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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플로 님의 서재입니다.

파종인류의 달과 나날들

웹소설 > 일반연재 > SF, 일반소설

머플로
그림/삽화
염현수
작품등록일 :
2019.08.16 17:37
최근연재일 :
2019.10.30 18:28
연재수 :
7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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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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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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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올라가는 길,1

DUMMY

네라이파 온엘은 화려한 연단 위에 올라서서, 수십 조의 사람들이 보내는 애달픈 시선을 음미했다. 취임한지 백 년이 넘었건만, 대중들 앞에 서는 일은 아직 거북하기만 했다. 위대한 집단에게 있어서 황제는 여타 파종인류 국가와는 달리 단순한 상징 그 이상이었다. 황제는 어떤 일에서든지 가장 뛰어난 사람 열 사람을 합한 것보다도 유능해야 했고, 거대한 레고 블록처럼 단단히 들러붙은 집단이 떨어지지 않게 조율해주는 역할을 혼자서 맡아야 해야 했다.


다른 누군가가 그런 역할을 맡았다간, 누군가는 불만이 생기기 마련이었고 집단은 곧바로 공중분해 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절대적인 권위가 그들의 위에 존재하는 한, 집단인들은 주저 없이 그녀의 말에 순종했고, 순종이야말로 집단의 존속을 의미했다.


귀족 카스트들은 보통 페로몬과 목소리의 조합을 사용해서 사람들을 통제하지만, 네라이파 온엘은 달랐다. 그녀는 오로지 몸짓과 순수한 언변, 그리고 행동을 통해 그녀만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페로몬에 지긋지긋해하던 사람들은 그녀의 통치를 반겼고, 그렇게 그녀는 집단 역사상 가장 명망 높은 황제 가운데 한 명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지금 메티시니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시점에서, 네라이파 온엘은 지금이야말로 페로몬을 쓰기 적절한 때인지 궁금해했다.


집단의 왕가는 오로지 필요해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그녀의 어머니는 줄곧 말하곤 했다. 너무나 머나먼 시절, 오로지 노래와 문화적 기억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시절, 삼색인 제국이 막 몰락하던 시절에, 집단은 삼색인 제국의 변방 종속국가에 불과했었다. 푸르게 타오르는 태양 아래에서, 당시의 최신기술은 물레방아와 쟁기였고, 삼색인들에 대해서는 천국에서 내려와 곡물들과 동물들, 때때로는 사람들을 데려가는 신들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삼색인 제국이 반란으로 찢겨져 나갈 무렵, 한 무리의 삼색인 피난민들이 간신히 작동하는 고물 우주선을 타고 임박한 죽음을 피해 도피했고, 한 집단인 농부의 밭에서 그 여정을 끝마치게 되었다. 비록 피난민들은 전부 사망했지만, 집단인들은 이를 통해 삼색인들이 신이 아니며, 자기들과 같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아니, 어찌 보면 열등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페로몬이 주는 기쁨과 슬픔을 알지 못했고,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적으로 행동하며 살고 죽었다.


이윽고 은하계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이어졌고, 천만다행히 집단인들의 고향은 발견되지 않았다. 워낙 구석진 곳이었고, 인접국이었던 페베네르 공화국은 다른 3개 국가의 총공세를 막아내는데 벅찼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른 채, 집단인들은 번성했다. 파종선의 선물인 페로몬은 빠른 의사결정과 협동을 가능하게 했다. 정보는 널리 공유되었고,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매진했다. 여러모로 삼색인 제국의 정반대였다. 이윽고 우주항행이 가능해졌고, 대기권 밖으로 나오자마자 집단인들이 처음으로 한 것은 항성 주위에 발전소와 물질채취기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곧 둘이 되었고, 둘은 곳 넷이 되었다.


집단인의 존재를 처음으로 눈치챈 사람들은 페베네르 공화국이 아니었다. 당시 페베네르 공화국은 여덟 개의 분파와 군벌로 나뉘어 내전에 휩싸여 있었다. 어느 날 페베네르 모성의 궤도에, 난생처음 보는 날렵한 전함들이 속속 진입하자 내전은 곧 종결되었다. 당시에도 집단은 다른 파종인류 국가보다 발전된 스텔스 기술을 터득했던 것이었다. 페베네르를 흡수하고 힘과 자신감을 보충한 집단은, 이윽고 다른 이웃들로 시선을 돌렸고, 신의 가호라도 받은 듯 정복사업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은하계는 여러 소국들이 더 큰 제국에게 흡수당하는 난장판이었다. 이런 판국에 집단은 여타 다른 신흥주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누가 우위에 서있는 지는 명백해졌다. 다이슨 스피어, 지금은 메티시니라고 부르는 거대 구조물의 힘을 받아, 집단인들은 가는 곳마다 전장을 지배했고 이윽고 거대한 제국이 되어 은하계를 거닐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승리가 함께했고, 전략과 전술은 항상 적을 앞섰다. 그러나 네라이파 온엘은 이것이 그저 집단이 운이 좋아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집단이 항상 비밀스럽게 보관해 놓고 있었던 것. 옛날옛적에 삼색인 제국이 은하게를 장악한 원천이자, 이제는 집단이 물려받은 것. 모든 파종선의 심장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는 것.


그리고 이것이 바로 메티시니의 생존에 직결되는 열쇠이기도 했다.


“네라이파 온엘은 훌륭하신 분이네.” 알라이파가 트램 열차를 타고 가면서 설명했다. “집단은 훌륭한 황제들을 많이 배출했지만, 네라이파 온엘만큼 집단을 강성하게 키운 분은 없으시지. 그분이 없었더라면 집단은 쭈그러들고 쇠퇴했을 걸세. 강바닥 아래 말라붙은 물구덩이같이.”


알라이파의 조모이자 지금 그녀에게 이 열차를 사용하도록 권한을 내린 네라이파 온엘에 대한 정보는, 나위나에게 있어서 미궁과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는 네라이파 온엘이 안전의식 하나만큼은 정말 없다는 사실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라이파가 자랑스레 소개한 ‘트램 열차’는 레일 위에다 달랑 한 칸짜리 열차만을 놓고 의자 여덟 개를 붙여놓은 다음 안전벨트 하나만 달랑 있는 꼴이었다. 자기부상식이라 속도 하나만큼은 확실했고, 열차 밖으로 날아가지 않도록, 사방에 일종의 투과성 입자 방패까지 장착되어 있어 내부만큼은 쾌적했지만, 극초음속을 돌파한 열차의 충격파가 발생시키는 바람소리는 충분한 고통이었다.


그 군사 카스트 말로는 입자방패 덕분에 소리가 줄어든 상태라고 해도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나위나도 입자방패에 대해 들은 적은 있었다. 일로스키아에서는 이론만이 있을 뿐이었지만, 집단에서는 사정이 다른 모양이었다. 소형 차량용 방어막으로 총탄을 막을 수는 없지만, 기체의 흐름을 완전히 차단하거나 방향을 바꿀 수는 있다고 들었다.


좌석은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푹신한 의자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식이었다. 나위나가 집단의 황제가 자주 이용했을 객차에 대해 상상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호화나 사치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었고, 대신 간소한 실용주의와 일로스키아의 객차와도 다를 바 없을 3등석 승객용 편의시설만이 있을 뿐이었다. 옆에 앉은 그돈나가 음료수 지급기를 시험하는 동안, 반대편에 앉은 샤흐테흠과 사바도는 불편한 듯 서로의 시선을 회피했다.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알라이파는, 옆에 테남 크로비를 대동한 채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현재 상공 수천 미터 위를 지나가는 중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메티시니에서 상공으로 얼마나 올라갔는지 정확히 재는 것은 불가능했다 발아래 까마득히 떨어져있는 구조물들마저도 너무 수시로 변하고 섞인 나머지 거대한 모자이크 판화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수 억년에 걸쳐서 일어났어야 할 대륙판의 운동이 단 몇 분만에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 같았다.


“메티시니가 자기 자신을 준비하고 있는 거네.” 알라이파가 말했다. “취약한 곳은 오므리고, 강한 곳은 드러내는 거지. 저길 보게. 저 거주구역이 저 아래로 밀려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이나? 앞으로 1시간 안에, 저 구역은 수백 킬로미터의 장갑판으로 안전하게 둘러싸일 걸세. 저 사람들은 안전하네.”


나위나는 그다지 확신하지 못했다. 별의 수인들 역시 수십 킬로미터 두께의 장갑판으로 자기 자신들을 감싸고 있었고, 일반적으로 방패를 갖고 있는 자들은, 그 방패를 뚫을 수 있는 창도 갖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범자의 기술력에 알라이파가 놀랐던 점을 보았을 때, 별의 수인 역시 범자보다 더 나은 기술력을 갖고 있으면 갖고 있지, 그 반대의 경우 일리는 없었다. 열차 좌석의 반대쪽에 앉아 있던 테남 크로비는 이런 걱정을 알아차렸는지 자신 있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카스트가 자랑하는 특제 방호벽은 불침입니다. 제가 보증하죠.”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샤흐테흠은 저 아래의 광경을 신기한 듯 보고 있었다. 그돈나가 그 모습을 보고 물었다.


“왜? 아래에 뭐 볼 거라도 있어?”


“아니, 그저 신기하다 싶어서.” 샤흐테흠이 얼버무리듯 말했다. “저 작게 보이는 네모난 격자들과 상자 모양의 구조물들이 각각 수백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이상해서. 그리고 그 격자들과 상자들이 어떠한 높은 의지에 따른 것

처럼, 명백한 목적을 가진 형태로 모여 더 큰 단위를 이루고.”


“보통 그걸 도시나 국가라고 하지.” 사바도가 말했다. 그러고는 샤흐테흠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상당히 세게 찔렀건만, 샤흐테흠은 자리에서 단 1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위나는 샤흐테흠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대신 침울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그건 범자도 아네.”


나위나는 사실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지금까지 주워들은 것과 본 것을 가지고 추정해본 바에 따르면, 범자들은 대부분 우주공간에서 생활했고, 행성이나 거대한 우주거주지에 내려가는 것은 드문 일에 속했다. 자연스럽게 높은 인구밀도를 가진 거대한 사회는 형성이 되지 않을 것이 틀림없고, 전근대적인 사회를 거치며 자연스레 형성된 사회체계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 뻔했다.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그돈나가 말했다. “저기 아래에 있는 건 수십 수백 세대의 사람들의 정신과 의지야. 하나의 생각에서 발화한 생각이, 다른 수많은 생각들을 낳았고, 그 생각의 힘이 벽돌을 쌓고 콘크리트를 붓고 철근을 올린 거야. 또 그 생각을 이용해서 구조물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꾸기도 하지. 이렇게 말하니까 조금 철학적이고 있어 보이게 들리지 않아?”


“약간은 그런 것 같네.” 나위나가 동의했다. “때때로 삶이 작고 하찮게 보인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야. 그렇지 않아? 때때로 내가 무슨 공감능력이 없는 소시오패스처럼 느껴진단 말이지. 어쩌면 삶이란 우리 파종인류의 두뇌가 받아들이기는 너무 거대한 개념일지도 모르고.”


“네 두뇌겠지. 난 너보다 오래 살았다고.”

“야!”

“왜? 사실이잖아. 난 지난 삼백 년 동안 땅에 발을 내딛고 살았다고. 뭐, 얼음이라고 하는 쪽이 더 올바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니 삶의 관록이 더 녹녹히 녹아 들어있다는 말씀.”

“너 그걸 말장난이라고 한 거면-“


사바도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그돈나를 향하자, 둘 사이의 다툼이 멈췄다.


“삼백 년이라니, 무슨 소리야?” 그녀는 평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치 큰 누나가 잘못한 동생에게 조곤조곤 따져 묻는 듯한 말투였다. 설명이 끝나자 사바도는 감탄 반, 놀람 반으로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 행성 같은 촌구석에서 그런 기술이 나올지 몰랐는데. 일로스키아라, 우리가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으면 한 번 더 방문해 보도록 할게. 그러고 보니까, 일로스키아하니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잘 기억이 안 나네. 그 바아라랑 뭔가 연관이 있었는데. 나위나, 네가 말했잖아?”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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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메티시니의 달밤 아래에서[완] 19.10.30 22 0 10쪽
76 아스라한 기억의 소금발을 잡으려 애쓰고,3 19.10.28 24 0 13쪽
75 아스라한 기억의 소금발을 잡으려 애쓰고,2 19.10.26 20 0 12쪽
74 아스라한 기억의 소금발을 잡으려 애쓰고,1 19.10.25 28 0 12쪽
73 대면,4 19.10.25 22 0 10쪽
72 대면,3 19.10.18 29 0 9쪽
71 대면,2 19.10.15 21 0 10쪽
70 대면,1 19.10.14 23 0 11쪽
69 올라가는 길,2 19.10.13 22 0 11쪽
» 올라가는 길,1 19.10.12 31 0 12쪽
67 메티시니 습격,7 19.10.10 24 0 9쪽
66 메티시니 습격,6 19.10.09 152 0 13쪽
65 메티시니 습격,5 19.10.09 27 0 10쪽
64 메티시니 습격,4 19.10.07 22 0 14쪽
63 메티시니 습격,3 19.10.06 21 0 17쪽
62 메티시니 습격,2 19.10.05 31 0 11쪽
61 메티시니 습격,1 19.10.04 30 0 12쪽
60 황제와의 만담 19.10.03 27 0 12쪽
59 집단과 범자, 그리고 그돈나의 과거,2 19.10.02 35 0 7쪽
58 집단과 범자, 그리고 그돈나의 과거,1 19.10.01 24 0 10쪽
57 메티시니-위대한 집단의 수도,3 19.09.30 30 0 12쪽
56 메티시니-위대한 집단의 수도,2 19.09.29 33 0 10쪽
55 메티시니-위대한 집단의 수도,1 19.09.28 41 0 8쪽
54 불안한 협상,4 19.09.27 36 0 9쪽
53 불안한 협상,3 19.09.26 41 0 9쪽
52 불안한 협상,2 19.09.25 32 0 13쪽
51 불안한 협상,1 19.09.24 39 0 10쪽
50 선택과 결정,2 19.09.23 36 0 11쪽
49 선택과 결정,1 19.09.22 33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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