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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영태건

겨울 멈추는 곳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정상영태건
작품등록일 :
2022.09.27 14:39
최근연재일 :
2022.10.09 20:49
연재수 :
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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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4,460

작성
22.10.03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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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선택 이후의 저녁식사

DUMMY

목동의 딜레마는 첨예하다. 장대를 놓지 않는 한 덫을 풀 수 없고, 장대를 놓으면 늑대에게서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덫을 풀어주고 싶은 목동의 본심을 알 리 없는 늑대와, 늑대의 푸른 눈과 하얀 이빨에 물릴 것 같아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소년이 교착된다.


지구와 달처럼 맴돈다.


돌아나가자. 너무 위험해.


라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뒷걸음질을 치려던 목동이 움칫 멈춰 선다.


늑대의 배가 불룩하다. 그 때문이다.


새 생명을 품고 있는 것일까.


목동은 꿀꺽, 소리 나게 침을 삼켰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선택해야 할 순간이다.


늑대를 찌를 듯 들이대고 있던 장대를 거두어 보란 듯이 등 뒤로 던진다. 물론 멀리까지 집어던지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는다.


그러다 성큼 기습적으로 걸어 늑대의 등 뒤 방향으로 훌쩍 돌아들어간다. 늑대는 깜짝 놀라지만, 덫에 끼인 다리를 뒤틀면서까지 목동에게 달려들지는 않는다. 그만치 자존심이 약해져 있었던 탓은 아니었을까. 홀몸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수도.


떨리는 손이 불쑥 튀어나가 덫을 붙잡는다. 마치 덫이 손을 빨아들인 것 같기도 하다.


쩔꺽, 쩔꺽!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는 숲의 문턱. 아직은 겨울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도 두려움에 얼어붙은 손은 자꾸만 엇나간다. 마치 사로잡힌 풀벌레의 뒷다리처럼 자꾸 튕겨져 나간다.


무거운 덫은, 아예 늑대의 발목을 다 잘라먹으려는 듯 턱을 앙다문 채 열지 않는다. 어느덧 소년에게 들이대진 늑대아가리에서 나온 더운 김과 고약한 냄새가 목덜미에 끼얹어진다. 목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딱! 철컥!


덫이 풀린다. 개 짖는 소리가 뚝 멈춘다. 늑대가 놓여날 것을 감지한 개들이 먼저 도망친다. 개들이 도망치면서 양들도 흩어진다.


매애, 매애. 양들의 울음소리가 고요한 주변을 뒤흔든다.


무릎 꿇은 채 굳어버린 목동을, 자유를 얻은 늑대가 내려다본다. 파르스름한 맹수의 눈에서 무거운 빛이 쏟아져 나왔다.


뭔가 말하려는 듯한 눈이지만 늑대는 인간의 대화를 모른다. 무심히 소년에게서 등을 돌리더니 다친 한 다리를 들고 세 다리만으로 뛰어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다리가 완전히 풀려버린 소년은 풀 위에 주저앉아 긴 숨을 내쉰다. 마치 몇 년 치의 숨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사람처럼 헐떡이다가 아예 자리에 누워버린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목동에게 있어 늑대는 천적이나 다름없으니까.


사람들에게 가 알려야 했을까?


...죽여야 했을까.


때늦은 고민이 골을 두드린다.


알 수 없는 의지 때문에 저지른 일이었다. 그것이 두 목숨을 살렸다.


새끼들 중 귀엽지 않은 동물은 없는 법이라던데.


늑대의 새끼들은 어떤 모습일까. 철없는 상상도 해본다. 그러나 목동으로서는 앞으로 다시는 만날 일이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목동이 양들을 몰고 숲으로 들어갈 일은 없을 것이고, 다리를 다친 늑대 역시 예전처럼 들판을 달릴 수 없을 것이었다.


상처를 기억한다면 들판으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소년은 억지로 믿어보기로 한다. 그러다 겨우 누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자유를 얻은 늑대는 숲으로 돌아갔지만, 목동에게는 일이 남겨진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목동인 이상 일단 양들을 잘 간수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소리를 질러본다. 대답이 없다. 다시 고민하다가 휘파람을 불어본다. 개들이 반응을 보인다. 한 번 더 크게 길게. 개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던 양들을 몰아 한 군데로 모은다.


휴우. 긴 한숨이 터진다. 자영업자는 평생 양을 몰아보기는커녕 양고기 파는 가게 앞을 지나가본 적도 한 번 없었다.


양들을 몰고 가는 개의 뒤를 따른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니 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삼십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뭘 모를 때일수록 자연스럽게 처신하는 게 좋다. 비밀번호를 잊었을 때 습관의 힘을 믿고 손가락이 가는 대로 놔두는 것도 방법이 될 때가 있으니까.


멀리 성이 보인다. 성? 성이라니?


하지만 분명히 개들은 웅장한 성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가까워질수록 성의 디테일은 살아난다. 그러면서 그가 속해있던 세계와 현재의 세계 사이에 드리워진 현격한 차이가 드러난다.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오래 걷지 않아도 될 것 같지만, 그 전망이 영 다행스럽지가 않고 다시 새로운 걱정이 생긴다.


성문 앞에 창 들고 경계 서는 놈들이 과연 나를 안으로 들여보낼까? 암구호 같은 거 물어보면 어떡하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정말 이대로 가도 되는 건가? 개들 뒤를 좇아가고 있지만 꼭 누군가에게 쫓기는 기분이다.


전투를 위해 지은 실제 성이다. 자연석을 빈틈없이 짜 올린 성벽과, 그 위에 선 보초들이 보인다. 탁한 해자 물 위로 성문이 열려 누워있다.


문에 선 경비병들은 창을 비스듬히 세운 채 잡담을 하고 있다. 목동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무사통과시킨다. 그래도 훈련을 받은 놈들일 텐데 늘 이럴 것 같지는 않고... 잡담하느라 바쁘다. 약간 들떠 있는 느낌? 무슨 일일까.


개들이 목동의 일을 다 해준다. 양들은 무사히 우리로 들어가고, 개들도 집으로 들어간다. 성 안에 양들을 보관하는 곳이 있다니 이건 상상도 못했다. 비상식량이 필요해서일까?


목동과 검은 개가 덩그러니 남겨진다. 이 검은 개는 다른 개들보다 더 친밀한 관계인 것 같다. 이제 어떻게 하지?


배가 고프다. 음식 냄새.


어쨌든 성은 전투시설이니 한 집에 하나씩 주방이 있지는 않을 거다. 여러 사람의 음식을 한꺼번에 준비하는 큰 주방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는 뭔가 먹을 만한 게 있을 거다.


냄새를 따라간다.


다행히 예상이 잘 맞아떨어진다. 걷다보니 사람들이 줄을 서서 배식을 기다리고 있는 복도다. 여기 살짝 섞여 들어가서 밥을 타먹으면 될 것 같은데.


꽤 많은 사람들이 서 있다. 고흐가 생전에 그린 인물화에 나오는 사람들 같다. 옷과 넝마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것을 걸치고 있다. 다들 얼마 동안 씻지 않은 건지 고약한 냄새가 난다.


물론 목동의 옷도 그와 같다. 냄새도 비슷할 거다. 여기서의 신분을 대강 알 것 같다.


좀체 목동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고 같이 줄을 서려는 개 때문에 조금 눈치가 보인다. 그래도 사람들이 별 말 않는 걸 보면 이러는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닌 것 같다.


줄 맨 끝에는 커다란 솥과, 그 안에서 끓고 있는 음식이 있다. 어쩐지 주막집 주모 분위기가 나는 중년여자와 그 딸? 쯤으로 보이는 소녀 하나가 배식을 하고 있다.


줄 선 사람들에게 솥의 국 같은 걸 몇 국자 떠서 준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이어서 금방 목동의 차례가 된다.


주모 아줌마가 목동을 보더니 면박을 준다.


“그릇 어쨌어? 으이그...!


혼나고 보니 다들 자기 그릇을 들고 서 있다.


습관적으로 음식을 떠주려다가 하마터면 허공에 부을 뻔한 주근깨투성이 소녀도 목동에게 눈을 흘긴다.


“뭐해? 아 바빠 죽겠는데 진짜!”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해 보이는 말투와 행동이다. 하지만 눈알만 굴릴 수밖에 없다. 그릇이 어디 있는지 알 도리가 없으니까.


소녀는 나무로 된 깊은 접시와 숟가락을 던지듯 내민다. 목동을 아는 것 같다.


“언니 봐서 이번만 주는 거야?”


그 언니라는 게 누구냐고 묻고 싶지만,


“병신 같은 게 자기 그릇도 못 챙기고.”


라는 말에서 경멸이 묻어나온다. 거기에다 대고 뭐라고 말을 걸 만큼 마음 놓을 상황도 아니고 해서 그냥 대꾸도 못하고 사람들의 뒤를 따라간다.


그다지 넓지 않은 공간이 나온다. 거기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등받이도 없는 긴 의자에 사람들이 걸터앉아 밥을 먹고 있다. 그마저도 자리가 안 나면 서서 먹어야 하는 것 같다.


채광이 좋은 편이 아니다. 아직 해가 남아 있는데도 실내는 그보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여기는 중세인가? 그 이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LED 실내등이 그리워진다.


때 묻은 나무 접시와 나무 숟가락. 찬도 뭣도 없는 한 사발이다. 이걸 스튜라고 해야 하나 그냥 꿀꿀이죽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뜨거워서 하얀 김이 난다는 것 말고는 어떤 미덕도 없는 물질이 그릇 속에 들어있다.


자리가 나서 슬쩍 앉으려 하는데 먼저 앉아서 밥을 떠먹고 있던 젊은 놈이 소년의 옆구리에 발길질을 한다. 하마터면 엎을 뻔.


아 나 이런 십색기가? 허둥대는 소년에게 그놈이 다시 소릴 지른다.


“꺼져 이 병신 새끼야! 감히 어디를 기어들어와?”


‘병신 같은 게’에서 더 노골적인 ‘병신 새끼’가 된다.


같이 앉아있던 다른 놈들이 낄낄댄다. 한 놈쯤이야 들이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여러 놈이랑은 곤란하다. 물러날 수밖에 없다.


너 운 좋았다 새끼야.


하릴없이 다른 자리를 찾아 움직인다. 발에 채인 자리가 뻐근하다. 얼굴 봐 놨으니까 두고 보라고.


옆에는 더 늙고 추레해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있다. 다행히 소년을 발로 차지는 않는다. 맞은편에 앉은 노인이 목동의 얼굴을 보고 싱긋 웃는다. 남아있는 이가 몇 안 된다. 식사에 만족하고 있는 느낌이라 조금 섬뜩하다.


아는 사이인가? 어떻게 인사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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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늑대의 숲 22.10.02 22 0 10쪽
2 전생의 마지막 22.10.01 26 0 9쪽
1 영웅전 22.09.30 33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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