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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생인
작품등록일 :
2020.04.20 13:32
최근연재일 :
2020.11.15 01:34
연재수 :
4 회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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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0
글자수 :
13,822

작성
20.11.15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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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비극을 좋아하는 소설가 A의 이야기

DUMMY

‘하필이면 이런 역할을 맡게 되서는.’


그녀는 투덜댔다.


‘쉬워도 너무 쉽잖아. 이래서는...’


그녀는 앞서가는 일행들을 그늘진 눈으로 훑었다.


‘등장인물들이 엉망진창으로 구르는 걸 볼 수가 없는데.’


*


그녀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했다. 좀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등장인물들이 절망과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이야기를 쓰는 것을 즐겼다.


‘좀 더. 절망스럽게, 고통스럽게. 비극적으로! 좋아, 좋아.’


그녀는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가 이번에 써 내려가는 것은 풋내기 용사 일행에 관한 이야기였다.

물론, 그녀의 취향에 따라 등장인물들은 진창에 처박혀 구르고 있었다. 풀 한 포기 뽑지 못하던 상냥한 왕자는 마왕성에 다다를수록 사이코패스가 되어 가고 있었고, 저주술사는 반작용으로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온실 속의 화초나 다름없던 왕자를 대신해 검을 들던 왕자의 충직한 수하와 성직자는 거듭되는 상처의 전이와 치료로 인해 온몸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환각통에 무너져 내려가고 있었다.


‘아. 개운해.’


그녀는 등장인물들을 진창에 처박으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등장인물들이 더욱 괴로워할수록, 고통에 겨워할수록 그녀가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더욱 강해졌다.


‘오늘도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뿌듯해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에 걸고 잠자리로 향했다.


*


‘....어?’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익숙한 천장이 아니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시뻘겋고 시커먼 하늘.

내가 꿈을 꾸는 건가? 그녀는 눈을 비비고 다시 눈을 끔뻑거렸지만, 여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강렬한 색감의 하늘뿐이었다.


- 벌떡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소년이 걱정스레 물어온다.


“괜찮으신가요? 마법사님.”


‘마법사?’


그녀는 일그러진 얼굴로 눈앞의 사람을 찬찬히 살폈다. 아무런 색도 섞이지 않은 순백의 고수머리와 옅은 회색빛 눈동자, 하얀 피부까지. 인간 도화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하얀 소년을 보고 그녀는 눈가를 찡그렸다.


‘...성직..자?’


그랬다. 눈앞의 소년은 그녀가 묘사한 그대로의 외양을 가지고 있었던 거다.


‘아직도 꿈인가.’


그녀는 자기 뺨을 세게 꼬집었다. 뺨이 몹시 욱신거렸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성직자는 더욱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괜찮지 않으신가요? 어디가 아프신지 말씀을 해주시면 제가,”


“아. 마법사님께서 깨어나셨나요?”


“마, 마법사, 님께서... 깨어나셨어요?”


“.....”


새까만 긴 머리와 긴 머리칼의 왜소한 몸집의 소녀와 짧은 검은색 머리칼의 다부진 몸집의 사내, 유약한 인상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그녀의 안위를 물어왔다.


‘개꿈인가?’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까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데굴데굴 굴렸던 등장인물들이 눈앞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왜? 난 단 한 번도 여기 들어오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괜찮으신가요?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요.”


굳은살 하나 없는 하얗고 부드러운 손이 머리를 쓸어 넘겨준다. 아주 잠깐 닿았지만, 그 손은 분명히 온기를 남기고 떨어졌다. 온기가 있는 손이었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손이었다.

...살아 있는 손이었다.


“하.”


그녀는 기가 막혔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모든 게 너무 쉬웠다. 그녀는 무료한 눈으로 스러지는 괴물들을 지켜보았다.


“마법사님! 남동쪽이에요!”


그녀는 무료한 얼굴로 돌아서 지팡이를 겨눴다.


‘시시해.’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서술한 마왕 토벌대의 구성 인원은 네 명이었다. 치유를 담당하는 성직자, 공격수 역할을 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왕자, 공격수 역할과 수비수 역할을 동시에 담당하는 왕자의 수하, 왕자의 수하를 지원하는 저주술사.

네 명 중 세 명은 실전경험 하나 없는 풋내기인데다, 그 세 명 중 하나는 초반엔 아무것도 못 하는 짐 덩어리나 다름없다.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조합이다.


‘내가 없었다면, 아마 내가 서술했던 대로 흘러갔겠지.’


그러나, 그녀가 끼어들고 나서 마왕 토벌대는 안정적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녀는 꽤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였기에 앞장서 공격하는 왕자의 수하를 안정적으로 지원하며 그가 처리하지 못하는 괴물들을 처치했고, 저주술사는 안정적으로 약한 저주들을 사용해 적들을 묶어놓았다. 안정적으로 괴물들의 숨통을 차례차례 끊어 나가자 모두 다칠 일이 줄어들었다. 상처를 입는다고 해도 생채기 정도의 경미한 부상이 전부였다. 상처를 치료할 일이 줄어들자 성직자는 힘을 보존할 수 있었고 남아도는 성력으로 모두에게 축복을 내려 주었다. 그러자, 모두는 힘을 얻어 더욱 다칠 일이 없어지고,


‘.....이게 뭐야.’


그녀는 일그러진 얼굴로 일행을 돌아보았다.

다들,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간 얼굴들이다.


‘뭐냐고.’


전투가 끝나자 일행은 서로의 공로를 치하하며 서로를 격려했다. 싸움에 참가하지 못한 유약한 왕자는 더 이상 모두에게 폐를 끼칠 수만은 없다며 앞으로는 자신도 싸움에 임하겠노라고 굳게 다짐한다.

훈훈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다. 역겨울 정도로.


‘난 이런 이야기를 보고 싶은 게 아니야!’


어디 갔는가? 절망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나의 사랑스러운 등장인물들은 어디로 갔는가?

식수와 식량을 두고 도망쳐 썩은 물을 마시고 괴물들의 냄새나는 사체를 뜯어먹던 원정대는 어디 갔는가? 저주에 잡아먹혀 마물과 비슷한 상태가 되어 버린 저주술사는? 환각통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자해하던 성직자와 자신의 주인을 비롯한 모두를 해치려 들던 왕자의 수하는? 미쳐가던 모두를 보며 자괴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피에 미쳐버린 왕자는?


그녀는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원래대로 되돌리면 이야기는 원래 흐름대로 돌아가겠지.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나만 없으면 돼.”


그녀는 검을 쥔 손을 늘어뜨린 왕자의 수하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피조물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영문을 모르는 순수한 눈동자였다.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깨끗한 눈동자.

그 깨끗한 눈동자에 피비린내 나는 비극을 새겨주고 싶었다.


그녀는 아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검을 쥔 그의 손을 단단히 붙잡아 망설임 없이 제 목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온몸을 꿰뚫는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만족감 때문이었다. 크게 벌어진 피조물의 갈색 눈동자,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더럽히는 핏줄기. 피를 꿀럭꿀럭 토해내며 그녀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와중에도 더럽혀진 피조물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그녀는 눈을 감았다.


*


“......?”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꿈이었나?’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번에도 보이는 것은 자신의 방 안이 아닌 낯선 공간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광장의 분수대.


‘왜 이런 곳에..?’


영문을 모르고 주변을 살피는 그녀의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제일 먼저 보인 건 환하게 웃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유약한 왕자, 그리고 시선이 옮겨간 곳에 있는 건, 충직하기 그지없는 그의 수하...


‘....아니.’


저런 인상이었나? 그녀는 새삼스레 그의 피조물을 다시 살폈다. 껑충하면서도 탄탄한, 전사다운 몸과 짧게 자른 새까만 머리카락. 여전히 그녀의 묘사 그대로였지만 그의 표정은 전과 달랐다.

무뚝뚝하지만 침착하고 따뜻하던 왕자의 수하는 거기 없었다. 그늘진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는 그녀가 알던 피조물이 아니었다.


“마지막 자리는 이분께서 채워 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래서였구나. 네가 그렇게까지 추천하는 사람이라니, 궁금한걸.”


유약한 왕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수족을 믿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왕자는 그녀가 알던 그대로였다. 더럽혀지기 전의 모습 그대로.

그녀는 시선을 옮겼다. 왕자의 수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새카만 시선으로 마주 보았다.


“.....그래서, 함께 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그녀는 왕자의 권유를 반쯤 흘려들으며 왕자의 수하를 노려보았다. 그의 피조물은 끝내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함께하지 못할 것 같군요.”


그녀는 꿈이든 환상이든 전에 되풀이했던 지루한 여정을 답습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죄송한 얼굴을 가장하며 뒤돌아서려 하자, 강한 힘에 손목이 붙들렸다.


- 덥석


그녀는 반강제로 뒤돌아서며 조금 끌려갔다. 왕자는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수하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함께하실 겁니다.”


“...나단?”


왕자가 당황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알아차릴 만큼, 눈앞의 피조물은 변칙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


“저와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단이 웃었다. 그는 상냥한 체하며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손목을 틀어쥔 손에는 아직도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하하. 그걸 잠깐, 잊었군요.”


흥미가 당겼다. 새겨진 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는 텅 빈 도화지가 아니었고 무엇인가 ‘채워진’ 상태였다.

그녀는 피조물이라는 도화지에 무엇이 새겨졌는지 궁금해졌다.


그녀는, 그녀의 피조물들을 향해 상냥한 척 웃어 보였다.


작가의말

2022.03.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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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극을 좋아하는 소설가 A의 이야기 20.11.15 32 0 10쪽
3 재앙을 불러오는 자 20.11.14 39 0 2쪽
2 15490번째 용사님 20.08.20 31 0 5쪽
1 멸망한 왕국의 마지막 왕 20.04.20 93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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