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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省元) 님의 서재입니다.

이방인온달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드라마

성원(省元)
작품등록일 :
2020.11.28 17:19
최근연재일 :
2022.08.11 00:05
연재수 :
2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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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99
추천수 :
1,767
글자수 :
1,373,441

작성
20.12.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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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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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글자
18쪽

13화 - 황실의 붕괴를 노리는 적.

DUMMY

안학궁성 내에 있는 서궁(西宮)의 한 별채에 호롱불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별채 곳곳은 중무장한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어느 한 사내가 별채에 다다르자 하인들이 그가 찬 검을 받아 보관했다.



“˚고추가(古雛加). 소인이옵니다.”


“오. 그래. 들어오게.”



하인들이 문을 열어주자 상복을 입은 늠름한 체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별채 안에는 ˚소노부(消奴部-서부西部)의 고추가인 해위지가 상복을 입고 구들에 앉아 주안상을 앞에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미간 위의 자잘한 주름살, 날 선 코 양옆으로 내려간 팔자주름에 인중과 턱을 감싼 수염의 해위지 앞에 방에 들어온 사내가 호궤했다.


사내와 마주한 해위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애써 근심한 표정을 짓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고추가. 지금은 선태왕의 상중입니다. 어찌 주안상을 차리셨사옵니까.”


“무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네. 허나 이 슬픔을 술로써 달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지..”


“다른 이들이 알면 어찌하시려고..”


“자네와 나 둘뿐이니 걱정하지 말게. 앉게.”



사내가 의자에 앉자 해위지는 술잔을 채웠다.



“자. 한잔 받게.”



사내는 마지못한 표정을 짓다가 곧 말없이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해위지 역시 술을 채우고 잔을 들었다.



“자네와 술잔을 드는 게 오늘이 처음이지? 자 들게나.”



해위지가 그를 향해 술잔을 들어 올리자 사내는 묵례를 하고 술잔을 들이켰다.


사내가 비워진 술잔을 내려놓자 그는 들었던 술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쯧쯧. 태왕께서 이 고려를 위해 애를 더 쓰셨어야 했는데 안타깝구나. 아직 창창할 때거늘.”


“태왕께서 간주리의 삼족을 멸하신 뒤 충격이 크셨던 것 같습니다.”


“간주리? 그렇지. 참으로 안타까워. 천하의 간주리가 그리도 허망하게 떠날 줄이야.”



해위지가 간주리를 두둔하듯 말을 하자 사내는 헛기침을 했다.



“고추가께서도 항상 조심하십시오.”


“자네가 곁에 있는데 조심을 안 할 수야 없지. 자넨 참으로 든든한 사내일세. 한잔 더 받게나.”



의심 없이 한잔을 더 들이킨 사내는 곧 정신이 혼미해져 눈꺼풀이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정신을 못 차리자 해서유태는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자네, 혹시 ˚간주리가 어떤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는지 아는가?”


“우읍. 크윽.”



곧 사내는 목에 굵은 핏대를 드러내며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늘 뒈진 고평성(高平成)이 그놈이 대가들 몰래 ˚동이매금(東夷寐錦)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지. 고평성의 개인 자네는 모르고 있었는가?”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의 공세로 남쪽 지역을 빼앗긴 고려.


돌궐의 침입과 내분, 귀족들의 득세를 걱정하던 양원왕 시기. 고려는 멸망의 위기에 봉착할 정도로 대내외적 상황이 좋지 못했다.


한강 이남 지역을 점령하며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신라의 진흥왕은 순수비를 설치해 고려를 능욕했고 빼앗은 고려 영토를 모두 신라의 영토로 편입시키면서 동맹이었던 백제와의 갈등을 유발했다.


신라와 백제의 동맹은 곧 파기되었고 백제와의 전쟁 지속과 함께 고려의 견제 또한 부담되었던 진흥왕은 비밀리에 양원왕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무려 삼십 년이라는 세월을 휴전상태로 두자는 불가침조약이었다. 이는 신라에게 유리한 것이었지 고려에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북쪽과 남쪽의 침략에 내분까지 겪는 양원왕에게 어쩔 수 없는 굴욕적인 선택이었다.


신라와 고려의 비밀 협정으로 신라의 팽창은 일단락 지어졌으나 갑작스럽게 신라와의 전쟁이 멈추자 일부 귀족들이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특히 오부 중에서 가장 큰 세력으로 부상하던 소노부의 해위지는 이를 왕위 찬탈의 기회로 보고 있었고 배후에서 간주리를 조종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우으으. 해위지.”



고통을 호소하는 사내를 보자 미소가 일그러지며 오만상을 찌푸린 해위지는 주안상에 놓인 고기 찬 하나를 손으로 집어 입속에 넣고 쩝쩝대며 씹었다.



“빌어먹을 것들. 나라를 말아먹은 것도 모자라 땅까지 빼앗긴! 자격도 안 되는 놈들이 감히 고려의 황부를 자처해!?”


“으윽. 해위..”



사내는 목을 움켜잡고 거품을 뿜다가 곧 탁상 위에 엎어졌다.



“소노부의 고추가인 나 해위지는 고려를 이꼴로 만든 무능한 계루부를 차마 좌시할 수가 없다.”



탁상에 엎어진 사내의 입에서 하얀 거품과 피가 섞여 흘렀다.


-짝짝!-


해위지가 손뼉을 치자 이내 방문이 열리며 찰갑으로 무장한 청년 두 명이 들어와 호궤했다. 그들의 손에는 피 묻은 검이 쥐어져 있었다.



“쥐새끼 네 마리는 다 치웠느냐?”



커다란 신장과 매서운 눈빛의 장남 해서유태가 칼의 피를 털어내며 대답했다.



“예. 아버님. 숨어들었던 쥐새끼 넷을 처단했습니다.”


“여기 독 처먹은 쥐까지 다섯이구나. 쯧쯧. 거의 뒈져갈 때인데 제일 강한 놈이어서 그런지 명이 길구나.”


“앗. 제일 난감했던 자였는데, 역시 대단하십니다. 아버님.”



어린 차남 해준종이 미소 지으며 부친 해위지에게 아부를 떨었다.



“준종. 너는 죽은 쥐새끼들을 전부 불태워 없애버리고 괜찮은 놈들을 골라 이놈들의 빈자리를 채워라.”


“예. 아버님. 조윤! 조호!”



해준종이 부르자 곧 그의 수하 둘이 나타나 중독된 사내를 질질 끌고 별채에서 나왔다.



“우리 가문에서 오래도 버텼구나.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두 부하와 함께 별채에서 나온 해준종은 곧바로 사내의 목에 칼을 그어 숨통을 끊었다.



첩자의 죽음을 확인한 해위지는 술잔을 비우고 또 채웠다.



“평성이 죽었으니 이제 태자놈 고양성을 구워먹을 차례구나. 평성이 뿌려놓은 이런 쥐새끼들 때문에 믿었던 간주리가 그리 쉽게 당할 줄 몰랐다.”


“아버님. 쥐새끼들을 치워버렸으니 곧 태자 고양성도 손을 쓸 것입니다.”


“이제 막 젖살 빠진 고양성이가 뭔 힘이 있다고. 늙어빠진 대대로 왕산악도 곧 뒈질 것이야. 왕산악이가 곧 은퇴하거든 우리가 그 자리를 꿰차야 한다. 그래야 일이 쉬워져. 여봐라. 술을 다시 가져와라!”



해위지는 새로 도착한 술병의 술을 따라 한잔을 쭈욱 들이켰다.



“크~ 고평성이 쥐새끼들을 우리 집안에 풀었으니, 우린 고양이를 계루부에 풀어놔야겠구나. 그나저나 노예 수급은 문제없느냐?”


“아버님. 그것이.”


“왜?”



해위지가 묻자 해서유태가 고개를 숙이며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준종이 훈련 도중에 노예 셋이 문제를 일으켰다며 치워버렸습니다.”


“뭐라? 셋이나? 준종! 해준종!”



부친의 외침에 해준종이 부랴부랴 별채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이 못난 놈!”


-쨍그랑!-



해위지는 독주가 담겼던 술병을 해준종 앞으로 던졌다. 깨진 술병의 술이 바닥에 흘렀고 해준종의 옷에도 튀었다.



“아. 아버님.”


“뭔 짓을 했기에 훈련 중에 네 형이 고르고 고른 노예들을 치우는 상황까지 만든 게냐!?”


“아버님. 송구하오나..”


“시끄럽다! 어리바리한 놈! ˚조의(皁衣)들이 될 놈들을 관리도 못하는 놈이 무슨 큰 일을 하겠다고!”


“아버님. 고정하십시오.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뭔 말이 더 있더냐!?”


“그 셋은 저에게 반항했기에 치웠던 것뿐입니다.”


“뭐? 네게 반항을 해?”


“예. 훈련 도중 제게 반항하여 치웠습니다. 그러나 셋보다 더 나은 사내들로 채웠으니 심려 거두십시오.”



빈자리를 채웠다는 말에 해서유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노예수급은 해서유태가 하고 있는데, 네가 어찌 채웠던 말이냐?”


“근자에 기뻐하실만한 공급책을 찾았습니다. 고정하시고 제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기뻐할 만하다?”



해위지가 술잔을 들어 입에 댈 때, 해서유태가 해준종을 노려보았으나 준종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예. 아버님. 진나라에서 주나라까지 두루 다니며 노예장사를 한다는 자인데 노예들의 상태가 상당했습니다.”


“˚상고(商賈)의 이름은?


“예. 이름이 정하시라고 하는데 목소리가 아주 영롱했습니다.”


“영롱하다? 흥. 계집이 노예장사를 해? 계집 따위가 뭐라고 우리 소노부에 노예를 댄단 말이냐?”


“아버님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붉은 너울이라고 노예상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자입니다.”


“뭐? 붉은 너울? 가만.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그 자의 면목은 어떠하더냐?”


“큰 덩치의 시위가 바짝 붙어 대동하고 붉고 긴 너울로 얼굴을 가리어 아쉽게도 확인은 못했습니다.”


“재차 궁금증을 유발하는 계집이로구나. 목소리가 영롱한 계집이라...”



예쁜 여성이라면 환장하는 해위지였기에 은근히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다.



“해씨 가문에 반항하는 놈들 따위는 저희 소노부에 필요 없잖습니까. 제게 맡겨주시면 심려 끼치지 않도록 수급에 힘쓰겠습니다. 아버님.”



동생 해준종이 나서는 것이 껄끄럽던 형 해서유태가 대꾸했다.



“아버님. 상고가 계집입니다. 괜찮겠습니까? 소자는 걱정이 좀 됩니다만.”


“괜찮은 공급책이 있으면 좋지. 그렇게 자신 있다면야 한번 맡겨 보마. 단 일을 그르치면 네게 큰 탈이 생길 터, 각오 단단히 하여라.”


“예.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계집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황실의 시위 중에도 계집 하나가 있었지?”



부친의 물음에 장남 해서유태가 대답했다.



“예. 공주의 시위가 그러합니다. 유수라는 계집입니다.”


“음. 그래. 해서유태 너도 정하시인가 하는 공급책이 괜찮은지는 제대로 확인해봐라. 해준종은 이만 물러가라.”


“예. 아버님.



해준종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며 별채에서 나갔다.



”때가 되면 내가 직접 계루부를 뒤집고 우리 소노부를 다시 황부로 만들 것이다. 사병은 계속해서 든든히 채워나가야 할 것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버님. 소자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그래. 고평성이가 일찍이도 뒈져줘서 그런지 오늘 술맛이 더 좋구나?! 하하하!”



과거 고려의 왕을 배출했었던 소노부.


소노부의 수장인 해위지는 세력가 간주리와 음모를 꾸며 왕권을 계루부에서 다시 소노부로 옮기려 했다.


비록 간주리의 반란은 실패했지만, 보위를 이을 고양성을 얕잡아본 해위지는 왕권 찬탈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



달빛이 비치어주는 객점들 사이로 노예들을 태운 한 마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는 홀로 홍등을 환하게 비추며, 굴뚝에서 따듯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어느 큰 객점에서 멈췄다.


마차의 주인은 허리춤의 빈 주머니 안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계집들이면 주머니를 꽉 채울 정도로 받겠지?”



객점의 욕탕에는 한 여성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큰 나무 욕조에서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욕탕의 내부는 붉은색 천으로 된 가림막이 겹겹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사람의 형태만 분간할 수 있었다.


객점의 입구는 붉은 도복을 입은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한 손에 큼지막한 편곤을 든 채 지키고 있었다.


큰 덩치와 함께 박박 민 짧은 머리, 오른쪽 광대뼈에서 턱까지 이은 깊은 흉터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은 사내임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가!?”


“재, 재이님. 정하시 나리를 뵈러 왔습니다.”


“일전에 계약했던 상인이로군.”


“예~ 예. 그렇습지요. 기억하시니 영광입니다.”


“따라오시오.”



재이는 굽신대는 상인을 데리고 욕실 입구로 이동했다.



“주인님. 재이입니다. 노예들을 끌고 온 자가 있습니다.”



영롱한 목소리의 여성은 욕조에서 몸을 풀며 말문을 열었다.



“아! 혹시 일전에 제가 소녀들을 주문했었는데 그 상인이 맞습니까?”



정하시의 목소리를 들은 상인은 그 자리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아! 예! 예~ 기억하시니 영광입니다. 나리.”


“곧 노예들이 있는 곳으로 곧 나갈 테니 기다려주시지요.”


“예. 나리.”



정하시가 욕조에서 나오는 물소리가 들리자 상인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들어 붉은색 가림막에 비치는 여성의 윤곽을 쳐다보았다.


윤곽으로만 봐도 침이 넘어갈 만큼 아름다운 자태였지만 이상하게도 왼손이 없어 보였다. 다시금 확인해도 분명 왼손은 없었다.


정하시가 욕탕을 나오자 재이는 상인을 밖으로 이끌었다.



”밖에서 잠시 대기하시오.“


”아.. 아. 예.“



노예들을 태운 마차에서 기다리던 상인은 한참을 기다려도 늦는 정하시의 태도에 슬슬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년. 피곤해 죽겠는데 왜 이리 시간을 끈담. 빨리 돈 받고 한 상 차려 먹었으면 좋겠구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붉은색 치마와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붉은 너울을 쓴 정하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울은 상체를 모두 덮을 정도의 길이였고 색도 짙거니와 밤이었기에 안면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나리, 나.. 나오셨습니까? 주문하셨던 계집 노예들입니다. 확인해주십시오. 자! 모두 나오너라!“



상인이 지시하자 마차 안에서 여섯의 여성들이 나왔다.


예닐곱 되는 아이부터 이십 대로 보이는 여성까지 들쑥날쑥했지만 모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고운 미인들이었다.


손을 포개며 고개를 숙인 상인은 다시금 그녀의 팔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녀의 비었던 왼쪽 팔목엔 아까와는 다르게 금속으로 된 손이 달려있었다.



”전에 제가 분명히 어린 아이들로 주문했었는데 한 아이 말고는 제법 나이들이 있군요.“


”아. 그래도 제법 싱싱한 계집들입니다. 고르고 또 골라 데려온 애들이니 값어치는 충분히 할 것입니다.“



정하시는 마차에서 내린 여성들을 쭈욱 둘러보았다.


정하시 옆의 편곤을 든, ˚야차 같은 재이 때문에 겁을 먹은 여성들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정하시는 이내 가장 어려 보이는 소녀의 앞에 섰다. 그녀는 은빛으로 빛나는 금속 손으로 소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소녀는 올해 몇 살이지요?“



은빛 손을 본 순간 깜짝 놀랐던 어린 소녀는 정하시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했다.



”일곱 살입니다.“



소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하시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짝!-


정하시가 휘두른 손이 소녀의 뺨을 후려쳤다.


얼떨결에 뺨을 맞은 소녀는 소리 없이 입술을 꼭 다문 채, 눈을 아래로 깔고 있었다. 반응이 없자 정하시는 다시금 소녀의 다른 뺨을 후려쳤다.


재차 뺨을 맞은 소녀는 이번엔 눈을 부라리며 정하시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매서운 눈을 확인한 정하시는 만족스러운 듯 은빛의 왼손으로 소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왼손의 날카로운 손끝이 소녀의 머리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소녀가 움찔거렸다.



”허면 이 아이만 거래하도록 하지요.“


”그렇게 하시.. 예?! 어찌 그 아이만, 나리~ 말씀이 다르잖습니까!?“


”뭐가 다르다는 거지요? 전에 분명 어린 소녀들을 주문했었는데.“


”아니~ 전에 그, 그러니까 그게. 어린 애들로 구하라기에 그~ 예쁜 애들로만 힘겹게 구했는데 어찌 하나만 거래하십니까? 전부 사주십시오. 나리.“



상인의 투덜거림에 정하시는 오른손으로 은빛의 왼손을 어루만지다가 왼손의 엄지를 움켜쥐었다. 이를 본 재이는 편곤을 꽉 쥐며 상인에게 다가갔다.



”흐음~ 그렇다면 나머지들은 모두 마차에 태우세요. 마차 값까지 한꺼번에 지급하겠습니다.“


”예? 마차까지요?“


”마차 값까지 해서 재차 거래가 없을 만큼 아주 두둑하게 드리지요.“


”그, 그럴까요?! 알겠습니다! 자자! 다들 마차에 올라라~“



상인은 여성 노예들을 하나둘씩 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정하시는 뺨을 때렸던 소녀만 태우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 노예가 마차 안으로 들어갈 무렵 정하시가 상인에게 물었다.



”헌데 아까 혹시 저의 왼손을 보셨습니까?“


”아~ 예! 예?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왼손을 보았냐고 물었습니다.“


”하아. 저 그게 본의 아니게, 일부러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상인이 고개를 돌리며 정하시에게 말을 잇는 순간 재이의 거대한 편곤이 상인의 목을 가격했다.


목이 꺾인 상인은 그 자리에서 맥없이 픽 쓰러졌다.


정하시 옆에 있던 소녀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랐지만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그녀는 곧 소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으며 응시했다.


소녀도 정하시를 바라보았지만 어둠과 붉은 너울 천 때문에 확실하게 얼굴을 확인하긴 어려웠다.



”눈앞에서 살생이 벌어지는데도 비명 한번 없다니 마음에 들어요. 앞으로 특별히 신경을 써줄 터이니 겁먹지 말고. 알겠지요?“



소녀는 말없이 그저 정하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다리를 타고 오줌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마차의 노예들은 일단 접수하세요. 나중에 대가들에게 헌납할 용도로 쓸 겁니다.“


”예. 주인님.“


”태왕이 승하했으니 잠시 고려를 떠나 있도록 하지요. 각 성에 배치된 행수들에게 복귀하라고 전하세요.“


”예. 주인님. 여봐라! 행수들에게 복귀 전갈을 보내라!“



재이의 지시에 붉은 도복을 입은 부하들이 나타나 명령에 따랐다.


정하시는 소녀를 목욕재계하기 위해 욕실로 이동했다.



”앞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니, 따듯한 물로 목욕부터 하세요.“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실 앞의 소녀는 가림막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은빛 손을 지닌 붉은 너울의 행수.


노예상인들 사이에서 정하시 상단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커가는 세력이었다.


태왕의 죽음으로 모든 상점과 객점들이 문을 닫았을 시기, 아직 휴업하지 못한 한 객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작가의말

˚고추가(古雛加) : 고추가는 고구려 때 왕족에 대한 칭호로, 왕족인 계루부에서는 각가(各家)의 적통 장자를 가리켰습니다. 옛 왕족인 소노부 및 왕비족인 절노부에서는 적통대인(嫡統大人-부족장)을 일컬었습니다.


˚소노부(消奴部) : 오부(五部) 중 하나로, 국가 체제 성립 후에는 서부(西部) 또는 우부(右部)라 불렀습니다. 계루부(桂婁部) 이전의 왕족을 배출한 부(部)로 고구려 오부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였습니다.


˚간주리의 난(干朱理─亂) : 557년 양원왕 13년에 고구려의 귀족 간주리(干朱理)가 환도성(丸都城)에서 일으킨 반란입니다. 원인은 양원왕 즉위과정에 불만을 가진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 또는 신라의 팽창에 대한 황부의 무능력에 불만을 품은 것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동이매금(東夷寐錦) : 고구려는 신라왕을 ‘동이매금(東夷寐錦)’이라 폄하했는데 고구려왕은 오랑캐의 뜻인 ‘동이’에 신라왕(매금)을 붙여 그렇게 불렀습니다.


˚조의(皁衣) : 고구려의 하위관등으로 왕 뿐만 아니라 오부의 대가들도 들일 수 있었던, 가신집단에 속한 관리로 추정됩니다.


˚상고(商賈) : 장사꾼을 일컫는 말입니다.


˚야차(夜叉) : 인도신화나 불교에서 다루는 귀신으로, 비슷한 것으로 ’두억시니‘나 ‘염마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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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5화 - 숨이 멎은 자를 되살리는 이방인. +5 20.12.16 357 14 17쪽
15 14화 - 호권의 마을에서. +4 20.12.15 380 15 16쪽
» 13화 - 황실의 붕괴를 노리는 적. +4 20.12.12 467 15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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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1화 - 온달이 무사하길 바라는 부녀(父女). +10 20.12.10 562 16 17쪽
11 10화 - 주몽(朱蒙)의 재림? +8 20.12.09 636 17 17쪽
10 9화 - 기억상실과 목의 흉터. +6 20.12.08 659 18 15쪽
9 8화 - 이방인온달 +8 20.12.05 795 17 13쪽
8 7화 - 태왕의 서거와 연씨가문. +10 20.12.04 922 15 14쪽
7 6화 - 부정(負鼎) 가문의 몰락. +6 20.12.03 1,092 17 13쪽
6 5화 - 한 몸 , 두 자아(自我) +8 20.12.02 1,210 19 13쪽
5 4화 - 법당에서. +12 20.12.01 1,238 17 13쪽
4 3화 - 금메달리스트 이방인. +12 20.11.30 1,367 17 12쪽
3 2화 - 자객들의 습격. +12 20.11.29 1,746 20 13쪽
2 1화 - 고려를 탈출하다. +14 20.11.28 2,551 33 10쪽
1 프롤로그 +13 20.11.28 3,072 37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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