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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입니다.

집에서만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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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돌
작품등록일 :
2022.05.25 19:06
최근연재일 :
2022.05.31 10:37
연재수 :
7 회
조회수 :
546
추천수 :
68
글자수 :
40,471

작성
22.05.25 21:14
조회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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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자
13쪽

봄볕이 말랑하다

DUMMY

어렸을 적 하반신이 마비되고 나는 분노했다.

왜 아버지는 악인들 손에 죽었나.

나는 왜 하반신 마비가 되었나.

그 분노가 사라지고 절망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방구석에만 처박혔다.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냉소적이고 짜증나는 인간이 되었다.

그건 내가 하반신을 잃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제와 안 사실이지만 악인의 자식이었기 때문인가.


“어리석은 놈. 이 멍청한 놈. 정녕 악인이었던 것이냐!”


정찬기가 발하는 기세에 마당이 뒤집혔다.

성격 같으면 바로 죽였다. 하지만 다 날 위해서 하는 소리다.

날 걱정해주는 사람은 손님이고, 손님과는 대화를 해야 한다.


“내 친부께서 악인이었단 사실을 당신도 알고 있었어?”

“이제와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머리가 뒤죽박죽이면 잠을 못 자.”


그래 나는 지금 당장 자고 싶다. 어쩌면 박영식을 보내버린 것도 잠을 못자서일수도 있다.

수면 부족이 이렇게 무섭다.

정찬기의 기세가 살짝 누구러졌다.


“그런 소문이 있었다. 악인회의 한 조직에서 언더커버를 보냈다고. 그 최후는 모른다. 나도 오늘 처음 알았다.”

“그래? 그럼 이제 사실로 밝혀졌다. 나는 영웅을 죽였다. 악인이다. 악인의 자식이기 때문에 악인이다.”

“이런 멍청한 놈!”


정찬기의 외침에 일대가 떨렸다. 이상하게 내 마음도 떨렸다.


“나는 네가 장애를 가져서 이번 사건의 주인공이 아닌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집에 다와가서 깨달았다. 내 편견이었다.”


자기 고백을 스스럼없이 하는 저자는 진정한 영웅이다.


“너는 그런 편견을 뛰어넘었다. 그런데 악인의 자식은 악인이란 편견에 굴복해 악인이 될 셈이냐!”


멋진 말이다. 내가 졸림과 배고픔과 지저분함에 시달려서 그런지 몰라도 멋진 말이다.


“나는 이미 영웅을 죽였다. 어쩌란 말이냐.”

“이 자리에서 저항없이 죽어라. 내가 안 죽여도 네 놈은 어차피 죽는다. 기동타격대가 오고 있다. 그 전에 곱게 죽여주겠다.”


중년쯤 되어보이는 저자의 말이 이상하게 따뜻하다.


“아침 햇살이 산뜻하구나.”


죽기 좋은 날이다. 아니, 죽기 보다 낮잠자기 좋은 날이다.

나는 하반신 마비인데 집에서만 강하다.

강해진 나는 악인 몇 놈을 죽이고 영웅 하나를 죽였다.

그러니 평생을 이곳에서 악인 영웅 할 것 없이 상대해야 한다.

참으로 귀찮고 비루하다.

내가 죽기로 결심한 건 다 귀찮아서다.

내가 악인임을 깨닫고 그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짓 따윈 하지 않는다.

그저 봄볕이 따쓰하다. 자고 싶다.


“나는 자겠다. 자는 동안 네 놈이 날 죽이든 살리든 신경 안 쓴다.”

“좋다. 장하다 이경봉. 명예는 지켜주마. 모두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결했다 말하겠다.”


내가 용서를 구했나. 말이라고 다 갖다붙이면 말이 되는구나.

나는 그런 건 모르겠다.

당당히 죽자. 자다가 죽는 거니 호상이다. 만족할 죽음이다.


터벅터벅.


저승사자의 발걸음이 달구나.


띵동.


초인종 소리가 쓰다.

무시할까 했지만 처음으로 정상적인 방문이었다.


“뉘시오.”

“나는 한명회라 하오만. 이경봉씨를 만나러 왔소.”


아. 초인종 누르는 센스부터 알아봤다. 훌륭하고 진정한 손님이다.


“들어오시지요. 귀히 모시겠습니다.”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왔다. 비꺽소리 하나 없다.

문을 넘어온 이는 노인이었다. 머리 희끗하고 온화한 노인.

영웅의 풍모라 생각했지만 악인이었다.


“나 한명회. 대한악인협회 고문이자 마포구 지회장을 맡고 있소이다.”


또 악인이다. 지긋지긋하다. 그냥 잠이나 자련다. 정찬기든 한명회든 누군가 죽여주겠지.

그런데 어떤 냄새가 잠을 깨웠다. 눈을 부릅뜨고 악인을 노려봤다.

한명회가 흐믓한 미소로 상자를 내보였다.


“피자를 좋아한다 하여 가져왔소만. 싫으시오?”


진정한 손님이다. 피자를 대접해도 모자란데 피자를 들고 오다니.

나는 누운 채 정찬기에게 말했다.


“이봐 꼰대. 가기 전에 피자 한 판 좋잖아. 어때? 겸상하겠어? 나와 겸상하는 놈은 진정한 손님이다. 나는 손님은 죽이지 않는다.”

“개수작하지마라. 죽기로 했으면 깔끔하게 죽어라.”


정찬기는 한명회에게 다가갔다.


“한명회 더 이상 선을 넘지마라.”

“워워. 너무 열 올리지말게. 난 이야기를 하러 왔을 뿐이야. 자네도 알겠지만 여기서 날 건드리면 전면전이야. 악인 한 놈 죽여서 시민들 죽어나가는 꼴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우리 손님께서 말빨이 나보다 좋으시다. 박수라도 쳐드려야겠지만 기운이 없다.

대신 나도 말로 드려야겠다.


“이 노인네 시민을 볼모로 잡다니. 노망이 나셨군.”

“자네 방금까지 날 귀빈 대접한다 하지 않았나?”

“여기선 세 가지 대접만 합니다. 나와 겸상하거나 욕 처먹거나 죽거나. 이 중 둘을 하니 귀빈 아닙니까. 또 죽어나갈 수도 있고.”

“하하하. 그게 그리 되나. 좋군 좋아.”


볼수록 호인이다.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나는 정찬기를 졸랐다.


“죽는 데 자신있다. 그러니 아무렇지 않게 누워서 잤지. 호상은 좋은 거다. 근데 배가 고프다. 마침 손님이 왔고 피자도 있다. 즐겁게 먹고 가겠다.”


내 언변도 한명회 영감에게 뒤지지 않는다.

정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는 땅이 뚫리고 잔디가 뒤집히고 수도가 터진 마당에 앉았다.

피자 하나씩 들고 우물거렸다.

멋쩍은지 정찬기 꼰대가 입을 열었다.


“포위망은 어찌 뚫었소?”

“보면 모르나. 그냥 뚫었다.”

“쉽지 않았을텐데.”

“쉬웠다.”


갑자기 분위기 무엇? 팽팽하다. 이러다 체해서 죽겠다.


“어차피 결계치고 들어와서 여기서 뭔 일이 있는지도 모를 거다.”

“그럼 기동대 소식이 여태 없는 것도 당신 때문이요?”

“아마 밖은 3초쯤 흘렀으려나. 그 쪽 조직도 한심하군. 여태 이변도 눈치 못 채고.”

“말 다했나?”


내 최후의 만찬을 이렇게 망치나.

나는 리치골드까지 깔끔하게 삼키고 말했다.


“그만들해. 내 마지막 밥상에 마지막 손님들이야. 곱게 가고 싶다.”


둘은 눈을 돌려 날 보았다. 긴장감이 누그러졌다.


내가 보기에 정찬기는 노인에 비해 무력이 강하다. 하지만 노인은 압도적인 재능을 가졌다. 시간이다.

그런데도 정찬기가 덤비는 걸 보면 진정한 영웅이다.

약한 걸 알면서도 상대해주니 노은은 영웅스러운 악인이다.


“본론이나 말해봐요 할아범. 찾아온 이유가 뭐요?”

“강태공을 몰살했다는데 맞나?”

“맞지맞지. 내가 죽였지.”

“보아하니 영웅도 죽인 듯한데 맞나?”

“맞지맞지 아마 저 땅 속에 있을거요. 이봐 영식이 지옥은 안녕하신가.”


대답이 없다. 역시 변변찮은 놈이다.


“그럼 자네는 악인인가 영웅인가.”


그 물음에 나는 두 번째 피자를 집으려다 말았다.

아무래도 두 조각째 피자를 먹으려면 꽤 시간이 걸럴 것 같다. 불안하다.


“그건 왜 물으시나.”

“너에겐 중요한 물음이다.”

“내게? 당신이 아니라? 이 뭔 개소리요.”

“넌 악인의 아들이다. 아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슬슬 짜증이 났다.

내가 인정한 손님인데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막 들은 참이오. 그래서 어쨌다고. 악인의 아들이니 악인이다, 그러니 악인회에 들어와라 이 말인가.”

“성급한 짐작이다. 나는······.”

“에에에.”


나는 노인의 말을 막았다.


“이봐 정찬기. 나 죽기 전에 악인 하나 더 죽여야겠다. 나는 내 손님 아닌 놈, 장애인 비하하는 놈, 그리고 악인의 자식은 악인이다, 라고 하는 놈은 죽인다.”

“좋다.”


정찬기는 이미 나의 강함을 안다. 그가 보기에도 내가 노인의 위다.

하지만 노인은 느긋하다.


“미안하지만 난 죽을 생각이 없네.”

“걱정마쇼. 나는 죽는 데 자신있는 만큼 죽이는 것도 못지 않지.”

“재미난 친구군. 확실히 악인상이야.”

“잘 가시오.”


빛의 속도로 접근했다. 그런데 의식만 빛의 속도이고 몸은 굼벵이였다.

주변은 물론 정찬기까지 느려졌다.

오직 한명회만 멀쩡했다.


“나도 느껴서 알았지만 자네는 너무 강해. 죽일 방법도 싸울 방법도 없군. 하지만 보아 알겠지만 날 죽일수도 없네.”


육체 능력에서는 내가 압도한다. 하지만 재능은 다르다.


“잠자코 내 얘길 듣게. 다 들으면 풀어주지. 알았으면 눈을 깜빡여.”


깜빡.


“좋아. 잘 들어라. 내게도 시간이 많지 않아. 빨리 끝내자고. 네 놈 아비는 악인이었다. 우리 악인회에 의해 악인으로 키워져 정부 요원이 됐지. 근데 놈은 영웅들에 감화되어 영웅으로 변절했다. 그에 대해 우리 악인회는 별 감정이 없었다. 단지 책임이 필요했지. 그래서 조건을 달았다. ‘널 습격할 것이다. 살아남으면 이후엔 뭘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그런데 그날 영웅들이 모든 사실을 깨닫고 우리와 같은 시각에 습격했다. 그가 영웅 쪽에 투항했음에도 말이지. 그를 죽인 게 영웅인지 우리인지 아직 모른다. 여기까진 이해했나?”


깜빡.


“좋아. 일단 풀어주지.”


감각이 돌아오며 시간이 흘렀다. 나는 침착한데 정찬기가 발끈한다.


“말 같지 않은 소리. 우리 영웅이 그리 비열할리도, 네 놈들이 정직할리도 없다. 이경봉. 이건 다 수작이다. 악인으로 끌어드리려는 거다. 그냥 죽어라.”

“이봐 선배. 그냥 닥치고 좀 듣자.”

“내가 왜 네 선배냐.”

“인생 선배. 꼰대 선배. 영웅 선배잖아.”

“다른 건 알겠는데 왜 영웅 선배냐. 넌 악인인데.”

“몰라. 잠자코 듣자.”


한명회는 단순한 악인이 아니다. 말 몇 번 섞어보면 안다.


“그래서 한명회 선배. 어쩌라고?”

“나는 또 왜 선배냐?”

“인생 선배. 호인 선배. 악인 선배.”

“뭐냐 악인이 될 거냐.”

“몰라. 인생은 럭키 박스 같아서 뭐가 나올지 모른다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명회가 박장대소했다. 내가 이렇듯 손님을 즐겁게 한다.


“이봐 한명회 선배. ‘우리는 친부를 안 죽였다.’ ‘우리에게 복수하지마라.’ ‘손에 손 잡고 쎄쎄쎄 하며 영웅을 치자’ 그런건가?”

“그건 네가 알아서 하면 된다. 나는 단지 헷갈려서 왔다.”

“뭐가?”

“악인을 죽였으니 영웅 같은데 몰살시키는 방식을 보면 악인 같다. 헷갈린다. 너 같은 놈은 악인이 되면 안된다.”


뜻밖의 말이다. 잠이 1시간쯤 달아났다. 젠장 7시간 밖에 못자겠다.


“악인이 악인이 되지말라하니 신빙성이 떨어지네.”

“우리 악인에게도 정의가 있다. 본성대로, 원하는대로 사는 것이 선이다. 영웅 될 놈이 악인이 되고 악인 될 놈이 영웅이 되면 그거야말로 악이다. 그걸 강요해도 악이다.”


궤변인데 멋드러진 궤변이다. 논리가 아름다워 수면시간 30분을 회복했다.


“그런 의미에서 네 친부는 애매한 자였다. 영웅 될 놈이 악인을 하고 있으니 악이다. 그러다 제 본성을 찾아서 모든 고통을 짊어졌으니 선이다.”

“그래서? 나도 내 본성을 찾으라고? 악인 선배. 보아 알겠지만 저 구멍엔 내가 내려보낸 영웅이 있어. 난 이제 악인이라고.”

“저건 내가 죽였다. 미친 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미친 놈이 당황하면 분위기 이상해진다. 나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죽였다. 악인 선배. 악인으로서 말한다. 내 공을 가로채지마라.”

“너야 말로 공을 가로채지마라. 네 녀석은 대한악인협회에 등록된 악인도 아니다. 이봐 영웅 요원.”


‘잠잠히 있던 정찬기가 한명회를 보았다.


“뭐요”

“이 구멍은 내가 만들었다. 한명회가 요원을 죽였다. 그리 전해라.”

“ ······. “


정찬기가 말이 없어 불안했다.


“꼰대 선배. 수작에 넘어가지마.”


정찬기 대신 한명회가 대답했다.


“넌 잠이나 자라. 정부 요원, 우린 이만 가세. 이 녀석은 잠을 자야지.”


정찬기가 입을 열었다. 나는 잠이 쏟아졌다.


“이경봉이 잠든 사이에 내가 죽이려면 막을 거요?”

“막지 않는다.”

“왜?”

“어차피 안 죽일 거 아니까. 너도 이만한 영웅 후보는 죽이지 않겠지?”

“당신 말을 들으면 악인 후보 같기도 한데, 아닌가?”

“그것도 맞지. 어쨌든 난 간다. 나머진 알아서 하고. 경봉 너는 잠이나 디비 자라.”


스르르 잠이 쏟아진다. 불현듯 궁금한 게 생겼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요.”

“네 아버지의 부탁이다.”

“계부? 친부?”

“잠이나 자라. 자고 나서 생각해볼 일이다.”


내 눈은 반쯤 감겼고, 한명회는 사라졌다.

봄볕이 말랑하다. 볕 덮고 누우면 참 좋겠다.

나는 누웠다. 죽을 자리다. 나는 정찬기가 날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마당에 아무도 없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리석었다.

잠에 빠져 무방비인 상대를 죽이다니. 영웅으로서 걸맞지 않은 행동이다.

정찬기는 참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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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맙소 22.05.31 20 2 14쪽
6 형님 유품 잘 쓰겠습니다 22.05.27 48 4 13쪽
5 피자 한 조각의 소중함을 아는 자요. +1 22.05.26 51 6 13쪽
» 봄볕이 말랑하다 22.05.25 78 12 13쪽
3 나가보지도 않는다 22.05.25 81 12 11쪽
2 우리집에 왜 왔니 왜 왔니 22.05.25 97 15 13쪽
1 멀리 안 나간다 +1 22.05.25 172 1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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