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길성진 님의 서재입니다.

시퍼런 사과

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현대판타지

완결

길성진
작품등록일 :
2018.09.06 19:30
최근연재일 :
2018.09.13 19:29
연재수 :
37 회
조회수 :
2,230
추천수 :
4
글자수 :
231,732

작성
18.09.07 20:17
조회
36
추천
0
글자
20쪽

보이지 않는 균열(6화)

DUMMY

【03.보이지 않는 균열】

사거리의 한 가운데에서 먹구름으로 뒤덮힌 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서있자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삼수의 실패로 썩어가기만 하던 나날.

"그래······. 난······."

결국 그런 지쳐감에서 내가 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은,

"이미············ 죽은 거구나."

허탈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눈 앞에 펼쳐진 색깔은 온통 짙은 회색이었다.

내리는 비가 온 몸을 적시고 한방울 한방울에 체온이 깎여나간다.

도저히 여름답지 않은 추위였다.

그래. 마치 깊은 물에 뛰어내렸던 그때처럼. 시커멓고 차가운 물이 온 몸을 휘감는 듯한.

추위로 온 몸이 굳어간다. 그건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사실은 당장에라도 집으로 돌아가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핫초코를 마신 다음 따뜻한 이불속에서 책을 읽다가 잠들고 싶다.

그럼에도 난 가만히 선 채로, 계속해서 회색으로 가득찬 곳을 보고 있었다.

나와 똑같은 처지에 있었던 누군가가 불현듯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리라.

잿빛을 띤 구름은 평소보다 낮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건 길을 오갈때마다 봐왔던 공터와 비슷하게 보였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쓸데없이 넓다.

그 거대한 외로움속에서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는듯한 느낌.

그건 마치 그 날의 소녀가 느꼈을 외로움과 닮아서, 어디에 있는지 모를 그 아이와 조금이나마 이어지는 것만 같아서.

난 다리가 아파도, 감기에 걸릴 것 같아도, 계속해서 비를 맞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피로가 쌓였던 탓이었을까.

얼마못가 두꺼운 졸음이 쏟아져버리더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릎이 아파올 만큼 주저앉아 버린 난, 아스팔트의 옆에 눕듯이 쓰러져버렸다.

거칠고 딱딱한 아스팔트의 느낌은 익숙해질 것 같지가 않다.

눈꺼풀이 무겁게 감겨온다.



쓰러진 지 얼마나 지난지는 모른다.

스르륵 눈을 떴을 때에도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빗물에 시야가 흐릿하다. 정육면체의 모양으로 노란 빛이 번진다.

뒤늦게 그것이 신호등의 노란 빛이었다는 걸 알게됐다.

가운데 색이었던 신호등의 노란 빛이 곧 빨갛게 물들었다.

사거리의 가운데에 누워있던 난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서있던 탓에 다리가 아프고 조금 졸리다.

더이상은 비를 맞는 건 힘들 것 같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게 좋겠다.

돌아가는 길, 마침 집에 먹을 것들이 다 떨어졌다는 게 떠올라 근처의 편의점에 들어갔다.

비가 와 추운데도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있다.

문을 열자마자 오한이 서렸다.

입구에 쌓여있는 장바구니중 맨 위에 것을 집었다.

코너를 돌아다니며 핫초코라든가 컵라면, 과자같은 것들을 대충 집어넣었다.

카운터에는 지폐가 놓여있다.

몇 번인가 와 물건을 사간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올려둔 돈들이다.

지폐와 동전을 나누어 깔끔하게 올려두었다.

동전은 종류마다 층층이 쌓아뒀고, 지폐도 천 원권이나 오천원 권, 만 원권씩 구별해 따로따로 겹쳐놓았다.

지갑을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주머니는 허전했다. 몇 번 툭툭 털다 이상한 낌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아무래도 집에 두고왔나보다.

하는 수없이 오늘 만큼은 못받은 거스름 돈을 대가로 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손해인 건 여전하겠지만.

계산은 생략하고 봉투를 꺼내들었다.

무거워진 봉투를 들고 다시 사거리쪽에서 방향을 꺾었다.

아스팔트에 발을 디딜때마다 빗물에 찰박이는 소리가 난다.

이미 젖은 몸이다.

편의점에는 우산도 팔고 있었지만 굳이 챙겨오지 않았다.

소박한 2차선 도로를 걷다보면 그 주변에 휑한 공터가 눈에 들어온다.

평소보다 훨씬 더 칙칙한 모습을 하고있다.

그 모습을 눈에 새기며 걷다가, 얼마 안가 문뜩 발을 멈췄다.

아예 그쪽으로 몸을 돌리며 공터를 바라보았다.

그 가운데에는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공터의 정중앙에는 한 그루의 나무가 심어져있다.

항상 오갈 때마다 저 나무가 심어져있었는지 의심스러웠다.

유독 오늘따라 저 나무의 존재에 짙은 위화감이 느껴진다.

내 기억에 의하면 공터에는 역시 저런 나무는 없었다.

조금 멀찍이 떨어져있어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곧 내 몸과 발은 집이 아닌 공터쪽으로 향했다.

진흙을 찰박거리며 나무에 가까이 다가갔다.

나무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나무 앞에서 손에 쥐고있던 봉투를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말도 안돼."

나무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그만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내게 나무에 관련된 특이한 트라우마가 있는 게 아니다.

나무 그 자체는 정말로 흠잡을데 없는 평범한 나무였다.

내가 나무 앞에서 이토록 혼란을 느끼는 까닭은, 나무에 맺힌 어느 '열매'때문이었다.

곳곳에 매달린 열매는 상큼한 녹색의 풋사과도, 먹음직스럽게 무르익은 빨간 사과도 아닌,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퍼런 사과였다.



다음 날이 찾아오자 비는 말끔하게 그쳤다.

매연같았던 먹구름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고, 화창한 푸름에는 새하얀 새털구름이 놓여있다.

잔잔한 호수에 깃털이 떠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름답다라는 감상이 어울리는, 오랜만의 파란 하늘이다.

오늘은 무얼하며 하루를 보낼까.

그것이 이 세계에서의 고민이라면 고민이었다.

방 안에서 의자를 뒤로 젖혔다.

천장을 지긋이 바라보며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시도해볼만한 것을 발견했다.

시내에 들를 용무가 생기자 곧장 청자켓을 걸쳐 집을 나섰다.

어제 긴 시간동안 서있던 탓에 다리가 조금 지쳐있다.

사거리를 지나치기 전, 인도를 걷다 도중에 공터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드레일도 없어 그냥 인도에서 직각으로 벗어나면 된다.

땅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질척거리는 흙을 밟으며 공터의 중앙으로 향했다.

공터의 중앙에는 작은 사과나무가 있다.

그렇게 크지 않아 낮은 곳에 열린 열매는 손쉽게 딸 수가 있다.

난 나무에 가까이 다가가 낮은 위치에 열린 사과 하나를 땄다.

사과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파란색깔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꽤나 진해 시퍼런 색을 띠고 있지만, 몇 개는 조금 덜 진해 평범한 파란색인 것도 있었다.

빨간 사과를 반전시켜둔 것 같은 시퍼런 사과.

그러고보니 유전자 조작을 통해 과일의 색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얼핏 들은 적이 있다.

껍질의 색도 바꿀 수 있는 걸까?

난 손에 쥔 사과를 천천히 돌려보며 의심해본다.

하지만······. 역시 그건 아닌 것 같다.

그저 색이 파란 걸로 끝나지 않으리라.

근본적으로 이건 평범한 사과와는 다르다는 걸 직감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코에 가져다댔다.

냄새를 맡아보니 평범한 사과향이 난다.

냄새에 한해선 별다른 효과는 없는 듯 하지만······ 그렇다면 과육은 어떨지.

손톱으로 조금 뜯어보자 의외로 껍질과는 다르게 안은 평범한 사과였다.

"······."

조금 뜯어낸 작은 부분조차 섣불리 입에 가져가질 못하겠다.

아무도 없는 세계와 그곳에 열린 정체불명의 시퍼런 사과.

도대체 이 둘의 연관점은 무엇일까?

그럴싸한 이유들이 떠오르지만 먹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었다.

점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다. 손에 쥔 사과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지고 숨이 가빠진다.

반전된 사과. 분명 위화감이 있지만 그래서인지 한 편으론 매력이 돋보이는 사과이기도 했다.

한 순간, 호기심에 '딱 한 입만 베어먹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서서히 사과를 가져가며 살포시 입을 벌렸다.

"······."

─그리고 입술에 닿기 직전, 그만 손을 멈췄다.

호흡이 가빠진다. 사과를 응시하던 동공이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크게 흔들린다.

사과속엔 여러모로 검증되지 않은 위험이 있다.

한 입이라도 베어먹었다간 꼭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이마의 땀을 훔치며 사과를 쥐고있는 손을 떨어뜨렸다.

"어······."

나무를 올려다보니 방금 사과를 딴 자리엔 새로운 사과가 매달려있었다.



그 위화감이 있는 모습은 꼭 다른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만 같았다.

저 사과를 먹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닳아버린 감정이 되살아난다.

─기억을 잃게된다.

─고통없이, 혹은 굉장한 쾌락에 빠져 죽어버린다.

사과를 바라볼 때면 그럴싸한 생각이 들지만 결국에는 눈으로만 살펴보는 것으로 끝난다.

시내 상점가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가, 그곳에 있는 팬시점에 들어갔다.

매장 안의 공기는 바깥보다 한층 쾌적했다.

시리도록 추웠던 에어컨 바람이 오늘은 기분좋게 시원하다.

넓은 매장은 쓸데없이 잡다한 것들까지 구비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에펠탑의 미니어처라든가, 자몽향 캔들, 싸구려 플라네타륨같은 것들.

사다놓아도 쓸 일은 거의 없어보이는 것들이지만, 괜시리 구매욕구가 샘솟는다.

더이상 있다보면 사버릴 것만 같아 자리를 떠났다.

조금 걷자 이번에는 거울이 진열되어 있었다.

작은 손거울부터 시작해 거실에 놓일법한 사각형의 대형 거울도 있다.

난 그 중에서 조금 커다란 손거울을 집었다.

거울에는 먼지나 지문하나 묻지 않아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깨끗하게 비추고 있었다.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면에 커다란 안식이 차오른다.

아마 이 세계에서의 나는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시간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거뜬히 웃돌아도, 내 가설대로라면 난 계속해서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다.

내가 서있는 세계는 그런 정신나간 세계다.

필사적으로 바랐던 누군가의 온기, 사람과 이어지고 싶다는 마음.

나의 하루에서 색이 다 빠져버려 온종일이 깜깜한 밤이었을 때.

누군가가 잡아주길 바라며, 그동안 꽁꽁 묶어놨던 끈을 허공에 풀어버린 적이 있다.

당시의 나는 나답지 않게 연약함을 품으며,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모종의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나풀거리던 그 끈을 잡아주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끈이어서 일지도 모른다.

끈은 서서히 얇아져갔다. 그리고, 결국에는 끊어져버렸다.

그 끈이 끊어져버렸을 때 비로소 나는 다른 방향을 바라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내 곁에 있어주었으면'에서 '차라리 궁극적으로 혼자가 되었으면'으로.

따라서 내가 아무도 없는 세계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중학생 시절의 무렵.

난 종종 턱을 괴며 창가 너머의 먼 곳을 바라보곤 했다.

그때마다 막연히 생각에 잠겨 어떤 세계를 상상하고는 했는데, 그건 변하지 않는 세계다.

그 세계에는 아무도 없다. 다른 동물이나 곤충마저 없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고는 오직 나 하나뿐인 외로운 세계.

하지만 생태계의 붕괴라든가 식량 조달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메워지게 된다.

이를테면 보도 블럭에 낀 잡초가 수북하게 자라나면 주기적으로 잘려나가고, 환경미화원이 없는 쓰레기장은 날마다 비워진다.

음식점에서 주문을 하면 주문한 메뉴가 눈 앞에 놓이게 되고, 가게에서 파는 식품들은 날마다 제조 및 유통기한이 최신 날짜로 갱신된다.

또, 그 세계에서는 노화라는 개념이 없다.

때문에 난 영원히 살아갈 수 있고, 내게 구원을 주는 외모를 평생토록 간직할 수가 있다.

불로불사가 되어 영원히 살아갈 몸이다.

몸에 상처나 질병 따위의 이상이 생기게 되면 전부 낫게 된다.

그 세계에 홀로 남겨진 나는 궁극적인 외로움과 자유속에서 허우적대며 살아간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죽어버리고 싶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렇게 '죽어버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확실하게 죽을 수가 있다.

다만, 모종의 형태로 자살을 하게 된다면 난 다시 익숙한 장소에서 눈을 뜨게 된다.

몇 번째의 죽음인 지 셀 수 있도록 죽음을 기억한 채로.

시계 바늘처럼 오직 네 개의 계절만이 돌고 돌 뿐인, 그런 정신나간 세계.

날 제외한 모든 사람과 그 외의 생명체들이 사라져 궁극적으로 혼자가 될 수 있는 세계.

소중한 것들이 전부 변하지 않는 세계.

그것을 이상이라고 치부해오던 나는 확실히 일그러진 인간이었다.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부터 그런 망상에 자주 빠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있어 여름은 다른 계절보다 조금 더 특별하고 조금 더 간직하고픈 계절이었기 때문이리라.

기본적으로 무신론을 지향하는 주의인데다가, 비현실적인 기적따위는 믿고 있지 않았다.

등하교를 할 때마다 무심코 올려다본 구름에서 하늘성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처럼.

나의 이상이 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허황된 꿈이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마음 한 구석에서 언젠가 나의 이상향에 발을 들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서부터 몇 년이 지난 어느 훗 날에 나의 상식은 완전히 박살이 나버리게 된다.

때는 2016년 7월 8일.

내가 그녀와 자살을 해버린 날이다.

내가 밟고 있는 세계를 단적으로 표현해보자면 이렇다.

이 세계는 내가 줄곧 망상해오던 나의 세계인,

변하지 않는 세계다.



사람이라고는 딱 한 명밖에 없는 허전한 매장.

휑한 곳에서는 이름 모를 케이팝이 흘러나온다.

양 옆의 진열대에는 거울이 잔뜩 진열돼있다.

조금은 음산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공포스러운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사려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편지 세트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1층에는 생활용품들이 전부였다.

난 손거울을 내려두고 생필품 코너에서 빠져나왔다.

2층으로 올라가자 내가 찾던 문구류 코너의 팻말이 나타났다.

그 주변을 둘러보니 편지세트가 있는 곳을 금방 찾아냈다.

여러개의 고리에는 각각 디자인이 다른 편지지와 편지봉투가 세트로 포장된 채 걸려있다.

몇 개를 꺼내 들었다 놨다 하며 비교했다.

그러기를 십 분 정도. 최종적으로 고른 것은 연한 갈색의 편지세트였다.

봉투도, 그리고 편지지에도 아무것도 그려져있지 않은 클래식한 편지세트다.

무난해보이길래 골랐다.

고리에서 꺼낸 다음에는 근처에 있는 볼펜통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볼펜은 집에 있는 것도 많지만 편지지를 사니 손에 맞는 볼펜도 새로 사고 싶어졌다.

'성숙해보인다'라는 칭찬을 몇 번인가 들어본 나의 글씨체는 볼펜심의 크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내 손에 맞는 사이즈는 0.38mm로 굉장히 얇은 심이다.

얇고 섬세한 글씨를 써왔기 때문에 그 사이즈가 나에겐 딱이다.

색깔은 검정색으로 골라 편지세트와 함께 쥐었다.

그렇게 1층으로 올라가 계산을 마치고, 문구점에서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자동문이 열림과 동시에 뒤쪽에서 와장창하고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모든 행동을 멈췄다.

자동문 앞에서, 한 걸음을 내딛으려는 자세에서 굳어버렸다.

곧, 열려있던 자동출입문이 닫혔다.

난 너무 당황스러워서, 속으로 무어라 중얼거릴 여력도 없었다.

방금 건 유리가 깨지는 소리였다.

기나 긴 침묵이 흐른다.

광기가 깃든 것처럼 크게 뜬 눈을 하고,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몸을 돌렸다.

침을 꿀꺽 삼키고,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걸었다.

만약, 누군가가 이 곳에 있다면 날 피해 나가려할 땐 또다시 자동문이 열릴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은 그 사람에게 있어 독안에 든 쥐와 마찬가지이다.

스피커에서는 최신가요가 흘러나오지만 소음을 가려낼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소음이 발생하게 된다면 확실하게 들릴 것이다.

내뱉는 숨소리에 조금이라도 발생할 소음이 가려질까봐 죽은 듯이 내뱉는다.

소리란 소리는 최대한 죽이며, 떨어지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

떨어져 깨진 건 은색의 손거울이었다.

아까 내 모습을 확인할 때 들었던 것이다.

깨진 거울 조각을 집었다. 그리고 내 뒤쪽을 이리저리 비춰본다.

이렇다할 움직임이나 모습은 없었다.

파편을 내려놓고 그 주변을 은밀히 걸으며 살폈다.

역시라고 해야할 지 아무것도 없었다.

떨어진 이후에도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까 거울을 내려놓을 때 불안한 위치에 내려놓았나보다.

그렇게 속으로 애써 안이한 척하며 문구점에서 나왔다.

그리고 난 곧바로 문구점 건물의 외벽을 따라 돌아, 창문을 통해 내부를 감시했다.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 누군가가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조심해봐야 손해볼 것은 없다고 생각하며 자그마치 두 시간을 넘게 감시했다.

하지만 끝내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나 잡음따윈 들리지 않았다.

두시간이다. 이만큼 견제했으면 답은 하나다. 그럼 그렇지.

인기척을 느낀 건 기분탓이다. 애초에 이 세계는 날 제외한 그 누구도 없는 나만의 세계이니까.

무거웠던 공기가 조금 가벼워진다. 어깨에 힘을 뺄 수가 있었다.

최종적으로 내린 판단은 '그럴 리가 없다'였다.

슬슬 다리도 아프고 줄곧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에 조금 지루하고 지치기도 했다.

난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냉장고에서 카라멜 마끼아또를 꺼내 식탁으로 가져왔다.

스트로우를 꼽아 한 모금을 마신다.

차갑고 달콤한 커피가 몸 안에 스며든다.

편지를 써보려한다.

편지가 비로소 닿아야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면, 내가 하려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단 쓰는 편이 자기만족에도 도움이 되겠지.

난 방에서 가져온 노트를 펼친 다음 볼펜을 들었다.

"으음······."

글씨체는 나름 자신있어 그 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막상 써보려하니 어떤 식으로 써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편지를 쓴 건 초등학생 시절이 마지막이 아니었던가.

첫 문장부터 막혀버렸다.

연습장을 가져왔다.

그곳에 따로 고민하며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던 나는 여러장의 페이지를 구기게 되었다.

흡사 90년대의 소설가가 된 듯한 기분이다.

그걸 몇 번이고 반복하다보니 마침내 편지에 옮겨쓸 문장이 완성 되었다.


『이 편지가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 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하루에 한 번씩 편지를 쓰고 같은 장소에 두고올 생각입니다.

이 세계엔 모든 사람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나와 당신은 서로를 알아둘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만에 하나 이 편지를 보게된다면 부디 답장을 써주세요.

저는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 지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편지를 읽게될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2016. 07. 22-』


최종적으로 쓴 편지의 내용이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세계를 망상했다.

그 어떠한 기대도 버릴 수 있게 궁극적으로 홀로 남겨지기를 바란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와서 굳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어쩌면······.'이라는 작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계기가 없었다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내가 쓴 편지는 이미 대상이 정해져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너무 큰 기대를 거는 건 좋지 않다.

거는 것이 클수록 잃는 것 또한 크다는 단순한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타일러보지만······ 역시 커다란 기대는 좀처럼 추스를 수 없다.

문구점에서 가져온 편지봉투에 넣고, 날짜를 적었다.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현관에서 나오자마자 공기가 후덥지근하게 변하고, 모든 수분을 가져갈 것만 같을 정도로 내리쬐는 햇빛은 쨍쨍했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자 살짝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사거리를 지나 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마땅한 장소가 어디 없을까 둘러보다가 학교 본관의 앞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열 계단정도의 높이에 있는 현관 앞의 공간에는 식수대가 있고 지붕아래 사각형을 이루는 네 개의 나무벤치가 있다.

"저기가 적당하겠네."

작은 계단을 올랐다. 나무 벤치는 아스팔트 스탠드같이 표면이 거칠지도 않다.

생각해보니 지붕도 있어 비가 오더라도 편지가 젖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뜻밖에 좋은 장소를 발견했다.

편지를 올려둘 장소는 앞으로 이 곳이 좋겠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이 세계에 있다면, 그 사람이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에 첫 편지를 올려두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시퍼런 사과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 보이지 않는 균열(6화) 18.09.07 37 0 20쪽
6 초여름의 공허(5화) +1 18.09.06 31 0 22쪽
5 초여름의 공허(4화) 18.09.06 32 0 14쪽
4 초여름의 공허(3화) 18.09.06 42 0 11쪽
3 텅 빈 소리(2화) 18.09.06 60 0 11쪽
2 텅 빈 소리(1화) 18.09.06 91 0 12쪽
1 프롤로그 18.09.06 221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