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먀이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 너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먀이
작품등록일 :
2018.01.22 02:17
최근연재일 :
2018.02.05 18:28
연재수 :
29 회
조회수 :
6,466
추천수 :
165
글자수 :
165,376

작성
18.01.24 14:18
조회
207
추천
7
글자
12쪽

5. 베일(1)

DUMMY

“마누엘! 잠깐, 잠깐만 기다려봐요.”


영주성을 목전에 두고 하린은 다급히 앞서가는 두 남자들을 붙잡았다. 영주성은 하린의 기대보다는 작았고, 하린이 본 어떤 집보다도 컸다. 말 그대로의 성이라기보단 저택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규모와는 무관하게, 하린에겐 이들을 저지해야할 이유가 있었다.


“왜 굳이 지금 들어가려는 거에요?”

“그야 시간이 없으니까요.”

“백작님이란 분 용건 끝나면 만나도 되지 않을까요?”


짐덩어리로 다니는 입장에서 두 사람의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걸 원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이른 아침 영주성으로 향하는 마누엘의 발걸음은 지나치게 가벼웠다. 게다가 백작이라면 잘은 몰라도 영주인 남작에겐 상사일텐데, 그런 분을 집으로 모시는 사람이 당일 아침 꾀죄죄한 나그네 셋을 친절하게 손님으로 먼저 받아줄 리도 없었다. 물론, 이러저러한 논리적 이유를 다 차치하고서라도, 하린은 웬만하면 높은 사람과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언제라고 생각해요?”


의뭉스런 마누엘의 질문에 맞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최소 나흘 뒤.”

“그건 너무···”

“최소한으로 잡은 거에요. 애플론 남작님께서 어떤 분인지 몰라도 모처럼 백작이 직접 방문하는 큰 행사인데 놓치고 싶지 않아할 거라서요. 백작이란 분도 그 이하의 대접을 받는다면 분명 모욕적이라 여길 테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누엘이 말을 끊더니 하린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무섭지 않았나요, 그 때?”


아이의 손을 통해 빠르게 식어가던 온기가 떠올랐다. 통제할 수 없이 널뛰는 감정과 내 것 같지 않았던 안타까움도 떠올랐다. 하린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먹힌 자는 절대 쉽게 죽지 않아요. 혼자가 아닐 수도 있구요.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가장 가까운 영지에 알리는 건 오스완 경같은 방랑기사의 의무고 다급한 사항이죠.”


곁에 서있던 오스완이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그는 극도로 과묵한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말해야할 때는 귀신같이 알아채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거절 당하면 뭐 어때요. 기껏해야 쫓아내는 정도 아니겠어요?”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마누엘의 미소 앞에서 더이상 ‘고관대작은 사양이라서요’ 따위의 변명을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나흘을 기다리기엔 두 사람도 전해야할 사안도 너무 급했으니까. 납득한 하린을 두고 마누엘이 다시 나섰다. 뒤에 서서 지켜보는 오스완 경을 보며 하린은 생각했다. 참 편한 인생이로다.

하린의 우려와는 달리 통과가 빨랐다. 대문을 지키던 기사-마누엘에 따르면, 영지 내 경비병은 대부분 기사였다-가 살짝 겁먹은 얼굴로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저렇게 무서워하는 소식 전하는 걸 말렸다니, 하린은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후, 머리가 하얗게 센 할아버지 한 분이 빠른 걸음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잘 세워진 셔츠깃과 반짝이는 구두를 보아하니 일반적인 고용인은 아닌 듯했다. 대문을 열고 세 일행을 맞이한 그는 자신을 집사 호턴이라고 소개했다.


“오스완이오.”

“스콰이어 마누엘입니다.”

“하린입니다.”


간략한 소개가 끝난 뒤 호턴은 셋을 응접실로 보이는 곳으로 안내했고, 발목께까지 내려오는 검은 원피스에 흰 앞치마를 두른 하녀 한 명이 간단한 다과와 티를 내어왔다. 귀족의 응접실이라 휘황찬란한 장식들을 기대했는데, 둘러보니 화려한 장식이라 할만한 건 벽난로 위에 걸려있는 날렵한 검 한 자루가 전부인 것 같았다. 신기한 마음에 열심히 구경하던 하린이 뒤로 돌아 자신이 들어온 입구로 시선을 옮긴 그 때, 하필이면 남작이 등장했다. 그녀는 그를 보지 못한 척 슬그머니 다시 앞을 보았고, 보지 못한 것인지 대화는 좋은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해서 남작님을 찾아뵙게 되었소.”


오스완 경의 설명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말을 다 듣고 난 남작은 손짓으로 호턴 집사를 불러 무어라 일을 시키는 듯했다. 그가 빠르게 물러나고, 남작이 살짝 식은 티로 목을 축이며 말했다.


“이번이 세 번째요.”


어쩐지, 이야기를 듣고도 허둥대는 기색이 없더라니. 하린은 이제 제 눈 앞에 흔들리지 않고 앉아있는 이 매부리코의 귀족이 적어도 흥청망청 나사 빠진 사람처럼 사는 것 같진 않다고 생각했다.


“1년여 전 먹힌 자 둘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지. 아니, 정확히는 반시체가 들어왔다고 해야하나. 죽여달라 애원하기에 목을 벴을 땐 이미 피도 흐르지 않더군.”


아이의 목을 베었을 때, 뜨거운 피 대신 찬 살점이 튀었던 것을 하린은 잊을 수가 없었다.


“누군지 결국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상태로 버텼다는 게 기적이었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이는 대로.”


남작이 돌연 왼팔을 들어보였다. 흰 장갑이 벗겨지자 하린은 그가 무슨 말을 했던 건지 이해했다.


“아직 약한 자들이었네. 내게 힘을 쓰면 다른 이들에겐 어찌할 수 없는 것 같았어. 이름이 하린이라고 했나? 경에게 감사하게. 조금만 늦었으면 나처럼 되었을 거야.”


둘보다 앞서나간 건 확실히 무모한 행동이었다. 두 사람이 다가서지 않는 데엔 그녀는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을 텐데도 그녀는 그들에게 성급하게 실망했다. 만난 첫날 목에 들이밀어진 칼날을 잊지 못해서였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불태웠었소. 뭐, 목을 베고도 살아남을 정도로 성장한 자는 아닌 것 같으니 다행이야.”

“그래도 유념하고 계시오.”

“물론. 나도 그렇게 느슨한 사람은 아니거든?”


첫인상부터 그랬지만, 하린은 이 사람이 깐깐하면 깐깐했지 절대 느슨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 알바하던 카페 사장님이 떠올랐으니까. 이목구비는 닮은 점이 한 톨도 없는데 괜히 연상된 걸 보면 어지간히도 사장님과 비슷한 성격인가보다 싶었다.

마누엘의 예상대로 남작은 하린에겐 일체 관심이 없었고, 오스완 경도 대화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만남은 짧게 끝났다. 남작은 ‘오늘 로터차일드 각하께서 오시는 날’임을 알리며 은근한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다 끝났구나 싶어 나갈 채비를 하는 셋의 앞으로 하녀 한 명이 다가왔다.


“점심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번엔 마누엘도 놀란 눈치였다. 오스완 경만이 여전히 목석같은 얼굴로 하녀의 안내에 따랐다.


“소식만 전해준 것 뿐인데, 원래 이렇게 해줘요?”


하녀가 나가고, 하린이 애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를 우물대며 물었다.


“애플론 남작님이 적어도 예의는 아시는 분이란 뜻이에요.”


마누엘도 예기치않은 호화로운 식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건 저도 알겠더라구요. 괜히 긴장했나봐요.”

“사정이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보면 남작령의 위험요소를 제거해주고 온 거잖아요, 우리가? 사례금을 받는 셈이죠. 다만 보통 영주들은 돈 조금 쥐어주고 보내요. 소식만 듣고 쫓아내는 경우도 다반사고. 바쁜 와중에 이 정도 식사를 준비해줄 줄은 저도 몰랐네요.”

“경 덕분에 입이 호강하네요.”


애피타이저를 다 비운 오스완의 시선이 하린에게 머물렀다가 마침 다음 요리를 내어오는 하녀에게로 돌아갔다. 하린은 언뜻 오스완의 입매가 올라간 것을 본 것 같았다. 설마 낯가림을 하나싶어 내심 웃었다.

메인부터 디저트까지 하린의 입맛엔 완벽했다. 지구에서도 몇 번 먹어보지 못했던 코스요리를 여기서 먹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커틀러리 사용이 능숙하네요.”


처음 맡는 향이 나는 차에 정신이 팔려있던 하린은 마누엘의 말에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가정 시간에 그럽디다, 바깥쪽 식기부터 쓴다면서요? 라고 이실직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정 시간은 고사하고, 여기 ‘중학교’라는 게 있는지부터가 미지수였으니까. 이럴 때 식기 사용 매너도 지구와 같을까 걱정하고 고심하며 행동했는데, 정작 그게 자신을 더욱 미심쩍은 인물로 몰아넣을 줄이야. 마누엘은 지나가는 말이었던 것처럼 금세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세 일행은 차까지 다 마시고 일어섰다. 막 바깥으로 나가려는 차에 한 여자가 그들을 불러세웠다.


“오스완 경! 맞으신가요?”

“맞소.”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붉은 머리를 한갈래로 땋은 여자였다. 정갈한 옷과 상반되게 내려온 짙은 다크서클을 보며, 하린은 이 여자가 이 저택 안에서 가장 바쁜 사람인 건 아닐까 추측했다.


“저는 에블린이라고 해요. 집사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에블린의 방, 혹은 사무실은 번잡했다. 미처 치우지 못했다며,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과하고 말을 이었다.


“이건 집사님 명령은 아니에요. 음, 말하자면 개인적 관심입니다.”

“무엇에 대한?”

“먹힌 자들이죠, 물론. 여러분께서는 그 이야기때문에 오지 않았나요?”


오스완 경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경이 그런 표정을 지었다면 엄청나게 관심이 있다는 뜻이라는 걸 이젠 하린도 알 수 있었다.


“조각사였소?”


조각사는 희귀하다더니. 하린은 처음 방문한 영지에서부터 보게 될 정도면 사실은 흔한 게 아닐까 싶어 마누엘을 쳐다봤다.


“제가 그렇게···이상해 보이셨나요.”


에블린이 울상을 지었다. 조각사는 특이하다고 했던 마누엘의 말을 떠올렸다. 특이하다는 게 그 힘만을 칭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조각사는 아니고 그냥 일개 문관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먹힌 자는 개인적 관심사구요.”

“그렇다면 윗사람에게 전해들어도 되지 않소?”

“그게, 제가 용건이 있는 건 저기 저 분이라서요.”


에블린이 가리킨 것은 하린이었다. 무슨 일인가 방관하고 있던 하린은 대화의 중심에 갑자기 끌려들어가자 살짝 당황했다.


“저요?”

“네. 괜찮을까요?”


왜 용건은 나에게 있는데 경을 보시나요. 하린은 속으로 투덜댔다. 아무래도 일행을 이끄는 사람이 경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긴, 방랑기사와 그의 종자와 역할을 알 수 없는 여자의 조합이라면 그럴 만도 했다.


“그 때 어땠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구체적으로 뭘 알려드리면 될까요?”

“그냥 다요. 생각나는 건 다 말씀해주세요.”


하린은 다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초점 없는 눈, 징그럽기보단 마음 아팠던 죽은 손, 내 아이···내 아이? 하린은 생각나는 키워드를 읊어가다가 놀라 멈췄다. 내 아이라니. 결혼도 안했는데 웬 내 아이란 말인가. 에블린이 확인하듯 아이는 없느냐 물었다. 하린은 당연히 극구 부인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책상 서랍을 열어 작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이거 보이세요?”


에블린이 가리킨 것은 책에 들어간 작은 삽화였다. 하린은 국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뗀석기 사료를 연상했다. 갑자기 역사 시간인가 의아해 조금 더 살펴보니 아래에 무어라 글씨가 쓰여있었다.


“모리엄의···조각? 조각이라는 게 진짜 조각이었나보네요, 비유가 아니고?”


이게 그 조각인가 싶어 고개를 드니 세 명의 시선이 이상하리만치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또 눈치없이 굴었구나, 하린은 직감했다.


“하린씨, 글 읽을 줄 알아요?”


마누엘과 오스완 경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10 23cm
    작성일
    18.02.11 17:51
    No. 1

    1, 2화의 패턴을 보았을 때 식사 대접하는 부분에서 수면제라도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틀렸네요! 소개글의 읽는 게 능력이라고 했던 부분이 나타나기 시작하나보네유. 점차 조각의 비밀을 찾아가는 것이려나요. 작가님이 말씀하시면 사소한 말조차 스포일러성 발언이 될 수 있으니 대답은 말아주세요! :)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나는 너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안녕하세요 글쓴이입니다 +2 18.02.09 136 0 -
29 28. 최고의 복수(7) +1 18.02.05 139 6 12쪽
28 27. 최고의 복수(6) +1 18.02.05 487 5 15쪽
27 26. 최고의 복수(5) +2 18.02.04 164 6 12쪽
26 25. 최고의 복수(4) +1 18.02.03 338 6 15쪽
25 24. 최고의 복수(3) +1 18.02.03 182 5 15쪽
24 23. 최고의 복수(2) +4 18.02.02 141 5 16쪽
23 22. 최고의 복수(1) +2 18.02.02 158 5 13쪽
22 21. 시간이 춤을 추는구나, 아가(6) +3 18.01.31 184 6 14쪽
21 20. 시간이 춤을 추는구나, 아가(5) 18.01.31 144 4 11쪽
20 19. 시간이 춤을 추는구나, 아가(4) 18.01.30 303 5 15쪽
19 18. 시간이 춤을 추는구나, 아가(3) +1 18.01.30 240 5 13쪽
18 17. 시간이 춤을 추는구나, 아가(2) +1 18.01.29 172 5 13쪽
17 16. 시간이 춤을 추는구나, 아가(1) +3 18.01.29 183 3 13쪽
16 15. 작은 일기(4) +1 18.01.29 147 4 10쪽
15 14. 작은 일기(3) +1 18.01.28 197 4 12쪽
14 13. 작은 일기(2) +1 18.01.28 168 5 11쪽
13 12. 작은 일기(1) +2 18.01.27 183 5 14쪽
12 11. 바퀴와 책과 부상병(5) 18.01.27 167 9 14쪽
11 10. 바퀴와 책과 부상병(4) 18.01.26 177 6 11쪽
10 9. 바퀴와 책과 부상병(3) +2 18.01.26 168 4 13쪽
9 8. 바퀴와 책과 부상병(2) 18.01.25 151 6 12쪽
8 7. 바퀴와 책과 부상병(1) +2 18.01.25 155 6 14쪽
7 6. 베일(2) +2 18.01.24 200 8 11쪽
» 5. 베일(1) +1 18.01.24 208 7 12쪽
5 4. 이방인(2) +3 18.01.24 472 7 14쪽
4 3. 이방인(1) +3 18.01.23 201 7 13쪽
3 2. 10월에 눈이 내리면(2) +1 18.01.23 240 6 12쪽
2 1. 10월에 눈이 내리면(1) +1 18.01.22 422 6 14쪽
1 서장 +1 18.01.22 371 9 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