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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영태건

겨울 멈추는 곳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정상영태건
작품등록일 :
2022.09.27 14:39
최근연재일 :
2022.10.09 20:49
연재수 :
9 회
조회수 :
176
추천수 :
0
글자수 :
34,460

작성
22.10.08 18:52
조회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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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
7쪽

아룬달 호수에

DUMMY

“식량은 가지고 있느냐.”


고개를 젓는다.


잠시 후 식량을 담은 자루가 성문 밖으로 풀썩 던져진다. 고립된 성에서 나온 식량이다. 아마도 전선에 도착하기 전에 떨어질 것이었다. 소년은 자루에서 빵을 하나 꺼내 우물우물 씹으며 짐을 짊어진다.


“무기가 없소. 창 반 자루뿐이오.”


무기를 달라고 하자, 노인의 뒤를 지키고 서 있던 갑사가 웃음을 터뜨린다. 방금 전 목동을 활로 쏘려던 그 자다. 허나 노인은 웃지 않는다.


“...창이 부러지지 않았던들 너는 막지 못할 것이다. 만나면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다.”


그제야 어느 정도의 위험을 헤쳐야 하는지가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발각되면 바로 죽임 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간다. 그러나 이미 노예로 살아온 자는 죽을 일만 걱정하면 된다.


주변을 뒤져 장대 하나를 찾아온다. 그리고 보란 듯이 부러진 창에서 창날을 빼내 꼼꼼히 끼우고 맞춘다.


목동에게 제대로 된 무기를 주는 이는 없다. 알아서 챙겨야 하는 거다.


노인은 눈썹을 찌푸릴 뿐 말이 없다. 소년은 일어서서 창을 세워든다. 그래봤자 지팡이를 짚은 모양새일 뿐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지.


“호수는 어디에 있습니까.”


노인의 말문이 막힌다.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


“아룬달 호수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게냐.”


그걸 내가 알 리가 있냐 이 양반아.


“그렇습니다.”

“...”


수상쩍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대안이 없다.


“동쪽... 아니 이제 아침이 되었으니 해가 떠오르는 방향으로 걸어라. 눈이 달려있는 이상은 못 보고 지나칠 수 없을 게다. 호수에서부터는 북쪽이 어디인지 물어 찾아가라.”


인사하지 않고 돌아선다. 노인의 말이 던져진다.


“혹시 호수에서 시신을 찾게 되면... 길이 늦어져도 좋으니 잘 수습하도록 해라. 영주님의 따님이시다.”


영주의 딸이었나. 신분의 벽이 더욱 공고해진다. 피비린내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성벽처럼.


*


개활지를 피해 사람 시선이 닿지 않는 그늘만을 골라 걷는다. 사방을 주시하며 지나간다. 군복무 경험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느리고 불편하기는 해도 어쩔 수 없다. 야만인들이 다시 들이닥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지 않은 이상 성문도 열어주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소년에게 활이 겨눠졌을 때는 첩지를 버릴 생각까지 했지만, 그걸 가지고 있으면 어디선가 신분증 대신 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가지고 있기로 한다. 그러나 노인이 시킨 대로 북쪽 전선에 있다는 영주를 찾아갈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다.


걷는다. 왜 걸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계속 걷는다. 마치 원래 세상의 자영업자가 왜 사는지를 모르고 이제까지 살아온 것처럼.


소년은 방향성 없는 노력이란 그저 애잔하고 공허할 뿐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그렇지만 걷다보니 점점 마음은 평온해지고 몸은 따뜻해진다. 몸이 어리고 젊어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걷는다는 것이 원래 이렇게 좋은 것이었던지는 알 길이 없다.


자영업자는 목적 없이 움직이는 순간의 느낌을 오래 잊고 살았다.


못 보고 지나칠 수 없다는 노인의 말이 맞았다.


호수다. 햇빛을 머금은 호수는 커다란 호박 보석 같다. 지금까지 봐온 어느 저수지보다 더 넓고 맑다. 멀리 배를 띄우는 나루 비슷한 것까지 보인다. 혹시 육지로 들이친 바다가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하지만 민물이다. 물맛이 달다. 호수의 물을 들이켜던 중 자연히 사람이 빠져죽은 해자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같은 민물인데도 호수는 고요하고 홀로 천연덕스럽다.


멀리서 볼 때는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문제가 발견된다. 해가 정오를 넘긴 뒤까지도 계속 피어오르는 연기 줄기가 군데군데에서 나타난다.


간밤 가을 호수는 가장 아름다웠을 것이나 정오가 되어가는 지금 수변에는 시체들이 널려있다. 젊은 남녀의 죽은 몸들이 땅과 물 위에 널려 있는 거다.


그러고 보니 사건 현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호수의 물을 떠 목을 축인 목동의 속이 메슥거린다. 피와 죽음이 섞인 물이었다.


돛이 없어 노를 저어야만 몰 수 있는 자그마한 나룻배들이 여러 척 물 위에 떠 있다. 물론 화살과 말발굽도 어지러이 찍혀 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느라 시간이 걸린다. 적은 보이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과 잿더미 속에서 전날 밤의 일을 추론해본다.


마을과 같은 양상이다. 저항한 자들은 모두 조각이 났다. 목동이 입은 넝마쪼가리와는 달리 다들 잘 차려입은 채로 죽었다. 아마도 수확을 끝낸 뒤의 축제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선남선녀들이 만나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나룻배를 타고 호수 한 가운데로 노를 저어가 등불을 밝히고...


아 이런 시발 누구는 양새끼 한 마리 잃어버렸다고 개처럼 쳐 맞고 쫓겨났는데 이것들은 쪽쪽 빨고 만지고 더듬고 아주 난리도 아니...


아니. 아니지.


축제에 간다고 꺼내 입었던 가장 좋은 옷이 수의가 된 마당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소년을 부러워할 것이다.


여자들의 시체는 적다. 흔치 않다. 어딘가로 끌고 간 것이 아닐까. 간혹 죽어 넘어져 있는 여자들의 몸은 하나 같이 엉망으로 훼손돼있다. 특히 아랫도리가 집중적으로 망가져있다. 눈뜨고 보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얼굴만 봐야 해. 얼굴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신들 가운데서 낯익은 얼굴을 찾아낸다.


전생까지를 통틀어 본 것 중 가장 처참한 광경이다. 여자의 양 손바닥에 구멍을 뚫고 두 손을 밧줄에 꿰어 나무에 묶어 두고 오래 욕을 보인 모양이다. 여자는 죽은 뒤에도 놓여나지 못했다.


풀어줘야 해.


피를 빨아들여 검게 변색된 새끼줄을 창날로 자른다. 아무렇게나 벌려져 있는 두 다리를 오므려주려 하는데, 이미 사체는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져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체를 부러뜨릴까 겁이 나서다.


여자는 눈을 뜬 채로 죽었다.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눈을 감겨주는 일뿐이다. 양을 잃은 죄로 두들겨 맞던 목동에게 밥은 먹게 하라던 시녀의 코와 입에, 파리들이 무정히 날아들어 알을 낳고 있다.


그녀에게는 빵 하나를 빚졌다. 식량자루에서 빵을 하나 꺼내 입에 물려주고 고개 숙여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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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미녀냐 물개냐 22.10.09 8 0 10쪽
» 아룬달 호수에 22.10.08 11 0 7쪽
7 회색악마의 연기 22.10.07 15 0 10쪽
6 비밀의 동굴 은신처 22.10.06 15 0 10쪽
5 학대 받은 저녁식사 22.10.04 17 0 10쪽
4 선택 이후의 저녁식사 22.10.03 30 0 10쪽
3 늑대의 숲 22.10.02 22 0 10쪽
2 전생의 마지막 22.10.01 26 0 9쪽
1 영웅전 22.09.30 33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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