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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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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설호(雪虎)
작품등록일 :
2011.04.03 23:48
최근연재일 :
2011.04.03 23:48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13,779
추천수 :
1,256
글자수 :
98,359

작성
11.02.22 22:23
조회
4,693
추천
32
글자
7쪽

미령(美靈)-1

DUMMY

영욱은 올해 55세의 이혼남이었다. 흔히 말하는 황혼 이혼을 당한 것인데 한때는 남부럽지 않은 배경에 승진 운까지 있어 경쟁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에 오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졌던 배경은 막강한 처가의 지원 때문이었고 그런 처가를 갖게 해준 것은 일류대학을 나온 영욱의 학벌이었다. 넉넉지는 못했지만 평범한 집안에서 성장한 그의 잘생긴 외모와 ‘A’로만 일관했던 성적은 적지 않은 여학생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많은 추파를 받았으면서도 그는 오직 공부에만 관심이 있었고 마침내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에 성공한 그는 같은 회사에 있던 여직원에게 이끌리게 되었다. 처음엔 일 때문에 접촉했던 것이 어느덧 사랑으로 발전했고 결혼상대자로 생각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렀지만 끝내 사랑을 이루진 못했다. 그것은 영욱에게 야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학금도 받았고 집안이 어렵진 않았지만 아버지처럼 평범하게 인생을 끝내기가 싫었던 것이다. 남들처럼 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외제 승용차를 타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다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우연히 다가 온 인연은 영욱이 사랑과 돈을 놓고 저울질을 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돈을 선택한 덕에 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면서 대기업 임원이라는 직함까지 얻었지만 그 역시 세월의 흐름은 막지 못했고 정년을 몇 년 앞두고 회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다른 데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하고 개인 사업을 생각하기도 했으나 때마침 불어 닥친 불경기 때문에 어느 것도 여의치 못했다. 한동안 여기저기 발품을 팔던 영욱은 개인 사업은 경험이 없었고 취직은 나이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생각을 접기로 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퇴직금까지 받았고 어차피 이 나이에 퇴직했다고 손가락질 받을 일도 없으니 여유로운 노후를 사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다. 그러나 영욱과 달리 아내 경미의 생각은 달랐다. 그동안 남편의 사회적 지위를 배경으로 남들 앞에서 늘 당당했던 경미는 하는 일없이 집에서 빈둥대는 영욱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그런 남편이 창피해 여간해서는 같이 다니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평생 남편을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의 체면을 세우는데 이용했던 경미는 어느 날 영욱에게 폭탄선언을 하기로 마음먹고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이제 더는 못 참겠어요.”

“못 참겠다니? 뭘?”

“우리 그만 끝내요.”

“끝내?”

“이혼하자구요.”

갑작스런 제안에 영욱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유가 뭔데?”

“당신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 더는 못 보겠어요.”

“나도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당신도 알잖아? 이 나이에 받아주는 데가 있을 것 같아?”

“그러게 그동안 뭐했어요? 동창들 남편은 사장이다 뭐다 하는데 정말 친구들 보기 창피해서.”

경미의 이 한마디는 영욱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소리였다. 전에도 그런 적이 없지 않았지만 이번은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화가 났지만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경미의 입은 쉬지 않았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요. 다른 애들은 남편이 다 한 자리씩 꿰차고 있는데 내 남편만 무능력하다는 말 들으면 기분이 어떤지 알아요?”

“그게 그렇게 창피해?”

“당연하죠.”

“평생 당신하고 애들 위해 뼈 빠지게 일했어. 내가 그렇게 할 동안 당신은 집에서 뭐했어? 만날 동창들하고 고급 음식점이나 드나들고 여기저기 카드빚만 잔뜩 만들어 놓았잖아? 물론 그것도 내가 다 감당했고.”

그랬다. 영욱의 부인 경미는 80년대 중반 급작스럽게 부상한 강남권 개발에 편승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으로 졸부의 대열에 올라섰던 아버지 덕에 호화스런 삶을 살았던 여자였다. 우연한 중매로 만난 영욱에게 그녀가 호감을 가졌던 것은 일류대학 졸업에 대학원까지 마친 그의 학력이었다. 그 옛날 집안 사정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 같은 모임에 나오는 여자들 중 유일한 고졸 학력이었던 그녀는 그런 식으로 자존심을 채웠고 아이들만은 일류대학에 보내고 싶었지만 이미 엄마의 허영심에 길들여진 아이들 역시 공부엔 관심이 없었다. 결국 처가에서 물려받은 돈으로 아이들을 대학에 입학시켰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공부는 뒷전이었고 늘 황태자 공주라는 착각에 빠지게 만든 엄마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하루하루를 놀고먹는 것으로만 일관하고 있었다. 그나마 퇴직 전 사회적 지위와 고액 연봉을 받는 남편 덕에 고개를 치켜들 수 있어 군소리 없이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데 지금은 자신이 만족할 필요충분조건을 상실한 영욱이 보면 볼수록 미웠고 생활도 거의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으로 하고 있는 남편과 살기가 싫었던 것이다.

“이왕 말 나온 김에 한마디 더 하지. 당신 결혼한 이후 한번이라도 당신 손으로 식구들 밥해 준 적 있어? 물에 손 담그기 싫다고 해서 가정부까지 뒀어. 그런데 뭐가 불만이야?”

“당신 집에서 이러는 것 몇 년째인 줄 알아요?”

“이제까지 잘 살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잘 살아요? 당신 회사 그만두고 나서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알아요?”

“친구들 보기 창피해서?”

“네.”

“당신한텐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래요. 모임에 나갈 때마다 날 보는 애들 눈치. 정말 싫어.”

영욱은 따귀를 한 대 올리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처가의 위세에 눌려 살아온 탓인지 쉽게 손을 올리지 못했다.

“애들은 뭐래?”

“실업자 아버지 때문에 친구들 만나기도 부끄럽대요.”

“그럼 나 하나만 없어지면 다 잘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경미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 역시 자신과 아이들의 사고가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걸 인정하기는 싫었다. 그것을 인정하기엔 자존심이라는 장벽이 있었고 어차피 처음부터 사랑 때문에 한 결혼이 아니었으니 굳이 무너뜨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더럽다 더러워. 그래. 해달라는 대로 해 줄게.”

그렇게 영욱은 경미와 이혼을 하게 되었다. 가정법원에서 절차를 마치고 나오는 영욱은 가족들의 철저한 배신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돈을 선택했던 자신에 대한 업보라고 생각했다.

“당신 집구할 때까지 난 애들하고 성북동에 가 있을 거예요. 집구하면 연락 줘요.”

“걱정마. 하지 말라고 해도 할 테니까.”

경미는 영욱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차장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영욱은 왜 진작 경미의 속내를 눈치 채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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