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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필연 님의 서재입니다.

다크판타지 속 야만전사로 살아가기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공모전참가작

조필연
작품등록일 :
2024.05.20 20:59
최근연재일 :
2024.06.01 23:54
연재수 :
14 회
조회수 :
1,497
추천수 :
97
글자수 :
80,952

작성
24.05.29 20:31
조회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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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2쪽

10화. 좋은 요정은 없다(1)

DUMMY

해가 완전히 뜨려면 아직 한참이나 더 남은 새벽이었다.

푸른빛으로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 아래, 온 세상은 아직 희미한 윤곽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어둠에 구애받지 않는 여행자는 장작을 더 넣을 생각도 없이 그저 깜빡거리는 모닥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회색 재와 검게 타들어가는 나뭇가지와 위태롭게 흔들리는 작은 불꽃.

불꽃 속에서 뚜렷한 안광을 번뜩이는 노란 눈. 파충류의 무감정한 눈.


아슬란은 눈 앞에 나타난 현상과 내면의 눈에 비친 상을 겹쳐 보았다.

조엘의 몸 속에 들어있던 여인의 영혼이 그 노란 파충류의 눈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비참하게 죽도록 만든 자를 찾아내 복수해달라는 듯, 여인은 처량하게 울었다.


물론 그건 아슬란의 감상일뿐 실제로 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가 가진 능력으로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녀가 생에 겪은 일들의 일부와 마지막으로 느꼈던 감정의 파편 뿐이었다.


그리고 멍때림을 끝낸 그는 흙을 끌어모아 모닥불에 확 던져버렸다.

점멸하던 불꽃이 꺼지고 하얀 연기가 어지러이 피어나는 가운데, 그가 말했다.


“나와.”


다음 순간 아슬란의 눈에 보인 것은 시커먼 누더기를 걸친 존재들이었다.

나무 뒤에서도, 바위 위에서도 누더기를 걸친 그 무언가들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슬란도 스르륵 일어섰다.


인간인지 요정인지 아니면 오크나 난쟁이인지도 불분명한 존재들은 이제 기척을 숨길 필요 없다는듯 그르륵, 목 울림 소리를 내며 무방비한 여행자를 노려보았다.

고약한 냄새와 뒤집어쓴 누더기, 그 속의 누런 안광.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그들의 의도는 분명했다.


“밑도 끝도 없이 싸우자는 거군.”


아슬란은 자신을 포위하고선 존재들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가락을 까딱 오므려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그가 피식 웃었다.


“그래, 시작하자고.”


누더기들은 크아악 하는 괴성을 내뱉으며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제왕의 모루에서 벼려낸 새로운 검, 아슬란은 단숨에 그 검을 뽑음과 동시에 앞으로 몸을 날려 한놈을 베었다.

잘려나간 머리가 허공에서 빙글 회전하는 동안 그의 몸도 달려간 힘 그대로 한바퀴 굴렀다.


몰개념한 돌진 후 저희들끼리 얽힌 누더기들이 서로를 밀쳐내며 눈을 돌렸다.

아슬란은 등을 보이고 숙였던 자세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고개돌렸다.

누렇게 번들거리는 눈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로로 갈라진 동공들이 기이하게 흐물거렸다.


아슬란이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그때였다.


“···그거 주문인가?”


누더기 중 누구도 대답하는 놈은 없었다.

딱히 대답을 원하진 않았던 아슬란도 다시 검을 휘둘렀다.

사각으로 돌아 기습해온 놈을 향해서였다.


누더기는 두 손을 내밀어 아슬란을 붙잡으려다가 어깨부터 복부까지 갈라지는 상처를 얻었다.

바닥에 철푸덕 떨어진 시체가 몸을 조금 움찔거리다 축 늘어졌다.


이내 다른 누더기들도 작전이 실패했기 때문인지 카악, 하는 거친 소리들을 내며 달려들었다.

적의 수가 거의 열 배쯤 되었지만 아슬란은 그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쪽을 택했다.

놈들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너무 형편 없어서였다.


아슬란은 맨 앞 누더기의 이마에 검을 꽂아넣고는 순식간에 왼쪽의 누더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바깥으로 짧게 내지른 돌같은 주먹이 한놈의 안면을 으깨고 걸쭉한 피를 묻혔다.

찐득한 느낌에 흘긋 쳐다보니 덩어리같은 질감에 색깔은 거의 검은색에 가까웠다.


아슬란은 마법에 대한 지식이 조금 더 깊었다면 더 많은 걸 알아냈으리라 생각하며 미간을 좁혔다.

누더기 하나가 문드러진 얼굴을 들이밀어 이빨로 자신을 물어뜯으려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왼주먹을 회수한 그는 반대편의 누더기에게도 한 주먹 꽂아주었다.

이빨이 빠작 부서지고 안면이 함몰된 놈은 그대로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리고 곧장 이마에 박혀있던 검을 쑥 끌어당긴 그는 오른쪽으로 검을 휘둘러 한놈의 허리를 반쯤 끊어놓고 그 힘 그대로 다시 한놈의 가슴을 꿰뚫었다.

벌써 절반에 가까운 누더기들이 바닥에 엎어졌다.

놈들이 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아슬란은 곧장 달려가 누더기들을 전부 썰어버리는 대신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어쩌면 그들을 조종하는 마법사나 멀리서도 위협이 될 만한 존재가 있을지 몰랐다.


순간 그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감각이 닿는 곳은 희미했던 윤곽 아래 숨겼던 그 모습을 모조리 드러냈다.

풀 한 포기의 흔들림과 숨 죽인 채 지켜보는 작은 짐승들조차 그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그때 누더기 하나가 크악, 소리 내며 달려들었다.

처음보다 훨씬 빠르고 강한 기세였기에 잠깐이지만 허공을 날아오는 모습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것이 주문의 힘임을 확신한 아슬란은 침착하게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확보한 공간으로 검을 찔러넣었다.

단단한 자세와 정확한 속력, 그리고 타점.

포물선을 그리며 머리 위쯤에서 내려꽂히던 누더기는 턱이 꿰이는 순간까지 손을 휙휙 젓다가 그대로 철푸덕 떨어졌다.

턱부터 뇌까지 구멍이 난 시체가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다가 이내 늘어졌다.


아슬란은 검을 빼내어 허공에 두어번 휘둘렀다.

검은 덩어리들이 투둑 떨어지며 고약하게 썩는 냄새를 풍겼다.


누더기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대로 멈춰서서 아슬란을 응시했다.

누렇고 무감정한 눈빛들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왜. 당황스럽나?”


누더기들이 아니라 그 건너편에 있을 마법사를 향해 질문한 아슬란은 양손으로 검을 고쳐잡았다.

그때 누더기 하나의 입이 느리게 열리더니 찢어질듯 거친 음성이 튀어나왔다.


“···누··· 구···.”

“내가 누구냐고? 누굴 것 같은데?”


정말로 답을 생각하는 중인지 누더기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던 놈이 다시 그대로 아슬란을 가리켰다.


“···죽, 음···.”


말끝을 흐린 놈과 다른 누더기들이 땅을 박차고 일시에 날아들었다.

이젠 아예 육탄 공격으로 작전을 바꾼듯 거침 없는 태도였다.


밑도 끝도 없는 공격에 대화 거부라.

고개를 슬슬 저은 아슬란은 저 뒤편의 마법사를 만나면 일단 말하는 법부터 가르쳐야겠다 다짐했다.

이번엔 그도 앞으로 마주 달려나갔다.


누더기들의 무식한 육탄 공격은 빠르고 매서웠으나 내면의 영혼을 불태운 아슬란의 눈은 놈들의 움직임을 훤히 읽을 수 있었다.

달려가던 그가 어느 지점에서 순간적으로 뛰어올랐다.

허공에서 옆으로 빙글 회전하는 몸.

순간적으로 누더기 한 놈의 등을 바라본 자세로 그가 검을 내리쳤다.

서로 마주 달려가는 속력이 엄청났기에 찰나를 포착해야만 벌일 수 있는 기예였다.


곧이어 허공을 날아가던 놈 하나의 갈라진 허리에서 내장이 와락 쏟아졌다.

그렇게 쏟아진 내장들은 두 조각 난 몸이 떨어진 직후에 그 궤적을 따라 후드득 떨어져내렸다.

심한 악취를 풍기는 시커먼 내장들과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저만치 나뒹구는 누더기들.

아슬란이 본 광경이었다.


진즉에 자세를 바로 잡고 있던 그는 기다리지 않았다.

땅을 박차고 달려간 야만전사는 이제 막 뒤 돌아보는 누더기의 목을 쳤다.

배를 가르는 건 그만둬야겠다 싶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게 두 놈을 동시에 처리하기에 적절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두 개의 머리가 허공을 날자 이제 남은 것은 하나였다.

아슬란은 놈의 다리를 걷어차고 쓰러트린 뒤에 가볍게 목을 밟았다.

우드득 소리 한 번 내고 죽은 시체가 마지막으로 끄,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시체를 바라보던 아슬란은 그게 애초에 시체였음을, 그러니까 그를 만나기 훨씬 이전부터 죽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흘러나오는 영혼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기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그는 무심한 시선을 거두며 검을 휙휙 털어 찐득한 덩어리들을 흩뿌렸다.


“이거 너무 지저분한데.”


검을 들어 쭉 살펴본 그는 문득 어떤 장면을 생각했다.

대장장이 꼬맹이가 자신이 쓰던 검을 평가하던 순간이었다.

녀석의 말처럼 자신이 너무 무식하게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고개를 살살저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싸우는 방식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적도 없었고 큰 불만도 없었다.

판타지나 좋아하던 사무직 아저씨가 싸우는 법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가 쓰는 근본 없는 동작들은 모두 자신의 튼튼함과 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상상을 조금 더해 만든 것들이었다.

어릴적 가문에서 배운 격투술과 검술이 있긴 했지만 그건 너무 급조된 보여주기식이라 잊은지 오래였다.

백여 년 전만해도 말타고 머리 쪼개던 야만인들의 가문에 오래된 비전 검술 같은 게 있을 리 없었으니까.


물론 그정도만 해도 스스로의 생존을 장담하기엔 충분했다.

지금까지 가문을 나와 몇 년 방랑하면서 경험하기로, 그를 죽을 고비에 밀어넣은 상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아슬란은 그 위험들마저 칼로 베어내고 이 자리에 서있었다.

지금까지 그의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괴물은 자기자신이었다.


괴물 야만전사 아슬란은 이런저런 상념들을 금방 떨쳐버리고 냇가로 다가가 검을 대충 헹궜다.

배낭을 짊어지고 다시 걷기 시작한 것은 곧 도착할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싶다는 기대때문이었다.


* * *


“이런 덜떨어진···.”


마법사 길리엇은 테이블을 꽝 내려치며 반대쪽 손으로 들고 있던 포크를 툭 내려놓았다.

접시에 남아있던 양념이 조금 튀어 그의 옷자락에 묻었다.

그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약해빠진 부랑자놈들 시체를 가져다 쓰는 게 아니었어. 어디 건강한 병사들이라도 데려왔어야···.”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조종하던 시체들이 모조리 크게 상하면서 지배 주문이 해제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제기랄. 근데 병사들을 어떻게 신선한 시체로 만들어 가지고 나와? 애초에 성에 들어갈 방법도 없는데, 젠장.”


길리엇은 젠장, 젠장, 욕을 지껄이며 잔뜩 늘어놓았던 도구들을 가방에 주워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야만인이 지금 이 마을로 향하는 길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꾸물거리다 놈을 만나는 날엔 검을 들고 싸워야할 것이었다.

시체 지배 주문을 빼면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그가 저항할 방법은 그게 전부였다.


유리병과 책, 몇 가지 시약들을 죄 쓸어담은 그는 가방을 들고 문 밖으로 나섰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에 그의 발길이 멈췄다.


“잠깐. 주문으로 강화된 시체 열둘을 상대하는 전사라. 저놈 하나면 병사 열 명 보다 훨씬 나은 거 아닌가···.”


방금 전까지 두려움에 떨던 마법사는 어디갔는지, 그는 자신만의 망상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길리엇은 음험하게 웃으며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가방을 내려놓은 그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 * *


“···뭔데.”


마침내 마을에 도착한 아슬란은 마을 어귀에 우뚝 멈춰섰다.

보아하니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아 버려진 마을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 분명한.


아직 생전의 모습을 간직한 시체들과 거기서 흐른 피가 거의 시냇물처럼 흐르다 멈춰있었다.

아슬란은 그들에게 다가가 어떤 방식으로 죽은 것인지 살펴보다가 이내 고개를 살살저었다.

시체들 모두가 목이든 배든 연약한 부분 어디 하나는 뜯겨 죽어있었다.

자세히 보니 맹수의 이빨 자국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마을 안에서 뭔가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오감을 키워나가던 그때.

삐그덕,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나타난 것은 3미터쯤 되는 키에 비대한 덩치, 살이 전부 터져 진물이 질질 흐르는 괴인이었다.


아슬란은 곧바로 괴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저기 어딘가에 숨어 있는 인기척, 새벽에 만난 시체부대의 주인이 이 마을에 있다는 것도.


“마법사 영혼은 처음이지 아마.”


약간 섬뜩한 미소를 지은 그가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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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연재 중단에 대한 사과 말씀 24.06.02 24 0 -
14 13화. 용살자 오크(1) 24.06.01 55 2 13쪽
13 12화. 좋은 요정은 없다(3) 24.05.31 66 4 12쪽
12 11화. 좋은 요정은 없다(2) 24.05.30 77 7 11쪽
» 10화. 좋은 요정은 없다(1) +1 24.05.29 93 5 12쪽
10 9화. 모루의 주인(7) +1 24.05.28 87 10 14쪽
9 8화. 모루의 주인(6) 24.05.27 89 6 14쪽
8 7화. 모루의 주인(5) 24.05.26 88 5 13쪽
7 6화. 모루의 주인(4) 24.05.26 97 7 14쪽
6 5화. 모루의 주인(3) +1 24.05.24 112 9 18쪽
5 4화. 모루의 주인(2) +1 24.05.23 114 9 14쪽
4 3화. 모루의 주인(1) +1 24.05.22 120 8 14쪽
3 2화. 흑(화한)마법사 24.05.21 138 10 13쪽
2 1화. 환생자 24.05.20 164 8 14쪽
1 프롤로그 24.05.20 196 7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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