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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호의 서재입니다.

미령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설호(雪虎)
작품등록일 :
2011.04.03 23:48
최근연재일 :
2011.04.03 23:48
연재수 :
32 회
조회수 :
113,822
추천수 :
1,256
글자수 :
98,359

작성
11.03.11 00:48
조회
2,023
추천
25
글자
8쪽

미령(美靈)-27

DUMMY

“육신이 다 타버렸는데 눈이 남아났겠어요?”

순간 영욱은 아차 싶었다. 겨우 평생의 제약에서 벗어났는데 자칫하다간 어렵게 얻어낸 것이 물거품이 될 판이었다. 그제야 겁이 난 영욱은 슬슬 꼬리를 내렸다.

“미안해요. 속상한 일이 있다 보니. 그만.”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네요. 오늘은 그냥 갈게요.”

미안한 마음과 찜찜함 때문에 이대로 보내기가 마음에 걸렸던 영욱은 막 사라지려던 미령을 불렀다.

“그냥 있어요. 내가 미안해요.”

영욱이 사과를 했지만 미령은 등을 돌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돌려세웠겠지만 물리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미령의 앞으로 간 영욱은 그녀의 눈에 반짝이는 작은 구슬을 보자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리 와요.”

옷을 벗은 영욱은 샤워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그녀를 기다렸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잠시 머뭇거리던 미령은 미끄러지듯 올라가 영욱을 황홀경 속으로 이끌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날이 밝은 뒤였다.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일어난 영욱은 습관처럼 베란다를 내다보았다. 거기엔 오늘도 어김없이 젖은 팬티가 빨래걸이에 널려 있었다. 미령이 자신을 남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던 영욱은 샤워를 끝내고 곧바로 주방으로 나갔다. 그런데 오늘은 아주 색다른 것이 준비돼 있었다. 어떻게 마련했는지 전자레인지 안에 사골국 한대접이 비닐 랩에 씌워져 있는 것이다. 국을 데워 먹던 영욱은 공연히 화를 냈던 것이 미안했다. 영욱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기가 막힌 사골국 때문이었다. 한 숟가락 떠먹을 때마다 기운이 부쩍 솟는 것 같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입에 착착 붙는 것이 평생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영욱은 정성을 들인 미령을 생각하며 재혼할 때까지는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령과 관계가 게속 되면서 한동안 애를 먹던 소설도 순탄하게 전개가 되었다. 이야기 흐름도 그렇고 내용도 재미있어 그것이 책으로 만들어지기만 하면 대박날 것이 틀림없었다. 문제는 출판계의 현실이었다. 아직 책 한권 낸 적 없는 자신의 글을 어디에서 받아줄 것인가가 문제였다. 대다수 출판사들이 유명 작가가 아니면 글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소설을 끝낸다고 해도 책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염려는 곧 기우로 변했다. 아직 요구한 것이 없으니 미령에게 부탁하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저녁때가 가까워 오면서 예정했던 분량의 집필을 끝낸 영욱은 저녁을 준비하면서 지은을 생각했다. 다른 얘기는 보지 않고도 짐작할 수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것은 차마 물어 볼 수가 없어 어떤 상태인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그냥 손상된 것이 아니라 감각까지 상실된 것이라면 육체적으로도 심하게 망가져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지은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소변 주머니를 차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뭐든지 된다고 했으니까. 이것도 해 줄 거야.’

문득 미령이 생각난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여자와 관련된 요구를 들어줄 지가 문제였다. 어쩌면 자신을 반려자로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는 미령인데 질투심이 없을 수 없었다. 만약 지난번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해코지라도 하면 또 다시 지은을 힘들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영욱이 이런 고민을 하는 사이 더위가 한풀 꺾여서인지 저녁때가 되면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욱만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었다. 이미 미령의 음기가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어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던 것인데 영욱은 그것을 시원해진 날씨 탓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아직 미령이 오려면 시간이 있어 영욱은 지은에게 전화를 했다.

“어제 늦게 들어가서 피곤했지?”

“아뇨. 전 괜찮은데 집까지 바래다주시느라 너무 힘드셨어요.”

“힘들긴. 그러나 저러나 지은이 이제 다시 시작해야지?”

“네?”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해야지. 여자 혼자 살 수는 없잖아?”

물론 본심이 아니었지만 지은의 마음을 떠본 것이다. 영욱은 때가 되면 해야죠 라던가 언젠간 해야겠죠 같은 대답을 기대했다. 그러나 지은의 대답은 아주 실망스러웠다.

“아직은 생각이 없어요.”

“왜? 먼저 간 식구들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누구하고도 재혼할 생각이 없다면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것이었다.

“앞으론 모두 잘 될 거야. 죽을 고비까지 넘겼는데 이제부턴 보상받는 삶을 살아야지.”

“고맙습니다.”

“그럼 쉬어. 또 전화 할 게.”

지은의 상태로 보아 아직 청혼하기는 이르다고 여긴 영욱은 좀 더 여유를 갖기로 했다. 그렇게 통화를 끝내고 오랜만에 영화채널에 빠져 있던 영욱은 그 사이 자정이 지났지만 TV 불빛 때문에 미령이 오지 못하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영화에서 유령이 나오는 것을 보고야 시계를 본 영욱은 급히 TV를 끄고 미령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나타난 미령을 본 영욱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미안해요. 내가 영화에 정신이 팔려서 그만.”

“괜찮아요. 지금 미안해하시잖아요.”

화를 내지 않을까 하여 조마조마했던 영욱은 미령의 미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맞아들였다. 한차례 비몽사몽의 시간을 보내고 눈을 뜬 영욱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령씨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요.”

“뭔데요?”

“내가 지금 소설을 하나 쓰고 있는데 그거 끝나면 책으로 낼 수 있게 도와줘요.”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

“국내 메이저급 출판사들이 내 소설을 서로 내고 싶어 안달하게 만들어줘요.”

“그거야 어렵지 않죠.”

흔쾌히 대답한 미령은 또 다시 흐름을 주도했다. 비몽사몽에 빠져있느라 미령이 사라진 것도 모른 채 잠이 들었던 영욱은 여느 때처럼 그녀가 준비한 아침을 먹고 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젯밤 있었던 일을 거의 써나갈 무렵 영욱은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고 매우 혼란스러워 했다. 전화는 경미보다 먼저 이혼한 적이 있는 경미의 초등학교동창이었다. 이런저런 안부로 얘기를 시작한 그녀는 결국 경미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영욱과 이혼을 했지만 좋아하던 재벌 홀아비에게서 등 돌림을 당한 경미는 그 이후 방탕한 생활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처갓집에서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그것을 메우느라 집까지 팔더니 지금은 아이들 등록금조차 대기 힘들게 됐다는 것이다. 그녀가 무슨 의도로 전화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이들 생각을 하면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 어미처럼 싸가지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렇다고 아직 세상물정도 모르는 아이들을 팽개쳐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자정이 되길 기다리다가 미령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영욱의 마음은 딴 데가 있었다.

“미안한데 오늘은 그냥 가면 안 되겠어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생각지도 않았던 걱정거리 때문에 하루 종일 답답했던 영욱은 하소연 하듯 아이들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선생님을 배신했던 전부인 때문에 고민이라는 건가요?”

“그 여자 때문이 아니라 새끼들 때문이지. 다시는 안 보겠다고 했는데.”

“알 수가 없네요. 자신을 버리다시피 한 사람들 걱정을 하다니.”

“자식이란 게 그런 거예요.”

이야기를 듣고 난 미령은 한참동안 창밖을 응시하더니 하얀 눈을 번뜩이며 영욱을 떠보듯 말했다.

“어쩌면 도와줄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귀가 솔깃해진 영욱은 다급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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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15 파장
    작성일
    11.03.11 00:57
    No. 1

    아 역시 따끈따끈 갓 나온 글을 보는 재미란...^^
    그런데 미령씨 같은 이 저도 좀 소개를...ㅠㅠ 부탁할 것도 많고...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5 파장
    작성일
    11.03.11 01:07
    No. 2

    기가 막힌 사골구 (국?) 때문.. / 재혼할 때가지는 (까?) 잘해주어야...

    기운 솟고, 난생 처음 보는 맛의 사골국이라... 과연 뭘로 끓였을까 갑자기 궁금해지는...
    (근데 물리적으로 돌려 세우지 못하는 존재가 음식같은 건 어떻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2 하르딘
    작성일
    11.03.11 07:39
    No. 3

    아.. 재미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7 운동잡식
    작성일
    11.03.11 10:10
    No. 4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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