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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호의 서재입니다.

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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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설호(雪虎)
작품등록일 :
2011.04.03 23:48
최근연재일 :
2011.04.03 23:48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13,819
추천수 :
1,256
글자수 :
98,359

작성
11.03.12 20:33
조회
1,851
추천
28
글자
7쪽

미령(美靈)-29

DUMMY

“아무것도 아녜요. 오늘은 제가 주도하죠.”

영욱이 이러는 데는 분명 다른 뜻이 있었다. 지난날의 자신을 수치스러워하긴 했어도 늘 도도하던 처가식구들의 몰락이 일종의 승리감을 가져다 준 것이다. 영욱은 그 승리감을 만끽하려는 것이었다. 미령을 침대에 눕게 한 영욱은 사람을 대하듯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미령의 몸에서 살아있는 사람의 스킨십이 느껴지는 것이다. 영욱은 신기하기도 하고 살아있는 사람을 대하듯 미령을 껴안았다. 그녀의 몸이 얼음같이 차가워 소름이 돋았지만 이혼 후 처음으로 여자를 가슴에 안은 영욱에게 그런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동안 미령이 주도하는 흐름이 주는 느낌만 받았던 영욱은 오랜만에 자신이 주도하는 흐름에 취해 있었다. 한참동안 이어지던 흐름은 영욱의 움직임이 멈추면서 끝이 났다. 그런데 가쁜 숨을 몰아쉬던 영욱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옆을 보니 눈을 감고 있는 미령이 축 쳐진 채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지금쯤 몸을 허공에 띄우고 있어야할 시간이었다. 게다가 우윳빛 같던 얼굴이 파리한 것이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잠깐만.”

눈을 감은 채 대답을 하는 미령은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 영욱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귀신은 영혼뿐인데 미령이 이러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지만 아직도 귀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영욱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영욱은 어느새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미령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시계는 이제 곧 날이 밝을 시간으로 치닫고 있었다.

“선생님. 주무세요?”

잠결에 미령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게슴츠레 눈을 뜬 영욱은 아직도 옆에 누워있는 미령을 보고 기겁을 했다.

“어떻게 된 거요? 벌써 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래야 하는데 그게.”

겨우 눈을 뜬 미령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영욱은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다. 미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과 하룻밤을 보내는 귀신은 육체가 없으므로 영욱의 정신을 빼앗은 뒤 그의 오감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채워왔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처럼 맨 정신의 영욱에게 모든 것을 맡기려면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끼게 해야 했다. 그것을 위해 미령은 자신의 모든 음기로 영욱을 받쳐 들어야 했기에 그만큼 힘든 밤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내가 괜한 짓을 했네요.”

“아뇨. 괜찮아요,”

“그런데 이제 곧 날이 밝을 텐데 어떻게 하죠?”

“선생님이 좀 도와주세요.”

“어떻게요?”

“주방 옆 작은 방에 가면 보일러밸브 박스가 있을 거예요. 거기를 열면 작은 단지가 있는데 그것 좀 갖다 주세요.”

영욱은 곧바로 작은방에 있는 보일러 박스를 열었다. 그랬는데 거기엔 크기가 주먹만 한 하얀 도자기가 놓여 있었다.

‘어떻게 이런 게 여기 있지?’

놀랍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은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영욱은 혹시 깨질 새라 조심스럽게 단지를 꺼내들고 안방으로 달려갔다.

“갖고 왔어요.”

“뚜껑을 열어 바닥에 놓고 세 걸음 이상 떨어지세요. 제가 사라지면 그때 뚜껑을 덮어 있던 자리에 갖다 두면 돼요.”

영욱은 그녀가 시킨 대로 하고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미령의 모습이 안개로 변하여 눈 녹듯 방바닥으로 흘러내리더니 단지 속으로 사라졌다. 재빨리 뚜껑을 덮은 영욱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은 현실에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저 작은 단지에 미령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 영욱은 그제야 그동안 풀지 못했던 의혹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전에 꿈에서 미령이 항상 들어갔던 곳도 작은방이었고 늘 음산한 분위기가 느껴졌던 것도 단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남들이 여간해서는 열어보지 않는 곳에 놓인 것을 보면 미령이 죽은 뒤 같이 살았다던 간병인이 넣어 둔 것이 틀림없었다. 단지를 작은방으로 들고 간 영욱은 전보다 더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데 단지를 박스 안에 넣으려던 영욱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뚜껑을 열고 단지 속에 손을 집어넣고는 이리저리 휘젓는 것이다. 살면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곱고 하얀 것이 미령의 유골이 분명했다. 그 순간, 이것만 없으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 영욱은 단지를 아파트 뒷산에 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뜻밖에 묘안이 생긴 영욱은 서둘러 세수를 끝내고 작은방으로 달려갔다. 박스에서 단지를 꺼낸 영욱은 등산용 배낭에 단지를 넣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러나 배낭을 메고 방을 나오려던 영욱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뭔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더니 급기야 코끝이 찡해지는 것이다. 단지 거래 때문에 미령을 받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슴 속에 그녀에 대한 감정이 생긴 것을 영욱은 모르고 있었다. 양심과 실리 사이에서 망설이던 영욱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가슴속에 지은과 미령이 공존하게 된 영욱은 단지를 박스 안에 넣고 착잡한 마음으로 뒷산 약수터로 향했다. 약수터에 올라가니 이제 곧 해가 질 시간이어서 그런지 한적하기만 했다. 약수 한 컵으로 목을 축인 영욱은 석양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루 종일 한숨도 자지 않았지만 이대로는 쉽게 잠들 것 같지 않았던 영욱은 내려오는 길에 동네 슈퍼에 들렀다.

“어서 오세요. 어머나!”

늘 같은 톤과 표정으로 인사를 하던 주인여자는 영욱을 보자 흠칫 놀라고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여자가 그러는 이유를 알면서도 은근히 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귀신이라도 보셨나?”

농담을 던지며 진열대에서 소주 한 병과 안주 거리들을 꺼내들고 계산대 앞에 선 영욱은 여자의 눈치를 보며 슬쩍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세상에 귀신이 있다고 믿으세요?”

“네?”

뜬금없는 질문에 여자는 당황했다.

“이 동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아서요.”

“아, 네.”

여자는 서둘러 계산을 하고 거스름돈을 내주었다.

“귀신이 뭐가 무섭다고 그러는지 원. 안녕히 계세요.”

영욱이 슈퍼를 나오면서 슬쩍 돌아보니 여자가 어지간히 놀랐는지 얼이 빠져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킥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집으로 돌아 온 영욱은 저녁을 술로 때웠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은 단 시간에 취기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평소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기분은 그런대로 나아지고 있었다. 술병과 안주를 담았던 접시를 대충 치우고 난 영욱은 문득 작은방에 있는 미령의 단지를 생각했다. 잠시 후 단지를 거실로 들고 나온 영욱은 단지를 내려놓고 한참동안 뚫어져라 보더니 무슨 생각이 났는지 진열대에 올려놓는 것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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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99 카우
    작성일
    11.03.12 21:08
    No. 1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읽는 중간에 제 잘못으로 헤어진 옛사랑을 떠올리게 하면서 만약... 그랬더라면 이라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읽는 저를 추억에 잠기게 만드시는 작가님의 능력에 감탄과 찬사를 보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카우
    작성일
    11.03.12 21:18
    No. 2

    단지를 작은 방으로 들고 간 영욱은 전보다 더 음산한 기운을 느껴졌다. -> 기운이 느껴졌다.
    급기야기 코끝이 찡해지는 것이다. -> 급기야 코끝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5 파장
    작성일
    11.03.13 00:10
    No. 3

    귀신과의 사랑이라. 점점 진지해져 가는 것 같은데... 참으로 기구한...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건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지리산불곰
    작성일
    11.03.13 03:24
    No. 4

    정주행 달렸습니다. 귀신가 유부남의 로맨스...
    달달한것 같지만 왠지 서글픈 분위기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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