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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쉼터

묘인족과 고리타분한 검사 이야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게임

전탁
작품등록일 :
2015.05.24 23:30
최근연재일 :
2018.04.1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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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4.1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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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쪽

묘인족이야기 (현재까지 진행된 부분까지)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그리고 그 즐거움에 제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DUMMY

묘인족과 고리타분한 검사의 이야기



청선국에는 예로부터 검을 잘쓰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다 당대에 이르러 전에 보지 못한 뛰어난 검사 셋이 나타났으니, 청선국 사람들은 존경과 두려움을 담아 그들을 고검사(高劍士)라 불렀다. 각각 백귀, 비상, 달가림이라 불리는 이 세 명의 검사들은 청선국과 심지어 주변국에서도 뛰어넘은 이들이 없었으니 이 세명의 승부를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인지 고의인지 세 명의 고검사들은 서로 마주치는 일이 없어 사람들의 기대는 그저 기대로만 그쳐야했다. 적어도 지금 까지는.


“후우...”


분명 흰색이었을 옷은 이미 울긋불긋하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옷의 주인은 이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탐탁치 않아하는 점잖은 인상의 남자와 흰 머리를 아무렇게나 기른 남자가 있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남자에게 유일한 공통점은 허리에 검을 차고 있다는 것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이는 두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백귀와 비상이 협공을 한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군.”

“저 녀석의 말에 흔들리지 마라 비상!”

“내게 명령하지 마라. 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하! 뭐, 상관없어. 난 저 계집애 같은 달가림 놈만 죽이면 그만이니까!”


놀랍게도 피투성이가 된 인물과 두 남자는 세 명의 고검사였다. 그것만으로도 세간 사람들이 놀라워할 일인데 두 명의 비상과 백귀가 고검사 중 하나인 달가림에게 합공을 가한다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근데 좀 놀랐어, 네놈이 천라지망을 뚫고 여기까지 오다니 말이야. 계집에처럼 보여도 고검사는 고검사라는 거겠지?”

“.......”


잔혹한 웃음이 섞인 백귀는 즐겁다는 표정으로 달가림에게 말했고 비상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달가림은 자신의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달가림, 고검사 중에서도 가장 신비에 싸여있으며 고혹적인 외모로도 유명했다. 게다가 그가 보름날에 달빛과 함께 수 십 명의 자객을 홀로 베어 넘긴 일화는 청선국 전체에서는 물론 주변국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내 이름은 달가림, 달을 삼키는 검귀...”


달가림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자신의 애검, 운룡을 두 사람에게 겨눴다.


“오라.”


스릉.

그런 달가림에게 백귀와 비상이 검을 빼들며 다가섰다.


--------------------------------------------------------


#1 만남



‘......’


달가림은 서서히 돌아오는 의식을 다잡기 시작했다. 비상과 백귀, 두 사람은 고검사라는 명칭에 어울릴 정도의 실력자들이었다.


‘분명 밀리다가 절벽으로 떨어졌을 터.’


백귀와 비상의 합공에 밀려 절벽으로 떨어진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부상을 입은 대다가 피까지 많이 흘린 탓에 꼼짝없이 죽었어야 정상이었을 터였다.


철그럭.


‘그런데 사슬이라..’


그러나 자신은 죽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사슬까지 묶인 채로. 그를 죽이려던 비상과 백귀의 무리였다면 절대 살려 두지는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가능성은 하나. 그들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인데..’


그는 천천히 눈을 천천히 조심스레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천라지망을 뚫고 두 고검사들과 싸우며 생긴 상처들은 대부분 치명상에 가까운, 말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상처다. 누가 구해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양심은 있는지 그래도 깊은 상처에는 천 조각을 이어붙인 붕대를 감아둔 채였다. 물론 자잘한 상처는 그대로 노출되어있었지만 이것만 해도 어디인가.


[---!]

“.....음?”


사람은 지치면 몸이 자동으로 휴식에 빠져든다. 그 때에는 어지간한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기 마련이지만 오감을 극도로 수련한 검사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작은 소리조차 잡아낼 수 있는 법이다.


“---!”

‘무슨.. 소리지?’

“피해라아!”

“.....!”


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누워있던 천막이 통째로 날아갔다. 주변에서 번쩍이는 병장기와 갑주들,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냄새는 익히 알고 있는 풍경이었다.


“전장인가.”

“우..우와악! 피해!”

콰직.


날아오는 무언가를 피해 달아나던 남자가 명중당해서는 박살이 나버렸다. 자세히 보니 남자를 박살낸 것은 사람 머리통만한 돌이었다.


“투석기인가?”


세상에 머리통만한 돌을 한 손에 들고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없거니와 있더라도 엄청난 고수가 아니면 안 된다. 그렇다면 남은 수단은 투석기 정도인데 돌이 날아드는 방향을 보면 그것도 아닌 듯 했다.


따앙.

“큭?”


달가림은 순간적으로 날아오는 것을 손에 감긴 사슬로 쳐냈다. 사슬에 막힌 정체모를 것은 바로 병사들에게 날아들던 돌이었다. 그가 돌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향하자 그곳에는 ‘그들’이 있었다. 피가 튀는 전장을 지켜보면서도 태연하던 그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괴물..?’


그곳에는 사람의 몸에 짐승의 귀를 가진 존재들이 장난하듯이 돌을 던져대고 있었다. 문제는 그 장난하듯 던지는 돌에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것이었지만.


“우와악! 죽어라!”

“시끄러.”

“크악!”


짐승 귀를 가진 존재들은 무장한 병사들이 달려들자 귀찮은 듯 손을 휘젓고 그 아무렇지도 않은 손길에 사람의 사지가 끊어져 나가며 피바람이 몰아친다. 얼핏 보기에도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사방에서 오가고 있었지만 이건 이미 전쟁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학살이군.”


여기 있다간 휘말려 죽을 것이 확실하다. 그렇게 판단한 달가림은 검을 뽑으려했으나 검은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 그의 입술이 악다물어졌다. 다른 건 몰라도 검만은 찾아야 했다. 검은 검사에겐 또 다른 생명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물건, 게다가 그의 검인 운룡(雲龍)은 다른 의미로도 특별했으니.


“큭?”


검이 없다는 사실에 분노가 솟구치던 순간, 그는 서늘한 감각에 재빨리 몸을 틀며 팔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말끔하게 잘려나가는 사슬, 얼른 시선을 향하자 그곳에는 재미있다는 듯 능글거리는 표정의 ‘고양이 귀 괴물’이 있었다.


“우와, 진짜 안 죽었어?”

“크루인! 내기는 네가 졌어!”

“아악! 내가 지다니 젠장! 이게 전부 너 때문이야 인간!”


다른 괴물들과 모종의 일이 있었는지 크루인이라 불린 괴물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사납게 달가림을 사납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달가림은 그 시선을 마주보며 천천히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검 하나를 주워들었다. 자신의 검이 아닌 타인의 검, 거기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물건을 쓰는 것은 평소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갈 판이었으니까.


‘몸이 제대로 움직여줄지 모르겠군.’


근육을 이리저리 움직여 본 결과 적어도 갈비뼈가 하나 이상 부러진 것 같았고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시야도 흐릿했다.


‘그래도 죽는 것 보단 나을 테지. 그리고..’


그는 손에 쥐여지는 검의 상태를 간단히 확인한 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존재에게 겨눴다.


“뭔지도 모를 괴물에 죽어줄 만큼 나는 호락호락하지 않아.”


몸은 무거웠지만 그의 눈만은 빛나고 있었다.


“하아?”


달가림에게 고양이 괴물이라고 불린 존재, 크루인은 자신에게 검을 겨누는 인간을 보고 어이를 상실했다. 안 그래도 인간인 주제에 묘인족인 자신을 고양이 괴물이라고 부르질 않나 검을 겨누질 않나..


“세상에 묘인족을 모르는 놈도 있단 말이야?”


자신들이 시끄럽게 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조용히 살아온 것도 아니다. 소문이 날 정도로 적당히 시끄럽게는(?)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인간은 묘인족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묘인족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인간이라면 지금 같은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어쭈? 살기까지? 가뜩이나 내기에 져서 짜증나는데..”


게다가 자신이 관찰하는 사이에 묘한 자세로 바뀐 인간은 어느새 검을 겨누고 살기를 뿌리고 있었다. 그런데 비실거리는 외모와는 달리 엄청난 살기라 크루인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이..인간 주제에 내게 싸움을 걸었겠다?”

“와라, 반 짐승.”


빠직.


“이게! 난 묘인족이란 말이다!”


인간의 말에 일순간 멍청한 표정을 지은 크루인은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한 것 자체에 분노한 나머지 아무 예고 없이 손바닥으로 인간을 공격했다. 어떻게 보면 뺨을 때리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손에 칼보다 날카롭고 강력한 손톱이 자라났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묘인족의 손톱은 바위정도는 우습게 갈라버리는 예기를 지니고 있었다. 전설 속의 용종이 아닌 이상에야 그들의 손톱을 맞고 멀쩡할 존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했다. 이런 사정이었으니 하물며 인간정도야 스치기만 해도 조각조각 나는 것이다.


‘체엣, 힘을 좀 뺐어야 했는데.’


눈앞의 인간을 조금 더 가지고 놀고 싶던 크루인은 순간 아차 싶었으나 그의 생각은 곧 기우임이 드러났다.


캉.

“엥?”


호리호리한 인간이 든 검이 자신의 손톱을 정확히 쳐낸 것으로도 모자라 그대로 팔을 타고 목을 벨 기세로 올라왔다. 그러다 목젖에 칼날이 닿으려던 순간, 인간의 몸이 갑자기 무너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 놀라운 인간.”


크루인의 옆에는 어느새 갈색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묘인족 하나가 서있었다. 묘인족은 무척 자존심이 센 존재들이라 개인의 싸움에 어지간해선 끼어들지 않고 끼어들게 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 끼어드는 당사자가 그들보다 강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는 크루인과 비슷할 뿐 강하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따지고 드는 크루인의 눈빛은 사나웠다.


“벨! 뭐 하는 거야?”


크루인은 벨이라 부른 묘인족은 조금은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도 묘인족인지라 자기 싸움에 누가 끼어드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런 그를 벨은 조용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 죽을 뻔 했어.”

“그렇다고 싸움에 끼어들다니!”

“아닌데? 이 인간, 혼자 쓰러졌어.”

“쩝......”


순간 화를 낸 것이 멋쩍어진 크루인은 벨의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그는 크루인이 억지를 썼다는 것 보다는 쓰러져 있는 인간에게 더 호기심이 생기는 듯 했다. 일례로 항상 덤덤하기만 하던 벨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으니까.


“내가 가져갈래.”

“먹게?”

“아니, 그냥 신기해서.”


순간 엄청난 대화가 오갔지만 크루인과 벨은 당연하다는 듯 대화를 이어나갔다.


“확실히 흑발 흑안의 인간이 흔하진 않지. 그런데 나머지에겐 뭐라고 하게? 납득할 이유가 없으면 당장에 잡아먹거나 가지고 놀다 죽일 텐데.”

“내 비상식량이라고 하면 돼.”

“결정 났네.”


크루인은 한마디로 운명이 뒤바뀐 것도 모른 채 의식을 잃고 있는 인간을 들쳐 매었다. 어느새 병사들은 몰살시키고 이것저것 기념품(?)을 챙긴 묘인족들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 벨.”

“응.”


그들과 묘인족들의 발길이 향하는 곳, 그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불리는 하얀 숲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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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남(2)



“......”

“......”


침묵이 있다면 정말로 이런 느낌일까. 달가림은 천천히 자신의 앞을 살펴보았고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맑은 눈동자가 마주쳐온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으음...”

“...”


눈앞에 있는 존재는 달가림이 무엇을 하던 간에 관찰하기 바쁜 것 같았다. 그가 움직이는 것 눈을 깜박이는 것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고검사로서 타인의 시선에 익숙한 달가림조차도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당사자가 고양이 귀와 눈동자를 가졌다면 더더욱.


“후...”


결국 달가림은 자신을 살피는 시선을 무시한 채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부러졌던 갈비뼈는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 더 어긋나 있었고 기껏 피가 멈췄던 상처에도 다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우선 뼈부터 맞춰야겠군.”


의사가 없으니 직접 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뼈는 자리만 제대로 찾아두고 쉬면 다시 붙으니 약이 필요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으득.

“......”


달가림의 이마에 식은땀이 솟았다. 아무리 검사로서 잔뼈가 굵은 그라지만 부러진 뼈를 맞추는 것은 어마어마한 고통을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자존심은 작은 소리라도 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온 몸에 힘을 풀고서 천천히 일어섰다. 인간을 가뿐히 죽여 버리는 존재가 자신을 없애려고 마음먹었다면 진즉에 했을 것이다.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달가림은 우선 몸을 회복하기로 결심했다. 탈출을 하건, 저항을 하건 몸이 회복되어야 할 테니.


‘그러기 위해선 뭐라도 먹어야...’


달가림이 생각하는 순간 그의 앞으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과일이 내밀어졌다. 시선을 향해 보니 갈색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예의 그 고양이와 사람을 반 섞어둔 것 같은 존재가 기대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부담스럽군.’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몰라 속으로 중얼거리긴 했지만 달가림은 나직이 혀를 차며 과일을 받아 한 입 베어 먹었다.


“음..”


생각보다 맛있는 과일에 달가림이 무의식적으로 감탄을 토하자 눈앞의 존재는 움찔거리더니 조심스레 손을 뺐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벨.”

“벨? 네 이름인가?”


고개를 끄덕인 묘인족이 물었다.


“너는?”

“달가림.”

“신기한 이름..”

‘내 입장에선 네가 더 신기하다만.’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달가림은 말이 통하는 것에 감사했다. 자고로 사람은 말이 통하면 관계의 출발선에서 한 발을 내딛은 채 출발한다는 것 정도는 오랫동안 방랑생활을 했던 탓에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상대방은 적의보다는 호의가 더 많은 듯 했다.


“여긴 어디지?”

“하얀 숲,”

“들어본 적 없군.”


다른 고검사들과는 달리 달가림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닌 편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자신이 살던 청선국을 비롯해 인근 국가에 하얀 숲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소는 없었다.


“하얀 숲은 어느 나라에 속해있는 곳이지?”

“인간들은 벨로란스 라고 불러.”

“벨로란스..”


들어본 적 없는 나라였다. 그가 방랑을 하는 동안에 수많은 상인들을 마주쳤지만 그들 입에서도 한 번도 언급이 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디로 온 것이란 말인가. 절벽에서 떨어진 후 강물을 따라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의 예상을 간단히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 신기해.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야.”

“여기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없나?”

“검은 머리는 조금. 그런데 검은 눈동자는 한 번도 못봤어.”

“완전히 다른 세상이군.”


청선국과 주변국 사람들의 머리색과 눈동자 색은 모두 검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그런 모습이 거의 없다는 것은 자신이 살던 곳이 아니라는 뜻.


‘아니, 오히려 그게 나은가.’


이제 자신이 죽일 사람도, 죽이러 올 사람도 없다. 달가림은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고양이 눈과 귀를 가진 종족이 있다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사실 그도 동물(?)을 싫어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큰 문제는 없다.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고양이 귀와 눈을 가지고 있나?”

“아니. 우리는 묘인족, 인간과 달라.”

“그럼 인간은 따로 있다는 소리군.”

“인간. 약해. 맛은 그냥저냥 이지만.”

“....”


마지막 말에 달가림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말을 들어보니 인간을 식량으로 쓴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근데 그냥 짐승이 더 잡기 쉽고 맛있어.”

“그런가.”

“그리고 인간 잡아오면 떼로 몰려와서 귀찮아.”


밋밋했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보니 후자의 쪽이 진짜 이유인 듯 했다. 달가림은 살짝 어이가 없어지는 것을 느끼며 문득 말했다.


“그런데 혹시 내 검은 못 봤나?”

“검..?”

“그래, 흰색 검집에 구름이 새겨져 있는 검이다.”

“아...”

“가지고 있나?”


달가림은 자신도 모르게 벨이라는 묘인족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검은 사연이 깊은 물건, 그에게 있어 목숨보다도 소중한 것이었다.


“가져오긴 했는데... ”

“돌려...”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렸어.”


순간 달가림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고 벨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조심스레 그의 눈을 살핀 벨은 곧 달가림의 눈에 귀화가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이미 일어서 있던 달가림은 성큼성큼 수풀을 해치고 나아갔다. 직접 찾아낼 셈이었다.


“어.. 안되는데...”


그를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달가림은 무시한 채 걸었다. 그런 그의 뒤를 벨이 중얼거리며 따라섰다.


“안되는데..”


잠시를 이동했을까 달가림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넋을 잃었다.


“허.....”


넓은 공터 같은 곳에 흰색 돌을 깎아서 만든 공터가 있고 그곳에서 조금 전까지 봐온 상대와 비슷한 존재들이 뒹굴 거리고 있었다.


“정말 고양이 같군..”


고양이라는 짐승은 그도 일전에 본 적이 있다. 고양이는 쥐를 잡고 곡식을 지키며 아울러 눈까지 즐거울 짐승이었기에 다른 국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짐승이었지만, 특히나 청선국에선 건국 초기에 고양이에게 은혜를 입어 건국되었다고 전해져 왕실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사랑하는 동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청선국에서는 주변국과는 달리 청선국에서는 고양이를 집안에서 기르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어? 인간이다!”

“인간이 여기 왜 있지?”

“호오..”


그를 발견한 묘인족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장난기 가득하기도 하고, 기분 나빠하기도 하고 흥미롭다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기도 했지만 그들에게도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달가림을 깔보는 눈을 하고 있다는 점. 게다가 한 놈은 소중한 자신의 칼을 바닥에 박아둔 채 발 받침으로 쓰고 있었고 그 광경을 본 순간 달가림은 자신의 몸 상태도 잊은 채 눈이 뒤집혔다. 그는 자신의 검을 밟고 있는 묘인족에게 말했다.


“당장 그 검에서 비켜. 안 그럼 죽여 버리겠다.”

“... 프렌, 저 인간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라면.. 널 죽여 버리겠다는데?”

“푸흑! 내 묘생에 이런 웃긴 말을 또 처음 들어본다. 인간 주제에 날 죽이겠데! 킥킥킥.”

“하여튼 인간들은 입만 잘 나불댄다니까.”


묘인족들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지만 이미 달가림의 눈은 귀화가 타올라서 그들의 말 따윈 듣고 있지 않는 상태였다. 그는 나직이 자신의 뒤에 따라오던 벨에게 말했다.


“..... 벨.”

“왜..?”

“튼튼하고 길이 적당한 나뭇가지 좀 구해와.”


어느새 자연스러운 하대였지만 벨은 그 점도 느끼지 못하고 달가림에게서 풍기는 살벌한 기세에 덜덜 떨며 재빨리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손톱으로 잘 다듬은 후 바쳤(?)다. 그것을 달가림이 잡는 순간 살벌한 기세에 더불어 날카로운 기세까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오늘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

“뭐...뭐야?”


이 쯤 되니 웃기만 하던 묘인족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분분히 일어나 손톱을 빼들었다. 그 숫자가 총 세 명, 이정도면 인간 수백 명 정도는 간단히 몰살시키는 정도였지만 벨은 왠지 달가림이 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기세만 해도 세 명의 묘인족은 가뿐히 뛰어넘고 있었으니까.


‘왠지 잘못 주워온 것 같아.’

이때까지만 해도 벨은 자신의 불안이 현실이 될 것이란 사실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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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화창한 날에도 먼지 나게 맞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이다. 가뭄도 아니고 평상시에 얼마나 많이 때려야 바닥에서 먼지가 자욱하게 일 정도일까. 벨은 태어나서 그 의문에 처음으로 답을 얻는 중이었다.


퍽퍽.

“캐액!”

“아악!”

“난 피했..!”

빠악.

“크흑.”


세 명의 묘인족들이 벨의 앞에서 먼지 나게 맞고 있었다. 그들을 가차 없이 후려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준 나뭇가지, 거기다 주문한 사람이 원하는 대로 방금 다듬은 튼튼한 녀석이었다. 물론 묘인족이 몇 대 맞는다고 죽진 않는다. 묘인족은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몇 배 나 강한 육체와 스피드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도 맞으면... 똑같이 아팠다.


“죽여 버리겠... 쿠억!”


반격을 시도하려던 금발의 묘인족 하나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그대로 꼬꾸라졌다. 눈에 초점이 풀린 것을 보니 아마 기절했으리라. 그리고 그 순간 묘인족들을 신나게 두드리고 있던 인간, 달가림의 팔이 멈춰 섰다.


“후우.. 감히 내 검을 밟아? 벨 덕에 살아남은 줄 알아라. 딱 기절할 때 까지만 때렸으니.”

‘그걸 계산하면서 때리고 있었단 말이야!?’


구경하고 있던 벨과 함께 맞고 있던 두 묘인족의 머릿속에 같은 비명이 스쳐지나갔다. 분노에 미친 것 같으면서도 생각할 건 다 생각하고 때린 것이다! 벨은 순간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 기절한 크루인은 묘인족들 사이에서도 맷집이 단단하기로 유명한 녀석이었기에 그의 공포심은 더해지고 있었다.


“너희 둘도 기절하고 싶나?”

“아...아니!”

“제발 그만 좀 때려!”


달가림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 묘인족과 달리 끝까지 반항하는 모습을 보이던 프렌이라는 묘인족의 정수리에 나뭇가지가 떨어져 내렸다.


빡.

털썩.


그렇게 두 번째 희생묘(?)을 기절시킨 달가림은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져둔 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묘인족에게 말했다.


“....넌 이름이 뭐지?”

“내 이름은 레민.. 레민이야.”

“그래? 벨과는 아는 사인가?”


끄덕끄덕.

순간적으로 자신이 살아남을 기회라는 것을 간파한 레민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작게 한숨을 내쉰 달가림은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져버리곤 바닥에 박혀있던 자신의 검을 회수하고 벨에게 향했다.


움찔.

“왜... 그래?”


벨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비명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부여잡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잠시 네 몸 좀 빌리지.”

“에?”

“피곤하군...”


순간 기겁하던 벨은 달가림의 호리호리한 몸이 자신에게 쓰러지자 얼른 그를 부축했다. 다행히 묘인족은 몸집에 비해 힘이 세기 때문에 벨은 어렵지 않게 자신보다 큰 육체를 추스를 수 있었다. 문제는 기절해있는 두 묘인족이었다. 묘인족은 신체 회복도 인간보다 빠르다. 다시 말하면 기절해도 정신을 차리는 시간도 인간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맞아 기절한 두 묘인족은 길길이 날뛸 가능성이 높았다.


“안전한 곳...”


하얀 숲 전체가 묘인족의 터다. 어지간한 곳이 아니고는 달가림을 성하게 보관할 곳(?)이 없다. 벨은 묘인족들이 접근하지 못하면서 인간이 머물 수 있는 곳을 고민했다.


“... 있다.”


‘그 곳’은 모든 묘인족들에게서 안전하다. 물론 묘인족들도 두려워하는 존재가 있는 장소이긴 했지만 주인은 오랜 잠에 빠져든 지 오래, 게다가 인간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그곳뿐이었다. 그곳의 주인을 떠올린 벨은 몸을 잘게 떨었지만 곧 결심한 듯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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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남(3)



검사라는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육체적 수련이 목적이지만 마음에 대한 수련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천하의 명검이라도 검에 대해 모르는 자가 들고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수련으로 힘을 쌓더라도 그 힘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가끔 힘을 기르는 것에만 치우쳐서 마음의 수련을 하지 않은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희대의 살성이 되거나 미치광이가 된다. 반대로 힘과 마음이 조화로울 때 그 본신의 능력은 수십 배가 된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검사들은 힘과 마음을 조화롭게 다스리는 능력이 뛰어날수록 높은 수준의 검사로 인정했다.


“....”


청선국에서 가장 뛰어난 세 명의 고검사 중 한명이었던 달가림 또한 힘의 수련을 하면서도 마음의 수련를 잊지 않고 꾸준히 해왔기에 어지간한 일에는 마음이 요동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 청선국에서 활동할 당시 더 이목이 집중되곤 했다. 그는 예의를 알고 있었으며 의미 없는 분노를 내비치지 않았고 항상 평정심을 유지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수련으로 평온해지기 노력했던 그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고 있었다.


쏴아아.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물론 비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를 괴롭히는 것은 비가 아니었다.


‘이게 무슨...’


스륵.


“큭....”


달가림은 침음을 흘리며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처했는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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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가림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 본 그는 아직도 손에 꽉 쥐어져 있는 검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수련이 부족하군..”


달가림은 검을 허리춤에 차고 본격적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이 정신을 잃자 벨은 장소를 옮긴 것 같았다. 하긴 달가림이 생각하기에도 그 자리에 남아있는 건 위험했다.


“여긴 동굴인가?”


앞 쪽으로 보이는 둥그런 입구를 보면 동굴이 확실했다. 순간 스스로가 멋쩍어진 그는 안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휘잉.


‘이질적인 공기다.’


그의 검사의 감각으로는 안쪽에 분명 누군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엔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생기, 숨소리, 소리조차도.


“....”


그의 머릿속에 과거의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자신을 대신하여 아버지가 죽었을 때의 기억, 차갑게 식어버린 육체와 사라져버린 맥동, 잊기로 결심하고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큭.”


달가림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사가 된 이후로 마음을 다스리고 또 다스렸다. 수많은 적들을 베어 넘기며 죽음에 익숙해져갔다. 약할 때의 기억, ‘달가림’이기 이전의 기억을 모두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떠오르는 거지?”


어딘지도 모르는 곳, 그것도 동굴 안에서 왜 이러한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달가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굴 안쪽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저벅저벅.

발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를 걷자, 달가림의 눈앞에 제단 위에 있는 석관 하나가 나타났다. 천장 쪽에 뚫린 구멍이로 빛이 쏟아져 내려서 관을 비추고 있었지만 이질적이게도 관에서는 한기가 흘러나와 그렇지 않아도 서늘한 동굴을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가까이 오는 이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넌 나와 비슷하군.”


과연 무엇이 비슷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몸을 돌려 다시 바깥쪽으로 나가는 달가림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묻어있었다.


“오.. 저게 그 인간?”

“진짜 여기 있었네. 벨, 우리가 모를 줄 알았어?”


동굴 밖으로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수십 명의 묘인족이 그를 쳐다봤다.


“.....”


그 사이에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귀를 늘어뜨린 벨도 섞여있었다. 달가림의 시선에 그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눈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공유하던 비밀을 들켜 미안해하는 듯한 어린아이의 모습에 달가림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고 순간 그 자리의 모든 묘인족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저...저게..’

‘인간, 그것도 남자의 미소라고?’


그들이 벨에게 들은 바로는 인간은 남.자.였다. 그를 업고 온 벨이 등의 감각을 가지고 증명(?)한 것이니 그건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이 짓는 미소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개중에는 얼굴을 붉히는(!) 묘인족까지 있을 지경이었다.


“벨.”

“응..?”


달가림은 벨을 불렀고 벨은 반사적으로 귀를 세우며 그를 쳐다보았다. 달가림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나를 데려온 날, 이미 나는 생명을 빚졌으니.”

“하지만...”


벨은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목이 막힌 듯 입만을 뻐끔거렸다. 그런 그에게 달가림의 말이 이어졌다.


“물러서있어라. 나머지 고양이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으니까.”


그의 검, 운룡(雲龍)이 뽑혀졌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쏟아져 내렸고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던 묘인족들의 표정이 대번에 변했다. 특히 맨 선두에 서 있던 세 명은 즐거워 죽겠다는 듯 흥분하기 시작했다.


“호오오!! 정말이잖아? 크루인을 기절시켰다는 게 허언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먼저 싸울 거다!”

“뭐? 크레이안, 그건 반칙이야! 순서를 정해야지!”


하나같이 손톱을 길게 뽑은 채 말하는 묘인족들은 인간들에겐 재앙 그 자체였으나 그들을 바라보는 달가림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는 운룡을 겨누며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묘인족들이 생애 들은 가장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순서는 필요 없다. 한 번에 덤비도록.”

“뭐시라!?”


묘인족들은 전투를 즐기지만 그 전투에도 공식이 있다. 전투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상대가 여러 명일지언정 묘인족은 혼자여야 한다. 물론 그게 전쟁이라면 상황이 조금 다르게 해석되긴 하지만 이 대륙에 묘인족과 전쟁을 치르고 싶어 하는 간 큰 인간들은 없었다. 그들과 싸우면 거대한 제국조차도 나라의 흥망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인간주제에!”

“이게 미쳤나!”


게다가 자존심이 무지하게 강한 묘인족들의 성격도 한몫을 했다. 그런 그들에게 인간 하나, 그것도 부상을 입고 붕대를 가장한 천 쪼가리를 감고 있는 인간이 묘인족 다섯을 상대하겠다고 한 것이다. 당연히 그들의 더러운(?) 성격을 자극한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일이다. 일부에서는 달가림이 미쳤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젓는 묘인족도 있었다.


“네놈은 반드시 죽여서 먹어 치워주마!”


앞에 있던 묘인족 중에서도 딱 봐도 성질이 급해 보이는 더벅머리 한 명이 나섰다. 그러자 다른 묘인족들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름은?”

“크레이안... 랄까 내가 왜 이름을 알려줘야 되는 건데!”

“왕은 나라를, 검사는 이름을 걸고 싸운다고 하지.”

“뭔 헛소리야! 간다!”

‘묘인족이라는 종족은 예의라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군’


묘인족들이 들었다면 분개할 소리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달가림은 검을 횡으로 그었다.


“윽?”


그에게 달려들던 묘인족의 몸이 순간적으로 뒤로 훌쩍 물러섰다. 어느새 목에는 얕은 상처가 있었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혼자 오면 죽는다.”


수많은 적들을 베어 넘기며 사선을 넘어온 달가림이다. 이곳에 오기 직전 천명이 동원되어 펼쳐진다는 전설의 포위망, 천라지망을 뚫고 두 명의 고검사와도 싸웠던 그에게 묘인족 하나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드득.


“오호라..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네? 크레이안, 나도 들어간다?”

“으르릉.. 아직 안 끝났어!”

“시끄러,인간한테 죽을 뻔한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큰소리야. 재미있을 것 같으니 나도 들어간다.”

“게다가 저 인간, 널 봐준 것 같은데? 나도 들어가 볼래!”

“나도 참여하지.”


달가림은 어느새 투닥거리고 있는 묘인족들에게 말했다.


“이름을 대라. 나는 달가림이다.”

“아까 말했잖아! 크레이안이다!”

“렉밀란.”


짙은 흑발의 묘인족은 무뚝뚝하게 말했고 그 뒤로 붉은 머리를 가진 여성 묘인족 한명이 싸움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쾌활한 모습으로 말했다.


“난 제리아! 꽃다운 묘인이지 후후!”


결국 4대 1의 구도가 갖춰지며 다섯 묘인족들은 달가림의 앞에 섰다. 흉흉한 살기와 투기가 오가는 모습이었지만 구경중인 묘인족들은 재미있는 볼거리라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일 뿐이었다.


‘이 종족은 싸우는 것도 즐기는 건가.’


달가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 그가 검술을 배운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세상은 각박했고 자신은 약했으니까. 정식 검사가 된 이후에도 즐기기 보다는 자신을 지키는 것에 검술을 사용했다. 문득 그는 묘인족들이 부러워졌다.


“죽어!”


그가 잠시 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크레이안이라고 불린 성질 급한 묘인족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달가림은 슬쩍 움직이는 것만으로 공격을 흘려낸 뒤 동시에 다가오는 세 명에게 찌르기를 넣었다.


“헉!”

“으아?”

“음...”


가지각색의 반응이었지만 묘인족들은 하나같이 그의 찌르기를 어느새 길게 만든 손톱으로 받아넘겼다. 그러나 달가림이 한 찌르기는 보이는 건 꽃잎과 같지만 만근의 거력이 숨어있는 찌르기, 그를 지나친 묘인족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덮치기 전의 위치로 물러선 모습이었다. 그 때 가장 말이 없던 묘인족이 다른 묘인족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렉밀란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묘인족이었다.


“물러서, 성묘도 안 된 네놈들이 감당하기엔 무리다.”

“.....”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색을 느낀 달가림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건가?”

“조금 전 까지는 장난으로 하려고 했는데 이젠 진심으로 해야 될 것 같군.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다. 인간.”


사실 그는 묘인족들을 얕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렉밀란이라는 묘인족의 말을 듣자면 지금까지 싸웠던 존재는 묘인족 중에서도 어린 쪽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게다가 이 렉밀란이라는 묘인족은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었다. 허나 그건 달가림도 마찬가지. 그는 단숨에 날카로워지는 렉밀란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건 안 되겠군.”

“네놈이 무슨 말을 하건 결국 인간일 뿐이다.”

“지금까지 어떤 인간과 싸워봤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애검, 운룡에서 맑은 소리가 울려 펴졌다. 검사들 중에서도 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들은 검과 하나가 되면서 소리가 일어난다고 전해진다. 청선국에서는 검명을 울리는 수준이 되어야 고검사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으니.


“지금은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고검사로 불리던 달가림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의 모습을 본 렉밀란이란 묘인족의 눈에는 경계심이 어렸다.


“원래 싸움은 목숨을 걸고 하는 거다 인간!”


챙.


‘손톱이 강철보다 단단하군.’


달가림은 자신의 검을 막아선 손톱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검명을 울리는 검 앞에서는 강철도 두부처럼 잘려나간다. 그러나 묘인족의 손톱은 그의 검과 부딪쳐도 단번에 잘리거나 부서지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되더라도 끝도 없이 자라났다.


“잡초도 아니고 이게 무슨..”


결국 그는 손톱과 맞부딪치기 보다는 몸으로 회피를 한 후 반격을 하는 모습으로 바뀌어갔고, 이러한 갑작스러운 변화에 렉밀란이 당황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 그는 자신의 손톱에도 끄떡없는 검을 마주하며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뭔 놈의 검이 이렇게 단단해!?’


묘인족의 손톱에 잘리지 않는 도구는 없다. 가끔 마법무기라고 해서 조금 귀찮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수십 번 부딪치다 보면 부서진다. 그러나 달가림이 사용하는 검은 아무리 손톱과 부딪쳐도 흠집하나 나지 않는데다 검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져서 이제는 그가 피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있었다.


“큭!”


검은 정확히 급소만 노리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았다. 어쨌든 싸움은 마무리 될 테니까. 그러다 달가림의 검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방향에서 쏘아져 나오자 렉밀란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눈을 뜨자 그곳에는 표정을 굳히고 뒤로 돌아선 달가림이 있었다. 그는 무언가에 시선을 향하고 있었고 자연스레 그곳으로 시선을 향한 렉밀란의 몸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굳어졌다.


“와...왕이시여!”


그 말을 렉밀란이 내뱉는 순간 모든 묘인족의 몸이 굳어졌다. 그들의 왕, 모든 묘인족들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 가장 강력한 묘인족. 거기에...


‘그 어느 때보다 난폭하고 잔혹한 왕..’


그녀는 역사상 가장 많은 묘인족을 죽였고 50년 만에 잠에서 깨어난 그들의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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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남(4)


지금까지 달가림은 수많은 적들을 베어 넘겼다. 그 중에는 같은 고검사 중 하나인 비상과 백귀도 있었지만 그들을 뛰어넘는 기인들도 많았다. 특히 암살의 제왕이라는 살왕(殺王)을 상대할 때는 목숨을 내어줄 뻔 했다. 그의 움직임이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은밀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눈을 가리고도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도록 피나는 수련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렉밀란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던 달가림은 뒤에서 갑자기 다가서는 섬뜩한 기운에 급히 검을 거두어야 했다.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이 만큼이나 가까이 왔다는 건 무서운 실력자라는 것인데 완전히 회복이 되지 않은 몸으로 검술을 펼치던 달가림에게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


기척을 따라 뒤로 돌아보자 하늘빛 머리칼에 은빛 눈동자를 빛내는 여자 묘인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끄러워.. 넌 누구지?”


무심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은빛 눈동자 속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갈무리되지도 않고 그저 난폭하게 흘러나올 뿐인 살기, 아차 하는 순간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느낌을 줄 만큼 농후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앞서 다른 묘인족들에게서 보았던 것 보다 더 지독한 오만.


‘좋은 눈빛은 아니군.’


짧게 감상한 달가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싶으면 네가 누구인지부터 밝혀라.”


그러자 무표정했던 여 묘인족의 얼굴에 표정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너, 죽고 싶어?”

“.. 이곳의 고양이들은 할 줄 아는 것이 협박뿐인가?”


그런 그녀의 반응에 달가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토씨 하나 변하지 않는 이 묘인족이라는 생물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아무리 마음을 수련한 검사라도 이정도면 짜증이 안 날래야 안 날수가 없다. 이 무슨 제멋대로란 말인가.


“허구한 날 죽인다 죽인다..”


게다가 목숨을 너무나도 가볍게 여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눈동자를 보고나서 달가림은 이 묘인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기로 마음먹고 움직이려 할 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왕이시여. 그 인간은 노예입니다....”

“노예? 보통 노예가 검을 가지고 있던가?”

“....”


잠시지만 잊고 있었다. 벨이라는 존재를. 달가림이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려 벨을 쳐다보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비장함이 담긴 눈빛이 이쪽을 향했다. 나름대로 도와준답시고 나선 것 같은데 달가림에게는 악수가 되고 말았다. 거기에..


“왕에게 바치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한 번에 죽어버리지 않는 강한 노예로요.”

“그래?

‘무슨 소리를..!’


점점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달가림은 벨에게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벨은 생명의 은인, 거기에 자신을 걱정해서 해주는 말인 것이 보였기에 그는 목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근데 난 노예 필요 없는데?”

“......!!”


그러나 묘인왕의 답은 단호했고 벨은 식은땀을 흘렸다. 왕은 노예가 없어도 묘인족 몇 쯤 부려먹으면 그만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근처에 누군가 있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서 오래 전에 있던 인간 노예들은 물론, 같은 묘인족들까지 조각냈을 정도였다.


‘큰일 났다..’


이쯤에서 벨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아닌 척 안도하는 달가림과 묘인왕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벨은 훗날 두고두고 후회할 말을 내뱉고 말았다.


“밤 노예입니다! 보시다 시피 남자 인간이지만 여자처럼 아름답...!”


서걱.


“.....”


말을 마치려던 벨의 눈앞에 섬광이 스쳤다. 시릴 듯이 날카로운 빛을 내는 검이 어느새 머리칼을 자르고 벨의 목에 닿아있었다. 그러나 벨은 목에 닿아있는 검보다는 그 검을 들고 있는 장본인이 더 무서웠다. 그는 마치 악귀처럼 눈동자에 불꽃을 이글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고 순간 벨은 살면서 처음으로 인간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뭐라 그랬나, 벨.”


은인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베어 넘길 것 같은 모습에 벨의 이마에 또다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

“설마 나보고 저 재수 없는 묘인족의 밤 시중이라도 들라는 말은 아니겠지?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도 해야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 있는 거다.”

“본인을 앞에 두고 실례되는 말을 하네?”


달가림이 말하자 묘인왕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런 그에게 달가림의 날카로운 고성이 울려 퍼졌다.


“닥쳐!”


움찔.


‘왕이 움찔했다!?’


자존심 강하고 오만한 묘인족, 그 중에서 왕의 위치에 있는 존재이니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았다. 그런데 그런 왕이 움찔거리는 모습에 묘인족 일동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눈에 쌍심지를 킨 채 풍겨내는 살기도 살기지만 묘한 기운이 그들의 눈과 귀를 그에게서 떼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알고 있나..? 으득.”


말을 하고 잠깐 쉴 때 마다 달가림의 입에선 이 갈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바로 여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다.”

‘그거 때문이었어!?’


그의 말을 듣고 벨을 비롯한 묘인족 일동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이없음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묘인족은 죄다 미남미녀다. 곱상한(?)묘인족 남성이 인간세상으로 가면 간혹 여자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시선을 즐길 뿐, 화를 낸다는 선택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그들에겐 달가림의 반응은 생소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후...”


그러나 당사자에겐 민감한 문제였다. 과거의 다짐으로 인해 머리를 길게 기른 것도 모자라, 몸도 호리호리하고 여인처럼 가냘프게 보이다 보니 진짜 여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었다. 자신도 스스로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를 보고 꼬이는 파리(?)들이었다.


‘어이 아가씨, 어디 좋은 데 안 갈래?’

‘아름다우시구려. 소저, 이름을 알 수 있겠소?’


남자인 자신에게 끈적거리는 시선을 던지며 다가오는 남자들,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났다. 그래서 검을 어느 정도 익힌 이후에는 비슷한 소리만 나와도 살기를 쏟아내서 입을 다물게 하곤 했고 그것을 수십 번 반복하다 보니 그에 대한 소문이 나서 여자를 혐오한다는 웃지 못 할 소문이 돌았던 그다. 그런 이상한 소문까지 들어가면서도 듣기 싫은 말을..


“네가 그딴 소리를 했단 말이지?”

“자...잘못했어...”


벨은 왠지 모르게 빌어야겠다는 판단으로 재빨리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구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달가림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벨이 역시 하길 잘했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던 찰나, 잊고 있었던 존재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너, 묘인족 맞아?”

“.....!”

“어떻게 묘인족이 인간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그녀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말하고 있었으나 벨은 그 속에 숨겨진 난폭함을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잘 알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맞았다.


덜덜덜.


“벨...?”


팔로 몸을 감싼 채 떨고 있는 벨에게 달가림이 다가서서 물었지만 대답은 다른 쪽에서 들려왔다.


“그런가.. 익숙한 냄새인가 싶었더니. 너구나.”

“무슨...”

“내가 유일하게 죽이지 못한 내 혈족이.”

“뭐?”


달가림은 진심으로 놀랐다. 성질 더럽게 재수 없게만 보이던 묘인왕이 조용하고 수줍어 보이는 벨의 가족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어지는 벨의 말에 그는 더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뭐라고?’


달가림은 다시 한 번 벨과 묘인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나이차이가 얼마 안 나보이는데 부모자식간이라니? 게다가 말을 듣고 있자니 달리 있던 가족들을 묘인왕이 죽였다는 말이 아닌가.


“....”


달가림의 시선이 벨에게로 향했다. 벨의 눈에 떠오른 것은 가족을 향한 따스함이 아닌 죽음에 대한 공포, 그 것을 알아챈 달가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달가림...?”

“잠깐 물러서 있어라.”


그는 검을 들지 않은 손으로 벨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그리곤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묘인왕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이름을 말해라.”

“내가 왜....”

“묘비에 이름 정도는 새겨줘야 할 테니.”

“그래? 내 이름은 이레인. 그런데 묘비를 만들려면.. 누군가는 죽어야겠지?”


말을 마친 묘인왕, 이레인에게서 근처에 있던 묘인족들이 질려 물러설 정도로 강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달가림은 그 자리에 꼿꼿이 허리를 핀 채 여전히 그녀에게 검을 겨누고 있을 뿐이었다.


“난 너 같은 녀석이 가장 싫다.”

“딱히 나도 널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는데..”


깡.


다음 순간 둘 사이에서 날카로운 것 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레인은 어느새 자신의 목으로 다가와 자신의 손톱과 마주하고 있는 검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긴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무슨 짓?”

“난 15세가 되기 전에 가족들이 죽었다.”


말을 잇는 달가림이 손을 슬쩍 움직이자 손톱에 막혀있던 검은 뱀처럼 그녀의 팔을 타고 올라오며 다시 목을 노렸다. 이레인은 그것을 피해 훌쩍 뛰어 뒤로 물러섰다.


카각.


그런 그녀에게 다시 달가림의 몸이 화살처럼 쏘아졌고 지근거리에 다가와 휘둘러지는 검을 이레인은 다시 손톱으로 막아섰다. 달가림의 말이 이어졌다.


“혈족을 죽였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말 하는 넌 쓰레기다.”

“네 가족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이레인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지만 달가림은 대답 대신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찌르기로 답했다. 대부분이 빗나갔지만 몇 개는 이레인의 몸을 스쳐 그녀의 몸에서 피가 배어나오게 했고 이후로도 기세를 잃지 않은 검은 그대로 왼쪽가슴팍에서 멈춰 섰다.


“....?”


움직임을 멈춘 이레인은 앞에 검이 있건 말건 멈춘 채 자신이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이야. 내 몸에서 피가 흐르는 건.”

“.....”

“그래, 너라면 날 죽일 수 있겠어.”


바로 앞까지 죽음이 다가왔음에도 무미건조함이 느껴지는 목소리, 무엇도 가지지 못한 채 껍데기만 남은 자루와 같은 존재. 그렇기에 달가림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왜? 승자는 패자를 죽일 권리가 있는 거야.”

“난 살아있는 건 베지만 이미 죽어버린 것은 베지 않아.”

“나 아직 안 죽었...”

“눈동자가 죽어있다면 시체나 마찬가지지. 네 눈은 썩은 생선 눈알 같군. 벨 가치도 없다.”

“....”


침묵한 이레인을 내버려둔 채 달가림은 검을 거두고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전적인 묘인족, 그 중에서도 묘인왕을 앞에 두고 등을 내보이는 그의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자살행위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그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벨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가자, 벨.”

“으...응..”


쏴아아.


그 때,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렸다. 갑작스럽게 쏟아지기 시작한 비였기에 그 자리에 있던 일동은 당연히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축축하게 젖어가기 시작했고 달가림과 벨, 이레인을 제외한 묘인족들은 비를 피할만한 장소를 찾아 사라졌다.


‘그렇다면 나는 살아있는 건가?’

“달가림?”

“....”


비를 맞으며 잠깐 동안 멍 하니 서있는 달가림을 벨은 조심스레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자 그를 바라본 벨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빗물이 그의 머리카락을 적시며 얼굴선을 따라 떨어지면서 고혹적인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묘인족이 봐도 아름답게만 보이는 광경, 그러나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듯 젖어서 번들거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역시 머리카락은 물에 젖으면 무겁군. 우선 저기서 비부터 피하자.”


그의 손이 한 곳으로 향했고 자연스레 그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린 벨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저기?”

“그래. 튼튼해 보이고 그나마 집처럼 보이니까.”


그가 가리킨 곳은 방금 전 그가 나왔던 곳, 이곳에서 유일하게 지붕이 있는 장소인 이레인의 거처였다. 묘인족은 기본적으로 아무데서나 잘 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거처라는 곳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왕의 거처만은 동굴을 개조해서 인간의 건축물처럼 만들어진 터라 유일하게 ‘집’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나..나는 괜찮아.”

“저 여자 때문에 그러나? 걱정 마라. 허튼 짓 하면 바로 베어버릴 테니.”

“아까도 말했지만 본인을 앞에 두고 너무하는...”

“패자는 입 다물어라.”

“그래도 내 집인데...”


이레인의 마지막 반항을 살포시 무시해준 달가림은 뻣뻣하게 굳은 벨을 끌고 집을 빙자한 동굴로 들어섰다. 벨이 더 이상 못 들어가겠다는 강경한 자세를 보였기에 그는 입구 근처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입구 근처라 그런지 빗줄기가 조금씩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벨을 혼자 두고 갔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


쏴아아.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쏟아져 내렸다. 달가림은 비를 싫어했다. 긴 머리칼 탓에 비가 오면 젖어서 머리가 무거워 지는데다 조금만 오래 노출되어도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머리카락은 가족들을 추억하는 마지막 보루라는 셈 치더라도 체력이 떨어지는 것은 검사에겐 치명적인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 칼과 화살이 날아올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검사였으니까. 그렇게 잠깐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들어오는 기척이 하나 있었고 그것을 감지한 달가림의 시선이 돌아갔다가 그대로 굳어졌다.


스륵.


‘이게 무슨...’


달가림은 침음을 흘리며 재빨리 시선을 돌린 채 말했다.


“뭐하는 짓이지?”

“옷이 젖었으니까 말려야지.”

“그러니까 왜 옷을 여기서 벗는 거냐! 거기다 왜 다른 옷은 안 입고!”


달가림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최대한 떨쳐내려 애쓰며 말했지만 그를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옷, 이거 하나 뿐인데.”

“......”


물론 그가 살던 청선국에서도 농민들은 옷 한 벌로 몇 년을 지내기도 했다. 그래도 옷을 빨 동안 걸치고 있을 누더기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인 것이다.


‘거기다 왕이라는 작자가!’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도대체 뭐하는 왕이냐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지금은 잡을 멱살도 없는(?)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바닥까지 끌리는 머리칼 덕분에 군데군데 가려질 곳(?)은 가려졌다는 정도. 결국 달리 향할 곳이 없어진 달가림의 시선은 벨에게로 고정되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덕분에 벨의 고민은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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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양이와 함께 사는 법.


다음 날, 달가림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에서나 하늘은 한결같군.”


언제 어디에 있건 하늘은 같다. 고검사 중에서도 세력도 없이 홀로 다니는 것도 유명했던 그는 청선국 내에서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물론 여행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검사가 되었을 때 이미 가족들은 죽고 집도 없었을 뿐더러 원한을 가지고 자신을 노리는 이들을 상대하기에는 떠돌이 생활이 편했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 있으면 적이 몰려오기만 할 뿐, 그렇다면 차라리 따로따로 찾아오게 해서 각개격파를 하는 것이 나았다.


“길었지...”


그러길 수 년, 떠돌이 생활에 지친 그는 쉬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믿었던 사람들은 배신했고 죽음을 넘어선 끝에 결국 낯선 땅으로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천라지망과 두 고검사의 협공, 처음부터 달가림을 적대시하던 인물들이긴 했지만 그 배신만 없었더라면 그는 죽을 때 까지 조용히 살았을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달가림은 인연도, 악연도 없는 이곳이 좋았다.


“.....”


그렇게 하늘을 주시하던 달가림의 몸이 돌아갔다. 그곳에는 이레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조금 전부터 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바라보고 있음에야 그저 무시하기도 그랬다.


“뭘 보는 건가.”

“신기해서.”

“뭐가 신기하다는 거지?”

“보통 인간들은 우릴 무서워하는데 넌 안 그런 것 같아서.”

“내가 보기엔 너희들은 그냥 몸집 큰 고양이일 뿐이다.”

“.....”


달가림의 말에 이레인은 고민하듯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고양이가 뭐야?”

“...”


이번엔 달가림이 침묵할 차례였다. 이레인과 한 마디라도 말을 섞게 되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마치 백치처럼 자신에 대한 것을 빼면 아는 것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을 제외한 것들에겐 관심이 없어서 알 기회조차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무언가 대화를 한다 치면 항상 이상하게 결말이 나버리곤 했다.


“또 말 안 해..?”


달가림이 침묵하자 이레인은 고양이처럼 조심스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결국 울컥한 달가림이 소리쳤다.


“넌 왕이라는 자가 왜 체통이 없나! 묘인족은 강해서 오만하다더니 헛소리인가보군!”

“응..? 왕이긴 한데 너에게 져버렸잖아.”

“.....”


잠깐 잊고 있었다. 묘인족은 철저히 강한 자가 모든 것을 가지는 강자존의 느낌이었다. 그런 의미로 보면 묘인족의 왕은 일족 중에서 가장 강한 이가 선택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왕을 제압해버렸다.


‘이건 이겨도 손해 보는군... 물론 반쪽짜리 승리이긴 했지만.’


달가림이 본 대로라면 자신과 싸울 때 이레인은 모든 힘을 내지 않았다. 그의 검이 심장 바로 앞까지 가서 멈춘 것도 그 때 힘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는 그녀의 신비한 은빛 눈동자를 보는 순간 눈치 챌 수 있었다.


‘죽고 싶어 하는 왕이라..’

“흐암..”


달가림이 본 이레인은 다른 묘인족들처럼 극도고 귀찮은 것을 싫어하고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보여주기 식의 행동일 뿐, 대부분의 시간에 멍한 모습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거나 자는 것이 보통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달관하고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이레인.”

“...?”

“넌 왜 살고 있지?”

“그건 왜 물어..?”

“잔 말 말고 말하도록.”

“몰라.”


달가림의 말이 거슬리는지 이레인의 미간이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그녀도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달가림의 키는 남성중에서도 큰 편이다. 덕분에 달가림이 앉아있지 않은 이상에야 이레인은 그에게 말할 때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그런 이레인을 내려다보며 그녀의 눈동자를 살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망가질 대로 망가졌군.’


그녀의 눈은 오래 전에 본 귀환병과 같았다. 그 병사는 무려 10년이나 이어진 월국(月國)과 동국(同國) 사이의 전쟁에 참여했었는데, 겨우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 보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은 몰랐지만 이미 그들의 집과 가족은 전쟁의 화마에 휩쓸려 사라졌고 비옥하진 않아도 먹고살만했던 땅은 시체 썩은 냄새를 풍기며 함께 썩어버린 것이다. 그는 수많은 남자들이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하거나 다시 전쟁터를 찾아 떠돌아다닌다고 했다.


‘아니, 이 경우는 더 나쁜가?’


묘인족은 강하다. 벨의 말대로라면 너무 강해서 땅을 딛고 사는 종족 중에 묘인족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다고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한 왕의 마음은 무엇 때문에 망가졌을까. 이유가 어찌 되었건 이대론 몸 보다 마음이 먼저 망가져있는 탓에 인형이나 마찬가지이리라.


“후우.. 이것도 병이군.”


달가림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끼어들 필요도 없는 일에 끼어들어 고민하고 심할 때는 피까지 본다. 천성인지 그렇지 않으면 연민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이레인 같은 존재를 모른척할 수가 없다. 결국 그는 신경질 적으로 검을 뽑아들고는 이레인에게 말했다.


“이레인.”

“왜?”


백치처럼 멍하니 답하는 그녀에게 달가림은 검을 겨누며 말했다.


“덤벼라.”


카앙.


“큭, 사양이 없군.”


달가림은 말이 끝나자마자 검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침음을 흘리면서도 그것을 능숙하게 흘려냈다. 그가 부드럽게 물러나서 시선을 향하자 그곳에는 이미 손톱을 빼어든 이레인이 서있었다.


“네가 덤비라고 했잖아?”


쉬익.


그녀는 기다란 손톱으로 달가림의 다리를 쓸어왔다. 스치기만 해도 근육이 가닥가닥 끊어져버릴 법한 공격이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공격을 할 뿐이었다. 옆으로 길게 물러나면서 공격을 피한 달가림은 검을 한 손으로 잡고 빠른 속도로 찌르기 시작했다.


“또 그거야?”


그러나 이레인은 지난번에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의 검을 모조리 튕겨냈다. 그런 그녀에게 달가림이 말했다.


“네가 가진 모든 힘을 내보이는 게 좋을 거다.”

“.... 내가 왜?”

‘역시 힘을 조절하고 있었나.’


속으로 짧게 혀를 찬 그는 최대한 감정이 실리지 않은 표정으로 이레인에게 말했다.


“이번에 지면 널 노예로 삼을 테니까.”

“한 번 봐줬더니 기가 살아서는...”


그의 말에 담담하게 대답하는 이레인이었지만 눈빛은 이미 살기가 번득이고 있었다.


‘과연, 자존심은 있다는 거군.’

“대신 내가 지면 내 목숨을 주지.”


말을 잇는 달가림의 자세가 미묘하게 변했다. 그 사이 이레인의 기운은 점점 커져서 어느새 구경 나와 있던 묘인족들의 눈동자에 공포심이 어릴 정도였다.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 달가림조차도 숨 막히게 만드는 기운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왕은 왕이라는 건가.’


그의 검에서 은은한 검명이 흘러나왔다. 그 역시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기운을 끌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기운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 이레인의 몸이 폭사되었다. 어찌나 빠른지 그녀에게 온 감각을 집중하고 있던 달가림에게 조차도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다.


‘빠르긴 하지만..’


달가림의 검이 잔영을 남기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기운은 너무 강한 탓에 눈으로는 놓쳐도 검사의 감각으로는 놓칠 수가 없었다.


‘벤다!’

“오검(五劍), 달빛 베기!”


이름 없는 검사였던 그를 달가림이라는 칭호로 불리게 해 준 검술이 펼쳐졌다. 폭발적인 속도로 검을 움직여 적과 함께 하늘의 달빛마저 일순간 베어 넘기는,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검술, 누구도 받아넘긴 적이 없을 정도로 빠르면서 패도적인 검. 그러나 그의 검이 이레인과 마주하는 순간 그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다리를 몇 번이나 굴러서 멈춘 뒤 심호흡을 했지만 강한 충격이 그의 몸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쿨럭..!”


생각보다 강하게 느껴지는 반발력에 그는 선 채로 헛기침과 심호흡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런 그에게로 구경꾼들 사이에 있던 벨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너덜너덜한 천 조각이 있었는데 아마 붕대랍시고 들고 온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서 달가림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실소를 머금었다.


“큭, 그것도 붕대라고 가져오는 거냐.”

“그게.. 인간들이 쓰는 것하고 비슷한 건 이것밖에 없어서...”

“됐다. 지치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으니까.”

“응...”


그의 말에 벨은 다시 종종걸음으로 묘인족들 사이에 들어가서 다시 맘 편한(?) 구경꾼의 자세로 돌아갔다. 그 뒤로 이어 달가림의 시선이 사방을 훑었다. 잠시 후, 그의 미간은 짜증으로 일그러져있었다.


“어디로 날아간 거지?”


땅에 중심을 대고 맞받아친 형태인 달가림과는 달리 허공에 뜬 것처럼 빠르게 날아오던 이레인은 상대적으로 더 멀리 튕겨져 나가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찾으러가는 대신 그는 주변에 있던 묘인족들에게 시선을 향했다.


움찔.


“뭐..뭐야!”

“그래, 너로 정했다.”

“뭐?”

“너희 왕이니 알아서 찾아오도록.”

“내가 왜...!”


지목당한 묘인족은 반항을 시도하는 듯 했으나 달가림과 눈빛을 마주치자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터벅터벅 걸어서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묘인족은 그를 동정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불쌍한 녀석.’

‘앞으로는 조용히 살아야겠다.’


한 마음으로 다짐하는 묘인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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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는 걸까.]


차가운 왕좌에 앉아 왕은 고민했다. 자연스럽게 가지고 태어난 힘으로 자연스럽게 왕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묘인족들을 죽이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자손도 낳았다.


[그 다음은?]


아무런 생각도, 욕심도 생기지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술을 마셔도,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아무리 아름다운 짝을 취해도 똑같은 일상이었다. 왕은 갈구했으나 그것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것도...없다.]


그래.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모르겠어..]


그때 하늘에서 갑자기 빛이 쏟아져 내렸다. 차가운 왕좌를 녹이고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듯한...


딱.


“윽!”


이레인은 눈을 떠서 자신에게 소위 말하는 꿀밤을 날린 존재를 바라보았다.


딱.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조금 더 강해진 것 같은 꿀밤이 대신했다.


“왜.. 때리는 거야.”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

“......”


이레인은 단지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묘인왕인 자신을 때린 존재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은 달가림, 인간이면서도 어지간한 묘인족 정도는 가뿐히 밟아주는 실력의 소유자. 그리고.. 얼어붙은 자신을 녹여준 자.


“이레인, 물 좀 떠오도록.”

“내가 왜....”

“노예에게 이유가 필요한가?”

“....”


어이없지만 묘인왕의 주인이 된 인간이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본 이레인은 깊은 검정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콧방귀를 낀 뒤 물을 뜨러가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벨.”

“에? 어.. 응.”


그리고 그 광경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벨은 달가림의 부름에 갈색 눈동자를 그에게 향했다.


“왜?”

“난 이제 평범한 삶을 살 거다.”

‘이미 평범하진 않은 것 같은데...’


벨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오던 말을 되삼켰다. 묘인족의 왕 조차 가뿐히 부려먹는(?) 달가림에게 거슬려봐야 좋은 건 없었다. 어느새 일거수일투족 그의 눈치를 보게 된 벨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이곳을 살만한 곳으로 바꿔야겠지. 도대체 이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군.”


달가림이 살펴 본 묘인족의 거처, 하얀 숲은 말 그대로 숲일 뿐이었다. 왕인 이레인이 살고 있는 동굴만 어느 정도 집의 구색을 갖추고 있을 뿐 나머지는 죄다 평평한 땅이나 나무에서 자곤 했다.

게다가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식기들은 도대체 어떻게 아직 부서지지 않았는지 궁금할 정도. 벨에게 물어보니 묘인족은 술을 좋아해서 개인 술잔만큼은 소중하게 여겨서 그런 거라고 하는데.. 게으르고 술을 좋아한다, 인간이었으면 한량이라고 했겠지만 이들은 묘인족이다. 뒹굴 거리고 술을 퍼마시다가도 싸움이 생기면 손톱을 뽑아들고 달려드는 종족인 것인 것이다.


‘그래도 한량보다는 묘인족이 났군.’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한 달가림은 뾰루퉁한 얼굴로 자신의 앞에 물통을 들고 서 있는 이레인을 쳐다보았다. 그게 불안한지 이레인은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물어왔다.


“....왜?”

“큭, 아무것도 아니다.”


달가림은 낮게 웃었다. 이 종족은 왕이건 백성이건 하는 짓이 똑같았다. 비록 동물을 키워본 적은 없지만 달가림은 의외로 고양이라는 것을 길러보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물론 묘인족을 기르는 건 사양이지만.’


손만 휘둘러도 집 한 채 정도는 박살낼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술까지 엄청나게 마셔대니 이 정도면 이미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범위는 넘어선 것은 확실했다.


“우선 이 집부터 해결해야겠군.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


달가림은 외관을 제외하고는 황량하기만 한 이레인의 거처, 아니 이제는 자신의 집이 된 곳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가 아무리 생활에 크게 구애되지 않는 무인이라고 해도 이 동굴에는 이레인이 자고 있던 석관 말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벨, 이 주변에도 인간이 살고 있나?”


달가림의 물음에 벨의 고개가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끄덕여졌다.


“응,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면 인간마을이 나오긴 해.”

“가보자.”

“알았어.”


귀를 쫑긋거리며 대답하는 벨을 앞장세운 뒤 달가림은 뒤에서 아직도 뚱한 얼굴로 서있는 이레인에게 말했다.


“너는 집을 지키고 있도록.”

“내가 왜...”

“후우...”


이레인은 반박하려고 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한숨에 몸을 움찔하고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야했다. 어찌되었건 그는 자신보다 강하고 무엇보다 따르지 않으면 왠지 큰일을 당할 것만 같은(?) 눈빛에 굴복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숙이긴 싫은 듯 했다.


“어차피 아무도 안 오는데...”


그녀의 말대로 이레인의 거처는 벨이나 달가림 외엔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 원래 묘인족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잔인했던 이레인의 거처인대다가 그녀를 이겨버린 달가림이 그곳에서 지낸다는 소문이 퍼지고 나서는 우연히 지나가던 묘인족도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의외의 타격을 받은 달가림은 무안함을 최대한 감추며 벨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 뒤로 이레인의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너라면.. 나에게 이유를 줄 수 있을까.”


그녀의 은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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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양이와 함께 사는 법(2)




벨로란스 공국은 영토의 대부분이 산악지형인 작은 나라였다. 오죽하면 바로 옆에 있는 로엔 제국이 얻을 게 없어 그냥 둔다는 이야기까지 나올까. 이 작은 공국에서 타국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면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었다. 바로 특산품인 멜미르 사과와 묘인족!


“상품 멜미르가 쌉니다 싸!”


멜미르 사과는 벨로란스 공국에서만 자라나는 특이한 사과 품종으로 일반적인 사과보다 훨씬 맛이 좋고 몸에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것으로 알려져 제국은 물론 각국에서 찾는 특산품이 되었다. 게다가 일반적인 농작물과 달리 오로지 야생에서만 자라기 때문에 극소량이 나오는 것도 이 멜미르 사과의 인기가 높아지는 데 한몫을 했다.


“하얀 숲 바로 앞까지 가서 따온 멜미르가 단돈 금화 1개! 다른 곳에 가서 이 가격에 못 구합니다!”


그리고 묘인족, 이들에 대한 정보는 이들이 살고 있는 벨로란스 사람들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묘인족들은 자신들의 거처인 하얀 숲에서 거의 나오는 일이 없는 대다가 어쩌다 나타나는 묘인족들도 호전적이고 엄청난 힘을 가진 모습이었기 때문에 정보를 모으러 다가서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얀 숲 근처에는 질 좋은 멜미르 사과가 나는 것으로 유명해서 벨로란스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에 상업도시를 건설했다.

물론 묘인족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도시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크기였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농부들과 상인들의 숫자 만큼은 도시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겉모습과 달리 속은 좁군.”


복잡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며 달가림은 주변을 살폈다. 다시 봐도 이상한 곳이었다. 성벽은 쓸 떼 없이 높은 대다가 내부는 성벽이 무색할 만큼 좁았다. 그 높은 성벽이 묘인족들의 심기를 거스리지 않기 위해 방음용으로 설치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더 이상하게 여겼겠지만 아직까지 그 사실을 모르는 그는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자연동굴이나 나무에서 뒹굴 거리는 묘인족들의 거처보단 낫지 않은가.


“.....”

“벨, 왜 그러지?”

“아니야..”


그런 그의 뒤를 따르는 벨은 달가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죽을 맛이었다. 달가림의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는 충분히 눈에 띌 만한 외모였고 묘인족인 자신 또한 인간들에게 있어선 신비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을 힐끔거리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졌고 나중에는 소문이 났는지 일부러 구경하러오는 사람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오, 보기 드문 흑발과 흑안이군!”

“쉿, 말 조심하게. 일행 중 하나가 묘인족이야. 수틀리면 우릴 죽일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묘인족이 따라가고 있는 건...”

“헙.. 내 평생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묘인족을 데리고 다니는 거지?”

“쳐다보지 말게! 죽고 싶은 겐가 자네!.”


사실 외모도 외모지만 그들은 묘인족을 아이처럼 데리고 다니는 달가림의 모습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아는 묘인족은 절대 사람을 따를 종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늘어나는 인파에 짜증이 난 벨이 주변을 째려보자(?) 자연스레 구경꾼들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시선 관리해라. 벨.”

“헉...”


물론 구경하던 사람들을 째려본 것도 달가림이 금방 눈치 채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지만 어쨌든 소문이 돌아서인지 더 이상 구경하는 인파가 늘어나진 않았다. 그렇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둘은 이윽고 쓸데없이 화려해 보이는 가게 앞에 도착했다.


[가구가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군.”


저렇게 화려하게 외부를 단장해 놓을 거면 이름도 신경을 써야하는 것이 아닌가.


“오, 손님...!”


그가 짧은 감상을 하는 사이 푸짐해 보이는 가게 주인이 한 껏 미소를 지으며 나오다가 벨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굳어졌다. 그렇게 한동안 굳어진 채 어쩔줄 몰라하던 가게주인은 달가림이 벨을 가리며 앞으로 나서자 그제야 긴장을 풀며 말했따.


“어..어서 오십시오.”

“몇 가지 가구를 보고 싶은데.”

“저희 가게는 항상 최고급품만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쇼!”

“침대, 탁자 그리고...”


물론 그러던가말던가 달가림은 꿋꿋이 자신이 생각해두었던 목록들을 가게주인에게 말하기 시작했고 들으면 들을수록 가게주인의 얼굴은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특히 달가림이 야심차게 준비한 마지막 말을 들은 후의 얼굴은 피가 다 빠져버리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였다. 이윽고 가게 주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며 언성이 높아졌다.

“당신 미쳤소?!”“뭐가 말인가?”

“하얀 숲에 온천욕탕을 만들겠다니! 정신 나간 작자가가 아니면 뭐요! 거긴 묘인족의 영토란 말이오!”

“그래서?”

“허?”

“그놈들의 왕한테 허락도 받았는데 무슨 상관인가.”

“컥!”


달가림의 야심찬 계획, 그것은 바로 온천욕탕이었다. 이놈의 묘인족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씻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그였다. 혹시나 싶어 벨에게 물어보니 묘인족은 기본적으로 청결한 종족인데다가 너무 더럽다 싶으면 비오는 날에 나가서 대충 해결한다던가.

물론 그 이야기를 들은 달가림은 당장에라도 지저분한(?) 묘인족들을 씻기고 싶었지만 마땅히 씻을만한 곳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하얀 숲에는 뜨거운 물, 즉 온천수가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속으로 얼마나 뿌듯했던가. 오랜 떠돌이 생활 도중 제대로 씻지 못했던 탓에 이와 벼룩에게 끔찍하게 시달린 그는 이왕 정착하게 된 김에 제대로 뿌리를 뽑으려는 중이였다.


‘... 생각만 해도 불쾌하군.’


자고 일어나면 다리에 가득 붙어있는 벼룩과 진드기를 떼어내기 위해 뜨거운 불로 얼마나 다리를 지졌던가. 물론 그가 익힌 경지면 몸에 있는 기운을 이용해 벌레들을 떼어낼 수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 습격해올지 모르는 적들 때문에 기운을 아껴두어야 했던 것이다. 물론 이 계획은 하얀 숲의 주인인 묘인족이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로 깔려있긴 하지만 왕이 자신의 노예가 된 판에야 이미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동의(?)를 한 거나 마찬가지지 않겠는가.


“가능하겠지?”

“돈만 준다면야...”

“.....”


가게 주인의 말을 들은 달가림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췄다.


‘돈...!’


평소에 떠돌이 생활을 하던 달가림은 돈을 신용이 높은 금고에 맡겨두었다가 필요할 때만 꺼내어서 썼다.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은덩이나 금덩이는 들고 다니기 불편한대다가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품속에 항상 화폐 대신 사용할 어음을 몇 장 챙겨 다녔으나 어딘지도 모를 땅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음이 통용될 리 없었으니 실질적으로는 무일푼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곤란하군.’


어떻게 계획한 일이었던가. 떠돌이 생활 전의 기억과 떠돌아 다니며 보아온 것들을 최대한 짜내고 짜내어 지금의 계획을 수립한 달가림이다. 이왕 이곳에 정착한다면 확실하게 따질 것은 따지는 것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도저히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군. 이곳의 사람들은 나를 모를 테니 나중에 지불하겠다는 약속조차 할 수 없을 테고.’


그러다 문득 벨을 가게에 일꾼으로 줘버리고 가져가면 어떻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불가능함을 알고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신조에도 맞지 않은 일인데다가 묘인족의 성미에 가게를 박살내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하얀 숲에서 열 걸음 안에 있는 멜미르 사과를 따가도 좋아.”


그런 달가림의 생각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일까,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눈빛에 움찔한 벨이 가게주인에게 말하자 갑작스러운 침묵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가게주인의 얼굴이 한껏 밝아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얀 숲의 최상급 멜미르 사과라면 충분하고도 남지요!”

“달가림. 됐어?”

“그래, 잘했다.”


그리고는 칭찬을 원하듯 반짝이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이미 손은 자연스럽게 벨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갸르릉..”


쓰다듬는 손이 기분 좋은지 벨의 입에서 끓는 소리가 나오며 몸까지 부비기 시작했지만 달가림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벨을 밀어내며 말했다.


“안 돼, 온천에서 씻고 와라.”

“..,,”


그의 말에 벨은 순식간에 시무룩해진 채 고개를 숙였고 귀까지 처진 그 모습을 본 달가림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한 동안 고민하던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 이번뿐이다. 다음번엔 제대로 씻고 오도록.”

“응응!!”


결국 자신에게 안기다시피 부비적거리는 벨을 방치한 채 달가림의 고개가 이번에는 가게 주인에게로 향했다.


움찔.


“무..무슨 더 주문할 것이 있으십니까?”

“아 혹시...”

“꿀꺽...”


가게 주인의 마른 침 삼키는 소리가 가게를 뒤흔들 정도라 달가림의 미간이 다시 살짝 구겨졌지만 당사자는 그저 죽을 맛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에 한 번도 보기 힘든 묘인족이 나타난 대다가 그 무시무시한 묘인족을 애완동물 다루듯 하는 존재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가게를 통째로 내 놓아라 해도 줘야 할 판이었다. 이 나라에서 묘인족은 충분히 그럴 힘이 있었으니까.


“질기고 편한 옷이 있나? 성별에 관계없이 입을 수 있는 것으로.”

“물론 구할 순 있습니다만...”

“더.. 지불해야 하나?”

“아닙니다! 바로 구해다 드리지요! 그냥 가져가시면 됩니다!”


달가림은 벨로란스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가치를 몰라서 물어본 것이었지만 가게 주인의 안색이 다시 하얗게 뜨는 것을 보니 분명 다른 의미로 이해했음이 분명했다. 그것을 눈치 챘지만 돈이 없는 것은 현실이었기에 그는 누구도 모르게 작은 실소를 지었다.


“큭, 고검사가 무일푼이라.”


검사라는 존재는 언 듯 보기에 돈과는 인연이 멀 것 같지만 수준이 높은 검사, 그 중에서도 달가림을 비롯한 세 고검사들의 몸값은 저택 하나 정도는 가뿐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물론 전쟁터에서 요인 호위나 왕족의 호위정도는 해야 그 정도를 받을 수 있었지만 다른 검사들과는 천지차이다. 비상이나 백귀와는 달리 떠돌아다니느라 큰일은 맡지 않았던 달가림조차 집 몇 채 살 재물을 모았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현실은 무일푼이었으니...


‘돈을 모아야겠구나.’


돈이 없으면 계속해서 오늘 같은 식으로 될 수밖에 없는데 그건 검사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의 고개가 벨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벨의 손에 있는 무언가였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베어 먹던 벨은 달가림이 자신을 쳐다보자 불안한 듯 조심스레 물어왔다.


“...달가림도 줄까? 혹시나 몰라서 몇 개 더 따왔는데...”

“그건..”

“이거? 멜미르 사과.”

“내가 먹던 거군.”

“응, 맞아.”


달가림의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벨과 가게 주인의 대화를 생각해보니 멜미르 사과라는 것을 일종의 특산품이고 상당히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듯 했다. 게다가 벨이 자신을 데려온 후 매일 같이 저 과일을 가져오는 것을 보면 다른 곳에선 몰라도 묘인족들이 사는 하얀 숲에서는 흔한 과일인 듯 했다.


‘그렇단 말이지..’


이후 무엇을 떠올렸는지 달가림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고 분위기를 살피던 가게 주인은 그 모습을 충격 받은 얼굴로 고개를 돌린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헉... 어떻게 사람 얼굴이...”

“달가림, 이제 가자.”


그 모습을 본 벨은 조심스레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자신의 동물적 감각(?)이 무언가 불쾌한 기분을 주고 있었다. 생각에 빠져있던 달가림은 팔에서 무시 못 할 힘이 가해지자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주인장, 물건은 언제 찾으러 오면 되지?”

“사...사흘 이내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렇군. 그 때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허....”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동안 멍한 모습을 유지하던 가게주인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수습했지만 이미 다른 손님이 그 얼굴을 본 뒤였다. 잠시 후, 도시 전체에 시끌벅적한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아양을 떠는 묘인족, 그리고 그 묘인족을 애완동물 다루듯 하는 신비로운 인간의 이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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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양이와 함께 사는 법(3)



묘인족은 기본적으로 게으르다. 서열관계와 왕이라는 존재가 있음에도 왜 그런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면 답은 간단하다. 그 서열 높은 녀석들과 왕도 게으르기 때문이다.


뒹굴.


“.....”


뒹굴뒹굴.


“....뭐하는 거지?”


달가림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뒤에서 뒹굴 거리는 이레인에게 말했다. 그러나 달가림이 무슨 말을 하건 이레인은 여전히 뒹구는 모습으로 말했다.


“구경.”


그녀의 시선이 향한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는 달가림이었으나 그렇기에 그는 더 깊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는 수십 명의 묘인족들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분주히 일하고 있었다. 정작 유구한 묘인족의 역사상 단 한번 도 없었던 이 위대한 업적(?)을 만들어낸 이들은 그들을 바라보며 쉬고 있는 입장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후우.. 도와준다는 생각은?”

“그러는 너도 안 돕잖아?”


딱.


시원한 소리가 울리며 이레인은 자신의 이마를 문질렀다.


“윽.”

“힘 좋은 일손들이 있는데 뭐 하러. 그리고 왕이 내 노예이니 당연히 부려먹을 수 있는 거다.”


이레인의 말에 움찔거리며 반응하던 묘인족들의 귀가 이어지는 달가림의 말에 다시 처졌다. 어쩔 수 있나, 힘이 모자란 것을. 그러나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내가 왜 이딴 일을 해야 되는 건데!!”


한 묘인족이 씩씩거리며 들고 있던 나무판자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힘 좋은 묘인족이 힘껏 바닥에 팽개쳤으니 부서지는 것은 당연지사, 달가림의 고개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크루인, 네가 부쉈으니 네가 다시 구해오도록.”

“싫어! 애초에 묘인족인 내가 왜 이딴 걸....”


바닥에 판자를 팽개친 채 씩씩 거리는 묘인족, 크루인의 말에 달가림은 슬쩍 뒤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렇다는군.”


그곳에는 뒹굴 거리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서늘한 눈빛으로 주먹을 쥐고 있는 이레인이 있었다.


“.... 죄송합니다.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이레인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저항을 포기한 크루인은 다른 묘인족들처럼 귀를 늘어뜨리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차근차근 모습을 드러내는 온천탕을 보며 달가림은 왠지 모르게 뿌듯해지고 있었다. 물론 본인이 하는 건 가만히 앉아서 묘인족들이 게으름을 피우는지 감시하는 것뿐이었지만 건축가들도 자신들이 설계한 설계도로 인부들이 완성해 가는 것을 보며 뿌듯해하지 않던가. 게다가 기본적으로 게을러터진 묘인족들에게 일을 시키는 것만 해도 힘든 일인 것이다. 물론 예외도 있긴 했지만.


“달가림.. 시킨 대로 다 했어.”

“잘했어, 벨.”

“응...”


달가림이 일을 시키자마자 가장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이 벨이었다. 그래서 달가림은 아예 그를 현장 감독 비슷하게 해서 다른 묘인족들이 게으름을 피우는지 지켜보는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기대대로 벨은 슬슬 도망치려는 묘인족을 속속들이 잡아내며 온천탕 완공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게다가..


“......”

“왜 그러나 벨?”

“그거 해줘.”

“오늘도 잘했다.”

“갸르릉...”


머리 한 번 쓰다듬는 걸로 모든 걸 무마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자, 그러면 씻으러 가자.”

“...안가면 안 돼?”


자신의 말에 끓는 소리를 내던 벨이 단숨에 반응하는 것을 보며 달가림은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역시 고양이가 물을 싫어한다는 건 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닌가보군.“


그러나 떠돌이도 아니고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지저분한 것은 질색이었다.


“깨끗하게 씻고 나면 나에게 비비는 것도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지.”

“...할게!”

‘단순하군.’


이로서 벨은 통과.


‘문제는 다른 녀석들인데..’


달가림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벨을 바라보는 묘인족들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 순간 시선을 받은 전원이 오싹함을 느꼈다는 게 밝혀지나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


“너희들도 씻으러 간다.”

“우..우리는 괜찮아.”

“그래, 우린 좀 안 씻어도...”


신기하게도 하루만 씻지 않아도 냄새가 나는 사람과 달리 묘인족은 씻지 않아도 몸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1년에 한 번 씻는 것도 안 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냄새가 안 난다고 때가 안 끼는 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벼룩과 진드기에 고생을 해 본 달가림으로서는 용납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시키자니 이 묘인족이라는 족속들은 너무 자유로워서 불만도 자연스럽게 나와 버린다. 그래서 달가림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레인.”

“....”


묘인족들은 자신들의 왕이 조용히 주먹 쥔 손을 올리는 것을 보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귀를 늘어뜨렸다.


“아 그리고..”

“.......?”

“우리가 씻고 너도 씻는다. 나머지 묘인족들은 네가 데리고 씻도록.”


달가림이 데려가는 것은 죄다 씩씩한 남성(?) 녀석들뿐이었다. 남녀가 17세가 넘으면 한 자리에 앉힐 수 없다는 청선국의 말이 있었다. 고어처럼 남녀가 17살만 되어도 같은 자리에 앉으면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달가림도 청선국에서 자랐기에 아무리 게을러 터져서 씻지도 않는 것들이라도 여성이라면 껄끄러운 그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레인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은 달가림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싫....”

“.....”


싫다는 말을 하려는 이레인의 머리 위로 달가림의 손이 살며시 올라갔고 그에 반응해서 이레인의 손도 함께 올라가 자신의 이마를 가렸다. 원망스러운 듯 정확히 이마를 겨냥하고 있는 손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윽고 힘없이 말했다.


“...알았어.”

‘왕도 우리랑 다를 바가 없구나..’


결국 반쯤 귀를 늘어뜨리는 채 무너지는 자신들의 왕을 보며 약간이나마 위로를 받는 묘인족들이었다. 그리고 이날, 이레인과 목욕을 한 여 묘인족들의 심장이 내려앉을 뻔 했다는 것은 후일담이었다.


“이제 좀 사람 사는 것 같군.”


대충 뜨거운 물이 솟아나던 웅덩이를 파서 만든 온청탕은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만족스러운 달가림과는 달리 묘인족들의 얼굴들엔 묘한 감정이 어려 있었으니.,


“어째서 내가...”

“이건 뭔가 잘못 됐어!”


온천에 들어갔던 묘인족들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남성으로 이루어진 묘인족들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가 달가림을 다시 쳐다보는 식의 행위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당사자는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수건으로 자신의 긴 머리칼을 정성스레 닦아내는 중이었다.

청선국의 검사는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몸가짐도 중요시했기 때문에 불편하더라도 시간을 들여 닦는 것이 일상이었고 묘인족 또한 그런 것을 일일이 신경 쓸 만큼 부지런한 종족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달가림의 모습을 계속해서 힐끔힐끔 보는 것은 그들이 함께 온천탕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남자 인간이 저런 외모냐고!”

“크흑, 난 가슴까지 두근거릴 뻔 했어. 반응했으면(?) 정말 절벽에서 뛰어내렸을지도 몰라.”


달가림은 얼굴도 여성의 그것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몸의 구조도 미묘하게 여인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물론 그건 달가림이 익힌 검술 때문에 일어난 신체의 변화이긴 했지만 묘인족들이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다.

덕분에 하얀 숲의 묘인족들은 얼마동안 정체성의 혼란에 시달렸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태연스럽게 물기를 다 닦아내고 그들을 뭐하냐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뭘 그리 멍하니 있는 거지?”

‘너 때문이잖아!’


또다시 묘인족들 사이에서 기적적으로 같은 생각이 솟아올랐지만 실제로 내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달가림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자신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신체 건강한(?) 남자 묘인족이 같은 남자, 그것도 인간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져버리면 묘인족 사회에서 매장될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곧 달가림의 주변은 말없이 절망하는 묘인족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구원자가 나타났으니.


“뭐하는 거지?”


이레인은 자신의 앞에서 괴상한 모습으로 소리 없는 절규를 내뱉고 있는 묘인족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는 달가림을 보고서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여성 묘인족 일동도 멈춰선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일이다.


“나머지 것들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도대체 왜 그런 얼굴을 하는 거지?”

“그건...”

‘큰일났다!’


묘인왕 이레인, 왕이자 지금은 달가림의 노예라는 기묘한 신분이 되어버린 그녀였지만 그녀의 말을 항상 직설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던 묘인족들은 대부분 달가림이 살기를 풀풀날리며 검을 휘두르던 날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간절히 빌었다.


‘제발 하지 마라..’

“네가 여자처럼 생겼으니까.”

‘아아악!’


그러나 그들의 왕은 기대를 무참히 깨버리고 우려하던 말을 내뱉고 있었다.


“...,,”


당연하게도 달가림의 검은 말없이 뽑혀져 그들의 왕을 향해 겨누어지고 있었다.


“뭐라고?”

“난 그런 점이 좋은데.”


세상의 수많은 남자들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소리를 이레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었고 다음 순간 움찔거린 달가림의 검이 힘없이 바닥으로 향했다. 묘인족들은 사람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요 며칠간 생생하게 느낀 그였다. 그런 것에 반응해서 화를 내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닌가.


“하아... 넌 정말 구제불능이군.”


달가림은 고개를 저으며 검을 다시 검집으로 밀어 넣었다. 그 순간 그의 앞으로 하늘 색 물결이 다가섰고 부드러운 것이 그의 볼에 닿았다 떨어졌다. 달가림의 눈이 충격으로 부릅떠졌다가 이윽고 그 상황을 만들어낸 장본인에게로 향했다.


“무슨 짓이냐!”

“흐음...”


달가림은 자신의 앞에서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짓고 있는 이레인을 죽일 듯이 바라보았다. 평소의 무표정한 표정과는 다른 처음 보는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감상할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볼에 닿았다 떨어진 것은 분명 입술이었다.


“다 큰 여인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청선국사람이라면 당연히 할 법한 생각을 하며 화를 내는 달가림을 무시하며 이레인의 말이 이어졌다.


“나, 당신 첩 할래.”

“쿨럭..”

“에에엑!!!”


묘인족, 인간 가릴 것 없이 충격으로 얼룩진 목소리가 하얀 숲에 울려퍼졌다. 물론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들은 당사자였다.


“후우우....”


멀뚱멀뚱.


“후우.....”

“왜 한숨 쉬고 있어?”

“으득, 조용히 해라.”

“.....”

“후우.. 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달가림은 이를 갈면서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이레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온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 짧은 시간에 말인가?”


달가림이 묘인족과 지낸 건 불과 한 달이 안 된다. 게다가 이레인은 거의 동굴 안에 박혀있고 달가림은 벨과 함께 숲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서 마주칠 기회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첩이라니... 이 무슨 경박한 소리란 말인가..’


남녀 사이에 엄격한 기준을 두고 있는 청선국 출신인 달가림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묘인족의 기준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강하고 외모도 마음에 들어. 그것뿐인데?”

“하아..”


달가림은 벨에게 들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묘인족은 강한 후손을 두는 것에 대한 집착이 있다. 물론 그 자식이 강해져서 자신을 죽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묘인족들은 기본적으로 강한 것에 끌리고 구애를 할 때도 마음에 드는 상대와 목숨을 걸고(?) 겨루어서 자신보다 강하다고 인정했을 때만 후손을 만드는 것이다.


‘묘인족이란 종족은 정말 적응하기 힘든 종족이군.’


적어도 이레인을 두 번이나 이겼다는 점에서 한 가지 조건을 충족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남녀가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달가림에겐 그녀를 첩으로 삼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첩이지?”

“너 정도 되는 인간이면 이미 짝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냐?”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이가 가족을 만드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떠돌이여서 부인이 없다? 그럼 부인으로 할래.”

“그러니까 말 좀 들어라. 난 가족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

“그럼 마음을 바꾸면 되겠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럼 한 번 더 승부야.”


이레인의 말에 달가림은 눈이 빛났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이레인의 은빛 눈동자를 본 그의 입가에 의미모를 미소가 지어졌다. 모처럼 만의 생기 있는 눈이 아닌가.


“그 승부, 받아주지.”


달가림은 자신의 검, 운룡(雲龍)을 다시 뽑아들고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그런 그에게로 이레인은 하늘 빛 궤적을 남기며 달려들었다. 길게 뽑아든 손톱이 목으로 들어오는 것을 달가림은 왼발을 축으로 몸을 살짝 움직임과 동시에 검으로 손톱을 아랫방향으로 튕겨내었고 검과 강철보다 튼튼한 손톱이 맞붙으며 요란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까릉.


“좋은 눈빛.”


왼발을 축으로 이레인의 공격을 흘려낸 탓에 그녀의 뒤쪽에 서게 된 달가림은 짧은 감상과 함께 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반격을 차단함과 동시에 상대에게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 위한 베기는 바람 같은 이레인의 움직임으로 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그녀의 하늘빛 머리칼만 흩날리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달가림의 검이 올라가며 방어하는 자세를 만들었다.


캉.


“그게 항상 벨에게 하던 칭찬이라는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어느새 자신의 지척에서 손톱을 내밀고 있는 이레인을 보며 달가림은 짧게 내뱉은 후 검을 훌쩍 떨쳐내었다. 그러자 가볍게 날아가 다시 자세를 잡는 이레인을 보며 달가림은 자신도 모르게 불평했다.


“정말 쓸 떼 없이 신체능력이 뛰어나군.”

“그것도 칭찬?”

“... 이번엔 조금 다르다는 것으로 하지.”


달가림의 자세가 다시 바뀌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이레인의 자세도 바뀌어갔다.


“저번에 썼던 것과 다르네?”

“아무래도 그건 마구잡이로 쓸 수 없는 기술이다. 항상 몸 상태가 같은 수는 없는 법이지.”

“그렇구나.”


파앙.


옅게 웃은 이레인의 몸이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튕겨졌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달가림의 검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삼검(三劍).. 하루살이베기.”


말 그대로 달빛에 홀려 밤하늘을 유영하는 수많은 하루살이들을 남김없이 베어 넘길 정도로 촘촘한 검의 그물이 펼쳐졌다. 말 그대로 방어만을 위한 검술, 수많은 실력자들의 검을 무력화시키고 천라지망에서도 그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검술이었다. 검술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지금 그의 검을 본다면 그저 감탄했으리라.

그러나 이레인의 손톱과 그가 만들어낸 막이 충돌하던 순간 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역시 몸이 성하지 않은 상태로는 무리였나.’


달가림은 검을 갈무리한 후 비틀거리는 몸을 부여잡았다. 얼마 전에 이레인과의 승부에서 사용했던 달빛베기가 문제였다. 온 몸에 있는 근육을 쥐어짜서 쾌속으로 휘두르는 검은 몸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검술이었다. 그래서 굳이 온천탕까지 만들어가며 회복하려던 것인데..


“이래서야... 의미가 없어져 버렸군.”

‘그래도 이레인의 눈이 바뀌었으니 손해 보는 건 아닌가?’


자신의 밑에서 손톱을 내밀고 있는 이레인의 눈을 살펴본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엇에도 관심이 없던 죽어버린 은빛 눈동자, 그 속에서 다른 것을 확인한 그는 천천히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죽을 만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얕은 상처도 아니었다. 지상에 발을 딛고 사는 종족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묘인족, 그 중에서도 묘인왕이 전력을 다해 공격한 것이다. 본인이 알고 있는 최고의 방어술을 펼쳤지만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공격은 그의 허리를 가르고 피를 흘리게 했다.


“다..달가림!”


그런 달가림의 곁으로 벨이 헐레벌떡 달려와 지난번 보다 조금 나은 상태의(여전히 붕대라고 보긴 어려웠다) 천 조각으로 그의 상처를 감기 시작했다. 그가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달가림은 고통 속에서도 피식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이번엔 네가 이겼다.”

“응, 근데 별로 안 기뻐.”

“어째서지?”

“나도 잘 모르겠는 걸.”


이레인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는 갸웃거리던 고개를 멈추더니 달가림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옆구리에 난 상처였다.


“인간은 약하다던데.. 혹시 죽어?”

“죽지는 않을 거다. 묘인족과는 달라서 회복은 오래 걸리겠지만 쉬면 괜찮아지겠지.”


하루살이베기는 방어를 위한 수법이라 이레인의 공격을 거의 대부분 흘려낼 수 있었다. 문제는 대부분 흘려내고 맞은 공격이 일반 사람이라면 치명상이라는 것이었지만 검사에게 있어 상처는 일상이나 마찬가지.


‘그나저나 저 백치 같은 얼굴이라니, 도저히 오만하고 강한 묘인족의 왕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그는 실소를 지으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조금.. 쉬도록 하지.”


어설픈 벨을 가르쳐 가며 붕대를 감은 달가림은 고통을 삼킨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이레인의 동굴에 도착하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물론 평소에 예의를 중시했던 그라면 바르게 앉았을 테지만 이 순간은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곁에 붙어있던 벨은 그것은 눈치 챘는지 눈빛에 불안감이 찬 모습으로 물어왔다.


“달가림?”

“...”

“몸이 뜨거워..?”

“괜찮다.”


그의 몸에 손을 대고 놀란 표정의 벨에게 답하던 달가림은 갑작스럽게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이건 마치 독에 당한 것 같군..’


암살의 제왕이라는 살왕을 상대할 때 그의 수하들이 사용한 수법 중 하나가 독이었다. 그 당시엔 독에 대해선 전혀 모를 때였기 때문에 정말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야 겨우겨우 그를 벨 수 있었다.


‘그 때 이후 어지간한 독에는 면역이 생겼을 터인데...’


청선국이나 주변국이 아니라면 그가 당해보지 않았던 독이 있을지 몰랐다. 그는 전신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수련을 통해 쌓아둔 기를 이용하면 몸에 있는 독기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이 무방비 상태가 되긴 하지만 지금 이곳은 묘인족의 하얀 숲, 묘인족들 외에는 누구도 올 수 없는 곳이다. 게다가..


‘내가 조용히 있으면 귀찮은 일이 없으니까 오히려 좋아서 놔두겠지.’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달가림이 앉은 채로 조용히 침묵하는 순간부터 묘인족들은 슬슬 눈치를 보더니 하나둘 씩 자신이 할 일을 하러(대부분은 낮잠이다.) 사라졌고 남아있는 것은 항상 달가림의 곁에 붙어있는 벨과 원래 그곳에서 살던 이레인 뿐이었다.


“.....”

“쿨럭..”


그리고 이레인이 벨을 가만히 응시함으로서 사레 걸린 듯 기침을 한 벨 또한 조용히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달가림과 이레인 두 명이 되었다. 물론 몸의 기운을 다스리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달가림을 일방적으로 그녀가 지켜보는 것뿐이었지만. 한참을 지켜보던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빠른 속도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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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인은 여느 묘인족처럼 게으르다. 게다가 맷집이 좋은 편이라 시비가 붙어도 싸우던 쪽이 공격하다 지쳐 먼저 물러나버렸기 때문에 더욱 더 삐뚤어진 성격은 묘인족 중에서도 막나가는 편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존재를 보며 연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

‘도대체 왕이 왜 날 찾아오는 거야!?’


50년 전 잠에 들고난 후에 먹지도 않고 잠만 자던 왕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덕분에 놀란 크루인은 낮잠을 자던 나뭇가지에서 그대로 떨어져 내려서 붉어진 이마를 문지르며 왕을 맞이하게 된 기괴한 상황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

‘무슨 짓을 하려고...’


50년 전 왕이 움직일 때는 항상 피바람이 불었다. 그렇기에 크루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조금씩 뽑아내고 있었다. 이레인 또한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눈썹을 꿈틀했으나 곧 눈을 한 번 감았다 뜨고는 말했다.


“인간은 어떻게 치료하지?”

“예..?”


묘인족은 어지간한 상처가 아니면 잘 먹고 쉬기만 해도 자연치유가 된다. 그러니 다른 종족이 어떻게 치료하건 그들에겐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크루인은 순간 자신이 들은 말에 반사적으로 되물었고 그 반응에 이레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본 크루인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자신이 아무리 맷집이 좋아도 왕에게 걸리면 순식간에 몸이 조각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떻게 치료하는지 물었다.”

“인간은.. 의원이라는 인간에게 치료받는다고 들었..”

“그럼 의원이라는 인간을 구해와라.”

“...알겠습니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왠지 찝찝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왕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


‘뭐, 대충 인간 하나 족쳐서 데려오면 되겠지.’


찝찝한 마음에 대충 해치우려고 생각하던 크루인에게 이레인의 말이 이어졌고 그 즉시 크루인의 몸이 전속력으로 움직였다.


“죽이지 말고 멀쩡하게. 늦으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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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는 잊은 줄 알았던 너무나도 정겨운 모습의 남자, 집안의 가보인 운룡(雲龍)을 손에 쥐고 등을 보이며 말하는 그의 뒷모습은 강인했지만 동시에 한 없이 부드러웠다.


[기억하거라. 어떤 인연이건 가벼이 보면 안 되느니.]


‘당신은 죽어서도 날 가르치시는군요. 아버님.’


달가림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몸을 움직이려다가 눈을 찡그렸다. 몸은 천근만근이었고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그는 몸에서 힘을 빼버렸다. 얼핏 보면 자포자기한 상태 같았지만 사실은 여기서 힘을 써 봐야 순식간에 털고 일어날 수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여긴..”


간신히 손을 들어 뻗어보니 차갑고 매끄럽게 다듬어진 돌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리고 사각형의 천장, 달가림은 묘하게 불쾌한 마음이 드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관이군.”


이레인의 동굴 속에서 단 하나 가구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가 잘 때 사용하는 관 뿐이었다. 무려 50년이나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이 석재 관은 여전히 말끔한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었고 여전히 애용하는(?) 잠자리였다.


“조금.. 그렇군.”


잠자리로 쓰고 있건 어쩌건 일단 관이지 않은가. 찝찝한 마음에 달가림이 일어나려 마음먹은 순간, 느껴지는 인기척에 그의 고개가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펑퍼짐한 잠옷을 입었지만 굴곡진 몸매 덕에 가린 의미가 전혀 없는(?) 여성이 서 있었다.


“아, 일어났군요!”

“.....”


달가림은 자신도 모르게 그 굴곡진 부위에 눈이 가는 자신을 저주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건 역효과를 불러오고 말았으니..


“앗, 괜찮나요?”


그가 눈을 감자 여성이 다가섰고 가까워지니 당연히 그녀의 몸을 보기엔 더 편하게 되어버렸다. 결국 달가림은 한숨을 내쉬며 손사래를 쳐 그녀를 물리쳤다.


“괜찮소. 그것보다 그 옷차림 좀 어떻게 해줬으면 하는데.”

“미안해요. 근데 어쩔 수 없어요. 나도 자고 있다가 갑자기 끌려왔거든요. 갑자기 와서 다짜고짜 의사를 데려가겠다는데 어쩔 수 있나요.”

“.....”


그녀의 말을 들은 달가림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생각들이 스쳐지나갔고 곧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우리 고양이들이 실례가 많았소.”

“... 설마 묘인족을 말하는 건가요?”

“음?”

“아..아니에요. 묘인족들을 그렇게 부르는 건 또 처음이라..”


여성은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당분간은 몸을 추스르는 게 좋아요. 다행히 어디가 아픈 게 아니라서 푹 쉬면 나을 거니까.”

“독에 당한 게 아니었나?”

“독이요? 아뇨, 굳이 말하자면... 몸의 긴장이 갑자기 풀렸다고 해야 할까요?”

“긴장이 풀렸다...?”


천하를 유랑하던 시절, 달가림은 항상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과 검사들을 대면해야 했고 그렇다 보니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을 대비하느라 잘 때도 언제나 검을 뺄 수 있는 자세로 자곤 했다. 그런 자신이 긴장이 풀렸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 밖에 없으리라.


‘적응해버렸다는 것이겠지.’


게으르고 노닥거리는 것 밖에 하지 않는 묘인족들, 그들은 강력하지만 평소 생활에서는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누군가 건드리기 전에는 조용한 존재들, 어느새 자신도 물들어버렸다.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아.’

“헙...”

“....?”

“미..미소가 참 예쁘시네요.”

“......”


달가림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 짓던 얼굴을 얼른 평소의 무뚝뚝한 모습으로 바꿨지만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후였다.


“남자 분이신 것 같은데 마치...”

“거기까지.”

“네?”

“말 안해도 무슨 말을 할지 아니까 그만하지.”

“아, 네....”


그러나 달가림의 수난은 끝난 게 아니었으니..


부스럭.


“시끄럽다 인간.”


달가림은 자신의 옆에서 눈을 살짝 뜬 채 중얼거리는 존재를 보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말했다.


“... 어째서 네가 내 옆에서 자고 있는 것인지 설명을 요구해도 되겠나?”


그의 말에 옆에서 관과 마찬가지로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를 흰 천을 덮은 채 머리만을 내밀고 있던 이레인이 말했다.


“그거야 나는 부인이니까.”

“나는 허락한 적이 없다만?”

“승부, 내가 이겼잖아?”


그리고 이레인의 말에 달가림은 이마를 짚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승부 아닌 승부가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고 물리기엔 검사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사이 이레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이제 같이 자도 상관없잖아? 번식기야 아직 한참 멀었지만.”

“너는 부끄러움 이라는 것을 좀 알아야...”

“왜?”

“....후우.”


이레인과의 승부를 너무 즐겼던 게 문제였다. 이게 무슨 잘 가다가 늪에 빠진 꼴이란 말인가.


“잘 어울리는 데요?”

“.....”


게다가 묘하게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이 의사까지. 달가림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조용히 살고 싶었던 그의 계획이 차츰 어긋나고 있었다.


“하아...”


달가림은 모처럼만에 아주 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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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숲은 언제나 조용하다. 그것은 하얀 숲을 포함한 영토를 가진 벨로란스 왕국이 개척을 활발하게 할 정도로 큰 나라도 아닌데다가 그 안에 있는 실질적인 숲의 주인, 묘인족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내 이름은 이드리브, 잘 부탁 할게요~”

“시끄럽다 인간.”

“아이 참, 부끄러워 하기는.”

“...이 여자, 죽여도 돼?”


그러나 오랜만에 하얀 숲은 시끌벅적해지고 있었다. 원인은 두 여성의 대화, 물론 한 쪽은 연신 웃기만 하고 한 쪽은 살기를 쏟아내며 말하고 있는 괴상한 상황이긴 했지만.


“네 할 일은 끝났는데 왜 여기에 머무는 건가 인간.”

“에.. 그냥 재미있어 보여서?”

“....”

“이레인, 손톱 집어넣도록.”


달가림을 치료하기 위해 왔던 의사, 자신을 이드리브라고 소개한 여인은 달가림이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하고 나서도 하얀 숲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본인의 말로는 흥미가 돌아 그렇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벨에게 들었던 이 나라의 사람들의 반응과 비교하면 결코 평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미 살기를 뿌리는 이레인과 웃으면서 대화를 하고 있는 시점에서 평범한 사람은 아니지.’


요 며칠 동안 그녀를 관찰한 달가림은 그녀가 여러모로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심장 언저리에서부터 느껴지는 미증류의 기운은 그것을 발견한 달가림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할 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이레인도 아마 그것을 느끼고서 그녀에게 살기를 뿌리는 것이리라.


“이드리브라고 했던가?”

“네, 그렇답니다 환자씨~”

“......”


아마 자신도 저 여인을 좋아할 수만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달가림이었지만 아무튼 그녀에겐 도움을 받은 처지였다. 옛말에 죽어서도 은혜는 갚는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나저나 환자씨는 참 예쁘게 생겼네요. 그렇게 되는 비결이 뭐에요?”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달가림의 이마에 핏줄이 솟아났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옆에 얌전히 앉아있던 벨에게 말했다.


“벨.”

“응...?”

“나를 잡고 있어라. 안 그러면 저 여자를 베어버릴 것 같으니까. 으득.”

“.....”


이를 갈며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부탁을 하는 달가림의 모습에 벨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냥 신경 안 쓰면..”

“저 여자를?”

“.....”


달가림의 반문에 벨은 입을 닫은 채 고개를 숙였다. 여의사, 그러니까 이드리브가 하얀 숲에 머물기로 선언한 그날 이후 하얀 숲이 조용할 날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녀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이레인이 그녀가 눈에 띌 때 마다 살기를 뿌리며 으르렁댔던 것이다. 지금도 화가 난 이레인이 손톱을 빼들고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지 않은가.


“죽여 버리겠다.”

“이레인.”


이드리브에게 다가서던 이레인은 달가림의 말에 불만 섞인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왜 말리냐는 것처럼. 그는 그런 그녀를 손짓으로 부르며 말을 이었다.


“죽여 봐야 얻을 것도 없다.”

“그래도...”


어느새 자신의 곁에 다가선 이레인이 여전히 불만스러운 모습으로 말하자 달가림의 손이 그녀의 하늘 빛 머리로 향했다.


“갸르릉..”


달가림의 손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자 이레인의 입에서는 기분 좋을 때 나오는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서인지는 몰랐지만 이레인을 비롯한 묘인족들은 그가 머리를 쓰다듬을 때면 무방비 상태로 고양이처럼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곤 했다. 이유를 모르지만 무척 편리하기에 십분 이용하는 달가림이였다.


“정말 당신에게는 순한 고양이일 뿐이네요?”

“그만 하도록. 네 말대로, 고양이 놀리는 게 재미있나?”

“.....”

“하하..”


벨은 입을 황당함에 쩍 벌렸고 능글거리던 이드리브 조차도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당사자는 마치 그게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실제로 달가림 본인은 매우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실없군.”


사실 그의 사고방식은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릴 적에 가족을 잃고 그 뒤로는 천하를 떠돌아다니는 삶을 산 그가 일반인들과 동일한 사고를 가지길 바라는 것은 사치이리라. 물론 검사의 소양으로 학문을 배우긴 했지만 말 그대로 학문일 뿐, 그의 사고에 큰 영향을 주진 못했다. 그 일례로 달가림은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눈빛으로 이드리브를 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흠흠..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라서 조금 당황했을 뿐이에요.”

“별걸 다 당황스러워 하는군.”

“갸릉.”


여기서 더 대화가 이어졌다면 할 말이 없었던 이드리브는 달가림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비빈 탓에 대화의 흐름이 끊기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설전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달가림에겐 어째서인지 위축되어 버린다. 그것은 그녀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게다가 어느 정도 그녀에 대해 꿰뚫어본 것 같은 눈치가 아닌가.


‘그래서 남은 거니까. 천천히 관찰해보면 되겠지.’


모처럼 만의 즐거움을 충분하게 즐기고 싶은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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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법사.



세상에 그냥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물은 떠오지 않으면 마실 수 없고 과일은 따지 않으면 먹을 수 없듯 당연한 법칙이다. 그것은 하얀숲과 달가림이 살았던 청선국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달가림은 지금 그 법칙이 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무언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의 이레인이 등을 돌린 채 누워있었고 그녀의 옆에 있는 벨은 삭막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물어뜯어지지도 않는 자신의 손톱을 씹고 있었다.


“....”

“호호호..”


사건의 시작은 이렇다. 목이 말랐던 달가림이 이레인에게 물을 떠오라고 시키려던 순간 그녀 대신 이드리브가 나서면서 이레인의 고까운 눈빛을 능글맞게 받아 넘기고는 당당하게 외친 것이다.


“나와라 물!”


쏴아.


그리고 진짜 허공에서 물이 나왔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기에 겉으로는 드러내진 않았지만 달가림은 충격에 휩싸였고 그런 그의 모습을, 이레인은 불만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여기서 끝났다면 놀랍다 뿐이지 분위기가 삭막해지진 않았으리라. 문제는 그 이후부터 이레인에게 달가림이 무언가를 시킬라치면 이드리브가 나섰다는 것이다.


“날씨가 조금 덥군..”

“호호, 불어라 바람!”

“불을 지펴야...”

“파이어!”

“......”


도대체 무슨 수를 쓰는 것인지 그녀가 손을 휘저으며 외치면 허공에서 물이 나왔고 빈손에서 바람과 불이 튀어나왔다. 보통사람, 아니 구경하던 벨이 눈빛을 반짝이며 볼 정도로 신비한 광경이었지만 이레인은 이드리브를 불만스럽게 노려본 후 항상 붙어있던 달가림의 곁에서도 떨어진 채 돌아 누워버렸다.


‘흐음..’


그 광경을 본 달가림은 잠깐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을 뿐 이드리브에게 눈을 향하며 말했다.


“괴상한 수를 쓰는군.”


그는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나름대로 세상을 많이 떠돌아 다녔다고 느꼈지만 그녀가 부리는 수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런 반응이 좋은지 이드리브는 연신 방긋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어머, 이건 마법이라는 거랍니다~”

“마법?”

“이 세상엔 정해진 법칙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살짝 뒤틀어서 원하는 대로 사용한다면? 그게 마법이죠.”

“흐음...”

“그냥 쉽게 말하면 법칙을 훔쳐서 뒤트는 거예요.”


신나게 설명하던 이드리브는 달가림의 한마디에 덜컥 멈춰섰다.


“도둑놈이군.”

“아니... 저는 마법사..”

“이곳에선 도둑을 마법사라고 하나?”

“아니 도둑이랑은 다르다니까요...”

“무엇이 되었건 본인의 입으로 훔치는 것이라 했으니 도둑이지 않은가.”

“훌쩍.”


그의 말에 이드리브는 대단히 상처받았다는 얼굴로 눈물을 훌쩍였다. 그러나 달가림이 누구인가, 수라의 길을 걷고 검 한 자루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검귀(劍鬼)였다. 그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이드리브에게 말했다.


“가짜 눈물은 그만두지.”

“어라? 들켰나요?”

“그 정도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내 감각은 무디지 않아.”


달가림이 상대했던 적중에서는 여러 가지 변장을 하고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이 많았다. 어린아이부터 노파까지 온갖 자객들을 체험한 달가림으로서는 대충 훑기만 해도 연기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이드리브는 자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약간의 억울함을 느끼며 말했다.


“아무튼 당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마법은 위대해요! 산을 날려버릴 수도 있고 호수의 물을 모조리 증발시킬 수 있어요. 그리고 하루아침에 성벽을 쌓아올릴 수도...”

“잠깐, 하루아침에 성벽을 쌓아올린다고?”

“그...그런데요..”


도중에 달가림이 자신의 말을 멈추자 순간 불안함을 느낀 이드리브는 몸을 움츠렸으나(그녀의 몸이 움츠린다고 들어갈 몸매는 아니었지만)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달가림의 눈에선 빛이 나고 있었다.


“그렇단 말이군... 좋아.”


그의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계획만 해두었던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도저히 사람, 아니 정확히는 사람과 묘인족이 살만한 곳이라고는 볼 수 없는 하얀 숲을 살 만한 곳으로 바꾸기 위해 그간 얼마나 고심했던가. 그러나 건축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대다 이미 있는 온천에 지붕을 놓는 것만 해도 하루 종일 걸리는 묘인족들을 데리고 일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정성이 통했는지 하늘은 건실한 일꾼(?)을 보내주었다. 게다가 혼자서 성을 세울 수도 있다니 수천 명의 일손이 한 사람에게 있는 셈이 아닌가.


“여기에 머무는 이상 밥값은 해야겠지.”

“이미 당신 시중을...”

“내 시중은 이레인으로 충분해.”

“묘인왕이 당신을 시중든다고요?”

“그래.”

“.......”


묘인족의 왕을 거리낌 없이 시종으로 취급하는 그의 모습에 이드리브의 표정에 어이없음이 떠올랐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강렬한 눈빛에 곧 어깨를 늘어뜨렸다. 지금 아쉬운 건 자신이었다.


“...알겠어요. 제가 뭘 하면 되죠?”

“일단 요리용 탁자와 의자부터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데.”

“날 목수로 써먹다니....”


이어지는 달가림의 말에 그녀의 어깨는 더욱 쳐졌다. 그러나 궁시렁거리면서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걸 보면 보인도 밥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던 모양. 동굴을 나가던 그녀는 문득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묘인족 몇 명 써도 되죠?”

“그걸 왜 나한테 묻지?”

“그냥 말했다간 제 목숨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은걸요?”


그런 그녀의 말에 달가림이 등을 돌리고 있는 이레인에게 시선을 향하자 그녀의 귀가 몇 번 꿈틀거렸다. 그것을 잠시 보고 있던 달가림이 말했다.


“마음대로 쓰라는군.”

“....”


말도 없이 귀만 보고 심중을 알아내는 달가림도 대단했지만 그런 그의 말에 아무런 반발 없이 가만히 있는 이레인의 모습도 대단했다. 말 그대로 척하면 척이라는 것 아닌가. 물론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사람 중에서도 서로의 손짓만 봐도 상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사람끼리의 이야기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들은 묘인족과 인간이라는 다른 존재인 것이다.

이드리브는 당장 연구를 하고 싶어 근질거렸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우선은 함께 지내며 두 존재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해야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돌아서서 걸어가는 그녀의 귀로 나직한 달가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마음대로 쓰라했다고 해서 고양이들을 데리고 장난치지 말도록.”

“.. 흠흠.”


정곡을 찔렸는지 이드리브는 헛기침을 하고 동굴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어느 정도 멀리가자 달가림은 아직도 돌아 누워있는 이레인에게 말했다.


“이제 만족하나?”


움찔.


그의 말에 이레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대신 하늘빛 머리칼 사이로 솟은 두 귀가 반응하는 모습에 달가림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커다란 고양이나 마찬가지의 모습이 아닌가. 보면 볼수록 비슷한 그 모습에 그의 손이 자동으로 이레인의 머리로 향했다.


문질문질.


이레인은 그의 손을 거부하지는 않으면서도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말했다.


“그 인간, 마음에 안 들어.”


평소에도 말솜씨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보다도 더 무미건조한 말투에 달가림은 그녀의 몸을 억지로 돌아 앉혔다. 그러자 보이는 찌푸려진 눈썹과 불만 가득한 은빛 눈동자, 그 모습을 확인한 달가림은 어이가 없었다.


‘고양이가 질투가 많다더니 사실이었나.’


그녀가 보이는 모습은 분명히 질투, 그것도 어린아이의 그것에 가까운 질투였다.


‘겉모습만 자랐지 속은 애나 다름없군.’


그러나 싫지 않았다.


“어리광을 부리는군.”

“달가림!”

“하지만 그것도 좋지. 가식적인 것보단 나으니.”


그런 점에서 이레인은 확실히 그의 마음에 드는 존재였다. 화 낼 때는 화내고 웃을 때는 웃는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묘인족들이 그랬다. 물론 이레인의 경우에는 다른 묘인족보다 까탈스럽긴 했지만 달가림에겐 그녀도 한 마리의 큰 고양이일 뿐이었다.


“....”


이드리브에 대해 따지고 들려던 이레인은 이어지는 그의 말에 얌전해졌다. 최대한 아닌 척 하고 있었지만 유난히 움직이는 귀는 그녀의 기분이 풀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것은 곧 이드리브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그녀에게 인간이란 약하디 약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서 옅은 미소를 지은 달가림을 제외하고는.


“오늘 탁자와 의자가 생기면 제대로 된 음식을 해봐야겠군.”

“...안 하면 안 돼?”


지난 번 온천 건설로 피해를 본(?) 그녀였기에 달가림의 말을 들은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했지만 이미 굳게 결심한 달가림을 꺾을 순 없었다. 그가 하얀 숲에 와서 먹은 음식이라곤 멜미르 사과가 전부, 물론 묘인족들이 가끔 사냥해온 고기를 주긴 했지만..


‘문제는 피가 뚝뚝 흐르는 생고기라는 점이지.’


그렇다고 조리를 하자니 조리기구도 가구도 없어서 그냥 물리던 것이 이드리브가 오면서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래봐야 간단히 굽는 정도겠지만 생고기보단 낫지 않은가. 물론 검사, 수련자로서의 그는 절제력이 강했지만 그래도 하루 세끼를 한 달 넘게 같은 과일로 연명하는 것은 전설속의 도인이 아닌 이상 힘들었다. 때문에 그의 의지는 굳건하다 못해 열정적이었다.


“벨, 마을에 가서 조미료를 조금 얻어 오도록.”

“조미료? 그게 뭔데?”


달가림은 동굴에 퍼져있던 삭막함에서 해방되어 눈빛을 반짝이는 벨의 반문에 잠시 멍해졌다. 과일이건 고기이건 생식을 하는 묘인족에겐 요리라는 개념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순간 몰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은 그가 말했다.


“... 그냥 조미료라고 하면 알아들을 거다.”

“응, 알았어.”


벨은 동굴 안의 공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빠른 속도로 사라졌고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달가림은 이번엔 이레인을 쳐다봤다. 그녀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두렵다는 듯 슬쩍 몸을 움츠렸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듣곤 눈을 반짝이며 동굴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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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뭐야.”

“요리라는 것을 한다던데?”

“쿨럭.. 와..왕이?”


하얀 숲의 묘인족들은 자신들 눈앞에 펼쳐져있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고 수군거렸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달가림와 벨, 이드리브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레인도 함께 있었지만 분주하다고 하지 않은 이유는 말 그대로였다.


“이레인, 사슴 좀 다듬어라.”

“내가 왜...”

“먹기 싫은가 보지?”

“...할게.”


통상적인 가정집과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묘인족들에겐 생소한 광경이었기에 모두들 충격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잔혹한대다 게으르기로는 어떠한 묘인족들보다 심한 자신들의 왕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다. 물론 본인의 의지보다는 달가림의 지시에 따르고 있다는 것이 정확했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그것만 해도 세상이 뒤집어질 일이었다.


“호호호~”


이드리브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커다란 솥을 들고 무언가를 휘젓고 있었는데 궁금해서 다가간 몇몇 묘인족을 절로 꺼림칙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눈빛은 묘하게 위험한(?)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저 인간이 만든 건 뭔가 이상해..”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아.”


묘인족들은 멀찍이 그녀에게서 물러섰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달가림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곁에 이레인이 있어 가까이 다가서지는 못했지만 그곳에서 풍겨오는 생전 처음 맡는 냄새가 그들의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킁킁, 이 냄새는 좋은데?”

“와, 맛있는 냄새다.”


자연스레 달가림과 이레인의 주변으로는 군침을 꼴딱꼴딱 삼키는 묘인족들로 가득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던 것을 맛 본 달가림의 결정적인 한 마디!


“음...맛있군.”


평소에도 거의 말이 없는 그가 말할 정도라면 본인도 상당히 만족스러워할 정도라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애검, 운룡은 허리에 메어둔 채 나무를 대충 깎아 만든 국자를 들고 있었다. 물론 요리라고하기도 묘한 떠돌이 시절에 해 먹던 조리법을 응용한 것에 불과했지만 벨이 마을에서 구해온 조미료를 조금씩 첨가하니 생각했던 것 이상의 맛이 나고 있었다.


“묘인족이라는 것도 생각보다 쓸모 있을 때가 있군. 부엌칼로 안성맞춤이야.”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국자와 잘 손질된 사슴고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묘인족의 손톱은 단단한 만큼이나 예기 또한 명검에 준할 정도라서 어지간한 사물은 쉽게 조각낸다.

이레인을 비롯한 묘인족들과 겨루면서 그 사실을 깨달은 달가림은 벨과 이레인에게 국자를 만들고 고기를 손질하는 것을 맡겨버렸다. 벨이야 워낙 달가림을 따르니 군소리 없이 따르는 데다 이레인을 보니 더러워진 손톱을 일부러 길게 뽑은 다음 부러뜨려서 새 손톱을 뽑아내고 있었다. 이것이야 말로 더러워지는 걸 걱정할 필요가 없고 손질할 필요도 없는 천하의 명검, 아니 부엌칼이었다.


“부엌칼이라니..”


달가림과 마찬가지로 표정변화가 거의 없는 이레인조차 달가림의 말을 듣고는 어이없다는 눈빛을 할 정도였으니 다른 묘인족들이야 말 할 필요도 없다.


“저게!”

“인간 주제에 건방지긴!”


지상 최고의 종족이라고 까지 불리는 자신들을 고작 부엌칼(!) 취급하는 달가림에게 분개하는 묘인족들도 있었지만 그를 뼈저리게 겪어보았던(?) 크루인을 주축으로 한 주변의 만류에 곧 귀를 늘어뜨렸다.


“아서라.. 너 그러다 죽는다? 난 저 인간한테 맞아죽을 뻔 했어.”

“그래, 왕 발끝자락에도 못 미치는데 어떻게 왕을 이긴 인간을 이기냐?”

“.....”

“다 들었다. 너희 몫은 없으니 그렇게 알도록. 난 적대시 하는 자들에게 호의를 베풀 만큼 너그럽지 않으니까.”


게다가 마무리로 달가림의 일침까지!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묘인족은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흙만 만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고 묘인족들은 희생양이 되어버린 동족을 보며 몸을 떨었다. 일신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가끔씩 튀어나오는 일침 섞인 말은 대화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을 무력화시키기엔 충분했다. 그 사이 달가림은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켜 이리저리 몸을 풀고는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다 되었군. 먹도록 하지.”


그의 말에 군침만 흘리고 있던 묘인족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들었다. 그러나 막 한명의 묘인족이 맛을 보려던 순간, 달가림의 손이 그것을 제지했다.


“....?”

“기다려.”


맛을 보려던 묘인족은 물론 이레인과 벨을 제외한 모든 묘인족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그는 이레인을 향해 시선을 향했고 이레인은 다시 벨에게 시선을 향했다. 왕의 시선을 받은 벨은 헐레벌떡 일어나서 어디론가 향했고 그러자 이레인의 이마에서 시원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딱.


“왜 때려...?”

“네 일을 왜 떠넘기는 건가.”

“....”


이마를 감싸쥔 이레인의 눈에 불만이 솟아났다. 아무리 묘인족이 체면과는 거리가 멀다곤 하지만 이래서야 왕으로서 기품이 너무 떨어진다. 그러나 한동안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던 이레인은 곧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서 뭔가 불평이라도 했다간 한동안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묘인족들 중 누군가 마음에 안 드는 일을 했을 때 달가림은 항상 그 묘인족을 빤히 쳐다보곤 했다. 한 마디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식은땀이 흐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에 담긴 질책이란! 평생 철면피로 살아온(?) 이레인조차 견디기 힘든 수준이었기에 그녀도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으면 슬슬 피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지금도 그녀는 달가림의 눈치를 보고 있었고 달가림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 자신이 할 일을 남에게 미뤘으니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벨이 늦군. 이레인, 가서 살펴보고 와라.”


달가림의 말에 찝찝한 모습으로 앉아있던 이레인은 기다렸다는 듯 벨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와 벨은 양 손에 커다란 독을 들고 돌아왔다. 벨이 조금더 큰 독을 든 것 같지만 그 정도는 넘어가주기로 하는 달가림이었다. 무어라 해도 일단은(?) 왕 아닌가.


찰랑.


두 묘인족이 내려놓은 독에서는 액체가 출렁이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술 냄새가 풍겨져왔다. 낮에 달가림이 이레인에게 말했던 것은 바로 술, 귀찮음에 찌들어 사는 이레인도 다른 묘인족들처럼 술을 좋아하는지 구해오라는 말에 눈빛을 반짝이며 움직이더니 반나절도 안 되어 술을 잔뜩 구해왔던 것이다.


“좋은 술이군. 어디서 구했나?”

“...그냥 얻어왔어.”


달가림의 말에 눈을 피하는 걸 보니 틀림없이 그냥 얻어 오진 않았으리라. 시킬 때부터 대충 예상하긴 했지만 그녀에게 당부해둔 것이 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하는 달가림이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겠지?”

“응, 다치지 않았어.”


자신은 다만 손톱을 뽑아 술을 준 이들 앞에서 정돈하면서(?) 한 마디만 했을 뿐이다. ‘오랜만에 술이 마시고 싶다’라고.


“그나저나 정말 향이 훌륭한 술이군. 사람이 만든 것 같지가 않아.”

“맞아, 사람이 만든 것 아닌데?”

“그럼 누가 술을 만든다는 거지?”


이레인의 말에 달가림은 의문을 가졌다. 만사 귀찮아하는 묘인족들이 술을 빗는다는 지루한 행위를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술을 구하는 방법은 다른 곳에서 얻어오는 것 뿐인데..


“이 근처에 엘프도 살아서 그들의 과실주를 좀 뺏어..아니, 가져왔어.”

“엘프? 그게 뭐지?”

“숲에서 풀만 먹고 사는 이상한 바보들.”

“.....”


달가림은 도저히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설명을 듣기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어느새 술 향기를 맡은 묘인족들이 군침을 흘리며 다가서고 있었으니까. 그는 마을에서 구해왔던 잔에 술을 가득 채운 후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온 지 벌 써 석 달이 지났다. 나는 이곳에 와서 묘인족이라는 종족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너희들이 인간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도 알았지.”

“....”


달가림이 말하는 사이에 음식이나 술에 손을 대려는 묘인족들이 있었지만 벨과 이레인의 따가운 눈총에 찔끔하고는 다시 손을 물렸다. 물론 그 광경을 달가림이 놓쳤을 리 없지만 그는 모른 척 말을 이었다.


“나는 묘인족에 대해 자세히 모른다. 하지만 알고 싶군. 묘인족은 인간과는 다르니까....”


마지막 말을 하는 순간에 그의 눈에 언 듯 슬픔이 스치는 것은 그의 가까이에 있던 이레인과 벨을 비롯한 몇몇 묘인족들만 볼 수 있었다. 사람에 의해 가족이 죽고 사람에 의해 사선까지 다녀온 그의 사정을 알 리 없었지만 달가림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술을 들지.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는 것을 기념하면서.”


달가림은 제법 큰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향긋한 향이 그의 입 안에 번져갔지만 그는 왠지 씁쓸한 맛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잊어버리고 싶었던 과거의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다시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이레인이 술 독 중 하나를 챙기며 말했다.


“다들 마셔.”


그리고 그녀의 말을 필두로 묘인족들의 잔치가 벌어졌다. 모든 묘인족들이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평소에는 종잡을 수 없고 게으르기만 하던 묘인족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웃고 떠들며 놀고 있었다. 그러나 벨과 이레인은 조용히 달가림의 곁에서 가끔씩은 자신들도 마셔가면서 그의 잔을 채워주고 있었다.


“오늘 따라 술이 쓰군..”

“....”


술은 향기가 은은한 것 치고는 매우 독했다. 잠시 후, 성묘가 되지 않아 술에 약한 벨을 비롯해 대부분의 묘인족이 여기저기 뒹굴며 잠에 들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은 것은 이레인과 달가림, 그리고 술고래로 유명한 몇몇 묘인족들 뿐이었다.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잊혀 지지 않아. 수많은 시간을 수련에 쏟아 부었지만 스스로의 마음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는 꼴이란...”


술에 취한 달가림은 평소의 딱딱한 어투가 아닌, 긴장이 풀린 모습이었고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묘인족들은 그의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던 달가림의 철통 방어가 풀린 것이다!


“어쩌면 좋을까.. 너희는 인간 보다 수백 년은 더 산다고 들었다. 터무니없이 오래 사는 너희는 알고 있을까?”

“달가림?”


이레인조차 달가림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아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달가림은 그녀를 쳐다보았고 이레인은 물론 그를 향해 시선을 향하고 있던 모든 묘인족들이 숨을 집어삼켰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을 구할 수가 없구나.”

“......”


이레인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달가림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는 인간, 그것도 남자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자르지 않아 길게 기른 머리칼과 우수에 젖은 검은 눈동자, 거기에 부드러운 선을 가진 몸은 어지간히 아름다운 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자존심 높은 묘인족들 조차 빨아들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 묘인족이 현실을 부정하듯 소리쳤다.


“저..저건 달가림이야! 달가림이라고!”


무뚝뚝하기 그지없고 묘인족들을 부려먹으며 심심하면 그들을 괴롭히는 인간인 것이다. 특히 그에게 매타작을 당한 프렌이라는 묘인족은 그의 모습이 거짓일 거라며 끝까지 부정했지만 달가림의 한 마디에 다시 넋을 놓고 말았다.


“귀여운 고양이들.. 가끔 짜증나긴 하지만 그것이 싫지만은 않구나.”


쩌억.


충격으로 공황상태에 빠진 묘인족들! 그러나 유일하게 버티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들의 왕인 이레인이었다.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달가림에게 말했다.


“너는 나 말고도 또 부인을 들일 셈이야?”

‘이놈의 왕아! 지금 그 소리가 아니잖아!’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모든 묘인족들은 속으로 소리쳤지만 그건 말 그대로 속에서만 멤돌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조용히 지내고 있지만 그녀는 그들의 왕인 것이다. 게다가 달가림이 언제 정신을 차릴지 모르는 상태였기에 그들은 이 사태(?)가 진정될 때 까지 침묵하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상황에 묘인족이 아닌 존재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으니..


“어머? 그럼 저도 받아주는 건가요?”


묘인족도 버티지 못하는 술을 어째서인지 버티고 있는 이드리브가 취기가 오른 얼굴로 다가서며 말했고 그녀의 말에 이레인의 눈이 위험한 빛으로 반짝였다. 마침 달가림도 취기로 인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으리라.


“인간...감히!”

“나는 마녀라고 불리니까 좀처럼 인기가 없다구요~? 아직 나이도 한창이고 몸도 한창인데....”


털썩.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쓰러졌고 묘인족들은 재빨리 그녀를 들어 으슥한 곳에 버려(?)두었다. 그리고 그들의 응급처치가 먹혔는지 자신들의 왕은 끌어올리던 살기를 가라앉혔고 묘인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레인.”

“왜?”

“나는 어쩌면 네게서 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아버님이 살아있을 적에 다른 이에게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


이레인은 달가림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에게 맞춰주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있어 달가림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존재, 그러한 존재를 위해서라면 거짓말정도는 할 수 있는 융통성 정도는 있었다. 비어있는 자신의 가슴을 채워준 존재를, 그녀는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달가림이 극도로 단련한 인간이라고 하나 결국 인간, 묘인족인 자신이 조금만 실수해도 죽는 연약한 생물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

“나는 인간에 대해 잘 몰라. 하지만 네가 없으면 안 돼. 그런 기분이야.”

“오랜만이군. 누군가에게 검사 이외의 존재로 필요해진 것이...”


점점 목소리가 잠겨들던 달가림의 말이 멎었다. 술기운에 취해 잠이 든 것이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완전히 잠이 든 것을 확인한 이레인의 눈빛이 깨어있는 몇몇 묘인족들에게 향했다.


움찔.


“저..저희가 정리 하겠습니다!”


말 하지 않아도 척척(?)알아 듣는 묘인족들! 그녀가 달가림의 노예 신분이 되면서 미묘한 관계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자신들의 왕이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고 잔인한!


“조용히 해. 달가림이 깨잖아.”

“.....”


굳어있던 묘인족들을 아예 석상으로 만들어버린 이레인은 누워있는 달가림을 안아 올렸다. 그의 키가 이레인보다 좀 더 컸지만 묘인족의 힘은 신장의 차이정도는 간단히 극복할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


그리고 이레인은 혹시나 자신이 손톱이 닿을까 조심하며 조심스레 달가림을 동굴 속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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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법사


마법사, 그들은 실로 위대한 힘의 사용자들이었다. 신 또는 세계의 법칙에서 흘러나온 파편을 다룬다고 알려진 마법은 가뭄에 비를 내리고 맨 손에서 불을 뿜어내는 등의 인간이 이뤄낼 수 없는 기적을 행하여 옛날부터 추앙받고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마법사는 어디에서나 대접받고 또 경외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럴 터인데..



“인간, 꺼져라.”

“.....”

“어이, 물 좀 만들어봐.”

“끄응...”


이드리브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묘인족들을 비롯해 그들의 왕인 이레인은 그들을 대놓고 무시했다. 실제로 그들에게 마법사는 별로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마법사가 마법을 제대로 쓰기도 전에 다가서서 갈갈이 찢어버릴 테니까.


“거기서 멍하니 뭐하는 거지?”


달가림은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드리브를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이 여인은 마법이라는 수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데 그에게 있어 그녀는 일 못하는 궁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그가 마법사라는 존재 자체를 이곳에 와서 처음 들었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실제로 그녀는 하는 일 마다 사고를 치기 일쑤였다.


“가구를 만들라 했더니 조각상을 만들고...”


그의 중얼거림에 이드리브가 멍한 표정을 풀고 움찔했다. 그녀가 마법으로 가구를 만든답시고 한 것은 너무나 큰 마력을 넣어 조각상처럼 되어버렸다. 백이면 백 자신의 잘못이었기에 이드리브는 식은땀을 흘렸다.


“호호.. 실수에요 실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라잖아요?”

“.. 그렇다고 잡일을 시키자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쿨럭...”


달가림의 마지막 일격(?)에 그녀는 사례가 걸린 듯 연신 기침을 했다. 사실 그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란 탐구하는 존재, 한평생 마법만 연구하다보니 요리와 청소 같은 일을 할 줄 아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오죽 하면 쌓아둘 때 까지 쌓아두다가 마법으로 처리하는 사람까지 생기겠는가.


“식충이와 다를 게 없군.”

“호...호호호...”


이드리브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마법사들을 무참히 깔아뭉개 버리는 달가림의 발언에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그의 옆에 있떤 이레인도 한 몫을 거들었다.


“처음부터 쓸모 없어보였어.”

“.....두고 봐요! 두 사람이 깜짝 놀랄만한 걸 보여주고 말테니까! 그때 가서 용서를 빌어도 안 받아 줄 거라구요!”


타타탓.


결국 이드리브는 눈물을 글썽이며 사라졌다. 그러자 달가림은 이레인을 향해 시선을 옮겼고 그 시선에 불안감을 느낀 이레인이 움찔했다.


“너도 마찬가지다. 왕이라는 자가 재물 하나 없는데다가 민심도 잡지 못하다니.”

“아니 원래 우리는 재물 같은 거 안 모으는데...”


묘인족에게 있어 인간의 재물은 의미가 없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냥 구해오면 된다. 묘인족을 보고 돈을 내놓으라고 끝까지 뻐길 존재는 지고의 존재라는 용족을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몇몇 묘인족들은 소장용으로 약간의 귀금속을 지니고 있기도 했지만 이레인의 경우 보석에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재물이라곤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 한 벌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원석이 전부였다.


“왕이라는 자가 그 정도 능력도 없어서 어쩌나. 무능력하기 짝이 없군.”

“예전에 남편들은 조금 많았...”

“.....”


이레인은 항변해봤지만 그것은 오히려 달가림에게서 풍기는 오오라는 증폭시키는 역효과를 냈다. 그녀는 조심스레 달가림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화났어..?”

“조용히.”

“......”


이레인을 침묵시킨 후 달가림은 숲의 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단련된 손이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엉망진창이었다.


‘어제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침에 일어난 그는 숙취와 함께 얼핏얼핏 떠오르는 기억 저편에서 자신이 했던 행동들을 떠올렸고, 한참 동안이나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채 숲 안을 거닐었다. 자신의 모습을 이레인이나 다른 묘인족들에게 보이기 싫어서였다. 그렇게 겨우 얼굴을 식히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늦잠을 자는 이레인을 살기(?)로 깨운 후 아침식사를 했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려보려 해도 계속 어제의 일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결국 그의 선택은 이레인을 비롯한 다른 묘인족들을 모조리 주변에서 쫒아내고 술에 일찍 취하는 바람에 유일하게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한 벨과 함께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었다.


“....”


한참 눈썹을 찌푸리고 있던 달가림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그는 언제나와 같이 자신의 옆에 얌전히 앉아있는 벨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나는 과일 이름이 멜미르 사과라고 했던가?”

“응”

“얼마나 나지?”

“정확히 세어본 적은 없지만 숲의 절반 정도..”

“그렇군.”


묘인족들이야 큰 문제가 없지만 사람인 자신이 살기에 하얀 숲의 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방랑생활을 오래하긴 했지만 그래도 필요한 것들은 마을에서 구하고 움직였다. 의복이나 건량(乾糧) 등은 스스로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게다가 하얀 숲에는 그마저도 없는 실정인 것이다. 멜미르 사과가 이 나라 사람들에게 가치가 있다면 필요한 물건과 교환도 할 수 있으리라.


“벨, 멜미르 사과를 따와라.”

“얼마나?”

“한 300개 정도면 되겠군.”

“....”


달가림이 먹을 줄 알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벨은 이어지는 말에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하얀 숲에서 자라는 멜미르 사과나무는 밖의 나무보다 높이가 2배는 높은데다 가장 높은 곳에만 열매가 열린다. 당장 먹을 몇 개면 모르겠지만 300개라는 수량은 묘인족에게도 힘든 일, 그렇기에 벨의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그럼 다른 애들도 데려가도 돼..?”

“....”


벨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달가림이 말했다.


“크레이안과 레민을 데려가도록.”

“응!”


자신 혼자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얼굴이 한껏 밝아진 벨이 사라지자 달가림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신기한 수법이군, 몸이 보이지 않다니 말이야.”

“.. 알고 있었나요?”


그의 말에 아무것도 없는 것 같던 허공이 일그러지며 이드리브가 나타났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자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손에는 그녀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이 웃고 있던 얼굴이 아닌 굳은 모습이었고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본 달가림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만한 기운을 흘리고 있는데 모를 리 없지.”

“당신은.. 도대체 뭐죠? 기척 감추기 마법을 꿰뚫어보다니..”

“지금 상황에 잡설이 필요한가? 좋은 의도로 온 것은 아닐 텐데?”

“...”


그의 말에 이드리브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이 들고 있는 지팡이를 달가림에게 겨눴다.


“묘인왕을 데려가겠어요.”

“그렇게 하고싶다면 그렇게 해라.”

“......!!”


달가림의 대답을 예상치 못했다는 듯 이드리브의 눈이 커졌다. 나름대로의 각오를 하고 온 그녀였으나 상대는 의외의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그녀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네가 무슨 짓을 하건 난 널 막아야겠다.”


스릉


“너도 멋대로 행동해라. 나도 멋대로 할 테니.”

“그렇군요. 당신도 저도 억지를 부리고 있으니 비긴 셈이겠죠.”


그의 애검, 운룡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드리브는 긴장의 끈을 잡아당겼다. 그가 싸우는 모습을 정확히 본 적은 없지만 묘인왕과 싸워 호각을 이뤘다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난 물러서지 않아요.”


묘인족, 그것도 왕이라고 불리는 존재와 승패를 떠나 싸움을 성립시켰다는 것에서 이미 보통 사람은 아득히 초월해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마법사의 직접전투능력은 최악, 하지만 그녀는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묘인왕과 겨루고도 살아남았으니 당신은 틀림없이 뛰어난 검사겠죠? 평범하게 싸운다면 틀림없이 나는 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랬다면 내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겠지. 넌 신중한 성격인 것 같으니.”

“...마법사는 준비하는 존재. 그런 의미에서 당신과 묘인족은 내게 너무 많은 시간을 주었어요.”


마법사에겐 시간이 곧 무기. 시간을 많이 들이면 들일수록 마법은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녀가 하얀 숲에 들어온 지 오늘로서 2주, 그 동안 준비한 마법과 함께라면 전설 속의 용족이 아닌 이상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 이상한 기운을 품은 조각상들 말인가?”

“....!”


그러나 달가림의 말에 이드리브의 몸이 움찔했다. 그녀가 실패를 가장해서 숲 여기저기 만들어두었던 조각상들은 실패작이 아닌 묘인족을 제압하기 위해 준비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달가림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한번 흔들리기 시작한 마음은 그녀에게 불안감을 주기 시작했다.


‘아냐... 알아차렸어도 이젠 소용없어.’


그러나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설사 안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도 조각상들이 멀쩡한지 확인하고 온 그녀였다.


“위대한..”


이드리브는 지팡이를 달가림에게로 향한 채 마법을 발동하는 주문을 외우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주문을 끝마치기도 전에 황급히 마법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것은 무언가 보였다기보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 직후, 그녀의 머리 위에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캉.


“헉!”


이드리브는 자신의 눈앞에서 반투명한 막에 막혀있는 검을 보고 경악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지팡이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자동으로 발동하게 되어있는 방어마법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목이 떨어졌으리라.


“나도 물러졌군. 한 칼에 베지 못하다니.”


그 와중에 달가림은 아쉬운 표정으로 자신의 검을 다시 회수하고 있었다.


“그 기운, 빨리 뽑아 쓸 수 없는 종류 같군.”


냉철한 분석과 함께 그의 검이 다시 한 번 하늘을 갈랐다.


까앙.


“어떻게 인간이 이런 속도를..?”


이드리브는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이런 속도를 낼 수 있을까. 시선에도 잡히지 않는 속도로 날아오는 검이 방어막을 두드릴 뿐이었지만 그녀의 몸은 연신 들썩거렸다. 아무리 방어막을 펼쳤다곤 하지만 애초에 그 자체가 마법사가 지닌 마력으로 구성되는 것, 그러니 막에 공격이 가해지면 질수록 시전자의 몸에도 충격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카가각.


그의 검이 스칠 때마다 그에 맞춰 이드리브는 이를 악물었다. 마력으로 만든 방어막에도 고랑이 파일 정도로 달가림의 공격은 매서웠지만 그녀도 마냥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었다.

방어막을 유지하기 위해 집중하면서도 이드리브는 조용히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췄을 때 달가림의 표정이 굳어지며 그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대지여 분노하라! 크뢰즈!”


쾨지직.


달가림의 몸이 움직임과 동시에 그가 있던 자리와 그 주변에 날카로운 암석의 바늘이 솟아올랐다.


“이것이 마법인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달가림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법이라는 것은 마치 없는 걸 만들어내는 기적과 같았다.


“하지만..”


그러나 언제까지나 감탄하고 있을 순 없는 일, 한 번 주문을 내뱉은 이드리브의 입술이 다시 빠르게 움직이고 있음을 달가림은 눈치 채고 있었다.


‘조금 전의 수법을 보면 마법이란 것은 마치 활과 같다. 그렇다면... 겨누지 못하게 하면 그 뿐!’


달가림은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지만 이번엔 마법의 주문이 흘러나오는 게 먼저였다.


“억겁의 무게를 그대에게 그레비티!”

“....!”


다음 순간 달가림은 몸이 짓눌리는 감각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반대로 이드리브의 눈동자에선 승기를 잡은 이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달가림에게 지팡이를 겨눈 채 말했다.


“순순히 묘인왕을 내준다면 여기서 물러나겠어요.”

“거절..한다.”


우두둑.


“그런..!


달가림이 움직였다. 몸을 누르는 힘을 거스르며 움직이는 그의 몸에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를 지켜보던 이드리브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그렇게 억지로 일어나면 죽을 지도 모른다고요! 왜 그렇게 까지..!”

“누구 멋대로.. 남의 가족을 데려간다는 건가.”

“....!”


달가림은 이를 악물고 몸을 짓누르는 기운에 대항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붙어가던 갈비뼈가 다시 부러진 것은 확실했다. 똑같은 부위에 똑같은 고통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움츠러들지도 않고 자신의 검을 들어올렸다.


“일검(一劍)..”


나직한 음성과 함께 그의 검이 느린 속도로 허공에 내리그어졌다.


“난파(卵破).”


찌이익.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주변에서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이드리브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입가에 작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달가림의 일검이 그녀의 마법을 강제로 파괴했던 탓이다. 그러나 피를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내뱉었다.


“어떻게 마법도구도 없이 디스펠을..?”


마법을 구성하는 마력은 무형의 힘으로 쉽게 말해 세상의 기운이었다. 소문으로 뛰어난 검사는 마법을 막아낸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말 그대로 막아낼 뿐, 강제로 마법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저 검이 마법아이템..? 아냐.. 분명 어떠한 마력도 느껴지지 않고 몰래 확인까지 했는데!’


그러나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지 간에 달가림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설 뿐이었다. 그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의 눈동자를 보면 볼수록 이드리브는 위축되고 있었다.


“준비한 건 이게 끝인가?”

“텔레포트!”


달가림이 세 발자국 거리까지 다가서자 이드리브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그녀의 몸이 빛에 휘감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빛만 났을 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자 그녀의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마력의 순환이 끊겼어...?’


그녀가 사용한 건 방어막과 마찬가지로 지팡이에 저장되어있는 마법, 위급한 상황에 사용하는 장거리 이동 마법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마력만 소비되었을 뿐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자 그녀의 얼굴에 망연자실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째서...”


그리고 그 사이 달가림은 바로 앞까지 다가서서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무심하기만 한 그의 표정에 이드리브의 눈가에 공포가 어렸다.


“보여줄 건 이게 다인가?”

“힉!”


상처 하나 없는 그녀의 모습과 달리, 몸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는 모습이었지만 표정은 정 반대였다. 달가림의 표정은 부상당한 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무표정했고 그를 마주하고 있는 이드리브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어렸다.


“당신은 도대체 누군가요. 평범한 사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나는 자신을 숨기는 자에게 스스로를 드러낼 만큼 어리석지 않아.”

“.....”

“각오는 되었나?”

“아아...”


달가림의 검이 천천히 그녀의 목으로 향해 다가왔고, 그 광경을 보던 이드리브는 체념과 함께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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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법사 3-3


검사에게 부상은 일상이다. 반대로 그 부상을 넘겨가며 살아남은 이들이 진정으로 강한 검사가 된다. 어지간한 상처로는 정신도 잃지 않는 정신력을 지니게 되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단련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청선국 최고의 검사이자 고검사로 불리던 달가림도 마찬가지였다.


“흠....”


전 날의 일로 싸움에서 뼈가 몇 군데 금이 가고 갈비뼈 하나가 또다시 부러지는 바람에 붕대-이번에는 마을에서 구해온 제대로 된 붕대-를 감았지만 그는 또렷한 정신을 유지한 채 눈앞의 광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저기...”

“.....”

“그..그게...”

“꿇어.”

“넵!”


하늘빛 머리칼을 가진 아름다운 묘인족이 살기를 흘리며 말을 하면 그녀의 앞에 있는 보랏빛 머리칼의 여성이 얌전히 따랐다.

달가림의 눈에는 고양이가 주인을 가르치고 있는 듯한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것 뿐, 여성을 동정한다거나 불쌍히 여기진 않았다. 그가 붕대를 감고 있는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인간 따위가 감히 내 것을 건드리다니..”

“누구 마음대로....”


뭔가 이상한 말도 들리는 것 같아서 한 소리 하려던 달가림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빛 머리칼의 묘인족, 이레인을 제지했다. 그녀는 막 손톱을 뽑아 이드리브의 심장 어귀로 손을 뻗는 중이었다.


“그만.”

“널 죽이려고 했던 인간이야.”

“상관없다. 대가는 이미 받았으니까.”

“겨우 머리카락으로?”

“여인에게 머리칼은 생명이라고 하더군.”


시큰둥안 이레인을 무시하면서 달가림은 이드리브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긴 생머리가 짧은 단발로 변한 이드리브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고, 그런 그녀를 본 이레인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죽이면 안 돼?”“짐승처럼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인다는 생각은 그만 두도록. 그리고..”

“....?”


달가림의 말에 이드리브의 눈이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그녀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죽여 보아야 뒤처리만 힘들다. 그럴 바에야 일손으로 써먹는 게 더 났겠지.”


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사실 달가림은 더 이상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만에 맞이한 조용한 삶 아니던가, 피를 보면 그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것을 달가림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달가림의 모습에 상식과는 거리가 먼 이레인마저 기가 막힌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그 시선을 덤덤하게 받아냈다.

그가 본 전쟁 포로들은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할 정도로 고된 노동을 했고 그러다 하나 씩 죽어나갔다. 즉 달가림의 입장에선 죽이는 것 보다 부려먹는다는 행동이 상대방이 더 고통 받는 일이었다. 게다가 청선국에선 여인들의 머리칼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풍조가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머리칼을 잘라버린 행동은 달가림의 입장에선 충분히 독한 처분이었다.


“저 여자는 네가 관리해라.”

“내가 왜...”

“...불만인가?”

“아니.. 시키는 대로 할게.”


달가림의 말에 토를 달던 이레인은 그의 표정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말을 바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무서울 것 없는 묘인족의 왕이었지만 지금 달가림을 건드렸다간 영원히 시달릴 기세였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스레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묘한 침묵에 휩싸여버린 상태에서 이드리브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하건 듣고 싶지 않다. 그냥 시키는 것만 하도록. 그 전에..”


달가림이 이드리브에게 다가섰다. 그리곤 그의 손이 빠르게 이드리브의 몸 여기저기를 두드렸다.


“커흑..?!”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이드리브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안색이 새파래졌다. 경악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달가림의 말이 들려왔다.


“기를 운용하는 통로를 임의로 막아놓았으니 그 마법이라는 것도 사용하지 못할 거다.”

“쿨럭쿨럭....”


달가림은 자신의 말에도 기침만을 내뱉으며 아무런 반응이 없는 이드리브를 놓아둔 채 뒤돌아섰다. 그가 사용한 수법은 청선국에서 고강한 실력을 가진 범죄자들을 제압할 때 쓰는 수법으로 몸 속의 기운이 움직이는 통로를 일시적으로 막아두어 고강한 실력자도 평범한 사람정도의 힘 밖에 쓸 수 없게 만드는 수법이었다.


“앞으로 그 마법이라는 것을 사용하려고 하면 네 몸이 먼저 망가질 거다.”


어떻게 보면 상대방에게 절망감을 선사하고 심하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예전에도 자신을 노리는 자들을 잡아 정보를 캐낼 때나 사용했지만 지금은 어떻든 상관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그녀는 이미 적으로 인식되었고 있었으니까. 아군에겐 몸을 기댈 산이 되고 적에겐 수라가 되는 것은 그가 지겹도록 지나온 길이었다.



이드리브는 그런 그를 두려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마법을 억지로 파훼한 것으로 모자라 마력이 흐르는 통로마저 제한할 수 있는 그의 힘이라니! 그러나 그녀의 표정이 어떻건 달가림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목숨을 이제 내 것이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고 살렸으니.”

“...알겠어요.”


이드리브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완전히 포기한 것이다. 마법을 잃은 그녀는 그저 남들보다 조금 똑똑한 여인일 뿐이었으니까.

그런 그녀에게 달가림이 물었다.


“널 보낸 자가 누구냐.”

“그건...”


순간적으로 이드리브의 얼굴에 망설임이 어렸다. 그러나 달가림이 말 없이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자 굴복하듯,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저를 이곳으로 보낸 이는 대륙에 있는 두 제국 중 하나인 로엔 제국의 수상, 카를 쉬폰 케시크라는 자에요.”

“그는 어떤 인간이지?”

“로엔 제국은 30년 전만 해도 크기만 큰 왕국에 불과했지요. 그러나 그는 10년 만에 왕국을 제국으로 만들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로 만들었어요. 그의 별명은 흑재상, 항상 본신을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조종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죠.”

“그런 자가 왜 이곳에 관심을 보이는 건가.”

“저도 자세히 몰라요. 단지 이곳을 조사하고 위험한 것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이죠. 그래서 몇 달 전부터 이곳에 파견되어 하얀 숲을 살피고 있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묘인족에 의해 이곳으로 오게 되었고 그 덕에 이곳저곳 둘러볼 수 있었어요.”

“네가 말했지. 마법사란 존재는 산 하나를 날려버릴 수 있는 존재라고. 그런데 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지?”

“저는....”


이드리브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뭔가 허탈한 모습이었다.


“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었어요. 난 제국에서 자라나 제국의 지원을 받아 마법사가 되었지만 전쟁 상황도 아닌데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아직 마도사가 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단지 다른 사람을 위해 나라의 명을 거역했다?”

“...우리 마법사라는 존재는 본디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해주질 않죠. 여러 방면에서 마법사만큼 우수한 인력이 없으니 어떻게든 잡아두는 거예요. 재물을 준다던가 그것으로도 안 되면 협박을 해서라도..”


달가림의 눈이 그녀를 직시했다.


“넌 노력해보았나?”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이드리브는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무리 마법사라 한들 거대한 국가에겐 대항할 수 없어요!”

“나는 질문을 한 것이지 네 변명을 들으려는 게 아니다.”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가요! 그들은 제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을 볼모로 잡고 있어요!”

“정말 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나?”

“나는....”

“물론 개인이 거대한 국가에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그걸 알면서 그런 말을....!”

“하지만 네 입으로 마법사는 법칙을 뒤트는 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웃기는군. 자기가 내뱉은 말마저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인간이라니”

“......!”


두려워서 눈길을 피하고 있던 이드리브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리고 달가림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녀를 두고 발걸음을 옮겼다.


“달가림?”


그를 부르는 이레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이리와라, 이레인.”

“그럼 저 인간은..?”

“내버려 두도록. 자신의 말도 지키지 못하는 쓰레기에겐 관심 없으니까.”

“알겠어.”


이레인은 달가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진 못했지만 이레인은 묘인족답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있어 의미가 있는 달가림의 말을 따를 뿐.


“.....”


그런 둘의 뒤로 멍한 눈빛의 이드리브만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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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가림, 저 인간 뭐야?”

“알 거 없다. 벨. 하던 일이나 계속하도록.”

“응..”


하얀 숲의 일과는 지극히 평화로웠다. 세상에 아무리 간이 큰 사람이라도 묘인족을 건드리는 이들은 없었고 묘인족들 사이에 벌어지던 다툼이나 싸움도 이레인이라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다. 거기에 달가림 까지 눈동자를 빛내고 있으니 무엇을 말하랴.


“.....”


그런데 그 사이에서 뭔가 동떨어진 것 같은 이가 있었으니 이레인과 달가림의 거처인 동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드리브였다. 그녀는 달가림의 말을 들은 다음 날부터 무슨 생각인지 동굴 앞에 와서 멍하니 있었는데, 달가림은 물론 인간이라는 생명체에 별 흥미가 없는 묘인족들은 그녀를 무시한 채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몇 명은 거슬린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누가 감히 왕의 처소 앞에서 소란을 벌이겠는가.


“그런데 왜 다쳤어?”

“조금 일이 있었다.”

“응, 알겠어.”


달가림은 자신의 말에 긍정하는 벨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자신의 목숨을 처음으로 구한 이 묘인족은 다른 묘인족과는 달리 그를 무조건적으로 따랐다. 어머니가 난폭함의 대명사로 두려움을 받는 묘인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순한 이 묘인족은 설사 그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긍정을 할 기세였다. 그는 문득 위화감이 드는 것을 느꼈다.


‘왜지?’


그는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과거의 벨을 그는 알지 못하고 벨도 마찬가지로 그의 과거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참이나 생각하던 달가림이 떠오른 바를 벨에게 물었다.


“넌 혹시 내게서 다른 이를 보고 있는 건가?”

“......”

‘정답이군.’


그리고 그의 말에 바로 침묵하는 벨을 바라보며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고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부분은 그의 전문분야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대로 그냥 놓아둘 수도 없는 일, 달가림은 복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다른 이가 될 수 없다. 벨.”


벨이 누구를 자신에게 투영시키는지, 어떠한 사정으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었다.


“....”

“누구도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다.”

“응, 알아. 나도 이제 50년 정도 살았으니까.”

“.....!”


달가림은 놀랐다. 묘인족 사이에서 성인도 못된 애 취급을 받는 벨이 인간의 나이로는 50세라니! 그는 당혹감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묘인족은 평균적으로 어느 정도나 살지?”

“오래 살면 400년도 살아.”

“.....”


이번엔 달가림이 침묵할 차례였다. 그는 묘인족이 이토록 오래 사는 존재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모두 겉모습이 젊어 보이는 대다 하는 행동들도 오래 살아온 존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이래서야 나이만 먹은 철부지 어린애들... 아니, 애초에 인간이 아닌가?’


인간의 기준으로 이들은 판단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생각일까. 애초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필요할 때만 사냥을 하거나 과일로 배를 채우는 이들을, 인간에게 대비시킨다는 것 자체가 문제일지 몰랐다. 그리고 그가 생각에 빠져있던 사이, 벨의 입에서 더욱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내 아버지는 묘인족이 아니었어. 정확히는 인간이랑 묘인족의 하프였데. 그래서인지 다른 묘인족들보다 약해서 영역다툼을 하다 금방 죽어버렸지만. 어떻게 왕의 남편이 되어서 나를 나았는지 모르겠어.”

“...”

“생긴 건 다른 묘인족들과 같을지 몰라도 뭔가 조금씩 달라. 다른 묘인족들은 인간의 피가 섞여서 그렇다고들 했어.”

“벨.”


달가림은 이제야 벨이 자신에게서 누군가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선지 난 인간이 싫진 않아. 물론 귀찮게 구는 인간들을 몇 번 이 손으로 죽여보기도 했지만...”


달가림은 말을 잇는 벨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억지로 그의 앞에 앉힌 다음 등이 보이는 자세로 끌어안았다.


‘아버지가 해주시던 것을 이곳에서 할 줄이야..’


그의 아버지는 달가림이 고민이 있다 싶으면 이런 식으로 자세를 취한 채 이야기를 하곤 했다. 묘인족한테도 통할지 장담은 못했지만 그가 아는 방법 또한 이것 밖에 없었다.


“말을 막아 미안하군. 그러나 들어다오, 벨.”

“...


묘인족은 인간에 비해 매우 빨리 자라지만 아직 성묘가 아니라서인지 달가림의 품 속에 그대로 들어왔다. 그런 벨이 달가림을 올려다보자 마치 품에 안긴 고양이처럼 되었다. 달가림은 벨의 눈동자 안에서 흔들림을 보았으나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인물과 같아질 수 없다. 그러나..”


달가림 또한 벨이 싫지 않았다. 그가 인간을 해쳤건 어쨌건 그의 목숨을 구했고 다른 묘인족들과 달리 이것저것 그를 위해 움직여주었다. 다른 묘인족과 비교하자면 그야말로 천지차이. 그것이 설사 다른 이에 대한 그리움의 산물이라 해도 그가 다른 존재를 위해 움직였다는 것엔 변함이 없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될 줄이야.’


가슴이 따뜻해지는 감정 느끼며 달가림은 오랜 만에 편한 미소를 지었다. 이 묘인족들이라는 종족은 인간에 비해 우월하지만 인간보다 단순하다. 그렇기에 배신도, 음모도 꾸미지 않는다. 이들이라면 충분히 과거에 생각했던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


“새로운 가족이 되어줄 순 있다.”

“.......!”


달가림의 말을 듣고있던 벨의 눈이 커졌다. 벨은 어찌할 줄 몰라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이윽고 푹 숙였다. 그러나 귀가 쫑긋쫑긋 하고 있는 모습은 벨의 심정을 여질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벨의 입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잠깐.”


그러나 분위기가 좋은 것(?)도 잠깐,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이레인이 벨을 잡아끌어내고는 자신이 그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닌가. 얼떨떨한 표정의 벨을 보며 달가림은 어이없는 얼굴로 말했다.


“뭐 하는 짓이지?”

“내가 네 반려야.”

“.....뭐?”

“벨은 반려가 아냐.”

“하아..?”


달가림은 오래 고민해볼 것도 없이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챘다. 그녀는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자기 자식에게!


“글러먹었군.”

“뭐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레인에게 설명을 해준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을 리 없기에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면서 벨을 쓰다듬었다. 이레인을 두려워하는 벨은 그의 손짓에 시선으로 저항했지만 달가림이 쳐다보자 포기했다는 듯 귀를 늘어뜨리고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이레인이 벨을 째려봤지만 곧 달가림에게 이마를 한 대 맞고는 잠잠해졌다. 그렇게 두 묘인족이 모이자 달가림은 그들을 한 품에 끌어안았다.


“너희들은 내 가족이다.”

“가족? 그게 뭔데?”


묘인족에겐 가족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저 자손을 놓고 그 자손이 강하게 크면 그만이기에 가족이라는 말에 반응하는 벨은 지극히 특이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뼛속까지 묘인족인 이레인이 가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달가림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이레인을 쳐다봤다.


“무뢰한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이레인은 억울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달가림의 눈빛은 탐탁치않은 그것이었기에 대신 원인제공자인 벨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곧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고개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딱.


“윽.”

“지금 어딜 노려보는 거냐.”

“왜 나만...”

“가족이란 이런 거다.”

“그래..?”

“와...왕이시여?”


곁에서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벨은 이건 뭔가 아니다 싶었지만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가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기에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레인이 달가림의 말을 듣더니 그에게로 주저 없이 손을 뻗는 게 아닌가. 그리고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의 손은 바로 지척까지 다가왔고 벨은 체념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손이 자신의 심장을 꿰뚫기를 기다렸다.


따악.


“크흑..?”


그러나 벨은 심장을 꿰뚫리는 고통 대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고통을 이마에 느껴야 했다.


“호오..”


딱.


“컥!”


고통으로 표정이 일그러지는 사이 또 한 번의 충격이 그의 이마를 강타했다. 벨이 놀라서 눈을 떠보자 이레인의 흥미롭다는 얼굴이 보이고.. 딱밤을 치는 형태로 되어있는 그녀의 손가락이 보였다. 뭔가 억울한 얼굴의 벨이 두려움도 잊은 채 쳐다보자 이레인은 즐겁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가족끼린 이러는 거래.”

“.....!”


그녀의 말에 벨은 진심으로 놀랐다. 역사상 가장 잔혹한 왕으로 알려진 그녀가 가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벨은 얼떨떨하면서도 찝찝해하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이레인에게 한 대 더 맞고 나서는 달가림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

‘방향이 조금 다르지만 괜찮겠지.’


그런 둘의 모습을 보고 있던 달가림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저 묘인왕은 가족이라는 말을 의미도 모른 채 단지 재미를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급해 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이들은 인간이 아니었고 그녀뿐만이 아닌 묘인족 전체가 가족이라는 의미를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급한 길일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딱.


“으윽.”

“흐음.. 생각보다 튼튼하네?”


한참을 맞고 있던 벨은 이레인의 말에 결국 눈이 뒤집혔다.


“가족이.. 이러는 거라고 하셨습니까?”

“음?”

“그러면 저도.. 하겠습니다!”


따악.


“....!!”


오붓하게(?) 딱밤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두 묘인족을 뒤로한 채 달가림의 시선이 밖을 향했다. 어느새 이드리브는 무릎을 꿇고 있던 자리에서 사라져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마법이라는 것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해둔 그녀는 평범한 여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음....”


여기까지 생각한 달가림은 침음을 내뱉었다. 하얀 숲에 인간이 들어오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그렇다는 것은 평소에도 묘인족이 사람과의 왕래가 거의 없다는 것인데 그런 숲에 지금 아주 무방비한 상태의, 그것도 여인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곤란하군..’


여기까지 생각한 달가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남에게 신경을 쓴다는 행위는 그에게 있어 매우 피곤한 일이었다. 칼과 암투가 난무하는 검사의 길에서는 스스로만 지키면 되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다. 홀로 살아남는 것이 아닌 함께 걸어가야 할 대상이 생겨버린 것이다.


“검사로는 실격이야.”


검사란 존재는 고독한 것, 평생 그것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 왔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검사로선 실격이리라.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이곳은 청선국이 아니었고 자신이 검사임을 아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서 그는 달가림이라는 인간, 그 뿐이었다.


“허나 이것도 나쁘지 않아.”


나직이 중얼거린 달가림이 일어섰다.


“어디가?”


결국 왕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일방적으로 딱밤을 날리게 된 이레인은 앞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벨을 무시한 채 물었다. 그녀는 막 손가락을 구부리던 것을 멈춘 채였다.


“잠시, 일을 보고 오도록 하지.”

“인간 찾으러 가?”

“그래.”

“안 돼.”

“음?”


이레인의 말에 달가림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나타나있는 것은 불안감, 그리고 불만이었다.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그가 말했다.


“무슨 소리지?”

“그 여자 인간은 어찌되든 상관없잖아.”

“내가 가고자 하는 것이다. 네가 막을 권리는..”

“그래도 안 돼.”

“지금 뭐하는...”

“안 돼. 가지마.”


안하무인 식으로 말하는 그녀의 말에 결국 달가림도 눈썹을 찌푸린 채 말했지만 이레인은 결사반대라는 모습이었다. 달가림의 눈썹은 더욱 일그러져갔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지?”

“.. 혹시 돌아오지 않으면?”

“하아?”

“인간을 만나서 그대로 인간들의 마을로 가버리면?”

“너는.....”


그러나 이어지는 이레인의 말에 달가림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말인 즉슨...


“내가 돌아오지 않을 걸 두려워하는 건가?”

“....”

“하.. 우습군.”


이런 상황에서 침묵은 곧 긍정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던 달가림이 피식 미소 지었다.


“정말 웃기는 일이야.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묘인족이라는 종족은 알다가도 모를 생물이었다. 구속당하지 않고 구속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것은 돌려 말하지 않고 분명히 요구한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엔 이들이 야만족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달가림은 그 편이 좋았다.

인간이 만든 음모와 암투에 지쳐있었고 그 때문에 천하를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으니까.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진 달가림은 그의 미소를 보고 멍하게 되어버린 두 묘인족에게 다가섰다.


따악.


“윽!”

“이레인, 이곳은 내가 살던 땅이 아니다.”

“달가림?”

“돌아갈 집도, 친구도 없지. 그런 내가 갈 곳이 어디 있겠나.”


불만으로 가득하던 이레인의 귀가 쫑긋거리고 꼬리가 살랑거렸다. 그 모습을 본 달가림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말을 이었다.


“있다면..”


청선국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곳은 없었다. 사방이 적이었고 머물더라도 그 뿐, 인연 따윈 없었더랬지.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소중한 것들이 생기고 돌아올 장소가 생겼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이곳이겠지.”

“...”

“네가 막아도 결국 가게 되어있다. 그러니 얌전히 기다리도록.”

“응..”


그는 간신히 표정은 관리하고 있지만 격렬히 움직이는 귀는 감출 수 없는 두 묘인족을 뒤로한 채, 이드리브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부상을 입은 그였지만 숲속으로 움직이는 발걸음은 바람처럼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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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악!”


이드리브를 찾기 위해 숲 속으로 향한 달가림은 생각보다 쉽게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숲 언저리에서 필사적으로 무언가에서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고 마침 달가림이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던 중이었다.


[크앙!]


그녀를 쫓는 것은 거의 집채만 한 표범이었다. 눈빛이 번뜩이고 털에서 빛이 나는 것만 봐도 보통의 짐승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쉬익.


“꺄악!”


우직끈.


표범이 머리만한 앞발을 휘두를 때 마다 날카로운 바람이 흘러나와 주변의 것을 가리지 않고 박살내고 있었다.


“진기한 광경이군.”


달가림은 오랜만에 보는 진짜 짐승(?)에 흥미로운 시선을 보냈다. 표범도 크게 따지면 고양이의 한 갈래라고 들었던 그는 검은 표범과 묘인족을 비교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표범은 먹기 위해 사냥이라도 하지.”


묘인족은 사냥하기도 귀찮아서 대부분 주변에 지천으로 널린 멜미르 사과를 먹고 산다. 의외로 고기를 먹는 것은 극히 일부의 부지런한(?) 묘인족뿐인 것이다. 그렇게 표범을 관찰하던 그는 이드리브가 막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자 검을 검집 째 들어 겨눈 채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크릉?]


“물러서라.”


“다..달가림씨.”


[크르르르르.]


집채만 한 표범을 눈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달가림은 천천히 표범의 눈을 응시했다. 표범도 마찬가지로 그의 눈을 응시하면서 시간이 지나길 한참, 표범의 입에서 나지막한 울림이 흘러나왔다. 명백한 적의, 일반적으로 자신의 영역을 가진 짐승들은 누군가 자신의 영역에 침범했다고 생각하면 사나워지기 마련이다. 눈앞의 표범도 마찬가지인지 몸을 숙여 언제든 달려들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바로 달려들지 않고 그를 응시하며 낮게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


그 모습에 이상함을 느낀 달가림은 표범을 경계하면서 주변을 살폈고 곧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크응...]


표범의 뒷다리 아래, 검고 작은 생명체가 있었다. 그리고 표범의 몸은 그것을 최대한 가리는 자세였다.


“새끼인가.. 멍청하긴, 새끼가 있는 짐승을 건드린 건가?”

“그..그게 귀여워서 한 번 만져보려다 그만..”

“마법사는 원래 이렇게 멍청한 족속들인가?”

“...”


달가림의 말에 할 말을 잃은 이드리브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진리를 좇는 마법사라곤 하지만 실질적으로 세상을 돌아다녀본 경험이 거의 전무했다. 대부분은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마법사길드에서 실험만 해왔으니까.


“마..마법사라고 모두 완벽하진 않다구요...”


그렇기에 처음 이곳에 파견되었을 때도 마을 주민들과 섞이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빠르게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의사 노릇을 한다는 것 아니었던가. 실제로 의술을 펼치는 것 아니고 치료마법을 사용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이 변방의 숲에는 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사람에 대한 적응은 했지만 다른 것들에 대해선 아직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평생 제국에서 제공한 실험실에 갇혀 온갖 지원을 받으며 연구만 해오던 그녀에겐 세상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했다.


“천천히 뒤로 물러서도록.”


생각에 빠져잇던 그녀는 달가림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달가림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시선을 표범에게로 향하며 말했다.


“몸을 돌리지 말고 천천히 물러서서 내가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전력으로 묘인족들에게 달려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달가림씨가...”

“내가 이런 곳에서 죽을 것 같나? 네가 있으면 오히려 일이 번거로워지니 빨리...”


[크헝헝!]


“늦었군.”


그 때 몸을 숙이고 있던 표범은 그 덩치에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가림을 덮쳐들었다. 달가림의 발이 빠르게 움직이며 덮쳐오는 표범을 피해냈지만 표범의 앞발이 크게 휘둘러지며 예의 칼바람이 덮쳐들었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균형을 잃은 달가림이 비틀거리며 검을 뽑아 그것을 막아섰지만 바람으로 만들어진 칼날을 완전히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행히 이드리브를 아슬아슬하게 스쳐가며 애꿎은 나무만 베었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순 없었다. 이레인과 때처럼 하루살이 베기를 사용한다면 완전히 막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의 뒤에 있는 이레인이 고스란히 노출 되어버린다.


“끝까지 애를 먹이는 여자군.”


역시나 자신은 지키는 것에 익숙지 않다. 단지 베고 또 베면서 살아왔을 뿐.


[크릉!]


눈앞의 표범 또한 그가 베어온 대상과 다르지 않다. 평소처럼 베고 넘어서면 될 것이었다.


[키잉...]


그러나 저 작은 생명, 어미의 몸에 매달려 아무것도 모르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작은 생명 때문에 그는 눈앞의 맹수를 베어 넘길 수 없었다.


‘내가 베어 넘긴 이들도 틀림없이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터...’


수많은 전장을 거치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베었고 그들도 누군가의 가족이요, 친구였다. 그가 아직 청선국에서 검사의 삶을 살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눈앞의 짐승을 베었으리라.


‘....베지 않는다.’


그는 어딘지도 모를 타국에서 지내면서 스스로가 바뀌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의 검사 생활을 할 때의 그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것도 지금은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후우..’


그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자신이 손을 쓰지 않으면 이드리브는 틀림없이 죽는다. 그녀가 마법을 쓸 수 있는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현재는 그의 금제로 인해 마법은커녕 기운 한 방울 조차 모으지 못하는 평범한 여인일 뿐이다. 원인을 제공했으면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는 법,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선 듯 해결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한 가지 차선책을 떠올린 그는 여전히 표범에게 시선을 향한 채 말했다.


“어서 가라. 아까 말했듯이 네가 없는 것이 나에겐 더 좋으니.”

“... 죽지마세요! 어서 가서 도움을 요청할 테니까!”

“...”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음에도 이드리브의 말에 달가림은 실소를 머금었다. 죽지 말라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인간은 결국 죽게 되어있지. 허나 지금은 아닐 것 같군.”


최근 들어 삶이라는 것에 욕심이 나고 있었다. 이전의 그가 피와 죽음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다면 지금은 정 반대였다. 인연과 여유, 즐거움을 느낀다. 달라진 삶 속에서 조금씩 새로운 것을 알아가며 즐기고 있었고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크르르]


그는 이드리브의 기색이 사라지는 것이 느꼈다. 그러자 표범의 시선은 달가림을 향해 고정되었다. 이 맹수 또한 그를 넘어서지 않으면 이드리브를 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리라. 게다가 여전히 곁에는 여전히 작게 우는 새끼까지 있었다.


“너 또한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알겠다.”


이드리브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인간이 숲에서 맹수를 따돌리기란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다. 때문에 달가림은 그녀의 기색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완전히 기척이 사라졌군.”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날이 지는지 숲이 노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한참동안 표범을 주시하던 달가림은 천천히 검을 갈무리했다. 이미 이브리브는 묘인족들에게 도착했을 터이고 눈 앞의 표범은 자신의 새끼를 지키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보였으니까.


“나는 너와 새끼에게 해를 가할 생각이 없다.”

[크응..]


검이 검집 안으로 들어가자 표범의 눈에서도 살기가 사라졌다. 달가림의 눈에 감탄이 어렸다.


“영물인가?”


가끔 짐승이 깨달음이나 힘을 얻어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될 때가 있는데 그렇게 힘을 얻은 짐승이 사악함 심성을 지니면 마물이 되는 것이고 선한 심성을 지니면 영물이 된다고 했다.

청선국에서도 유명한 영물이 하나 있었는데 무려 천 년을 살아왔다는 백호였다. 물론 그 모습을 쉬이 드러내지 않아 전설에 가까웠지만 나라가 위험할 때면 언제나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지고의 영물이었다. 눈앞의 흑표범이 그 정도로 오래 살아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것을 보면 영물임에 틀림없었다.



“돌아가거라. 나는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테니.”

[크르르.]


달가림의 말에 답하듯 콧소리를 낸 표범은 천천히 숲 속으로 사라졌고 그 순간 달가림의 곁에 엄청난 속도의 인영이 내려섰다.


“달가림!”“늦었다. 벨.”

“괜찮아? 델크를 만났다고 하던데!”


그의 곁에 내려선 존재는 다름 아닌 벨이었는데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달가림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고 그의 몸이 멀쩡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델크? 그 표범의 이름이 델크인가?”

“응, 숲에서 우리랑 같이 살아가는 녀석. 하지만 요즘은 번식기라 조심해야해.”

“흐음.. 주의해야겠군.”

“그런데.. 괜찮은 거지? 응?”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벨의 모습에 달가림은 실소를 머금었다. 역시 자신은 바뀌었다. 벨이 하는 말은 전장에서도 수없이 검사들과 병졸들에게도 들었던 말이었다. 그 당시엔 말을 들으면서도 왜 저런 말을 하나 싶었지만 지금은 가슴 한 칸이 따뜻해지고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있었다.


“난 괜찮으니까 호들갑떨지 마라 벨.”

“응...”


달가림의 미소를 보고 안심했는지 벨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벨의 머리를 몇 번이나 쓰다듬던 달가림은 문득 떠오른 것을 말했다.


“그나저나 이드리브라는 여자는 어떻게 됐지?”

“그 여자는 지금 왕께서..”


벨이 하던 말을 듣고 있던 달가림은 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을 박찼다. 벨이 하려던 것이 무슨 말인지 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평소에도 곱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던 이레인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기까지 운용해가며 전속력으로 하얀 숲의 중심부로 향했고 덕분에 숲으로 왔을 때 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무릎을 꿇은 이드리브와 그녀의 머리로 손을 가져가고 있는 이레인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달가림은 소리쳤다.


“멈춰!”

“....달가림?”


달가림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이레인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서려있었다.


“이레인, 그녀를 죽이지 않기로 했을 텐데.”

“응? 안 죽여.”


이번에는 달가림이 의아한 표정을 지을 차례였다.


“뭐..?”

“안 죽여.”


달가림은 그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이레인이 조심스레, 이드리브의 머리로 향해있던 손을 슬그머니 치우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손은 엄지가 중지의 손톱 언저리를 감싸고 있는 모양새였는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 달가림은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었던가.


“이레인.. 네 힘이라면 인간의 머리는 그 정도로도 산산조각 나버릴 거다.”

“...힘을 절반만 써도?”

“아무리 네가 힘을 조절해도 최소한 뇌가 진탕되겠지.”

“.....”


달가림의 말에 이레인은 침묵에 빠져들었고 이드리브는 멍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이레인이 자신을 죽이는 대신에딱밤이라는 것을 놓는다기에 기다리고 있었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장이 갈라져서 죽는 것 보다 더 끔찍한 죽음에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레인은 묘인족의 기준으로 생각하며 말했을 뿐이었지만.


“그렇다면 역시 그냥 죽이는 게.. 아니 그냥 놔둘게.”


이레인은 아쉬운 듯 중얼거리다가 듣자마자 찌푸려지는 달가림의 눈썹에 바로 손을 늘어뜨렸다. 그녀의 입장에선 달가림보다 무서운 것이 없는 것! 지상최강이라는 묘인족의 왕이 한 인간에게 좌지우지 된다고 하면 누구든 믿을 사람이 없으리라.


“네가 싫어하는 건 안 할래.”


자유분방하고 오만한 묘인족의 습성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달가림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을 것을. 그런 그녀를 보며 달가림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그가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지고 말았다.


“흑흑... 으아아앙!”


갑작스레 터진 이드리브의 울음보에 달가림은 물론 이레인마저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세상이 떠나가라 서럽게 울었고 그 소리에 다른 묘인족들도 인상을 찌푸린 채 모여들었다. 귀라는 감각기관이 매우 예민한 몇 안 되는 종족 중 하나인 묘인족은 최대 반나절 거리에 있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기에 가까이에서 나는 소음은 그들의 귀찮음을 방해하기에 충분했다.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케엑!”

“시끄러워서 낮잠을 깼잖아! 헉...”


그러나 신경질적으로 모여들던 묘인족들은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석상이 되었다. 시끄러움에 그 원인을 처리하러 모여들었던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한 쌍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하하 오늘 산책은 어디로 가볼까나~”

“흠흠.. 역시 잠도 너무 오래자면 좀 그렇지.”


한껏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모여들었던 묘인족들은 즉시 얌전하게 된 모습으로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자리에는 다시 넷만이 남게 되었다.


“음.. ”


달가림은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살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을 겪어 본적이 거의 없었다. 우는 사람, 특히나 여성을 본 기억은 거의 없다보니 그는 침음을 흘리며 이레인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 죽일까?”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흘러나오는 이레인의 말에 짧게 신음한 그는 이마를 짚었다.


“후우.. 네게 뭔가 기대한 내가 잘못이군.”

“으아앙!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렇게, 하얀 숲의 일상(?)이 또 하루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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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행


“.......”

“.......”

“어서 꺼지지 않고 뭐하는 거냐 인간.”


아는 사람만 아는 조용한 폭풍우가 지나간 후, 모처럼 평화롭던 하얀 숲의 일상이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었다. 그 원인은 두 여인, 이레인과 이드리브였다. 숲 속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 달가림은 이드리브에 가한 금제를 풀어주었는데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저, 이 숲에 남을래요.”

“뭐라고..?”

“저는 달가림씨에게 너무 큰 은혜를 졌어요. 마법사가 된 자, 은원은 확실히 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렇게 실천해왔으니 이대로 숲에 남아 돕고 싶..”

“안 돼.”

“왜...왜요? 물론 전투마법은 잘 못하지만 그래도..!”

“넌 묘인족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있나?”

“.....”

“이들은 사납고, 오만하며, 강인한 종족이다. 듣자하니 이곳에서 묘인족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적어도 네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진 않군.”


달가림은 이드리브를 물러서게 하기 위해 독하게 말했다. 이드리브는 입술을 깨물었다. 달가림의 말이 틀린 것이 없었던 것이다. 마법사가 무서운 존재라는 것은 몇 번에 걸친 전쟁으로 이미 입증된 바였지만 그건 마법사가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묘인족이라면 준비는커녕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할테니까. 그러나 그녀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이곳에 남겠어요.”

“그리고 남동생이 붙잡혀 있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셈이지? 일전에 널 보낸 로엔 제국의 수상이라는 자가 그냥 두고 볼 리 없을 텐데?”

“그는.. 아마 제가 죽을 줄 알고 이곳에 보냈을 거예요. 제국의 수상이라는 자가 묘인족에 대한 정보를 모를 리는 없으니까. ”

“네가 살아온다면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좋고 죽어도 손해 볼 건 없으니 보낸 것이군.”


달가림은 검사였지만 그가 서 있는 전장은 권력자들의 암투로 벌어진 것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검사들을 고용한 군대의 장군조차도 그들의 손에 좌지우지 되어 지휘도 할 줄 모르는 자가 그저 권력에 의해 취임하여 수많은 희생을 야기하기도 한다. 때로는 옳은 말을 하는 자가 좌천되어 전장에서 싸우다 죽어가기도 한다.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도 있는, 그런 이야기였다. 달가림의 냉혹하기까지 한 평을 들은 이드리브는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십중팔구 그랬겠죠. 그리고 남동생은.. 아마 죽이진 못할 거예요. 언젠가 뛰어난 기사가 되어 황궁수비대에 발탁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무리 흑재상이라도 황제의 곁에 있는 기사를 함부로 처리하진 못 할 테죠.”


마법사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뛰어난 자들만이 익힐 수 있는 학문이다.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은 것인지는 이드리브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거침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를 이곳에 있게 해주세요. 남동생을 구출하기 위해선 준비가 필요해요. 오히려 제국에 돌아가면 운신이 더욱 힘들어질 테니까. 대신 그 대가로 무슨 일이든 하겠어요.”

“결정권자는 내가 아니다.”


달가림은 그렇게 말하며 이레인을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 자신이 결정권자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지만 그의 눈빛을 받은 이레인은 완전히 다르게 해석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달가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 머무는 건 허락해주지 인간.”

“감사합니다. 묘인족의 왕이시여.”

“그러나 살아남는 것은 네 몫이다. 어떠한 묘인족도 널 돕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달가림에게 다가오지 마. 그는 나만의 것이니까.”

“.......”

“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너는!”


뭔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줄 알고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달가림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소리쳤다. 얼굴에 살짝 홍조가 돌고 평소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말 더듬기까지 하는 모습은 그가 이레인의 말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물론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그가 가족처럼 생각하는 이레인과 벨만이 있던, 외인(外人)이 없을 때가 아니던가.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외인에게는 말을 가려서 하는게 철칙인 청선국의 관념을 배우며 자란 달가림에겐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한창이네요..”

“뭐라고..?”

“합..”


그런 모습을 보며 무심코 중얼거린 이드리브는 달가림이 쳐다보자 찔끔한 듯 고개를 움츠렸다. 그러나 이미 내뱉어진 말을 주워담을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결국 달가림은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이 녀석에게 내가 무엇을 바라는 건지...”

“응? 나는 강하고 무엇보다 네 아이를 낳을 수...”

“큭, 이 부끄러움도 모르는 바보가!”


그러나 이어지는 이레인의 말에 달가림은 다시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고 말았다. 묘인족이 자유분방한 종족이라고는 하지만 가끔은 달가림의 이해범위를 넘어서버린다. 그들은 흔히 말하는 돌려말하기를 할 줄 몰랐다. 함께 지내면서 어느 정도 그 사실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가 살던 청선국과 주변나라는 엄격한 예절사회였기 때문에 그의 반응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격렬했다. 물론, 이레인에겐 아무래도 좋은 일인 것 같았지만.


“왜? 아이를 낳았지만 우리 묘인족은 인간처럼 시들지 않아. 아이가 다 자라도 여전히 쌩쌩...”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후우.. 아니다. 그만하자 이레인. 더 이상 말하면 머리가 아플 것 같으니.”

“....”


그러나 당당하게 말하던 이레인도 달가림이 심각한 얼굴로 이마를 짚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침묵시킨 달가림의 말이 이어졌다.


“한 가지 더 추가하지. 네 목숨의 빚으로 넌 나를 한 번 도와주어야 한다. 이의 있나?”


본디 검사는 약한 자를 돕는다는 것을 기본 철칙으로 삼는다. 그것은 청선국에서도 거의 잊혀져가긴 했지만 달가림은 그 철칙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왔다. 그것에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도 원칙이지만 이드리브의 경우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이레인을 노렸던 자, 은원을 확실히 하는 그로서는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일이었기에 부득이하게 자신의 철칙을 약간 수정하기로 한 달가림이었다. 이드리브는 마법사답게 그 점을 눈치 챘는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관대한 처사에 감사해요.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요?”

“음?”


그녀에게서 부탁한다는 말이 나올 줄 몰랐던 달가림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이드리브의 말이 이어졌다.


“남동생의 구출을... 도와주세요.”


그녀의 말에 달가림의 곁에서 그에게 머리를 비비던 이레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달가림이 왜? 네놈의 핏줄이 어떻게 되건 말건 무슨 상관이야.”

“그건..그렇지만 그래도 부탁드려요.”

“감히 인간 따위가...”

“그만.”


이드리브의 말을 들은 이레인은 살기를 피워올리며 그녀에게 다가섰지만 옆에서 뻗어 나온 달가림의 손이 그녀를 제지했다.


“제의를 받아들이도록 하지.”

“달가림!”

“이레인.”

“....운 좋은 줄 알아 인간.”


이레인이 천천히 살기를 거두어들이자 이드리브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달가림씨!”

“감사해할 것 없어. 어차피 그 카를 이라는 자와는 만나서 담판 지을 생각이었으니까.”

“네....?”


달가림의 말에 이드리브는 혹시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나 싶어서 반문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너무나도 담담한 목소리로 폭탄선언을 내뱉었다.


“그 자를 만나서 이곳에 대해 관심을 끄도록 만들 생각이다. 자고로 머리를 굴복시키면 그 아래의 것들은 자연히 따라오는 법이니까.”

“그는 제국의 재상이에요! 그렇게 쉽게 만날 수도, 협상할 수도 없는 상대라고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 밑에는 수많은 수하들이 있고 그 중에는 제국에서 자랑하는 소드 마스터도 있어요!”

“소드 마스터?”


처음 듣는 단어에 달가림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드리브의 설명이 이어졌다.


“검을 다루는 기사들 중에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자들을 의미해요. 듣기로는 그들은 말처럼 빠르게 달릴 수 있고 검 하나면 하늘 아래 무서울 게 없다더군요.”

“한 번 겨뤄보고 싶군.”

“달가림씨라면 분명 가능할... 잠깐, 제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에요!”

“너는 네 동생을 구하는 게 힘들다고 해서 그만둘 생각인가?”


달가림의 물음에 그녀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그..그럴 리 없잖아요! 그 아이는 제가 반드시 구할 테니까!”

“마찬가지다. 무엇이 가로막고 있다 한들, 나도 나아갈 뿐이야.”


이어지는 달가림의 말에 이드리브는 무언가를 느낀 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 쉽지 않을 거예요.”

“지금까지도 쉬웠던 적은 없어.”


정말 그랬다.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청선국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으니까. 그가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남았을 때가 8살이 되던 해였으니 그야말로 평생 동안이라 해도 좋았다.


“마법사는 준비하는 자라고 했던가? 떠날 준비가 끝나면 말하도록.”

“알겠어요. 일주일내로 준비를 끝내고 찾아뵐게요.”

“인간.”

“네..네..?”


이드리브의 말에 자신을 쓰다듬는 달가림의 손길을 느끼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내던 이레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당장이라도 심장을 꿰뚫겠다는 듯 서슬 퍼렇게 빛나는 눈에 이드리브가 움찔하면서 물러서자 그녀는 자신의 손톱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오지 마. 달가림은 내 거야.”

“....하아, 준비가 되면 벨에게 말하도록. 이 고양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까.”

“....”


여전히 고집불통인 한 묘인족, 그리고 곤란한 표정을 짓는 두 인간과 함께 오늘도 하얀 숲의 일상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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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숲, 최상품의 멜미르 사과가 나며 한 해 내내 하얀 색이 유지되어 신비로움을 연출하지만 그 누구도 가까이 갈 생각은 못하는 장소.

그 이유인 즉슨 그곳에는 지상의 생명체들 중에서 최강이라고 여겨지는 묘인족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하얀 숲의 중앙, 제법 넓게 펼쳐져있는 공터에 한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 있는 광경을 본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충격에 빠지리라.


“으음..”

“....”


그리고 그 옆엔 맑은 갈색 눈동자를 지닌 묘인족 하나가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앉아있었다. 한참을 생각에 빠져있던 하던 남자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너도 따라가고 싶다고?”

“응!”

“왜지?”

“난 인간과도 다르고 다른 묘인족과도 달라. 왜 다른지, 반의반은 인간의 핏줄이 섞여있으니까 그들을 보면 뭔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

“아버지는 성묘가 되기 전에는 인간 세상에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어.”

‘아아...’


달가림은 속으로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벨이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어린 묘인족은 기어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어버린 것이다.

묘인족은 가족에 대한 애정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러나 벨은 두려워하지만 이레인을 어머니라 불렀고 지금은 이미 죽은 자신의 아버지를 추억하고 있었다.


‘다른 묘인족과 다르다고 느낀 건 이것 때문이었나?’


평범한 묘인족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인간의 피가 섞인 그는 묘인족의 수명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간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평범한 묘인족에게 50년은 그저 지나가는 유년기였지만, 그에겐 길고도 혼란스러운 세월로 다가왔으리라. 자신이 가지게 된 감정의 정체도 모른 채 불안해하면서.


“안...돼..?”

“....”

“달가림이 불편하면....”

“벨.”

슥.


“다..달가림?”


자신 없는 눈으로 시선을 깔고있던 벨은 갑자기 느껴지는 감각에 눈을 크게 하며 말을 더듬었다. 검은 빛의 머리칼이 그의 등에 흘러내렸고 그의 이마에는 단단한 육체가 맞닿아있었다. 달가림이 다가와 그를 감싸듯 안은 것이었다.


“벨.”

“으..응?”


머리 위에서 부드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벨이 고개를 위로 향하자 은은한 미소를 지은 달가림의 얼굴을 마주했다. 벨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달가림은 그런 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린 가족이다.”

“......!”

“가족 사이에 불편이란 건 없어. 그러니 부담스러워할 필요도 없다.”

“가족...”

“네가 원한다면 따라와라. 나도...”

“....?”


좀처럼 볼 수 없는 뜸 들이는 모습에 벨이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달가림은 그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가족과 함께 여행은 처음이니까. 기대되는군.”

“....응!”


그리고두 사람이 대화를 끝내는 순간, 달가림은 익숙한 기척이 느껴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왔나?”

“후우..후우.. 늦어서 죄송해요. 이것저것 챙길게 많아서..”


이제는 어깨까지밖에 내려오지 않는 보랏빛 머리칼을 질끈 묶은 이드리브가 그들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벨도 함께 간다.”

“응..? 묘인족은 귀찮은 일을 싫어하는 걸로 아는데..”

“이미 결정 난 사항이다. 본인도 동의했고.”

“그렇다면야. 상관은 없지만...”


이드리브는 벨을 연신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그녀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참다못한 벨이 내뱉듯 말했다.


“묘인족도 여행정도는 다녀. 귀나 꼬리 말고는 인간과 크게 다를 게 없으니까 인간들이 잘 눈치를 못 챌 뿐이야.”

“그..그런가요?”

“아마 제국이라는 땅에도 있을 걸. 여행을 떠나는 묘인족들은 인간이 많은 곳을 찾아서 떠돈다고 하니까.”

“하..하지만 제국 정보부에서도 그런 언급은...”

“인간들에게 제압당하는 묘인족이 있을 것 같아?”

“없...겠네요.”


지상에서 묘인족을 이겨낼 존재는 없다. 물론 초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드 마스터와 대마법사가 있긴 하지만, 이드리브가 몇 주간 하얀숲에서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묘인족이 마음먹고 빠져나가려고 했을 때 막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애초에 초인이라 불리는 이들은 그 숫자가 매우 적었으니 어디서 만날지 모를 묘인족들을 인간이 막아서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이야기는 끝났나?”

“응. 이 인간이 질문을 더 하지만 않으면.”


달가림의 물음에 벨이 슬쩍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을 쳐다보자 이드리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제가 궁금한 건 그게 끝이에요!”

“그렇대.”

“.... 벨.”

“알겠어. 다른 인간들에겐 이러지 않을게. 이 인간은 뭔가 수상쩍은 냄새 나니까 계속 의식해버려서.”

“수..수상쩍은 냄새라니....”



벨의 말에 이드리브의 표정이 시무룩해졌으나 한 남자와 묘인족은 아무런 관계없다는 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그 뒤를 울상을 지은 이드리브가 뒤따랐다.


“벨, 우선 일전에 가구를 구했던 도시로 가자. 우선 그곳에서 여행물품을 준비해야할 것 같으니까. 길 안내를 부탁한다.”

“응.”


묘인족에겐 여행물품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나 벨은 그의 말에 그저 수긍할 뿐이었다. 그 모습이 훤히 보였기에 달가림은 벨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벨의 입에서는 기분 좋을 때 나오는 울림이 흘러나왔다.


“갸르릉.”

“지난번에 따두었던 멜미르 사과를 처분한 돈이 아직 남아있으니 이번엔 곤란할 일이 없겠어.”

“응 그때 열심히 했어.”

“잘했다 벨.”

“응응!”

“가...같이가요!”


정확히는 그가 딴 것이 아니라 벨과 달가림의 이름을 단 협박(?)에 못이긴 묘인족들이 준비한 거지만 양심의 가책은 들지 않았다. 결국엔 돈의 절반이상은 도무지 어떻게 유지했는지 궁금해지는 옷가지들을 교체하거나 하는 식으로 쓰이지 않았던가.


“...그나저나.”


달가림의 눈썹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이레인은 어디 갔지?”

“....”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는 벨은 침묵을 지켰고, 대신 허겁지겁 그들을 따라잡은 이드리브에게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후아.. 이레인님께선 오늘 하루 종일 안 보이시던걸요?”

“그런가.”

“그러고 보니 이틀 전부터 전혀 본 적이 없는데...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별 것 아니다.”


이드리브의 물음에 달가림은 짧게 대답 후 걸음을 옮겼다.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그의 뒷 모습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싸늘함에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 수 없었고, 그건 벨도 마찬가지인지 찰싹 달라붙어있던 평소와는 달리 조금 떨어져서 따라가고 있었다.


‘마중도 나오지 않겠다?’


실제로 발걸음을 옮기는 달가림의 속에서는 은은한 분노가 생겨나고 있었다. 원인은 다름 아닌 이레인, 그녀의 고집 때문이었다. 그는 삼일 전, 이레인과 했던 대화를 회상했다.


“나도 갈 거야.”

“불가.”

“왜 안 된다는 거야!”


동굴 앞에서 달가림은 불만가득한 표정의 이레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이드리브라는 인간은 같이 가면서 왜 나는 안 돼!”

“그걸 굳이 말해 주어야 아나?”

“도대체 왜 안 된다는 거야!”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그녀에게 달가림은 단호히 말했다.


“넌 인간을 죽이지 않을 자신이 있나?”

“그건 갑자기 왜?”

“덤비지만 않으면 상관없다는 말은 하지 마라. 애초에 묘인족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너와 만나는 인간은 모조리 죽을 테니까.”

“그건...”

“물론 싸워야 하는 순간이 있을지도 모르지. 다만 난 학살자가 되는 건 사양이다.”


그의 말에 자신 없는 모습으로 말끝을 흐리는 이레인, 달가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내가 갈 곳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묘인족의 기준은 통하지 않아. 인간의 기준을 따라야한다.”

“내가 왜..!”

“그것이 인간이니까. 너 자신이 묘인족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듯 인간 또한 그렇다.”

“.....”

“이드리브에게 물어보니 제국은 최대 백 만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더군. 아무리 네가 강한들 수만, 아니 수십만의 군대를 마주하고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의 말에 이레인은 사납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시시한 인간들 쯤이야 얼마가 와도 모두 쓸어버릴 수 있어.”

“그 중에 나 같은 검사라 섞여있기라도 한다면 어쩔 셈이지?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겠나.”

“하지만 그런 인간은...”

“없다고 단언할 수 없지. 제국에는 소드마스터라는 존재가 있다더군. 그들도 어느 정도의 실력일지 알 수 없는 판국에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될 바에야 처음부터 위험이 될 가능성은 배제하는 것이 좋겠지. 이게 너와 동행이 불가능한 이유다.”

“....”


그의 말을 들은 이레인은 몸을 돌려버렸고 그 뒤로 이틀 이 지난 지금까지 달가림은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고양이는 잘 토라진다더니.. 묘인족도 비슷한 건가.’


정확히는, 그녀가 자신을 피했다는 표현이 맞으리라. 그녀의 거처인 동굴의 안에서는 틀림없이 기척이 느껴졌으니까. 그녀를 보기 위해 자신이 찾아간다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잘못한 게 없는데 뭐하러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단 말인가.


‘후우...’


속으로 한숨을 내뱉으며 달가림은 회상을 마쳤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편한 감정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눈치를 보게 된 것은 그와 함께 있던 벨과 이드리브였다.


“아무 말 없으니까 더 무서워.”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네요 이건...”


두 사람은 나란히 어깨를 움츠린 채 달가림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하얀 숲이 끝나는 경계선에 다다를 때 까지, 그들은 말 한 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인간, 뭐하는 거야.’

‘그러는 벨님이야 말로 이 분위기를 개선하지 않고 뭐하시는 거에요!’

‘내가 너보다 나이 많아.’

‘인간으로 치면 한창 어린애잖아요!’


눈짓으로 치열한 미루기(?)를 하던 그들은 달가림이 돌연 발걸음을 멈추자, 움찔 몸을 떨며 반사적으로 물음을 내뱉었다.


“....”

“왜.. 그래..?”

“무..무슨 일 있나요?”


그러나 그들은 이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말로 기분이 언짢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던 달가림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져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옅은 미소이긴 했지만 평소에는 거의 볼 수 없는 그의 표정 변화에 벨과 이드리브는 감탄을 내뱉었다.


“와아...”

“굉장한 미소네요..”


평소라는 그런 그들에게 자신은 눈요깃거리가 아니라며 한 소리 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달가림은 그저 지긋이 숲의 한쪽을 바라보며 말할 뿐이었다.


“나와.”

“어어..”


그리고 그의 말이 나오고 나서야 벨은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고, 유일하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드리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에? 누가 있나요?”

“한 번만 더 말하지. 나와라.”

“누가..”

“흥, 너 따위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당연한거다 인간.”


그 때 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세 사람의 앞으로 마치 장막처럼 흩날리는 하늘빛 물체가 사뿐히 내려섰다. 정확히는, 하늘빛 머리칼을 길게 기른 인영이었다. 그것은 묘인족, 그 중에서도 특별한 이가 지닌 색. 적어도 하얀숲에 살아가는 존재는 물론, 세 사람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이레인님?!”

“....”


자신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짓는 이드리브와 주춤 뒤로 물러선 벨을 무시한 채 이레인은 달가림에게 다가섰다.


“나도 갈 거야.”

“....분명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달가림이 옅게 만들어져있던 미소를 지운 채 말하자 이레인은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서서 자신보다 약간 큰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갈 거야. 혼자선 절대 못 보내.”

“...어딜 봐서 혼자라는 거지?”

“약해빠진 묘인족 하나에 쓸모없는 인간 하나잖아?”

“너란 녀석은 말을 가려서 할 줄 모르는 건가.”

“내가 저것들보다 강해.”

“하아...”


확실히 그녀의 강함은 달가림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몇 번 겨뤄보기만 해도 그녀가 작정하고 전력을 드러낸다면 자신도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러면 뭐하겠는가. 정신 자체는 어린아이와 비슷한 수준인데.


“그리고 내가 부인이야.”

“너..너는 갑자기 무슨 말을! 그런 말은 남들 앞에서 꺼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나..!”

“아니라고 부정은 안하잖아.”

“그건...!”

달가림은 이곳에 떨어진 후 처음으로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부인이 된다는 조건을 건 마지막 승부에서 져버렸으니 할 말이 없었다. 승부는 승부였으니까.


“그때는.. 네가 이겼으니....”

“그러니까 따라가도 되겠지? 인간은 부부가 일심동체라면서?”


의미도 모르는 채 사용하고 있겠지만 달가림은 두통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저기 쓸모없는 인간에게 들었는데.”

“큭..”

‘그 여자 쓸데없는 말을...’


언젠가 이드리브에게 쓸데없는 지식을 주입하지 말라는 소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달가림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도무지 예상치도 못한 방향에서 치고 들어오는군.’


이레인은 그의 마음속에서 걸리고 있던 부분을 귀신처럼 걸고 넘어지고 있었다. 물론 제대로 된 표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성격상 일부러 그러진 않겠지만, 어찌되었건 그녀의 말은 결정타가 되어 그의 가슴 속에 파고들고 있는 건 사실.


“나보고 인간의 기준을 지키라면서?”

“으으음...”


달가림이 곤란함이 담긴 신음과 함께 침묵하자 벨과 이드리브에게서 놀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헉.. 달가림이 말싸움에서 졌어..?”

“역시 본인도 내심 좋았던 거네요. 평소에는 그렇게 칼 같던 사람이...”


물론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들이라 직후 그들은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말 하는 건 자유지만... 책임도 질 자신이 있나보지?”


달칵.


달가림의 눈이 일순간 서늘해지며 그의 손이 검 손잡이에 올라갔다. 그러자 벨과 이드리브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안 그랬다간 묘인왕과 호각을 겨루는 인간이 당장이라도 그들에게 검을 기세였니까.


“와..와아 저기 처음 보는 나무가...”

“호..호호호 날씨가 참 맑네요.”


묘인족만이 살아가는 하얀 숲에서, 그것도 나무가 우거져 하늘마저 잘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뱉어진 둘의 말은 누가 봐도 단순한 말 돌리기였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들에게 검은 날아오지 않았다. 다만 평소보다 유난히 짙은 달가림의 한숨소리가 들려왔을 뿐이다.


“하아아....”‘사..살았다.’

‘이번엔 정말 위험했어요...’


완전히 시선을 피한 두 사람을 내버려둔 채, 달가림은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을 고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하늘빛 묘인족에게 시선을 향했다.


“돌아가라고 해도 듣지 않겠지?”

“승부, 또 해?”

“....”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오는 이레인의 모습에 달가림은 침묵했다. 승부를 하는 것 자체는 상관없다. 문제는 이레인은 진심으로 달려들 것이고 자신도 그에 맞추려면 전력을 다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부상 없이 그녀를 이겨낼 자신은 없었다. 거기다 부상을 입었을 때 회복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 느긋하게 승부 후에 몸을 회복하고 길을 떠나자니 제국의 재상이라는 자에게 시간만 더 주는 셈이 되어버릴 상황이다. 구출에 도움을 주기로 약속한 이드리브의 동생의 경우도 시간이 더 지체했다간 그 사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달가림은 자신의 고집을 조금 꺾기로 했다.


“.... 별 수 없군.”

“....”

“함께 간다. 단..!”

“..?”


함께해도 된다는 말에 귀를 쫑긋거리며 꼬리를 흔들고 있던 이레인은 이어지는 달가림의 말에 움찔거렸다.


“인간들 사이에선 무조건 내 말에 따르도록. 이게 조건이다.”

“그건...”

“불가능하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내 목숨을 걸고 너와 승부할 밖에.”


단호함이 담긴 달가림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이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는 자신이 죽어도, 타인이 죽어도 큰 감흥이 없을 거라 생각했고 실제로 자신의 손으로 인간, 동족 가릴 것 없이 죽여왔다.

그러나 이 인간, 달가림과 만나고 나서 죽음이라는 게 너무나도 두려워졌다. 정확히 이걸 무어라 해야 할지 몰랐지만 어찌되었건 그와 사라지는 게, 함께하지 못하는 상황이 두려워진 것만은 확실했다. 그게 어떠한 상황이건.


“....그건 싫어.”

“그럼 어쩔 거지?”


그렇기에 따라올 건지 말 건지를 묻는 달기림에게 이레인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따라갈 거야.”

“... 그렇군. 벨, 이드리브.”

“응...?”

“네에...?”

“가자.”


분명 그가 반대하던 상황이었으나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달가림의 얼굴에는 다시 옅은 미소가 피어나있었다. 그러나 뒤따라가는 셋은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고, 그렇게 두 인간과 두 묘인족이라는 묘한 일행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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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란스 공국은 벌써 오백년의 역사를 써내려온 국가였다. 영토가 커지거나 줄어들거나 하는 일도 없이, 그들이 이런 오랜 역사를 유지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얀 숲’, 그 안에 살고 있는 존재들 때문이었다.

지상최강의 종족으로 불리는 묘인족, 그들은 하얀 숲에 살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인간들에게 경고를 해왔다. 실제로 벨로란스 공국을 침략했던 일만이 넘는 군대가 전쟁소리에 시끄럽다며 찾아온 수십 명의 묘인족에 의해 전멸당하기도 할 정도였으니 주변국은 물론 제국마저 공국을 건드리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덕분에 지난 오백년간 그들은 한 세 번의 전쟁을 겪었고 그 외엔 평화롭게 살아왔다. 지금까지는.


“무...무어라 하셨소?”


벨로란스의 17대 왕인 일리안트 필룸 벨로란스는 자신의 앞에 있는 자에게 기가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제국은 진정 우리 벨로란스가 멸망하길 바라는 것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벨로란스와는 제국이 왕국이었던 시절부터 우호관계가 아닙니까.”


그의 앞에 있는 존재는 바로 대륙의 세력을 양분하는 두 제국 중 하나, 로엔 제국에서 파견된 대사였다. 그의 이름은 파울 델 세사민, 약 10년 째 공국에 머물고 있어 왕은 물론 모든 신하들에게도 익숙하고 친근하기까지 한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 일리안트 왕에겐 그는 재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얀 숲의 개발권을 달라는 것이오!”

“직접 개발하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소유권을 이양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멜미르 사과의 채집과 유통에 대해서는 공국의 소유권을 인정하겠습니다.”

“허어... 그렇다 해도 곤란하오.”


아까부터 이런 식으로 평행선이었다. 하얀 숲을 개간하기 위해 소유권을 넘겨달라는 파울과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일리안트 왕의 거부였다.


“제국에서도 잘 알다시피.. 우리는 작은 땅 만큼 병사도 많지 않소. 묘인족들이 분노하면 나라 자체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오.”

“그렇다면 제국의 병력을 파견해드리겠습니다.”

“그들의 유지비를 우리는 감당할 수 없소.”

“전하....”


담담하기만 하던 파울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의 표정엔 안타까움이 묻어있었다.


“이곳에서 10년간 대사로 지내며 진심으로 평화로운 나라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륙은 격변할 겁니다. 공국은 아마 그 시작점에 해당하겠지요.”

“무슨...말이오 대사?”


질문을 던지고 있었찌만 일리안트 왕은 그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 그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로엔 제국은.. 조만간 무리아스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할겁니다. 전하, 저는 이 평화로운 나라가 짓밟히길 원하지 않습니다. 비론 저는 제국인이지만 이곳의 사람들이 얼마나 평화롭게 살고 얼마나 따뜻한 사람들인지 알고 있나이다. 부디 제국의 청을 받아들이소서.”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일리안트 왕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것은... 황제폐하의 뜻이오 그렇지 않으면 ‘흑재상’의 뜻이오?”

“그건.....!”

“내가 다스리는 땅은 제국에 불과하면 점에 불과하오. 그런 나도 로엔 제국에 있는 검은 그림자는 들어보았소.”

“그렇다면 더욱 잘 아실 것 아닙니까. 그는... 카를 쉬폰 케시크라는 인물은 자신의 앞길을 막는 것들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허허허.. 제국에 멸망당하나 묘인족에게 멸망당하나 이쪽은 매한가지라오. 그대는 우리가 하얀 숲의 소유권을 제국에게 넘겼을 때 묘인족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오 대사?”

“....”


그의 말에 파울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일리안트 왕의 말이 이어졌다.


“십중팔구 그들은 분노할 것이오. 설사 제국에서 병력을 지원받는다 한들 그들의 유지비를 감당하다가 공국이 파산하겠찌. 전쟁이 벌어지지 않는다 한들 수많은 백성들이 굶어죽을 것이오.”

“...괜찮으시겠습니까 전하. 저는 들은 바를 그대로 제국에, 흑재상에게 보고해야하는 처지입니다.”

“그건 그대의 잘못이 아니네. 그대는 받은바 명을 잘 이행할 뿐이니.”

“전하...”

“단지 진정 자네가 이 나라를 조금이라도 좋아했다면... 보고 날짜를 일주일만 늦춰주게. 제국에는 협상 중이라고 보고하면 되지 않겠는가?”

“일주일...말씀이십니까.”

“요즘 들어 내가 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네. 조금이라도 더 내 하나밖에 없는 딸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군.”


일리안트 왕에겐 아들이 없었고 부인도 일생에 한 명만을 맞이했다. 그리고 늘그막에 얻은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이솔렛 필룸 벨로란스였다.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총명함으로 유명하고, 거기에 아름다운 외모까지 지니고 있어 ‘벨로란스의 은화’라 불리며 공국의 보물로 추앙받는 존재. 그렇기에 파울은 왕의 말 뒤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공주님을 피신시킬 생각입니까?”

“그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다 내가 못난 탓이지.”

“......”


파울은 고민했다. 자신은 로엔 제국의 관료이며 대외적인 업무는 벨로란스 공국에서의 외교관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공국은 감시한다는 임무도 포함되어 있다. 아무리 작은 나라라지만 제국의 실질적인 주인인 흑재상이 이 나라를 눈여겨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대 황제폐하께선 어째서 그런 자를 들이셨는지... 아니, 들일 수밖에 없었던가.’


현 황제가 즉위한지 고작 3년 밖에 되지 않았고 나이도 10대로 황제라고 불리기엔 어리디 어린 인물이었다. 그 자질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황제가 굳건히 홀로 서기까지, 각종 음모와 위협에서 황제를 지킬 인물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역할에는 왕국을 단숨에 제국으로 만든 흑재상이 가장 적절했으리라. 그는 왕국을 제국으로 키워놓고서도 아무런 욕심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황실의 그림자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인물이었고, 제국의 귀족들은 황제보다 뒤에서 움직이는 그를 더 두려워할 정도였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나 지난 10년간 드는 이 땅에 마음을 빼앗겨버렸고, 그렇기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연민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윽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 사흘, 사흘 동안의 말미를 드리겠습니다. 그 이상은 제 능력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고맙소.”

“전하는.. 죽음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파울의 물음에 일리안트 왕은 노인의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의 목숨으로 수많은 생명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오.”

“그렇습니까...”


그야말로 백성을 걱정하는 인자한 왕의 모습에 파울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백성들은 오래도록 전하를 칭송할 것입니다.”

“허허.. 그대도 입에 발린 소리를 할 때가 있구려.”

“.....저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라고 말 하고 있었지만 이 이상은 그의 위치로는 허락되지 않는 언행이었다. 그렇게 그가 왕에게 예를 갖추고 알현실을 나가려던 순간,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근위병이 들어섰다.


“저..전하!”

“무슨 일이냐. 지금 제국의 대사를 만나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라 말했거늘.”

“그...그것이....”


다급함이 가득한 근위병의 표정에 알현실을 나서려던 파울도 잠시 걸음을 멈춘 채 귀를 기울였다. 근위병이 힐끗 그의 눈치를 봤지만 일리안트 왕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이 작은 나라에서는 숨긴다 한들 며칠이면 모두 밝혀지게 된다. 조금 전


“제국과 우리는 오랜 동맹국이다. 그러니 말하라. 무슨 일인지.”

“그게... 묘인족이 찾아왔습니다.”

“무...무어라?”


그러나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근위병의 보고에 일리안트 왕은 물론 파울 조차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그들의 이야기가 누설된 것일까라는 생각과 동시에 두려움, 도대체 왜 찾아왔을까 하는 의문이 동시에 그들에게 찾아들었다. 그 사이 근위병의 말이 이어졌다.


“정확히는 인간 둘과 묘인족 둘입니다만.. 왕궁 앞에서 전하를 뵙고 싶다며....”

“으으음... 대사, 아무래도 그대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어야 할 것 같네.”

“.... 알겠습니다. 이에 대한 보고도 하게 됩니다만 상관없으시겠습니까?”

“묘인족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 이게 최선의 방법이오. 제국의 관료가 함께 있다가 피해를 받으면 나중에 중대한 외교적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그대가 보고를 한다 한들 어쩔 수 있겠소?”

“그렇다면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파울은 일리안트 왕에게 간소하게 예를 취하더니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머릿속엔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하여 보고 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으리라.

그를 물리친 자신의 행동이 어쩌면 보다 심각한 상황이 초래할지도 몰랐지만 가만히 있다간 당장 나라가 멸망할지도 몰랐다. 묘인족이란 그런 존재였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아직까지도 부동자세로 대기하고 있던 근위병에게 말했다.


“근위병, 손님을 이곳으로 모셔라.”

“그럼 근위병들을 모두 소집하겠습니다.”

“묘인족이 덤벼온다면 막을 수 있겠나?”

“그..그것은... 죄송하옵니다 전하!”


순간 그 상황을 상상한 듯 말을 더듬는 근위병에게 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어렸을 때 묘인족을 본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아비인 선왕이 햐얀 숲에 선물, 정확히는 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공물을 올리러 갔을 때였다.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압도적인 하늘빛 묘인족,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를 보며 그는 인간이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꼈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묘인족을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이 땅에 얼마나 있겠는가. 그보다 그들을 안내하기 전에 시종장에게 말해서 다과와 차를 준비하게. 묘인족은 차를 즐기지 않겠지만 함께 온 두 인간도 그러리란 법은 없으니.”

“명을 받들겠습니다!”



경례를 마친 근위병이 알현실을 떠나자 일리안트 왕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왕으로 있었던 지난 세월 동안 공국은 평화로운 시절을 영위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덮쳐오기 시작했다.


“제국과 묘인족이라...”


어느 하나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존재들이 공국에 다가서고 있었다.


“하늘이 진정 벨로란스를 버리심인가..”


왕은 짧게 탄식했고 그와 동시에 알현실을 두드리는 문소리와 손님이 도달했음을 알리는 근위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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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행(2)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달가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벨로란스라는 나라는 제국을 가기 위해선 무조건 거쳐야 하는 나라 중 하나, 생각보다 규모가 작은 나라였기에 왕이 있는 수도까지 오긴 힘들지 않았다. 하얀 숲 탓에 애초에 마물들은 근처에 서식하지도 않았고, 가끔 등장했던 도적들은 이레인과 벨의 외모를 보자마자 꽁지빠지게 도망쳤다. 그렇게 수도에 도착했더니...


“갑자기 이런 대접을 받다니 이상하군.”

“왜? 가끔 인간들한테 갈 때 마다 이렇던데.”

“이레인.. 혹시 이곳의 사람들을 학살하기라도 한 건가?”

“귀찮은데 뭐 하러?”

“... 그래 묘인족은 그런 존재들이었지.”


수도의 정문에 도달하자마자 일행을 목격한 경비대장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뛰어내려왔고 그야말로 극진한 대접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뒤로 전령으로 보이는 병사가 빠르게 도시 중앙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으나 태도를 보니 공격하려는 낌새가 없어 가만히 두었다.


“왕이 직접 초청하다니..”



그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었다. 갑자기 공국의 왕이 보냈다며 화려한 마차가 도착했고 달가림 일행은 정중히 모셔져 왕이 있는 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원래 이곳의 사람들은 손님을 무조건 왕궁으로 초청하는 건가?”


달가림은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나머지는 당연하다는 반응이었다. 당연하다 못해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있는 이레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나머지 두 사람을 바라보자 이드리브와 벨조차 별 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달가림이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짓자 이드리브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그보다, 그녀 이외에는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인원이 없다는 게 옳았지만.


“묘인족이 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에요. 이들은 수백 년의 시간동안 하얀 숲과 묘인족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요. 공국 정도는 묘인족이 날뛰기 시작하면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이곳 사람들의 묘인족에 대한 인식이 도대체 어떻기에...”

“음... 간단하게 설명하면 자연재해 정도일까요? 그것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곳사람들만 그런가?”

“아마 묘인족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설사 그것이 제국이라도.”

“.....죽고 싶나 인간?”

“흐엑! 살려주세요 달가림씨!”

“... 적당히 하도록.”

“갸릉...”


이드리브의 설명을 들은 달가림은 날뛰려는 이레인의 머리를 쓰다듬음으로서 진정시키며 생각에 빠졌다. 묘인족이 이 정도로 취급받는 상황에서 굳이 건드리는 흑재상이라는 자의 행동에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달가림의 시선이 이번에는 왠지 쭈뼛거리고 있던 벨에게 향했다.


“벨, 하얀 숲에 나 이외의 인간이 찾아온 적이 있었나?”

“달가림을 만난 그날을 제외하면 없어.”

“그 병사들 말인가?”

“응.”

“갑옷에 특별한 문양은 없었는데.. 혹시 깃발을 본 적이 있나?”

“아, 인간들이 나무 작대기에 천을 매달아두는 걸 이야기 하는 거야?”

“맞다.”

“음.. 본거 같아.”

“벨님, 혹시 그 깃발이 붉은색 배경에 하얀 칼 두 개와 꽃이 그려져 있지 않던가요?”

“그랬던 것 같은데.”

“....”

“이드리브, 뭔가를 알고 있나?”


좀처럼 말에 참견하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끼어드는 모습에 달가림이 의문을 담아 시선을 향하자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문장은... 로엔 제국의 문장이에요.”

“제국? 제국에서는 너 혼자 파견했다고 하지 않았나?”

“...흑재상이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는 누구도 몰라요. 그의 움직임에는 단지 결과만이 있을 뿐이죠. 하지만 그도 묘인족이 감당하기 힘든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을 텐데 도대체 왜...?”

“......”


결국 흑재상이라는 자는 모든 걸 알고서도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타인이 보기엔 터무니없이 어설픈 행동들이었지만 만약 그것들이 더 큰 무언가를 위한 포석이라면 말이 된다. 한 나라를 제국으로 만든 자가 이렇게 허술한 방법으로 일을 처리할 리 없으니까.


‘다른 의미로 강적을 만난 걸지도 모르겠군.’


달가림은 마음속 깊이 경계심을 새겨 넣었다.

살왕 때처럼 무기를 들고 찾아드는 적은 오히려 대처하기가 쉽다. 단지 베어 넘기면 될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지략으로 나서는 적은 자신의 능력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능력까지 활용하고, 그렇기에 상대하기가 더욱 껄끄러웠다. 듣기로는 그를 벼랑까지 몰아넣었던 천라지망도 한 지략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작품이었으니까.


“어찌되었건 그 병력은 이드리브, 너도 모르는 사이에 파견된 인원들이라는 거군.”

“네.. 왜 그랬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요.”

“어려운 이야기는 귀찮아.”

“.....!”


그러다 돌연 이레인이 저돌적으로 몸을 비비기 시작하자 달가림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그만둬라! 남들이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응? 부부는 이러는 거라던데?”

“이드리브....”

“하..하하.. 여기까지 오면서 이레인님이 인간의 부부는 어떻게 하는 지 물어보셔서..”

“도대체 이 세계는 남녀관계가 어떻게 되어가는 건가! 어떻게 이런 부끄러운 행동을 남들 앞에서 하는 거지?”

“아.. 사실 저도 소설 속에 있던 걸 말씀드린 거지만요.”


툭.


“그렇군. 그렇단 말이지..”


그리고 이어지던 이드리브의 말을 듣고 있던 달가림의 속에서 무언가 끊어졌다. 그의 몸에 몸을 비비고 있던 이레인이 슬며시 그의 눈치를 보며 물러섰고, 자신도 몸을 비비고 싶었지만 이레인의 눈치를 보느라 움찔거리고만 있던 벨의 표정이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바로 이레인을 사이에 끼고 않아있던 이드리브는 그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소설이라..”


뿌드득.


달가림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설은.. 무슨 소설이지?”

“연애소설이죠. 엄청 유명해서 제국에서도 누구나 다 아는... 헉?”


그리고 그때서야 이드리브는 달가림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다..달가림씨..?”

“그래.. 고작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이야기의 내용을 네가 이레인에게 알려줬다 이거군. 그럼 그 행동을 당하는 나도 구경거리일 거고. 그렇지 않나?”

“그...그게 저도 평생 연구만 하느라 부부가 되긴 커녕 연애도 못 해봐서...”

“그러니까 너도 확신할 수 없는 걸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저 묘인족에게 알려줬다는 거군? 그것 때문에 나는 부끄러워지는 상황만 생기고 말이야.”

“자..잘못했어요오!”

“......”


서늘함이 느껴지는 달가림의 눈빛을 받은 이드리브가 몸을 떨며 심판(?)을 기다리던 순간, 덜컹거리던 마차가 멈추는 느낌과 함께 마차의 문이 열렸다.


“이제 도착입... 히익!”


마차의 문을 연 병사는 달가림의 표정을 보더니 그대로 몸을 굳혔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생전 처음 표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물론 그것을 입으로 내뱉는다는 실수 따윈 하지 않았다. 그가 모셔온 손님은 무려 묘인족이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잠시 동안 식은땀을 흘리던 그는 평생 해보지 못 했던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하여 다시 입을 열었다.


“구..궁전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앞에 안내하는 근위병이 대기하고 있으니 따라가시면 됩니다!”

“......”


그러나 병사의 말을 들었음에도 그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어느새 새하얗게 탈색되었던 얼굴에서 회복한 벨이 그의 소매를 이끌었다. 달가림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의 서늘한 시선을 받은 벨은 몸을 움찔했지만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잠시 감정을 삭이듯 눈을 감은 달가림의 눈이 이득고 다시 떠지며 말했다.


“...벨.”

“응.”

“지금부터 이 여인이 이레인에게 이상한 소리를 할 것 같으면 입을 막아라.”

“...죽일까?”

“흐에엑!”


너무나도 가볍게 내뱉어진 벨의 말에 이드리브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으나 다행히 달가림을 고개를 저었다.


“죽이거나 몸을 상하게 하진 마라. 그녀는 제국에 가기 위한 길잡이이기도 하니까.”

“사..살았다아..”

“단, 그 이외엔 무슨 짓을 해도 좋다.”

“응, 알겠어.”

“잠깐만요! 그 이외엔 무슨 짓을 해도 된다니...!”


불공정한 처사라며 따지고 들려던 이드리브는 다시 자신에게 향한 달가림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했다.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마법사. 묘인족은 분명 감정에 서툰 종족이지만 그렇다고 네가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야 .”

“......”

“그리고 나는 아직 널 완전히 믿지 않아. 그것만 기억해두도록.”

“...새겨둘게요. 죄송해요 달가림씨.”

“움직인다. 왕을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


달가림이 마차 밖으로 나와 움츠리고 있던 다른 병사를 따라나서자 나머지는 그 뒤를 따랐다. 그의 눈치를 보면서. 그리고 그들이 먼발치까지 움직여 보이지 않게 되자 마차 문을 열었던 병사는 참아왔던 숨을 단숨에 내뱉었다.


“.....푸하. 정말 무섭구만.”


조금 전 그는 생전 처음으로 생명의 위기를 느꼈다. 숨을 돌리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묘인족과 인간이라.. 신기한 조합인걸.”


묘인족은 오만하고 잔혹하다는 소문만을 들어왔으니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긴 했다. 더군다나 함께 있던 인간 중 하나는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작은 묘인족 한 명만 남자였던 것 같은데 묘인족은 일부다처젠가...?”


달가림이 들었다면 당장 칼부림이 일어났을 말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의도치 않게 목숨을 부지한(?) 병사는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급한 모습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신분은 왕궁 수비대 소속 병사, 명령을 마쳤으니 서둘러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했다.


“어이쿠, 또 수비대장에게 잔소리 듣겠어.”


깐깐한 상사의 얼굴을 떠올린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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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작은 궁전으로 안내되었다. 돌로 포장되어있는 길을 걸으며 달가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규모는 작았으나 궁에는 품위가 있었고 사치스럽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양식으로 지어져있었다. 안내하는 병사의 몸에는 절도가 있었고 궁에는 소란스러움이 없었다. 다시 말해 이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어질다는 증거이리라.


“도착했습니다. 이 앞의 정원을 가로질러 가시면 대기하고 있는 시종장이 안내를 해줄 것입니다.”

“음...?”


안내역을 맡던 근위병의 말에 달가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무기를 가지고 있소만?”


자신의 검을 살짝 건드려 보이는 그의 모습에 근위병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전하께서 그냥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 그렇군. 알겠소.”


그리고 일순간 그의 말을 납득한 달가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손톱으로 강철마저 잘라내는 묘인족을 만나는 상황에 일행이 무기를 지니고 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마 벨로란스의 왕이라는 인물도 그 점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상대는 일국의 왕,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 한다. 그는 매어져있는 검의 상태를 확인하고 옷가지을 점검했다. 그리고 뒤따라오던 세 사람을 바라보자 이드리브는 자연스레 스스로를 점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의문을 담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두 쌍의 눈동자에게 말했다.


“벨, 이레인.”


왜 그러고 있냐는 눈빛을 보던 벨과 이레인은 나직한 그의 목소리와 살짝 올라간 눈썹을 보고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충 옷을 털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들이 왜 그래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모습에 달가림은 속으로 작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레인 너는 묘인족의 왕이라는 자가 체통을 지켜야 하지 않겠나? 인간은 힘 이외에도 상대를 판단하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으니.”

“내가 왜? 약해빠진 것들은 대우해줄 필요 없어.”

“우린 가족이다. 가족인 네가 얕잡아 보인다면 나도 함께 그런 취급을 당하게 된다. 그러니 이 나라의 왕을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해라.”

“.... 알겠어.”

“벨.”


못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레인을 지나 달가림의 시선이 벨에게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벨은 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 입을 열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달가림이 곤란한건 싫어.”

“좋아.”


이윽고 각자의 몸가짐을 점검한 그들은 정원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알현실로 향했다. 문은 금이나 은으로 치장된 것이 아닌 색이 짙은 나무를 조각해 고풍스러운 것이었다. 마치 주인의 성격을 보여주듯 위엄은 살리면서도 사치스러워보이진 않았다.


덜컹.


“어서 오십시오, 제가 벨로란스 공국을 다스리는 왕.... 음?”


그곳에는 노인이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는 예법을 취하다 멈춘 자세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는 달가림이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뒤따르던 이레인과 벨의 모습을 본 후, 다시 정신을 차린 듯 정중한 모습으로 예를 마쳤다.


“일리안트 필룸 벨로란스라고 합니다. 하얀 숲의 위대한 분들이시여.”


그러자 처음으로 조용히 달가림의 뒤를 따르기만 하던 이레인의 입이 열렸다.


“귀찮으니까 앉아. 늙은 인간.”

“감사합니다. 위대한 묘인족의 왕이시여.”



노인, 벨로란스 공국의 왕은 그녀에게 정중히 숙이며 다시 한 번 예를 취했다. 분명 이레인은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았으나 그는 당연하다는 듯 예를 차리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렇게나 그의 자리에 가서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꼬맹이가 많이 컸네.”

“네, 덕분에 벨로란스는 평화로웠으니 이렇게 오래 살아버렸습니다. 허허..”

“이레인, 이 상황에 대해 나에게 설명할 것이 있지 않나?”

“뭘?”


자신의 말에 고개까지 갸웃거리는 이레인의 모습을 본 달가림은 그녀에게서 설명을 듣는 걸 포기했다. 그 대신 그는 왕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상대는 작다한들 일국의 왕이다. 예의를 차리지 않는 게 이상했다.


“무기를 들고 들어오게 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괜찮습니다. 이레인님과 함께 오신 손님이니 무기정도야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허허허.”

“저는 그저 평범한 사람 중 하나일 뿐이니 말을 높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보다 두 배는 살아온 인물에게 존대를 듣는 상황이 어색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왕이고 자신은 일개 검사일 뿐이었다. 예의를 차리는 건 필요하지만 무엇이든 과하면 없느니만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러나 일리안트 왕은 허허롭게 웃을 뿐 태도를 바꾸진 않았다.


“평범하다고 보기엔 어폐가 있습니다. 이레인님과 함께 오신 손님은 설사 인간이라 할지라도 예의를 차려야겠지요. 그보다, 이레인님과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그건...”


청선국의 사람들은 외부인에게 자신의 사정을 말하길 꺼려하는 풍조가 있었다. 달가림의 경우 떠돌이 생활을 하며 위험에게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말을 조심해왔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에게 내뱉어진 왕의 물음에 바로 대답할 수 없었고, 그 사이 대답은 이레인에게서 흘러나왔다.


“내 남편.”

“이레인!!”

“그랬군요. 이레인님이 인간과 어째서 함께 다니시나 생각했습니다만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리고 그녀의 돌방행동에 놀란 달가림은 왕을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소리쳤다. 이드리브 앞에서까진 모르겠지만 타국의 왕 앞에서 자신의 생활이 알려지는 건 굉장히 상황이 다르다.

“적당히 하지 않으면...”


달가림이 천천히 자신의 검으로 손을 가져가던 찰나, 그의 움직임이 갑작스레 멎었다. 이레인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있었고 벨은 이드리브를 억지로 잡아끌어 달가림의 곁으로 데려왔다.


“으아악 벨님, 아파요! 인간 여자의 몸은 약해서 세심하게 다뤄주시지 않으면 부서진다구요!”

“시끄러워. 조용히 안하면 입고 있는 옷을 잘라내서 입을 막아버릴 거야.”

“흑흑.. 이래보여도 마법사인데 취급이 너무해요오..”


두 사람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서자 달가림은 검의 손잡이를 쥐며 일리안트 왕에게 말했다.


“찾아오기로 한 자가 있었습니까?”

“별 달리 방문하기로 한 자는 없었습니다만.. 있다면 근위병이 말해주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병사들의 훈련이 있습니까?”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적이군.”


공왕의 대답을 들은 달가림은 망설임 없이 운룡을 빼어들었다. 그의 감각에 짙은 적의가 전해졌다. 적의를 뿜어내는 이들은 점점 빠르게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병사들의 외침이나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만큼 그들의 능력이 뛰어남을 반증했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들이 눈앞에 들이칠 때 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일리안트 왕은 상황을 알아차린 듯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솔렛...”


그는 다급히 이레인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이레인님! 부디 제 딸아이를 구해주십시오!”

“내가 왜?”


그리고 그의 간절한 목소리를, 이레인은 단박에 잘라내었다.


“제발..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아이만은.. 제 딸만은...!”


한 나라의 왕이 이렇게 남에게 간절히 비는 순간이 있을까. 일리안트는 자세마저 무너뜨린 채 간절한 모습으로 부탁했으나 이레인의 대답은 한 결 같았다.


“내가 그렇게 할 이유가 뭐지?”

“제발... 뭐든 드리겠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거라면...바라신다면 제 목숨이라도 드릴 터이니!”

“늙은 인간의 목숨 따위에는 관심 없어.”

“아아아....”


나이는 들었으나 밝은 빛을 품고 있던 늙은 왕의 얼굴이 급격히 시들어져간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을 절망과 회환, 무기력감이었다.


“따님, 공주는 어디계십니까.”

“.... 감사합니다!”


갑작스런 달가림의 말에 일리안트의 멍한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고 동시에 이레인의 목소리가 커졌다.


“달가림!”

“이레인.”

“왜 달가림이 인간을 도와줘야해!”


그녀는 더 이상은 참아줄 수 없다는 듯 일의 원인이 된 일리안트 왕을 죽일 표정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그러나 그녀는 이어지는 달가림의 말에 걸음을 멈춰야했다.


“나는.. 내가 가족으로 여기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 그러니 타인이 가족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 무시할 순 없지 않겠나.”

“.....”

“나를 막지 마라 이레인.”

“그래도...”

“소중한 이들이 죽어갈 때 무력했던,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못했던 내 자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별로 유쾌한 경험이 아니야. 되도록 남에게 겪게 하고 싶진 않다.”

“......”


진심이 담긴 달가림의 목소리에 이레인은 잔뜩 화가나있던 그녀의 귀와 꼬리가 늘어졌다. 설사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너는 이드리브와 함께 이곳을 지켜라. 이드리브, 그 마법이라는 것으로 상대를 구속하는 일도 가능한가?”

“상대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다르지만 가능해요. 물론 달가림씨 정도라면 준비 없인 무리고...”

“우선 확보를 시도하고 안 되면 그만둬도 좋다.”

“알겠어요.”


이레인과 이드리브에게서 대답을 받아낸 달가림의 시선이 벨에게로 향했다.


“벨, 너는 나와 함께 가자.”

“응!”

“내가 앞장설 테니 따라와.”

“하지만..”


딱 잘라말하는 달가림의 말에 벨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으나 이어지는 그의 말에 다시 반짝임이 돌아왔다.


“너에겐 뒤를 맡기겠다. 가족이 아니면 부탁할 수도 없으니까.”

“응응!”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벨의 얼굴에는 다시 화색이 돌았다. 목숨이 오가는 싸움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지만 그의 미소는 해맑기만 했다.


“딸아이, 이솔렛은 아마 지금쯤 2층 우측 끝에 있는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일리안트 왕의 설명이 끝나는 순간, 달가림은 벨과 함께 망설임 없이 발을 박찼다.


“이곳은 맡기겠다 이레인.”

“무사히 돌아와. 안 그럼 인간이란 인간은 모두 죽여 버릴 거야.”


상황에 맞지 않는 엉망진창수준의 협박에 달려가던 달가림이 입구 쪽에서 잠깐 멈춰 섰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넌 너를 이긴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머리.. 쓰다듬어 주는 것도 추가.”

“실없기는...”


고개를 내저으며 알현실을 나서는 달가림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하지만 고려해보도록 하지.”

“.....!”


순순한 달가림의 모습에 일리안트 왕을 제외한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적들이 들어서며 그 생각은 뒷전으로 미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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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대륙은 크게 두 세력으로 나누어져있었다.

동대륙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혼 제국, 그리고 서대륙을 지배하는 신흥강자 로엔 제국. 그 아래에서 반쯤 강제 동맹을 맺은 군소 왕국들은 대륙을 반으로 가른 채 신경전을 벌였다. 특히나 로엔제국의 경우, 그 역사가 불과 100년이 채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파죽지세로 그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


로엔 제국의 수도 칼리아스 힐, 그곳에야말로 대륙을 양분하는 두 세력 중 하나인 로엔 제국의 황제가 기거하고 있는 황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을, 온통 검정색 일색인 사람이 걷고 있었다. 성별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에 치렁치렁한 검은 천을 두르고 베일까지 눌러쓴 모습으로.


“충!”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이었지만 황궁에 있는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황제를 호위하는 기사들조차도 그를 보며 가볍게 경례를 했을 뿐, 그의 발걸음이 그들의 주인 황제가 머물고 있을 집무실로 향하고 있음에도 지켜보기만 하는 모습이었다.


“황제폐하.”

“누구냐? 이 시간은 분명 휴게라고...”

“신 카를이옵니다.”

“오오, 재상인가! 어서 들어오게!”


그리고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는 행동으로 그가 왜 황궁 안에서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지 판명되었다. 그는 로엔 제국의 재상. 황제 바로 아래에 있는 권력자이자 제국의 귀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 ‘흑재상’이라 불리는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그 외에도 이유가 하나 더 있었지만.


“카르을!”


덥석.


“폐하...”


황제가 있는 집무실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서자 그에게로 녹색 물결이 다가섰다. 정확히는, 녹색 머리칼을 지닌 미청년이 그에게 검은 인영에게 안겨들었다. 마치 여자처럼 머리를 길게 기르고 부드러운 외모를 지닌 청년, 그가 바로 대륙을 양분하는 로엔 제국의 황제 델피어드 론 로엔이었다. 검은 천을 걸친 자에게서 곤란함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폐하께선 제국의 절대 지배자, 이러한 모습을 보이셔서는 아니됩니다.”

“흥, 내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카를 앞뿐이야!”

“이런이런.. 앞으론 좀 더 가끔씩 찾아뵈어야겠군요.”

“헉..! 그..그러지 말고 자주와! 업무에 치여서 죽겠단 말이야!!”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의 황제였으나 카를은 검은 베일 속에서 미소 지었다. 황제는 결코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이 다시 말한 것은 그 모습이 영원하기를, 언젠가 자신의 앞에서도 당당한 황제의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요즘 바빴나 보네? 무려 일주일만이잖아?”

“요즘 새로운 일이 생겨서 그쪽에 신경을 쓰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헤에... 그래? 나한테도 알려줄 수 있어?”

“언제나 그렇듯.. 모든 것은 폐하를 위해 하는 일이옵니다. 일이 완전히 마무리 되면 알려드리겠나이다.”


제국의 절대 권력자인 황제와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었지만 그의 말엔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 모습이 익숙한지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투덜거릴 뿐이었다.


“카를은 매번 그래. 그러니까 ‘흑재상’이라는 이상한 별명만 생겼잖아? 그거 선황 때부터 생긴 별명이라며?”

“저는 어떠한 말을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폐하께서 오롯이 계시고 이 땅을 통치하실 수만 있다면.”

“카를은 질리지도 않고 그 소리를 하네... 나는 황자였기에 황제가 된 것 뿐이야. 다행스럽게도 선황께 자식이란 나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런 말씀 마소서.”


카를은 열려있던 집무실의 문을 닫고 천천히 델피어드에게 다가섰다. 그리고는 그의 긴 녹색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신하가 군주에게 이런 행위를 한다는 사실을 누군가 안다면 길길이 날뛰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을 방해할 인물은 없었다. 애초에 황제와 독대할 수 있는 자는 제국의 재상을 제외하면 없었으니까.


“폐하, 당신께서는 황제의 자질이 충분하십니다. 그것은 이 땅에 살아온 인간들이 증명합니다.”


그리고 그의 손길에 황제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렇게 좋게 말해줘도 내가 더 이상 카를에게 줄 수 있는 거라곤 내 몸뚱아리밖에 없는 걸? 재물도, 영지도 거절하는 재상이니까.”

“저는 그 무엇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군림해주소서. 이 제국을 보다 살기 좋은 땅으로 만들어가소서. 그것이 제가 가장 바라는 것입니다.”

“그저 이곳에 있는 게 뭐가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카를이 원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거야.”

“감사하옵니다 폐하.”

“하지만 언젠가.. 내게도 재상에 대해 알려줘. 그건 가능하겠지?”

“때가 된다면 기꺼이.”


카를은 쓰다듬던 것을 멈추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곤 황제의 집무책상 앞에 있던 작은 병을 쥐었다.


“처음 보는 병이군요.”

“아 그거? 어의가 피로에 좋은 약이라며 주더군.”

“한 번 마셔 봐도 되겠습니까?”

“나야 뭐 다시 받으면 되니까 재상이 원한다면 모두 마셔도 돼 항상 나를 위해 고생하고 있으니까.”

“그럼 감사히...”


병을 베일 안쪽으로 가져간 그는 망설임 없이 내용물을 마셨다. 지켜보고 있던 델피어드가 놀랄 정도로.


“카를.. 많이 피곤했나봐?”


황제의 말에 카를의 몸이 숙여졌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아니, 괜찮아. 그걸로 카를이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면.”


안 그래도 부드럽게 느껴지는 얼굴의 황제가 미소를 짓자 방 안이 일순간 환해졌다. 그러나 카를은 흔들리는 모습 없이 병을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보겠나이다. 병은 제가 나가면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 바쁜 일이 없다면 자주자주 찾아오고.”

“최대한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황제에게 예를 표하며 집무실을 나온 카를은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황궁의 구석진 곳에 다다랐을 때, 그의 몸이 갑자기 허물어졌다.


“끄으윽...”


고통스러운 듯 입에선 연신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그의 곁으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괜찮으십니까!”

“퍼스트, 나는 괜찮... 크헉.”


결국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그림자는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설마.. 그 병에 있던 것이 독이었습니까?”


그림자의 물음에, 베일 너머에선 뒤틀린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맞다. 큭큭.. 뭔가 수상하다 싶었더니 역시 독약이었어.”


카를은 속에서 병을 꺼내고는 그림자에게 내밀었다.


“지금 당장 가서 어의를 사로잡아라. 아니, 그와 관계된 자라면 모조리 잡아들여. 내 이름을 걸고 배후를 밝혀낼 때 까지 무제한의 고문을 허가한다. 감히 로엔 제국의 황제를 암살하려 한 자에게 지옥의 고통을 보여줘라.”

“하지만 당신께서...”

“이 까짓 독으로 난 죽지 않아. 내가 누군지는 네가 더 잘 알 텐데? 인간의 독은 내게 소용없어. 단지 조금 아플 뿐이지.”


그의 말대로, 고통으로 떨리던 카를의 신형은 점점 진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림자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후우.. 당신은 너무 스스로의 몸을 과신하십니다.”

“당장 내 명령부터 수행해. 명령을 몇 번이나 반복하게 할 셈이지?”

“...알겠습니다. 임무 후에는 회복에 좋은 약이라도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어서!”

“명을 받듭니다.”


스윽.


카를의 말에 고개를 조아린 그림자는 나타날 때와 같이 자연스레 사라졌다.


“쿨럭쿨럭..”


그림자가 사라진 후에도 피가 고통 섞인 기침을 내뱉던 카를은 이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침 탓에 베일에 피가 묻은 채였지만 검은색인 탓에 굳기만 하면 크게 티도 나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황제를 건드리려는 자가 남아있다니 마무리가 서툴렀어. 최근 일에 신경 쓰느라 시선을 옮겼더니 그새 암살시도인가.”


몸을 비틀거리며 황궁의 입구로 움직이는 그는 자신이 최근에 진행해온 일을 떠올렸다.


“그 쪽도 변수가 많은데.. 우선 첫 시작은 문제가 없을 테니 눈을 다시 황궁으로 돌려야겠군.”


계획이 시작된 이상, 경과보고 이외엔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러니 당분간은 황제의 주변 청소를 진행해야할 것 같았다. 황제가 눈치 채지 못하게. 모든 오물은 자신이 짊어지도록.


‘제국의 앞길을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제거한다. 설사 신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계획해온 일이 시작부터 어그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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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괜찮나?”


촤악.


“응 문제없어.”


벨과 함께 2층 서고로 향하던 달가림은 복도를 가득채운 정체불명의 괴인들과 조우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회색 가죽 붕대로 온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고 비정상적으로 긴 손가락에는 날카로운 칼날들이 달려있었다. 마치 묘인족을 닮게 만들려고 억지로 만들어낸 것처럼. 그리고 달가림과 벨은 그들을 망설임 없이 베어 넘기며 전진하고 있었다.


“혹시 묘인족도 여러 종류가 있는 건가? 예를 들어 꼬리가 귀가 없는 묘인족이라던가.”

“이것들은 묘인족아냐. 살아있지도 않고.”

“뭐라고?”

“처음 봤을 때부터 썩은 냄새만 나는걸. 살아있는 건 이런 냄새 안 풍겨.”


묘인족의 감각은 이 세계에 온 후 어느 정도 시험해본 결과 의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시야에 완전히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도 그들은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 벨의 말은 잘못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달가림 또한 그들과 마주하고 나서 이상함을 느끼던 참이었다.


‘불쾌한 느낌은 이것 때문이었나.’


그가 공격한 부위들은 어디건 치명상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보통 그런 부위가 베어지게 되면 인간은 상당량의 출혈을 동반하게 되는데, 회색 붕대를 감은 이들에게선 거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 나왔다 치더라도 붕대를 살짝 물들일 정도의 미미한 양이 전부. 게다가 급소를 찔리거나 베여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격해오기까지. 덕분에 완전히 쓰러뜨리기 위해서 달가림은 일일이 그들의 목을 날려야만 했다. 벨의 경우에는 그들의 몸을 조각조각 내는 식으로 하고 있었지만...


“벨, 목을 노려라. 혹시 모르니 힘은 아껴두는 게 좋다.”

“해볼게.”


아마도 벨에게는 목만을 노리는 행동이 더 힘든 것 같았지만 이내 요령을 익혔는지 손톱이 상체부분만을 가르고 지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결코 칭찬할 행위는 아닌, 끔찍함에 가까운 광경이 여전히 연출되었지만 괴인들은 감정이 없는 존재처럼 계속해서 공격을 해올 뿐이었다. 서재 앞까지 다다르자 가득 몰려있는 붕대인들을 보며 달가림이 말했다.


“벨, 잠깐 뒤쪽을 막고 있어라.”

“알겠어.”

“후우우우....”


벨에게 뒤를 완전히 맞긴 달가림은 전신의 근육을 이완시켰다. 그리고 그의 검에 옅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을 때, 그는 단숨에 힘을 끌어올리며 전방을 향해 검을 횡으로 움직였다.


“이검(二劍). 겨울파도.”


스륵.

그의 검이 휘둘러진 궤적을 따라 가느다란 선이 생겨났다. 허공에 갑자기 등장한 선은, 처음엔 부드럽게 나아가다가 붕대인들에게 도달해서는 거대한 파도처럼 몰아쳤고 직선상에 있던 벽들과 장식품들이 선을 따라 갈라지기 시작했다.


쩌어어억.


마찬가지로 선을 마주한 붕대인들의 가슴팍에 선이 파고들더니 그대로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 잠시 그 광경을 보며 상대가 모두 쓰러졌는지 확인한 달가림은 조금 피곤한 목소리로 뒤를 향해 말했다.


“벨, 그쪽은 끝났나?”

“응.”


투툭.


어느새 뒤따라오던 몇 명의 복면인을 처리한 벨이 정체모를 끈적이는 액체와 피로 물든 자신의 손톱을 부러뜨리며 다가섰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표정까지 찡그리며 벨은 코를 움찔거렸다.


“불쾌한 냄새가 나. 씻고 싶어.”


묘인족의 입에서 씻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온 걸 보면 어지간히 싫은 냄새가 나는 듯 했다. 달가림에겐 그래도 참아줄 만한 냄새로 느껴졌지만 예민한 묘인족의 감각에는 더욱 고약한 냄새로 다가온 것이리라.

달가림은 당장이라도 그 요망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그들에겐 더 우선시해야할 일이 있었다.


“지금은 이게 먼저다.”

“달가림도 같이 씻을 거야?”

“일단은.. 나도 괴인들을 베었으니 그럴 생각이다.”

“그럼 빨리 끝낼래!”


무언가 기쁜듯한 벨의 대답을 들으며 달가림은 안쪽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지 않는지 경계하며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귀를 예민하게 세운 벨이 그 뒤를 따랐다.


“...늦은 건가?”


이윽고 복도 끝에 위치한 방 앞에 다다른 그들은 경비병으로 보이는 두 명이 쓰러져있는 방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의 기척을 살피던 달가림은 문을 열어젖혔고 벨과 함께 안에 펼쳐진 광경을 본 그의 눈썹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


폭풍이 지나간 듯 서재 안은 난장판이었다. 서적을 보관하던 가구들과 함께 서적에서 분리된 종이들이 사방에 떨어져있었고 그 사이로 살점으로 추정되는 덩어리들이 보였다.


“이상하군.”


왕의 말대로라면 이곳에는 그의 딸, 이솔렛 공주가 있어야했다. 만약 그가 도달하기 전에 당했다면 시체라도. 납치의 가능성도 있었지만 벨과 그가 하나밖에 없는 복도로 들어왔고 서재 안의 창문이 깨진 흔적도 없으니 납치는 되지 않았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서재 안은 여인으로 추정되는 옷가지는커녕, 그녀가 죽었다면 반드시 흔적으로 남았어야 할 피 냄새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흩어져있는 살점은 모두 붕대인의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조력자가 있는 건가?’


왕이 걱정하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공주에게는 침입자에게 대항할 능력이 없다고 봐야했다.


‘아니, 시체를 처리하는 특수한 방법을 사용했을지도...’


살왕과 그의 휘하에 있는 자들을 상대했을 때, 그들은 죽은 동료의 시체를 특수한 약물로 없애버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덕분에 그들의 본거지를 찾느라 1년 가까이 허비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것도 딱히 좋은 생각이라곤 할 수 없었지만,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르는 습격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대 다수라도 정면대결을 하는 게 나았다.


“흐음...”


혹시나 살수가 있을까 싶어 기감을 넓혀봤지만 살수 특유의 은은한 살기는 물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재 내부는 평범하게 느껴지다 못해 원래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자연스럽다..?’


문득 달가림은 위화감을 느꼈다. 인간의 손이 닿은 모든 것들은 인위적인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그 정도가 크냐 작으냐의 차이일 뿐,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가져올 수 없다. 정원을 아무리 꾸며도 숲이 될 수 없는 것처럼.


“.....”


분명 서재 안에 있는 것들은 인간이 만든 서가와 인간이 펼쳐낸 서적들이었다. 그럼에도 달가림은 서재 안의 풍경에서 그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마치 산 한복판에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서재 안은 자연의 기운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그 때, 눈썹을 찌푸린 달가림의 곁으로 벨이 다가서며 말했다.


“벨?”

“냄새가 나.”

“냄새?”


달가림이 반문하자 벨은 냄새를 맡는지 몇 번 허공에 코를 움찔거리더니 대답했다.


“응, 뾰족귀들, 엘프에게서만 나는 특이한 풀 냄새.”

“엘프?”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단어에 생각에 한동안 기억을 되짚던 그가 말했다.


“숲 근처에 산다던 이들인가?”

“응, 하얀 숲 근처에 살고 풀만 뜯어먹는 이상한 애들이야.”

“그렇다면 그곳에 사는 인간을 엘프라고 부르는 건가?”

“인간이랑 달라. 걔네들은 숲에서 나오지도 않고 인간보다 강해. 묘인족에 비하면 약해빠졌지만.”


벨의 말을 들은 달가림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자신의 검을 들어올렸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벨, 냄새의 근원지를 찾을 수 있겠나?”

“응. 잠시만..”


벨의 코끝이 또 몇 번 움찔거렸다. 이윽고 벨이 움직였고 달가림은 언제든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자세로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벨의 발걸음은 서재의 구석으로 움직였고 이윽고 그들은 한 서가 앞에 도착했다.


“여기서 냄새가 나.”

“흐음..”


서재 전체가 난장판이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도착한 곳에 있는 서가는 흠집은커녕 먼지만 가득 쌓여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 것처럼. 그리고 그 앞에 선 달가림은 감각을 최대한 끌어올렸고 작은 감탄을 터뜨렸다.


“기로 막을 만들어놨군. 그것도 서재로 보이게 위장해서 말이야.”


기의 효용이 무궁무진하다지만 눈앞의 광경처럼 일정한 형태를 만들어내기란 고검사인 그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정확히는 만들어내는 것 자체는 가능했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설명하는 게 옳았다.

대신 그는 검을 이용해 기의 그물을 만드는 방법을 택했고, 그 결과 그의 일곱 가지 검식 중 하나가 탄생했다.


“기? 막? 그게 뭐야?”

“나중에 설명해주마. 벨, 잠깐 뒤로 물러서라.”

“응...”


벨을 자신의 뒤편으로 물린 달가림은 천천히 기를 끌어올렸고 그의 검에서 맑은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검명이었다.


“사검(四劍)..”


기는 경우에 따라 가장 날카로운 검도, 가장 튼실한 방패도 될 수 있다. 그의 몸 앞으로 당겨진 검이 기의 막으로 내질러졌다.


“점홍(點紅).”


콰직.


검은 그대로 투명한 막에 파고들었다.

알에서 새가 부리로 알을 뚫고 나오듯, 그의 검이 들어간 자리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수련을 쌓은 달가림에겐 앞에 있던 막에 균열이 생겨나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아무리 단단한 힘이라 한들, 작은 점 하나에도 무너지기 마련이지.”


균열은 삽시간에 크기를 키워가더니 이내 막은 산산조각났다. 이어서 드러나기 시작한 광경 달가림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벨, 엘프는 인간과 다르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

“이곳의 왕은 인간이었지?”

“응.”

“...이상하군.”


그의 눈앞에는 귀 끝이 살짝 뾰족한 여인이 쓰러져있었다. 달가림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차에 벨의 코끝이 다시 움찔거렸다.


“뾰족귀하고 인간 냄새가 섞여있어. 이상해.”

“일단 이곳에 있는 사람이라곤 공주밖에 없다고 했으니 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벨, 이 여자를 업어라.”

“알겠어.”


**


“오오.. 이솔렛!”


알현실로 돌아가자 온통 시체와 내장으로 가득한 풍경이 달가림과 벨을 맞이했다. 왕은 그들이 오자마자 반색하며 벨에게 달려왔다. 벨은 왕에게 닿기가 싫은 듯 재빨리 등 뒤에 업혀있던 공주를 내려놓은 후 달가림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벨은 이내 식은땀을 흘리며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야했다. 거슬린다는 듯 눈을 살짝 치켜뜨며 그에게 살기를 날리는 이레인 때문이었다.


딱.


“자기 자식에게 살기를 보내지 마라.”

“아파.”


그런 이레인에게 달가림은 다가서서 딱밤을 날렸다. 이레인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살기를 거둬들였다. 물론 그러면서도 달가림의 곁에 달라붙는 건 잊지 않았다.


‘어른 같은 아이에, 아이 같은 어른이군.’


속으로 한숨을 쉰 달가림은 계속해서 이솔렛 공주를 안고 있는 왕에게 다가섰다. 그는 연신 자신의 품속에 있는 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의식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왜..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겁니까?”


달가림에게 물어오는 노왕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본디 권력을 지니고 있는 자들은 주변의 것들에 소홀하기 쉬운 법. 그러나 지금 이순간 자신의 자식을 소중히 여기는 감정이 여실히 전해져오는 왕의 모습에 달가림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저 기운이 빠졌을 뿐이니 시간이 지나면 회복할겁...”


말을 이어가던 달가림의 말끝이 흐려지더니 이내 완전히 침묵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왕이 있는 방향, 정확히는 그가 안고 있는 이솔렛 공주를 바라보았다.


“귀가...”

“이솔렛에게 무슨 문제라도...!”

“.... 아무것도 아닙니다.”


왕에게 고개를 저어보인 달가림은 생각에 빠졌다.

분명 서재에서 보았을 때는 뾰족했었던 귀가 지금은 평범한 사람처럼 둥글게 변해있었다. 단순히 잘못 보았다고치기엔 벨이라는 또 한 명의 목격자가 있었다. 그의 시선이 왕의 옆에 멀거니 서있는 이드리브에게 향했다. 그녀는 왜인지 창백한 안색으로 시선을 천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드리브.”

“다..달가림씨이...”

“무슨 일이지? 붕대를 감은 괴인에게 당했나?”

“그건 아니지만... 우욱!”


달가림의 질문에 대답하던 그녀에게서 구역질이 흘러나왔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그녀가 말했다.


“후우우우... 이레인님 덕에 다친 곳은 없지만 시체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죽이겠다고 달려들던 것 치고는 비위가 약하군.”

“저는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 실험실에서 살아왔단 말이에요오.”

“앞으로 이런 일을 얼마나 더 겪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적응하도록.”

“우욱.. 노력..해볼게요.. 푸하..”

“그보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뭔가요?”

“서재에서 공주를 발견했을 때, 그녀의 귀 끝은 보통사람과 달리 뾰족했다. 그리고 그녀는 정체모를 힘에 보호되고 있더군. 벨에게 들어보니 그건 엘프들의 특징이라면서?”

“네에?”

“하지만 지금은 보다시피 보통의 사람과 같은 모습이다.”

“잘못 봤다는 경우는...”

“나 혼자라면 상관없지만 벨도 확인한 거다.”

“엘프라...”


달가림의 말에 이드리브의 얼굴이 창백한 상태에서도 놀란 사람의 그것으로 변했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공주를 쓰다듬고 있는 왕에게 말했다.


“전하, 잠깐 괜찮을까요?”

“혹시 이솔렛을 깨울 방법이 있습니까!”

“상황에 따라선 가능할지도 몰라요.”

“부탁 하겠습니다!”


일리안트 왕을 뒤로 물린 그녀는 의식을 잃은 공주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달가림은 이드리브의 곁으로 기가 모여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흥미로움을 지니고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언제 봐도 신기한 수법이군. 몸에 쌓아둔 기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기운까지 공명시켜 사용하다니.’

“진실의 손(The honest hand).”


힘이 담긴 말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빛이 나며 마법이 발동되었다. 한동안 눈을 감은 채 명상을 하듯 가만히 손을 올리고 있던 이드리브는 잠시 후 빛을 잃은 손을 공주의 이마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굉장히... 특이한 경우네요 이건..”

“무슨 뜻이지 이드리브?”

달가림이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고 대신 일리안트 왕에게 시선을 향했다.


“전하, 혹시 왕가에 엘프의 피가 섞였나요?”

“...오래 전, 초대 공왕이 공국을 세우며 한 엘프의 도움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남아있습니다만 그것 이외엔 500년의 역사동안 누구도 엘프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엘프는 단순히 도움만 준 게 아니라 공왕과 사랑을 한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일리안트의 왕의 얼굴에 불신의 빛이 어렸다. 그 위로 이드리브의 말이 이어졌다.


“공주님에게서 느껴지는 건 틀림없이 엘프의 기운이에요. 엘프와 인간이 결합해서 나온 자손의 경우는 인간의 기질을 따라갈 때가 많지만 간혹 오랜 시간이 흘러 자손들에게도 격세유전 되기도 하죠.”

“그럴 수가.. 그럼 전설로만 치부되던 그게 사실이었다는 말입니까?

“뭐, 저도 공국의 역사를 지켜본 입장이 아니니 사실인지 아닌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공주님은 엘프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의식을 되돌릴 방법은 정녕 없는 겁니까?”

“인간의 치유마법은 아마 듣지 않겠죠. 차라리 주변의 숲에서 요양시키면 며칠 내로 회복될 거라 생각해요. 지금까지 잔병치레 한 번 하지 않았죠? 그건 엘프 특유의 자연회복력이 강해서 그런 거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정말..정말 다행입니다.”


이드리브가 대답과 함께 물러서자 왕은 다시 자신의 딸을 조심스레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드리브는 달가림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설명하는 도중에 자연스럽게 대답이 될 거라 생각해서 도중에 말을 끊어버렸어요.”

“문제없다. 그보다 우선 상황을 정리해보도록 하지. 인간과는 다른, 뾰족한 귀를 지닌 엘프라는 종족이 있고 그들은 하얀 숲 근처의 다른 숲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공주는 그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이겠지?”

“맞아요. 격세유전이라 매우 옅어진 상태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의문이 해결되지 않아. 그녀를 지키던 정체모를 힘과 저 귀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


달가림의 눈썹이 찌푸렸다. 이 세상은 자신이 모르는 것투성이다. 물론 앞으로 알아 가면 그 뿐이지만 자신이 살아가던 세상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차근차근 알아가고 싶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정보를 얻을 곳도 많지 않다.

답답함에 지어진 표정이었지만 이드리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저..정말이에요! 애초에 엘프와 인간의 혼혈이라는 경우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제가 소속되어 있던 제국의 수석마법사도 대충 짐작만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추궁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던 지식과 달라 조금 혼란스러울 뿐이야.”

“휴... 다행이에요. 그리고 아마 그녀를 지키던 힘은 그녀의 핏속에 잠들어있던 엘프의 힘일 가능성이 높아요. 생명의 위협을 받자 무의식적으로 발동되었겠죠.”

“다시 말해, 육체가 견디질 못했다는 건가?”

“정확해요. 평소에 쓰지도 않던, 그것도 핏줄 속에나 희미하게 남아있던 힘을 억지로 사용했으니 몸이 성할 리 없죠. 아마 그녀의 육체가 스스로를 회복하기 위해 바깥과의 모든 연결을 차단했을 거예요.”

“그렇군.”

“문제는 회복을 위해선 숲이 가장 좋은데 이 근방의 숲은 너무 위험하다는 거예요.”

“그건...”


이드리브가 말끝을 흐리며 왕에게 시선을 향하자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딱히 공주를 회복시킬 만한 장소가 없다는 의미이리라. 애초에 숲엔 인간을 해칠 수 있는 산짐승들이 가득하다. 호위병사가 있다손 쳐도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인데다, 괴인들의 침입으로 수많은 병사가 죽은 지금 상황에서 차출할 병사가 있을지 조차 의문이었다.

그의 시선이 알현실 한쪽에서 빈둥거리는 존재에게 향했다.


“이레인.”

“싫어.”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

“저 인간들을 도와주라는 거잖아? 싫어.”

“.... 이유라도 들었으면 하는데?”


달가림의 눈썹지 점점 찌푸려지기 시작했지만 이레인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냥 싫어.”

“그렇군.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


달가림이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서자 그녀의 표정은 슬쩍 불안한 것으로 바뀌었다.


“벨.”

“으응...?”


달가림이 자신을 부르자 그와 이레인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벨은 얼른 대답했다.


“저 여자를 하얀 숲에서 데려다주고 와라. 이드리브가 쓰던 집 정도면 충분하겠지.”

“달가림!”


그의 말에 귀와 꼬리를 뻗친 이레인이 소리쳤지만 달가림은 그런 그녀를 무시했다.


“가능하겠나?”

“하지만.. 이 인간을 데려다놓고 오면 달가림을 못 따라가..”

“벨,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라.”

“좋은 기회...?”

“인간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했었지? 그래서 여행을 따라나선 거고.”

“응..”

“인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다. 이솔렛 공주가 완전히 회복될 때 까지 곁에서 관찰하면 되지 않나? 회복을 마치면 다시 이곳에 데려다주면 된다. 쉬운 일이지.”

“그건 그렇지만..”


그의 말에 벨은 수긍하면서도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 원인을 짐작한 달가림은 그를 끌어당겨 끌어안았다.


“다..달가림?”

“반드시 돌아오마.”

“.....”

“너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 벨, 내 부탁을 들어주겠나?”

“하지만...”


벨의 시선이 이번엔 이레인에게로 향했다. 명백히 그녀가 마음에 걸린다는 반응이었다.


“이레인.”

“왜?”


그는 자신의 말을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지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레인에게 말했다.


“너도 나와 둘이서 움직이고 싶지 않은가?”

“.....!”


달가림의 말에 이레인은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눈동자를 크게 했다.


“네가 싫다면 별 수 없...”

“그럴게!”

‘정말 어린아이구나 이 묘인족은..’


그리고 예상된 반응에 달가림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론 티를 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럼 해결이군.”


한 건 해결한(?) 달가림의 시선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일리안트 왕에게 향했다.


“들으신 대로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놀라운 사람입니다..”

“저는 그저 검을 좀 쓸 줄 아는 검사일 뿐입니다.”

“아닙니다. 세상에 누가 있어 묘인족과 이렇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허허..”


감탄과 허무함이 섞인 음색을 흘린 왕은 고개를 숙였다. 달가림 뿐 만이 아닌, 모두에게 잘 보이는 인사였다.


“딸아이를 잘 부탁합니다.”


달가림은 그에게 고개를 마주 숙였다. 딸을 위해 왕의 체면을 내던진 부모의 마음에 감탄하면서. 그 후, 그는 다시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벨에게 말했다.


“들었지 벨? 부탁한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래, 기다려라. 내가 돌아갈 때 까지. 돌아오면 그 땐 다시 함께 여행을 가자.”

“응...”


자신을 힘주어 안아오는 벨의 머리를 쓰다듬은 달가림은 그가 이솔렛 공주를 업고 떠날 때 까지 지켜보았다. 왠지 모르게 지금 벨의 모습을 담아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공주를 가볍게 업은 벨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자 그는 다시 왕에게 말했다.


“이런 일이 있다 보니 애초에 온 목적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이든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드리겠습니다. 이 늙은이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우선....”


바닥에 닿을 듯 고개를 숙이는 왕에게 달가림은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엇이건 다 들어줄 것만 같던 왕의 얼굴은 서서히 굳기 시작하더니 그의 이야기가 마쳐졌을 땐 경악으로 가득 차있었다.


“제국에... 따지러 가신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만 문제라도?”

“이런 말을 하면 은인에게, 또 이레인님에게 굉장한 무례가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제국은 강합니다.”“제국이라는 조직이 강한 것이지 재상이라는 자가 강한 건 아닙니다.”

“허...”

“다른 부탁은 않겠습니다. 다만 로엔 제국으로 가는 빠른 길이 있다면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걸어가시면 피곤하실 테니 말과 마차를 빌려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아닙니다! 은인에게 받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소소하지요!”

“... 알겠습니다. 감사히 호의를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더 이상 거절했다가는 더한 제안을 할 것 같았기에 달가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문득,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말했다.


“이드리브, 네가 살던 집은 안전한가?”

“묘인족이 사는 숲이 안전하지 않을 리 없잖아요? 거기에 벨님도 계실거고...”

“아니, 내가 말하는 건 그 마법이라는 것과 관련되어서다.”

“아, 확실히 조금 위험한 시약들이 있을지도....”

“....”

“그..그렇지만 수납함에 잘 담아놨으니 괜찮아요! 억지로 열지만 않는다면...”

“제국에는 서둘러서 다녀와야겠군.”

“신뢰해주지 않는다니 너무해요오...”



과장된 모습으로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이드리브에게 달가림이 쐐기를 박았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도 모르나? 지금까지의 네 행동을 생각해보도록.”

“....”


자신이 벌인 사고를 회상하는지 이드리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그녀에게 달가림의 추가타가 이어졌다.


“그보다 마차는 몰 줄 아나?”

“네? 시골출신이라 어릴 때 조금 몰아보긴 했어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세요?”

“나는 마차를 몰아본 경험이 없다.”

“에? 그건 설마...”

“네가 마차를 몰아야 한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그럼 이레인에게 시킬까?”

“엑....”


이드리브의 시선이 한동안 달가림과 이레인 사이를 오가더니 이내 떨구어졌다. 둘 사이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일단 달가림이 왕의 호의를 받아들인 이상 자신이 거부한다고 해서 반전될 상황도 아니었다.


“그냥 제가 할게요...”


힘없이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담겨있었다.


**


“.....”


딱딱함이 느껴지는 마차의 의자에 앉아 달가림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일리안트 왕은 자신의 최고급 마차를 빌려주고 싶어했으나 달가림이 정중히 거절했다. 그리고 빌린 것이 이 군용 마차. 좌석이 편하진 않았으나 그는 오히려 이 감각이 편했다. 편안한 자리는 그에게 낯설게만 느껴지는 것이었으니까.


‘일단 제국까지 가는 건 해결되었다.’


벨로란스 공국의 왕에게서 마차를 받았으니 제국까지 간다는 일차적 목표는 해결되었다. 걸어가는 것도 문제는 없었지만 체력적인 면에서 걷는 것과 마차를 타고 가는 상황의 차이는 크다. 시간이 단축되는 건 덤. 찾아가는 일이 복잡할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벨로란스 공국에서 제국으로 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고, 제국 내에 도달해서는 이드리브의 인도를 따르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흑재상이라는 자가 있는 제국의 수도에 도착한 후였다.


‘한 나라의 재상을 쉽게 만날 순 없겠지.’


그가 살아온 청선국에서도 나라의 관리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전장에 설 때는 직책이 높은 장수들과 대면할 때도 있었으나 그건 전장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이다. 평소에 일개 백성이 관리를, 그것도 왕의 바로 아래 있는 존재를 만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흑재상이라는 자가 다른 일을 벌이기 전에 담판을 짓는 게 그의 목표였다.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오래 전 그는 소중한 것을 잃으며 그 점을 느꼈고,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때의 자신에겐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다르지 않은가.


‘후회는 한번이면 족하다.’


그는 마차에 타기위해 잠시 풀어놓은 자신의 검, 운룡을 쓰다듬었다. 섬세하고, 추억에 젖은 손길이었다. 달가림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모습은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보여주기 부끄러운 것이었으니까. 다행히 이드리브는 마차를 몰고 있었고 이레인은 마차 안이 답답하다며 지붕에 올라가있었기에 그는 걱정 없이 한동안 그 모습을 유지했다.


덜컹.


“음?”


그 때, 마차가 멈춰서는 게 느껴지자 달가림은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피곤한 기색의 이드리브가 마부 자리에서 내리고 있었다.


“달가림씨.. 잠깐 쉬어가야 할 것 같아요...”

“바로 야영준비를 하도록 하지. 쉬어라.”

“부..부탁드릴게요오...앗...”


피로가 심했는지 이드리브의 몸이 비틀거렸다. 달가림은 빠른 속도로 쓰러지려던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마차를 모는 것도 당연히 체력을 소비한다.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더 심하리라.


“조심하도록.”

“아...”


의도치 않게 달가림의 품 속에 안긴 꼴이 된 이드리브는 피로와는 다른 의미로 말을 더듬었다.


“가..감사합니다.”

“얼굴이 붉군. 몸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닌가?”

“꿀꺽. 괘..괜찮아요오..”


몸 상태를 물어오는 달가림을, 이드리브는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평상시에는 잘 몰랐지만 가까이서 바라본 그의 외모는 고혹적인 면이 있었다. 여인보다 부드러운 눈매와 검처럼 날카로운 눈썹, 거기에 훤칠한 키와 빛을 머금은 듯한 흑요석 빛 눈동자는 보이는 이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거기에 등까지 길게 길러진 밤하늘 같은 머리칼까지, 그가 거리에 있다면 남녀불문 누구나 한 번쯤 쳐다볼만한 모습이었다.


“떨어져.”

“흐엑, 이..이레인님!”


그러나 감탄도 잠시,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자신을 노려보는 이레인의 모습에 이드리브는 황급히 달가림의 품을 벗어났다. 그녀의 눈빛에서 싸늘한 한기가 몰아치고 있었다.


“감히 인간주제에 내 걸 탐내?”

“이건 어쩔 수가 없었달까...”

“죽고 싶은가보구나 인간.”


이레인의 날카로운 손톱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놓겠다는 듯 길게 뽑혀 나왔다. 가늘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강철마저 손쉽게 갈라놓는 예리함이 있었다. 이드리브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을 때, 달가림이 이레인에게 다가섰다.


“누구 멋대로 내가 네 것이라는 거지? 그보다 멋대로 행동하지마라 이레인.”

“비켜.”

“이번 여행의 동행조건은 내 말을 따르는 것이었을 텐데?”

“.... 저 인간 너무 마음에 안 들어. 길은 어차피 하나뿐이니까 이제 필요 없잖아?”

“마차를 몰 줄 아는 건 그녀뿐이다.”

“걸어가면 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내가 달가림을 안고 달리면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어.”

“하아.. 도대체 뭐가 문제냐.”


결국 달가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난히 까탈스럽게 구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상시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할 일이 있는 상황이 아닌가. 평생을 검사로서 수련을 쌓고 떠돌면서 여자와 지내본 바가 없으니 이럴 때 그가 할 수 있는 건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상식선의 행동밖에 없었다.


“우리는 놀러가는 게 아니다. 제멋대로 굴고 싶다면 이 일이 끝나고서 하도록.”

“하지만...”


달가림의 말에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던 이레인의 입이 문득 다물어지며 그녀의 안광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것은 달가림도 마찬가지였고 한술 더 떠 그는 자신의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무..무슨 일인가요? 이레인님도 달가림씨도 왜 그렇게 무서운 눈을 하고선..”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이드리브의 물음에 달가림은 자신의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불청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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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엔 제국의 황궁에는 총 3개의 출입제한 구역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당연히 황제가 집무를 보는 집무실이다. 그리고 두 번 째는 중요한 사항을 의논할 때 황제와 신하들이 함께 모이는 알현실, 마지막으로 제국의 재상 직에 있으나 직위 그대로의 이름보다는 ‘흑재상’이라는 이명으로 더 자주 불리는 카를 쉬폰 케시크의 집무실이었다. 본래는 황궁 안에 황제 이외의 존재가 출입제한 권한을 가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집무실의 주인이 황제에게 전언을 올렸고, 황제가 이를 수락했는데 누가 불만을 토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집무실의 주인을 제외하면 황제만이 자유롭게 찾아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집무실의 안에서는 황제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집무실 주인의 목소리와 함께 울려퍼지고 있었다.


“뭐라고 했지?”

“... 실패했습니다.”

“그걸 보고라고 하는 건가?”


집무실의 주인은 연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이의 몸은 그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올 때 마다 움찔거리고 있었다. 실패라는 상황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 오히려 그 모습이 분노로 날뛰는 것 보다 더 두렵게 느껴졌다. 검은 베일에 가려져있는 금빛 눈동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실망이군.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전력은 벨로란스 공국에서 증발한데다 임무까지 실패했다고?”

“그렇.. 습니다.”

“멍청한 놈들. 그따위 움직임을 보기 위해 그 오랜 시간을 투자한 것이 아닌데 말이야.”


싸늘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무릎을 꿇고 있던 자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것은 집무실의 주인, 카를 쉬폰 케시크가 화를 낼 때의 모습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진심으로 분노를 보이게 되면 설사 제국일지라도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방해한 자가 누군지는 확인했나?”

“외교관으로 파견되어있던 파울 델 세사민의 말에 따르면 방해꾼은 모두 4명, 그 중 1명은 갑자기 사라졌고 나머지 3명이 제국을 향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 2명과 묘인족 1명입니다.”

“잘됐군.”

“....?”

“찾아갈 수고를 덜었어. 처리해. 이번에야 말로 날 실망시키지 않도록. 설마 못하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지? 퍼스트.”

“....”


지상 최강의 종족인 묘인족이 일행에 포함되어있다고 말했지만 케시크의 언사엔 거침이 없었다.


“너희에게 내가 얼마만큼의 투자를 했는지를 생각하면 이 정도도 못해줘선 곤란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흘러나오는 퍼스트라 불린 자는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그가 말한 대로였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단체가 죽음의 문턱 앞에 있을 때 구해준 건 바로 이 남자, 카를 쉬폰 케시크였다. 게다가 구해졌을 뿐만 아니라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방면에서 지원을 받았다. 그야말로 죽음에서 건져 새 삶을 주었다.

그러니 그의 말을 거역하는 건 있을 수 없다. 설사 그것이 다시금 죽음으로 향하게 되는 길이더라도.


“명령을 받듭니다.”

“그리고 처음의 건도 빠르게 처리해.”

“그렇다면 동시에 진행하겠습니다.”

“방법은 어찌되건 좋아. 단지 나의 인내심이 점점 더 바닥나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돼.”

“.....알겠습니다.”

“가봐.”

“예.”


케시크의 말에 퍼스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리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누가 봤다면 놀랄 광경이었지만 퍼스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는 케시크의 눈동자는 담담했다. 그들이 죽건 말건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다. 명령을 받는다손 쳐도 퍼스트와 그가 속해 있는 조직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며 결과에 스스로 책임진다. 그렇다면 연민이나 동정 따위 생길 리 없다.


“묘인족이라.. 예나 지금이나 골치 아프게 하는 단어군.”


그는 인간으로 치면 그야말로 오래 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과거를 회상했다.


“500년간 기다렸어. 이제 와서 망칠 순 없지...”


오래 전, 그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인간은 버텨낼 수 없는 세월이었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인간을 증오해마지않던 그가 제국의 재상이라는 자리에 앉아있는 것도, 왕국에 불과했던 나라를 제국으로 키워낸 것도 그 약속을 나눈 인물 때문이었으니까.


“그때도 지금도 인간은 증오스럽지만 너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참아주겠어.”


검은 베일 속에 가려진 그의 금빛 눈동자가 추억에 젖어들었다.


“아아.. 너와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동안 추억을 되새기듯, 그의 몸은 앉아있는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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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자신의 검을 뽑아든 달가림은 눈앞에 있는 존재를 곤혹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도대체 뭐지?”

[키이익.]


그의 앞에는 온 몸에 검은 가죽 끈을 감아놓은 모습의 인간들이 가득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인간을 눈을 가죽 끈으로 가린 상태에서는 앞을 보지 못하니까.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가려진 얼굴을 자신과 일행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여기까진 상관이 없었다. 자신에게 이 세상은 새로운 것들이 가득했으니까. 문제는..


“이 세계의 여성들은 저렇게 하고 다니는 게 평범한 건가...?”


가죽 끈을 감은 이들은 하나같이 볼륨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 모습을 응시하면서도 달가림은 연신 눈을 떼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에게 뒤에서 자신의 마법지팡이를 꺼내든 이드리브가 다가서며 말했다.


“저건.. 인간이 아니에요. 벨로란스에 나타났던 것들과 비슷한 종류죠. 달가림씨에겐 익숙하지 않은 말이겠지만 저건 마법으로 만들어진 소환수에 가까워요.”

“소환수?”

“즉, 마력을 이용해서 부리는 하인 같은 거예요. 먹을 필요도, 잘 필요도 없고 일정한 마력만을 소모하면 되니 편리한 존재죠.”


이드리브가 마력이라 부르는 것은 달가림의 입장에선 ‘기’로 분류하는 힘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설명하는 것은 그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지식이었다.


“... 피가 거의 없는 것도 그래서인가?”

“네, 맞아요. 원래는 육체가 없는 이들이 현실에 존재하기 위해선 육체가 필요하죠. 그래서 마법사는 자신의 마력을 사용해서 일종의 가짜 몸을 만들어주는 거예요. 어차피 소환수가 죽으면 육체는 다시 마력으로 돌아가니 최소한의 요소들만 맞춰주는 거랍니다.”

“소모품으로 사용하기 편리하겠군.”

“사실, 대부분이 귀찮아서라는 이유에요. 말씀하신대로 어차피 소모품인데 신경써줄 이유가 없다랄까....”

“정말 마법사란 족속들은 이해할 수 없군. 저들의 모습도 그렇고 도무지 정상이라고 보이지 않아.”

“하..하하하... 일단은 저도 마법산데 말이에요오....”


이드리브는 찔린 눈빛으로 힘없는 웃음을 흘리더니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구석으로 향했다. 자신은 마법사라느니 이상하지 않다느니 하는 중얼거림이 연신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당분간은 그 상태에서 회복하지 못할 듯 했다.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아갔다.


“더 이상 거리낄 이유가 없군.”

[킥?]


애초에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의문이니 정보를 캐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가 할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막는다면 베고 지나간다. 그 뿐.”


촤악.


그의 검이 맨 앞에 있던 가죽 끈으로 감싸인 소환수를 스치고 지나갔다. 생각보다 단단한 상대의 방어에 달가림은 슬쩍 눈썹을 찌푸렸지만 그의 검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신호가 된 듯, 소환수들이 그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다른 일행을 놓아두고 그에게만 달려드는 게 미묘했지만 달가림에겐 오히려 그 상황이 오히려 달가웠다.


[키에엑!]

“이레인.”

“....왜?”


자신의 손톱만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피우고 있던 이레인은 달가림의 부름에 심드렁한 모습으로 답했다. 달가림은 여전히 시선을 덮쳐오는 소환수들에게 향한 채 말했다.


“너라면 알아챘겠지?”

“뭘?”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는 건가?”

“.....달가림도 내 말 안 들어 줬잖아.”

“......”


확실히, 그녀의 말을 도중에 끊어버린 행동은 좋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황을 봐가며 행동하겠지만 이레인의 마음은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달가림은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너무나 이기적이었나.’


이레인의 자세는 언제나 솔직하다.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고 스스럼없이 그것을 표현한다. 오히려 자신이 그런 그녀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편한 쪽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닐까.


“미안하다.”

“.....?”


갑작스러운 그의 사과에 이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눈동자를 점점 크게 만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혼자였다. 그렇기에 타인의 말을 듣는다는 행위에 익숙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것 또한 변명이라는 것은 안다만....”


달가림은 눈앞에서 달려드는 또 다른 소환수를 베어 넘기며 말했다.


“너와, 묘인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상 그 부분도 고쳐야겠지.”

“.....!”


혹자는 말한다. 검사는 실력이 높아질수록 자존심이 드높아진다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자는 스스로의 행동을 증명한다, 그렇기에 남들보다 고집을 부리고 행동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기에 자존심이 높아지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자만으로 변하기도 쉽지만, 적어도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고집을 부리며 살았다. 그것이 내겐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도 나를 지적하지 못했고 누구도 나를 계도하려하지 않았다. 그것이 검사로서의 길이라 생각했다. 자만했지.”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가 부정하던 행동을 정작 본인이 했다는 생각에 그는 검사가 되고 처음으로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이 솟아나고 있었다.


“달가림.”

“그러나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쓸 데 없는 고집은 버릴 때도 됐어.”


스카칵.


그의 검이 움직임이 문득 변화했다. 지금까지 자신만이 수천 수만번을 연습한 동작을 그대로 뻗어냈다면, 지금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자유분방한 그것이었다.


‘지금까지 지녀왔던 고집과 마음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곳은 내가 모르는 땅, 새롭게 살아갈 장소, 마음 또한 새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을..’


깨달음과 함께 머릿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감각이 그에게 찾아들었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선 새로운 길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이치지만 자신은 지금까지 해온 것들은 답습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걸어왔던 길을 잊고 새로운 걸음을 시작해야 할 때였다.


[키에엑!]


소환수들을 베어가던 그의 검이 2배로 늘어났다. 정확히는, 그의 검이 가지고 있던 길이만큼 빛이 솟아올라있었다. 지금까지 검안에 압축되어 무엇이든 베어버릴 수 있게 해주던 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검에서 흘러나와 형태를 갖춘 모습이었다. 그것은 엄청난 양의 기가 소모되는 행위였지만 달가림은 부담은커녕 무척이나 평온한 상태였다.


“개운하군...”


머리가 뚫리는 듯한 감각은 그가 검사로서 수련을 쌓으며 성장할 때 마다 느꼈던 감각이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긴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전에는 몸에 축적한 기를 뽑아내어 쓴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의 온 몸이 기가 지나다니는 통로가 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달가림은 문득, 청선국과 주변국에서 내려오던 오래된 전설을 떠올렸다.


“천 년 전의 검사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먼 옛날, 세상에 괴물들이 가득할 시절에 인간은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검을 사용했으며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검에 기를 담아 사용하는 것은 물론 기의 형태를 조절하고, 그리 넓은 범위는 아니지만 자신의 주변에 있는 기를 다룰 수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오랜 전설 안에서는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 검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의 경지에 다다른 자, 검신(劍神)이라고.


“의지가 담기면 작은 바람도 폭풍우가 될 수 있으니.”


파아앙.


[크엑!]


그의 의지가 담기자 그의 애검, 운룡이 지나가는 자리에 폭발이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그 앞에 있던 소환수들은 그 폭발에 휘말려 산산조각 났고 달가림은 같은 방법으로 남은 소환수들을 빠르게 일소하기 시작했다. .


“이레인.”

“응.”


그런 그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이레인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해왔다. 그 사이, 소환수들을 모두 정리한 달가림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너를 만난 건 다행이야.”

“달가림...?”


달가림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이레인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한 번 발을 내딛을 때 마다 그의 신형은 미끄러지듯 쭉쭉 늘어나더니 단 몇 걸음 만에 그녀의 앞에 도달했고, 이레인은 놀란 눈으로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달가림의 손이 그녀의 머리 위로 향했다,


슥슥.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마무리는 내가 짓겠어.”

“... 달가림 뭔가 부드러워졌어.”

“그런가?”

“확실해.”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사실이겠지.”

“갸르릉...”


이레인은 그의 손길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머리를 맡겼다. 그녀가 기분이 좋을 때 흘러나오는 목울림 소리를 들으며 달가림이 말했다.


“숲 속에 숨어있는 자는 내가 처리하겠다.”

“응.”

“그리고 이드리브, 힘을 끌어 모으는 것을 보니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고 있는 거겠지?”

“에..? 마..맞아요!”


갑작스러운 그의 물음에 고개를 숙인 채 웅얼거림을 반복하던 이드리브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답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어마법을 준비하곤 있었던 그녀다. 달가림이 자신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것을 알아채자 처음 마주했을 때보다 더욱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혹시나 소환수들의 이목을 끌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그녀는 최대한 은밀하게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느껴졌다. 그것뿐이야.”


충격에 빠진 이드리브를 놓아둔 채 달가림은 주변에 있는 숲의 한편으로 시선을 향했다. 조금 전까지는 숲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만을 받았다면 지금은 정확한 위치와 그가 지닌 기운의 크기와 종류, 그것을 움직이는 의지의 종류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이드리브가 준비하고 있는 마법을 알아챈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녀가 모으고 있던 기운은 명백하게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었으니까.


“거기군.”


문득 시선을 고정시킨 달가림의 몸이 숲속을 향해 쏘아졌다. 쏘아지는 그의 신형은 시위에서 벗어난 화살보다 빨라서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고, 그가 한 발을 내딛을 때 마다 수십 걸음이 좁혀졌다. 청선국의 검사들, 심지어 그와 같은 수준으로 칭송받던 두 명의 고검사조차도 지금의 보았다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으리라. 지금의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설의 재림이었으니까.


“나와라.”

“헉!”


그리고 숲과 도로의 경계에 도착한 달가림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검을 내리쳤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숲에서 당혹성이 흘러나오며 검은 색 옷을 걸친 이가 검을 피해 바닥을 굴렀다. 원래라면 일격에 목이 날아갔겠지만 달가림이 일부러 천천히 검을 내리그은 결과였다. 물론 당하는 입장에선 결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지만.


“도망칠 거였다면 더 빨리 도망쳤어야 했다.”

“큭, 저주의 창이 그대를 꿰뚫으리라 다크 스피어(Dark Spear)!”


달가림의 말에 검은 옷을 입은 인영의 손이 펴지며 창의 모양을 취한 검은 기운이 그에게 쏘아졌다. 그에 맞춰 달가림의 검, 운룡이 부드러운 궤적을 그렸다.


“뭣...!”


검은 옷을 입은 이에게서 경악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손에서 나온 검은 기운이 달가림의 검에 감싸진다 싶더니 그대로 분해되듯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은 멀리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이드리브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번과는 또 달라..”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달가림에게 죽을 뻔 했던 그날을 회상했다. 그 때, 분명 아주 날카롭고 강한 힘이 자신의 마법을 가르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선 강맹한 힘은커녕 평범하게 검을 돌리기만 한 것 같은데도 마법을 무효화 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큰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것보다 저건 흑마법이잖아!”


마법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치유와 축복을 다루는 백마법, 모든 종류의 마법을 조금씩 아우르는 정통마법, 그리고 파괴력과 저주를 다루는 흑마법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뉘는데 이 중에서 흑마법은 사악한 수법이라고 인식되어 오래 전부터 세상에서 배척당해왔다. 그리고 약 600년 전,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졌다고 여겨지는 마법.


“달가림씨 조심하세요! 흑마법의 저주는...!”

“늦었다! 너의 시야를 빼앗겠노라, 블라인드(Blind)!”

“...!”


흑마법사를 몰아붙이던 달가림의 시계가 돌연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는 당황하지 않고 어둠 한가운데를 노려보았다.


“기묘한 수법이군. 허나...”


그의 검, 운룡이 천천히 그의 가슴 앞으로 당겨졌다.


“시야를 가린다고 다가 아니다.”


스윽.


달가림의 검이 어둠 한 편으로 천천히 찔러졌다. 너무나도 느려 어린아이라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찌르기, 그러나 안에 깃들어있는 힘은 바위마저 산산조각 낼 만큼의 거력이었다.

그의 검은 기(氣) 그 자체였다. 이레인의 말에서 얻은 작은 깨달음, 그것이 가져온 파장은 지금까지 수련으로 얻어온 어떤 것보다 커다란 힘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그의 시선에는 세상을 이루는 기운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과거도 지금도 그것들을 마음대로 다룰 순 없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지금의 달가림은 그 흐름을 보고 길을 조정할 순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부서져라.”


그는 어둠의 흐름 한 가운데로 자신의 검을 찔러넣었다. 길을 막힌 흐름은 범람하기 마련, 어둠 속을 파고든 그의 검 주변에서 수많은 균열이 생기며 그 안으로 빛이 새어들었다.

이윽고 어둠이 산산조각 나고 다시금 밝아지기 시작했을 때, 달가림의 눈앞에는 불신의 눈빛을 띠고 있는 흑마법사가 비틀거리고 있었다.


“너..너는 도대체 뭐냐! 어떻게 마법을 고작 검 한 자루로 깰 수 있는 거지?!”

“검사다.”

“바보 같은 소리! 검사 따위가 이 정도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제국 내에서도 마법의 파훼가 가능한건 소드 마스터 밖에 없어!!”

“제국...?”


당장이라도 흑마법사의 목을 베어 넘길 듯 나아가던 달가림의 검이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제국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것이었다. 만약 이 흑마법사라는 자가 제국에서 왔다면 정보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네겐 들어야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군.”

“헛소리! 내가 말 할 것 같...”


빠바박.


“커헉 컥..”


검을 쥐고 있지 않은 달가림의 손이 흑마법사의 몸 몇 곳을 강타했다. 그의 손에 맞은 흑마법사의 몸이 경직되나 싶더니 무기력한 모습으로 주저앉았다. 이드리브에게 행했던 방법과 비슷했으나 이번에는 아예 기운 뿐 아니라 근육까지 풀어지게 만들어두었다.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그와 함께 고검사로 불렸던 이들도 쉽사리 하지 못했던 일을 이제는 손쉽게 행할 수 있었다.


“얌전히 묻는 것에 대답한다면 목숨은 취하지 않겠다.”

“크...크크큭...”


그러나 고개를 숙인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절망도, 체념도 아닌 웃음소리였다. 그 속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달가림의 눈썹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지금 같은 상황에 처해있을 때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두 가지 부류다. 완전히 체념한 자의 웃음, 그게 아니면 모종의 수를 숨겨두었을 경우다.


‘몸에 흐르는 기운은 분명 봉해두었다.’


지금도 그의 눈에는 흑마법사의 기의 흐름이 멈춰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육체적 능력을 숨기고 있는 걸까.

그러나 이내 달가림은 고개를 저었다. 펑퍼짐한 망토 같은 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그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속도와 눈앞에서 검이 내려쳐짐에도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육체능력도 그리 뛰어나진 않다고 생각해야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방심해서 좋은 건 없다. 달가림은 언제든 검을 다시 뽑을 수 있게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는 천천히 물러섰다.

그 때, 돌연 흑마법사의 숙여졌던 고개가 들려졌다. 동시에 그의 얼굴 쪽에서 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 빛의 근원지는 바로 그의 이마, 그곳에 생겨난 알 수 없는 글씨였다. 그곳에서 흑마법사가 가지고 있던 기운과는 비교도할 수 없는 강력한 기운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

“크하하! 500년 전의 실수를 반복할 것 같으냐아!”


붉은 빛 아래 드러난 흑마법사의 눈빛은 광기로 번득이고 있었다.


“나 벨페르의 계약자 데미안이 모든 것을 바쳐 그대의 파괴를 이곳에 청하나이다!!!”


광기어린 외침과 함께 강렬한 기운이 흑마법사에게 모여들었다.


‘위험하다!’


그 어디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위험한 감각에 달가림은 망설임 없이 뒤로 물러서며 검을 뽑아들었다.


“이미 늦었다! 오랜 시간 동안 당해온 우리의 고통을, 너희들도 느껴봐라!!”

“달가림씨 위험해요! 엡솔루트 실드(Absolute Shield)!”


그리고 이드리브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강렬한 폭발음이 달가림과 흑마법사가 있던 자리를 집어삼켰다.


-------------------------------------------------------


“달가림씨!”


폭발이 일어난 직후, 이드리브는 급하게 달가림이 있던 자리로 달려갔다. 멀리 서 있던 그녀가 후폭풍에 비틀 거릴 정도의 강한 폭발이었다. 준비하고 있던 방어마법을 급히 사용하긴 했지만 폭발의 크기로 봐선 그가 무사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으시면 말이라도 좀...!”

“시끄럽다 인간.”

“이...이레인님?”


천천히 연기가 사라지기 시작한 자리, 그곳엔 불에 그을린 듯 엉망이 되어버린 이레인이 서있었다. 그리고 연기가 좀 더 사라지자 이드리브는 그녀의 옆에 서 있는 한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달가림씨 무사하셨군요!”

“음.”


그녀의 물음에 짧게 고개를 끄덕여 답한 달가림은 자신의 검을 다시 갈무리했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옷깃 하나 구겨지지 않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이드리브의 방어마법이 일차적으로 충격을 완화시켰고 그 다음 그가 펼친 방어에 의해 나머지를 흘려낸 것이다.


“지독한 수법이군.”


달가림은 고개를 내저었다. 공격을 흘려내면서도 검을 쥔 손에 저릿한 감각이 느껴질 정도로 지독한 공격이었다.

흑마법사, 폭발을 일으킨 당사자가 있던 자리에는 어떠한 흔적도 없었다. 그가 과거에 보았던 화포라는 화약무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렬한 폭발, 그러나 그런 것 치고는 지나치게 깨끗했다.

그가 기억하는 지식 안에서 폭발에 휘말린 인간의 말로는 온 몸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지는 참상이 벌어질지언정, 이렇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진 않는다.

달가림은 흑마법사가 마지막 순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바친다 라..”


그가 했던 말은 비유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 땅에는 자신이 모르는 것들로 가득했으니까.


‘앞으로 조금 귀찮아질지도 모르겠어.’


달가림은 자신을 습격한 이가 마지막 흑마법사라는 형편 좋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얼마나 더 나타날지, 어떤 식으로 습격을 해올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도 흑마법사의 자폭으로 사라져버렸다.


‘정보가 필요하다.’


이드리브의 반응으로 보아 그녀는 흑마법사라는 존재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만약 그녀가 말해준 정보만으로 모자라다면 다른 방법도 쓸 생각이었다. 그가 청선국에서 떠돌이 생활을 할 때 이용했던 방법이었고 이 땅에서도 가능할지 확신은 할 수 없지만, 지금 상황에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법이기도 했다.


“달가림, 괜찮아?”

“음...”


옆에서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달가림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는 조금 전에 있었던 상황을 떠올리고 표정을 굳힌 채 자신의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폭발에 휘말려 이리저리 그을린 모습이 된 이레인이 있었다. 자신은 이드리브의 도움과 자신을 방어할 수단으로 몸을 보호했지만, 그녀는 어떠한 방어수단도 없이 이드리브의 방어마법만으로 폭발의 한 가운데에 노출되다보니 완벽하게 폭발에서 벗어나지 못해 머리칼은 물론 몸에도 탄자국과 생채기가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왜 그랬나.”

“응?”


표정을 굳힌 채 다가서는 달가림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레인이 반문했다. 그녀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춘 달가림은 폭발에 휘말려 여기저기 타올라서 엉망진창이 된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바보 같기는, 그을려서 엉망이 되었잖은가.”

“괜찮아. 이 정도 상처는 금방 나아. 달가림만 무사하면 돼.”


언제나와 같은 반응에 달가림은 한숨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아냈다. 이 묘인족은 처음부터 어린아이처럼 순수했다. 그렇기에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자신을 향해 달려온 것이리라. 그리고 이런 그녀 덕에 자신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분명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조금은 스스로를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달가림의 손이 그녀의 머리로 향하며 말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약하지 않아. 네 덕분에 더 강해졌다고도 할 수 있겠지. 다음부터는 나를 좀 더 믿어주었으면 좋겠군.”


분명 말은 질책하는 것이었으나 반대로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은은한 미소가 피어나있었다.


“모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나중에 정리하는 게 좋겠어.”

“.....”


미소 지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본 이레인은 멍한 표정으로 숨을 집어삼켰다.


“달가림이 웃는 건 항상 예뻐.”

“...이 상황에 그런 소리를 하다니 이해할 순 없다만 지금은.. 그걸로 봐주도록 하지.”


그의 손이 이레인을 완전히 끌어안았다.


“이젠 네가 다치면 곤란하다.”

“달가림이 왜 곤란해? 다치는 건 난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오는 이레인의 질문에 달가림의 얼굴이 그녀의 머리에 닿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느껴진 부드러운 감촉과 따스한 바람을 느낀 이레인의 몸이 당혹스러운 상황을 체험한 사람처럼 굳어졌다..


“방금...”


이레인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한 채 달가림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달가림은 멋쩍은 듯 그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지만 여전히 그녀를 안은 손은 유지한 채였다.


“이젠 네가 없으면 쓸쓸해 질 것 같으니.”

“.....정말?”


말을 내뱉은 직후, 달가림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듯 침음을 흘렸지만 이레인의 반문에 확실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갸르릉.”


그의 품에 안겨있던 이레인의 귀와 꼬리가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그의 몸에 머리를 비볐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는 듯 입에서 골골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번에 수작 부리려는 녀석이 있으면 그 전에 죽여 버릴 거야.”

“지금까지의 말은 뭘로 들은 거냐..”

“그럼 안 다치게 죽일게. 그러면 되지?”

“......”

“의심되는 것들은 다 죽일까?”

“.... 아니,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이쯤 되면 한숨을 내쉬고 싶은 달가림이었지만 이레인이 살아왓을 삶을 생각하면 당연한 모습이었기에 그것을 억눌렀다.

그녀는 왕이다. 그것도 지상에 당해낼 존재가 없다는 묘인족의. 그렇다면 이러한 점은 자신이 이해해야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래왔다고 앞으로도 똑같이 행동하게 놓아둘 생각은 없었다. 그녀를 바꾸어가는 것, 그게 자신의 과제이리라.


“앞으론 내가 먼저 나서마.”

“걱정하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강한...”

“그러니까 항상 내 곁에서 함께 싸워다오.”

“응?”

“.....”


순간 이해를 하지 못한 듯 이레인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러나 달가림은 그녀를 이해시키는 등의 행동을 하진 않았다. 지금의 그는 방금 전의 자신이 한 말을 되새기는 것만 해도 엄청난 부끄러움을 참아내고 있었으니까.

결국 차오르는 부끄러움을 이겨내지 못한 달가림은 이레인을 팔을 풀고 그녀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러나 그가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 묘인왕은 어린아이와 비슷한 존재라는 것을.


“저기, 그게 무슨 뜻이야?”

“....”

“항상 곁에 있다는 건 지금도 하고 있잖아?”

“그건...”

“그런데 또 같이 있어달라는 건 이해가 안 돼.”

“하아...”

“달가림?”

“하고자 하는 말은 다 했다. 의미는 스스로 생각하도록 해!”


결국 달가림은 현실에서 등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화끈거렸고, 심장은 그 어떠한 전투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레인을 외면한 채 마차 근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와.. 한창이네요오..”

“뭐라고 했나.”


그런 그를 보며 중얼거리던 이드리브는 달가림에게서 서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잠깐 장작을 구해오지.”

“히익.. 네..네!”

‘...내가 저런 말을 들을 줄이야.’


그 모습에 달가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바로 옆의 숲으로 향했다. 정말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대상에게 자신을 드러냈다고 후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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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이 실패했다.”

“데미안이?”


앙상한 가지만이 남아있는 숲의 한 복판에서 네 명의 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체격도, 성별도 가지각색이었지만, 하나 같이 검은 마법사 로브를 눌러쓴 채 어두운 기운을 풍기는 모습은 그들이 같은 집단의 소속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총 두 명의 남성과 두 명의 여성으로 이루어진 그들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벨페르의 계약자가 아닌가. 강력함으로 따진다면 우리 중 제일일 텐데?”

“....상대가 더 강했다는 소리겠지. 멍청하기는.”

“감히... 고작 하위 마왕인 폴른의 계약자 주제에 상위 마왕 발론님의 계약자인 내게 덤비겠다는 건가?”


가장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성의 말에, 반대로 가장 작은 몸집을 가진 여성은 갖잖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흥! 누가 무식하게 힘만 센 바보의 계약자가 아니랄까봐.”

“네놈... 고작 하위 마왕과 계약한 약해빠진 년 주제에..!”


그리고 그녀의 대답에 키 남성이 큰 소릴 치려던 찰나, 입을 다물고 있던 두 남녀 중 여성 쪽이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는 누구보다 짙은 어둠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이 자리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이며 동시에 리더의 역할을 맡고 있는 존재였다.


“그만둬. 이러기 위해서 모인 게 아닐 텐데?”

“하지만 이년이..”

“저 바보가 먼저...”


서로 상대방을 가리키는 그들의 행태에 여인은 두 사람의 눈을 번갈아 응시하며 말했다.


“그분께서 맡기신 일에 실패했고 데미안이 죽은 상황에서 잘도 그런 헛소리가 나오는 걸?”

“크흠.”

“그건 아니지만....”


두 사람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우자 그들을 꾸짖던 여인은 머리가 아픈지 이마에 손을 올리며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셀빈, 너도 가만히 있지 말고 저 녀석들이 난리치기 전에 좀 말리는 게 어때?”

“....”


절레절레.


침묵하던 남자는 대답대신 고개만을 저었다. 그의 손이 허공을 몇 번 오가니 그의 앞으로 붉은 색 글씨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침묵의 마왕 사힐님의 계약자, 말을 할 수 없는 내가 너보다 빠르게 둘을 말릴 순 없다.]

“그럼 다음번에 또 소란스럽게 하면 침묵 마법이라도 써버려.”

[알겠다. 퍼스트.]


남자가 대답과 함께 손을 내리자 붉은 글씨들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에게서 시선을 뗀 여인, 퍼스트는 다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았다. 5명이던 인원 중 한명이 줄었으니 이제 4명만이 남았다.


‘미안해 데미안.’


수백 년간 핍박을 받으며 살아남은 자신들 중 하나가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줄은 그녀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를 혼자 보냈으면 안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자책감이 솟아올랐지만 그녀는 얼른 그 생각을 털어냈다. 지금은 더 이상의 희생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는 탄식 섞인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고는 말했다.


“이번엔 우리 네 명이 한 번에 나서야 해. 이의 없겠지?”

“이의 없다.”

“그게 퍼스트 언니의 뜻이라면.”

[리더의 말에 따르지.]


그리고 나머지 인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녀의 말에 별 다른 저항 없이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방심하지 말고 다들 최선의 준비를 하도록 해. 데미안의 목숨이 헛되지 않도록.”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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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다 싸!”

“제도의 기사들도 가지고 다닌다는 마법물품을 할인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간다. 자신의 물건을 홍보하는 상인들과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인파를 이루어 거리를 가득 채웠다. 그들의 얼굴에는 생기로 가득했다. 로엔 제국의 영토 안에서도 이 정도로 번화한 곳을 드물며,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곳이 특별한 장소라는 의미도 되었다. 이곳은 뤼른, 대륙을 양분하는 거대한 제국인 로엔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가장 큰 규모의 상업도시였다.


“쌉니다. 싸.....응?”

“이보시오, 주인장. 뭘 봤기에.... 어?”

“맙소사 어떻게 저런..”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상인들과 사람들로 인해 시끄럽던 거리에 한순간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길 한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들이 짓고 있는 표정은 크게 두 가지, 멍 하거나 혹은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세 사람이 잡혀있었고 묘한 침묵은 그들이 한 여관을 찾아 들어설 때 까지 계속되었다.


덜컹.


“저기.. 달가림씨?”

“.....”

“역시 이런 식이면 더 눈에 띄는 게..”

“아무 말도 마라.”

“네에....”


달가림은 쭈뼛거리는 이드리브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 땅에 들어선지 이제 이틀, 최대한 눈에 띄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목구비를 완전히 가리는 옷가지를 뒤집어쓴다거나, 일부러 사람이 없는 길만을 찾아간다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 했다. 오랜 시간 떠돌았던 그의 경험상, 일부러 그러는 모습이 평범하게 다니는 것보다 훨씬 더 눈에 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얼굴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상황에서 혼자만 얼굴을 가리거나 으슥한 골목길로 다닌다는 건 대놓고 나 여기있소라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곤란하군.’


그러나 그들이 도시에 접어든 직후 이틀째가 되는 지금까지, 그들은 지나가는 길마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상황에 그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귀와 꼬리만 가리면 문제없다고 생각했는데.’

“달가림 곤란해? 여기 있는 인간 다 죽일까?”


그리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묘인족의 왕, 묘인족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드리브에게 부탁해서 머리 위의 귀와 꼬리를 가리는 마법까지 걸었지만 그는 결정적일 부분을 놓쳐버리고 만 것이다.


‘실수다.’


곁에 있는 것이 너무 당연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미남미녀로 불리는 묘인족, 그 중에서도 이레인은 독보적으로 눈에 띌 정도의 미인이었다. 그런 존재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 어떻게 보이겠는가.


“이래서야 시선을 끌 수밖에 없군...”


그의 자조 섞인 중얼거림에 이드리브가 말했다.


“그거야 달가림씨와 이레인님 정도의 미인이 거리를 걸어 다니면 당연히... 헙!”


이드리브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지만 이미 흘러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순 없는 법.


“뭐라고 했지?”

“하...하하하.. 그러니까 미인이라는 소리는 성별에 관계없이 쓴 말이라구요? 결코 달가림씨가 여자 같다는 소리가..”


어딜봐도 변명조였지만 달가림은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여기서 소동(?)을 벌여봐야 이목만 더 끌게 될 뿐이다. 정체불명의 집단에 노려지고 있는 이상, 눈에 띄는 것은 자제하고 눈에 띄지 않을 방도를 모색해야 했다.


“후우.. 우선 방을 잡도록 하지.”

“네엣!”


가까스로 살아났다고 생각한 이드리브는 멍하니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여관 주인에게 말했다.


“방 있나요?”

“아...예예! 있고말고요! 그나저나...”

“네?”


우물쭈물하는 여관주인의 모습에 이드리브가 반문하자 그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말했다.


“험험.. 처음 보는 분에게 실례인 줄 알고 있습니다만 정말 아름다우신 아가씨들이군요. 저..정말 다른 의도는 없고 단지 머리 털 나고 아가씨들처럼 아름다우신 분들은 처음 봐서 그럽니다.”

“하...하하하..”

“으득..”


멋쩍게 웃던 이드리브는 자신의 뒤편에서 무언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가 나자 황급히 말했다.


“일행이 잠을 잘 땐 같이 묵으면 안 되는 종교를 믿고 있어서..! 1인실 세 개로 부탁드려요!”

“음? 독특한 믿음을 추구하시는군요. 며칠이나 묵으시겠습니까.”

“우선 삼 일 정도로!”

“3일실 3개, 합해서 1골드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저희 여관을 이용해주셨으니 식사는 서비스로 준비해드리지요.”

“가..감사합니다아...!”


주인에게 고개를 끄덕인 이드리브는 망설임 없이 품속에서 비상금을 꺼내 지불하고 열쇠를 거머쥐었다. 조금 전 등 뒤에서 이 가는 소리가 난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서늘한 한기가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오늘따라 조금 쌀쌀한 느낌인데.. 밤엔 추울 것 같으니 장작이라도 올려 드릴까요?”


여관주인은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친절을 베풀고 있었지만 이드리브는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황급히 두 일행 사이로 돌아가 방으로 향하는 이드리브를 보며 여관주인은 또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식사하는 손님이 있었다면 운 좋게도 지금 홀은 비어있었다. 아니, 설사 욕지거리를 당하거나 주먹다짐을 당한다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상관없으리라. 그리고 일행이 완전히 방이 있는 2층으로 사라질 때 까지 그는 몽롱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혹시 천사가 아닐까....?”


그리고 그가 중얼거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뤼른의 한 여관에 세 명의 천사가 강림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작가의말

도저히 잘라서 올릴 시간이 되지 않아 일괄 업로드를 하였습니다.


스토리는 변화된 부분이 있습니다. 아마 초반부를 제외하면 아예 달라졌다고 느끼실 듯 합니다.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더 빠르고 성실하게 연재하겠습니다.


2018년 4월 10일, 전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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