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 꽃집 주인은 소문에 밝다
그리니언은 근처 가게에서 과일을 조금 산 뒤 바로 목적지로 가려했지만, 예상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고 말았다. 과일 가게 주인으로부터 상으로 사과를 받은 심부름 잘하는 아이가 사실은 대륙에 20명 남짓밖에 없는 A급 용병이자 35살의 중년이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과일 가게 주인의 서비스는 고스란히 그의 입에 쳐박혔다. 호의나 선의가 무례가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법이다.
"어디서 또 한바탕 하고 오신겁니까?"
얼굴 한가득 짜증이 담긴 그리니언의 얼굴을 보며 꽃집의 주인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니언은 그 모습에 한층 더 화가 났지만, 이미 과일가게에서 경찰들과 한바탕 실랑이를 하고 온 탓에 한번 더 드잡이질을 할 기력은 없었다.
"누가 보면 내가 틈만 나면 싸움이나 하고다니는 어린앤 줄 알겠군. 이거나 받아라."
그리니언으로부터 과일이 가득 담긴 종이봉투를 받은 꽃집 주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선물을 다 사오시고..."
"어른이 주면 감사합니다하고 받을 것이지 말이 많아! 싫으면 도로 내놔!"
그리니언은 결국 짜증이 한 가득 담긴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꽃집 주인은 그 모습에 재빨리 과일들을 카운터 안쪽에 뒀다.
"아니 아니. 감사하게 받기야 하겠지만, 아무 이유없이 이런 일 하실 분이 아니잖습니까."
꽃집 주인의 말에 정곡을 찔렸다는듯 잠시 멈칫한 그리니언은 겸연쩍은듯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뭐, 별건 아니고. 내 대신에 의뢰 하나만 맡아줘. 루브린 외곽에 있는 라스베트라는 여관 알지?"
꽃집 주인은 뜬금없는 그리니언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에? 라스베트요? 알고 말고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유명한 곳이니까요."
라스베트는 생긴지 1년 남짓된 여관이지만, 규모가 작은데도 꼼꼼하고 철저한 방 관리와 서비스 덕분에 좋은 소문이 났던 곳이었다. 특히나 서쪽 평원과 가까운 위치와 값싼 숙박료 때문에 루브린을 찾는 용병들이나 파견 나온 군인들 사이에선 예약 1순위 여관이 되었다.
'물론 괴물들이 머무는 레어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지.'
값싸고 질 좋은 여관이라는 소문의 뒤에는 라스베트의 단골 손님들에 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 역시 돌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는 사실여부가 판명된 붉은 공학자 레드럼이나 자유용병 그리니언 외에도 유희를 나온 마족들이 쉬었다 간다는 둥, 용사일행들이 서신을 통해 몰래 예약을 했다는 둥, 모험가 카쉬르를 봤다는 둥 터무니 없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단순히 위험인물들이 단골이라는 소문 외에도 눈앞에 있는 그리니언은 서쪽 평원의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해 라스베트에 묵으러 온 타지의 A급 용병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은 것을 빌미로 아예 재기불능을 만들어 버렸다. 덕분에 라스베트에는 괴물들이 산다는 소문이 용병들을 비롯해 루브린의 주민들에게 까지 퍼졌다.
정작 당사자인 그리니언은 그런 사실에는 흥미가 없는지 라스베트를 안다는 꽃집 주인의 말에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거기 주인장이 뭔가 일이 있는 모양인데, 나는 지금 다른 의뢰를 받은 상태라서 도와줄 수가 없거든. 자네가 대신 좀 해줘."
"무슨 의룁니까?"
"나도 모르겠다...라고 말하면 흥미가 좀 생기나?"
"충분하네요."
"아마 꽤 어려운 의뢰일 거야.그 수완 좋은 주인장이 혼자서 처리를 못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지."
그리니언의 말에 꽃집 주인은 의외라는 듯 질문을 던졌다.
"꽤 높게 평가하시나보군요?"
"접객이라는 게 그냥 무턱대고 할 수 있는게 아니거든. 더구나 그 여관은 유독 까탈스러운 손님이 많이 오니까 말이야."
"하긴. 매일같이 레드럼씨가 꽃을 사러왔다면 아마 저도 장사를 접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나도 의뢰인들이 죄다 레드럼 같았으면 용병 때려치고 농사 지으러 갔을거다. 아무튼 오늘 내일 중으로 라스베트로 찾아가서 내 이름을 대고 설명을 들으면 된다."
"제 의사는 듣지도 않으시고 벌써 하는 걸로 결정입니까?"
"네놈이 이런 건수를 듣고 그냥 지나칠 놈이었으면 부탁하러 오지도 않았어!"
"뭐, 일단 만나는 보도록 하죠. 그나저나 보수는....?"
"과일 사왔잖아."
"에이. 어려운 일일 거라고 그렇게 바람을 잡으셨으면서 과일로 퉁치시려는 겁니까?"
능글맞은 꽃집 주인의 말을 듣던 그리니언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에휴...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면 따로 보수를 챙겨줬겠지만. 아니 애초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면 네놈한테 부탁할 일도 없었겠지. 어쨌든 내가 바보도 아니고 이런 일에 환장하는 네놈한테 굳이 돈까지 줘가며 부탁할 이유가 없지 않겠냐?"
꽃집 주인은 그리니언의 말을 듣고는 쳇 하고 아쉬운 듯한 행동을 취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기대감이 가득했다.
"하여간 마족이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이해하기가 어렵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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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꽃집 주인과 대화를 마친 그리니언은 라스베트로 돌아가기 위해 걸어가던 중 자신을 향해 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하늘색 머리의 남자를 마주쳤다.
"응? 누구신지?"
"특수사건 전담반 소속 시안 경위입니다! 오늘자로 서쪽 정찰대로 파견을 명 받았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리니언은 상대의 소개를 듣고 다시 심드렁한 표정이 됐다.
"특경인가? 따로 지원 필요없다고 이미 말했던 것 같은데. 어중이 떠중이들이 아무리 늘어봐야 별 도움이 안되거든."
"지난 번에 대장님께 실수를 범했던 인원들은 전원 근신처분을 받았습니다. 원래부터 자질에 문제가 있던 인원들이라...저는 이번에 강경파 마족들의 움직임이 포착됐다는 보고를 받고 새로 파견됐습니다."
"아이고...어차피 그놈이 그놈인데 뭘... 뭐, 의뢰인이 어떻게 해서든 감시역을 붙이고 싶은 모양이니 일단 알겠다."
그리니언은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
"...? 뭐야. 이제 갈 길 가봐. 서쪽 평원 들어갈 때 연락할 테니까."
그리니언은 자신의 길을 막은 채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시안에게 말했다.
"저기 대장님?"
"왜? 미리 말해두겠는데 서쪽 평원 들어가기 전에는 개별 행동이다."
"아뇨. 그게 아니라..."
한참 그리니언의 앞에서 우물쭈물거리던 시안은 이윽고 섬뜩한 눈으로 말했다.
"방금 전에 이야기 나누시던 꽃집 주인 마족인 것 같은데 그냥 둬도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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