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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339
추천수 :
927
글자수 :
790,487

작성
22.06.19 20:00
조회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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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글자
12쪽

제국 사냥꾼 제6호

DUMMY

이엘은 한껏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운전하는 중이었다. 그가 선글라스를 끼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자기 표정을 숨기기 힘든 순간. 치밀어 오르는 짜증스러움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는 순간.


뒷좌석에 탄 손님은 이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멋대로 떠들어 댔다.

"그러니까 말이죠, 언니가 죽으면 제가 적법한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언니는 어릴 때부터 잘하는 것도 없고 성격도 물러 터졌고, 이래저래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고요."


흔한 이야기다. 피가 이어진 사람들끼리 죽이려 하는 일은 발에 챌 정도로 많았다. 보통은 재산이나 다른 법적 권리 때문에 그랬다.


고작 재산 때문에 제국 사냥꾼에게 자기 자매를 죽여 달라고 하다니. 이 손님이 그 재산을 조금만 투자해 알아봤더라면, 그가 이런 의뢰를 절대 받지 않는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터였다.


"기사님께서 제국 사냥꾼 2호라면서요? 저는 사실 1호라는 분을 찾고 싶었는데요. 아무래도 그쪽이 조금 더 확실하지 않을까 해서."

1호 같은 소리 하네.


이엘은 속으로 그렇게 뇌까렸다. 그 사람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 방법이 있다면 좋겠구만.


"그런데 그분은 지금 일을 받지 않으시는 모양이더라고요. 소개받은 브로커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거, 사실이겠죠? 나 같은 사람한테는 일을 맡기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돌려보내는 거라든가. 그런 거 아니죠?"


이엘은 손님이 말한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손님이 한참 동안 혼자 떠들면서도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평소에도 다른 사람들을 앞에 두고 혼자 떠드는 일이 흔한 거겠지.


"저는 그런 의뢰는 받지 않습니다."

"뭐라고요?"

손님이 묵고 있을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야 이엘이 입을 열었다.


"요청하시는 바를 들어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왜, 왜요? 돈이 모자라서? 아니면 내가 아직 정식 후계자가 아니라서?"

"저는 오직 제국 사냥꾼만이 할 수 있는 의뢰만 받습니다."


손님은 차에서 내리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엘이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의뢰는 아마 심부름꾼이나 살인 청부업자를 찾아보시면 될 것 같은데요."


"그,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라고요!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데는 제국 사냥꾼이 제일 확실하다고 해서······."

손님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뒷좌석의 문이 열렸다. 이엘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잠겨 있었을 텐데, 어떻게?


"맞아요, 사람을 죽이는 데는 제국 사냥꾼이 제일 확실하지."

열린 문으로 미끄러지듯 올라탄 건 중키의 여자 한 명이었다. 그리고 이엘은 그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도달, ······잠깐!"

여자는 이엘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행동을 마쳤다. 겉으로 보기에는 고작 손가락으로 옆 사람의 목을 긋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작은 행동으로 차에 타고 있던 손님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당신이 아는 걸 당신 언니가 모를 리 없잖아요, 페탈포드 씨."

"내 차에서 지금 뭐 하는 거야?"

"이엘. 오랜만이네요."


이엘은 놀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떴다. 긴 갈색 머리, 낡고 먼지투성이에 마찬가지로 긴 외투, 무릎까지 올라오는 부츠. 다 떨어져 가는 커다란 여행용 가방.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에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

등에는 기다란 물체가 든 자루를 메고 있었다. 여자의 모습은 이엘이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도달 아자칸."

이엘이 이마를 짚었다. 이 녀석까지 사월로 돌아온 건가.

"사월 어딘가에 보물이라도 숨겨져 있는 거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왜 다들 사월로 돌아오지? 꿀이라도 발라 놨냐는 말이야."

"글쎄요, 다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일 때문에 왔는데요."


여자, 도달이 뒷좌석의 문을 조용히 닫았다. 마치 손님을 바로 바꿔 태우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문제는 먼저 탔던 손님이 내리지 못하고 죽어 있다는 사실이었지만.


"내 차로 시신을 옮길 셈인가?"

"아뇨, 내 가방으로 옮길 거예요. 그냥 이엘이 반가워서 그만."

"두 번만 반가웠다가는 내 차에 사무실이라도 차리겠는데."


도달은 그립다는 듯 차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녀는 실제로 이엘이 꽤 자주 태우고 다닌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한때나마 파트너 비슷한 관계였으니까.


"이 여자 이름은 메이라 페탈포드. 내 의뢰인인 에오네 페탈포드의 동생이에요."

"그건 나도 알아. 그래서 죽인 건가?"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요?"


"내 차 안에서 말이지."

"이엘의 차인 줄은 몰랐네요. 똑같이 생겼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엘은 그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도달이 모르는 사람의 차 안에서 당당하게 누군가를 죽일 위인은 아니었다.


"이엘을 찾아온 걸 보니 에오네 페탈포드를 죽여 달라고 의뢰할 셈이었군요."

"그렇게 말하긴 했지. 물론 나는 거절했지만."

"운이 없는 사람이네요. 이엘 대신 나를 찾아왔다면 좋았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어떤 제국 사냥꾼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 청부업자 노릇을 하곤 했다. 그게 계시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아무도 문제 삼을 수 없었으니까.


도달 역시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도달이 그런 사람이라는 건 이엘과 도달이 갈라선 이유이기도 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나?"

"딱히 없어요. 이미 끝났으니까."


도달은 턱짓으로 제 옆에 죽어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그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자는 모습이라고 착각할 법도 했다.


"가방에 넣어서 에오네 페탈포드에게 데려가기만 하면 되죠."

"이 여자 말로는 자기 언니는 물러 터진 성격이라던데. 사실이 아닌 모양이군."

"바보 같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쉽게 낮잡아 보고는 하죠."


도달은 그 말을 끝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한 말이 자신에게도 해당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걸 깨달아서였을까.

어쨌든 이엘의 손님은 도달의 의뢰인보다 생각이 짧았다. 그래서 눈 깜짝할 새 죽어버렸다.


도달은 여자의 시신을 집어넣기 위해 자기 가방을 열었다. 보통 여자들이 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큰 가방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다.


그녀가 가방으로 시신을 운반할 수 있는 건 그녀의 가방에 걸려 있는 한 가지 소마법 때문이었다. 물체가 차지하는 공간을 극도로 축소하는 마법. 이론적으로는 코끼리도 가방에 집어넣을 수 있는 능력인 셈이었다.


그녀가 가방에 시신을 집어넣자 차 안은 거짓말처럼 다시 깔끔해졌다. 여기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리라고는 아무도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이엘, 잘 지내는 걸 보니까 좋네요."

"이 여자를 죽이기 위해 사월로 돌아온 건 아니지?"

도달이 문손잡이를 당기려던 손을 멈췄다.


"솔직하게 말할까요?"

"아니, 적당히만 솔직했으면 하는데."

"누군가를 죽이러 온 건 맞아요."


진짜 목표는 따로 있다는 이야기인가. 이엘은 그녀의 적당한 솔직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고 싶은 마음 반, 몰라서 불안한 마음 반이었다. 도달은 언제나 이엘이 예상치 못한 사고를 저지르고는 했으니까.


"문제만 일으키지 마라."

"문제를 일으킨다는 게 뭔가요?"

도달의 얼굴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그 말에는 뼈가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게 문제를 일으키는 건가? 그렇다면 그녀는 이미 한 번의 문제를 일으킨 셈이었다.


이엘은 대답하지 못한 채 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런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을 하다니 실망이네요. 불가능하다는 거 알면서."

도달은 코웃음을 치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참, 세눈은 아직도 맛있나요? 설마 망한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멀쩡하게 영업하니까 한 번 가 보든가."

"그런가요."


차 문을 닫는 소리가 이엘의 귀를 때렸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주차장 저편으로 사라져 이내 이엘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엘은 다음 손님을 맞기 위해 차를 출발시켰다. 이대로라면 정말 편두통이라는 지병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엘을 무엇보다 괴롭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가 누군가와 가까워지기만 하면 자신의 단골 식당을 소개해 줬다는 사실이었다. 마음 편히 밥 한 끼 못 먹을 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는 건데.


그는 한숨을 쉬며 다음 손님을 태웠다.

"유성호텔 지하 주차장으로 갑시다."

또 유성호텔인가. 좀 높은 사람이다 싶은 손님들은 어김없이 유성호텔로 가자고 했다.


경호원까지 대동한 남자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수행원을 같이 데려가도 되는 겁니까?"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면요."


떼어 놓고 오라고 했다가 아까 같은 일이 생기면 책임질 방법이 없기도 하고. 물론 그런 일이 그리 흔히 일어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여튼 남자는 한 명의 경호원을 데리고 차에 탔다.


"제가 누구인지는 지금으로서는 말씀드리기 어려운 점 양해해 주시죠."

"그런 분들이 그리 적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의뢰를 받으실지 안 받으실지도 아직은 모르니 말입니다."

누군가를 죽여 달라는 의뢰는 그 자체로 무게감을 가지게 된다. 그게 얼마나 중대한 사안이든, 사소한 사안이든, 개인적인 이유든 대의명분이 있어서든.


그래서 이엘은 의뢰인들이 무게를 잡는 걸 굳이 비웃지 않았다. 어차피 비웃을 만한 의뢰 내용을 들고 오면 그때 비웃어도 족했다.

"편하게 말씀하시죠."


"알체이라 씨는 같은 제국 사냥꾼과 검을 맞댄 적이 있습니까?"

이엘의 한쪽 눈썹이 슬쩍 찌푸려졌다. 오늘은 어째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투성이인데.

"제 경험이 중요한 사안입니까?"

"경험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알체이라 씨의 가치관이니까요."


같은 제국 사냥꾼과 검을 맞댄 적이 있는가. 이엘은 그 한마디로 그가 하려는 의뢰를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이전에도 제국 사냥꾼을 죽여 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이 있었으니까.


"무슨 일로 제국 사냥꾼을 죽이려 하십니까?"

남자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의뢰 내용을 추측하는 데 그리 대단한 통찰력이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제국 사냥꾼이 아닙니다. 사냥의 신도 그 사람을 버렸을 겁니다."

사냥의 신에게 버림받은 사냥꾼이라. 이엘은 자신 역시 그런 존재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사냥의 신이 제국 사냥꾼들을 품어 준 적이 있기나 했던가.


"알체이라 씨는 제국 사냥꾼의 이름으로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고 다니는 자가 있어도 된다고 생각합니까?"

"저 역시도 그리 자비롭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사람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제국 사냥꾼의 지위를 악용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 이엘에게 내밀었다. 이엘은 제 주머니에 들어 있는 사진과 교환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남자가 내민 사진 속의 얼굴은 이엘이 아주 잘 아는 얼굴이었다. 그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차 뒷좌석에 타고 있던 얼굴이니까.

"도달 아자칸, 제국 사냥꾼 제6호라고 하더군요. 알체이라 씨와도 아는 사이입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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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다섯 번만에 누군가의 이름을 외운다는 것 +1 22.07.11 31 5 12쪽
52 손님으로 들어와 연행되어 나간다는 것 +1 22.07.10 38 6 12쪽
51 죽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읽어본다는 것 +1 22.07.09 44 7 12쪽
50 검을 맞댔던 여자와 마주 앉아 식사한다는 것 22.07.09 43 7 12쪽
49 전 여자친구의 오빠에게 머리카락을 맡긴다는 것 +1 22.07.08 51 7 12쪽
48 신을 담는 그릇 +1 22.07.07 48 7 12쪽
47 신의 사자들 22.07.06 50 7 12쪽
46 구원 +1 22.07.05 50 7 13쪽
45 폭우 +1 22.07.04 53 7 12쪽
44 멀어져 가는 모든 것들 22.07.03 52 7 12쪽
43 수면제 +2 22.07.02 47 7 13쪽
42 커다란 걸 짊어진 자 +2 22.07.01 50 8 12쪽
41 그의 반쪽 +4 22.06.30 51 8 12쪽
40 아직 한창인 사냥꾼 +2 22.06.29 53 7 12쪽
39 모르는 게 없는 +1 22.06.28 49 8 12쪽
38 기댈 곳 없는 이 +1 22.06.27 55 8 12쪽
37 옛 파트너 22.06.26 55 8 12쪽
36 반역의 씨앗 +1 22.06.25 49 8 12쪽
35 의뢰를 가리지 않는 사람 +1 22.06.24 53 9 13쪽
34 건방지고 무례한 손님 +2 22.06.23 59 9 12쪽
33 태평한 아가씨 +2 22.06.22 54 9 12쪽
32 막무가내에 고집 센 여자 +1 22.06.21 57 9 13쪽
31 황제 시해자 +1 22.06.20 61 9 12쪽
» 제국 사냥꾼 제6호 +1 22.06.19 60 7 12쪽
29 시험 +2 22.06.19 53 9 12쪽
28 옥탑방의 남자 +1 22.06.18 53 9 12쪽
27 인터뷰 +1 22.06.18 64 9 13쪽
26 소설가 선데이의 하루 +1 22.06.17 68 9 12쪽
25 일단락 +2 22.06.16 72 9 13쪽
24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22.06.15 77 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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