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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님의 서재입니다.

폐급 용사는 사람을 찢어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게임

블랙리스트
작품등록일 :
2024.02.04 22:42
최근연재일 :
2024.03.06 21:44
연재수 :
18 회
조회수 :
492
추천수 :
19
글자수 :
78,450

작성
24.02.17 01:06
조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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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0쪽

7화. 양치기 소년(3)

DUMMY

흐리멍덩한 착란 속에서 헤매는 날 끄집어낸 건 응급환자 구조에 다급했던 마을사람들? 정성스레 병간호 하고 있는 페일? 다 틀렸다. 융통성 없는 AI였다.


「중독이 완화되었습니다.」


“··········”


감각적으로 덮여진 이불박차고 반쯤 벌떡 일어났다.


방바닥에 나부러진 이불 그리고 좁은 이마에 둘러진 물수건이 사타구니 위로 떨어짐과 동시에 심장도 떨어질 뻔했다.


덜컹!

‘히익! 죽을뻔한 건가?’


고블린 놈이 의미심장하게 쏜 화살을 맞았던 왼쪽 허벅다리가 퉁퉁 불다 못해 화난 새끼복어 마냥 부풀어 올라있었다.


“왼쪽 다리에 감각이 없다.. 안 움직여..”


투박하게 붕대가 칭칭 감겨있는 다친 다리를 내려다보고 벙쩌있는 그때, 깨어난 병자를 발견한 페일이 화들짝 놀라 다행이라며 한 번 더 포근한 품을 내어줬다.


‘으윽. 역시 숨 막혀.’

‘근데 이것도 나쁘지는 않네.’


보통 힘이 아닌듯해 보이는 중년의 여성은 마치 전쟁터에 파병나간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기뻐 날뛰었다. 살짝 부담스럽게.


그나저나 중요한 건 깨어났다는 사실이 아니라 고작 화살 한 방에 쓰러진 이유. 무려 「LV.89」 를 자랑하는 용사가 말이다.


페일을 통해 맥없이 고꾸라진 이유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영양사이자 건강미 넘치는 겉모습과 달리 의학적 지식이 뛰어난 힐러였기 때문에.


고블린 우두머리가 한방을 노리고 여러 개의 화살을 쏘아댄 정황은 이랬다고 한다.


일격에 치명상을 노린 것이 아닌 화살촉에 발린 맹독으로 회복불능 상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와씨. 대두새끼 소름 돋네? 심장 뛰는 것 봐..’


고블린이 생각한 의도대로라면 중태에 빠져들 시간임에도 다리가 욱신거리는 것 이외에 생명에 크게 지장은 없었다. 왜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누구보다 눈치 빠른 병자는 곧장 인벤토리를 뒤적거렸다.


사라진 「부러진 뭉툭 앞니」 와 다시 한 번 들어보는 AI의 딱딱한 설명.


「앞니를 빻아 초보자용 해독제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상점가 2원.」


인벤토리를 샅샅이 뒤져도 정확히 500개에서 100개 이상 비어있었다.


남에 물건에 손을 함부로 갖다 대도 되는 거야? 만약 고가의 아이템이 있었으면?


페일의 빠른 대처가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도와주었지만 이상하리만큼 영 찝찝해.


의도치 않게 재산 중 일부를 약탈당했다. 내 소중한 200원. 생명을 담보로. 언제나 그랬듯이 도와줘도 지랄이란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땅 파서 돈 나오랴.


‘내 한 푼도 헛되이 쓰지 않으려 했건만!’


악랄한 세상을 살아가며 이기적이라는 표현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님을 느낀다.


으드드득 으드드득


방문 옆에서 초보자용 해독제로 탈바꿈할 토끼 놈들 앞니를 빻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온다.


흡족한 미소를 띠고 미지근한 맹물에 잘 빻은 회색빛 가루를 타 휘휘 저어 건네주는 페일의 지극정성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바보. 난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닌데.


그렇다고 마음 약해져 세워놓은 장대한 계획을 함부로 공유할 수는 없다. 어느새 또 쇠망치로 뒤통수 가격 당할지 모르니까.


“이 정도면 충분해요. 마시면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날 테니까 걱정마세요. 용사님.”


연신 감사인사를 꾸벅거리며 완성된 초보자용 해독제를 이온음료처럼 벌컥벌컥 마셨다.


‘음~? 맛있다~?’


그녀가 타준 해독제는 이온음료보단 달달함과 청량감 가득한 탄산음료 같았다.


“이제 조금만 안정을 취하시면 금방 나을 거예요.”

“예. 정말 고맙습니다.”


부상에 의한 회복이 시급했다. 나와 같은 처지에 놓여있을 늙은 촌장 놈이 어쭙잖은 언변으로 마을 사람들을 회유하기 전에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 했으니까 말이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페일의 뒷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함께할 동료였다면 좋았을 텐데.”


나지막이 속삭이며 부질없는 상상과 함께 잠시나마 그녀와의 협력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동료의 모습이랄까.


“네!?”


내뱉은 속삭임에 페일이 뒤를 돌아봤다. 이 사람도 귀가 밝네. 먼저 떠난 동료 누구처럼.


“아.. 아닙니다.. 하하하!”

“용사님! 그나저나 고블린들은 어떻게 처리하신 거예요!? 한 놈도 아니고 패거리를..”


제기랄. 핑계거리를 만들어 놓았어야 했는데 요단강을 건널 바람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유토피아 시민들에겐 용사 클래스가 존재한다. 특이하게도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파타하, 순으로 클래스가 나뉘며 그 기준은 레벨이다.


클래스는 자동으로 노출되며 캐릭터 레벨은 본인의 선택에 따라 공개하거나 비공개할 수 있다.


「LV.89」


보이기로는 높은 수치 같지만 놀랍게도 ‘하’급 클래스에 위치해있다. 추측이긴 하지만 아마도 레벨 당 100단위로 클래스가 상승하는 게 아닐까?


앞장서 수십 마리의 고블린을 퇴치했지만 미약한 경험치 획득 탓에 레벨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내 사냥감은 놈들이 아니니까.


‘무슨 거짓말로 페일을 납득시켜야하지?’


오만가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며 풋내기 용사가 고블린 패거리를 싹쓸이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본다.


‘없다.’


없었다. 어떻게 상상해보던 간에 말이 안 되니까.


‘고블린 패거리가 지들끼리 싸우다 자멸했다고 말할까? 아.. 어떻게 얘기하지?’


턱도 없는 소리. 굳게 닫힌 입을 조심스레 열었다.


“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네!? 용사님 말고 다른 용사님이 또 계셨단 말이에요!?”

“맞습니다.”


끄덕끄덕끄덕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격하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분은..! 괜찮으세요!?”

“고블린 놈들을 하나하나 일격에 퇴치하시고 쿨하게 마을 밖으로 나가셨어요.”

“이.. 일격에!?”

“네. 그 용사님의 공격은 엄청난 스킬들이 난무했어요.”


가상의 인물을 신화 속 영웅처럼 그려내야 했다. 예를 들자면 헤.. 헤라클레스?


“흑사자의 탈을 쓰고 있었죠. 한 손엔 빛나는 황금빛 방망이를 들고 계셨습니다.”

“흑사자라면.. 헉..! 케로베로스!? 분명 ‘아’급 이상의 클래스였을 거예요!”

“아.. 케로베로스.. 그런 몬스터가 있군요..”

“네! 모르세요!?”

“아.. 제가 유토피아 시민이 된지 오래되지 않아서요.. 하하..”

“잠깐! 빛나는 황금빛 방망이!?”


신화 속 영웅담을 듣는 이의 자신감은 커지고 뱉는 이의 자신감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네네.. 빛나는 황금빛..”

“+9강화 이상의 장비아이템!!!!!”


페일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빛나는 황금빛. 젠장.


“그 분의 존함을 알고 계신가요!? 그 정도 실력자라면 유토피아에서 유명하신 용사님일 수도 있으니까요!”

“아.. 존함.. 아 제가 여쭤보긴 했는데요.. 뭐.. 뭐라 그러셨더라..”

“용사님을 포함해 로이어 마을을 지켜주신 은인이세요! 존함이?”

“헤.. 헤라.. 헤라쿠레!”


순간 정적이 흘렀다.


제발. 제발. 제발. 아무런 의심하지 않기를.


“헤라쿠레!”

“맞습니다. 헤.. 헤라쿠레!”

“멋진 존함이시네요! 용사님. 우연치 않게 다시 마주칠 기회가 생기신다면 꼭 로이어 마을에서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전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후우. 그릇된 영웅담을 끝으로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페일과 대화를 나누며 용사 클래스, 강화와 같은 시스템에 궁금한 것 투성이었지만 묻지 않았다.


아직까지 신규 유저들과 동일한 ‘하’급 클래스에 머물러 내 레벨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단 사실에 그저 감사할 뿐.


***


그녀의 배려로 휴식을 취하고 나니 심각하게 다쳐있던 왼쪽 다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나았다.


주기적으로 욱신거리던 통증 그리고 퉁퉁 불었던 기형적인 모습까지 전부 원래대로 돌아왔다.


‘페일은 어디 갔지?’


내 옆을 지켜주던 페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폴짝! 폴짝!


침대에서 내려와 점프를 가볍게 몇 차례 뛰어봤는데 찌뿌둥한 몸이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됐어. 최상의 컨디션이다.”


갑자기 돋은 안전불감증에 인벤토리를 열어 챙겨놓은 뿌리열매 하나를 꺼냈다.


“한 놈 크게 베어 물고 나가자. 혹시 모르니까.”


콰직.


뿌리열매를 입안에 가득 채워놓고 고대하던 불꽃놀이 시작을 알리기 위해 천천히 밖을 나섰다.


보자. 불은 어디서 구할 것이냐?


주변을 둘러보아하니 역시나 애초에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골초들이 어찌나 많던지.


마음씨 좋아 보이는 골초아저씨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어! 용사님이시군요! 잘 회복하셨습니까! 덕분에 마을 분위기가 아주 평안해졌습니다. 촌장님은 아직 회복 중에 계시지만..”

“아.. 그래요..!? 휴식과 안정이 꼭 필요하실 거예요. 저는 다리라서 금방이었지만 심장과 가까운 가슴에 화살이 박히셨으니. 그래도 살아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아쉽다. 조금 더 깊이 박혔더라면.


푸우우~


골초아저씨가 내뿜는 담배연기로 묘기 하듯 맑은 하늘에 잔뜩 먹구름을 만든다.


“벌써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되는지요!? 용사님도 안정을 취하셔야할 시기지 않습니까!”

“아아. 다행히 깊은 상처가 아니어서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불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오~ 흡연 하시는구나~ 담대가 남다르다 했더니만 원동력이 여기 있었네!”

“하하하하하. 아닙니다.”

“에이! 기분이다! 이거 다 가져가세요!”

“감사합니다.”


스윽.


태우다 몇 개비 안남은 담뱃갑과 성냥갑을 받았다.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담배」 1개

「성냥」 10개


골초임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돛대를 선물한 의미는 무한한 신뢰였다.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따뜻함을 되돌려주고자 차가운 마음 속 심지에 불을 붙여본다.


마음을 다잡고 발걸음을 옮긴 장소는 인적이 드문 봉사단 후원 물품 보관소.


“저질러볼까.”


인벤토리에서 담배와 성냥을 꺼내 하나 남은 돛대를 기꺼이 입에 물었다.


작가의말

연재 시간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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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0화. 휴먼 헌터(2) 24.02.19 16 1 9쪽
10 9화. 휴먼 헌터(1) +2 24.02.18 21 1 12쪽
9 8화. 양치기 소년(4) 24.02.18 18 1 9쪽
» 7화. 양치기 소년(3) 24.02.17 20 1 10쪽
7 6화. 양치기 소년(2) 24.02.14 20 2 9쪽
6 5화. 양치기 소년(1) 24.02.12 19 1 10쪽
5 4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4) +2 24.02.09 21 1 9쪽
4 3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3) 24.02.08 20 1 11쪽
3 2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2) 24.02.05 34 1 13쪽
2 1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1) 24.02.04 79 1 11쪽
1 0화. 프롤로그 +2 24.02.04 127 4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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