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그리고.
지쳐 죽은 듯이 잠든 에바는 순간적으로 눈을 떴다.
어둡던 주위가 점점 밝아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절망 한 구석이 희망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에바는 빛 때문에 부신 눈이 빛에 적응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동전 크기만 하던 빛은 어느새 점점 더 넓어져 있었다. 동전 크기부터, 주먹 하나만 한 크기, 그리고 머리만 한 크기, 그리고···. 바깥이 완전히 보일 만한 크기로! 땅으로는 온몸으로 알 수 없는 진동음이 느껴졌다. 일말의 희망이 꿈틀대는 것을 느끼며, 에바는 숨을 크게 쉬었다.
첫 번 째 숨은 먼지 맛이었고, 두 번째 숨은 피 맛이었다. 몇 번이나 기침하던 에바는 온 힘을 다해 소리 질렀다.
"살려주세요!"
팔 움직일 힘은 없으면서도 소리 지를 힘은 있구나······. 귀를 다친 에바로서는 소리치는 건지 그냥 속삭이는 건지 알 방법은 없었다. 예상치 못한 큰 운동에 산소가 다시 결핍되고, 시야가 순간적으로 픽 하고 나가버렸다.
주위가 다시 쿵쿵거리는 진동에 휩싸이고, 이어서 누군가가 그 큰 구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를 따라 들어온 1m 정도의 무언가는 신속하게 주변의 방해물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빛에 에바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겨우 눈을 뜬 에바의 시야에 검댕과 먼지로 뒤덮인 그림자가 나타나자, 에바는 그나마 멀쩡한 쪽에 들려있던 자베르의 손을 잡은 채 말했다.
“저기, 사람······."
에바의 상태를 확인했던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제 천국의 문처럼 보이는 커다란 구멍에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역광 때문에 그들의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반쯤 혼절해있던 에바는 곧 그 지게차에 들려졌다.
무기력하게 꿈틀대던 에바의 손은 이미 식은 자베르의 손을 쉽게 놓고 바깥의 밝은 빛 안으로 들어갔다. 몸에 하얀색 천이 씌워지고, 차가운 바깥 공기가 발에 닿았다가, 어느 초록색 차 비슷한 것 안에 들어갔다.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목에 주삿바늘 같은 뭔가에 찔리는 느낌이 났다.
에바는 픽 의식을 잃었다.
커플들과 가족들을 위해 꾸며진 거리는 따뜻했고 즐거웠다.
손안에서부터 졸졸 따라오는 가슴 따뜻한 온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주 오랜만에 이 조그마한, 거의 변하지 않은 아이와 함께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춥게만 느껴졌던 크리스마스가 처음으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이 만델라 거리의 중앙, 커다란 트리가 있는 곳에 도달했을 때, 자베르는 문득, 이 상태로 세상이 멈췄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이쁘네······."
정적을 깬 것은 에바였다. 그래, 에바의 말마따나, 커다란 트리는 여러 홀로그램과 장식들로 장식되어 붉은색, 푸른색, 흰색, 가끔 노란색으로 계속 빛나고 있었다. 창가와 여러 장식으로 반사된 빛은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옆에 있는,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 아름다운 아가씨는 어느새 아름다운 배경 속에 스며들었다. 아름다웠다. 트리 빛을 따라서 붉게, 푸르게, 노랗게, 하얗게··· 끊임없이 색이 변하는 에바는 은하수 위의 요정처럼 보였다.
에바의 미소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마주한 자베르는 순간 정신을 놓아버렸다. 심장은 다시 미친 듯이 뛰고, 콧속으로는 어떤 향이 밀려들어 온몸에 밀려들었다. 그 향기는 뭣보다도 강하게도 그의 뇌를 사로잡았다.
이성이 마비된 자베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는 어디 정신이 팔려있던 에바의 턱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토끼 눈이 된 에바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에바의 회색 눈과 눈이 마주치고, 숨과 숨이 닿았다.
기습적으로 에바의 입을 맞춘 자베르는 곧 에바에게 밀쳐진 뒤 얼마나 맞을지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필요 없다는 듯, 두 사람의 입맞춤은 생각보다 오래 계속되었다. 까치발을 들던 에바는 아쉬운 듯 콩 발을 굴렀다. 분명 내 얼굴도 저 아이와 같은 표정이겠지. 기습에 반쯤 넋이 나간 에바의 기분을 알기라도 하듯, 자베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에바."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이었다. 용기를 낸 대가는 더욱 커다란 시련이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베르, 너답지 않게 긴장한 것 아니야? 만약 거절당하면 어쩌지? 입까지 맞췄는데? 하지만, 난 마음의 준비가··· 이태까지 말하려 했던 거잖아? 지금이 아니라면······.
'지금이 아니라면······.'
'어쩌면 평생 못 할 수도 있어.'
“할 말이 있어."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듯 에바의 눈이 잠깐 커졌다.
에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건지, 예상 못 한 상황에 굳어버린 건지는 알 수 없었고, 알 겨를도 없었다. 쉬는 법을 잊어버린 심장만이 흐르는 시간을 말해주었다.
"저······."
그대로 눈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것, 지금 끝내야 하는 일이리라. 안된다는 생각은 없이, 된다는 생각만을······.
자베르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천천히아주 천천히이태까지 말하려 했던입가에 맺힌 한 마디를,
에바는 혼란스런 정신을 가다듬었다.어쩌면나 혹은 그가 하길 기대한장밋빛 물음의 답을.
말했다.
"에바, 좋아해."
"자베르, 나 네가······."
대답은 필요 없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 한 사람은 누구 먼저 할 것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아침의 어색함과는 전혀 다른, 아플 정도로 따뜻한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다. 서로의 알 수 없는 미안함, 거절에 대한 공포, 일 년 동안 사무치던 그리움···. 여러 감정이 섞인 채로 분출되는 감정의 도가니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 꼭 손을 잡고 있었다.
트리 어디 선가부터 시작된 강한 빛이 두 사람을 축복하듯 감쌌다. 강한 빛······.
그리고 뜨겁고, 위험하고, 창백한, 작렬하는 빛! 위험을 느낀 자베르가 에바를 감쌌다.
"에바! 조심······"
쿠쾅 -!
고막을 흔드는 폭발음이 들린 것은 그 다음이었다. 두 사람을 덮친 충격파는 여러 물건과 함께 사람들을 저만치로 던져 버렸다. 충격파에 저만치 날아가던 에바는 곧 어딘가 단단한 것에 꽝 머리를 박았다. 아득해지는 시야 너머로 기절하기 직전, 에바가 마지막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온몸에 느껴지는 둔중한 충격과 그 중에도 손으로 똑똑히 느껴지는 자베르의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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