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과 남경지역의 명칭을 계속 북경 남경이라고 하실 건가요? 북경 남경 할때의 경(京)이 한 나라의 서울 즉 수도를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다만 이번에 조선이 점령한 북경 지역을 조선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계속 북경이라고 부르면서 조선의 배도 (別都)로 삼아 제 2의 수도로 삼을 수 있겠죠 광해군 일기와 고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수많은 나라들이 두개의 수도를 가졌다는 기록이 있죠
우선 광해군 일기의 기록입니다
광해 6년 6월 14일 을미 3번째기사
주나라의 수도는 호경(鎬京)과 낙양(洛陽)이었고 지금 명나라에도 남경과 북경이다라고 한 기록이 있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606014_003
고종 실록의 기록입니다 대한제국 시기에 고종이 평양을 서경으로 격상시켜 평양을 제 2의 수도로 만들렸고 하였죠 실제로 평양에 풍경궁(豐慶宮) 이라는 행궁을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외국에서는 두 개의 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명(明) 나라에는 남경(南京)과 북경(北京) 을 두었고 조선의 전조인 고려에서도 특별히 평양을 서쪽에 있는 수도라는 뜻인 서경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출처 고종실록 고종 39년 5월 6일 양력 2번째기사
평양(平壤)은 기자(箕子)가 정한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옛 도읍으로서 예법과 문명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비록 사람의 일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고장의 신령스러움도 것도 역시 논할 수 있다. 주(周) 나라에는 동경(東京)과 서경(西京)이 있었고
명(明) 나라에는 남경(南京)과 북경(北京)이 있었으며 요즘에 이르러서는 외국의 경우에도 역시 두 개의 수도를 세우고 있다. 그리고 고려 때의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특별히 평양에 서경을 두고 송경(松京개경입니다)과 함께 두 수도로 삼았는데 이것은 모두 나라를 공고히 만들어 반석같이 크게 다지려는 것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za_13905006_002
현재 난징을 명나라에서 남경으로 부르고 있는데 남경(南京)의 뜻은 남쪽 수도라는 뜻입니다
다만 남경이 남쪽 수도란 뜻이긴 한데 어디까지나 명의 황도는 북경입니다 영락제가 남경에서 북평으로 천도해서 북평의 지명을 북경으로 바꾸었죠 남경은 배도 (別都) 즉 나라의 서울 이외에 둔 수도(首都)입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63691&cid=41748&categoryId=41752
참고로 고려는 삼경(三京)을 두어습니다 개경 서경(西京평양입니다 뜻은 서쪽 수도란 뜻이죠 ) 동경이죠(東京 경주입니다 뜻은 동쪽 수도로 경주를 뜻합니다) 고려 문종떄 한양을 남경(南京 남쪽 수도)으로 승격 시켰습니다
물론 서경 동경 남경의 경(京)은 서울 즉 수도란 뜻이지만 진짜 수도는 아니었죠 평양 경주 한양에 수도라는 의미인 경(京)을 붙인건 그만큼 중요한 도시란 뜻이겠죠 서경이 진짜 수도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겠죠
참고로 발해는 5경(五京)을 두었습니다 각각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출처 한국민족 문화대백과 오경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95277&cid=46620&categoryId=46620
중간에 선조의 후궁들의 거처에도 각기 한 그릇의 팥빙수가 올라왔다는 내용이 있는데요 선조의 후궁들이 아직 궁궐내에서 살고 있는건가요?
보통 후궁들은 원칙적으로 국왕이 죽은 다음에는 궁궐내에서 거주할 자격을 잃었다고 합니다 후궁에게 자녀가 있을 경우는 자녀가 사는 집에 얹혀 산다고 합니다.
후궁에게 자녀가 없다면 비구니가 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후궁 자신의 아들이 왕으로 즉위한 경우엔 예외였다고 합니다 수빈 박씨(순조의 생모)가 그러한 경우였죠
선조의 후궁들의 거처 부분을 광해군의 후궁들의 거처로 수정하시는게 어떠신가요? 선조의 3년상도 끝난지 오래이니 이젠 광해군에게도 후궁들이 존재하는게 가능하지 않을까요?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궁중여성 종교생활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70715&cid=49236&categoryId=49236
출처 불교 신문 글 제목 후궁들 떼지어 비구니 되다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21827
광해의 후궁은 아직 없습니다. 또한, 광해의 효성이 생각보다 지극했던 모양입니다. 왕의 후궁들이 비구니나 사가로 나가 살았다는 기록이 다른 왕에게는 있었지만, 이 글에서는 왕태후보다는 못하지만 왕실의 웃어른으로서 궁궐에 계시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또한, 아직 후손을 보지 못한 광해(대군주)의 입장을 생각하여(사실은 98년 12월에 세자 이질이 탄생합니다만) 후궁을 두지 않으려 합니다.
웅비가 떠나고 난 뒤의 조선은 알 수가 없습니다. 웅비가 다시 조선으로 귀의할지 아니면 대한민국으로 돌아갈지는 아직 정한 바는 없습니다.
웅비가 떠날 시점을 정해야 하는데(물론 갈 곳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좋은 의견을 구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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