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bar)
[This is not a love song♪]
요염한 여자보컬의 목소리가 흐르는 노란색 조명 아래, 나는 괜스레 노래 분위기에 맞춰 속눈썹을 착 내리깔고 시선을 아래로 둔 채, 카페라떼를 마시고 있다.
커피도 함께 판매하는 이 소규모의 바(bar)는 내가 좋아하는 곳이다. 중년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사장님도 멋있고, 가게의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도 좋고, 약간은 끈적이는 느낌의 재즈곡들이 배경으로 깔리는 것도 무척이나 좋다.
“희은씨, 그런데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아?”
짧은 머리를 왁스로 멋있게 세운 사장님이 유리컵을 정리하며 나에게 말을 던졌다.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은 사장님의 말뜻을 이미 알고 있지만 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뭐가요?”
“진심으로 물어보는 건 아니겠지?”
내 앞에 와서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사장님에게 나는 ‘정말로 몰라요’라는 의미로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그래도 계속 내 눈을 쳐다보는 사장님에게 나는 연달아 눈을 깜빡거렸고, 사장님은 이내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내 머리를 주먹을 곱게 말아 쥔 손으로 가볍게 한 대 때렸다.
“아야. 아, 왜요!”
“왜긴 뭐가 왜요야. 몇 시간 뒤면 1월 1일이라고. 아직 창창한 나이의 26살 먹은 아가씨가 곱게 화장하고, 그것도 예쁘게 차려입고 이런 곳에서, 이런 날, 이 밤에, 혼자서, 커피나 홀짝 거리고 있는 게 좀 그렇지 않냐 이거지.”
왠지 길어질 것만 같은 잔소리에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그냥 고개를 사장님의 말에 맞춰 끄덕거리기만 했다. 평소에는 참 멋있는 사장님이지만 가끔 잔소리를 시작하면 마치 우리 엄마 같단 말이야.
“여기서 새해를 맞이할 생각이야?”
“그러면 안돼요?”
끝이 없을 것 같던 사장님의 잔소리에 내가 불쑥 끼어들어 대답했다. 본인의 잔소리에 심취해있던 사장님은 잠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아까보다 더 깊은 한숨을 고아내더니, 다시 입에 잔소리 따발총을 장전한 표정으로 막 입술이 움직이려고 했는데, 다행이도.
‘짤랑’
“어서오세요~”
손님이 왔다. 와,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고 구세주와 같은 사람이다. 잔소리의 늪에서 한 순간에 날 꺼내준 사람이 누굴까 호기심이 동해 슬쩍 쳐다봤다. 가게 안을 슬쩍 훑어보는 남자는 꽤나 젊어보였다. 아니, 어려 보였다. 나보다도 3살 정도 어릴까, 이제 막 20살을 넘긴 티가 나 풋풋했다.
가게 안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내 왼쪽으로 의자 두세 개를 남겨두고 앉았다. 메뉴판을 보고 한참을 고민하는 옆모습은 상당히 귀엽게 생겼다. 좋은 눈요기 거리가 생겼다 싶어서 은근슬쩍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메뉴판을 앞뒤로 넘기며 고뇌하던 그는 결국 ‘깔루아 밀크’라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풉”
뭐랄까, 그에게 어울리는 듯 안 어울리는 메뉴 선택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최대한 작게 웃었지만, 그래도 들렸는지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실내가 어두워서 더 그랬던 걸까. 그의 눈은 마치 밤하늘처럼 조명 빛을 별빛삼아 빛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아, 네. 안녕하세요.”
경계심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편안한 인사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아주긴 했지만, ‘넉살이 참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데 그가 또 말을 걸어왔다.
“여기 분위기 정말 좋네요. 이런 곳을 찾고 있었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칵테일을 만들어서 그의 앞에 올려놓으며 사장님이 대답했다. 나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힐끔힐끔 구경했다. 훈훈한 남정네 둘이 대화하는 모습은 상당히 좋은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했다. 2012년의 마지막 날, 눈 호강도 하고 뭐, 나쁘지 않네.
그 때 가게의 문이 다시 짤랑하고 울리며 또각또각 거리는 구두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저 왔어요.”
현관에 들어서서 외투에 묻은 눈을 털어내는 여자는 나도 기억하는 여자다. 나만큼 이 가게의 단골이기 때문이다.
나이는 30대 중 후반쯤 됐을 거라 예상하고 있다. 처음에 봤을 때는 많아봐야 30살 일거라 생각했었다. 사장님하고 하는 대화를 통해 유추한 나이는 30대 중 후반. 예쁘거나 귀엽게 생긴 얼굴은 아니고, 오히려 못생긴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외모. 하지만, 무릎까지 올라오는 높은 굽의 가죽 부츠에 요즘 유행하는 퍼(pur)를 두른 여자는 패션 센스가 상당히 뛰어나 매번 볼 때 마다 친해지고 싶단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몇 주 전 까지는 말이다.
“밖에 눈 와요?”
“네, 방금 전부터 내리기 시작했어요.”
여자는 내 오른쪽으로 의자 두세 개를 남겨두고 자리에 앉았다. 졸지에 왠지 내가 중앙에 앉아버린 느낌이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나는 여자의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조금 거슬렸다. 옷을 벗는 동작, 의자에 앉는 동작, 앉아있는 자세까지도.
내가 저 여자를 싫어하게 된 계기를 말해주면, 남들이 보기엔 어린애냐고 나를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싫어지는 걸 어찌하겠는가.
“마티니 한 잔 주세요.”
“알아요.”
외투를 정리해 옆 자리 빈 의자에 걸쳐두며 말하는 여자. 사장님은 싱긋 미소 지으며 마티니 전용 잔을 가볍게 들어 올려 보였다. 그런 사장님을 여자는 바(bar)에 턱을 괴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같은 여자가 봐도, 솔직히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저 여자는 사장님을 좋아하고 있다. 그래, 나는 저게 맘에 안 든다.
“사장님 잠깐.”
마티니를 바위에 올려놓는 사장님에게 여자가 상체를 조금 내밀어 어깨에 붙은 먼지 혹은 실밥을 떼어주는 시늉을 했다. 내 눈에는 여태 보이지도 않던 먼지가 잘도 생겨났다 싶다. 그래, 나는 저게 맘에 안 든다고! 파인 옷을 입고 대놓고 끼를 부리는 저 여자가 매우 눈에 거슬렸다. 내가 결코 가슴이 부족해서 질투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좋아하면 좋아하는 건데, 저렇게 살랑살랑 끼를 부리는 게 맘에 안 든다는 것이다.
“사장님, 저 블루 사파이어 한 잔 주세요.”
짜증나는 마음에 커피 잔에 남아있던 카페라떼를 한 번에 입 안에 털어 넣고, 칵테일을 주문했다. 사장님은 웬일로 칵테일을 다 주문 하냐고 물어보더니 잠시 안쪽에 있는 주방으로 사라졌다. 짜증이 나서 알코올을 좀 섭취해야 할 것 같다고요.
그런데 사장님은 안쪽에서 뭘 찾고 있는 건지, 꽤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장님이 없어진 바(bar)는 묘한 정적이 내려앉아서, 나는 한 달 전에 큰 맘 먹고 산 나의 사랑스러운 스마트 폰만 열심히 쓰다듬었다.
“어? 그거 갤럭시 노트 투 맞죠?”
“아, 네. 맞아요.”
넉살 좋은 그 남자가 내 스마트 폰에 관심을 보였다. 그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내 손과 내 손에 쥐어져있는 스마트 폰에 계속 머물렀다. 왠지 그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구경이라도 시켜줘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조심스럽게 휴대 전화를 그 쪽으로 밀었다.
“구경하셔도 되요.”
“와 정말요?”
그는 대번에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들고 바로 내 옆자리 의자에 앉아 휴대 전화 구경 삼매경에 빠졌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에 조금 놀랐지만 휴대 전화를 열심히 구경하는 그 남자의 옆모습이 귀여워 아까 전 마구 피어오르던 짜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여기서 펜 꺼내서 이렇게 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또 내가 큰 맘 먹고 산 휴대 전화를 반짝이는 눈으로 신기해하니까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갤럭시 노트 2의 다양한 기능을 보여줄 생각으로 이것저것 알려주자 남자는 연신 오, 우와, 대박. 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며 감탄했다.
“그거 산다고 이 아가씨가 몇날며칠 여기 와서 밥 달라고 얼마나 횡포를 부렸는지 알아요?”
언제 돌아 온 건지 사장님이 나에게 블루 사파이어를 내밀며 남자에게 말했다.
“밥이요?”
“네, 그 갤럭시 노트 2 산다고 밥값도 다 써버렸다고 저한테 밥 달라고, 배고프다고~ 얼마나 횡포를 부리던지, 진상 손님이 따로 없었죠.”
“사장님!”
얼굴이 뜨뜻해지는 게 느껴지며 나는 사장님을 째려봤다. 사장님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유유자적 뒤 돌아 제빙기의 얼음을 퍼냈다. 사장님의 등을 한 번 노려보다가 시선을 돌리려는 데 아까 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눈은 나를 위아래 슥 훑어보더니 붉게 칠해진 입술이 삐뚜름하게 변하며 피식하고 비웃음을 뱉어냈다.
“사장님, 여기도 애들 놀이터가 다 됐네요?”
장난스럽고 가벼운 말투로 포장했지만, 그 속에는 나에 대한 비웃음이 담겨있단 걸 느끼지 못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저 여자에게 대체 무엇이 밉보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사장님하고 친근하게 구는 모습이 눈에 거슬렸을 거라 생각한다.
나와 여자 사이에 묘한 기류를 눈치 챘는지 사장님이 일부러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왜요~ 젊은 사람들 많이 오면 좋죠. 에너지도 받고.”
“사장님은 정말 좋으신 분 같아요.”
눈웃음을 살랑살랑 치며 입을 조신하게 손으로 가리고 웃는 여자가 정말 싫었다. 오징어처럼 생겨가지고는, 어디서 여우 흉내를 내는 걸까. 바다로 돌아가버려라. 흥.
나는 블루 사파이어에 꽂혀있는 빨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참으로 짜증난다.
[카톡. 카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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