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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령 님의 서재입니다.

요양산장

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여령
작품등록일 :
2011.03.16 21:38
최근연재일 :
2011.02.09 22:58
연재수 :
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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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74
추천수 :
59
글자수 :
12,810

작성
11.02.09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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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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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글자
8쪽

계두식전기 - 제2장 혼동

DUMMY

꼬르륵.

새벽닭이 울고 아침 해가 떠오른 이른 시각.

밤새 잠 한 숨 자지 않고 자신의 현재 처지에 대해 심도 있는 고찰을 하던 주혁의 배에서 요란스러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제길. 이런 판국에 밥이 넘어 가냐?”

애꿎은 배를 탓하며 주혁은 몸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한국어가 아닌 정체 모를 제3의 언어였다. 계두식이 가진 지식을 조금 받아들임으로써 주혁은 따로 언어를 배우지 않았음에도 이 세상의 언어를 익힐 수 있게 된 것이다.

“난 김주혁일까, 계두식일까?”

침상에서 일어선 주혁은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회한 섞인 말로 자문했다.

다른 차원에서의 새로운 삶.

비록, 이성은 전생의 김주혁이 차지하는 부분이 더 컸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으로는 가능해도 그것을 쉬이 행동에 옮길 수는 없었다.

밤새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두 영혼의 기억이 뒤죽박죽으로 엉키며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두식은 쌓여있는 쓰레기를 옆으로 치우며 방문을 찾았다. 그가 누워 있던 곳은 어릴 때부터 지내던 창고 겸 거처였다. 전생이었다면, 장애인단체에서 들고 일어설 정도로 열악한 거주환경이었다.

끼이익.

간신히 방문을 찾아내 힘껏 앞으로 밀어내니, 쇳소리를 내며 천천히 문이 열렸다.

“흠. 역시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네.”

문 밖에는 무성한 잡초와 이름 모를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었다. 두식의 기억에 이 숲은 매일 같이 창고를 드나들었음에도 길이 생기기는커녕 밤이 지나면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괴이한 곳이었다.

“…….”

두식이 입을 다문 채 굳은 얼굴로 땅바닥에 발을 내딛었다. 새로운 세상에서의 첫 걸음.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두식은 지금 이 순간 이 한 걸음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시작이 반이니까.”

어떤 일이든지 첫 발을 내딛는 것이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이후부터는 조금씩 여유로워진다.

이는 누구라도 알고 있는 이치지만, 정작 그것을 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두식 역시 그런 청년이었다. 의욕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사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식은 빠르게 마음을 다잡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곳은 절대 꿈과 같은 허상의 공간이 아니다.

아직은 막연하지만, 이 세상은 분명히 실재한다.

이제까지의 삶을 송두리째 뒤엎는 기적이 일어났으니, 적게나마 마음가짐이라도 변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것이 두식이 내린 작지만, 확고한 결심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죽지 않은 걸 알면 식모가 또 예전처럼 부려먹으려 할 텐데….”

새 마음가짐에 입각해 의욕적으로 나선 것은 좋았지만, 두식은 식모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을 차근차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식모의 집으로 향했다. 참을 수 없는 배고픔 때문에 본능이 이성을 억누르고 있었다.

“일단, 내 변화를 알리는 것이 좋겠어.”

더 이상 식모에게 이전처럼 얻어터지고 살 수는 없었다. 식모가 두식을 그토록 험하게 다뤘던 건 순전히 지능이 떨어진다는 점 때문이었다. 다행히 잘 씻지 않아서 그렇지 두식의 맨 얼굴은 제법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즉, 이전처럼 덜 떨어진 행동을 하지 않고 식모의 비위를 맞춰주며 어리광을 부리면 그녀도 두식을 예뻐할 가능성이 있었다.

“마침 밥을 짓는 모양이네.”

창고를 나와 10분 쯤 걷자, 식모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두식은 코를 자극하는 밥 냄새에 저절로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달그락달그락.

집 마당에 들어서자, 식모가 낯익은 소쿠리에 밥과 반찬을 담고 있었다. 서른 개가 넘은 소쿠리에 밥과 반찬을 골고루 담는 것이 흡사 요양원에서 노인들을 위해 식판에 밥과 반찬을 퍼 담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식모.”

“뭐야? 두식이 왔어? 다 나았으면 얼른 찾아왔어야지 뭐했어? 뭐해, 우두커니 서서? 당장 소쿠리 들고 서안 어르신들께 가질 못해?”

서안은 계곡의 서쪽 언덕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제야 두식은 자신이 식모와 함께 이름 모를 계곡 안에 거주하는 서른 세 명의 노인들께 아침 점심 저녁으로 밥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이건 마치….’

자아 성찰을 우선 과제로 삼고 밤새 고민을 한 탓에 두식이 가지고 있던 많은 정보들이 아직 온전하게 머릿속에 녹아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식모의 지시를 듣는 순간 두식은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서른 세 명의 노인을 돌보는 요양원의 요양보호사.

전생과 같이 요양원이라는 간판만 없을 뿐, 분명히 이곳은 이 세상의 요양원이었고 두식은 요양보호사나 마찬가지인 일을 해왔었다.

탁!

“빌어먹을!”

“뭐, 뭐라고?”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음에도 또 다시 요양원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억울했는지 두식은 그가 기억하는 최고의 욕을 내뱉으며 애먼 땅바닥을 발로 찼다.

과거의 두식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그 행동을 보며 식모는 밥을 식기에 담다 말고 잔뜩 놀란 눈으로 두식을 쳐다봤다.

‘이런!’

식모의 표정을 보며 두식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식모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물건을 감정하기라도 하듯 위아래로 두식을 꼼꼼하게 훑어보는 것이 아닌가.

“너 이 자식, 몸져눕더니 어디서 못된 말을 배워 온 거야? 맞고 싶어?”

다행히 식모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식은 그녀의 말에서 또 한 가지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두식이 자식, 매일 같이 맞고 살았구나….’

단순히 일을 많이 해서 그 창고에 쳐 박힌 것이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식모의 구타.

빨래하다 말고 빨래방망이로 두들겨 맞고, 설거지하다 말고 작은 도마로 흠씬 맞았다.

“어디라고?”

“이, 이 자식이 그래도!”

두식의 입에서 자연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밥 먹여주고 재워줬으니 고마운 마음이 들 법도 하건만 두식은 전혀 그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밥 먹여준다고 장애인을 때려도 되는가.

아니,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장애인은 그 존재 자체로 남들과 다름을 인정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은 노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부분이었다.

그것은 두식이 1년 넘게 요양원에서 일하며 알게 된 작은 깨달음이었다.

두식은 작은 몸을 이끌고 밥과 반찬이 담긴 소쿠리를 달구지에 하나둘 차곡차곡 쌓았다. 늘 해왔던 일인 것처럼 두식의 손짓은 무척이나 능숙했다.

“두식이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니냐? 내가 누군 줄 몰라? 나야, 나! 네 엄마 채운!”

두식의 기억 어디에도 식모의 이름은 없었다.

한 마디로 식모 채운은 두식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고 그제야 십 년 만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려준 것이다.

‘고약한 아줌마.’

채운이 두식에게 그동안 해왔던 것은 말 그대로 아동 학대요, 장애인 학대였다. 전생이라면 이런 여자는 당장 구속감이었지만, 이곳은 그저 주변으로부터 지탄만 조금 받을 뿐 아무런 법적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이게 진짜! 바빠 죽겠는데!”

퍼벅!

“으아악!”

계속 두식이 채운의 말을 무시하자, 참다못한 그녀가 장작더미에서 불쏘시개로 쓰는 장작 하나를 꺼내 무작정 두식을 개 패듯 패기 시작했다.

어리고 몸이 허약한 두식은 별다른 힘도 쓰질 못하고 채운의 매질에 꼼짝없이 당해야만 했다.

‘미친 년, 선불 맞을 년!’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두식의 형형한 눈빛은 채운을 향해 있었다.

지금의 두식에게는 악에 받친 독기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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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계두식전기 - 제1장 사고 +3 11.02.09 8,423 13 10쪽
2 계두식전기 - 제1장 사고 +6 11.02.09 11,626 16 7쪽
1 계두식전기 - 序 +7 11.02.09 12,968 19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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