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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린애 님의 서재입니다.

두번째 남자

웹소설 > 자유연재 > 현대판타지, 로맨스

이린애
작품등록일 :
2018.04.09 23:54
최근연재일 :
2018.07.12 13:44
연재수 :
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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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3
추천수 :
16
글자수 :
161,352

작성
18.06.04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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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월 3일

DUMMY

아파트 주차장에 내려선 서아의 발걸음이 경쾌했다. 어딘가 기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관없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갑자기 올라타는 검은 그림자에 서아는 깜짝 놀란다.


“어디 갔다 와?”


장실장의 말에 서아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주차장 자신의 차 안에서 서아를 기다리면서 차에서 내리는 서아의 행복한 표정을 본 터라 장실장의 마음이 씁쓸해진다.


“유호 씨 집에 있었어요.”


서아가 거리낌 없이 장실장을 보며 말했다.


“한국 돌아와서 내내?”


“네.”


서아의 당당한 대답에 장실장이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서아가 홱 돌아서 내린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장실장도 서둘러 따라내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서아가 잠시 멈춰 섰다. 두어 달 만에 돌아온 집을 새삼스레 바라본다. 문가에 기태가 갖다둔 캐리어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울산 호텔의 짐을 서아와 친한 분장팀 스탭이 정리해서 보내준 것일 터였다.


잠시 캐리어에 눈길을 던지는가 싶더니 창가로 다가간 서아가 환기를 시켰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캐리어 쪽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장실장은 보이지도 않는 듯 부산하게 움직이는 서아를 멀거니 보고 있던 장실장이 맥없이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말없이 서아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는다.


그런데 잠시 후, 서아가 짐을 풀고 있는 게 아니라 필요 없는 것만 덜어내고 다시 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 가?!”


“할머니한테 가 있을 거예요.”


이번에도 지체 없이 대답한 서아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캐리어를 닫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실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김유호 씨랑?”


이 말에는 서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놈이 아닌 정중한 호칭이 의외였던 것이다.


“네..”


서아가 대답하자 장실장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래.. 준비 다 되면 내려와라.”


캐리어를 끌고 서아의 차키를 손에 쥔 채 집을 나서는 장실장의 뒷모습을 이번에는 서아가 멍하니 바라본다.





*


서아의 차에 캐리어를 싣고 차 문에 기대선 장실장이 생각에 잠겼다.


준혁이 찍어놓은 동영상은 장실장에게 적잖이 큰 충격이었다. 애초에 연예계에 큰 뜻이 없던 서아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에 대한 죄책감을 지고 있던 장실장이었다. 유호의 깊은 눈과 주차장에 내려서던 서아의 행복한 표정을 떠올린 장실장이 눈을 감는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유리문이 열리고 서아가 나왔다. 차를 향해 점점 걸어오는데 젖어있는 머리가 보인다. 급하게 씻고 내려온 모양이었다.


“샤워할 거면 말을 하지! 천천히 기다리면 되는데..”


장실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도 모르게 서아의 머리칼 끝을 만진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만 같던 물기가 장실장의 손가락을 적셨다.


갑작스런 장실장의 손길에 놀란 서아가 눈을 크게 뜬다. 화장기 없이 해사한 그 얼굴이 십여 년 전 우연히 마주쳤던 모습 그대로라고 장실장은 생각했다. 자신이 내민 명함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던 서아.. 잠시 그때를 떠올리던 장실장이 문득 계속 머리칼을 만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손을 거뒀다.


“가라.. 운전 조심하고.”


담담한 말투로 말하며 운전석 문을 여는 장실장을 잠시 바라보던 서아가 말없이 차에 올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장실장이 문을 닫는다. 망설이던 서아가 차를 출발시켰다.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장실장의 모습이 점점 멀어진다. 서아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꼼짝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


“서아 씨!”


옥탑방 건물 앞에 차가 서자마자 유호가 반갑게 서아의 이름을 부르며 옆좌석 문을 열었다.


“머리가 젖었어요.. 천천히 와도 되는데.”


자리에 올라앉자마자 유호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인다. 서아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장실장을 만난 이야기는 굳이 안 할 생각이었다. 유호 역시 옥탑방 화장실이 좁은 탓에 서아가 며칠간 편하게 씻지 못했을 것을 떠올리며 더이상 말이 없다.


“도착하면 다시 전화한다니까요. 추운데 나와 있었어요?”


“네.. 왠지 가만히 못 있겠어서..”


유호의 쑥스러운 표정에 서아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서둘러 시동을 걸며 말한다.


“얼른 가요. 지금 출발하면 야경 볼 수 있을 거예요.”


“오늘 안 봐도 돼요. 천천히 가요.”


“보고 싶어요. 그걸 봐야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들거든요.”


서두르는 서아의 옆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호의 얼굴에 다시 설렘이 번진다.





*


유호와 번갈아 운전하며 거의 쉬지 않고 달려온 끝에 4시간여 만에 포항 구룡포에 닿았다. 늦은 밤 겨울 바다는 조용하지만, 식당 간판들과 정박한 배들이 뿜어내는 불빛들로 반짝인다. 편의점에서 따뜻한 커피를 사 들고 서아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5살 때인가.. 엄마 따라서 할머니 집에 내려와 살기 시작했어요. 아빠 얼굴은 기억 안 나지만 어렸을 때 가끔 아빠를 찾았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 나는 울고 엄마랑 할머니는 싸우고.. 그러고 나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여기로 왔어요. 불빛들을 넋 놓고 보느라 울음을 그쳤거든요. 근데.. 좀 크고 나서야 엄마는 불빛을 보면서 울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 이후로 아빠에 대한 건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어요.”


담담히 읊조리는 서아의 말에 유호가 말없이 손을 잡는다. 한 손에는 커피, 한 손에는 맞잡은 서로의 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오래된 성벽 터인 돌담길을 따라 걸으니 옆으로 구룡포항의 야경이 펼쳐진다.


발걸음을 멈춘 서아가 말없이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봤다. 유호는 서아의 어머니처럼 서아 역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야경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바닷가에 카페를 열고 싶어 하셨어요. 할머니가 식당 일로 고생하시는 게 싫어서였을 수도 있지만.. 커피랑 바다가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두 가지였거든요. 그래서 말인데요, 유호 씨.”


갑자기 서아가 유호를 돌아보며 이름을 불렀다. 놀란 유호가 서아를 마주 본다.


“나랑 포항에 머물면서 카페 한 번 해보지 않을래요?”


금방 와닿지 않는 질문에 유호가 두 눈을 깜박였다.


“네?”


“다시 고향에 내려오고 싶기도 하고, 엄마 뜻을 따라주고 싶기도 하고.. 가끔이겠지만 맘에 드는 작품이 들어오면 연기는 계속할 거예요. 그래서 더 같이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유호 씨가 해주지 않을래요?”


“네.. 그래요.”


“네?”


“좋아요.”


“뭐 더 안 물어봐요? 어디서 어떻게 할 건지 라거나..”


잠시 당황하던 서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뭐든 좋아요. 서아 씨랑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유호가 대답했다. 비로소 서아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


포항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두 사람은 아침 일찍 할머니의 식당에 갔다.


“할머니! 배고파~”


식당을 들어서는 서아의 장난스러운 외침에 국자를 손에 든 할머니가 황급히 주방에서 뛰어나온다.


“가스나, 연락도 없이!”


입을 벌린 채 서아를 보던 눈에 분명 눈물이 설핏 고였는데 말은 퉁명스럽다.


“배고파. 밥 줘~”


모른 척 서아가 의자에 앉으며 어리광을 부렸다. 눈을 흘기는 할머니의 눈에 그제야 뒤이어 들어오는 유호가 보인다. 이번에는 할머니의 입이 아까보다 더 벌어졌다.


“이놈이 그놈이가?”


할머니의 말에 서아의 얼굴에 순간 어두운 빛이 스치지만, 다시 장난스레 말한다.


“오~ 할머니 요즘엔 내 기사 좀 보나 보네?”


“식당에 오는 사람마다 다 그 얘길 해쌌는데 모를 수가 있나!”


잠시 유호를 보던 서아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이놈은 이놈인데, 그놈은 아냐.”


“그기 뭔 말이고.”


“있어. 일단 밥부터 줘요. 유호 씨 뭐 먹을래요?”


“갈비탕이요.”


메뉴를 설명하려던 서아가 유호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멈칫한다. 할머니 역시 새삼스레 유호를 빤히 바라봤다.


“어? 울할머니 국밥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갈비탕이 더 자신 있는 메뉴인데! 어떻게 알았어요? 대부분 국밥 시키는데.”


서아의 즐거운 목소리를 들으며 유호가 미소 지었다. 할머니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다.


서아가 떠난 후, 할머니를 부탁한다는 서아의 말을 따라 포항에 내려왔을 때.. 할머니의 눈은 이미 빛을 잃어 있었다. 그리고 찾아올 때마다 앙상하게 말라가던 두 손을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할머니는 누구보다 건강하고 활동력이 넘쳐 보였다. 직원도 거의 쓰지 않고 식당일을 거뜬하게 해냈다던 그 시절 모습다웠다.


“할머니~”


서아가 다시 한번 재촉하는 소리에 할머니가 눈을 흘기면서도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긴다. 계속해서 할머니를 바라보는 유호를 이상한 눈으로 돌아보는 게 보였다.


“앉아요. 유호 씨.”


할머니의 모습이 주방 안으로 사라지자 유호가 그제야 서아 앞에 마주 앉았다.


“할머니 갈비탕 시키는 사람 좋아해요. 잘했어요, 유호 씨.”


기쁜 듯 웃는 서아를 보며 유호도 웃는다.


“할매! 나 밥..”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경찰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동현이었다.


“가시나! 얼마만이고!”


서아를 보는 동현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서아와 동창인 동현 역시 서아의 할머니를 자주 챙겼던지라 유호와 많이 마주쳤었다. 지진이 났던 날, 함께 이 식당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나갔다.


그 후 지진 피해자들을 도우며 가까워진 두 사람은 가끔 술도 한 잔씩 나누는 사이가 됐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현 역시 유호를 알아보지 못한다. 반갑게 서아에게 다가섰던 동현이 유호를 보고 멈칫했다.


“잘 있었어?”


서아가 동현을 보며 미소 짓는다.


“니 울산 와있음서 바쁘다카고 한번뿌이 안 왔다며. 연애할 시간은 있고..”


동현이 유호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동현은 유호가 준혁인 줄로만 알았다.


“앉아!”


어느새 동현 몫까지 3인분 음식을 쟁반에 담아온 할머니가 무뚝뚝하게 외친다. 동현은 마지 못해 서아의 옆에 앉았다. 한동안 세 사람이 어색하게 식사를 이어갔다.





*


그로부터 3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서아와 유호는 함께 바리스타 학원에도 다니고 카페 인테리어에 손수 참여하며 정신없고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유호는 카페와 집의 위치에만 의견을 보였을 뿐 묵묵히 서아를 도왔다. 서아는 알 수 없었지만 유호가 반대했던 장소들은 지난 2017년 지진 당시 큰 피해를 입었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카페 오픈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이것저것 점검하느라 분주하던 서아가 원두를 살피다가 얼굴을 찡그린다.


“수량이 안 맞네. 업체에 다녀와야겠어.”


“같이 가.”


유호도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이따 인테리어 하자 보수하러 오시기로 했잖아. 유호 넌 그것 좀 봐줘.”


서아가 서둘러 차 키를 집어 들고 나선다.


“조심해서 다녀와, 서아야.”


따라 나온 유호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서아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얼마 전부터 말을 놓기 시작한 유호의 말투가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응.”


빙그레 웃어 보이고 차에 올라타는 서아를 보는 유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카페 준비를 하는 동안 서아는 적극적이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돌아서던 유호의 눈에 카운터에 놓인 달력이 들어왔다. 무심코 손에 들고 오늘 날짜를 헤아린다.


‘4월 3일..’


다시 돌아오기 전, 서아가 세상을 떠났던 날이었다.


감회가 새로운 마음으로 유호가 달력을 한참이나 들여다본다. 지난 2017년에서는 오늘 유호의 세상도 멈췄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 달력을 다 넘기고 새해가 오고 또 오랜 시간이 흐르도록.. 서아와 함께 할 것이다.


‘쾅!!’


그 순간 유호의 귓가에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들리는 차들의 브레이크 소리..


유호의 손에서 힘없이 달력이 떨어져 내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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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잠들 수 없는 밤 18.05.09 120 1 15쪽
14 잘해. 너보다. 18.05.03 75 1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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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뜨겁고 서글픈 밤 19금 18.04.24 67 1 17쪽
9 대관람차 18.04.21 107 0 10쪽
8 2014년 10월 18.04.17 106 0 13쪽
7 눈을 보면.. 18.04.11 133 0 14쪽
6 반짝이는 18.04.10 151 0 12쪽
5 소중하게 18.04.10 140 0 12쪽
4 그 사람 18.04.10 161 1 14쪽
3 너무 보고 싶어서.. 18.04.10 149 0 13쪽
2 일렁이는 마음 18.04.10 228 1 11쪽
1 피할 수 없는 18.04.10 296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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