 보셨다.


그전에 세 들어 살 때도 내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셨기에 아무리 높은 이자의 달러 빚이라도 나에게 집을 사는데 필요한 큰 돈을 선뜻 빌려주신 거지만 내가 성실하게 빚을 갚는 모습을 좋게 보셔서 이사를 가고도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특히 그 집 할머니가 무능한 남편 덕에 아이 넷을 내가 벌어 먹여 키우다 시피 하는 내 사정을 알고는 나를 무척 예뻐하셔서 우리 친 할머니처럼 챙겨주셨다. 때가 되면 먹을 것 부터 이것저것 챙겨주시는데 나중에 빚을 다 갚고는 할머니에게 너무 고마워서 금반지 세 돈 짜리를 해다 드렸다.


남편은 여전히 무능했지만 그래도 책장사로 버는 돈이 제법 되어 시간이 흘러 빚까지 모두 갚고 나니 이제는 집도 내 것이고 먹고 살만 하다 싶었는데 내 모진 인생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루는 장을 보고 오는데 동네 부동산 사장님이 나를 가만히 불러서는 남편이 내 명의로 된 집을 어떻게 하면 자신의 명의로 돌릴 수 있는지 물어보고 갔다고 말씀해 주셨다. 평소에 그 사장님을 볼 때마다 인사를 하고 다닌 덕에 부동산 사장님과는 제법 안면이 있는 사이였기에 나에게 몰래 알려 주신 건데 그 말을 듣고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잘 안 나왔다.


나는 간신히 부동산 사장님에게 알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날 내가 남편에게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편이 먼저 내게 사정을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막 울면서 사정하기를 물건을 해올 돈이 없으니 또 빚을 얻어다 달라는 소리를 했는데 그 상황에서도 울며 사정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난 멍청하게도 남편에게 또 돈을 만들어 주었다.


물론 언제나처럼 남편은 돈을 가져가면 그때뿐이었고 당시 내가 못 먹으면서 아이들을 임신한 탓에 아이들이 잔병치레를 자주 했는데 내가 아이들을 병원에라도 데려갔다 오면 남편은


"뭐 하러 애들을 병원에 데려가? 차라리 그 돈을 나를 주지 나를!"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그토록 얄궂었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아들은 하나밖에 없어 첫째 아들이 외로울까봐 아들 하나를 더 낳기 위해 기어코 다섯째를 낳고 말았다. 한데 낳고 보니 또 딸이었다. 결국 큰아들 하나에 아래로는 딸만 줄줄이 4명을 낳은 것인데 결국 이 다섯 아이들을 키우는데 내 일생을 바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집을 사서 이사를 갔을 때는 이미 정신이 이상하시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라 시아버지와 시동생들까지 같이 살 때였는데 나 혼자 그 많은 식구의 뒤치닥거리가 감당이 안 되니 내 이종사촌 동생 기숙이가 우리집에 와서 집안일을 거들어 주었다.


기숙이는 태생이 바르고 성실한 아이라 내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나마 책장사가 벌이가 제법 되긴 했지만 나 때문에 고생하는 기숙이에게도 조금씩 월급을 챙겨주려면 나는 또 다른 일을 해야 했다.


결국 다시 시장근처에 좌판을 펼치고 생선을 파는 생선 노점을 했는데 크게 도매장사를 한다고 설치는 남편은 집에 돈 한 푼 못 벌어다 줬지만 시장구석에서 좌판을 하는 나는 그것으로 기숙이 월급도 주고 가족들 부양할 만큼의 돈도 벌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남편은 어찌 집안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지 내가 열심히 일을 해서 빚을 갚을만 하면 또 다시 돈을 내놓으라는 소리를 했다.



나중에는 모아놓은 돈을 박박 긁어가서 집에 돈이 없는데도 돈 좀 구해오라는 소리를 하기에 내가 도대체 무슨 재주로 돈을 구해 오냐 했더니 기어코 다시 집 이야기를 들먹였다.


남편은 당시 살던 집이 안채와 바깥채로 구분되어 있으니 우리가 바깥채에서 살고 안채를 세를 주어 그 돈을 달라고 했는데 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자꾸만 사정하는 남편을 매정히 내칠 수 없어 그럼 그 돈을 해주면 가족들이 먹는 식량이 한 달에 쌀 한가마는 되니 한 달에 쌀 한가마 씩만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내 생각에는 남편이 쌀만 한 가마씩 구해다 주면 내가 버는 걸로 반찬도 해먹고 돈도 조금씩 모아 다시 그 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는데 내가 안채를 세를 놓고 그 돈을 마련해 주기 전까지는 내말에 그러마하고 철썩 같이 약속했던 남편은 정작 내가 전세금을 빼서 사업자금으로 주자 딱 첫 달 한번만 쌀 한가마를 집에 가져다주고 다시는 가져다주지 않았다.


바보 같은 내가 남편에게 또 당한 것 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억울한 일이지만 아직 정말 가슴에 피가 맺히도록 억울한 이야기는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남편이 그렇게 집에 쌀을 가져다주지 않게 되니 내가 계획한 것들은 모두 어그러져서 생활은 갑작스레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궁리 끝에 다음날 학교를 안가는 어느 토요일 다섯 아이들을 모두 남편이 장사하는 곳으로 보냈는데 내 생각에는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들어와 한 달에 한 가마씩 쌀을 사 줄 테니 아이들은 장사 하는데 방해 되지 않게 가게로 보내지 말라는 소리를 할 줄 알았던 거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다르게 남편은 아이들을 가게에 두고 집으로 들어와서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방문을 탈카닥! 하고 잠가버렸다. 나는 당시 내복 하나만 입은 상태로 방에 있었는데 내가 집에 돌아온 남편을 보고 일어서자 남편이 나를 휙! 하고 떠밀었다.


그리고는 넘어진 나를 사정없이 발로 차고 당시 방안에 있었던 단단한 몸체를 가진 나무 빗자루의 대를 뽑아서는 그걸 무지막지 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그 잔인한 폭력에 미처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까무라 쳤는데 남편은 그렇게 나를 실컷 때리다가 내가 까무라치고 나서야 내가 죽은 줄 알고 잠시 매질을 멈췄다.


나는 그렇게 매질이 그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다시 들었는데 그제야 남편이 나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경황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정신이 들자마자


"사람 살려요!!!"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남편은 소리치는 나를 보고는 다시 정신없이 매질을하기 시작했고 나는 다시 또 까무라치고 말았다. 내가 그렇게 또 까무라치자 남편은 다시 내가 죽었을까봐 매질을 멈췄고 나는 서서히 정신을 차렸는데 당시 나는


'이대로 또 때리면 진짜로 맞아 죽겠구나. 내가 죽어도 저놈에게 원수를 갚고 죽어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 위기를 어떻게 해치고 살아 나가나 궁리를 하는데 일부러 정신을 잃은 채를 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내가 그렇게 한동안 정신을 잃은 연기를 하고 있으니 순간 남편이 방심하는 게 얼핏 실눈으로 보여 재빨리 발딱! 일어나서는 잠긴 문고리를 열고 정신 없이 큰길로 뛰어나갔다.


그리곤 억울한 마음에 진단서만 떼서 고발만 하면 복수가 되는 줄 알고 바로 병원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매를 맞고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아직 매 맞은 부위가 시커멓게 멍이 들지 않고 새빨갛게 부어오르고 핏줄이 터진 정도여서 의사가 말하길 2주 진단밖에 줄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2주 진단이라도 복수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2주 진단이라도 떼어 달라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전치 2주로는 처벌의 수위가 무척 낮았다. 당시 의사는 제대로 된 진단서를 떼고 싶으면 멍이 올라온 뒤 다시 와서 진단을 떼라고 했었고.


그리고 정말 그날부터 하루 이틀이 지나니 온몸에 새카맣게 멍이 올라왔는데 정작 몸을 움직이기도 힘든데다 내가 일을 못해 집에 돈의 여유가 없으니 진단을 다시 뗄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너무 크고 분이 삭질 않아 그 2주 진단을 받은 진단서를 가지고 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그런데 정작 남편의 폭행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했어도 나는 갈 곳이 없어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행히 남편은 내가 고소장을 제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나는 그렇게 남편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고 난 뒤 날이 갈수록 몸이 부어 아예 움직일 수도 없게 되자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세상에 사람을 그렇게 죽으라고 모질게 때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소리쳤는데 남편이란 작자가 말하길


"어휴~ 그거 오수교가 그렇게 때리라고 해서 때렸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오수교라는 사람의 이름을 잊지 못하는데 그는 남편의 군 생활 동기이자 한마을에 사는 사람이었다. 나는 남편의 황당한 대답에 어이가 없어


"그사람이 나한테 무슨 원수를 져서 때리라고 그래?"


하고 말했는데 하는 모양을 보니 오수교라는 사람이 마누라는 때려야 말을 잘 듣는다는 식으로 말을 한 듯 했다.


나는 너무 분하여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에서도 아이들에게 내 옷을 모두 벗기게 한 다음 시커멓게 멍이 들고 부어 오른 내 등이 잘 보이게 엎드린 상태에서 보자기를 덮게 했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동네에 살고 있는 그 오수교라는 사람을 불러 오게 했는데 아이들에게 불려온 오수교가 방에 들어오자 내가 큰아들에게 말했다.


"엄마 위에 있는 보자기를 벗겨라."


그러자 큰아들이 보자기를 벗기고 마침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맣게 멍이 들고 부어오른 내 등이 드러났는데 그걸 본 오수교라는 사람이 말하길


"아유~ 이게 웬일이에요."


하고 말하는데 나는 화가 나 소리쳤다.


"아니 오수교씨가 나를 이렇게 때리라고 우리 애들 아버지한테 시켰다는데 나하고 무슨 원수 졌어요? 나를 왜 이렇게 때리라고 그래요?“


했는데 오수교가 대답하길


"아휴~ 내가 때리라고 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때려.... 아휴... 아휴.."


하면서 더 이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처럼 오수교는 자신은 그저 농담으로


"여자가 말을 안 들으면 때려야 해!"


하고 말했다는데 내 남편이라는 사람이 정말로 나를 때릴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 사람도 여자인 내가 얼마나 억울하면 옷을 벗고 엎드려서 시커멓게 멍이 들고 엉망이 된 등을 보여줄까 하는 생각에 너무 기가 막혀 더는 변명조차 못하고 한숨만 쉬다 슬그머니 가버렸고.


나는 경찰에 남편의 폭행에 대한 고소장만 접수한 게 아니라 이혼 소송까지 제기한 상태였는데 그 당시 내 억울함은 그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남편의 폭행에 대한 재판이 먼저 이루어 졌는데 각자 폭행에 대한 증인을 세우게 되었다. 나는 동네에서 내가 맞으면서 지른 비명소리를 듣고 내가 학대받은 것을 알게 된 마을 사람 8명에게 부탁을 해 증인을 세웠고 남편은 그 재판에 자신의 군대 동기이자 한마을 사는 친구인 그 오수교를 증인으로 세웠다.


동네 사람 8명은 당연히 내가 세운 증인 답게 모두 내 편을 들며 내가 남편에게 학대당했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었는데 정작 남편이 데려온 오수교라는 사람은 나에게 지은 죄가 있으니 재판장에서는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남편 편을 드는 대신 역시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내가 너무 끔찍하여 말을 제대로 못했지만 남편은 나를 단단한 나왕 나무 빗자루 대가 부러질 정도로 때린데다 몇 번이나 까무라쳐도 개의치 않고 죽일 듯 때렸기에 나중에 시커멓게 멍이 올라 왔을 때는 그 모습이 쳐다보기 조차 끔찍했으니 이미 그걸 본 오수교는 내가 서있는 법정에선 결국 남편에게 부탁받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폭행에 대한 재판은 내가 이겼는데 정작 재판에 이겼어도 남편이 나를 때린 것은 인정이 되었지만 전치 2주의 가벼운 진단을 받은 게 문제가 되어 가벼운 폭행으로 치부되어 남편은 징역살이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소송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혼소송까지 이어졌는데 내가 이미 남편의 폭력은 재판부에서 증명한 사실이라 증언했더니 남편이란 작자가 대뜸 하는 말이 내가 바람을 펴서 때렸다고 했다. 나는 처음엔 남편의 황당한 거짓말에 어이가 없어서 대꾸조차 하지 못했고.


결국 단순 가정폭력으로 쉽사리 이혼소송에 이길 것 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 이혼 소송 재판은 1년을 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 이혼 소송 재판을 하는 도중 내가 당시 친하게 지내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친정 부모님들처럼 고민 상담을 했던 송경래 할아버지 내외를 찾아가는데 집을 나서자마자 집 옆에 있던 무궁화나무 뒤에서 어떤 남자가 숨어 있다가 내 앞으로 확!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내가 이상한 사람 같아 피해 가려고 하자 나를 보며


"나 몰라요? 나 알죠?"


하면서 나를 따라왔다. 나는 남자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껴


"제가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그리고 알던 모르던 왜 이렇게 따라와요?"


하고 쏘아붙였는데 남자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따라왔다.


나는 그런 남자가 신경 쓰여 발을 재개 놀리며 도망가려 했는데 그럼에도 남자는 기어코 나를 따라 논두덩 까지 따라왔다. 그러더니 논두덩에 이르자 갑자기 나를 꽉 끌어안았는데 나는 놀라고 당황해서 남자를 뿌리치려 하며


"아니 당신 누군데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주민등록증 내놔 봐요!"


하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말이지만 당시 내 생각에는 정말 나를 아는 사람이면 주민등록증을 보고 정체를 알아야겠다는 마음에서였는데 남자는 당연히 나에게 주민등록증을 내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히려 나에게 입을 들이밀며 뽀뽀하는 척을 하려는데 나는 황당하고 끔찍한 상황이 너무 싫어 제대로 소리조차 치지 못하고 연신 힘을 써 떼어내려고만 했다. 그런대 그때 저쪽에서 불이 번쩍 번쩍 하는 게 느껴졌다.


당시 나는 멍청하게도 그냥 차가 도로를 지나면서 불이 번쩍 거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한 남자는 그 후에 나를 자연스레 놓아주었다. 나는 더 봉변을 당할까봐 빨리 송경래 할아버지 댁으로 가서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말했는데 송경래 할아버지 내외는 대번에


"이런 못된 놈의 자식 같으니라고!! 강제로 바람났다고 하면서 사진 찍은 거야! 이 맹추야!"


하고 말하셨다. 그런데 나는 설마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아니에요 자동차가 지나가는데 불이 비쳤나 봐요."


하고 말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상황에서도 남편을 믿고 싶어 했는지 멍청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재판 날짜에 재판장을 가보니 남편이란 작자는 기세도 등등하게 내가 바람피웠다는 증거라며 사진을 제출했는데 그때 논두렁에서 내가 봉변을 당하는 사진이었다.


물론 사진상으로 보아도 내가 그 상황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싫어하며 밀쳐내려는 모습이 그대로 찍혀 있었기에 남편이 호기롭게 내민 사진 증거는 아무런 효력도 발휘 하지 못했는데 이미 그 전부터 법관들은 내 편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보아도 나는 남편에게 학대당한 사람이었고 심지어는 그때까지도 결혼할 때 동네 사람들이 해준 낡은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어 누가 봐도 순진한 시골 아낙의 모습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아파서 집에서 누워만 있느라 돈이 없어 대리인도 쓰지 못하고 소송에 관련된 서류조차 모두 내가 작성했는데 남편에게는 이혼 위자료로 70만원을 요구했다.


그런데 남편은 그 이혼 위자료 70만원을 주기 싫어 빚을 내어 서기를 고용해 소송 서류를 만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서기를 고용한 비용이 무려 200만원에 달했다. 차라리 70만원만 주었으면 소송이 빨리 끝났을 건데 그걸 주기 싫어 그렇게 시간을 끌어대니 내 속만 뒤집어 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법관들은 내 편을 들어주었고 이혼소송은 나의 승소로 마무리 지어지는 듯 했는데 남편이 한 달만 재판의 결과를 연기해달라고 사정하자 법관들이 그럼 조정기간으로 보름을 준다고 했다.


그런데 재판장 문을 나서자마자 남편이 나를 끌어안더니 꼬시기 시작했다.


"우리 자식이 다섯이나 되는데 같이 살아야지 않겠어?"


하는데 나는 나를 잔인하게 폭행한 것으로도 모자라 바람까지 피는 부도덕한 사람으로 만든 남편의 말을 듣기 싫어 그대로 뿌리치고 집으로 가버렸다.


그날 남편은 집으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친정을 간 것이었다. 남편은 우리 친정에 가서는 친정식구들에게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모두 모이라고 하고는 펑펑 울면서 애가 다섯이나 있는데 내가 바람이 나서 이혼을 하자고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좋은 사람으로 포장을 해서 내가 바람을 폈지만 자식이 다섯이나 되니 자신은 이혼을 할 수 없고 같이 살아야 겠다고 말했는데 순진한 시골 사람들인 우리 친정 가족들은 울면서 말하는 남편의 말에 그대로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덕분에 나는 오히려 친정에 불려가 친정 식구들한테 어떻게 자식을 다섯이나 두고 바람을 피고 이혼하자는 소리를 하냐며 야단을 맞야 했고.


친정식구들은 날 호되게 야단치며 애가 다섯이나 되는데 어디 이혼을 하냐고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소리들을 했는데 내 어머니마저도 야속하게 내 맘은 몰라주시고 무조건 이혼은 안 된다고 말씀하시니 결국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다 이긴 이혼 소송을 취소해 버렸다.


그리고 난 이혼 소송을 취소 하자마자 그것을 후회해야 했다. 남편은 자신이 저지른 폭행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동네에 내가 바람 핀 여자라는 소문을 내고 다녔으며 또한 내게 폭언을 일삼았다.


내가 그렇게 폭행을 당하고도 이혼 소송을 취소했다는 소문이 돌자 결국 남편이 퍼트린 내가 바람을 피워서 폭행을 했다는 사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동네에 퍼져나갔고 결국 동네 사람들까지 나에게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학대와 괴롭힘에 시달리던 어느 날 남편이 나에게 여느 때처럼 욕설을 퍼부었고 나는 그 분을 참지 못해 씩씩대다 어느 순간 정신을 놓아버렸다. 언뜻 내가 일어서서 춤을 췄다는 것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데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당시 국민학교를 다니던 큰아들이 내가 갑자기 미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 시작하자 우리 친정어머니를 모셔온 거였다. 큰아들에 의해 우리 집으로 찾아오신 어머니는 내가 미친 사람처럼 춤추고 노래하며 욕설을 해대자 큰일 났다고 생각하셔서 의사를 불러 진정제를 놓은 다음 병원으로 옮긴 거였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미쳐서 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자 시끄러운 소리에 동네 사람들이 구경 왔었는데 남편은 대문 문턱에 자전거를 가져다 놓고는 거기에 턱~ 하니 걸터앉아서 사람들에게


"저 여자가 바람이 났는데 이 남자하고 살아야 하나 저 남자하고 살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미쳤어요."


하고 말을 했다고 하니 지금 생각해도 정말 정이 떨어지는 사람이다.


그렇게 나중에 병원에서 정신을 차리고는 정말 남편이 사람으로 안보이고 짐승처럼만 보였는데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큰아들이 병원에서 깨어난 나에게 ‘미친놈의 아범’이 그리하더라고 말해주었으니 내가 부모로써 자식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 뒤로는 남편의 폭언과 폭행이 점점 심해졌고 동네에는 이제 바람피다 미친 여자라 매 맞는 게 당연한 것처럼 소문이 나며 정말 세상이 살기 싫어졌다.


그래서 이번엔 동네 약방에 가서 약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한걸음에 약방을 찾아간 내가


"쥐약 하나 주세요!"


하고 말하니 약방 안쪽에 딸린 방에 있던 약사가 문을 열고 나왔는데 약을 꺼내서 주려다 멈추고는 실컷 울어서 엉망이 내 얼굴을 쓱 보더니 말도 없이 약을 다시 진열장에 넣고는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약사 생각에도 잔뜩 울어 엉망이 된 내 얼굴이 심상치 않으니 쥐약을 팔면 필시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예상한 듯 했는데 난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약사가 쥐약을 진열장 어디에 놓는지 잘 보고 있다가 약사가 방으로 들어가자 재빨리 그 진열장으로 가서는 쥐약 값을 놓고 쥐약을 약사 몰래 훔쳐서 가지고 나왔다.


나는 그렇게 훔쳐 나온 쥐약 병을 들고 가다 집근처 밭에서 모두 마셔버리고는 빈 쥐약 병은 밭에다 던져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으로 돌아가자 급격히 어지러워져 자리에 누워서는 아들과 딸들을 불러다 놓고 말했다.


"엄마가 어디 좀 갔다 올지 모르니까 만약 엄마가 없어도 너희들 공부 잘하고 엄마 없다고 울고 짜고 다니지 말고 있어. 엄마가 항상 너희들 공부 잘하나 못하나 볼 거야!"


라고 했는데 이때쯤 되니 쥐약이 퍼지면서 위장을 마치 철수세미로 긁어대는 것처럼 쓰리고 아픈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고통 속에서 스르르 잠이 왔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모진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결국 또다시 깨어보니 병원 이었는데 내가 쥐약 병을 가져간 것을 안 약사가 동네 사람이니 어디 사는 줄 알고 우리집까지 쫒아온 덕에 제 때 병원에 실려 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거기에 또 기막힌 우연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때 마침 나를 택시에 태워 병원에 보내려고 잡은 택시 기사가 예전에 내가 운수 사업을 할 때 내 밑에서 택시 운전사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내가 목숨이 위험한 것을 알고는 정말 자신이 갈수 있는 한 제일 빠른 속력과 제일 빠른 길을 골라가며 병원까지 데려다 주었고 덕분에 늦지 않게 위세척을 해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렇게 병원에서 깨고 나니 목안으로 연결된 호스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물이 들어가는 호스고 하나는 물이 나가는 호스였다. 그런데 당시 장비가 열악한 탓인지 아니면 제대로 결속이 안 된 것인지 밖으로 물을 빼내는 호스에서 물이 내 머리 쪽으로 흘러서 나는 머리가 다 젖어 엉망이었다.


당시 병원에는 직원이나 의사도 많고 오가는 사람도 많았는데 누가 좀 나를 보고 고쳐줬으면 하는 내 바램에도 누구하나 방치된 나를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남편이 병원 한쪽에서 또다시 내가 바람을 피다 걸려서 자살하려고 했다며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남편의 이야기만 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딴에는 내가 죽으려고 까지 했으니 자기변명을 위해 했을 테지만 사람이 죽을 뻔 했는데도 그런 식으로만 이야기 하고 있으니 꼼짝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정신만 멀쩡하여 그 말을 모두 듣고 있던 나로서는 복장이 터지는 일이었다.


내 억울함은 하나도 치유되지 않았지만 병원에서는 위세척 외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퇴원을 하게 되었다. 물론 억울한 모함에다 남편의 학대를 받는 것이 너무 힘들어 자살시도까지 했던 내가 제대로 일상에 적응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지난번에 택시로 교통사고를 내었던 벌금이 날아왔는데 당시 돈으로 2만원 정도였다. 작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돈을 어떻게 융통하면 될 만한 금액이었는데 나는 일부러 그 벌금을 내지 않았다.


세상이 너무 살기 힘들고 괴로워서 차라리 감옥에 가면 편히 쉬고 나을 것 같아 그랬는데 어느 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도중 경찰관 둘이 오더니 나보고 나오라고 했다. 그들의 지시대로 부엌을 나가니 대뜸 나보고 벌금이 있는걸 아냐고 물었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한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안다고 말했고 이에 그들은 같이 경찰서를 가자고 했다.


이미 마음의 결심을 하고 있던 나는 곧장 그 경찰들을 따라나섰는데 그들은 경찰서에 도착 하자마자 바로 나를 구치소로 집어넣었다. 그리곤 죄수들이 입는 수형복까지 입고 3일을 살았는데 또 큰아들이 가서 이야기 한 건지 우리 어머니가 그곳을 찾아오셨다.


그리고는 내가 3일간 머무른 금액을 제외한 나머지 벌금의 금액을 지불하시고 나를 빼내 주셨는데 결국 그 상황이 되어서도 나를 한번 찾아와 보지 않던 남편과는 그 뒤 이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남편은 전과 다르게 여자가 생겨 바람을 피는 중이라 내가 이혼을 하자고 하자 냉큼 하겠다고 나섰는데 대신 아이들은 시댁에서 키울 테니 나에게 위자료는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까짓 돈 없어도 된다고 말하고는 이혼을 했는데 돈 한 푼 없이 나와서 살게 되었어도 오히려 그 징그러운 인간을 안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이혼을 하게 되어 집을 나오면서 아이들에게 약속하기를


"엄마가 1년만 가서 돈을 벌면 너희들 다섯을 다 데리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든지 참고 공부 잘 하고 있거라."


하고 말했는데 아이들이 어찌나 울어 재끼는지 집에서 나오는 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거기다 막상 집을 나서긴 했지만 딱히 무엇을 할 것이라고 정해 놓은 것도 아니고 돈도 한 푼 없었고.


결국 이번에도 믿고 의지할 사람은 우리 어머니 밖에 없어 친정어머니를 찾아 가서 말했다.


"어머니 나 못살겠어서 서울로 가려는데 돈이 하나도 없어요. 어머니 돈 좀 있어요?"


하고 말했더니 어머니가


"나한테 돈 하나도 없다. 딱 쌀 한 말 값있다."


하시더니 장롱속 주머니에서 당시 쌀 한말 값 정도 되는 쌈짓돈을 주섬주섬 꺼내 주셨다.


시골 노인인 어머니에게 그 돈은 한동안 모아놓았을 적지 않은 돈 이었지만 반대로 내가 그 돈만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 살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돈 이기도 했다. 이에 나는 방도를 찾기 시작했는데 마침 해순이 엄마에게 생각이 닿았다.


그녀는 내가 예전에 시장에 방을 얻어 살 때 형편이 어려워 내가 밥도 내어 주고 당시 하고 있던 곗돈도 2번으로 타게 해주며 챙겨줬던 사람인데 그 후로 곗돈을 착실히 모아 목돈이 생기자 안면도로 돈을 벌러 갔었더랬다.


그 돈을 가지고 안면도로 옷 장사를 하러 간 것인데 제법 장사가 잘되어 돈을 좀 벌었다는 이야기를 동네사람에게 들었었고. 그 상황에서 마땅히 손을 벌릴만한 곳이 없던 나는 그이가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야기만 듣고 그렇게 안면도로 찾아갔다. 정말 주소도 모르고 연락도 한동안 안하고 있었는데 아예 안면도에 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간 것이다.


그래도 용케 그녀를 찾는 데는 성공했는데 오랜만에 본 해순이 엄마가 무척이나 반갑고 대화를 나누는 게 기쁘기까지 했지만 차마 돈을 빌리러 왔고 내가 죽을 생각까지 할 만큼 힘들었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아주 어렵게


"언니 내가 장사 좀 하려는데 나 돈 좀 빌려줘"


하고 말을 했는데 해순이 엄마가


"나한테 있는 돈이 전부 이거야"


하더니 너무나 흔쾌히 당시 돈으로 커다란 가게 가격의 절반쯤 되는 돈이 들어 있는 통장을 내주었다. 나는 그동안 연락도 제대로 못하고 염치없이 오랜만에 와서는 돈이나 빌려달라고 했는데 해순이 엄마가 너무 흔쾌히 돈을 내주자 너무 고마워서 그 자리에서 펑펑 울어버렸다.


그리곤 해순이 엄마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그 돈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는데 막연히 장사를 하려면 서울에서 해야 된다는 생각에 서울로 올라간 거였다. 물론 마땅히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닌데다 막상 뭘 해야 될지가 막막했다.


그러다 그나마 알고 지내던 동네 친구가 서울에서 살고 있는 것이 생각나 그곳을 찾아가


"요즘 뭐 장사 할만한 것 좀 없어?"


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글쎄 내가 뭐 아는 거 있나? 한번 알아보지 뭐."


하고 대답했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그이는 그렇게 장사 같은 건 잘 모르니 남편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 친구의 남편이 슬그머니 자기 동생이 하던 사업을 나보고 인수하라고 권했다.


그때 그 사업이란 것은 지금 흔히 캬바레라 불리는 것과 비슷한 사업으로 당시에는 맥주 싸롱이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미도홀' 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그 가게는 장사가 안 되어 세금을 내지 못했고 그 밀린 세금만 점포 가격의 반에 이르는 완전 망해버린 가게 였는데 친구의 남편이 말하길 동생이 장사 수완이 없어 가게 형편이 어렵지만 아마 나라면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사업을 인수하라고 했었다.


나는 당시 아무 생각 없이 정말 그 사람의 동생이 장사 수완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그 사업을 인수하기로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세금도 못 낼 정도로 완전 망해버린 가게를 이혼까지 해서 갈 곳도 없는 내게 넘긴 그 친구 남편이나 그것을 알고도 말리지 않은 친구나 그리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래도 밀린 세금이 점포 가격의 반에 이르니 나머지 반 가격만 주고 반은 내가 밀린 세금을 인수해 처리하는 것으로 했는데 내가 해순이 엄마에게 얼마를 가져왔다고 했더니 딱 그 돈 전체를 점포가격의 반이라며 요구해서 그 돈을 몽땅 털어주었다.


그렇게 가게를 인수해 찾아갔더니 내게 남은 것은 어머니가 챙겨주신 쌀 한말 값밖에 남지 않았는데 새로 개업을 했으면 개업 떡을 해야 한다는 친구 부부의 말에 그 돈 마저 몽땅 떡값으로 들어갔다.


그 후 저녁이 되어 슬슬 가게가 장사할 준비를 시작하는데 갑자기 지배인이라는 덩치도 좋고 나보다 나이도 많은 남자가 와서는


"사장님, 물건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해요? 물건을 해 와야 장사를 할 텐데요?"


하는데 나는 예전 운수 사업을 할 때가 생각나 종업원들에게 기가 눌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반말로


"돈 없으면 장사 못하나?"


하고 톡 쏘아 붙였다. 내 말을 예상하지 못한 지배인은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네! 알겠습니다 사장님!"


하고는 기존에 거래를 하고 있던 업체들에 연락해서 물건을 외상으로 땡겨 왔는데 사장이 바뀌어서 자신의 자리가 위태롭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주 능력껏 물건을 그득그득 땡겨 왔다.


심지어 친구 부부는 가게에 물건조차 하나도 없는 상태로 만들어 내게 넘긴 것 이었는데 당시 그 물건 가격만 해도 상당했었다는 것을 기억해 보면 정말 그 사업을 인수한 것 자체만 따져보면 일종의 사기를 당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일단 개업 떡을 돌리고 사장이 어리버리한 여자로 바뀌었다는 소문이 나서인지 그날부터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다행히 그날 번 돈으로 그날 외상값을 모두 갚고 그 다음날 장사할 물건 값까지 나왔다.


결국 망해가던 가게가 내가 인수 하자마자 첫날부터 장사가 잘된 셈인데 그 당시까지도 처음 시집갈 때 동네 사람들이 해줬던 낡은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있는 내가 커다란 맥주싸롱을 운영하자 어리버리한 나를 꾀어 그럴듯한 맥주싸롱을 차지하려는 사기꾼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이것저것 많은 사업도 해보고 장사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그리 어리숙하지 않아서 그때가 기회다 싶어 자기가 잘나가는 사업가인척 하는 사기꾼들에게는 일부러 바가지를 퍽퍽! 씌웠다.


남자종업원만 열댓 명에 연주를 하는 7인조 밴드까지 있는 그럴싸한 맥주싸롱이었으니 어리숙한 나를 차지해 가게를 빼앗고자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었고. 난 그런 사람들에게 퍽퍽! 바가지를 씌워대니 가게는 날로 흑자가 늘어갔는데 정작 사장인 나는 그동안 밀린 세금 낼 돈도 모아야 하고 큰돈을 흔쾌히 빌려준 해순이 엄마에게 돈도 갚아야 해서 방 한 칸 구할 돈이 없어 장사가 끝난 가게 한 구석에서 잠을 잤다.


당시는 자가용이 무척 드물 때였는데 워낙 사람들이 많이 오고 다시 그 덕분에 우리 맥주 싸롱에 대한 소문이 나다 보니 우리 가게 앞에는 그 드문 자가용들이 쭈욱~ 나래비를 서게 될 정도였다.


거기다 사기꾼 녀석들이 어떻게든 나를 꾀어내려고 하자 거기에 휘말린 정말 잘나가는 사람들도 내가 대단한 사람인줄 알고 나를 꼬시려고 하는데 나는 절대로 그들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는 바가지를 푹푹 씌웠다.


덕분에 좀 여유가 생겨 두어달 만에 아이들이 잘 있는지 집을 한번 가보았는데 놀랍게도 아이들이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기운을 못 차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는데 아이들이 말하길 내 전 남편이라는 사람이 아이들 밥 먹는 것조차 제대로 신경을 안 써 집에 먹을 게 없어 아이들이 쫄쫄 굶고 있었던 거였다.


비실대면서도


"엄마! 엄마!!"


하고 달려드는 아이들은 볼이 쑥 들어가고 눈이 퀭했는데 하루 이틀을 제대로 못 먹은게 아니라 아예 내가 집을 나가고 나서는 제대로 밥을 챙겨 먹은 적이 더 드물다고 했다.


당시 우리집에 살며 아이들 밥도 챙겨주고 살림도 거들던 내 이종사촌 동생 기숙이는 당연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그 아이마저 없으니 남편은 물론이고 같이 살던 시댁 식구 누구하나 아이들 밥 먹는 것을 챙겨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도대체 어떻게 버텼냐고 물으니 당시 여섯 살 먹은 딸아이가 말하길 너무 배가 고파 한번은 오빠와 언니들이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자 그나마 나이 먹은 아이들이 먹을 걸 좀 더 챙겨줘서 힘이 있던 그 아이가 20리길을 걸어 남편이 장사하는 데를 찾아 갔다고 했다.


그렇게 거기에 가서는 집에 먹을 게 없어 오빠와 언니들이 다 죽어 간다고 하니 내 전 남편이라는 사람이 국수집에 가서 국수 한관을 사서는 아이에게 주곤 가서 먹으라고 했다고 한다.


말이 쉬워 한관이지 지금으로 따지면 4키로 정도 되는 묵직한 마른 국수를 그 여섯 살짜리에게 그냥 주고는 집에 가서 먹으라고 했으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행동이었다.


하다못해 택시 값이 비싸 못 태웠으면 그가 일하던 시장에서 배달하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 사람들 자전거에라도 아이를 태워 보내야지 20리나 되는 길을 그 여섯살 아이보고 4키로에 달하는 국수를 가지고 가게 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결국 아이는 집에서 굶고 있는 언니 오빠 동생을 위해 결국 그 국수 한관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는데 집에 오다가 몇 번이나 쉬었다가 이고, 지고 갖은 방법을 써가며 땀이 범벅이 되어 돌아왔다고 했다.


그렇게 집에 간신히 도착해 물을 끓여 국수를 넣고 삶아 배고파 움직이지도 못하는 형제들을 먹인 덕에 아이들이 살아났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억장이 무너졌다.


애초에 바람이 나서 나와 이혼을 결심한 남편이었기에 아예 집에는 들어올 생각조차 안하고 장사를 마치면 그 여자랑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같이 사는 시댁식구들 조차 아이들을 그렇게 방치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미 남편이 한번 사줬다는 국수 한관은 다 먹은지 오래고 다시 그저 굶고만 있던 아이들 이었기에 나는 얼른 먹을 것부터 사다가 해주었는데 마치 음식 이라는 걸 처음 본 사람들처럼 달려들어 먹는 아이들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아이들은 그렇게 오랜만에 배부르게 먹자 기운이 좀 나는지 엄마를 따라가면 안 되느냐고 나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는데 아직 제대로 된 방 한 칸 없이 가게 한구석에서 잠을 자던 내가 아이들을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안타까워도 어쩔 수 없이 일단 내가 종종 들르다가 집을 구하는 데로 데려가겠다고 했는데 아이들은 또다시 굶을 일도 서럽고 엄마와 헤어지는 것도 서러운지 무척이나 울었다.


그렇게 내가 다시 집을 나서려고 하자 아직 어린 막내 딸아이 하나는 맨발로 쫒아 나와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내 치마를 붙들고 우는데 내가 그런 막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꼭 금방 데려간다는 말뿐이었다.


정말 간신히 아이들을 떼어놓고 집을 나서는데 눈물이 어찌나 쏟아지는지 한참 걷다보니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여서 나는 아예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박복한 내 인생과 불쌍한 아이들을 생각하며 한동안 펑펑 울었다.


그 후 가게로 돌아와서는 아이들을 데려올 욕심에 나에게 추근대는 사기꾼들에게는 더 퍽퍽! 바가지를 씌웠는데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그런 사람들이 꾸준히 가게를 찾아왔다. 결국 다시 한 달쯤 지나자 장사는 완전히 궤도에 들었는데 이미 동네에선 우리 가게가 제법 유명해져 있었다.


나는 그렇게 정말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모았지만 가게에 밀려 있는 세금도 내야 되고 물건 값도 줘야 하고 해순이 엄마에게 빌린 돈도 갚아야 하다 보니 돈이 원하는 만큼 쉽게 모이질 않았다. 그래도 한번 아이들이 굶고 있던 모습을 보고나니 걱정이 되어 그 뒤로는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꼭 아이들을 찾아갔다.


일단 내가 음식을 잔뜩 장만해서 찾아 가는데다 가기만 하면 쌀도 마련해 놓으니 내가 한번 왔다 가면 다들 배는 곯지 않았는데 그러다 내가 마련해준 식량이 떨어지면 알아서 사다 먹으라고 아이들에게 얼마간의 돈도 쥐어주고 왔다.


그래도 워낙 장사가 잘 되어 조금씩이나마 돈이 모이고 있었기에 아이들하고 약속한 일 년이 되면 같이 살 집 정도는 전세로 마련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내가 그렇게 집을 나온지 육 개월쯤 되었을 때 다시 집을 가보니 갑자기 또 아이들이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분명 먹을 것도 사다두고 아이들에게 돈도 주고 왔는데 아이들이 굶고 있어 어찌된 일인지를 묻자 아이들이 말하길 시아버지나 시동생들이 집에 음식이 없을 때는 자기들은 어떻게든 밖에서 얻어 먹고 오거나 했는데 내가 아이들 먹으라고 집에 식량을 사다 놓으니 다들 남의 집에서 얻어먹지 않고 집에서 밥을 먹게 되면서 식량이 금세 동이 났다고 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얼마간 준 돈도 있지만 그 돈으로 산 식량 역시 아이들만 이라면 버틸만한 양임에도 온가족이 달려들어 식량을 축내니 금세 떨어져 버렸고. 그러자 황당하게도 다시 어른들은 밖에서 얻어먹고 오는 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집에 있는 아이들만 쫄쫄 굶고 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시댁 식구들의 무능함에 치가 떨리고 아이들이 배를 곯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억장이 무너졌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날로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왔다.


물론 당장 잘 곳이 없으니 가게로 데려 오긴 했지만 아이들이 머물만한 환경도 아니고 잘 곳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부동산에 찾아가 내가 가진 돈으로 구할수 있는 전세가 있냐고 물었는데 부동산에서 서대문에 있는 낡은 전셋집 하나를 소개해줬다.


나는 따로 조건을 잴 형편도 아니라 곧장 그 집을 전세로 계약했는데 비만 오면 물이 새는 정말 오막살이 같은 집이었다.


그렇게 일단 집은 구했어도 내가 일을 하면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다시 이종사촌 기숙이에게 우리집에서 아이들을 돌봐주며 같이 살지 않겠느냐고 물어봤더니 그 고마운 아이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책장사가 잘 될 때는 기숙이에게 월급이라고 돈도 조금씩 챙겨줬는데 남편에게 맞은 후로 두 달을 움직이지 못하니 책장사는 포기해버려 한동안 기숙이에게 월급을 주기는커녕 집에 먹을 게 없어 같이 굶기 까지 했었다.


나만 믿고 온 아이를 굶기는 상황이 되자 미안해진 내가 집으로 돌려보냈던 것인데 그 아이는 내가 쥐약을 먹는 일 등은 보지 못했지만 마치 내 친자매 마냥 내가 얼마나 힘들지 잘 안다며 기꺼이 나를 돕겠다고 나섰다. 나는 그런 식으로 말 해주는 기숙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고.


그래도 기숙이가 아이들을 돌봐준 덕분에 나는 열심히 일만 할 수 있었는데 가게와 집이 너무 멀어 늦게 까지 장사해야 하는 나는 여전히 집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가게 한구석에서 잠을 잤다.


그나마 꼬박꼬박 집에 돈을 가져다주는 것은 잊지 않았기에 착한 기숙이가 나 대신 우리 아이들을 엄마처럼 돌봐주었고. 기숙이가 아이들 밥도 해먹이고 아이들 학교 도시락도 싸주고 정말 많은 일을 해주었는데 나는 그 아이가 너무 고마워 다시 내가 번 돈에서 얼마간을 기숙이 월급으로 챙겨주었다.


물론 아이들을 데리고 오고 나서는 삶이 더 팍팍해졌는데 이제는 가게의 밀린 세금과 매번 줘야 하는 물건 값, 거기다 해숙이 엄마에게 빌린 돈에 더해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돈과 기숙이 월급까지 챙겨줘야 했기에 그전에 비해 돈이 몇 배로 필요했던것이다.


반면 이제 슬슬 내가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게 소문이 나서 바가지를 씌울 수 있는 사기꾼 손님들은 조금씩 줄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날 우리 가게에 맥주를 납품하는 맥주 대리점 사장 최씨가 직원들이 바빠서 대신 왔다는 핑계를 대고 우리 가게에 한번 와서 나를 보더니 그 뒤로는 아주 우리 가게의 단골이 되어 가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나에게 완전 미친 사람처럼 굴었는데 부인도 있고 아이도 아들하나 딸 하나 둘이나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어떻게든 나를 꼬시려고 안간힘을 썼다.


심지어 지배인이나 밴드맴버들, 그리고 웨이터들까지 모두에게 돈을 물 쓰듯이 해서 자기편을 만들고서는 나를 꼬시기 위해 술을 먹이려고 했는데 나는 본래가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라 어떻게든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최씨에게 포섭된 직원들이


"사장님이 잠깐이라도 앉아서 인사라도 하고 가야 매상을 많이 올려주신데요"


"사장님! 가만히 가서 잠깐 앉아서 인사만 하고 나오면 되는데 왜 못하세요?"


하며 나를 어떻게든 최씨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앉혀 두려 했다. 슬슬 손님이 줄고 살림이 팍팍해 지기 시작한 나는 그들의 말과 매상을 올려볼 욕심에 그냥 앉아 있다만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앉아서 대화를 잠깐 나누었고.


그러자 최씨는 나에게 어떻게든 술을 먹이려 했는데 내가 술을 한잔이라도 받아야 비싼 안주를 시켜 매상을 올려준다는 식이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사장님이 왔으니까 제일 비싼 안주 가져와!!"


하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몇십만원은 하는 안주를 덥석 덥석 시키니 형편이 어려워 지던 나로서는 잠깐 앉아 있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거기다 비싼 술까지 시켜 한잔만 하라고 권하면 또 술 한잔을 안 받을 수도 없었고.


덕분에 술이 약한 나는 금세 취해 알쏭달쏭한 기분이 되어 쓰러져 버렸다. 그러자 최씨가 직원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어디 호텔로 데려다 주라는 소리를 했는데 나는 처음엔 내가 취했으니까 잘 곳으로 데려다 주는 구나하고 따라갔다.


그런데 막상 호텔에 들어가고 나니 취한 와중에도 최씨가 그 호텔로 따라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그 호텔을 빠져나와 다른 호텔로 도망을 갔다.

심지어 그것도 한번으로 끝난 게 아니라 그렇게 간신히 두 번 정도 위기를 모면했는데 어느 날 또 최씨가 가게로 와서는 비싼 안주와 술을 잔뜩 시켜놓고 나와 이야기 좀 하자며 붙들고 늘어졌다.


우리 가게의 가장 큰 손님 중 하나인 최씨 이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날도 술기운이 조금 올라올 정도로 술을 받아 마셨다.


정말 최대한 거절하면서 한두모금만 먹은 것 만으로도 술기운이 올라왔던 건데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최씨가 나에게 자꾸만 이야기를 시켰더랬다. 나는 결국 별 것도 아닌 주제로 한참을 이야기 하다 어느새 가게의 끝날 시간이 다된 것을 알고는 최씨에게 말했다.


"아이구 열두시가 다되었어요. 우리 문 닫아야 하니까 어서 가세요! 얘들아!! 문 닫아야지!!"


당시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을 때라 아무리 늦게까지 해도 가게를 12시 전에는 닫았기에 통행금지에 걸린 직원들이 퇴근하지 못할까봐 걱정 된 나는 얼른 정리 하고 보내려고 직원들을 불러 댔는데 내가 아무리 불러도 그 많은 직원 중 누구하나 오지를 않았다.


당시 테이블 주변은 사람 키 정도 되는 칸막이가 달린 소파가 놓여 있었는데 내가 술이 조금 취해 알쏭달쏭한 기분이 되는 바람에 미처 그 칸막이 너머에서 다른 직원들이 모두 퇴근해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모두 다 퇴근해 버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현관의 자물쇠를 채우기 위해 가지고 나왔는데 이상하게 최씨 역시 그때까지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이제 가게 문 잠궈야 하니까 어서 가세요. 곧 통금시간이에요."


"그래 가야지 가.."


내가 최씨가 나가면 현관문 안쪽에 자물쇠를 채우려고 들어 올리자 최씨가 갑자기 내가 들고 있던 자물쇠를 확! 뺏어서는 자기는 나가지도 않고 가게 문을 안에서 잠궈 버렸다. 나는 순간 먹었던 술이 확 깨며 얼마나 무서운지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최씨가 나를 와락 붙잡으려 들었다.


당시의 나는 비록 아이가 다섯이나 있었지만 워낙 시집을 일찍 간 탓에 나이가 서른셋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 그래도 젊은 혈기가 있으니 최씨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술이 불콰하게 취한 최씨는 그런 나를 쉽사리 잡지 못했고.


나는 심지어 어떻게든 도망가기 위해 테이블을 밟고 소파 뒤에 서있는 사람 키만한 칸막이까지 밟아가며 겅중 겅중 뛰어 다녔는데 그렇게 가게 안을 계속 해서 빙글 빙글 돌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날래게 도망 다니니 최씨 역시 나를 쉽게 붙잡진 못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를 쫓아 왔고. 결국 서너 시간쯤 그렇게 도망을 다니자 뛰어 다니느라 기력이 빠진 내가 지쳐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최씨에게 내 몸을 강탈당하고 말았다. 지금 같으면 당연히 고소할만한 일이었지만 그 옛날 당시에는 남자한테 몸을 주게 되면 같이 살아야 되는 줄만 알았다.


결국 최씨는 마누라와 자식이 있는 대도 그 뒤로 우리 가게에 와서는 내 서방 행세를 하고 나를 걸핏하면 호텔등으로 불러내었는데 바보 같은 나는 더 이상은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끌려 다녔다.


나중에 알아보니 그날 다른 직원들은 모두 최씨가 미리 돈을 주고 집으로 일찍들 들어가게 한 것 이었는데 나를 배신한 직원들에게 배신감도 크게 느끼고 맥주대리점을 하는 최씨가 시내에 나가서 장사를 하면 더 크게 돈을 벌 수 있다고 나를 설득하니 나는 결국 '미도홀' 이라는 가게에 정이 떨어져 기존의 가게를 팔고 시내인 신촌의 가게 하나를 다시 얻었다.


그렇게 새로 얻은 가게는 크기 자체는 '미도홀'보다 크지 않았지만 시내에 있는 맥주싸롱이라 가격은 훨씬 더 비싸게 받았는데 신촌에 있던 그 가게의 이름은 '황제싸롱' 이었다.


나는 기존 직원들에게 너무 배신감을 크게 느껴 단 한명도 새 가게로 데려가지 않고 모든 직원들을 새로 뽑았는데 그나마 신촌에 새로 얻은 가게는 집하고 조금 더 가까워 이제는 혼자 가게에 남아 있는 것도 무서우니 일이 끝나면 서대문의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걸어서 돌아갔다.


다만 장사라는 게 본래 내가 원할 때 문을 닫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손님이 있으면 그 마지막 손님이 갈 때까지는 문을 열고 있어야 하는 법이라 종종 통금이 다되어서야 문을 닫게 되었는데 나는 신촌의 '황제싸롱'에서 만큼은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집에 걸어서 가려고 노력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장사가 늦게 끝나 결국 통금을 단속하는 순경에게 걸리고 말았는데 순경이 나보고 경찰서로 가자고 하는 걸 집에 어린아이들 다섯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고 꼭 집에 가야한다고 제발 봐달라고 사정 사정을 했다.


한데 그 순경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어서 내가 아무리 사정해도 쉽게 보내주지를 않았는데 나는 포기 하지 않고 집에 아주 어린 갓난쟁이도 있어서 꼭 가야된다고 애원을 했다.


그랬더니 순경이 말하길 그럼 집을 같이 가서 아이들이 다섯이나 있지 않으면 경찰서로 가자고 하더니 나를 앞세우고는 내 뒤를 따라 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곳에서 우리집까지눈 제법 거리가 있었는데도 끝까지 따라온 것이다.


결국 집에 도착하자 아이들이 다섯인 것은 맞지만 사실 순경에게 말한 것처럼 갓난쟁이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슬쩍 걱정되긴 했는데 일단 나는 도착 하자마자 아이들부터 불렀다.


"얘들아 엄마 왔다!"


당시 우리가 살던 그 집은 비가 줄줄 새는 집이니 당연히 우풍이 세서 아이들 역시 많이 추웠는지 항상 낡은 담요를 덮고 있었는데 엄마가 왔다는 소리에 아이들이 그 낡은 담요를 뒤집어쓴 채 우르르 몰려와 문을 여니 순경이 그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푹~ 쉬고는 그냥 돌아갔다.


"엄마~~"


내가 봐도 안쓰러울 만큼 낡은 담요를 다함께 둘둘 말고 있는 아이들은 정말 짠한 모습이었는데 그중 한 녀석은 감기가 들렸는지 누런 콧물까지 흘리고 있어서 말문이 턱 막히는 광경이었다.


물론 내가 돈을 벌게 되면서 아이들을 못 먹이지 않고 못 입히진 않았지만 상황이 공교롭게도 그렇게 불쌍해 보일만 했던 것이다. 결국 그날은 무사히 넘어갔는데 항상 통금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멀쩡한 손님들도 술을 먹으면 진상을 부리지만 정말 깡패 같은 사람들이 술을 먹으면 집에 가지도 않고 돈도 안내려고 하며 온갖 진상을 부렸다.


신촌으로 가게를 옮기고 나서는 유독 가게에 깡패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한번은 깡패 녀석 하나가 비싼 술이며 안주를 잔뜩 시켜먹고는 술값을 못 내겠다고 버티기 시작했다. 심지어 직원들이 점잖게 말하는데도 욕을 하며 난동을 부리자 결국 내가 나섰다.


"아니 술을 먹었으면 돈을 내야지 어디서 행패질이야!"


내가 호되게 야단을 쳤더니 이 깡패 녀석이 눈을 희번덕거리더니


"에이썅!! 어디서 주둥이를 나불대"


하고는 유리창 하나를 주먹으로 팡! 하고 내리쳐 깨버리고 그 깨진 유리조각을 집어 들며 소리쳤다.


"죽고 싶어??"


그렇게 그 깡패 녀석은 날카로운 유리조각을 내 쪽으로 들이밀며 협박을 하기 시작했는데 녀석이 먹은 비싼 술과 안주면 우리 아이들 학비를 낼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순순히 물러 설수는 없었다.


"오냐 찌를테면 찔러라! 나는 단독일신으로 잃을게 아무것도 없지만 네가 만약 나를 찔러 죽이면 너는 인생 망가지는 거야!"


나는 겁이나 금세라도 다리가 풀릴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녀석에게 꼿꼿하게 대들었는데 내가 그렇게 나가자 녀석도 결국 나를 찌르지는 못하고


"가까이 오면 찌를 거야!!"


하면서 소리만 쳤다. 나는 이에 아예 녀석에게 더 가까이 가며


"찔러!! 찌르고 감옥에서 평생 썩어봐라 어디!!“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녀석이


"뭐 이런 여자가 다있어!! 에이씨!"


하더니 유리 조각을 내버리고 나를 밀친다음 도망가려 했다. 나는 거기서 물러나지 않고 기어코 도망가는 녀석을 붙잡고 늘어지며 악을 썼다.


"어딜 가 이놈아!! 돈 내고 가 돈!! 먹었으면 돈을 내고 가야지!!!“


내가 그렇게 큰길까지 쫓아가며 악다구니를 써대자 결국 녀석은 창피했는지 내게 항복하고 말았다.


"아이고 아주머니! 이제 그만좀 해요 그만! 여기 돈 있어요!!"


결국 나는 녀석에게서 술값에 안주 값 그리고 유리창 값까지 톡톡히 받아냈고.


그러나 그때 한번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받아냈다고 해서 항상 그런 식으로 돈을 받아내는 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아예 질이 더 나쁜 깡패 녀석들은 남자 종업원들을 두들겨 패서 쫒아 오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내빼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맞아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종업원이 있으면 다친 종업원을 돌보느라 그 깡패 녀석들을 쫓아갈 겨를이 없었고. 신촌은 아무래도 시내다 보니 그런 깡패들 뿐만 아니라 제법 높은 사람들도 많이 찾아왔는데 정말 별의별 손님이 다 있었다.


가끔은 고위 공무원부터 정치인들까지도 찾아왔는데 하루는 어떤 남자 세명이 오더니 가게에서 가장 비싼 술을 시키고는 그중 하나가 나와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내가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그 사람이 말하길 자기는 김영삼 동생인데 자기 애인을 하면 자기가 뒤를 봐줘서 크게 성공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단호히 거절을 하며 돈으로 내 자신을 팔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그 말이 더 남자를 자극했는지 남자가 말하길 그럼 일단 오늘 하루만 자기와 함께 보내면 그 자리에서 1억원짜리 수표를 써준다고 했다. 당시의 1억이면 지금의 10억 가치도 훨씬 넘는 큰돈이었고.


그러나 나는 역시나 더 듣지도 않고 거절해 버렸다. 그러자 남자가 이번에는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자기 형이 김영삼이니 자기 애인을 하면 형이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뒤를 봐주어 큰 부자를 만들어 줄 테지만 거절하면 아예 장사를 못하게 하겠다는 엄포였는데 나는 아예 콧방귀를 뀌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그러자 남자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다른 일행 두 명이 나를 강제로 자리에 앉히려고 했는데 나는 재빨리 종업원들을 불렀다. 그렇게 남자종업원 네댓명이 몰려오자 결국 내 어깨를 잡고 있던 녀석들도 나를 놓을 수 밖에 없었고. 한데 그러고 나서도 남자는 끈질기게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그런 남자를 쫓아내기 위해 아예 가게 문을 닫겠다고 했는데 기어코 가게 셔터를 내릴 때까지도 남자는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아예 확실히 하기 위해 이번엔 택시까지 타고 집으로 향했는데 남자들은 심지어 자가용을 타고 내가 탄 택시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 근처 사거리 까지도 자가용이 쫓아오자 나는 결국 택시를 멈추게 했는데 자가용이 척! 하니 택시 앞을 가로막으며 멈춰섰다. 그리곤 내가 택시에서 내리자 자가용에서도 남자가 내렸는데 나는 남자에게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집에 애가 다섯이나 있는 여자야!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따라와!! 김영삼 동생이 아니라 김영삼이가 와도 나는 애인할 생각 없으니까 빨리 꺼져!! 당장 안가!!!"


내가 그렇게 악다구니를 쓰자 남자는 표정이 허옇게 질리더니 결국 다시 차를 타고 가버렸고 나는 집까지 무사히 택시를 타고 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김영삼은 동생이 없다고 했으니 그 남자의 정체는 아직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유명 정치인의 가족을 사칭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실제로 당시 제법 힘 좀 쓰던 정치인들이나 고위 공무원들이 오곤 했으므로 나를 강탈한 뒤 마치 내 서방인양 행세하던 최씨는 높은 사람들에게 나를 뺏길까 두려워 경쟁이 치열한 시내보다 조금 한적한데서 하는 게 벌이가 낫다는 말로 나를 꼬시기 시작했다.


지금은 남의 말을 거의 듣지 않는 편이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아직 어렸고 신촌의 '황제싸롱'을 할 때에는 깡패들이 너무 많이 와 시달린 통에 그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고.


결국 신촌에서 장사한 것을 모은 돈과 가게를 팔고난 돈을 합하니 이전에 해순이 엄마에게 빌린 돈은 다 갚고 장위동에 작은 가게를 마련할 정도가 되었다. 덕분에 집도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비가 줄줄 새는 집에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다.


그렇게 전세금을 빼고 남은 돈을 합하니 당시 돈으로 400만원 정도가 되어 2년짜리 전세 집을 계약했는데 건물도 낡고 그리 좋은 집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우리가 살던 비가 줄줄 새는 오막살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2년 계약으로 들어간 전셋집은 산지 일 년도 안 되어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린다고 하여 결국 계약기간을 채우지는 못했다.


장위동으로 이사한 가게의 이름은 당시의 큰 기업이었던 영진이라는 회사의 이름을 따서 '영진 싸롱'으로 지었는데 이사하고 처음엔 장사가 신통치 않았다. 덕분에 어떻게 가게는 유지하고 먹고 살만큼은 벌긴 했지만 전세 계약금을 올려주지는 못할 정도였다.


사실 당연하게도 당시엔 서울의 변두리였던 장위동으로 이사를 했으니 서울에서도 번화한 곳이던 신촌 시내에서 장사하던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는데 결국 나는 최씨에게 속아 넘어간걸 그제야 알았다.


아무튼 당시 전세금을 올려주지 못한 나는 다시 400만원을 들고 친하게 지내던 동네 부동산엘 찾아가서 이 돈으로 괜찮은 전셋집 좀 있냐고 물었는데 당시 부동산 할아버지가 전세는 마땅한 게 없으니 차라리 사는 게 어떻냐는 말을 했다.


이에 나는 깜짝 놀라서 아니 전셋집 구하기도 힘든 돈인데 어떻게 집을 사냐고 물었는데 부동산 할아버지가 말하길 집주인이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급매로 나온 물건이 있는데 방이 여러개 짜리라 방 몇개를 전세로 주면 오히려 대출을 좀 껴서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 집을 가보니 서대문에 있는 일본식 집이었는데 대지가 칠십 평 정도 되고 방이 아주 많은 곳으로 건물 자체의 면적은 백 평정도 되는 물건이었다. 당시의 매매가로는 1500만원 정도하는 물건이었는데 집은 크지만 정말 일제 강점기 때 지은 오래된 집이라 건물자체가 낡고 문제가 많았다.


그렇게 전셋집 구하기도 힘든 400만원이었지만 결국 부동산 할아버지 말대로 많은 방중에 몇 개를 전세로 내주고 은행에서 대출을 좀 받고 하니 정말 그 집을 살 수가 있었다. 당시 난생 처음 생긴 내 집이 어찌나 좋은지 나는 그 집을 쓸고 닦고 아주 광을 내었는데 너무 오래되고 낡은 집이라 아무리 청소를 해도 그리 티가 안 났다.


거기다 오래된 집이다 보니 수도와 전기는 항상 말썽이었는데 전세로 사는 사람들이 항상 그것에 대한 불편을 늘어놓고는 해서 나는 돈만 벌면 그것부터 꼭 고쳐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다.


사실 장위동에서 시작한 '영진싸롱'은 처음엔 장사가 잘 되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장사가 되기 시작했는데 가게 규모는 전에 비해 줄었지만 직원이 더 줄어든 탓에 내가 주방 일부터 직원들 밥 챙기는 것이나 청소까지 해야 해 일이 곱절로 늘었다.


그러나 나는 하루하루 부쩍부쩍 커가는 아이들을 위해 정말 쉬지 않고 바지런하게 움직이며 일을 했고 덕분에 새로 연 가게도 조금씩 이득이 남아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고된 일 덕에 나는 종종 아프기 시작했는데 그런 내게 동네에서 주사 아줌마를 소개시켜줬다.


얼마 전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주사 아줌마라 불리는 이는 당시에도 있었는데 당시의 주사 아줌마는 흔히 병원에서 볼수 있는 포도당 영양제등을 놓아주었다. 아무래도 병원까지 가는 것도 힘들고 병원은 비싸기도 하니 종종 동네 사람들이 그 아주머니를 통해 영양제를 맞는 모양이었는데 어느 날 내가 일이 너무 많아 지치고 힘들다고 은연 중 이야기 하자 동네 슈퍼 주인이 내게 그 아줌마를 소개 시켜줬었다.


당시 그 주사 아줌마가 진짜 포도당 주사만 놓은 것인지 아니면 특별한 무언가를 섞은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찌됐든 몸이 피곤해도 그 주사를 한번 맞고 나면 그래도 힘이 났기에 나도 그 아줌마가 우리 동네에 올 때면 종종 맞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 그녀의 발길이 뚝 하고 끊어졌다.


나는 여전히 인건비를 줄이고자 가게의 많은 잡일을 거의 혼자 처리 하고 있는 상황 이었고 이제 갚을 돈도 없으니 돈이 제법 모이기 시작했는데 한 일 년을 그렇게 죽어라 일만 하자 오백만원정도가 모였다.


그런데 그렇게 한동안 동네에 발길을 끊었던 주사 아줌마가 돌연 몇 달 만에 동네에 다시 방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힘들었는데 마침 잘되었다며 주사 좀 놓아 달라 했는데 주사 아줌마는 이제 자기는 주사 놓는 일을 안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왜 그 일을 안 하느냐고 물었는데 갑자기 주사아줌마가 나를 보며


"나 뭐 달라진 거 없어요?"


하고 말했다. 화장을 더 진하게 한 것인지 아니면 피부가 더 좋아진 것인지 일단은 얼굴이 전보다 허옇고 동글동글 하게 살이 오른 것 같아. 얼굴이 좋아 졌다는 식으로 말했더니 주사아줌마가 반색을 하며


"그렇죠? 얼굴이 좋아졌죠? 이게 다 지렁이 농사 때문이에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여자가 갑자기 무슨 소린가 했는데 주사 아줌마가 말하길 자기가 얼마 전부터 지렁이 농장이라는 것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자고 일어나면 돈이 늘어나니 얼굴이 안 좋아 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지렁이 농장이 무슨 돈이 되요? 누가 지렁이를 돈 주고 사는 사람이 있대요?“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해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고 말았는데 그게 잘못이었다. 그녀는 마치 미리 준비라도 한 것 마냥 지렁이 농장에 대해서 줄줄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대략 말을 요약하자면 모판 같은 곳에 지렁이를 잔뜩 길러서 두세 달이 지나면 지렁이의 양이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나는데 그럼 투자한 돈도 두 배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가장 핵심인 이 지렁이를 사는 사람은 바로 일본의 화장품 회사로 보통 여자들이 쓰는 립스틱에 이 지렁이가 원료로 들어가는데 일본에서 원하는 만큼의 원료를 구할 수가 없어서 우리나라 까지 와서 사가는 것으로 일단 지렁이를 키우기만 하면 무조건 다 그쪽에서 사가는 것으로 계약 까지 되어 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두세 달 만에 돈을 두 배 벌수 있는 일이면 자기 친척들부터 하게 했어야지 잘 알지도 못하는 내게 그걸 가르쳐 줄 수가 없는 것인데 당시의 나는 순진하게도 또 그것을 믿고 말았다.


나는 결국 그동안 열심히 모아놓은 돈 500만원에 대출 500만원을 더해 총 1000만원을 지렁이 농장에 투자했는데 실제로 지렁이 농장을 가보니 넓은 땅에 모판을 주욱 펼쳐놓고 거기다 지렁이를 잔뜩 기르면서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내게 분양된 것인지를 설명했는데 정말 그들의 설명처럼 두달 만에 지렁이 양이 두 배로 늘기는 했다.


그래서 나는 투자한 것의 두 배가 되었으니 일단 투자한 돈부터 빼기 위해 절반은 팔겠다고 했는데 웬걸 지렁이 농장 관리인의 말이 바뀌었다.


”아니 살 사람은 알아서 구하셔야지 그것까지 저희보고 구해달라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데 나는 그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일본 화장품회사가 물량이 부족해서 나오는 족족 다 수입 해 간다면서요?"


하고 되물었는데 농장 관리인이 말하길


"한동안 일본 화장품 회사가 사가긴 했지만 요즘은 도통 안와요. 나중에 일본 화장품 회사가 오면 이야기는 해줄 수 있지만 그 전까지는 알아서 파실 곳을 찾아야 합니다."


하는데 나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주사아줌마에게 전화를 걸어 닦달을 하기시작했는데 처음엔 주사아줌마가 말하길 일본화장품 회사가 곧 올지도 모르니 조금 더 기다려보라 말했다.


그러나 두어달이 더 지나도 일본 화장품 회사는 오지 않았고 지렁이 농장의 지렁이는 다시 두 배가 되었으며 농장의 관리인은 늘어난 지렁이를 핑계로 더 많은 관리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그 주사 아줌마를 찾아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따져 물었는데 주사 아줌마가 내 악다구니에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는 결국 울면서 실토를 했다.


그녀가 말하길 전에 말한 것처럼 자신도 지렁이 농장에 투자했고 시간이 지날 때마다 두배로 늘어나는 지렁이 덕분에 정말로 부자가 되는 줄만 알았다며 자기도 일이 이렇게 될지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하는데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결국 알고 보니 일본 화장품회사에서 지렁이들을 수입하지 않은지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나중에는 정말 일본에서 지렁이들을 수입해간 적이 있는지도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그 와중에도 늘어난 지렁이들의 관리비를 요구하는 지렁이 농장을 찾아가 관리인이 보는 앞에서 내 몫이라고 말하는 지렁이 모판을 모두 뒤집어엎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서는 한동안 끙끙 앓았다.


집을 살 때도 전세를 끼고 사느라 400만원이면 족했는데 대출까지 합쳐 무려 1000만원에 달하는 돈을 잃었으니 내 속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데 주사 아줌마는 한동안 내 돈을 내놓으라는 전화에 시달리더니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결국 주사아줌마가 내게 돈을 사기 친 것이고 그 돈을 가지고 슬쩍 사라져 버린 것인데 당시에는 그저 내게 시달리다 잠적한 줄만 알았으니 그렇게 사기를 당하고도 정신을 제대로 못 차렸던듯 싶다.


어찌됐든 나는 너무 크게 사기를 당한 탓에 한동안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는데 갑자기 빚이 오백만원이나 생겨버리니 가계의 부담이 컸다.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돈을 더 벌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신문에서 종로구의 식용유 유통을 담당할 식용유 대리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광고에는 식용유 대리점을 하고 싶은 사람은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라고 적혀 있었는데 당시 돈이 궁했던 나는 아주 정성껏 50페이지 정도 되는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냈다. 당시 그 대리점을 하기 위해 몰려왔던 인원이 대략 30명쯤 되었는데 나만큼 정성껏 서류를 만든 사람은 없었는지 내가 서류 검사결과 1등으로 뽑혀 그 대리점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고.


나는 그 일을 아주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 집을 담보로 받을 수 있는 모든 대출을 끌어 모아 사업을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되자 당시 학교를 다니던 우리 아들마저 친구들을 데리고 식용유 대리점의 명함을 거래처마다 뿌리고 다니며 도울 정도로 우리집의 사활을 건 사업이었다.


그런 아들의 지원 덕분인지 아니면 원래 당시의 식용유 대리점 사업이 유망했는지 나는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하루에 식용유를 두 트럭씩 팔정도가 되었는데 처음엔 돈이 제법 벌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식용유 대리점의 운영은 배달 직원 셋에 경리 하나를 두고 여지껏 내 서방 행세를 하던 최씨가 조금씩 일을 도와주며 내가 총괄 지휘를 하는 식이었는데 나는 장이동 가게와 식용유 대리점을 택시까지 타고 하루에 몇 번씩 오갈만큼 열심히 했다.


그런데 처음엔 돈을 좀 버는 것 같던 사업이 시간이 지날수록 삐걱거리기 시작했는데 일하는 직원들도 모두 다 착하고 장사도 잘되는데 이상하게 계산이 안 맞기 시작한 것이다. 하루에 식용유 두 트럭을 팔았으면 분명 두 트럭을 판만큼의 돈이 남아야 되는데 아무리 계산을 해도 돈이 비었다.


그것도 제법 많이 모자라서 돈을 만지는 직책인 경리가 돈을 떼먹는가 싶어 경리직원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했다.


그런데 경리를 교체해도 계속해서 돈이 비니 자꾸 손버릇 안 좋은 사람들만 들어오는 건가보다 싶어 계속해서 경리를 교체했는데 나중에 보니 무려 두 달 동안 일곱 명의 경리를 교체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경리를 일곱 명이나 교체를 했어도 여전히 돈은 비었고 결국 나는 경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주 우연히 내 일을 도와주던 최씨의 지갑을 보게 되었는데 제법 두툼하니 뭔가가 많이 들은 듯 했다.


나는 슬쩍 그 지갑엔 뭘 그리 많이 넣어가지고 다니는데 그리 불룩하냐고 떠보았는데 최씨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는 재빨리 지갑을 감추었다. 나는 슬슬 최씨의 행동에 수상함을 느껴 한동안 계속 지갑을 보자고 덤볐는데 최씨는 기어코 내게 지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며칠 뒤 최씨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그 지갑 한번 보자며 강제로 달려들어 뺏어 버렸는데 재빨리 펼쳐본 지갑 속엔 오천원 짜리 지폐가 가득 들어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천원짜리가 별것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제법 큰돈이었다.


알고 보니 그동안 식용유 대리점의 돈을 빼간 사람은 바로 최씨였던 것이다. 이에 나는 깜짝 놀라기도 하고 배신감까지 느꼈다. 나는 집까지 저당 잡혀 대출이란 대출은 박박 긁어다다 사업을 하는데 그 사업에서 돈을 빼간다는 것은 결국 나보고 빚더미에 깔려 죽으라는 소리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한없이 서러워 져서는 그때까지도 내 서방행세를 하며 점잖게 말하려는 최씨에게 소리를 쳤다.


"당장 나가!!!! 꼴도 보기 싫어!!!!"


사실 나는 그때쯤 그의 부인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눴던 터라 아예 그 김에 집으로 돌려보내서는 내게 찾아오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를 그렇게 모질게 내쫓고 나니 그와 함께 일했던 식용유 대리점 역시 더 이상 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그 힘들게 시작한 식용유 대리점 사업을 정리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동안 장사도 제법 되었고 그 사업을 원하는 이도 있어 집을 담보로 대출 받았던 것들은 얼추 정리가 되었다.


다행히 최씨는 그 후로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는데 나중에 한번 이야기 듣기로는 그 후로도 나를 못 잊어 나와 같은 한국 하늘 아래에서는 살수가 없다며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식용유 대리점 사업은 채 1년도 하지 못했지만 그동안 장사도 잘되고 사업을 넘기면서도 어느 정도 이득을 남겨 거기서 번 돈으로 우리집에 전세를 살던 이들의 전세보증금을 모두 내어주고 다 월세로 전환을 해버렸다.


그렇게 몇 년 만에야 온전히 대출 없이 내 집이 된 것인데 그리고도 돈이 얼마간 남아서 나는 항상 세입자들의 불평불만의 대상이었던 낡은 상하수도와 전기 설비를 교체할 생각을 했다.


그때 마침 우리가게에 종종 들리곤 하던 손님 중에 건축업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가서는 우리집 상황을 이야기 한 다음 그런 수리를 내가 가진 돈으로 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그가 말하길 아예 돈 한푼 안들이고 집을 새로 지을 수 있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게 가능 하냐 물었는데 그가 말하길 자신에게 맡겨주면 아예 집을 새로 지어 주고 대신 새로 지은 집의 일부를 자신이 전세를 주어 그 돈으로 공사비를 충당할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안 그래도 큰돈을 들여 대대적인 수리를 할 생각이었는데 아예 공짜로 집을 새로 지어준다고 하니 그 말에 당장 그러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 후 몇 달간 이어진 공사에서 내 돈은 한 푼도 들어가지 않았다.


나중이 되고 보니 결국 대지 70평 위에 근사하게 새로 지은 100평 건물이 내 것이 된 것 이었는데 그의 말처럼 일부를 전세로 주어 그 전세금을 공사대금으로 지급 하고도 새로 생긴 방이 무척이나 많아 나는 아예 하숙을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에는 장이동 장사가 주가 되고 하숙이 부수적인 수입이었는데 나중에는 장이동의 '영진싸롱'이 삐거덕 거리기 시작하자 아예 하숙이 주가 되어버렸다.


장이동의 '영진싸롱'은 그래도 몇 년은 하였지만 시설이 노후 되고 더불어 손님이 점점 줄기 시작하여 과감하게 정리하고 하숙을 본격적으로 업으로 삼았던 것이다. 방이 워낙 많은 큰집이라 하숙을 치는 것만으로도 생활이 될 정도였는데 마침 그때가 아이들이 대학에 가기 시작할 무렵이라 돈도 많이 들고 아이들 신경도 많이 써야 해서 시간을 많이 활용할 수 있는 하숙집 사업이 내게 딱 알맞았다.


나는 다섯 아이들을 키웠고 총 11번의 수능을 겪었는데 오로지 넷째 딸만이 한 번에 대학을 가고 나머지 아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가기위해 몇 번씩 시험을 치렀다.


내가 맥주 싸롱을 해서인지 고등학교 시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던 첫째 아들은 공부를 워낙 못해 두 번의 시험으로도 대학을 가지 못하고 군대를 먼저 갔다 왔는데 그래도 군대를 갔다 오고 나서는 다시 노력해서 중앙대에 들어갔다.


둘째인 딸은 서울 여상을 다녔는데 제법 공부를 잘했다. 본래는 딸들은 대학을 보낼 생각이 없었는데 첫째인 아들이 자꾸만 대학가는 것에 실패하자 딸들이라도 대학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둘째 보고도 대학을 가라고 했다.


하지만 둘째는 상고를 나왔기에 원하는 대학을 가기 위해서 첫번째 시험은 거의 포기하고 두번째 시험에서 크게 노력했고 덕분에 동국대학교에 가게 되었다.


셋째는 풍문 중고등학교를 나왔는데 당시 친구 중 교회를 다니는 아이가 있어 학창시절부터 그 아이를 따라 교회에 다니며 그곳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덕분에 공부할 시간을 많이 뺏겨 시행착오를 겪긴 했지만 입시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받았는데 서울대학교를 갈수 있는 점수인데도 자신이 원하는 간호대학은 서울대학교에 없다며 고려대학교 간호대학을 갔다.


넷째는 어려서부터 욕심이 많았는데 내가 어쩌다 과일이라도 한 봉지 사들고 가면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을 골라 자기 것으로 맡아놓는 아이였다. 물론 나는 아이의 버릇이 나빠질까봐 그런 넷째를 혼내고 아이들 중 가장 어리고 착했던 막내 다섯째에게 다시 배분을 시켰는데 그러면 가장 좋은 것은 엄마를 주고 그다음 좋은 것은 첫째부터 순서대로 나눠주는 막내 때문에 넷째 아이는 항상 뒤에서 두번째라 볼품없는 것을 먹어야 했다.


다만 그런 식으로 배분을 하면 결국 막내는 그 중 가장 안 좋은 것 그러니까 물건을 사면 덤으로 끼워주는 그런 것들을 먹게 되었는데 막내는 항상 그런 식으로 배분을 했고 덕분에 심통이 난 넷째는 볼따구니를 퉁퉁 부풀리곤 했었다.


그렇게 본래 어렸을 때부터 욕심이 많았던 아이지만 효녀이기도 한지라 넷째만 혼자 단 한번의 입시만으로 명지대에 들어갔는데 그 아이가 말하길 오빠와 언니들 때문에 엄마가 힘들었으니 자기만이라도 엄마의 걱정을 덜어주고 싶었다고 했다.


막내 다섯째는 다른 아이들처럼 어렸을 때 잘 먹지 못해서 유독 작았는데 언제나 그 성품만은 고왔다. 거기다 다섯째는 성품만큼이나 얼굴도 고와서 한때 배우의 꿈을 꾸기도 했는데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남편을 만나 현재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


어쨌든 내가 하숙을 본격적으로 할 무렵 우리 아이들은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게 되어 다들 바쁜 시간을 보냈는데 난 일요일만큼은 ‘가정의 날’ 이라는 것을 만들어 토요일은 친구들과 놀더라도 이 ‘가정의 날’ 만큼은 꼭 식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했다.


‘가정의 날’에는 주로 식구들과 여행을 갔는데 거창하게 외국 여행등을 간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계곡이나 바닷가 등을 주로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에는 집에 변변한 물놀이 용품이 없어서 혹시라도 아이들이 바다에서 놀다 빠지기라도 할까봐 바다에 갈 때는 기다란 노끈을 가져갔었다.


그리고는 바닷가에 도착하면 아이들과 기숙이를 포함하여 나까지 모두 허리에 끈을 묶어서는 줄줄이 엮은 굴비 같은 모양으로 바다에 들어갔는데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생각해낸 궁여지책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양새가 참으로 재밌기만 하다.


그런데 그렇게 가정에 충실한 생활을 보내던 어느 날 내 평온한 일상에 커다란 파문이 생겼다.


몇 년간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낼 무렵 나는 또다시 내 운명을 바꿔놓는 순간을 맞이했던 것이다.


어느 날 버스를 탔는데 나는 쉽게 앉을 만한 자리가 없어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그런데 내 앞에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나를 보며 자기 안쪽에 빈자리가 있으니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바깥쪽 자리에 남자가 앉아 있으니 그냥 틈을 비집고 들어가 앉기가 무안해서 앉지 않았던 것인데 마침 그 남자가 앉으라고 손짓까지 하니 큰 생각 없이 들어가 앉으려했고.


당시 원피스를 입고 있던 나는 치맛자락을 꼭 붙들어 쥔 채 조신하게 들어갔는데 자리에 앉는 순간 쥐고 있던 치맛자락을 놓자마자 폭~ 하고 펼쳐진 치맛자락이 그 사람 무릎 하고 손을 덮어 버렸다.


나는 그 상황에 깜짝 놀라고 부끄러워 얼굴이 다 화끈 거렸는데 일단 잽싸게 그 사람 무릎을 덮은 치맛자락부터 가져왔다. 그 후에는 괜히 무안하고 부끄러워 그 남자는 보지도 않고 괜히 딴대만 쳐다봤는데 갑자기 그 남자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


내가 가만히 그를 쳐다보자 그는 그때까지도 말 한마디 없이 미소만 머금은 채 자신이 내리는 정류장이라고 같이 내리자는 손짓을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같이 내리자는 말에 따라 내리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텐데 그 사람의 인상이 얼마나 좋은지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홀려서는 기어코 그를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맥주싸롱을 하면서 나를 꼬시려던 사기꾼들이나 제법 힘 있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만났기에 남자가 꼬신다고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건만 나는 이상하게 그의 손짓 몇 번에 목소리조차 듣지 못하고는 그를 따라 내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여자로서 자존심이 상할 만큼 너무나 쉽게 그의 말을 들었는데 버스에서 내리고 나서야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방에서 차 한잔 하시지요."


그리 특출 나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 평범한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이 날만큼 생생하다. 덕분에 나는 결국 그를 따라 다방에 따라가서는 마주앉아 차를 마시게 되었다. 그렇게 겨우 차 한잔을 마시는데도 가슴은 왜 그리 콩닥 거리고 얼굴은 화끈거리는지 차를 마시면서도 버스에서 본 그 인상 그대로 그가 너무 좋게 느껴졌다.


처음 본 사람과의 대화이다 보니 그리 이야기 할 것은 많지 않은 터라 차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눈 후 그가 명함을 나에게 주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고. 나는 당시로서는 남자에 대한 환멸까지 느끼고 있던 터라 아이들 다섯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생각에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잘 때 이상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자려고 자리에 눕자마자 이상하게 그가 생각나고 보고 싶은데 너무 보고 싶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밤새도록 몸에 열이 나고 아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을 지경이라 밤을 아예 뜬눈으로 새울 정도였다.


심지어 눈을 감아도 그 사람의 인상 좋은 얼굴만 눈앞에 아른아른 거리는데 도무지 밥도 안 넘어가고 그 후로도 이틀을 똑같은 증세에 시달렸다. 그러다 나중에는 아예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고 머릿속에 그 사람이 보고 싶은 생각 하나 밖에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나는 머릿속으로 아이들 아빠와 최씨를 생각하며 어떻게 여자가 남자를 세 명이나 만나냐며 죽어도 안 만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프기까지 하니 결국 참지 못하고 그 사람이 준 명함으로 전화를 했다.


내가 그렇게 전화를 하자 그 사람은 아주 반갑게 전화를 받으며 왜 이제 전화를 하냐고 어서 만나자고 하는데 나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 다짐이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서둘러 그 사람을 만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걸음에 그가 말한 장소로 찾아갔다.


그렇게 다시 다방에 앉아서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등을 물어 봤는데 당시의 그는 종이 대리점을 하고 있었다. 맥주싸롱을 하며 워낙 쟁쟁한 사람들이 내가 좋다고 달려들었던 기억이 있던 나는 종이 공장도 아니고 겨우 종이 대리점을 하는 그의 직업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


나는 그와 이어지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어떻게든 그에게서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을 찾아내려 애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좋은 인상이 자꾸만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당시의 나는 그 종이 대리점을 어떻게든 마음에 안 드는 구석으로 인식하기 위해 그에게 일부러


"남자가 제대로 된 사업을 해야지 겨우 종이 대리점을 해서 되겠어요?"


하며 퉁명스레 굴었는데 내 가시 같은 말에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고


"나는 이것으로 만족하오."


하는데 나는 그걸 핑계로 속으로 졸장부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의 이미지를 어떻게든 안 좋은 방향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다시 차 한잔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머릿속으로 만들어 놓은 그의 졸장부 이미지를 들추며 어떻게든 그를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했음에도 내 몸은 또다시 그 사람이 보고 싶어 아프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너무나 보고 싶어 심장이 미처 날뛰는데 도무지 머리로는 통제가 불가능한 지경까지 이르자 결국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게 몇 번을 반복하게 되니 결국 난 어느새 그 사람과 교제를 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다만 나는 국회의원이나 장관급 손님들과 어울린 경험이 많았기에 그를 만나게 되고서도 애써 그를 나쁜 이미지로 기억하려 했던 이유인 작은 종이 대리점에 만족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그에게


"남자가 포부도 없이 작은 종이 대리점 하나에 만족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니 그러지 말고 큰 포부를 가지고 사업계획을 한번 세워보세요."


하고 몇 번이나 권유를 했다. 그러나 그는 사업에 관해서는 생각해 보겠다고만 말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점점 만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아지고 결국 그가 내 남자가 되었을 때 나는 또다시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남자가 말하길 자기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 유부남이라는 것을 그제야 밝힌 것인데 나는 또다시 어떤 기구한 인연으로 유부남인 남자를 만나게 되었는지 무척이나 서러웠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당장이라도 해어지고 싶었지만 이미 그를 너무나 사랑하게 되어 도무지 그를 떠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결국 한 달에 한두 번씩 무려 팔년이라는 세월동안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전화번호도 바꾸고 집도 이사를 간 것인데 그야말로 한순간에 행방불명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진 그를 나는 몇 년 전 23년만에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내가 23년만에 다시 마주한 그는 새하얀 머리를 가진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동네 우체국을 갔다가 누군가 나를 보고는 아주 반갑게


"아니 이게 누구야! 도대체 우리가 얼마만에 보는 거야!“


하고 인사를 하기에 돌아보니 너무 할아버지가 되어 알아보기 조차 힘든 그가 서있었다.


나는 그가 자신이 누구라고 밝히고 나서야 그 사람이 23년간 행방 불명됐던 그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나를 떠나보낸 세월이 그리 행복하지 만은 않았는지 폭삭 늙은 그는 그저 안쓰러운 몰골이었다.


알고 보니 그와 나는 제법 오랜 기간 같은 홍제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것도 불과 길 하나를 마주 두고 살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그에 대한 정이 떨어진지 오래라 그와 인사만 하고 해어지려 했는데 그 사람은 기어코 우리집까지 따라와서는 우리집을 보고 갔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자주 우리집을 찾아오는데 항상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이 두 손에 과일 등을 무겁게 들고 왔다. 나는 이제 정도 없을 그가 굳이 친하게 지내려 하자 속으로 그 사람이 망해서 거지가 됐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그가 우리집에 올 때 가끔 교통비를 봉투에 넣어 다만 얼마간이라도 챙겨주었다.


그는 처음엔 내가 주는 교통비를 절대 안 받으려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사라졌던 이유는 거지가 되서가 아니라 반대로 돈을 벌어서였다. 나는 그와 만날 때마다 남자가 포부를 가지고 사업을 해야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는데 그 말을 잘 들었는지 작은 종이 대리점만으로도 만족한다던 그 사람이 어느 사이에 컵 만드는 공장을 차리더니 제법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돈을 많이 벌고 나니 오히려 내가 눈에 차지 않아져 나를 버리고 떠났던 것이었는데 나는 이미 그를 다시는 안 만날 결심을 했던 터라 그가 나를 떠났던 것에 대한 원망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처음 한두 번은 이야기만 하고 가던 그가 어느 날인가는 찾아와서 나를 끌어안고 강탈을 하려 들었는데 나는 그런 그를 거세게 뿌리쳤다. 젊은 시절의 그였다면 물러서지 않았겠지만 이미 노인이 된 그는 결국 내가 밀쳐내니 그대로 밀려나고 말았고. 이에 나는 그가 보기 싫어 그대로 집을 나와 버렸다.


그 뒤로는 그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아 아예 새로 집을 알아본 다음 이사까지 가게 되었는데 남산 밑에 있는 해방촌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나는 성당도 전과 달리 열심히 가게 된 터라 유부남인 그와 어떻게든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그에게는 분명 어디로 이사를 간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결국 내가 이사간 곳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어서는 계속 해서 전화를 걸어 왔다.


나는 그가 나에게 너무나 매달리기에 하루는 그의 전화에 못 이겨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리고는 그에게


"아직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면 2박3일로 나와 여행을 갈수 있겠어요?"


하고 물었다. 나는 사실 진짜 그와 여행을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가 아직도 나를 정말 좋아해서 그러는지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물은 것 이었다. 그와는 절대 엮이기 싫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그의 계속되는 방문과 전화에 조금씩 흔들린 것인데 그가 잔뜩 풀이 죽은 채 말하기를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에 그를 단지 떠보려 했던 것임에도 화가나서 그에게 왜 못하냐고 그 말이 곧 나를 안 좋아했다는 증거 아니냐고 쏘아 붙였다.


그런데 그가 또 대답하길 부인이 아파서 병석에 있어 못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또 어이가 없었는데 아니 아픈 부인이 집에 있는데 그 사람을 돌볼 생각은 안하고 나를 쫓아다니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됐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부인이 아픈데 이렇게 하면 되겠어요? 양심의 가책도 없어요? 앞으로 나에게 전화하지 마세요."


하고 다시 매운말을 했다. 그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왔는데 그도 그날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나를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당시 남대문에서 아는 성당 동생과 함께 작은 장사를 하고 있던 나에게 다시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왔다.


처음 몇번은 아예 그의 전화를 받지도 않고 끊어 버렸는데 그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전화를 걸어오자 나중에는 그 성당 동생 보기가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내가 아무리 우물쭈물하고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남자 전화라는 것이 대번에 티가 나다보니 점점 성당 동생 보기가 민망해진 나는 아예 전화를 못하게 하려고 그의 전화를 기어코 받아서는 다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속으로 그를 야단을 쳐 다시는 전화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곳으로 갔는데 그는 돌연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너무 너무 서럽고 외롭다며 눈물을 쏟았는데 나는 그걸 보고 감이 이상해 혹시 그의 부인이 더 아프게 된 것인가 지레짐작을 하고는


"부인은 좀 어떠세요?"


하고 물었는데 그는 처음엔 아직도 아프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아니 부인이 아프시면 부인을 잘 챙겨드려야지 이러고 다니시면 어떻게 해요?"


하고 말했는데 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갑자기 부인이 먼데 갔다는 소리를 했다.


"먼데가 어딘데요?"


하고 물으니 저 멀리 갔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단순히 요양병원을 갔다는 말 같지는 않아


"아니 그럼 세상을 떠나셨다는 거예요?"


하고 물었더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의 말에


"그럼 부인이 돌아가신지 얼마 안 되었으면 부인 생각을 하시면서 잘 지내고 계셔야지. 돌아가신 분이 배신감 느끼게 저를 자꾸 찾아오시면 어떻게 해요? 앞으로 저 만나려고 하지 말고 전화도 하지 마세요!"


하고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하고 집에 오고 나니 그가 서럽다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장면이 이상하게 눈에 선했다. 그에게는 배신감도 느끼고 괘씸함과 미움의 마음이 한가득 있었지만 이상하게 점점 그의 울던 모습이 생각나 내 머릿속에서 그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는 내가 그렇게 모진 말을 했음에도 시간이 좀 지나자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내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는데 이미 내 머릿속에 있던 미움은 그의 우는 모습으로 인해 점점 옅어져 가던 터라 결국 그를 만나러 카페를 몇 번 더 가게 되었다.


그는 나를 만나던 당시 43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부인과 둘이서 살다가 부인이 죽고 나니 방에도 못 들어가겠고 적적해 죽겠다며 정말 카페에 그를 보러 갈 때마다 그렇게 눈물을 흘려 댔다.


무슨 놈의 남자가 그리 눈물이 많은지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일인데 당시의 나는 그의 눈물에 그렇게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나는 평생동안 너무 많은 눈물을 흘리고 살아서 인지 지금은 눈물조차 잘 나오지 않는데 당시의 그가 마치 수도꼭지라도 틀은 것 마냥 뚝뚝 흘려대는 눈물을 보니 마치 얼음장 같던 내 마음이 그 물줄기에 그대로 녹아내린 것이다


결국 나는 머리며 수염까지 모두 하얀 할아버지가 된 그가 남자로서의 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운 시절을 함께한 이고 옛정이 있어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이미 부인을 사별한 터라 내게 더욱 매달렸다.


결국 그는 부인과 함께 살던 홍제동의 큰집은 더 이상 살지 못하겠다며 팔고 불광동으로 작은 집을 얻어 이사 갔는데 그는 이제 살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남 눈치 보느냐며 그러지 말고 자신과 함께 살자며 내게 자꾸만 매달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를 따라 가지를 말았어야 하는데 끝내 그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를 따라 나서고야 말았다.


한데 그는 같이 살기 전에는 마치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더니 정작 함께 살게 되자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는데 사사건건 내가 하는 일마다 따라 다니며 내가 잘못된 방법으로 일을 한다고 트집을 잡았다.


'밥을 잘못해서 먹을 수가 없다, 반찬을 잘못해서 먹을 수가 없다, 부엌에서 그릇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설거지를 한다.' 등 갖가지 일들로 트집을 잡아 대는데 도무지 버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거기다 물을 아낀다고 온수는 아예 잠가 버려서 겨울에도 찬물에 손이 꽁꽁 얼어가며 설거지를 해야 했고 심지어 휴지를 쓰는 것 마저도 자신은 큰일을 보고 나서도 두장이면 해결할 수 있다며 억지를 부렸다.


그렇게 하루 종일 듣는 그의 잔소리 덕에 잠들기 위해 침대에만 누우면 그날 들었던 잔소리들이 귓가에 쟁쟁하게 다시 울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그의 잔소리와 트집을 참다못해 어쩌다 한번 대들기라도 하면 그는 갈려면 가라고 되레 큰소리를 쳤는데 나는 자식들이 나이 먹고 혼자 편하게 살면 되지 왜 나이 많은 영감님 뒤치닥거리 하러 가느냐고 말리는 대도 그를 따라간 것이 부끄럽고 민망해서 그의 말 한마디에 대뜸 간다고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장성한 우리 아이들은 내가 그와 함께 산다고 말했을 때 아무도 반기지 않았는데 대체로 거길 가봐야 좋을것이 없다는 이유때문 이었다.


차라리 만나고 싶으면 가끔 한번 씩 만나는 걸로 만족하시라는 아이들의 말에도 나는 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매달리던 것이 눈에 선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따라가야겠다고 말하고는 기어코 그를 따라간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무척이나 잘못된 선택 이었다.


그는 애먼 트집과 잔소리만 해댄 것이 아니라 같이 살고 나서는 오히려 내게 무신경해 졌는데 내가 대상포진에 걸려 무척이나 아파하며 방에 누워있는데도 아픈 나를 놔두고 아는 이를 불러다 거실에서 막걸리나 마시고 방에 누워있는 나는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대상포진이 어느 정도 낫게 된 후 나는 한순간에 변해버린 그의 태도에 너무나 화가 나고 그의 잔소리와 트집이 더 이상 못 견딜 지경이라 그의 눈앞에서 수면제를 먹으며 시위를 했는데 그는 마치 내가 죽고 싶으면 죽으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내가 수면제를 몇알이나 먹던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날 수면제를 제법 먹었는데 용케 죽지 않고 그 다음날 깨어났고 그는 그런 나를 보고도 괜찮냐는 말 한마디를 건네지 않았다.


그러나 수면제를 많이 먹고도 용케 살아나긴 했지만 그때 위장이 상했는지 이후 나는 매일 속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 뭐든지 먹기만 하면 속이 계속 더 아파오니 도무지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할 지경까지 갔다.


덕분에 53kg이 나가던 내 몸무게는 그와 함께 살며 43kg까지 줄었는데 나이를 먹다 보니 한번 내려간 몸무게가 올라가지를 않았다.


물론 내가 아프고 음식을 제대로 못 먹는다고 해서 그의 트집과 잔소리가 줄어든 것은 아니어서 내가 밥은 도저히 못 먹겠으니 밥에 물을 잔뜩 붓고 그 물만을 마시며 연명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그것까지 참견하려 들었다.


내가 조금 덜 아프면 물을 조금 덜 붓고 많이 아프면 물만 많이 해서 밥을 끓이는데 그는 내가 밥을 끓일 때 주방까지 따라와서는


"무슨 놈의 죽을 그렇게 쒀?"


하며 야멸찬 타박을 했다. 그러다 하루는 속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물을 조금 덜 붓고 죽을 되직하게 만들려는데 그가 쫓아와서


"물을 잔뜩 붓고 만들어야지!"


하며 물을 더 넣으라고 성화를 부렸는데 나는 마치 그의 말이 나는 죽도 먹지 말고 물만 마시다 죽으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거기다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하루는 컨디션이 좋아 평소보다 죽을 한 숟갈 정도 더 먹는데 그런 나를 보며


"무슨 밥을 그렇게 많이 먹어?"


하며 타박을 하기도했다. 뿐만 아니라 어느 날은 내가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거실에 있다 돌아서는 내 등을 본 그가


"무슨 등어리가 그렇게 판들 판들해? 으유~ 살찐 것 좀 봐!"


하는데, 물론 여전히 내 몸무게는 한번 떨어진 뒤로 다시는 올라가지 않아 여전히 43.5kg 이었다. 그의 흉을 보자면 정말 밤이 새도록 열거 할 수 있을 테지만 근래 들어서는 아예 서로 말조차 하지 않게 된 그와의 관계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니어서 그를 흉보는 것은 여기 까지만 하겠다.


나는 갈려면 가라는 말을 마치 천하제일의 보도인양 휘두르던 그 때문에 경희궁 근처의 아파트 하나를 내 이름으로 분양 받아서 그곳으로 이사 했는데 이제 그의 집이 아니라 내 집이었기에 그의 갈려면 가라는 말은 자취를 감췄다.


오히려 전에는 한번 트집을 요란하게 잡기에 내가 예전에 그가 했던 대로 어디 갈려면 가보라고 소리쳤는데 그는 알겠다고 말하고는 정작 나가지 못했다. 이제 그와의 관계는 사랑 보다는 애증의 관계라고 보는 편이 맞는 듯 한데 같이 한집에 살면서도 대화는 사라진지 오래다.


거기다 이 글에 담지 못한 내가 심장수술을 하며 죽었다 살아난 이야기나 그밖에 용기를 내고도 말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은 아직 내 가슴속 일기장에 고스란히 적혀있다.


또한 지금은 비록 주식으로 큰돈을 날려 안타까운 상황이 되었지만 한때는 자신의 사업장에서 굴리는 차만 6대에 부부 내외가 또 각자 한대씩의 차를 굴리던 지금은 이혼한 큰아들이나 간호사인 셋째를 제외한 모든 딸들이 각기 다른 항공사에서 스튜어디스를 한 이야기와 재미난 딸들의 결혼 이야기 등은 추후에 생각이 나는 대로 차차 적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글을 마친다.


여든 노인의 유치한 사랑 이야기나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고리짝 이야기들을 끝까지 읽어준 모든 이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에필로그



이제 내게 모진 구박을 하던 노인은 내 곁에 없다.

서로 말조차 안하게 된 우리가 결국 헤어지는 것이야 당연한 결과라지만 나는 그와의 이별마저 모두 잊었다.


그와의 기억을 잊고,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을 잊고, 그리고 나 자신을 잊어가기 시작했다. 오래전 밝게 빛나던 추억들은 여전히 생생하지만 나는 이제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몇 년도인지를 잊었다.


그리고 그렇게 잊어가는 게 많아질수록 이상하게 자식들이 내 곁에 머무르는 시간도 늘어만 간다. 요즘엔 어째서인지 미국에 살던 막내딸도 내 옆에 있고.


얼마 전 다친 내 허리를 간호하기 위해서라는데 넷째와 막내가 곁에 붙어서는 어린아이처럼 재잘대니 그래도 요즘은 웃는 날이 많아졌다.


하지만 이 기억 역시 자고 일어나면 잊혀진다. 마치 그옛날 힘든 시절의 내가 어떻게든 현실의 어려움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것처럼 이제는 잠만 자도 많은 것들이 잊혀진다.


몸에 딱 달라붙어 있는 통증을 제외하면 이제는 좋았던 것도, 그리고 싫었던 것도 너무나 빠르게 잊혀지고 만다. 그리고 언젠가부턴 내 머릿속에서 그렇게 밝게 빛나던 기억들마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깜깜한 밤이 찾아오기 전의 어슴푸레함처럼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가는 기억들.


나를 병원에 데려간 아이들은 내가 아프다고 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잊게 되는 것도 모두 아프기 때문이라고.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치매라는 병이라는데 나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지금도 믿지 못한다. 그냥 나이가 들어서 건망증이 생기는 거다. 누구나 그렇듯 살다보면 몸 안의 어디가 고장 나는 것처럼...


고장 난 몸 때문인지 요즘엔 통 식욕이 없다. 얼마 전 허리를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을 땐 도통 입맛이 없어 며칠씩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그나마 지금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그로 인해 몸무게도 많이 줄었다.


하지만 줄어버린 몸무게처럼 가벼워진 내 존재감은 언제라도 하늘로 두둥실 떠오를 것만 같이 느껴진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또 다른 하루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내 삶.


활기를 잃어버린 노인의 삶을 바꾸기 위해 아이들이 바다도 데려가고 좋은 식당도 데려가지만 나는 결국 모두 잊을 뿐이다. 그 옛날, 자고 일어나면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사라지길 그토록 바랐는데 나는 그것을 이제야 얻었다.


그러나 이 여든 노인이 얻은 평화는 그토록 바라던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을 잊어 가는 삶.

문득 문득 내 곁을 지키는 아이들이 힘들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곧 잊혀진다.


이제는 내가 들었던 말 뿐만 아니라 내가 했던 말조차 잊혀진다.


아직 다 못한 말도 많은데, 아직 해야 할 말도 있는데, 내 입에서 뱅글 뱅글 돌던 말들은 그냥 잊혀지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오늘 하루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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