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조필연 님의 서재입니다.

다크판타지 속 야만전사로 살아가기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공모전참가작

조필연
작품등록일 :
2024.05.20 20:59
최근연재일 :
2024.06.01 23:54
연재수 :
14 회
조회수 :
1,491
추천수 :
97
글자수 :
80,952

작성
24.05.24 18:20
조회
110
추천
9
글자
18쪽

5화. 모루의 주인(3)

DUMMY

시드릭은 일어난 그대로 옆의 건달을 바라보았다.

술에 잔뜩 취해서는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머저리같은 모습이었다.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은 시드릭은 그의 허리 춤에 꽂혀있는 단검만 쑥 뽑아들었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직감한 여인들이 작게 입을 틀어막고 구석으로 몰려갔다.


덕분에 시드릭은 자신을 위해 열린 길 위에서 존귀한 인물이라도 된듯 당당히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사람들이 물러나며 마련된 공터에 서서 그가 말했다.


“노인장,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약속을 지키라 신사적으로 말했더니 이런 식으로 날 모욕하는군.”

“신사? 남의 것을 함부로 빼앗는 신사도 있다더냐.”


노인은 시드릭의 도발에도 흥분하지 않았다.

그는 뜨겁지만 차분하게, 자신이 언제 한 방을 날려야 할지를 생각할 뿐이었다.


“대장간에서는 고분고분 하더니 이젠 아주 막 나가기로 한 모양이지? 그래, 기왕 솔직해지기로 한 거 말이나 한 번 들어보자고. 내가 뭘 빼앗았나? 내가 뭘 그리 잘못했어?”

“이리 오너라. 애초에 네놈같은 말종하고 대화할 생각같은 건 없었다.”


망치를 든 노인은 전투를 앞둔 난쟁이 전사처럼 망치를 움켜쥐고 앞으로 걸어갔다.

키는 난쟁이보다 조금 더 컸지만 망치는 그보다 작아서 아주 위협적으로 보이진 못했다.

그러나 그 비장함은 돈 받고 용병노릇하는 난쟁이 전사에 비견될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뚜렷했다.


시드릭의 표정이 비웃음으로 물들었다가 순간 인상이 싹 뀌었다.

그가 단검을 치켜들었다.


“어이가 없군. 네 아들놈이 내 눈을 이렇게 만든 건 기억도 안 나는가? 난 그놈 덕분에 남은 생을 외눈박이로 살게 됐다. 그런데 도리어 나한테 욕을 해?”


하얀 막이 낀듯 뿌연 눈을 커다랗게 뜨며 시드릭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래서 세상이 너희를 천한 것들이라 못 박은 것이다. 자기 잘못은 조금도 인정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외치며 떼만 쓰는 것들! 그런 억지가 먹히지 않으면 힘으로 해결하려하는 무뢰배들! 오냐, 오너라. 내 오늘 너희 천한 것들의 눈을 하나씩 도려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법부터 배우게 해주마.”

“···그 입부터 박살내주겠다.”


굵은 팔뚝을 휘두른 노인의 망치가 허공을 날았다.

아주 무거웠기에 방향만 잘 잡아주어도 저혼자 날아서 목표를 뭉갤만한 망치였다.


그러나 시드릭은 한 쪽 눈으로도 충분하다는듯 망치를 쳐다보더니 순간 고개만 휙 젖혀 망치를 피했다.

뒤에서 쿵, 우당탕, 하고 뭔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시드릭이 앞으로 내달리더니 단검을 휙 그었다.

아슬란이 무시했던 건달치고는 상당히 빠른 움직임이었다.

때문에 움직임이 더딘 노인은 망치를 휘두르고 할 틈도 없이 억, 소리 내며 뒤로 넘어져버렸다.


그리고 허공을 그었던 단검은 시드릭의 손 안에서 반대로 방향을 바꾸었다.

주저앉은 노인을 향해서였다.


“자, 이건 정당방위다. 그러니 날 원망-”


시드릭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노인을 죽일듯 노려보았으나 그의 단검은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잠시 후 노인의 눈에 보인 것은 뭔가에 머리를 얻어맞고 피를 질질 흘리며 뒤로 주춤거리는 시드릭의 모습이었다.


“끄으으으···.”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시드릭은 고통에 겨워 신음을 흘리면서도 한쪽 눈으로 자신에 뭐에 맞은 것인지 확인했다.

발밑에 떨어진 건 벌건 빛으로 거무튀튀한 동화 한 닢이었다.


“동전···? 이, 이게 무슨···?”


그때 노인의 뒤편에서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 주머니에 든 게 그런 것 뿐이라 다행인 줄 알아라. 그게 고대 난쟁이 금화였으면 넌 뒈졌다.”


시드릭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는지 열린 문으로 석양이 긴 몸을 밀어넣은 가운데, 그 강렬한 빛을 등지고 선 시커먼 인물이 거기 서 있었다.

그도 얼핏 기억이 나는 덩치는 야만인의 것이었다.


“너는 아까 그···. 이게 무슨 짓이냐? 대장간 놈들하고 뭔 수작을 부리는 거야?”


주저앉아 있던 노인도 아슬란을 발견하고 인상을 굳혔다.


“아니, 자네가 왜 여기 있나? 내가 분명히 집안 일이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난 지금 나한테 아니꼽게 군 놈 손 좀 봐주러 온 거요. 남의 집 안 일에 참견하러 온 게 아니라.”

“···뭐?”


아슬란은 아무런 대꾸 없이 노인의 팔을 잡아 일으켜주고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덕분에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계속 닦아내던 시드릭의 눈엔 손이 눈앞을 지나가는 순간마다 야만인이 쑥쑥 커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야만인은 안델의 엄격한 규칙을 잘 따를 것처럼 보이던 얼뜨기 이방인이 아니었다.

마치 북쪽 아무아 반도에서 쪽배를 타고 상륙해 왕국사람들의 머리를 쪼개버리던 그 흉포한 야만인이 이 자리에 현현한 것 같았다.

지금껏 본 적 없는 공포스러운 광경에 그의 발이 본능적으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너,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아슬란은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가다 갑자기 어느 지점에 우뚝 멈춰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들이 수십쌍은 되었다.

하나같이 다음에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 떨고 있는 눈들이었다.


그가 비죽 웃으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내가 겁나나?”


시드릭은 그 순간 오싹함이 등골을 타고 쭉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야만인은 흉악한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고 거친 함성을 내지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그 커다란 몸집과 무저갱처럼 시커먼 눈동자,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의 골통을 맨 손으로 짓뭉게 버릴 수 있다는 예고로 상대를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순간 시드릭이 발작적으로 이를 드러내고 달려들었다.

마치 궁지에 몰린 작은 맹수같았다.


“너도 눈알을 파내주마.”


몇 걸음만에 달려온 시드릭의 단검은 단숨에 아슬란의 심장을 노렸다.

비록 무에 관해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뒷골목을 들쑤시며 익힌 직선적 살인 기술이었다.


그는 그것으로 야만인을 쓰러트릴 것이라 생각했다.

단검이 가슴팍 바로 앞까지 왔음에도 상대가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순간 그의 얼굴에 기대치 못했던 희열감이 스며들 때였다.


쩌억.


뭔가 살갗이 세게 들러붙었다가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술집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직후 사람들의 눈에 보인건 손바닥을 편채 사선으로 팔을 뻗은 야만인과 눈이 완전히 까뒤집혀버린 시드릭의 모습이었다.

그는 부글부글 거품을 문채 떨고 있었다.

마치 갑자기 발작증이라도 도진 것처럼 보였다.


물론 아슬란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방금은 힘 조절을 좀 했으니 고작 그런 걸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바들거리는 시드릭을 내버려둔 채 그의 손 옆에 나뒹구는 단검을 집어들었다.


“다음?”


아슬란이 자신들을 향해 묻자 건달들은 술이 확 깼는지 땡그란 눈으로 양 손을 번쩍 들었다.

거의 벌벌 떠는 수준으로 고개를 흔드는 건달도 있었다.


“너흰 평생 기사되기는 글렀다.”


단검을 휙 던져버린 아슬란은 건달들에게 이리 오라 손짓하고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시오?”

“난 일단 괜찮네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나. 자넨 이제 어쩌려고?”

“별 일이야 있겠소? 보아하니 영주도 내놓은 자식놈인데. 뭐, 별 일 있으면 튀면 그만이오. 떠돌이의 장점이지.”


아슬란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어쩌다보니 나도 휘말려버린 것 같은데, 지금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소?”


노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미 일은 벌어졌다는 걸 깨닫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나지막이 그동안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내 아들은 대장장이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었어. 자질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걸 부끄럽게 생각했지. 내 보기엔 그만하면 되었다 생각했지만 본인 생각엔 아쉬운 게 많았던 모양이야.”


아슬란은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아까 모루 위에 걸터 앉아있던 중년 남자가 아마 노인의 아들이었을 것인데, 그도 아슬란의 눈으로 보기엔 꽤 장인처럼 보이는 면모가 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이런저런 일을 하며 어디선가 색시도 데려오고 손자도 안겨주고 하더군. 난 그 녀석이 그렇게 잘 살아가니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네. 대장장이 일이야 하려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이어나갈 사람 찾는 건 어렵지 않았으니까.”


여인들과 악사, 무희들은 자신들이 여기 있어서 득될 게 없다고 생각하는지 눈치를 슬쩍 보더니 문을 통해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슬란은 물론 노인도 그들을 굳이 붙잡아 놓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대로 두었다.

우르르, 발소리가 나는 가운데 노인이 계속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누군가 대장간에 찾아왔더군. 눈에다 뭘 칭칭 감고 온 남자였어. 안델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이름이었지.”

“그게 저 영주의 덜 떨어진 아들놈이었군.”

“정확히는 영주의 서자라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짓들을 벌이고 성에서 내쫓겼지만.”


아슬란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불려온 건달들은 자기들이 뭘 해야하는지 묻듯이 조금 떨어진 곳에 주르륵 서있었고, 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너희 형님, 숨이나 제대로 쉬는지 확인하고 있어라. 내가 묻기 전에 저놈 뒈지면 너희도 그 무덤 속에 산 채로 같이 파묻어 줄 테니까.”


야만인의 장담에 건달들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어깨를 떨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눈빛만 주고 받으며 시드릭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그냥 눈 한 번 뒤집어보고 죽지 말라고 기도만 하는 수준이라 손길들은 금방 멈췄다.


“대장간에 찾아온 놈은 대뜸 날더러 책임을 지라했네. 눈을 이렇게 만든 것이 내 아들이고 아들놈은 돈이 없으니 내가 배상을 해야할 것이라했어. 아니면 아들 녀석 눈을 똑같이 만들어주겠다고.”

“무슨 일로 그랬던 것이오?”

“···자기 부인을 희롱하는 놈을 참아줄 남자가 어디 있겠나. 주먹 한 번 날렸는데 그게 잘못 된 거야.”


그럴만 했다는 뜻으로 아슬란이 주억거렸다.

눈 하나로 끝난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내 아들은 차라리 놈을 죽이고 안델을 뜨겠다 했네.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낳은 자식이 셋이나 되었지. 난 평생 쇠만 두드린 놈이라 애들을 잘 키울 자신도 없었어. 물론 아들을 그렇게 방랑자로 만들기도 싫었고. 그래서 대장간에 와서 다시 일하게 된 걸세. 이래뵈도 벌이가 나쁘지 않은 일이라 그렇게 벌어서 배상을 해나가면 될 것 같았거든.”

“그 다음은 뻔하군.”


노인은 아슬란의 말이 맞다는듯 마른 세수를 했다.

좋은 의미로 뻔한 얘기가 아니어서였다.


“삼 년을 약속한 그날로부터 대장간을 찾는 손님이 확 줄었네. 뭘 어떻게 한 건진 몰라도 뒷골목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은 놈이라 그런 짓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테지. 덕분에 나머지는 빚이 되었고, 우린 정기적으로 칼든 건달들에게 위협을 받아야했어. 돈은 돈대로 뜯기면서 불안한 나날을 계속 보냈지.”


자신의 쩍쩍 갈라진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노인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푸, 하고 뱉었다.

이미 전의 일을 회상 중이었지만 더 먼 예전의 뭔가를 회상하는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까 꼬맹이가 말하길 약속 어쩌고 하던데.”

“아, 그거···. 만약 배상금과 빚, 거기에 대한 이자를 기한 내에 변제하지 못하면 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대장간. 그걸 내어놓으라는 거였지. 그 안에 있는 물건 하나까지 모두 다.”

“그건 너무 과한데.”

“···솔직히 대장간 정도라면 내어줄 수도 있네. 나야 여기서 끝나더라도 내 아들과 아이들은 다른 도시로 떠나든 해서 그 재주를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물건 중에 뭔가 있겠군.”


노인이 고개를 힘 없이 끄덕였다.


“대장간 한쪽 구석에 안 쓰는 모루가 하나 있네.”


아슬란은 기억을 더듬어 그 속에서 모루를 떠올릴 수 있었다.

검은빛에 영롱한 오색이 감도는 것이라 금방 생각이 났다.


“그건 내 아버님께서 여기로 이주해오시면서 가져온 물건일세. 훨씬 더 전의 선조께서 난쟁이 상인들에게서 고대의 물건을 구한 것이라는데, 제왕의 검을 벼려냈다는 모루라더군.”

“제왕? 그건 무슨 전설같은 거요?”

“먼 옛날 최고의 장인이 그 위에 놓고 만든 검이 고대 제국 황제의 검이 되었다고 했어. 검이 새로 만들어질 때마다 황제도 바뀌었다는 얘기가 있었지. 어쩌면 미신일 지도 모르지만 그런 이야기가 더해지면 가치는 더욱 치솟는 법 아닌가. 우리 가문이 무슨 대단한 귀족은 아니지만 그건 먼 선조로부터 내려온 가보일세. 도저히 넘겨줄 순 없었어. 그래서 오늘 같은 일을 벌이고 나도 죽어버리리라 결심했네. 앞으로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나 싶었지···. 그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만.”


노인은 씁쓸한 얼굴로 피식 웃고는 자신의 하나 남은 망치를, 그리고 쓰러져있는 시드릭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아까와 같은 불길은 없고 재가 되어 부스러진, 동력과 방향성을 잃은 회색빛이 있을 뿐이었다.

아슬란은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아슬란은 다음 순간 몸을 돌려 건달들에게로 다가갔다.

누군가 딸꾹질을 하자 건달들 전체가 화들짝 놀라서는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이제 자신들의 처분이 어찌될지 두렵다는 듯했다.


“숨 잘 쉬나?”

“···예. 아직은요.”

“아직은?”

“아, 아닙니다. 계속 앞으로도 잘 쉴 것 같습니다요···.”


아슬란이 슬쩍 보니 시드릭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뭔가 기회를 노리고 단검을 찾아 꼼지락거리던 손이 갑자기 우뚝 멈췄다.


“···새끼.”


피식 거린 아슬란은 건달들을 대충 밀치고 시드릭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때문에 허공에서 반쯤 뜬 그는 기절한척 목을 축 늘어트리다가 괜히 뺨만 한 대 더 얻어맞았다.

이번에는 그리 세게 치지 않아서 그는 컥컥, 기침 몇 번 하는 걸로 눈을 번쩍 뜨게 되었다.


“끄으···.”

“넌 뭐 할 말 없냐? 살려달라든가, 네가 평소 많이 들어봤던 그런 말들.”


시드릭은 잠시 더 머뭇거리다가 이내 버둥거리며 자신의 다리로 땅을 딛고 일어섰다.

얼굴 한쪽이 얻어터져서 퉁퉁 부어올라있는 모습이 전체적으로 못생긴 생선을 보는 것 같았다.


“···내게 이렇게 굴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나.”

“방금 건 창의적이었어. 그만한 패기로 좀 더 싸웠으면 그럴 듯 했을 것 같은데.”


시드릭은 아슬란을 올려다보았다가 그의 시커멓게 그늘진 얼굴을 보고 순간 눈을 내리 깔았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도저히 인간 대 인간으로 비벼볼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괜한 말을 해서 목숨을 단축하고 싶지 않았다.


“널 어디다 파묻어버리면 영주가 날 찾아서 죽이려고 할까?”

“···한낱 대장장이도 자기 아들을 위해 목숨을 건다. 귀족은 뭐 괴물인 줄 아나?”

“그게 버린 자식이라도?”


그때 시드릭이 비웃는 것처럼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렸다가 표정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여전히 잡혀있은 멱살이 진지한 표정과 합쳐져 그저 우스꽝스러운 꼴 밖엔 안 되었다.

건달들 몇몇이 이를 악 물고 고개를 떨궜다.

그걸 본 시드릭이 시뻘건 얼굴로 말했다.


“···이건 좀 놓고 말하면 안 되나? 부하들이 보고 있다.”

“반대쪽도 터지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가.”

“···사양하지.”


시드릭은 아슬란의 눈길을 피하면서 말했다.


“···아까 버린 자식이라고 했었나? 그래, 보다시피 난 당장은 이런 처지야. 뒷골목 건달일 뿐이지. 하지만 결국 아버지도 날 찾게 될 것이다.”

“무슨 자신감이냐?”

“자신감이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거다. 조엘 공자는 영영 못 일어날 테니까.”


아슬란은 잡고 있던 멱살을 내팽개치듯이 툭 놓아버렸다.

해방된 시드릭이 이제 좀 살겠다는듯 숨을 들이쉬었다.

그 숨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까 엉엉 울던 어떤 꼬맹이가 생각나는 호흡이었다.


“더 자세히.”

“내 아버지, 그러니까 안델의 영주에게는 아들이 둘 뿐이다. 거의 십 년 째 혼수 상태인 조엘 공자. 그리고 나. 그러니 후계를 물려받을 사람이 누구겠나?”

“혼수 상태?”

“···아주 오래된 일이지. 공자는 어릴 때부터 앓았던 이름 모를 병때문에 종종 발작을 일으켰다. 그게 성인이 되면서는 더 심해졌어. 온갖 사제며 마법사와 돌팔이들이 와서 들여다봤지만 원인도 못 찾았지. 내 보기엔 무슨 저주 같더라만···.”

“저주? 왜 그렇게 생각하지?”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공자의 눈 속에선 시퍼런 게 꿈틀거렸다. 그런 상태로 자기 혼자 무슨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사방을 뛰어다녔어. 그 정도면 병이라고 해도 저주나 다름 없지 않나?”


아슬란이 뚱하니 서있자 그걸 놀란 신호로 이해했는지 시드릭이 다시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이 방금 안델의 영주가 될 사람에게 저지른 행동을 돌아보라고 말하는 듯했다.


물론 아슬란은 그딴 거 신경 안 썼다.

이 금쪽이의 골통을 지금 으깨버리면 후계자는 혼수상태 공자가 되든 가문 어딘가에서 데려온 양자가 되든 할 것이었다.

만약 시드릭이 조금만 더 띠껍게 굴었으면 그는 정말로 그렇게 안델의 후계구도에 유의미한 획을 그어버릴 수도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럴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드릭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그의 수명을 당분간 연장시켜줄만한 발언이었다.

눈 속에서 뭔가 시퍼런 게 꿈틀거린다는 말, 그런 건 이땅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얘기였다.


그러나 아슬란은 마침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그런 눈을 딱 하나 알고 있었다.

거울 속에서 이따금씩 보이는 야만인, 자신의 눈동자였다.


아슬란의 검은 눈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시드릭은 뭐에 찔린 것처럼 움찔했다.

그러고는 자기도 모르게 슬슬 뒷걸음질 치려는데, 아슬란이 성큼 다가가 그 멱살을 잡았다.


“만날 방법이 있나?”

“누, 누굴?”

“조엘 공자. 네 이복 형제.”


작가의말

내용상 분량이 좀 넘쳤네요. 주말에는 연참도 한 번 노려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다크판타지 속 야만전사로 살아가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중단에 대한 사과 말씀 24.06.02 23 0 -
14 13화. 용살자 오크(1) 24.06.01 55 2 13쪽
13 12화. 좋은 요정은 없다(3) 24.05.31 66 4 12쪽
12 11화. 좋은 요정은 없다(2) 24.05.30 76 7 11쪽
11 10화. 좋은 요정은 없다(1) +1 24.05.29 92 5 12쪽
10 9화. 모루의 주인(7) +1 24.05.28 87 10 14쪽
9 8화. 모루의 주인(6) 24.05.27 88 6 14쪽
8 7화. 모루의 주인(5) 24.05.26 88 5 13쪽
7 6화. 모루의 주인(4) 24.05.26 97 7 14쪽
» 5화. 모루의 주인(3) +1 24.05.24 111 9 18쪽
5 4화. 모루의 주인(2) +1 24.05.23 114 9 14쪽
4 3화. 모루의 주인(1) +1 24.05.22 120 8 14쪽
3 2화. 흑(화한)마법사 24.05.21 138 10 13쪽
2 1화. 환생자 24.05.20 164 8 14쪽
1 프롤로그 24.05.20 195 7 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