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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별의 다락방

재벌 박차고 개발천재 된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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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별
작품등록일 :
2021.07.26 12:37
최근연재일 :
2021.08.11 17:05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7,271
추천수 :
267
글자수 :
93,060

작성
21.07.26 17:35
조회
859
추천
39
글자
12쪽

할아버지와 손자

DUMMY

부우웅.


자정이 다 된 영종대교를 구형 레토나 한 대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달리고 있었다.


“차 좀 바꾸지, 그래?”


감색 후드티를 입은 강산이 무심하게 한마디 던지자 운전하던 여자는 살짝 볼멘소리했다.


“일 년에 몇 번이나 탄다고···. 본가에 알렸으면 너도 편하고 나도 편했잖아. 아무튼 네 운전기사 노릇도 이번이 마지막인 줄이나 알라고.”


대충 묶어놓은 머리카락 사이로 뿔테 안경을 쓴 홍도가 힐끗 강산을 쳐다보며 말했다.


“영원한 친구네 뭐네 할 땐 언제고···. 우리 김홍도 많이 변했네. 요즘 연애하냐?”

“밥 벌어먹기도 힘든 시국에 연애 같은 소리 하네. 저녁은 기내식으로 때웠니?”

“아니···. 홍합탕에 소주가 눈에 아른거려서 참았지.”

“오자마자 그놈의 술타령···.”


말은 뾰족하게 했지만, 홍도의 분홍 입술 꼬리도 살짝 올라갔다.

강산의 귀국이 그녀도 기쁜 모양이었다.


서울에 도착한 그들은 홍합탕에 명란 계란말이, 백김치를 놓고서 소주잔을 마주쳤다.


짠.


“스물다섯에 동시에 두 개의 MIT 박사 과정을 마친 초천재 강산을 위하여···.”

“고마워. 네가 없는 1년이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했는지 모를 거다.”


홍도는 눈으로 호선을 그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앞으로 계획은 생각해 보고 들어온 거야?”

“사업하려고···.”


홍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할아버지 회사라면 질색하지 않았나?”

“내 사업을 할 거야. 주신 그룹엔 안 들어가.”


후르륵, 하아.


산은 얼큰한 홍합탕 국물을 입에 털어 넣으며 낮은 탄성을 냈다.

홍도는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골똘해졌다.


“신경과학이나 소재공학으로 사업하려면 차라리 미국에서 자리 잡는 것이 낫지 않았어?”

“장점이 많겠지. 한데 너를 포함해서 내 사업 파트너가 대부분 한국 땅에 살아서 말이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증명해 보여야 해서···.”

“피···. 얘가 외주 일로 겨우 입에 풀칠한다고 날 너무 띄엄띄엄 보네.”


홍도는 소주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뇌파나 소재 영역에 내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취직을 생각했다면 귀국하지도 않았어.”


산은 지그시 홍도를 바라봤다.


“네 감성, 네 감각, 네 디자인이 필요해. 난 네 감각을 믿거든.”


홍도는 취기가 살짝 도는지 볼이 불그스레했다.


“후후후, 나중에 정식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하면 고려해 보는 걸로. 오늘은 생각 없이 마시자고···.”


미국 매사추세츠, 찰스강을 경계로 마주 보는 MIT와 보스턴 대학교 출신 남녀는 늦은 밤까지 1년 만의 해후를 나눴다.


&


“안녕하십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강영조 회장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강산이라고 전해주세요.”


오전 9시 30분, 주신 그룹 본사 사옥 안내데스크엔 감색 후드티를 입은 청년이 그룹 총수를 만나겠다고 면담 신청을 하고 있었다.

로비 보안을 담당하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온화한 미소를 띠던 중년인이 얼른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민완한 보안 책임자는 데스크 안내원에게 뭔가를 지시하곤 웃는 낯으로 청년을 응대했다.

10여 분이 지났다.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하고 중년 여인과 수행원이 나타났다.


“강산 군!”

“오··· 여사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어째··· 점점 아름다워지십니다.”

“다음 주나 돼야 들어오는 것으로 알았는데, 짓궂어요.”


강산의 말대로 기품과 미모를 겸비한 여인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자, 이러지 말고 얼른 올라갑시다. 회장님께서 기다리세요.”


주신 그룹 총괄 부사장이 버선발로 급히 로비까지 달려 나오는 일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강산이 정순의 안내로 엘리베이터로 향할 때마침, 조찬 회동을 마치고 귀사하던 건설 부문 사장 장인한은 걸음을 멈추고 후드티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사영의 아들놈···.’


장 사장의 금테 안경 속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장차 주신 그룹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는 강산의 등장은 장인한에게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다.

강사영의 죽음에 일조한 전적이 있는 장인한이다.

강산의 후계 구도에 장인한이 차지할 자리가 과연 있을 것인가.

줄기차게 사영의 비행과 부적절함을 적나라하게 성토했던 사람을 내버려 둘 리 없다.


‘강화영에게 연락해야겠군.’


장인한은 수행원을 전부 대동하고 로비에 선 채로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그룹 내, 아니 재계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위치와 세력을 유지하려면 아군이 필요했다.


‘점심도 편히 먹긴 틀렸군.’


조찬 회동에서도 음식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았던 장인한은 화영과의 점심 약속을 하며 풀때기로 차려질 비건식 식사를 감수해야 했다.


&


“인마! 도깨비처럼 또 연락도 없이 들어온 게야? 자꾸 이러면 할애비 섭섭해!”

“아하하. 할아버지 절 받으세요.”


산은 강영조 회장에게 넙죽 절부터 올렸다.


“녀석, 미국물 좀 먹었으니 미국식으로 인사하자.”


강회장은 손자의 손을 덥석 잡고는 이내 부둥켜안았다.


“킁, 킁. 할아버지 아직도 담배 태우세요? 여사님, 담배 끊지 않으면 밥도 챙겨주지 말라고 했잖아요.”

“어휴, 강산 군이 안 겪어봐서 그래요. 잔소리라도 하려 들면 얼마나 불같이 노여워하시는지 몰라요.”

“인마. 갈 날 얼마나 남았다고 이것저것 재고 살아.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소식하고 정기적으로 검진 받고 일 열심히 하면 돼.”


강회장은 손자의 잔소리가 그리 싫지 않은지 산의 어깨를 토닥이며 해묵은 건강 지론을 펼쳤다.

그런 조손을 따뜻한 눈으로 웃음 지으며 김정순은 바라보고 있었다.


‘김정순, 아버지보다 3살이나 어린 할아버지의 최측근, 사사로이는 내게 계조모나 다름없는 분.’


강산은 부사장과 눈을 맞자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입사 초기 강산의 아버지를 사수로 여기고 일을 배운 김정순은 특유의 친화력과 철두철미한 일 처리로 부사장 지위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룹 기획조정실에 있을 적, 특별한 매력과 능력을 발견한 강회장은 그녀를 곁에 두었다.

결국 정순은 환갑 노인과 애정 관계로 발전하여 급기야 비공식적인 한남동 저택의 안주인이 되었고 그때 그녀 나이 고작 28살이었다.

재계 내외엔 암암리에 강회장의 노욕이다, 재산을 노린 잔망스러운 여자다, 잘근잘근 씹어댔지만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불륜을 저지른 것도 아니며 다 큰 자식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아 불화가 생기지도 않았다.

정순은 지고지순하게 강회장을 섬겼고 강회장 역시 그녀 아끼면서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강회장은 지독하게 능력 위주로 인사를 처리했다.

그 완고한 잣대는 자식이든 오래된 창업 공신이든 가리지 않고 들이댔다.

김정순이 그룹 총괄 부사장에 오른 건 강회장의 연인이어서가 아니다.

순전히 그녀 능력 때문이다.

다만, 정순의 야망만큼은 그 누구 못지않았고 능력도 출중했기에 그룹 내외에선 주신의 후계 구도에 3강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사영의 아들 강산, 총수의 연인 김정순, 총수의 고명딸 강화영이 그 3강이다.

아직 이렇다 할 후계 계획에 대한 강회장의 뜻이 밝혀진 것이 없는지라,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가십거리에 불과한 얘기였지만.

아직은 말이다.


역량으로 보면 단연 김정순이 우위였고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정통성으로 보면 강산이었다.

이렇다 할 입지를 세우지 못한 유통 부문 사장 강화영은 차분히 관망하는 분위기.

이런 형국에 장성한 강산의 등장은 그룹 내부로 빠르게 전파되며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강회장은 산과 2년 만에 재회였다.

기특한 손자는 할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2년 전 육군 현역으로 전역하고 다시 미국으로 남은 공부를 하러 갔다.


“그래, 네가 원하던 공부를 마쳤으니 이제 너도 슬슬 일을 배워야 하지 않겠냐?”


강 회장은 강산에게 십여 년 동안 참을 만큼 참아왔던 후계 수업을 주문하고 있었다.


“회장님, 강산 군이 돌아온 지 만 하루도 안 됐어요. 조금 숨 좀 쉬게 시간을 좀···.”

“내가 천년만년 살 것 같나? 지금도 많이 참아왔어. 더는 미룰 수 없네.”


버럭 소리를 지르는 강회장의 서슬에 부사장은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산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할아버지, 저는 그룹에 머물 생각이 없어요. 제 전공을 살려 신경과학을 응용한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네가 그리 나올 줄 알고 신사업을 준비할 TF팀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부사장이 신경 써서 준비해뒀으니···.”

“저는 그룹에 머물지 않을 거예요.”


감히 강영조의 말허리를 잘라먹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부사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터져 나올 고성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했다.


“부사장, 자리 좀 비켜 주겠나?”


의외로 낮은 목소리로 강회장은 얘기했다.

김정순은 자리에서 일어나 묵례한 뒤 회장실을 나섰다.

조손만 남은 휑한 회장실.

강회장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네 아비 때문이냐?”

“맞아요. 아버지 때문이기도 해요. 아버지가 견디지 못했던 주신의 그룹 문화, 저도 자신 없거든요.”

“세월이 지났고 할애비도 회사도 변했다.”


산은 별다른 대답하지 않았다.

켜켜이 쌓여있는 기업의 폐단은 한꺼번에 바꿀 수 없다.

수십 번의 구조조정, 혁신을 한다 해도 강산이 원하는 기업상이 되긴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손자가 대답이 없자 강회장은 생애 처음으로 죄를 고백하려 했다.

강회장은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는지 입술을 씰룩이다가 침잠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그릇된 생각으로 네 아비를 죽음으로 몰아간 건 인정하마. 후회한다. ···할애비를 용서해라.”


오래 준비된··· 수많은 날을 들였을 강회장의 사과는 담백했고 솔직했다.


“할아버지 탓만은 아니에요. ···할아버지 냉철해지세요. 혈육에 연연하지 마세요. 저는 그룹을 이끌만한 재목이 아닙니다.”


강회장은 손자와의 대화를 위해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했을 것이다.

하나··· 강산의 대답은 강회장의 예상 답안에 나오지 않는 최악의 대답이었다.


‘할아버지, 저는 그룹을 이끌 재목이 아닙니다. 세계를 경영할 겁니다. 구태의연한 조직으론 제 발목을 잡을 뿐··· 제발 족쇄를 채우려 하지 마세요.’


목소리로 전달하지 않은 메시지는 눈과 눈을 통해 전해졌다.

60년 기업 활동으로 축적된 강회장의 감은 손자의 의지를 금세 알아챘다.


어린 산의 크고 맑은 눈망울은 이제 없다.

남자 대 남자로 절대 만만치 않은 젊은 수컷이 어느덧 강회장 앞에 앉아있었다.

버럭 성을 내고 내친다고 해도 손자는 아랑곳하지 않을 걸 강회장은 깨닫고 말았다.


“오냐. 좋다. 사업을 하겠다고? 입때껏 학교에서 사람 머릿속만 들여다보던 네가?”


강산은 담담히 강회장의 비아냥을 듣고 있었다.


“그래, 그럼 종잣돈은 충분하고? 설마 할애비에게 손을 벌리려는 것은 아닐 테고.”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그룹 지분을 처분할 생각입니다.”

“그럴만한 계획이 있었구나. 50억 정도 되려나··· 꼭 그러고 싶으냐?”


평생을 불같이 살아온 강회장은 곁을 떠나려는 손자에게 노기를 누르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뭐라고 하셔도 제 결심은 변함없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살날이 얼마 안 되는 할애비 곁에 머문다면 네가 원하는 일을 하게 해주겠다고까지 말했다. 그룹을 물려받은 후엔 네 마음대로 해도 늦지 않을 터···.”


강회장의 눈은 노기에 번들번들 빛을 냈다.


“시가 총액 50조에 육박하는 회사를 저버리고! 고작 50억을 들고 구멍가게부터 시작하겠다? 할애비가 널 어찌 생각해야 하는 거냐?”


강회장의 인내심은 유리처럼 처참히 깨지고 귀청이 떨어지는 고성이 회장실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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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꿈을 포기하는 사람 +4 21.07.27 685 3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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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rologue +2 21.07.26 943 47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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